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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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는 프랑크 왕국의 총독 카를 마르텔의 차남으로, 751년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다. 그는 롬바르디아를 공격하여 교황령의 기틀을 마련하고, 아키텐과 작센을 정복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또한, 도량형을 통일하고 화폐 개혁을 단행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으며,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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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며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된 인물이다.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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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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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피핀 3세 |
다른 이름 | |
별칭 | 단신왕 () |
출생일 | 714년경 |
사망일 | 768년 9월 24일 |
사망지 | 생드니, 프랑크 왕국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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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작위 | 프랑크 왕 |
재위 기간 | 751년 – 768년 9월 24일 |
이전 국왕 | 킬데리쿠스 3세 |
다음 국왕 | 샤를마뉴 카를로만 1세 |
네우스트리아 궁재 재위 기간 | 741년–751년 |
네우스트리아 궁재 이전 | 카를 마르텔 |
네우스트리아 궁재 다음 | 샤를마뉴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재위 기간 | 747년–751년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이전 | 카를로만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다음 | 왕권에 통합 |
가계 | |
왕조 | 카롤링거 왕조 |
아버지 | 카를 마르텔 |
어머니 | 로트루데 |
배우자 | 랑의 베르트라다 |
자녀 | 샤를마뉴 카를로만 1세 기셀라 |
기타 | |
로마자 표기 | Pipinus |
프랑스어 표기 | Pépin le Bref |
독일어 표기 | Pippin der Jüngere |
2. 생애
피핀은 714년 현재 벨기에령 쥐피유-쉬르-뫼즈에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과 그의 아내 클로드트루드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11] 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롬바르디아 왕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차남 피핀을 롬바르디아 왕 리우트프란트의 양자로 삼았다.[12] 744년 랑 백작의 딸인 베르트라다[13]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아들인 카를, 카를만 두 사람이 성인이 되었다.
741년 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피핀은 형 카를로만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나누어 가졌다. 카를로만은 아우스트라시아 궁재가 되었고, 피핀은 네우스트리아 궁재가 되었다.[15] 카를 마르텔의 서자 그리폰 역시 상속분을 요구했지만, 라옹에서 포위되어 항복하고 수도원에 감금되었다.[15]
743년, 피핀과 카를로만은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리히 3세를 국왕으로 옹립했다.[16] 747년 형 카를로만이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17] 피핀은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했다.[16]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에게 "왕의 칭호만 가진 자와, 왕은 아니지만 왕권을 행사하는 자 중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고, 교황은 실권을 가진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답을 내렸다.[18][19] 이를 바탕으로 751년 11월, 피핀은 수아송에서 프랑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프랑크 왕으로 선출되었고,[20] 마인츠 대주교 성 보니파시오에게 성유를 받았다.[21][22] 힐데리히 3세는 머리카락이 잘린 채 생베르탱 수도원에,[23] 왕자 테우데리크는 생-방드리유 수도원에 유폐되면서,[20]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피핀은 영토 확장을 통해 권위를 높였고, 754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로마 귀족(파트리키)으로 서임하고,[24] 파리의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를 받음으로써[20] 권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피핀은 왕위 세습을 원했고,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그의 아들 카를과 카를만에게도 성유를 했다.[20][21][22]
페팽은 왕위에 오른 후 아이술프가 이끄는 롬바르드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퐁티옹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를 만난 후, 페팽의 기증을 통해 라벤나와 펜타폴리스를 교황령으로 확정하며 교황의 세속 통치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20][25]
