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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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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빌뇌브는 1763년에 태어나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한 프랑스 제독이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 칭호를 버리고 혁명에 동참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영국 해협 봉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후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806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났지만, 나폴레옹의 암살 지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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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빌뇌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미랄 드 빌뇌브, 해양 박물관 (프랑스)"
출생명피에르샤를장바티스트실베스트르 드 빌뇌브
출생일1763년 12월 31일
출생지발랑솔, 프로방스, 프랑스
사망일1806년 4월 22일 (42세)
사망지렌, 브르타뉴, 프랑스
안장지알 수 없음
별칭알 수 없음
서명알 수 없음
소속프랑스 왕국
프랑스 공화국
프랑스 제국
군사 경력군종: 해군
복무 기간: 1779년–1806년
최종 계급: 중장
지휘:
Guillaume Tell (기욤 텔 함)
Bucentaure (뷔상토르 함)
참전:
영국-프랑스 전쟁 (1778–1783)
포트 로열 전투
프랑스 혁명 전쟁
나일 해전
몰타 공방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피니스테레 곶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
훈장: 알 수 없음
관련된 사람: 알 수 없음
이후 활동: 알 수 없음
배우자: 알 수 없음
자녀: 알 수 없음

2. 초기 생애 및 경력

1763년 프랑스 발랑솔에서 태어난[1] 피에르 빌뇌브는 1778년 혹은 1779년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였다.[1][2]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드 그라스 제독 함대에서 복무했으며,[2] 귀족 출신임에도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해군에 남아 경력을 이어가 1796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798년 나일 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1804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툴롱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영국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고 영국 침공을 준비하는 중요 임무를 맡게 되었다.

2. 1. 해군 입대와 프랑스 혁명

1763년 알프드오트프로방스주 발랑솔에서 태어났다.[1] 1778년 또는 1779년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1]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드 그라스 제독 함대 소속의 ''마르세예''(''Marseillais'')에서 해군 소위로 복무했다.[2]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공감하여, 자신의 이름에서 귀족 칭호를 나타내는 '드(de)'를 삭제했다. 이러한 행보 덕분에 혁명 시기 다른 많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해군에서 숙청될 때에도 그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혁명 전쟁 동안 여러 해전에 참전했으며, 그 결과 1796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2. 2. 나폴레옹 전쟁 초기

1798년 나일 해전에서 그는 후위 부대를 지휘했다. 그의 기함 ''기욤 텔''호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프랑스 함선 중 하나였다.[1] 빌뇌브는 이 해전에서 영국 함대와 적극적으로 교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운 좋은 남자"라고 평가하거나[1]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옹호하며[1] 그의 군 경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후 몰타 포위전 중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영국군의 대우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군을 '기름진 고블린'(gobelins gras프랑스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

1804년, 나폴레옹은 빌뇌브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툴롱에 주둔한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빌뇌브에게 내려진 명령은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고 영국 해협을 장악하여,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을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빌뇌브는 함대를 이끌고 서인도 제도로 항해하여 영국의 해군력을 분산시키고, 그곳에서 스페인 해군브레스트에서 출항하는 프랑스 함대와 합류하도록 지시받았다. 합류 후 카리브해의 영국령을 공격하고 대서양을 건너 돌아와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한 뒤, 불로뉴쉬르메르에 대기 중인 프랑스 침공군(''Armée d'Angleterre|아르메 당글테르프랑스어'')을 잉글랜드로 상륙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3.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과 빌뇌브

1804년, 나폴레옹영국 본토 침공이라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프랑스 해군영국 해협을 장악하여 프랑스 육군의 안전한 도해를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나폴레옹은 피에르 빌뇌브 제독에게 툴롱 함대를 이끌고 영국 함대의 봉쇄를 돌파하여, 다른 프랑스 함대와 합류한 뒤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빌뇌브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805년 툴롱을 출항하여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 제도까지 항해하는 등 복잡한 기동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해전과 판단 착오를 겪으며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빌뇌브의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카디스로 후퇴했으며, 이는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이 최종적으로 좌절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3. 1. 영국 해군 봉쇄 돌파 시도

