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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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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제2공화국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립되어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멸망한 프랑스의 공화정 체제이다. 2월 혁명 이후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는 사회주의자 탄압, 언론 통제 강화 등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으나, 의회와의 갈등 속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1852년 제2제정을 수립했다. 제2공화국은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을 추구했지만,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단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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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2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848년의 프랑스
1848년의 프랑스
기본 정보
공식 명칭프랑스 공화국
로마자 표기République française
일반 명칭프랑스
국가 표어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국가 표어 (프랑스어)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국가Le Chant des Girondins
국가 (프랑스어)Le Chant des Girondins
공용어프랑스어
수도파리
종교로마 가톨릭교 (국교)
칼뱅주의
루터교
유대교
통화프랑스 프랑
현재 국가프랑스
알제리
ISO 3166 코드생략됨
정치
정치 체제단일 반 대통령제 공화국 (1848–1851)
단일 대통령제 공화국 독재정 (1851–1852)
대통령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부통령앙리 조르주 불레 드 라 뫼르트
총리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 (최초)
레옹 포셰 (최후)
입법부국민의회
역사
시작프랑스 혁명
시작일1848년 2월 23일
노예 제도 폐지노예 제도 폐지
노예 제도 폐지일1848년 4월 27일
헌법 채택헌법 채택
헌법 채택일1848년 11월 4일
쿠데타쿠데타
쿠데타 발생일1851년 12월 2일
종료제2제국 수립
종료일1852년 12월 2일
이전 및 이후
이전 국가프랑스 왕국
이전 국가 깃발Flag of France.svg
다음 국가프랑스 제2제국
다음 국가 깃발Flag of France.svg
국기 및 국장
프랑스 국기
프랑스 국기
국장 유형국새
프랑스 국장
프랑스 국장

2. 프랑스 2월 혁명과 제2공화국의 수립

1848년 2월 24일,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 1세7월 왕정을 무너뜨렸다.[8] 국왕은 영국으로 망명했고, 알퐁스 드 라마르틴과 르드뤼 롤랭 등이 중심이 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프랑스 제2공화국의 시작을 알렸다.[9]

임시정부는 즉시 여러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재산에 따른 선거권 제한을 폐지하고 21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보통선거제의 도입이었다. 이로써 유권자 수는 7월 왕정 시기 약 24만 명에서 94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또한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 폐지(1848년 4월 27일), 국내 사형제 폐지 등 인권 신장을 위한 조치들이 이루어졌다.[11] 언론의 자유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생존권, 노동권, 결사권 등 사회적 권리도 인정되었다.[10] 이러한 개혁들은 사회 전반에 '서정적 환상'(fr)이라 불릴 만큼 희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사회 계층을 넘어 박애주의 정신이 강조되었다.

2. 1. 7월 왕정의 몰락



프랑스의 "2월 혁명"은 1848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 중 첫 번째 혁명이었다. 이 혁명으로 7월 왕정(1830년 ~ 1848년)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1830년 7월 혁명은 샤를 10세의 부르봉 왕정을 끝내고, 오를레앙 왕가의 루이 필리프 1세를 왕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를 수립했다. 이 7월 왕정은 이전보다 자유로운 체제였지만, 주로 프랑수아 기조가 이끄는 보수적인 중도우파와 아돌프 티에르가 이끄는 진보적인 중도좌파 세력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왕정의 왼편에는 공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급진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7월 왕정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특히 선거 제도는 소수의 부유한 재산 소유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제한선거였기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1840년대 동안 프랑스 국가근위대는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여러 청원을 제출했지만, 기조와 티에르 양측 모두 이를 거부했다. 정부는 정치 집회를 금지했고, 선거 개혁가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만찬 운동'(1847년 ~ 1848년)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토론 모임을 열었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오딜롱 바로와 같은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기조 정부를 비판하며 시작했지만, 1846년 경제 위기가 닥치자 일반 노동자들도 정부에 대한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점차 힘을 얻었다.