768년 9월 24일 네우스트리아의 생드니 서쪽에서 사망하였다.[1] 그의 사후 아들 카를과 카를로만 2세가 영토를 분할 상속했다.[1]
2. 1. 생애 초기
피핀은 714년 현재 벨기에령 쥐피유-쉬르-뫼즈(Jupille-sur-Meuse)에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과 그의 아내 클로드트루드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11] 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롬바르디아 왕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차남 피핀을 롬바르디아 왕 리우트프란트의 양자로 삼았다.[12] 744년 랑 백작의 딸인 베르트라다[13]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아들인 카를, 카를만 두 사람이 성인이 되었다.2. 1. 1. 출생과 소년 시절
피핀은 714년 1월 1일 혹은 710년경 네우스트리아 북부(벨기에 리에 주) 쥐펠-쉬르-뫼즈(Jupille-sur-Meuse)에서 프랑크의 궁재였던 카를 마르텔과 로트루디스 트레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6] 위로는 형 카를로만이 있었고, 동생으로는 베른하르트 공작이 있었으며, 아버지 카를 마르텔의 바이에른 출신 첩에게서 배다른 동생인 그리폰 등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메로빙거 왕조의 군주들은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왕국의 실권은 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갖고 있었다. 그의 별칭인 '키 작은', '짧은'은 '젊다', '작다'로 불리던 것의 오역으로서, 9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한다. 피핀과 카를로만 형제는 앵글로-색슨의 선교사 윌리브로드(Willibrord)에게 세례를 받고 파리의 생드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36] 유년 시절 피핀은 생드니 수도원에서 주로 신학 교육을 받았다.소년 시절의 그의 행적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피핀은 키는 작았지만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수완은 탁월했다.[34] 피핀의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난쟁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키가 6피트 3인치나 되는 피핀 자신의 첫 아들 샤를마뉴와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
소년 시절 피핀은 출신지와 친정 가문을 알 수 없는 여성 레우트베르가(Leutberga)와 결혼했으나 레우트베르가가 언제 사망했는지, 혹은 첩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740년을 전후하여 자신의 6촌이자, 레온의 백작 하리베르트(Caribert)의 딸 랑의 베르트라다와 결혼하였다. 왕발(Big Foot) 혹은 거위발이라는 별명이 있던 베르트라다는 마르틴 드 헤르스탈의 손녀딸로, 마르틴 드 헤르스탈은 피핀 3세의 친할아버지 피핀 2세 드 헤르스탈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베르트라다의 할머니 네우스트리아의 베르트라다는 테오도리히 3세의 딸로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리히 3세의 아내 클로틸드는 안세기셀의 딸로, 피핀 2세 데르스탈과 마르틴 드 헤르스탈의 누이였다. 랑의 베르트라다에게서 샤를마뉴, 카를로만 2세 등의 아들들과 베르타, 기셀라, 웨섹스의 에그버트 왕의 왕비들 중 한 명인 레트부르가(Redburga) 등이 태어났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랑의 베르트라다와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들이었다는 전승도 있다. 이때문에 카를로만 2세나 샤를마뉴 반대파들은 샤를마뉴를 정식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태어났다 하여 사생아로 규정하였다.
2. 1. 2.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궁재
741년 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죽자 피핀은 네우스트리아, 부르고뉴, 프로방스의 궁재직을 물려받았다. 큰 형인 카를로만은 아우스트라시아, 알레마니아, 튀링겐의 궁재였다.[36] 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임종 직전 그리폰에게도 영토를 분할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지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이복 동생 그리폰을 리에 주 체베르몽(Chèvremont) 수도원에 유폐시켰다.742년 아키텐과 알레만니아가 독립을 시도하자, 피핀은 형 카를로만 1세와 협력하여 진압했다. 같은 해 푸아티에에서 형과 영토 경계를 정했다. 743년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가 반란을 일으키자, 피핀은 바이에른을 공략하여 오딜로를 사로잡았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바이에른에서 아우스트라시아로 돌아온 피핀 3세는 형 카를로만과 함께 힐데리히 3세를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궁재직을 차지한 후 몇 년간 피핀은 형 카를로만과 함께 바이에른, 아키텐, 작센 족, 알레만니 족의 독립 운동을 진압했다. 그러나 왕국 전체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피핀은 형에게 은퇴를 종용하며 압력을 행사하였다.
742년 피핀은 자신의 친척인 테오도알트를 암살했다. 수도원에 있던 테오도알트는 피핀 2세 드 헤르스탈의 증손으로, 피핀 2세의 아들 드로고 1세의 손자이자, 아버지 카를 마르텔에 의해 축출된 테오도알트의 아들이었다. 그해에 피핀은 이복 형제 그리폰과 그의 어머니 바이에른 출신 스완힐드를 감금하였다.