1월의 실패한 원정 이후, 빌뇌브는 1805년 3월 29일 11척의 전열함을 이끌고 툴롱을 출발했다. 그는 넬슨의 봉쇄를 피해 4월 8일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했고, 넬슨 함대가 뒤쫓아 대서양을 횡단했지만, 불리한 바람으로 인해 약 한 달 늦어졌다. 서인도 제도에서 빌뇌브는 마르티니크에서 한 달을 기다렸지만, 강토메 제독의 브레스트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빌뇌브는 프랑스 육군 장교들의 압박을 받아 영국에 대한 계획된 공격을 시작했지만, 마르티니크 앞바다에 있는 다이아몬드 록 섬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6월 7일 그는 넬슨이 앤티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6월 8일 그는 함대를 이끌고 영국 군함 바베이도스(HMS Barbados)와 슬루프 또는 스쿠너 넷리(HMS Netley)의 호위를 받으며 귀향하는 영국 상선 15척의 호송선을 요격할 수 있었다. 두 척의 영국 군함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빌뇌브의 함대는 약 500만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호송선 전체를 포획했다. 빌뇌브는 그 다음 약탈선을 프랑스 프리깃 시렌(Sirène)의 호위를 받으며 과들루프 섬으로 보냈다.[3] 6월 11일 빌뇌브는 넬슨의 추격을 받으며 유럽으로 출발했다.

7월 22일, 이제 20척의 전열함과 7척의 프리깃을 거느린 빌뇌브는 스페인 북서 해안의 피니스테레 곶을 지나 비스케이 만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그는 로버트 캘더 경 부제독이 지휘하는 15척의 영국 함대를 만났다. 악천후 속에서 혼전이 벌어진 피니스테레 곶 해전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영국군은 스페인 함선 두 척을 격리하여 나포할 수 있었다.

빌뇌브는 이틀 동안 퇴각하는 영국군을 따라갔지만,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8월 1일 아 코루냐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계획대로 브레스트불로뉴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어쩌면 비스케이 만에 더 강력한 영국 함대가 있다는 잘못된 보고를 믿었을지도 모르고, 스페인 지휘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카디스로 항해하여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3. 2. 피니스테레 곶 해전

서인도 제도에서 강토메 제독의 함대와 합류하는 데 실패한 빌뇌브는 1805년 6월 11일 유럽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3]

7월 22일, 스페인 북서 해안의 피니스테레 곶을 지나 비스케이 만으로 들어서던 빌뇌브의 함대는 로버트 캘더 경 부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와 마주쳤다. 당시 빌뇌브는 20척의 전열함과 7척의 프리깃을 보유하고 있었고, 캘더 함대는 15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악천후 속에서 벌어진 피니스테레 곶 해전은 혼란스러운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수적으로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우세했으나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선 두 척을 나포했다.

빌뇌브는 이틀 동안 후퇴하는 영국 함대를 따라갔지만,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8월 1일 아 코루냐 항구로 함대를 이끌고 후퇴했다. 아 코루냐에서 빌뇌브는 나폴레옹으로부터 계획대로 브레스트불로뉴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비스케이 만에 더 강력한 영국 함대가 있다는 잘못된 보고를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스페인 함대 사령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남쪽의 카디스로 항해했다. 이 결정은 나폴레옹이 계획했던 영국 침공 계획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3. 3. 카디스로의 후퇴와 영국 침공 계획 좌절

1805년 7월 22일, 스페인 북서부의 피니스테레 곶 근처 해상에서 빌뇌브의 함대는 칼더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와 마주쳤다. 이어진 피니스테레 곶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스페인 함선 2척을 영국 함대에 빼앗겼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빌뇌브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8월 1일, 함대는 아 코루냐 항구에 도착했다.

아 코루냐에서 빌뇌브는 나폴레옹으로부터 기존 계획대로 프랑스브레스트불로뉴로 함대를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빌뇌브는 비스케이 만에 강력한 영국 함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오보)를 믿고, 스페인 함대 사령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카디스 항구로 함대를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빌뇌브의 이러한 결정은 영국 본토 침공을 목표로 했던 나폴레옹의 원대한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트라팔가 해전

1805년 8월, 피니스테레 곶 해전 이후 빌뇌브는 아 코루냐를 거쳐 카디스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이 결정으로 나폴레옹이 계획했던 영국 본토 침공 작전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같은 해 9월,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에 나폴리를 공격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빌뇌브는 좀처럼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10월 중순, 나폴레옹이 자신을 해임하고 François Étienne de Rosily-Mesros|프랑수아 에티엔 드 로지-메스르프랑스어 제독으로 교체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빌뇌브는 새 사령관이 부임하기 전인 10월 18일, 마침내 함대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1805년 10월 21일, 카디스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가 출항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마주치면서 트라팔가 해전이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넬슨 제독은 전사했지만, 영국 함대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연합 함대의 기함이었던 Bucentaure|뷔상퇴르프랑스어는 영국 함대에 나포되었고, 빌뇌브 제독 역시 포로 신세가 되었다.