1848년 2월 14일, 기조 정부는 만찬 운동을 불법 정치 집회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이에 2월 22일,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과 공화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기조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오딜롱 바로는 기조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제안하여 시위대를 달래려 했지만, 하원은 기조 총리를 지지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프랑스 국가근위대를 동원하려 했으나, 2월 23일 아침 국가근위대는 오히려 혁명 세력 편에 서서 정규군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

파리 외곽의 산업 노동자들이 도시 중심부로 행진하자 국가근위대는 이들을 환영했다. 군인들이 기조의 저택 앞에서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파리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결국 1848년 2월 23일, 기조 내각은 지지 기반이었던 소부르주아의 지지를 잃고 총사퇴했다. 루이-마티외 몰레와 아돌프 티에르 같은 다른 보수 성향 정치인들도 정부 구성을 거부했다. 오딜롱 바로가 잠시 총리가 되었지만, 이미 봉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수도 파리 전체가 봉기군에게 장악되자,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은 9살짜리 손자 파리 백작 필리프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러나 하원 회의장에 몰려든 시위대의 압력으로 의회 지도자들은 봉기 세력의 편에 서서 임시 정부 구성을 결정했고,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제2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임시 정부는 자크-샤를 뒤퐁 드 뢰르가 의장을 맡았고, 알퐁스 드 라마르틴(외무), 아돌프 크레미외(사법), 알렉상드르 오귀스트 르드뤼-롤랭(내무), 이폴리트 카르노(공공 교육), 미셸 구슈(재무), 프랑수아 아라고(해군), 오귀스트 로랑 부르도(전쟁) 등이 장관으로 참여했다. 에티엔 조제프 루이 가르니에-파주는 파리 시장이 되었다.

하지만 1830년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공화-사회주의 세력은 파리 시청(오텔 드 빌)에 별도의 정부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루이 블랑, 아르망 마라스트, 페르디낭 플로콩, 그리고 '노동자 알베르'로 알려진 알렉상드르 마르탱 등이 포함되어 내전의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르봉 궁전(의회)이 시청을 압도하지 못하고 두 세력이 합쳐진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주도권은 라마르틴 등 온건 공화파가 쥐고 있었다.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불확실했다. 한쪽에서는 사회 자체의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재산 소유의 특권이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고, 붉은 깃발을 상징으로 내세웠다. 다른 한쪽에서는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으며 삼색기를 중심으로 뭉쳤다. 라마르틴은 국민들의 열망을 일부 수용하여, 삼색기를 유지하는 대신 깃발에 공화국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를 새기고 붉은 장미 매듭(로제트)을 추가하기로 합의했다.[3]

2. 2. 임시정부의 구성과 개혁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이 퇴위하고 7월 왕정이 붕괴하자,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했다.[8][9] 알퐁스 드 라마르틴과 르드뤼 롤랭 등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임시정부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참여한 연립 정부의 성격을 띠었다.

임시정부는 프랑스 혁명 경험자인 자크-샤를 뒤퐁 드 뢰르를 수반으로 하여, 라마르틴(외무), 르드뤼 롤랭(내무) 등 자유주의, 공화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더불어 루이 블랑, 알렉상드르 마르탱(노동자 알베르) 등 사회주의자들도 참여했다.[10] 처음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오텔 드 빌에 별도의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곧 임시정부와 통합되었다. 비록 주도권은 온건 공화파가 가졌지만, 사회주의자들의 참여는 당시 노동자 계층의 요구를 반영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848년 프랑스 임시정부 주요 구성원[10]
직책이름성향
정부 수반자크-샤를 뒤퐁 드 뢰르공화파
외무부 장관알퐁스 드 라마르틴온건 공화파
내무부 장관르드뤼 롤랭급진 공화파
사법부 장관아돌프 크레미외자유주의 공화파
공공 교육부 장관이폴리트 카르노공화파
재무부 장관미셸 구슈공화파
해군 및 식민지부 장관프랑수아 아라고공화파
전쟁부 장관오귀스트 로랑 부르도군인
파리 시장에티엔 조제프 루이 가르니에-파주공화파
국무위원루이 블랑사회주의자
국무위원알렉상드르 마르탱 (알베르)사회주의자 (노동자 대표)
국무위원아르망 마라스트공화파 (사회주의 성향)
국무위원페르디낭 플로콩공화파 (사회주의 성향)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여러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선거 제도의 개혁으로, 재산 제한 선거를 폐지하고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유권자 수는 7월 왕정 시기 약 24만 명에서 94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또한,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를 1848년 4월 27일 법령으로 완전히 폐지했으며, 국내에서는 사형제를 폐지하는 등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1]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200개가 넘는 신문이 발행되기도 했다.