744년 작센 족이 분리독립을 시도하자 형 카를로만과 함께 작센 족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형 카를로만과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746년 피핀은 군사를 이끌고 알레만니아를 다시 공략, 알레만니의 귀족들을 대량 학살한 뒤 프랑크인 귀족 바린(Warin)과 루타르드(Ruthard)를 알레만니아 공작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2. 2. 권력 장악과 국왕 즉위
741년 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피핀은 형 카를로만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나누어 가졌다. 카를로만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가 되었고, 피핀은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다.[15] 카를 마르텔의 서자 그리폰 역시 상속분을 요구했지만, 라옹에서 포위되어 항복하고 수도원에 감금되었다.[15]743년, 피핀과 카를로만은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리히 3세를 국왕으로 옹립했다.[16] 747년 형 카를로만이 수도원으로 은퇴하면서,[17] 피핀은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했다.[16]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에게 "왕의 칭호만 가진 자와, 왕은 아니지만 왕권을 행사하는 자 중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고, 교황은 실권을 가진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답을 내렸다.[18][19] 이를 바탕으로 751년 11월, 피핀은 수아송에서 프랑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프랑크 왕으로 선출되었고,[20] 마인츠 대주교 성 보니파시오에게 성유를 받았다.[21][22] 힐데리히 3세는 머리카락이 잘린 채 생베르탱 수도원에,[23] 왕자 테우데리크는 생-방드리유 수도원에 유폐되면서,[20]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피핀은 영토 확장을 통해 권위를 높였고, 754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로마 귀족(파트리키)으로 서임하고,[24] 파리의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를 받음으로써[20] 권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피핀은 왕위 세습을 원했고,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그의 아들 카를과 카를만에게도 성유를 했다.[20][21][22]
2. 2. 1. 권력 장악
피핀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고 힐데리히 3세는 국왕이었지만, 왕국의 정치, 행정은 모두 피핀에 의해 결정되었다. 힐데리히 3세는 신앙심 깊은 신학자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35] 749년 또는 750년 초, 피핀은 교황에게 대표단을 보내 메로빙거 왕조의 무능력한 정치를 종식시키고 자신을 국왕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750년 피핀은 다시 교황 자카리아에게 자신을 왕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가했다."실력이 있는 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타당하다. 로마 교황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허락하노라"
결국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해 수도원으로 보내지고, 피핀은 751년 11월 힐데리히 3세와 그 아들 테오도리히 5세를 프륌 수도원에 감금시키고, 같은 11월 수아송에서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는 형식으로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귀족들의 투표가 종결된 뒤 귀족들은 그를 렉스 프랑코룸(Rex Francorum)이라 선언하고 만세를 외쳤다.
그는 게르만 족 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국왕에 올랐다.[35]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일단 즉위의 정당성을 얻으려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야 되었기에 귀족들의 선출을 통해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어 마인츠 대주교 성 보니파시오에게 세례를 받고 대주교와 성직자들에 의해 왕으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는 종말을 고했고 피핀에 의해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가 세워졌다.
754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에게 직접 도유식을 해주어 그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시켜 주었다.[32] 당시 기대 수명이 짧았고 피핀은 가족의 계승을 원했기 때문에 교황은 피핀의 아들들인 12세의 샤를(훗날 샤를마뉴로 알려짐)과 3세의 카롤만 1세에게도 성유를 부었다.
2. 2. 2. 카롤링거 왕조 개창
피핀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고 힐데리히 3세는 국왕이었지만, 왕국의 정치, 행정은 모두 피핀에 의해 결정되었다. 힐데리히 3세는 신앙심 깊은 신학자로서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35] 749년 또는 750년 초 피핀은 교황에게 대표단을 보내 메로빙거 왕조의 무능력한 정치를 종식시키고, 자신을 국왕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750년 피핀은 다시 교황 자카리아에게 자신을 왕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허가했다.:"실력이 있는 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타당하다. 로마 교황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허락하노라"
교황 자카리아는 실력있는 자가 왕이 됨이 옳다며, 교황의 이름으로 피핀을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임명한다는 답을 내렸다. 결국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해 수도원으로 보내지고, 피핀은 751년 11월 힐데리히 3세와 그 아들 테오도리히 5세를 프륌 수도원에 감금시키고, 같은 11월 수아송에서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는 형식으로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귀족들의 투표가 종결된 뒤 귀족들은 그를 렉스 프랑코룸(Rex Francorum)이라 선언하고 만세를 외쳤다.
