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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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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독일의 철학자, 작가, 사업가이다. 그는 1743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와 제네바에서 공부한 후 사업가로 활동했으며,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정치에도 참여했다. 야코비는 30세에 사업을 정리하고 철학과 문학에 전념했으며, 범신론 논쟁, 무신론 논쟁, 신의 사물 논쟁 등 다양한 철학적 논쟁에 참여했다. 그는 칸트, 피히테, 셸링 등 독일 관념론 철학을 비판했으며,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야코비의 사상은 체계적이지 않지만, 독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작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연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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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기본 정보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초상화, 때로는 임마누엘 칸트의 초상화로 오인되기도 함
이름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출생일1743년 1월 25일
출생지뒤셀도르프, 팔츠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819년 3월 10일
사망지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연방
자녀카를 비간트 막시밀리안 야코비
친척요한 게오르크 야코비 (형제)
철학적 정보
주요 관심사상식 실재론
종교 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시대19세기 철학
학파/전통독일 관념론
영향애덤 스미스
토머스 리드
데이비드 흄
바뤼흐 스피노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크리스티안 볼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게오르크 하만
임마누엘 칸트
모세 멘델스존
영향을 받은 철학자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쇠렌 키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모세 멘델스존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야코프 프리드리히 프리스
빅토르 쿠쟁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레오 슈트라우스
주요 사상Glaube (믿음)
Offenbarung (계시)
허무주의

2. 생애

1743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제네바에서 공부한 후, 21세에 아버지의 설탕공장을 물려받아 경영인이자 무역상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뒤셀도르프 지부 재정을 담당했으며, 윌리히(Jülich)-베르크 공국의 재무 관리로도 활동했다. 제네바에서는 샤를 보네계몽주의 저술을 탐독했으며, 루소와 볼테르의 정치 사상에 심취했다.[4]

30세에 철학과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을 정리하고, 1779년 뮌헨의 각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입각한 통상 및 세무 행정 개혁이 실패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 이론을 지지하는 논문을 발표했다.[4]

1794년 프랑스 혁명군이 펨펠포르트를 점령하자 고향을 떠나 홀슈타인함부르크에서 거주하며 라인홀트를 알게 되었다.[4] 1804년 셸링과 함께 뮌헨대학 철학 교수가 되었고, 1807년부터 1812년까지 바이에른 학술원 원장을 지냈다.[4] 1819년 뮌헨에서 사망할 때까지 저술 편집에 몰두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1825년 친구 프리드리히 코펜이 전집을 출간했다.[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743년 뒤셀도르프에서 부유한 설탕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잠시 견습 기간을 거친 후, 제네바로 가서 일반 교육을 받았다.[5] 제네바에서 조르주-루이 르사주를 비롯한 문학 및 과학계 인사들과 교류했다.[5]

샤를 보네의 저술,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의 정치 사상을 면밀히 연구했다.[5] 1763년 뒤셀도르프로 돌아와 이듬해 엘리자베트 폰 클레르몽과 결혼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5]

2. 2. 상인, 공직자, 그리고 좌절

21세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경영인이자 무역상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뒤셀도르프 지부의 재정을 담당했으며, 윌리히(Jülich)-베르크 공국의 재무 담당 관리로도 활동했다.[5] 1770년 율리히-베르크 공국의 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어 재정 및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으로 명성을 얻었다.

1779년 뮌헨의 각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했으나, 그가 주도한 자유주의적 통상 및 세무 행정 개혁은 바이에른 정권의 권위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 이론을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했다.[5]

2. 3. 철학으로의 전향과 저술 활동

30세에 접어들면서 야코비는 철학과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을 정리했다.[4] 1779년에는 뮌헨의 각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했지만, 자유주의에 입각한 통상 및 세무 행정 개혁이 실패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났다.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 이론을 지지하는 논문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되었다.[4]

야코비는 시인인 그의 형 요한 게오르크 야코비를 통해 크리스토프 마르틴 비란트와 함께 문학 잡지를 발행하여 명성을 얻었다.[4]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요한 게오르크 하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 당대 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4]

1785년 범신론 논쟁을 계기로 철학계에 등장했다.[4]