4. 1. 출항 지연과 해임 위기

1805년 8월 1일, 피니스테레 곶 해전 이후 빌뇌브는 아 코루냐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계획대로 브레스트불로뉴로 함대를 이동시키라는 나폴레옹의 지령을 받았다. 그러나 빌뇌브는 영국 함대가 비스케이 만에 있다는 잘못된 정보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스페인 함대 사령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대를 카디스로 돌렸다. 이 결정으로 인해 나폴레옹이 구상했던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은 실행 불가능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나폴레옹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에 나폴리를 공격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빌뇌브는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출항을 계속 미루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10월 중순, 빌뇌브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와 명령 불복종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으며, 자신을 해임하고 François Étienne de Rosily-Mesros|프랑수아 에티엔 드 로지-메스르프랑스어 제독으로 교체하여 파리로 소환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해군 대신에게 보낸 서신에서 "빌뇌브는 의지가 박약하여 함선을 이끌 수 없다. 결단력도 없고 정신적 용기도 부족하다"라고 평가하며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해임 위기에 몰린 빌뇌브는 새로운 사령관이 도착하기 전인 10월 18일, 마침내 함대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이는 곧 트라팔가 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4. 2. 트라팔가 해전 발발

카디스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봉쇄 작전에 갇혀 있었다. 1805년 9월, 나폴레옹은 빌뇌브에게 나폴리로 출항하여 지중해에서 영국 선박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빌뇌브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1]

10월 중순, 빌뇌브는 나폴레옹이 자신을 프랑수아 에티엔 드 로실리-메르소로 교체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파리로 소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해군 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빌뇌브는 프리깃함 하나를 지휘할 만한 강인함도 갖추지 못했다. 그는 결단력도 부족하고 도덕적 용기도 없다"고 혹평했다.[2] 자신의 교체 소식을 들은 빌뇌브는 새 사령관이 도착하기 전인 10월 18일, 출항 명령을 내렸다.[3]

하지만 미숙한 선원들과 카디스 항구의 복잡한 조건 때문에 34척의 함대가 항구를 빠져나와 전열을 갖추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4] 1805년 10월 21일, 빌뇌브는 영국 함대의 규모를 파악하고 카디스로 돌아가려 했으나, 연합 함대는 트라팔가 곶 근해에서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에게 따라잡혔다.[5] 수적으로는 영국 함대가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함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빌뇌브의 기함이었던 뷔상퇴르(Bucentaure)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와 스페인 함선들이 영국군에 나포되었고,[6] 빌뇌브 자신도 포로 신세가 되었다.[7]

5. 최후

''유리알루스''호에 탑승한 프랑스 제독, 1805년 에칭


영국은 빌뇌브를 ''유리알루스''호에 태워 잉글랜드로 보냈으나, 가석방을 조건으로 석방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햄프셔의 비숍스 월텀에서 지냈으며, 크라운 인(Crown Inn)이라는 펍에 머물렀다. 그와 함께 온 약 200명의 부하들은 지역 가옥에서 묵었다. 빌뇌브는 비숍스 월텀에 머무는 동안 넬슨 제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다. 1805년 말 석방된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군 복귀를 시도했지만,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4][5][1][6]

5. 1. 의문의 죽음

영국으로 보내졌던 빌뇌브는 가석방 상태로 햄프셔의 비숍스 월텀에서 지냈으며, 넬슨 제독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1805년 말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군 복귀는 좌절되었다.

1806년 4월 22일, 의 한 호텔(''호텔 드 라 파트리'')에서 왼쪽 폐에 다섯 군데[4](다른 기록에는 여섯 군데[5]), 심장에 한 군데 자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4] 그는 아내에게 작별 편지를 남겼다.[5]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판결되었으나,[1] 여러 자상 흔적 때문에 당시 영국 언론 등에서는 나폴레옹이 비밀리에 암살을 명령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6] 빌뇌브의 사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이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5]

6. 평가 및 유산

빌뇌브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대체로 높지 않다. 1911년 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그가 1805년 10월 카디스를 출항하여 해전에 돌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빌뇌브 자신의 지침에 비추어 보아도 정당화될 여지가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패배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출격한 이유가 해군 장관으로부터 해임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일 뿐이라며, 이는 "그가 피하려 했던 파멸을 향해 돌진한 것과 다름없다…… 허영심에 상처를 입고 발작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7]

참조

[1] 서적 Villeneuve, Pierre Charles Jean Baptiste Silvestre
[2] 웹사이트 Villeneuve, Pierre-Charles de, (1763–1806), vice-amiral http://www.napoleon.[...]
[3] 문서 'James (1837), Vol. 3, p. 351.'
[4] 서적 The French Review https://books.google[...] Hoskin & Snowden
[5] 웹사이트 Villeneuve, Pierre Charles Jean Baptiste Silvestre, Comte de https://www.oxfordre[...] Oxford Reference 2021-08-29
[6] 서적 Trafalgar: The Biography of a Battle Abacus
[7] 서적 Napoleon's Admirals, Flag Officers of the Arc de Triomphe 1789–1815 Casemate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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