그는 게르만 족 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국왕에 올랐다.[35]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일단 즉위의 정당성을 얻으려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야 되었기에 귀족들의 선출을 통해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어 마인츠 대주교 성 보니파시오에게 세례를 받고 대주교와 성직자들에 의해 왕으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는 종말을 고했고 피핀에 의해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가 세워졌다.
754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에게 직접 도유식을 해주어 그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시켜 주었다.[32]
754년 2월 6일 랭스 대성당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에게 세례(기름부음 의식)를 하고 축성해주었다. 754년 7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친히 파리를 방문, 7월 28일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을 세례한 후 축성하였으며, 피핀의 두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 2세를 세례 후, 미래의 국왕으로 선언하고 축성해주었다. 이때 교황은 피핀 3세를 '''로마의 보호자'''(patricius Romanorum)로 선언하였다.
2. 3. 이탈리아 공략
페팽은 왕위에 오른 후 아이술프가 이끄는 롬바르드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퐁티옹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를 만난 후, 페팽의 기증을 통해 라벤나와 펜타폴리스를 교황령으로 확정하며 교황의 세속 통치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20][25]
752년경, 페팽은 세프티마니아로 관심을 돌려 론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 안세문드 백작의 충성을 얻은 후 동부 세프티마니아(니메스, 마겔론, 베지에, 아그드)의 항복을 받아냈다. 나르본을 공격했지만, 759년 759년에야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26]
아키텐은 와이오파르의 통치하에 프랑크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760년, 루시용을 정복한 페팽은 툴루즈와 알비로 이동하여 아키텐 대부분을 황폐화시켰고, 와이오파르에게 충성하는 백작들은 부르고뉴를 황폐화시켰다. 페팽은 부르봉, 클레르몽, 샹텔, 부르주, 투아르 등 아키텐 점령 도시와 요새를 포위 공격했고, 가스콘 군대는 패배하여 북부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763년, 페팽은 와이오파르의 영토 중심부로 진격하여 주요 요새(푸아티에, 리모주, 앙굴렘 등)를 함락시켰고, 와이오파르는 역습했으나 피핀은 테러 전술로 저항을 분쇄했다. 767년, 툴루즈시와 와이오파르의 수도 보르도가 함락되었다.
결국 아키텐 귀족들과 가스콘인들은 친프랑크 평화 조약(프롱삭, 약 768년)을 수용했고, 와이오파르는 768년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했다.
2. 3. 1. 이탈리아 공략 및 교황과의 관계
752년 초, 피피누스 3세는 군대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롬바르디아 왕국으로 진격, 알프스산맥에서 아이스톨프 왕이 이끄는 롬바르드 족과 교전했다. 고산지대의 기상 악화와 군량 부족을 극복하고 롬바르드 군을 격퇴한 피핀의 군대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펜타폴리스(Pentapolis)를 점령하여 교황에게 봉헌하였다.[20][25]교황 자카리아가 사망하고 교황이 된 스테파노 2세는 롬바르드 왕국의 아이스톨프 왕이 공격해오자 비잔티움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비잔티움 제국이 응답하지 않자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753년, 피핀은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를 폐위시키고, 외조카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한 뒤 로마로 향했다. 753년 가을, 피핀은 아이스톨프와 교전했고, 패배한 아이스톨프는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로 도주했다. 피핀의 군대는 파비아 근처까지 추격했다가 파비아 주변을 약탈, 파괴했다. 결국 아이스톨프는 라벤나와 교황이 권리를 주장하는 로마의 교황과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라벤나 땅도 교황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피핀은 아이스톨프에게 확약받고 회군했으나, 아이스톨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계속 서신을 보냈다.
754년 2월 6일,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파리로 와서 피핀을 만나 도움을 청하며, 피핀을 ‘로마인의 수호자’라는 뜻의 로마의 파트리키우스(patricius Romanorum)로 임명했다.[8] 754년 여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다시 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방문, 생드니 수도원에서 피핀과 그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를 왕과 후계자로 축성하였다.