2. 4. 범신론 논쟁과 철학적 명성

고틀리프 에른스트 레싱은 스피노자주의 외에 진정한 의미의 철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 이는 야코비가 스피노자의 작품을 장기간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레싱 사후, 야코비는 1783년부터 레싱의 절친한 친구인 모세스 멘델스존과 서신을 교환하며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5]

1785년,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교리에 관한 모세스 멘델스존에게 보낸 편지』를 출판하여 범신론 논쟁을 촉발했다. 이 책은 철학에서 독단적인 체계에 대한 야코비의 강력한 반대를 명확히 표현했고,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5] 야코비는 비이성적인 믿음이라는 구시대적 개념을 철학에 도입하려 했다는 비난과 함께 이성의 적, 경건주의자, 위장한 예수회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믿음"이라는 모호한 용어 사용으로 공격받았다.[5]

1787년, 야코비는 『데이비드 흄에 관한 믿음, 또는 관념론과 현실론』에서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비판했다. 야코비는 객관적인 물자체를 직접 알 수 없다는 데 동의했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체는 외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이는 직접적으로 알려지지만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진리, 즉 계시의 결과이다. 물자체의 실제 존재는 관찰 주체에게 드러나며, 주체는 마음속의 관념적인 표상을 직접 알고, 마음 밖의 객관적인 물자체를 강하게 믿는다. 야코비는 외부 세계를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 믿음과 신학적 연관성을 정당화했다.[2]

범신론 논쟁은 후대 독일 철학자와 작가들이 범신론과 스피노자주의에 관심을 갖게 했다. 야코비의 신앙주의는 인기가 없었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독일 철학자들이 무신론을 탐구하고 유신론, 신화, 도덕에 대한 철학적 토대의 상실 문제를 다루게 했다. 야코비와 범신론 논쟁은 최초의 체계적인 허무주의 진술(비판적이었지만) 중 하나를 공식화하고 초기 하느님의 죽음 담론의 예를 보여주기에 유럽 지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3]

2. 5. 망명과 무신론 논쟁

1794년 프랑스 혁명군이 펨펠포르트를 점령하자 고향을 떠나 홀슈타인함부르크에 거주했다. 이 시점에 라인홀트를 알게 되었다.[4]

피히테는 1799년 무신론 혐의로 예나에서 해임되었다. 피히테는 1798년 프리드리히 카를 포르베르크의 논문 "종교 개념의 발전"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의 철학 저널에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거에 관하여"("Ueber den Grund unsers Glaubens an eine göttliche Weltregierung")라는 논문을 발표한 후 이러한 혐의를 받았다. 피히테에게 신은 우선적으로 도덕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했다. 그는 "살아 있고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도덕 질서는 그 자체로 신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이 필요 없으며, 다른 신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피히테의 과격한 "대중에 대한 호소"("Appellation an das Publikum", 1799)와 "사적인 편지에서"라는 제목의 보다 신중한 답변(1799)은 F. H. 야코비로 하여금 "피히테에게 보내는 편지"(1799)를 발표하게 만들었는데, 이 편지에서 야코비는 철학 전반, 특히 피히테의 관념론허무주의와 동일시하고 자신의 철학적 원리와 신학의 관계를 설명했다.[4]

2. 6. 뮌헨 시절과 말년

1804년 야코비는 뮌헨 과학 아카데미의 철학 교수로 초빙되어 뮌헨으로 돌아왔다.[5] 상당한 재산 손실로 인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807년에는 바이에른 학술원 원장이 되었다.[5]

1811년에는 프리드리히 셸링을 비판하는 내용의 마지막 철학 저작인 『신의 사물과 그 계시에 관하여』를 출판했다.[5] 이 책으로 인해 프리스와 바아더 등이 참여한 활발한 논쟁, 이른바 신의 사물 논쟁이 일어났다.[5]

1812년 야코비는 학술원 원장직에서 은퇴하고 자신의 저작들을 모아 출판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저작집 출판을 완료하지 못하고 1819년 뮌헨에서 사망했다.[5]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코펜(Friedrich Koppen)이 야코비의 저작 출판을 이어받아 1825년에 전집을 완성했다. 전집은 총 6권으로 구성되었으며, 4권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5]

