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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데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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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시데리우스는 756년 롬바르드 왕국의 왕이 되었으며,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지원을 받아 라치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의 권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아들 아델키스를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교황령에 도전하고 비잔틴 제국과 협상하여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으며, 샤를마뉴의 침공으로 774년 롬바르드 왕국이 멸망하고 코르비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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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데리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카에서 주조된 데시데리우스의 트레미시스 금화
루카에서 주조된 데시데리우스의 트레미시스 금화
직함랑고바르드인의 왕
통치 기간756년 – 774년
이전 통치자아이스툴프
후임 통치자샤를마뉴
왕조롬바르디아
배우자안사
자녀데시데라타
안셀페르가
아델페르가
리우트페르가
아델키스
출생720년경
사망786년
상세 정보
다른 이름데시데리우스

2. 생애와 즉위 과정

데시데리우스는 브레시아 출신으로, 원래 왕실 관리이자 토스카나 공작이었다. 756년 아이스톨프 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1] 이 때, 아이스톨프의 전임 왕이었던 라치스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 왕위를 되찾으려 했으나, 데시데리우스는 교황 스테파노 2세의 도움을 받아 신속하게 진압했다. 즉위식에서 데시데리우스는 교황령에서 빼앗은 도시들을 돌려주고 교황령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2]

757년, 데시데리우스는 중앙 이탈리아의 스폴레토 공국과 남부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공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베네벤토 공작 리우트프란트는 데시데리우스를 무시하고 그의 왕위에 도전하며 피핀 3세의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데시데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 지원을 받아 리우트프란트를 제압하고, 그의 공국을 아레키스에게 넘겼다. 같은 해, 데시데리우스는 스폴레토의 알보인을 폐위하고 스폴레토 공작의 권한을 직접 행사했다. 그는 전임 왕들처럼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의 세력을 넓히려 했으며, 교황과 남부 공국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759년 8월, 데시데리우스는 아들 아델키스를 롬바르디아의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데시데리우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기도한 후, 이전 왕들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다시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과 협상하여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교황령에 더 큰 영토 손실을 가져올 합의를 맺으려 했다. 760년경, 피핀의 사절단이 데시데리우스에게 점령한 도시들 중 일부를 교황에게 돌려주도록 설득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데시데리우스는 원래 왕실 관리였으며, 토스카나의 공작(''dux'')이었다. 756년 아이스톨프가 죽은 후 왕이 되었다.[1] 당시 아이스톨프의 전임자인 라치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 왕국을 차지하려 했지만, 데시데리우스는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지원을 받아 그의 반란을 빠르게 진압했다. 즉위식에서 데시데리우스는 교황령에 빼앗긴 많은 도시들을 복원하고 교황령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2]

757년, 데시데리우스는 중앙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와 남쪽의 베네벤토의 강력한 공국에서 자신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데시데리우스를 멸시했던 신흥 영주 리우트프란트(베네벤토 공작)가 그의 왕권을 문제 삼고 피핀 3세의 보호를 받으려 하자, 데시데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해군 지원을 받아 리우트프란트의 반항적인 행동을 종식시켰다. 이후 롬바르드 왕은 리우트프란트의 이전 공국을 그의 적의 아들인 아레키스에게 양도했다. 같은 해 데시데리우스는 스폴레토의 알보인을 폐위시키고 그곳에서 직접 공작의 권한을 행사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그의 전임자들처럼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의 권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교황에게 도전하고 남부 공국을 놓고 경쟁했다. 759년 8월, 데시데리우스는 아들 아델키스를 롬바르디아의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데시데리우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기도한 직후, "그의 전임자들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으로 돌아갔다." 그는 심지어 비잔틴 제국과 협상하여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로마의 교황령에 더 많은 영토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합의를 맺었다. 760년경, 피핀의 사절단은 데시데리우스에게 그가 점령한 도시 중 일부를 교황에게 돌려줄 것을 설득했지만, 롬바르드 왕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2. 2. 왕위 계승

브레시아에서 태어난 데시데리우스는 원래 왕실 관리였으며, 토스카나 공작이었다. 756년 아이스톨프가 죽은 후 왕이 되었다.[1] 당시 아이스톨프의 전임자인 라치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 왕국을 차지하려 했지만, 데시데리우스는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지원을 받아 그의 반란을 빠르게 진압했다. 즉위식에서 데시데리우스는 교황령에 빼앗긴 많은 도시들을 복원하고 교황령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2]