사회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생존권, 노동권, 결사권 등 시민적 권리를 인정했다.[10] 특히 파리 노동자들과 루이 블랑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할 권리' 원칙을 선언하고, 실업자 구제를 위한 국가 작업장(Ateliers Nationaux) 설립을 결정했다. 또한 노동 문제 연구와 정책 제안을 위해 루이 블랑을 의장으로 하는 룩셈부르크 위원회(Commission du Luxembourg)를 설치했다.[11] 국가근위대의 재산 자격 요건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민주적 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러한 개혁들은 사회 전반에 '서정적 환상'(fr)이라 불릴 정도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회 계층을 넘어 박애주의 정신이 강조되었고, 비록 선거권은 없었지만 여성들도 정치 클럽 활동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화국의 상징을 놓고 붉은 깃발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과 전통적인 삼색기를 지지하는 온건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나, 라마르틴의 중재로 삼색기를 유지하되, 깃대에 붉은 로제트를 달고 프랑스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fr)를 명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3]

3. 제2공화국의 전개와 갈등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시작부터 몇 가지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라마르틴과 르드뤼 롤랭 등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구성원이 정치 경험이 부족했으며, 사회 문제 해결보다는 정치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자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 속에서 1848년 5월 15일, 프랑수아-뱅상 라스파이,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아르망 바르베 등이 이끄는 무장 시위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지하는 일부 근위병의 도움을 받아 의회 장악을 시도했으나, 부르주아 계급을 지지하는 시민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파리 실업자 구제를 위해 설치되었던 국립 작업장(ateliers nationauxfra)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실질적인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 채 단순 작업에 동원하고 하루 1FRF 남짓의 임금을 지급하는 데 그쳤으며, 운영 자금을 위한 세금 인상은 지방 농민들의 큰 반발을 샀다. 결국 6월 21일, 알프레드 드 팔루 백작은 의회 위원회를 통해 국립 작업장 폐쇄와 노동자 해고, 그리고 청년 노동자들의 군 강제 징집을 결정했다.

이에 격분한 파리 노동자들은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대규모 6월 봉기를 일으켰다. 의회와 정부는 카베냐크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카베냐크는 군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봉기에 가담했던 사회주의자들은 패배 후 추방당했다.

6월 봉기의 참혹한 진압은 공화국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 농민들은 국고 부족을 메우기 위해 부과된 새로운 토지세에 분노했고,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 클럽의 활동과 경제 침체로 불안감을 느꼈으며, 노동 계급은 '6월 학살'로 인해 공화국에 등을 돌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그를 볼 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결국,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과 제정 복고에 대한 향수는 보편적 참정권 하에서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배경이 되었다.

3. 1. 4월 총선과 온건 공화파의 승리

1848년 3월 초, 임시정부는 21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 법령을 발표했다.[12] 이에 따라 4월 23일,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제헌의회 의원 880명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온건 공화파와 왕당파를 포함한 보수 세력이 연합한 질서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반면, 프랑스 2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예상과 달리 매우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의회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13] 이러한 결과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사회주의 사상은 아직 농촌 지역까지 깊숙이 파고들지 못해 지방에서의 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또한,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도 과거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남아 있어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했다.[13] 전국적인 보통선거 실시는 혁명의 중심지였던 파리 노동자와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전 혁명들처럼 파리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정국을 주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13]

이처럼 선거를 통해 의회에서 소외된 사회주의 세력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이는 점차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특히 이후 국립 작업장 폐쇄 결정은 6월 봉기라는 대규모 무장 봉기를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14][15]

3. 2. 6월 봉기와 좌절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는 정치 경험 부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소극적 태도 등 내부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임시정부를 구성한 인사 대부분은 정치 경험이 부족했고, 사회 문제 해결보다는 정치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불만을 샀다.