3. 사상

야코비의 철학은 체계적이지 않다. 그의 주요 개념은 이해(이해력)와 실제 사실에 대한 파악 사이의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야코비에게 이해 또는 논리적 능력은 순전히 형식적이거나 정교화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주어진 자료를 넘어서지 않는다. 즉각적인 경험이나 지각을 바탕으로 사고는 비교와 추상을 통해 진행되지만, 본질적으로 중개적이고 유한한 상태를 유지한다.[5]

이해의 영역은 조건화된 영역이며, 그곳에서 세계는 기계론으로 나타난다.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면, 실제 사실의 존재는 사고의 논리적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져야 한다. 중개적인 사고는 즉각적인 진리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5]

야코비에 따르면, 신은 알려진 존재일 수 없다. 만약 신이 알려진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유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신은 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유가 존재한다면, 현상의 기계적 질서가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인식은 감각 지각(감각적 문제에 대한 믿음)과 이성(초감각적 사실에 대한 믿음) 사이의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5]

야코비의 철학적 업적은 칸트 철학에 대한 반박과 피히테, 셸링 등 독일 관념론 철학에 대한 논쟁에 있다. 야코비는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주장하는 대신, “비철학”으로서 논쟁 상대가 되는 철학 체계의 내부에 잠입하여 그 근저에 잠재하는 비합리적인 것, 합리적 근거의 부재를 지적했다. 그의 용어 사용은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지만, 이는 야코비 사상의 근본에 논증적인 합리성에 대한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

3. 1. 이성과 믿음

야코비는 이성, 즉 논리적 능력은 형식적이며 제한적이라고 보았다. 이성은 주어진 자료를 넘어서지 못하며, 비교와 추상을 통해 사실들 사이의 연결을 확립하지만, 본질적으로 중개적이고 유한한 상태를 유지한다.[5] 야코비에게 있어 참된 인식은 이성이 아닌 즉각적인 경험이나 지각, 즉 직관과 믿음을 통해 얻어진다.

야코비는 "믿음(Glauben)이야말로 모든 인식의 요소"라고 주장했다. 초감각적인 대상, 특히 신은 이성에 의한 논증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인간의 정신은 초감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있다!"라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감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와 같은 사변적 논증은 논리의 매개(Vermittlung|de) 체계를 순환할 뿐, 그 체계를 지탱하는 초감각적인 것을 포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야코비에게 "믿음"은 단순한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정신"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한 능동적인 "받아들임"이다. 이러한 정신 활동은 이론적 논증을 포함한 모든 인간 활동의 기초가 된다. 야코비는 논증에 의존하지 않는 "믿음"의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일종의 "도약(Sprung)" 또는 "죽음의 도약(salto mortale)"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인정했다.

3. 2. 비판 철학 비판

야코비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비판했다. 그는 물자체는 직접 알 수 없지만, 믿음을 통해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야코비는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을 비판하고, 이성을 지성으로 이끌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믿음(Glauben)이야말로 모든 인식의 요소"라고 보았다.[5] 야코비에 따르면, 이성에 의한 논증으로는 초감각적인 대상을 파악할 수 없지만, 인간은 초감각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무언가가 "있다!"라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3. 3. 독일 관념론 비판

야코비는 피히테관념론허무주의와 동일시하며 비판했다.[5] 그는 절대적 자아로부터 모든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셸링의 동일철학을 비판하며, 유한한 존재로부터 무한한 존재로의 이행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야코비에 따르면, 스피노자를 대표로 하는 모든 사변적 논증(즉, 야코비가 말하는 '철학')은 논리의 체계적인 그물망을 순환하고 있을 뿐이며, 그 체계를 근본적으로 지탱하고 유지하는 초감각적인 것을 포착할 수 없다. 독일 관념론의 논리적 체계는 결국 공허함에 이르게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약"을 통해 "신앙의 입장"에 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3. 4. 스피노자주의와 무신론

야코비는 스피노자를 대표로 하는 모든 사변적 논증(철학)은 논리의 "매개" 체계에 갇혀, 존재의 직접적 파악인 "믿음(Glauben)"을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 야코비에 따르면, 이러한 "스피노자주의"는 "무신론"과 같다. 그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인식의 요소”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성에 의한 “논증”으로는 초감각적인 대상(특히 신)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초감각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있다!”라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주요 논쟁