757년까지 데시데리우스는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중앙 이탈리아의 스폴레토 공국과 남쪽의 베네벤토 공국에서 자신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데시데리우스를 멸시했던 베네벤토 공작 리우트프란트가 그의 왕권을 문제 삼고 피핀 3세의 보호를 받으려 하자, 데시데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 지원을 받아 리우트프란트의 반항적인 행동을 종식시켰다. 이후 롬바르드 왕은 리우트프란트의 이전 공국을 그의 적의 아들인 아레키스에게 양도했다. 같은 해 데시데리우스는 스폴레토의 알보인을 폐위시키고 그곳에서 직접 공작의 권한을 행사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그의 전임자들처럼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의 권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교황에게 도전하고 남부 공국을 놓고 경쟁했다. 759년 8월, 데시데리우스는 아들 아델키스를 롬바르디아의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데시데리우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기도한 직후, "그의 전임자들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으로 돌아갔다. 그는 심지어 비잔틴 제국과 협상하여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로마 교황령에 더 많은 영토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합의를 맺으려 했다. 760년경, 피핀의 사절단은 데시데리우스에게 그가 점령한 도시 중 일부를 교황에게 돌려줄 것을 설득했지만, 롬바르드 왕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3. 권력 강화와 대외 관계

데시데리우스는 브레시아 출신으로 왕실 관리이자 토스카나 공작이었다. 756년 아이스톨프가 죽은 후 왕이 되었으며,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 왕국을 차지하려던 라치스를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지원을 받아 진압했다.[1][2]

757년, 데시데리우스는 중앙 이탈리아의 스폴레토 공국과 남부의 베네벤토 공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베네벤토 공작 리우트프란트가 피핀 3세의 보호를 받으려 하자, 비잔틴 제국 해군 지원을 받아 리우트프란트를 굴복시키고 아레키스에게 공국을 넘겼다. 같은 해 스폴레토의 알보인을 폐위하고 스폴레토 공작령을 직접 통치했다. 759년 8월, 아들 아델키스를 롬바르디아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로마를 방문하여 성 베드로 무덤에서 기도한 후, 데시데리우스는 이전 왕들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으로 돌아갔다. 비잔틴 제국과 협상하여 교황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고, 760년경 피핀의 사절단 설득에도 불구하고 점령한 도시를 교황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767년 교황 바오로 1세 사후, 성 비투스 수도원의 사제 필립을 교황으로 세웠으나 실패했다. 769년 8월 말에는 라벤나 대주교 교체에 군사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후보를 옹립하는 데 성공했고, 이스트리아 지방을 왕국 내 아퀼레이아 대주교 관할로 편입시키려 했다.

아이스톨프 시대에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군을 격파하고 교황청과 카롤링거 왕조 사이에 동맹을 맺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770년, 프랑크 왕 카를 1세와 데시데리우스의 딸이 결혼했다. 이는 카를 1세의 어머니 Bertrada of Laon|베르트라다영어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동맹 상대로 삼기 위해 중매를 선 것이다. 데시데리우스는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통행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771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만이 사망하면서 양국 관계는 변화했다. 카를로만의 미망인과 아들들이 데시데리우스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 데시데리우스는 이들을 이용하려 했으나, 카를 1세는 아내를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돌려보내고 힐데가르트와 결혼하여 데시데리우스의 의도를 꺾었다.

스테파노 3세 사후 하드리아노 1세가 교황이 되자, 데시데리우스는 영토 반환 약속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라벤나를 포위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773년 데시데리우스와 단교를 선언하고 카를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 1. 교황과의 관계

브레시아 출신인 데시데리우스는 원래 왕실 관리였으며, 토스카나 공작(dux)이었다. 756년 아이스톨프가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1] 당시 아이스톨프의 전임자인 라치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 왕국을 차지하려 했지만, 데시데리우스는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지원을 받아 그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즉위식에서 데시데리우스는 교황령에 빼앗긴 많은 도시들을 복원하고 교황령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2]

757년까지 데시데리우스는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중앙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와 남쪽의 베네벤토의 강력한 공국에서 자신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데시데리우스를 멸시했던 베네벤토 공작 리우트프란트가 그의 왕권을 문제 삼고 피핀 3세의 보호를 받으려 하자, 데시데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 지원을 받아 리우트프란트의 반항을 종식시켰다. 이후 롬바르드 왕은 리우트프란트의 이전 공국을 그의 적의 아들인 아레키스에게 양도했다. 같은 해 데시데리우스는 스폴레토의 알보인을 폐위시키고 그곳에서 직접 공작의 권한을 행사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전임자들처럼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 왕국의 권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교황에게 도전하고 남부 공국을 놓고 경쟁했다. 759년 8월, 데시데리우스는 아들 아델키스를 롬바르디아의 공동 왕으로 임명했다.