1848년 4월 23일, 21세 이상 남성의 보통선거에 기반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12] 선거 결과, 온건 공화파와 왕당파 등 보수 세력이 연합한 질서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는 지방 유권자들의 보수적 성향과 파리 내에서도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파의 공포 정치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결과였다.[13] 전국 단위 선거 실시는 혁명의 중심지였던 파리 노동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3]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가 파리 실업자 구제를 위해 설치했던 국립 작업장(ateliers nationaux프랑스어)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국립 작업장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세금 인상에 지방 농민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의회를 장악한 온건 우파는 결국 국립 작업장을 폐쇄하고 실업 상태의 청년들을 군대에 징집하거나 지방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노동자들은 1848년 6월 23일 대규모 6월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가 확산되자 의회와 정부는 카베냑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진압을 맡겼다. 카베냑은 군대를 동원하여 6월 26일까지 나흘간 이어진 시가전 끝에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측 703명, 노동자 측 3,035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4][15]

6월 봉기의 실패는 2월 혁명 당시 잠시 협력했던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의 완전한 결별을 가져왔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에 큰 위협을 느끼고 급격히 보수화되었으며, 사회 안정을 명분으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 사건은 프랑스 시민혁명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3. 3. 사회주의자 탄압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는 여러 내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라마르틴과 르드뤼 롤랭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시정부 구성원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또한 1848년 4월 새로 선출된 의회는 사회 문제 해결보다는 정치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2월 혁명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은 파리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국립 작업장(ateliers nationauxfra) 문제로 인해 극에 달했다. 지방 농민들은 국립 작업장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 인상에 반발했으며,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온건 우파 세력은 결국 국립 작업장을 폐지하고 실업자들을 군대에 징집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노동자들은 1848년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6월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악화되자 의회와 정부는 카베냑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카베냑은 군대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봉기를 매우 난폭하게 진압했다.

4.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과 권력 장악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는 왕정주의자들의 압력과 6월 봉기를 겪으며 점차 보수화되었다. 사회 안정을 명분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정부 정책은 우파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보수파들은 사적 재산 보호, 가톨릭 윤리 강조 등을 내세우며 '질서당(Parti de l'Ordre)'으로 결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48년 11월 4일,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헌법은 7월 왕정 시기의 의원내각제와 달리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급하게 만들어진 헌법은 대통령과 의회 간의 권력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 정치적 불안정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1848년 12월 10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여러 후보가 경쟁한 가운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주는 후광과 함께, 질서 회복을 바라는 농민과 보수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팔루 법 등을 통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확보하는 등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대통령에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점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마침내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듬해인 1852년 12월 2일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2제국을 선포했고, 이로써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1. 루이 나폴레옹의 귀환과 정치적 부상

사회주의자 색출이 진행되던 시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망명 생활을 끝내고 정치 무대에 등장하려 하고 있었다.[17][18] 공화파 장군 카베냐크가 6월 봉기를 진압한 것을 두고 루이 나폴레옹은 "이 남자는 나를 위해 길을 쓸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848년 6월, 그는 영국 망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9] 그러나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는다는 의심과 공화제의 적으로 간주될 위험 때문에 의회 내에서는 그의 의원직 승인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라마르틴은 그의 위험성을 경고했다.[20] 루이 나폴레옹은 이러한 불신을 인지하고 현명하게 의석을 사퇴하며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표명했다.[21][22]