피핀은 아버지 카를 마르텔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고자 했다.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교회 재산을 징발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세와 평민, 포로들로 병사를 조달하였다.
피핀은 왕위 승인의 대가로 754년부터 755년에 걸쳐 롬바르디아 왕국의 아이스툴푸스와 싸워 라벤나를 함락시키고 756년에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 헌납했다.[20][25] 이것은 피핀의 헌납이라고 불리며, 훗날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20]
2. 3. 2. 바이에른, 아키텐 공략
752년 초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 왕국을 공격, 알프스산맥에서 아이스톨프가 이끄는 롬바르드 족과 교전했다. 고산지대의 악천후와 식량 부족을 극복하고 롬바르드 군을 격퇴한 피핀의 군대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펜타폴리스를 점령하여 교황에게 바쳤다. 그러나 곧 이베리아반도로 진군하여 사라센과 교전, 론 계곡 동쪽 셉티마니아를 정벌하고 님과 셉티마니아 백작 안세문도를 복속시켰다. 759년까지 7년간의 교전 끝에 사라센을 몰아냈다.749년 먼 친척이자 매부인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는 분리 독립을 시도했다. 751년 아키텐의 분리독립 기도를 진압했다. 753년 바이에른에서 그리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피핀은 생 장 드 모리네에서 그리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리폰을 처형했다. 피핀은 오딜로를 축출하고 외조카 타실로 3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앉히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759년까지 피핀은 나르본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결국 무슬림들을 히스파니아로 몰아냈다. 그러나 와이오파르의 가스코뉴-아키텐은 프랑크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760년 루시용을 정복한 피핀은 툴루즈와 알비로 이동, 아키텐 대부분을 황폐화시켰고, 와이오파르에게 충성하는 백작들은 부르고뉴를 황폐화시켰다.
피핀은 부르봉, 클레르몽, 샹텔, 부르주, 투아르 등 아키텐 점령 도시와 요새를 포위, 가스콘 군대를 격파하고 북부 프랑스로 추방했다. 763년 피핀은 와이오파르 영토 중심부를 공격, 주요 요새를 함락시켰고, 와이오파르는 반격했으나 피핀은 테러 전술로 저항을 분쇄했다. 767년 툴루즈시와 와이오파르의 수도 보르도가 함락되었다.
결국 아키텐 귀족들과 가스콘인들은 친프랑크 평화 조약(프롱삭, 약 768년)을 수용했다. 와이오파르는 768년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했다.
2. 3. 3. 2차 이탈리아 공략 및 작센족 공략
752년 초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 왕국으로 진격, 알프스산맥에서 아이스톨프가 이끄는 롬바르드 족과 교전했다. 고산지대의 기상 악화와 군량미 부족을 극복하고 롬바르드 군을 격퇴한 뒤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펜타폴리스를 점령하여 교황에게 봉헌하였다.[39] 그러나 곧 이베리아반도를 진군하여 사라센과 교전, 론강 동쪽 셉티마니아를 정벌하고 님과 셉티마니아 백작 안세문도를 복속시켰다. 759년까지 7년간의 교전 끝에 사라센을 몰아냈다.[40]753년 봄에는 이탈리아로 가 파비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753년과 757년 한차례씩 작센 족을 정벌했으나, 작센 족은 형식적으로만 피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피핀은 작센 족 정벌에 전념할 수 없어 이탈리아나 아키텐으로 향해야 했기에, 종주권 확인과 환대를 받고 회군하였다.
754년 10월 14일 피핀은 롬바르드 왕국에 대표단을 보내 프랑크 왕국은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의 맏아들이라 선언하고, 롬바르드 왕국은 교황의 거처를 괴롭히는 짓을 중단하라고 포고하였다. 755년 여름 피핀은 교황과 함께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이이스툴프와 싸웠으며 롬바르드군을 물리치고 아이스톨프의 로마 공작직을 박탈하였다. 피핀은 교황에게 아이스톨프에게서 압류한 일부 땅을 바쳤고, 교회의 모든 재산과 라벤나와 펜타폴리스의 영지를 확인하고 되찾아 줄 것을 약속하였다. 756년에도 피핀은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교황과 교회를 위해 롬바르드와 싸웠다. 이때 피핀이 교황과 약속한 것을 가리켜 '''피핀의 기증'''이라고 부르며 이후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756년 피핀은 다시 이탈리아로 와 아이스톨프를 응징하고, 약속을 이행할 것을 종용하였다. 아이스톨프는 다시 라벤나 영지 봉헌 및 교황과 교회의 재산을 되돌려준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피핀은 양피지를 동원해 아이스톨프에게 서명을 강요했고 아이스톨프는 굴복하여 서명하였다. 이는 그대로 성문화되어 19세기까지 교황이 바티칸 외에도 이탈리아 중부 지역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과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가 되었다.