데시데리우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기도한 직후, "전임자들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으로 돌아갔다. 그는 심지어 비잔틴 제국과 협상하여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교황령에 더 많은 영토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합의를 맺으려 했다. 760년경, 피핀의 사절단은 데시데리우스에게 그가 점령한 도시 중 일부를 교황에게 돌려줄 것을 설득했지만, 롬바르드 왕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767년 교황 바오로 1세 사망 후 발생한 위기에 개입한 데시데리우스는 768년 7월 31일, 로마 에스퀼린 언덕에 있는 성 비투스 수도원에서 필립이라는 사제를 붙잡아 즉시 교황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대립 교황 필립은 인정받지 못했고, 상당한 추종자도 얻지 못하여 같은 날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그 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 2.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데시데리우스 이전의 아이스톨프 등이 랑고바르드 왕이었던 시대,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군을 격파하고 교황청과 카롤링거 가문 사이에 동맹을 맺었다. 그 이후 랑고바르드 왕국은 반쯤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770년, 프랑크 왕 카를 1세 (대제)와 데시데리우스의 딸이 결혼했다. 과거 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를 1세와 동생 카를로만이 왕권을 분담하고 있었으나, 카를 1세의 세력이 약해 균형이 무너지려 하자, 어머니 Bertrada of Laon|베르트라다영어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카를 1세의 동맹 상대로 삼기 위해 중매를 서서 성사된 혼인 관계였다. 데시데리우스 또한 피핀 3세 시대부터 프랑크 왕국의 군사 개입을 초래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움직였으며,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카롤링거 왕조의 왕 한두 명에게 교황청과의 관계를 중재하게 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통행권을 보장하려 했다. 실제로 카를 1세와 그의 동생 카를로만은 "로마의 파트리키우스"(patricius Romanorum)라는 칭호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카를로만은 프랑크 왕국 측에서 알프스 산맥의 교통을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의 스테파노 3세와 크리스토포루스는 반 랑고바르드 진영을 형성하기 위해 카를로만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양자 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크리스토포루스 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스테파노 3세는 데시데리우스와 손을 잡았다.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교황이 크리스토포루스를 버린다면 대규모 교황 세습령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여 스테파노 3세를 끌어들였고, 크리스토포루스를 체포하여 교황 측근인 파울루스 아타필타에게 넘겨 학살하게 했다. 이 결과 데시데리우스는 로마의 수호자(프로텍토르)가 되었고, 속은 스테파노 3세는 실의 속에 772년에 사망했다.

771년, 프랑크 왕국에서 왕권을 분담하고 있던 카를만이 사망한 것은 랑고바르드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카를만의 미망인 게르베르가와 두 아들, 그리고 몇 명의 측근들이 데시데리우스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서''에 따르면, 그들은 카를 1세에게 흡수된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로저 콜린스에 따르면, 이 카를만 가족의 주장도 교황이 프랑크 왕국을 랑고바르드 왕국과 적대시키기 위해 흘린 거짓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유족을 프랑크에 대한 정책에 이용하려 했지만, 카를 1세는 아내를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돌려보냈고, 이로써 양국 왕의 우호 관계는 끝을 고했다. 대신 카를 1세는 과거 카를만 영지였던 알레만니아의 대공 가문의 혈통을 잇는 힐데가르트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카를만 계의 정통성을 이용하려는 데시데리우스의 의도를 꺾으려 했다.

스테파노 3세가 죽은 후, 하드리아노 1세가 교황이 되자, 데시데리우스는 새 교황에게 우호 협약을 맺도록 강요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가 영토 반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데시데리우스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청과의 평화를 파기하고 라벤나를 포위했다. 이에 대항하는 하드리아노 1세는 랑고바르드-프랑크 동맹을 무너뜨리고 정치적 환경을 뒤엎으려 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를만의 유아에게 성유를 바르고, 이 아이가 카를만의 후계자라고 선언하도록 하드리아노 1세에게 강요했지만, 하드리아노 1세는 이를 거부했다. 양국을 저울질한 끝에,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와 손을 끊는 방향을 취했다. 773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공식적으로 데시데리우스와의 단교를 선언했다. 데시데리우스가 보복으로 교황령의 도시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하드리아노 1세는 카를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저항을 시도했다. 랑고바르드군이 알프스 산맥을 봉쇄했으므로, 하드리아노 1세는 바다에서 사절을 보냈다. 그들의 임무는, 카를 대제에게 자신이 교황청의 수호자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데시데리우스에게 교황령을 공격하게 하고,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모두 그의 계획 안에 있었다. 요청을 받은 카를 1세는 교황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4. 샤를마뉴와의 전쟁 및 몰락