야코비는 생전에 여러 중요한 논쟁에 참여했다.
범신론 논쟁 (1785)1785년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교리에 관한 모세스 멘델스존에게 보낸 편지』를 출판하여 범신론 논쟁을 일으켰다.[5] 야코비는 고틀리프 에른스트 레싱과의 대화에서 레싱이 스피노자주의 ছাড়া 진정한 철학은 없다고 한 말을 듣고 스피노자 철학을 연구했다. 레싱 사후, 야코비는 모세스 멘델스존과 서신을 교환하며 스피노자주의를 논의했고, 이 편지들을 출판하여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반발을 샀다.[5]

야코비는 비이성적인 믿음을 철학에 도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믿음'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5] 그는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1787)에서 '믿음'은 저명한 작가들이 사용했으며, 추론과 반대되는 사실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책의 부록에서 야코비는 칸트의 지식관을 비판하며, 객관적인 물자체는 직접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2][5]

범신론 논쟁은 후대 독일 철학자들과 작가들이 범신론과 스피노자주의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야코비의 신앙주의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신론 탐구와 유신론, 신화, 도덕의 철학적 토대 상실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야코비는 최초의 체계적인 허무주의 진술 중 하나를 공식화하고 초기 하느님의 죽음 담론의 예를 보여주었다.[3]

이 논쟁에는 칸트, 헤르더, 괴테 등 당대 주요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무신론 논쟁 (1799)무신론 논쟁은 범신론 논쟁 이후 14년 후인 1799년,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예나 추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야코비는 피히테와 사상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추방을 비난하며 피히테를 변호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야코비는 피히테의 사상이 허무주의(Nihilismus)임을 지적했다. 이것은 독일어에서 니힐리즘이라는 용어의 철학적 사용으로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야코비에 따르면, 절대적인 자아로부터 모든 것을 도출하려고 시도하는 피히테의 일원론적 체계는 자아 이외에 실재성의 근거를 갖지 않는다. 야코비는 여기서 자아의 무근거성을 간파하고, 무(無) 위에 자아의 유(有)를 결합하는 피히테의 사상을 "키메라주의" 또는 "무를 의지하는 무"만을 근원으로 하는 "니힐리즘"으로 규정했다.

야코비에게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 실체의 일원론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주의와 다를 바 없었다. 스피노자주의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니힐리즘"이며, 피히테주의는 "전도된 스피노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야코비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것은 "무신론"과 같은 의미이다). 야코비는 이러한 논리적 체계가 귀결하는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약"을 통해 "신앙의 입장"에 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신의 사물 논쟁 (1811-1812)프리드리히 셸링의 동일철학을 비판한 야코비의 저서 《신의 사물과 그 계시에 관하여》(1811)가 출판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5] 셸링은 《야코비 씨의 저서 신의 사건에 관한 기념비》(1812)를 통해 이에 반박했다.[5] 이 논쟁은 19세기 전반의 종교철학적 문제점들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범신론 논쟁과 무신론 논쟁을 총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 논쟁의 간접적인 발단은 1802년 헤겔이 발표한 논문 〈신앙과 지식〉이었다. 야코비는 《케펜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로 이에 답했다. 1803년에는 셸링 쪽에 서 있던 에셴마이어가 《철학의 비철학으로의 이행》을 저술하여 야코비 쪽으로 이동하면서, "무한자에서 유한자로의 이행"의 불가능성이라는 쟁점을 바탕으로 셸링의 동일철학을 비판했다. 셸링은 1804년 《철학과 종교》를 집필하고, 1809년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서 악의 문제와 타락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며 이에 맞섰다.

야코비는 1811년의 비판에서 주로 셸링의 동일철학을 겨냥했다.