의회 다수를 차지한 보수적인 질서당(Parti de l'Ordre)은 그의 태도에서 성실함을 느끼고 프랑스 귀환을 승인하며 정치적 복권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루이 나폴레옹이 의회 내 동조 세력을 확보하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23] 질서당과 보수파 인사 팔루 공작 등은 공화파 카베냐크를 이용해 민중 봉기를 진압하게 한 뒤, 다루기 쉬워 보이는 루이 나폴레옹을 내세우려 했다.[24]

1848년의 루이 나폴레옹


1848년 9월 보궐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압도적인 지지로 다시 당선되었다.[25][26] 이때 그는 단순한 의원이 아니라 카베냐크를 대체할 유력 후보로 부상했다. 그러나 막상 의회 활동을 시작하자, 긴 망명 생활로 인한 서툰 프랑스어 발음과 부족한 연설 능력 때문에 정치적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수파는 그를 다루기 쉬운 인물로 여겼다.[27] 아돌프 티에르는 그를 "그저 바보"라고 평가했으며, 오를레앙파의 레뮤자 역시 그의 외모와 말투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28]

1848년의 알렉상드르 르드뤼-롤랭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가톨릭 세력의 지지가 필요했던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 혁명의 여파로 수립된 로마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교황 피우스 9세의 로마 복귀를 지원하기 위해 1849년 이탈리아 파병을 결정했다.[49] 이는 프랑스 내 공화파의 반발을 샀다. 특히 산악당은 헌법 위반을 주장하며 정권을 비판했고, 르드뤼-롤랭 주도로 시위를 벌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를 좌파 세력 제거의 기회로 삼아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으며, 르드뤼-롤랭 등 주요 인사들은 망명하거나 체포되었다.[50]

산악당 봉기 진압 후 질서당은 루이 나폴레옹에게 쿠데타를 통해 공화파를 완전히 제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은 전국 순회 연설을 통해 질서당의 음모를 폭로하고 공화정 수호를 외치며, 좌우 양극단의 대립에 지친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자 했다. 그는 좌익 혁명과 우익 쿠데타 모두를 거부하며 자신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또한, 복위 후 반동 정치를 강화하는 교황 피우스 9세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질서당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51] 이는 결국 대통령과 질서당의 결별로 이어졌고, 오디용 바로 내각이 사퇴한 후 루이 나폴레옹은 직접 내각을 구성하며 권력 장악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52]

4. 2. 1848년 대통령 선거

혁명 이후 왕정주의자들의 압력과 6월 봉기를 겪으며 임시정부는 점차 우경화되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보수파들은 사적 재산, 가톨릭 윤리, 가족 보호를 내세우며 "Parti de l'Ordre|안정당프랑스어"으로 결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48년 11월 4일, 7월 왕정 시기의 수상 중심제와 달리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선출하는 내용의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는 여러 논쟁이 있었다. 노동권은 "몽상가의 감상"이라는 비판 속에 결국 삭제되고 "노동과 산업의 자유"가 명기되었다.[30] 의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입법 심사를 위한 참사원을 두기로 결정했다.[31] 대통령 선출 방식은 독재자 출현에 대한 우려로 의회 지명 방식도 논의되었으나, 알퐁스 드 라마르틴 등의 주장에 따라 국민 직접 선거로 결정되었다.[32] 헌법은 11월 4일 의회에서 찬성 796표, 반대 30표로 채택되었으나, 계엄령 하에서의 제정이라는 점과 노동권 삭제 등을 이유로 극우와 극좌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33]

새 헌법은 미합중국 제도를 참고하여 입법부(의회)와 행정부(대통령)를 대등하게 규정했다. 대통령은 각료 임면권을 가졌지만 의회 해산권은 없었으며, 이로 인해 양측이 대립할 경우 갈등 해결이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모두 성인 남성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대통령 당선 조건은 유효 투표의 과반수 득표와 최소 200만 표 확보였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후보가 없을 경우, 상위 5명 중 국민의회가 선출하도록 했다.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제로 제한되어 정치적 연속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34][35]

헌법 공포를 기념하여 11월 12일 콩코르드 광장에서 축전이 열렸으나, 추운 날씨와 더불어 6월 봉기 진압에 대한 반감과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이러한 국민 정서는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36]

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12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주요 후보로는 6월 봉기를 진압했던 공화파 카베냐크 장군,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라마르틴과 르드뤼롤랭, 사회주의자 라스파유, 샹가르니에 장군, 그리고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등이 출마했다. 선거 운동은 정책 대결보다는 후보 간의 중상모략과 이미지 경쟁으로 흘러갔다.