773년 봄, 샤를마뉴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여 두 개의 프랑크군을 보냈다. 샤를마뉴가 직접 이끄는 군대는 몽생니 고개를 넘었고, 그의 삼촌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다른 군대는 그랑 생 베르나르 고개에서 아오스타 계곡으로 내려갔다. 데시데리우스는 몽생니 고개에서 샤를마뉴와 대치하며 포 평원에 들어가기 전에 요격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수도 파비아에서 농성했다. 그러나 8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파비아는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는 774년 6월에 체포되었다. 카를로만 1세의 유족과 함께 베로나에 농성했던 아달키스 또한 프랑크 군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샤를마뉴는 데시데리우스를 북프랑스의 코르비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랑고바르드 왕의 재산을 모두 빼앗았다. 결국 데시데리우스의 야망은 좌절되었고, 그는 독립 왕국으로서 역사상 마지막 랑고바르드 왕이 되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 칭호에 "랑고바르드 왕"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그는 파비아 공략 직후 발급한 증서에서 "프랑크인의 왕이자, 랑고바르드인의 왕"이라고 자칭했다. 샤를마뉴가 랑고바르드 왕(라틴어: ''rex Langobardorum'')을 칭한 사건은 게르만 제국 왕으로서 정복한 왕국의 칭호를 함께 칭하게 된 첫 번째 사례이다.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족의 세력을 근절하는 대신, 그들이 "그들의 법을 유지하는 것"을 인정하고 "반역자였던 자를 용서"했다. 이후 랑고바르드 왕(이탈리아 왕)의 칭호는 카롤링거 왕조로 계승되어 가게 된다.

4. 1.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와의 대립

피핀이 데시데리우스의 롬바르드 선임자들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에서 수행했던 이전의 군사 작전들은 성공적이었지만, 교황청(카롤링거 왕조와 동맹)과 롬바르드족 간의 그 이후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773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 왕과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었다.[1] 데시데리우스가 교황 도시를 공격하여 이에 대응하자, 하드리아노 1세는 즉시 롬바르드족에 대항하기 위한 도움을 샤를마뉴에게 요청했다.[1] 롬바르드족이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그의 사절단을 해상으로 보내야 했다. 그들은 샤를마뉴에게 그가 교황청의 보호자임을 상기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2]

원래, 샤를마뉴는 데시데리우스의 딸 데시데라타와 결혼하여 롬바르드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 간의 동맹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노 3세는 마지못해 두 왕과의 긍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지만, 772년 2월 그의 죽음과 이 관계를 훼손하려 했던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즉위는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켰다. 하드리아노 1세는 자신의 입장을 신중하게 결정하고 데시데리우스를 자극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프랑크족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그가 성좌에 대해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도움 요청을 들은 샤를마뉴는 성좌의 요청에 응했다. 카를로만 1세의 죽음 또한 상황을 변화시켰다. 샤를마뉴의 형제(카를로만)의 미망인과 그녀의 아이들이 데시데리우스에게 피신했고, 그는 - ''교황 연대기''에 따르면 - 프랑크족의 후계자를 선포하려 했다. 역사학자 로저 콜린스에 따르면, 이 주장의 진실성은 교황청이 "프랑크 왕이 롬바르드족에 대항하도록 돕기 위한 의도"로 퍼뜨린 허위 정보일 가능성이 있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771년, 프랑크 왕국에서 왕권을 분담하고 있던 카를로만 1세가 사망한 것이 랑고바르드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왜냐하면 카를만의 미망인 게르베르가와 두 아들, 그리고 몇 명의 측근들이 데시데리우스에게 의탁했기 때문이다.''교황의 서''에 따르면, 그들은 카를 1세에게 흡수된 왕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로저 콜린스에 따르면, 이 카를만 가족의 주장도 교황이 프랑크 왕국을 랑고바르드 왕국과 적대시키기 위해 흘린 거짓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유족을 대(對)프랑크 정책에 이용하려 했지만, 카를 1세는 아내를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돌려보냈고, 이로써 양국 왕의 우호 관계는 끝을 고했다. 대신 카를 1세는 과거 카를만 영지였던 알레만니아의 대공 가문의 혈통을 잇는 힐데가르트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카를만 계의 정통성을 이용하려는 데시데리우스의 의도를 꺾으려 했다.