4. 1. 범신론 논쟁 (1785)

1785년 야코비가 『스피노자의 교리에 관한 모세스 멘델스존에게 보낸 편지』를 출판하면서 범신론 논쟁이 시작되었다.[5] 야코비는 고틀리프 에른스트 레싱과의 대화에서 레싱이 스피노자주의 ছাড়া 진정한 철학은 없다고 언급한 것을 계기로 스피노자 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레싱 사후, 야코비는 레싱의 친구였던 모세스 멘델스존과 서신을 교환하며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이 편지들은 1785년 야코비에 의해 출판되었고,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5]

야코비는 비이성적인 믿음을 철학에 도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성의 적, 경건주의자 등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믿음'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공격이 거셌다.[5] 야코비는 다음 저작인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1787)에서 '믿음'이라는 용어가 저명한 작가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추론과 반대되는 사실 인식의 본질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주장했다. 이 책의 부록에서 야코비는 칸트의 지식관을 면밀히 조사하며 비판 철학과 대립했다.[5]

야코비는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비판하며, 객관적인 물자체는 직접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부 세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주체가 정신적 관념과 관련된 실제 대상을 인식하고, 물자체의 존재를 강하게 믿는다고 보았다.[2]

범신론 논쟁은 역설적이게도 후대 독일 철학자들과 작가들이 범신론과 스피노자주의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야코비의 신앙주의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신론 탐구와 유신론, 신화, 도덕의 철학적 토대 상실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야코비와 범신론 논쟁은 유럽 지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그가 최초의 체계적인 허무주의 진술 중 하나를 공식화하고 초기 하느님의 죽음 담론의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3]

이 논쟁에는 칸트, 헤르더, 괴테 등 당대 주요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4. 2. 무신론 논쟁 (1799)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1798년 프리드리히 카를 포르베르크의 논문 "종교 개념의 발전"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의 철학 저널에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후, 1799년 무신론 혐의로 예나에서 해임되었다.[4] 피히테에게 있어 신은 우선적으로 도덕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했다. 그는 "살아 있고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도덕 질서는 그 자체로 신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이 필요 없으며, 다른 신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피히테의 "대중에 대한 호소"(1799)와 "사적인 편지에서"라는 제목의 보다 신중한 답변(1799)은 야코비로 하여금 "피히테에게 보내는 편지"(1799)를 발표하게 만들었는데, 이 편지에서 야코비는 철학 전반, 특히 피히테의 관념론허무주의와 동일시하고 자신의 철학적 원리와 신학의 관계를 설명했다.[4]

무신론 논쟁은 범신론 논쟁 이후 14년 후인 1799년,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예나 추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야코비는 피히테와 사상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추방을 비난하며 피히테를 변호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야코비는 피히테의 사상이 허무주의(Nihilismus)임을 지적했다. 이것은 독일어에서 니힐리즘이라는 용어의 철학적 사용으로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야코비에 따르면, 절대적인 자아로부터 모든 것을 도출하려고 시도하는 피히테의 일원론적 체계는 자아 이외에 실재성의 근거를 갖지 않는다. 야코비는 여기서 자아의 무근거성을 간파하고, 무(無) 위에 자아의 유(有)를 결합하는 피히테의 사상을 "키메라주의" 또는 "무를 의지하는 무"만을 근원으로 하는 "니힐리즘"으로 규정했다.

야코비에게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 실체의 일원론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주의와 다를 바 없었다. 스피노자주의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니힐리즘"이며, 피히테주의는 "전도된 스피노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야코비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것은 "무신론"과 같은 의미이다). 야코비는 이러한 논리적 체계가 귀결하는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약"을 통해 "신앙의 입장"에 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4. 3. 신의 사물 논쟁 (1811-1812)

프리드리히 셸링의 동일철학을 비판한 야코비의 저서 《신의 사물과 그 계시에 관하여》(1811)가 출판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5] 셸링은 《야코비 씨의 저서 신의 사건에 관한 기념비》(1812)를 통해 이에 반박했다.[5] 이 논쟁은 19세기 전반의 종교철학적 문제점들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범신론 논쟁과 무신론 논쟁을 총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 논쟁의 간접적인 발단은 1802년 헤겔이 발표한 논문 〈신앙과 지식〉이었다. 야코비는 《케펜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로 이에 답했다. 1803년에는 셸링 쪽에 서 있던 에셴마이어가 《철학의 비철학으로의 이행》을 저술하여 야코비 쪽으로 이동하면서, "무한자에서 유한자로의 이행"의 불가능성이라는 쟁점을 바탕으로 셸링의 동일철학을 비판했다. 셸링은 1804년 《철학과 종교》를 집필하고, 1809년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서 악의 문제와 타락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며 이에 맞섰다.