루이 나폴레옹은 한때 무명이었으나, 7월 왕정의 실책과 제국에 대한 향수,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저술 활동 등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다. 그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주는 후광을 최대한 활용하며 질서, 종교, 가족, 재산의 수호를 내세웠고, 팔루 법 등을 통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확보했다. 또한 전쟁과 제정 부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려 노력하며 보수파와 농민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왕정주의자들도 카베냐크 대신 루이 나폴레옹과 연합했으며, 러시아 등으로부터 받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41][42]

선거 결과, 루이 나폴레옹이 전체 유효표의 74.2%에 달하는 543만 표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카베냐크는 144만 표(19.8%)를 얻어 2위에 머물렀다. 앙리 조르주 불레 드 라 뮈르트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보나파르트주의자5,434,22674.2%
카베냐크공화파 (온건 공화파)1,448,10719.8%
르드뤼롤랭산악파 (급진 공화파)370,1195.0%
라스파유사회주의자36,9200.5%
라마르틴무소속 (자유주의)17,2100.2%
샹가르니에왕당파 (정통왕조파)4,7900.06%
합계7,311,372100%

[37][38]

공화파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표가 분산되었고, 카베냐크, 르드뤼롤랭, 라마르틴 등 주요 후보들은 6월 봉기 진압에 대한 책임론과 리더십 부재라는 평가 속에서 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노동자들의 표는 6월 봉기 탄압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공화파 후보들을 외면하고 일부는 5월 15일 의회 난입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중 출마했던 사회주의자 라스파유에게 향했다.[39][40] 반면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후광과 질서 회복에 대한 기대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농민과 보수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의 당선은 이후 프랑스 제2제국 수립의 발판이 되었다.

5. 루이 나폴레옹의 통치와 제2제정으로의 전환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면서[43] 제2공화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초기 루이 나폴레옹은 오를레앙파 등 보수 세력과 협력하며 내각을 구성하고 국정을 운영하려 했으나, 점차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한 로마 원정[5] 결정이나 교육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한 팔루 법[6] 제정 등은 보수적인 의회와의 협력 사례였지만, 동시에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보수파가 다수인 의회 사이의 긴장 관계는 계속되었다. 특히 1850년, 이주 노동자들의 선거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방향으로 보통선거 제도를 후퇴시킨 선거법 개정[55]은 공화주의 원칙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으며, 루이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을 국민 권리의 수호자로 포장하려 했다. 대통령 임기 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 시도가 1851년 의회에서 부결되자[58],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감행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며 권력을 장악했다.[60]

쿠데타 이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한[7]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새 헌법을 공포하고, 같은 해 말 다시 한번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 즉위의 정당성을 얻었다. 마침내 1852년 12월 2일, 그는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여 제2제정의 시작을 알렸고, 이로써 프랑스 제2공화국은 종말을 고했다.[62]

5. 1. 대통령 취임과 권위주의적 통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취임 선서


1848년 12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12월 22일, 입법의회에서 선서하고 새로운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황태자=대통령(Prince-Président)"으로 불렸다.[43]

그러나 새 정부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으로서 총리를 지명하고 내각을 구성해야 했으나, 의회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자신의 정책을 실행할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당초 그의 당선을 도왔던 에밀 드 지라르댕 같은 인물은 급진적인 성향 탓에 의회 조정 역할에 부적합했다.[44] 혁명 이전 집권 세력이었던 오를레앙파가 유력한 대안이었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구체제 파벌과의 타협을 꺼렸다. 결국 아돌프 티에르의 추천으로 오딜롱 바로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바로는 루이 나폴레옹의 사회 개혁 구상을 실현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45]