756년 아이스톨프는 낙마 사고로 죽고, 757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롬바르드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피핀은 서신을 보내 교황과 교회의 재산에 손대지 말 것을 명시했다.
2. 4. 생애 후반
760년 피피누스 3세는 아키텐과 셉티마니아를 공격하였다. 카를 마르텔 사후 힐데리히 3세가 폐위되자, 아키텐 공작 바이프레스는 아키텐의 독립과 자치화를 시도하며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과 동맹을 맺었다.[1] 히스파니아의 무슬림 세력을 이베리아반도 밖으로 몰아낸 피피누스 3세는 다시 아키텐을 공략했다.[1]763년 바이프레스는 무슬림 군대와 연합하여 다시 저항했고, 피피누스 3세는 푸아티에, 리모주, 앙굴렘 등을 약탈하여 황폐화시키며 보복했다.[1] 765년 아키텐을 다시 공략하여 대량 학살을 자행했고, 767년에는 보르도를 함락시키고 초토화했다.[1] 바이프레스 공작은 아키텐을 탈출했지만 부하에게 암살당했다.[1]
피피누스 3세는 아키텐을 영구히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고, 작센 정복을 준비하던 중 768년 9월 24일 네우스트리아의 생드니 서쪽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1] 그의 사후 아들 카를과 카를로만 2세가 영토를 분할 상속했다.[1]

2. 4. 1. 도량형 통일 및 표준화폐 제정
755년 7월 11일부터 7월 20일 피피누스 3세는 수학자들을 동원하여 도량형 일치를 제정하고, 각종 무게와 길이의 정리 작업 및 표준화를 진행하게 했다. 또한 즉위 초부터 화폐 개혁에 착수하여 프랑크 왕국의 각 분국마다 사용되던 화폐들을 하나로 통일, 7월 20일 통일된 데나리온 동전을 발행하고 공용 화폐로 선언하였다. 도량형 통일과 공통 화폐는 우아즈에서 처음 칙령으로 발표되어 우아즈 칙령(또는 베르-쉬르-로네뜨(Ver-sur-Launette) 칙령)이라 불린다.[1]2. 4. 2. 아키텐 정복과 최후
760년 피피누스 3세는 아키텐과 셉티마니아를 공격하였다. 카를 마르텔이 사망하고 힐데리히 3세가 폐위된 직후, 아키텐 공작 바이프레스는 아키텐의 독립과 자치화를 시도하며 이베리아반도의 무슬림과 동맹을 맺었다.[1] 히스파니아의 무슬림 세력을 이베리아반도 밖으로 몰아낸 피피누스 3세는 다시 아키텐을 공략했다.[1] 클레르몽과 부르봉 등을 함락시킨 그는 사로잡은 아키텐인과 무슬림의 아내와 자식들을 프랑크 왕국 북부 지역에 노예로 보냈다.[1] 루시용에서 이교도와 손잡았다는 이유로 아키텐 지도자들을 배교자로 단죄하고, 툴루즈와 알비 지역을 파괴했다.[1]763년 바이프레스는 무슬림 군대와 연합하여 다시 저항했고, 피피누스 3세는 보복으로 아키텐 공작령의 중심지인 푸아티에, 리모주, 앙굴렘 등을 약탈하여 황폐화시켰다.[1] 765년 아키텐을 다시 공략하여 대량 학살을 자행했고, 767년에는 보르도를 함락시키고 초토화했다.[1] 바이프레스 공작은 아키텐을 탈출했지만 부하에게 암살당했다.[1] 피피누스 3세는 아키텐을 영구히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고, 작센 정복을 준비하던 중 768년 9월 24일 네우스트리아의 생드니 서쪽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1] 그의 사후 아들 카를과 카를로만 2세가 영토를 분할 상속했다.[1]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카를 마르텔 | 680/688 ~ 741 |
어머니 | 바이에른의 로트루드 | |
형 | 카를로만 1세 | 은퇴 후 아들에게 물려주고 수도원으로 낙향 |
조카 | 드로고 2세 | 삼촌인 피핀이 수도원에 유폐시킴 |
동생 | 베른하르트 | 프랑크 공작 |
조카 | 베른하르트 | 샤를마뉴 시대의 국방대신 |
누이 | 알다(Alda) | |
매부 | 오툉의 테오도리히 4세 | |
외조카 | 기욤 드 겔론 | |
서모 | 스완힐드 | 바이에른 출신 여자 포로 |
이복 동생 | 그리폰 | ? - 753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 |
부인 | 베르트라다 | 레온의 베르타(? ~ 783), 큰 발(the Big Foot)이라는 별명, 740년 결혼 |
아들 | 카를 | 742년 – 814년 : 카를 대제가 됨 |
며느리 | 이멜트루드 | |
손자 | 피핀 4세 | 768 - 811 |
며느리 | 힐데가르트 | |
손자 | 피피노 카를로만 | 771 - 810 |
손자 | 청년 카를 | 772 - 811 |
손자 | 로타르 | 요절 |