야코비는 1811년의 비판에서 주로 셸링의 동일철학을 겨냥했다.

5. 영향

야코비의 저술 활동은 논쟁적이며 당시 상황에 맞춰 이루어졌고, 1800년 전후 독일의 사상계와 언론에 영향을 미쳤다. 야코비의 사상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주로 서신 왕래나 강의 등을 통해 전해졌으며,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인 형태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활동했던 철학자와 문학가들의 저술에서 야코비에 대한 언급을 여러 차례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저작집은 총 6권이며, 생전에 그 자신이 직접 편집한 것이다.

20세 학생이었던 헤겔은 헬데르린과 함께 『스피노자 서간』을 읽었고, 1791년 2월 12일의 노트에는 범신론 논쟁의 슬로건이기도 했던 "헨·카이·판(일にして전)"이라고 적어 놓았다.[6]

19세기와 20세기의 세기 전환기에는 야코비 연구가 많이 출판되었는데, 레비브륀르의 『야코비의 철학』(1894년)도 그중 하나이다.

1933년, 딜타이의 제자인 볼노우가 『F.H. 야코비의 생의 철학』을 저술하여 야코비가 "생의 철학"의 선구자로 재발견되었다. 볼노우의 연구는 20세기 야코비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6. 주요 저작

Edward Allwill’s Briefsammlungde (1781)

Etwas das Lessing gesagt hatde (1782)

Über die Lehre des Spinoza in Briefen an den Herrn Moses Mendelssohnde (1785, 1789, 1819)

Friedrich Heinrich Jacobi wider Mendelssohns Beschuldigungen betreffend die Briefe über die Lehre des Spinozade (1786)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de (1787)

Woldemarde (1794, 1796)

Jacobi an Fichtede (1799)

Ueber das Unternehmen des Kriticismusde (1801)

Ueber Gelehrte Gesellschaften, ihren Geist und Zweckde (1807)

Von den göttlichen Dingen und ihrer Offenbarungde (1811)

Friedrich Heinrich Jacobi's Werkede (1812–1825)

Friedrich Heinrich Jacobi's auserlesener Briefwechselde (1825–27)

일본어 번역:


  • 『スピノザの学説に関する書簡』일본어 (Über die Lehre des Spinoza, in Briefen an Mendelssohnde, 1785, 1789, 1819): 다나카 히카루(田中光) 번역, 2018년 4월 지센쇼칸(知泉書館) 출판.
  • 『世界視点――知のトポス』일본어 제6호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de, 1787): 쿠리하라 타카시(栗原隆), 아베 후쿠코(阿部ふく子), 후쿠시마 켄타(福島健太) 부분 번역, 니가타대학 인문학부 철학·인문학연구회, 2010년 게재.


그 외 저작:

  • Sendschreiben an Fichtede (1799)
  • Über das Unternehmen des Kritizismus, die Vernunft zu Verstand zu bringende (1801)
  • drei Briefen an Köppende (1803)
  • Über gelehrte Gesellschaften, ihren Geist und Zweckde (1807)
  • Von den göttlichen Dingen und ihrer Offenbarungde (1811)


소설:

  • Eduard Allwills Briefsammelungde (1781)
  • Woldemarde (1779)

참조

[1] 웹사이트 Friedrich Heinrich Jacobi https://plato.stanfo[...]
[2] 서적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3] 서적 The Myth of Disenchantment: Magic, Modernity, and the Birth of the Human Scienc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4] 웹사이트 Johann Gottlieb Fichte https://plato.stanfo[...] 2024-02-20
[5] 백과사전 Jacobi, Friedrich Heinrich
[6] 간행물 ヘーゲルとヤコービ:スピノザ主義の問題を巡って 弘文堂 1990
[7] 논문 야코비와 스피노자 논쟁 2014-03
[8] 논문 야코비의 칸트 비판과 인간의 자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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