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피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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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피흐는 18세기 프로이센의 군인이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에서 태어나 7년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승진을 거듭했다. 쿤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코르비츠 전투에서 승리하여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막센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파면되었고, 슈판다우 요새에 투옥되었다. 석방 후 덴마크 군에서 복무하다가 코펜하겐에서 사망했다. 저서로 《군사적 대상에 대한 고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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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피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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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핀크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에서 태어났다.[1] 그는 1734년 라인강에서 안톤 울리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의 수행원으로 처음 실전에 참전했다.[1] 그 직후 오스트리아군으로 전속했고, 이후 러시아로 가서 그의 후원자인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뮌니히 원수의 실각으로 진급 전망이 막히기 전까지 복무했다.[1] 1742년 그는 베를린으로 갔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소령 계급의 부관으로 임명했다.[1] 훌륭한 공적으로 그는 7년 전쟁에서 빠르게 진급했다.[1] 콜린 전투 (1757년 6월 18일) 이후 그는 대령이 되었고,[1] 1757년 말에는 소장이 되었다.[1]
1759년 초 핀크는 중장이 되었고, 이 계급으로 참담한 쿤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했는데, 그는 전장과 패배한 프로이센군을 수습하는 데 모두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1] 결국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지휘권을 넘겼다.[1] 9월 21일 핀크는 요한 야콥 폰 빈쉬 장군과 협력하여 코르비츠 전투에서 싸웠는데,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제국의 소국 분견대가 패배했다.[1] 이 공적으로 프리드리히는 핀크에게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했다.[1]
그러나 그 후 일어난 막센 전투의 참사로 핀크의 현역 경력은 갑작스럽게 종결되었다. 프로이센군은 9월 4일 드레스덴을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고, 핀크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적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막센(작센의 피르나 지역에 있는 마을)으로 파견되었다. 위험하게 노출되었고 병력이 부족했기에, 핀크는 국왕에게 이러한 작전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지만 변경되지 않은 명령을 따랐다. 고립되고 압도적으로 수적으로 불리해진 그는 1759년 11월 21일 약 14,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이후 프리드리히는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그는 파면되었다. 그는 또한 슈판다우 요새에서 1년 동안 투옥되었다. 이 기간이 만료된 후 핀크는 보병 장군으로 덴마크군에 입대했다. 그는 1766년 코펜하겐에서 사망했는데, 여전히 프리드리히의 무자비한 엄격함에 억울함을 느꼈다.[1]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피흐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에서 태어났다.[1] 그는 1734년 라인강에서 안톤 울리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의 수행원으로 처음 실전에 참전했다.[1] 그 직후 오스트리아군으로 전속했고, 이후 러시아로 가서 그의 후원자인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뮌니히 원수의 실각으로 진급 전망이 막히기 전까지 복무했다.[1] 1742년 그는 베를린으로 갔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소령 계급의 부관으로 임명했다.[1] 훌륭한 공적으로 그는 7년 전쟁에서 빠르게 진급했다.[1] 콜린 전투 (1757년 6월 18일) 이후 그는 대령이 되었고,[1] 1757년 말에는 소장이 되었다.[1]1759년 초 핀크는 중장이 되었고, 이 계급으로 참담한 쿤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했는데, 그는 전장과 패배한 프로이센군을 수습하는 데 모두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1] 결국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지휘권을 넘겼다.[1] 9월 21일 핀크는 요한 야콥 폰 빈쉬 장군과 협력하여 코르비츠 전투에서 싸웠는데,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제국의 소국 분견대가 패배했다.[1] 이 공적으로 프리드리히는 핀크에게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했다.[1]
2. 2. 7년 전쟁
피흐는 7년 전쟁에서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콜린 전투(1757년 6월 18일)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고, 1757년 말에는 소장이 되었다.[1] 1759년 초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게 지휘권을 넘기기도 했다.[1]9월 21일, 피흐는 요한 야콥 폰 분쉬 장군과 협력하여 코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제국 소국 파견대를 격파했다.[1] 이 공로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피흐에게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했다.[1]
그러나 막센 전투의 패배로 피흐의 경력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1759년 11월 21일, 병력 부족과 불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약 14,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해야 했다.[1]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이후,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파면되었고, 슈판다우 요새에 1년 동안 투옥되었다.[1]
2. 3. 막센 전투와 몰락
피흐는 7년 전쟁에서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콜린 전투 (1757년 6월 18일) 이후 대령이 되었고, 1757년 말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1] 1759년 초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하며 패배한 프로이센군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게 지휘권을 넘기기도 했다.[1]요한 야콥 폰 분쉬 장군과 협력하여 코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제국 소국 파견대를 격파한 공로로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1] 그러나 막센 전투는 그의 경력을 갑작스럽게 끝냈다. 프로이센군이 드레스덴을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한 후, 피흐는 적의 움직임을 차단하라는 왕명을 받고 막센(작센 주의 피르나 지역에 있는 마을)으로 파견되었다. 병력이 부족하고 위험에 노출된 그는 왕에게 작전에 대해 조언했지만, 명령에 따랐다. 결국 1759년 11월 21일, 약 14,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해야 했다.[1]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이후, 피흐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파면되었고, 슈판다우 요새에 1년 동안 투옥되었다.[1] 형기를 마친 후, 그는 보병 장군으로 덴마크군에 입대했다. 1766년 코펜하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격함에 억울함을 느꼈다.[1]
2. 4. 덴마크 군 복무와 죽음
피흐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에서 태어나 1734년 라인강에서 안톤 울리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의 수행원으로 처음 실전에 참전했다.[1] 그 직후 오스트리아군으로, 이후 러시아군으로 이적했지만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뮌니히 원수의 실각으로 진급이 좌절되었다.[1] 1742년 베를린으로 가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해 소령으로 임명되어 부관으로 활동했다.[1] 7년 전쟁에서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콜린 전투 (1757년 6월 18일) 이후 대령, 1757년 말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1]1759년 초 중장으로 진급한 핀크는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군단을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전투 후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1] 같은 해 9월 21일 요한 야콥 폰 분쉬 장군과 협력하여 코비츠 전투에서 승리하여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1]
그러나 막센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패배하면서 핀크의 경력은 갑작스럽게 끝났다.[1] 1759년 11월 21일, 병력 부족과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명에 따라 전투를 수행했으나 결국 항복했다.[1]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파면되었고, 슈판다우 요새에 1년간 투옥되었다.[1] 석방 후 핀크는 보병 장군으로 덴마크군에 입대했다.[1] 그는 1766년 코펜하겐에서 사망할 때까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가혹함에 억울함을 느꼈다고 한다.[1]
3. 저술 활동
피흐는 《군사적 대상에 대한 고찰》(베를린, 1788)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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