손자 | 루트비히 1세 경건왕 | 778 - 840 |
며느리 | 파스트라다 | |
아들 | 카를로만 2세 | 750?, 751?~771년 |
며느리 | 게르베르가 | 롬바르드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딸 |
며느리 | 이름 미상 | 카를로만의 첫 부인 |
손자 | 피핀 | |
손자 | 카를 | |
아들 | 피핀 | 756년 - 761년 어려서 죽음. |
딸 | 기젤라 | 757년 – 810년, 788년 셀레스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됨. |
딸 | 베르타 | |
딸 | 로타이드(Rothaid) | 수녀가 되어 메츠의 세인트 아르눌프 수녀원에 들어갔다. |
딸 | 샤를로테(Chrothais) | |
딸 | 아델하이트 | 수녀가 되어 메츠의 세인트 아르눌프 수녀원에 들어갔다. |
딸 | 레트부르가(Redburga) | 웨식스의 에그버트의 왕비 또는 후궁 |
4. 정책
피핀 3세는 정통성이 다소 취약하여 즉위하면서 귀족들의 선거에 의한 국왕 선출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을 신뢰하지는 않았다.[36]
그는 클로디온 5세의 아들 클로도발드의 먼 후손으로, 정치적 정당성이 부족하였다. 게르만족의 왕권 사상은 신수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피핀은 신성한 종교적 의미의 왕권을 보장하는 왕가 혈통을 지니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이를 대체하기 위해 교회로부터 도유 축성을 받는 왕권을 고안해냈다.[36]
그는 클로비스 1세가 486년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것과,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침례받은 것을 근거로 하여 국왕 즉위식 때 교황 혹은 대주교급 성직자로부터 세례 후 축성받는 전통을 확립하였다.[36]
4. 1. 정복 사업
741년 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아키텐은 아키텐 공작 후놀드 1세를 중심으로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피핀은 형 카를로만과 함께 아키텐을 공략했다. 745년과 751년, 753년에 아키텐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모두 진압하였다. 759년에도 아키텐을 공략하고 나르본까지 점령했지만, 나르본은 같은 해에 다시 아랍인의 손에 빼앗겼다. 760년에 다시 아키텐과 셉티마니아를 공략했고, 767년에도 아키텐 공 바이프레스를 중심으로 분리독립을 시도하자 보르도를 점령하고 아키텐을 초토화시켰다. 그는 아키텐의 대부분 지역을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데 성공한다.[1]742년부터는 왕국 동부에 거주하던 작센 족 원정을 시도했다. 그는 일단 작센 족 부족장들을 형식적으로 그에게 복종시키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지만, 748년 작센 족은 다시 분리독립을 시도한다. 피핀은 748년에도 군사를 이끌고 작센 족을 원정하여 형식적으로 복종을 받아냈다. 하지만 작센 족은 강력히 저항하고 봉기하여 결국 병합에는 실패한다.[1]

페팽이 왕으로서 처음 한 주요 행위는 로마 공국(ducatus Romanus)으로 세력을 확장한 롬바르드 왕 아이술프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퐁티옹에서 스테판 2세 교황과 만난 후, 페팽은 롬바르드 왕에게 교회에서 빼앗은 재산을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교황청이 라벤나와 펜타폴리스를 소유하도록 확인했는데, 이른바 페팽의 기증으로 교황령이 설립되었고 교황의 세속 통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약 752년에 그는 세프티마니아로 눈을 돌렸다. 새 왕은 론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군사 원정을 떠났다. 그는 백작 안세문드의 충성을 확보한 후 동부 세프티마니아(니메스, 마겔론, 베지에, 아그드)의 항복을 받았다. 프랑크 왕은 세프티마니아의 주요 우마이야 거점인 나르본을 공격했지만, 759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로부터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무슬림들은 히스파니아로 쫓겨났다.