오디옹 바로 내각은 예상대로 오를레앙파 등 왕당파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로 인해 루이 나폴레옹이 『빈곤의 근절』(Extinction du paupérisme, 1844)에서 제시했던 국립 집단 농장 설치와 같은 빈곤 퇴치 및 사회 개혁 정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46] 그는 당분간 인내하며 기회를 기다렸다.[47]

취임 후, 성격이 다른 의회와 기회를 엿보던 대통령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주의 성향이 약한 인물들, 특히 오를레앙파 출신들을 장관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그는 가톨릭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황 비오 9세의 세속 권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로마 원정을 결정했다. 이는 마치니가리발디가 이끄는 로마 공화국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개입이었다. 오디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로마 진군은 파리에서 로마 공화국을 지지하는 봉기를 유발했으나, 1849년 6월 13일 진압되었다. 교황은 복위했지만,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자유주의 정부 수립 요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루이 나폴레옹은 1849년 11월 1일, 기존 내각을 해산하고 풀드-로셰 내각으로 교체하며 의회 내 가톨릭 및 왕당파 다수파에 대한 견제를 분명히 했다.[5]

1849년 5월 13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보수파인 질서당이 705석 중 450석을 차지하며 압승했다. 반면 카베냐크가 이끄는 온건 공화파는 75석으로 몰락했고, 르드뤼 롤랭의 산악당은 180석으로 약진했다. 질서당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산악당의 약진은 보수파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48]

이후 대통령과 보수파가 다수인 의회는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다. 1850년 3월 15일, 양측은 대학 교육을 다시 교회의 영향력 아래 두는 팔루 법 통과에 협력했다.[6] 그러나 곧이어 권위주의적인 정책들이 연이어 추진되었다. 1850년 5월 31일에는 유권자에게 3년간 한 주소지에 거주했음을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선거법이 통과되었다. 이는 이주가 잦은 노동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여 사실상 보통선거 원칙을 훼손하는 조치였다. 같은 해 7월 16일에는 신문 발행인에게 보증금 예치를 의무화하여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으며, 정치 클럽과 단체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어 공화주의 세력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루이 나폴레옹의 권위주의적 통치 강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5. 2. 의회와의 갈등과 쿠데타



루이 나폴레옹1848년 12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공화국은 대통령과 다양한 정치 세력이 혼재된 의회 사이의 불안정한 긴장 상태에 놓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오를레앙파 출신의 오딜롱 바로 등을 장관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고, 특정 세력에 기울지 않으면서 보수 세력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들(마치니, 가리발디)에 의해 로마에서 피신한 교황 비오 9세의 권력 회복을 돕기 위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아 로마 원정을 결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오디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로마 진군은 파리에서 로마 공화국 지지 봉기를 유발했으나 1849년 6월 13일 진압되었다. 교황 복위 후, 대통령은 자유주의 정부 수립을 요구했으나 교황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11월 1일 풀드-로셰 내각으로 교체하며 의회 내 다수를 차지한 가톨릭 및 왕당파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5]

대통령과 보수적인 의회는 1850년 3월 15일, 중등 교육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팔루 법''을 통과시키는 데 협력했다.[6][53] 이 법은 종교 교육을 의무화하고 공화파 성향의 교사들을 교육계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같은 해 3월과 4월 보궐선거에서 공화파가 약진하자 위기감을 느낀 보수파(질서당)는 반격에 나섰다. 1850년 5월 31일, 의회는 선거권을 얻기 위한 거주 요건을 6개월에서 3년으로 늘리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이주가 잦은 도시 노동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여 보통선거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조치였으며, 약 300만 명의 유권자가 자격을 상실했다.[55] 루이 나폴레옹은 이 법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실제로는 질서당에게 반동 정책의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국민 권리의 수호자로 나설 기회를 엿보았다. 또한 6월에는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7월에는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새로운 출판법이 시행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왕당파의 분열과 왕정복고 계획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이용했다. 1850년 하반기, 그는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대 사열을 통해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는 의회 내 왕당파와 연계하여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의심을 받던 파리 군사 총독 샹가르니에 장군을 1851년 1월 해임했다.[57] 또한 모르니, 플뢰리, 퍼시그니 등 충성파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하고, 생트아르노 등 군부 내 지지 세력을 규합하며 쿠데타를 준비했다. 의회는 루이 나폴레옹의 봉급 증액 요구를 거부하며 견제했지만[56], 대통령은 1850년 선거법 폐지를 주장하며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 했다.