그러나 아키텐은 와이오파르의 가스코뉴-아키텐 통치하에 남아 프랑크의 손이 미치지 못했다. 와이오파르 공작은 교회 토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군대에 분배했을 가능성이 있다. 760년, 무슬림들로부터 루시용을 정복하고 와이오파르의 행위를 비난한 페팽은 군대를 툴루즈와 알비로 이동시켜, 아키텐 대부분을 불과 칼로 황폐화시켰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와이오파르에게 충성하는 백작들이 부르고뉴를 황폐화시켰다. 페팽은 차례로 와이오파르의 가스콘 군대가 방어하는 부르봉, 클레르몽, 샹텔, 부르주, 투아르 등의 아키텐 점령 도시와 요새들을 포위 공격했고, 가스콘 군대는 패배하여 사로잡혔으며, 그들의 아이들과 아내들과 함께 북부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763년, 페팽은 와이오파르의 영토 중심부로 더 진격하여 주요 요새(푸아티에, 리모주, 앙굴렘 등)를 함락시켰고, 이후 와이오파르가 역습하여 전쟁이 격화되었다. 페팽은 테러를 퍼뜨리기로 선택하여 빌라를 불태우고, 포도밭을 파괴하고, 수도원을 황폐화시켰다. 765년까지 잔혹한 전술이 프랑크족에게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였고, 중앙 아키텐의 저항을 분쇄하고 그 지역 전체를 황폐화시켰다. 툴루즈시는 767년 페팽에 의해 정복되었고, 와이오파르의 수도인 보르도도 함락되었다.
결과적으로 가론 강 너머의 아키텐 귀족들과 가스콘인들도 친프랑크 평화 조약(프롱삭, 약 768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와이오파르는 탈출했지만 768년 좌절한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했다.
4. 2. 내치
피핀 3세는 정통성이 다소 취약하여 즉위하면서 귀족들의 선거에 의한 국왕 선출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피핀은 귀족들을 신뢰하지 않았다.[36]피핀은 클로디온 5세의 아들 클로도발드의 먼 후손으로, 정치적 정당성이 부족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왕권 사상은 신수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피핀은 신성한 종교적 의미의 왕권을 보장하는 왕가 혈통을 지니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이를 대체하기 위해 교회로부터 도유 축성을 받는 왕권을 고안해냈다.[36]
그는 클로비스 1세가 486년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것과,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침례받은 것을 근거로 하여 국왕 즉위식 때 교황 혹은 대주교급 성직자로부터 세례 후 축성받는 전통을 확립하였다.[36]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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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 History of Early Medieval Europe: From 476–911
Routledg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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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magne
Palgrave Macmillan/University of Toront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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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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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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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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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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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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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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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7]
서적
[1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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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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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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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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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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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5]
서적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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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네덜란드
휘슬러
[32]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33]
기타
[34]
서적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라
세종서적
[35]
서적
인류 이야기
서해문집
[36]
서적
세계 교회사
바오로딸
[37]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38]
서적
세계 교회사
바오로딸
[39]
서적
세계 교회사
바오로딸
[40]
서적
초기 기독교 이야기
살림
[41]
기타
[42]
서적
아날학파의 역사세계
아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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