대통령의 재선 금지를 규정한 헌법 개정 시도가 1851년 7월 의회에서 부결되면서[58] 평화적인 권력 연장의 길은 막혔다. 의회가 군대 동원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산악파와 보나파르트파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의회는 더욱 무력해졌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1일 밤에서 2일 새벽,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및 아우스터리츠 전투 승전 기념일에 맞춰 1851년 프랑스 쿠데타를 단행했다. 내무장관 모르니, 육군장관 생 탈르노, 경시총감 모파, 심복 퍼시그니, 파리 총사령관 피에르 마냥 등이 쿠데타를 주도했다.[60] 군대는 의회를 해산하고 보통선거 부활을 선언했으며, 티에르, 베리에, 카베냐크, 샹가르니에 등 주요 반대파 정치인들을 체포했다. 빅토르 위고 등이 이끈 파리에서의 저항과 지방에서의 봉기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2월 3일, 공화파 의원 장 바티스트 보댕은 바리케이드 위에서 저항을 호소하다 사살되었다.[61]

쿠데타 이후 12월 20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루이 나폴레옹의 조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합법성을 확보했다.[7] 이를 기반으로 1852년 1월 14일 새 헌법이 공포되었고, 같은 해 11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 즉위가 결정되었다. 마침내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며 제2제정을 선포했다.[62]

5. 3. 제2제정의 성립

1848년 12월 10일 대통령 선거에는 알퐁스 드 라마르틴, 르드뤼 롤랭, 까베냑 장군, 사회주의자 라스파이 등과 함께 보나파르트주의자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출마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팔루 법을 통해 교회에 교육권을 부여하는 등 가톨릭 세력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1852년 12월 2일 프랑스 제2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였다.

6. 역사적 평가

새로운 헌법은 민주 공화국, 직접 보통선거, 삼권분립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1848년 11월 4일에 공포되었다.[4] 이 헌법에 따라 여러 정치 제도가 새롭게 구성되었다.

입법부로는 3년 임기의 의원 750명으로 구성된 단일 상설 의회가 정당명부식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다. 사법부의 역할 일부와 법률안 제안 기능을 담당하는 국무원은 의회에서 선출했으며, 임기는 6년이었다. 의회는 국무원이 제안한 법률을 표결하는 방식으로 입법 절차가 진행되었다.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위임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었고, 의회보다 더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는 직접 보통선거로 선출되었으나 재선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장관을 임명했으며, 임명된 장관은 대통령과 함께 의회에 책임을 졌다.

헌법 개정 절차는 매우 까다롭게 규정되었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특별 의회에서 세 번 연속으로 전체 의원 4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만 했다.

이러한 대통령 중심의 강력한 행정부 구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었다. 쥘 그레비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사실상 국왕과 같은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될 위험성을 지적하며, 국가 원수를 단순히 의회가 해임할 수 있는 장관회의 의장으로 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면, 람르탱은 자신이 보통선거를 통해 충분히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과거 프랑스를 통치했던 왕가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의회는 대통령직을 국민의 직접적인 지지와 인기에 크게 의존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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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Les couleurs du drapeau de 1848 https://www.persee.f[...] 1931
[3] 서적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Gallimard
[4] 서적 1848, Quand la République combattait la Démocratie Mare et Martin
[5] 서적 The Republican Experiment, 1848–1852
[6] 서적 The Penguin History of the Church: The Church in an Age of Revolution https://books.google[...] Penguin
[7] 서적 Napoleon III and the Second Empi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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