스테파누스 3세가 죽은 후, 하드리아노 1세가 교황이 되자, 데시데리우스는 새 교황과 우호 협약을 맺도록 강요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가 영토 반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데시데리우스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청과의 평화를 파기하고 라벤나를 포위했다. 이에 대항하는 하드리아노 1세는 랑고바르드-프랑크 동맹을 무너뜨리고 정치적 환경을 뒤엎으려 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를만의 유아에게 성유를 바르고, 이 아이가 카를만의 후계자라고 선언하도록 하드리아노 1세에게 강요했지만, 하드리아노 1세는 이를 거부했다. 양국을 저울질한 끝에,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와 손을 끊는 방향을 취했다. 773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공식적으로 데시데리우스와의 단교를 선언했다.[1] 데시데리우스가 보복으로 교황령의 도시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하드리아노 1세는 카를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저항을 시도했다.[1] 랑고바르드군이 알프스 산맥을 봉쇄했으므로, 하드리아노 1세는 바다에서 사절을 보냈다. 그들의 임무는, 카를 대제에게 자신이 교황청의 수호자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2] 데시데리우스에게 교황령을 공격하게 하고,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모두 그의 계획 안에 있었다. 요청을 받은 카를 1세는 교황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4. 2. 프랑크 왕국의 침공과 롬바르드 왕국 멸망

피핀 3세가 이탈리아에서 수행했던 이전의 군사 작전들은 성공적이었지만, 교황청(카롤링거 왕조와 동맹)과 롬바르드족 간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773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 왕과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었다.[1] 데시데리우스가 교황 도시를 공격하자, 하드리아노 1세는 카롤루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 롬바르드족이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교황은 사절단을 해상으로 보내야 했다. 사절단은 샤를마뉴에게 그가 교황청의 보호자임을 상기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2]

샤를마뉴는 데시데리우스의 딸과 결혼하여 롬바르드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다. 스테파노 3세는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 간의 동맹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두 왕과의 긍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772년 스테파노 3세가 죽고 하드리아노 1세가 즉위하면서 정치적 환경이 변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를 자극하여 프랑크족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카를로만 1세의 죽음 또한 상황을 변화시켰다. 카를로만 1세의 미망인과 아이들이 데시데리우스에게 피신했고, 데시데리우스는 프랑크족의 후계자를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의 진실성은 의문시될 수 있다.

773년 봄, 샤를마뉴는 두 개의 프랑크군을 보내 8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파비아와 데시데리우스를 점령했다. 샤를마뉴는 데시데리우스를 코르비 수도원으로 유배 보냈고, "프랑크족의 왕"이자 "롬바르드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했다. 샤를마뉴가 ''rex Langobardorum''(롬바르드 왕) 칭호를 얻은 것은 게르만 왕이 정복한 왕국의 칭호를 처음으로 채택한 사건이었다. 샤를마뉴는 롬바르드족을 완전히 파괴하는 대신 그들이 "그들의 법을 유지하도록 허용하고 반역자들을 사면했다." 데시데리우스의 야망은 롬바르드 왕국의 종말을 가져왔고, 그는 기록상 마지막 롬바르드 왕이었다.

5. 가족

Desideriusla는 안사와 결혼했으며,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두었다.

이름설명
안셀페르가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수도원 수녀원장이었다.
아델페르가베네벤토의 아레키스 2세와 결혼했다.
리우트페르가바이에른의 타실로 3세와 결혼했다.
데시데라타770년 샤를마뉴와 결혼하여 771년에 파혼당했다.
게르페르가샤를마뉴의 형제 카를로만 1세와 결혼했다.
아달기스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이었다.


6. 유산 및 평가

데시데리우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아델키에서 그를 권력욕에 눈이 먼 인물로 묘사하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단테 알리기에리천국편 VI (95행)에서 데시데리우스를 신성한 교회를 물어뜯고 샤를마뉴에게 패배한 "롬바르드 치아"(또는 "뱀")라고 언급한다.

6. 1. 긍정적 유산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는 롬바르드 건축의 증거이자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름다운 수도원 교회로 데시데리우스에 의해 건설되었다.[1] 데시데리우스의 이탈리아어 이름 "Desiderio"는 영어로 "욕망"으로 직접 번역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1822년에 쓴 비극 ''아델키''에서 데시데리우스를 자신의 왕국과 유산을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파괴하는 허영심 많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의 아들 아델키(아달기스)는 아버지의 뜻과 평화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굶어 죽는다.[2]

753년부터 756년 사이에 브레시아 공작이었던 데시데리우스는 아이스투르프에게 성 살바토레 수도원 건설을 명받고 그 부지를 하사받았다. 이렇게 세워진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교회는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를 갖추고 랑고바르드 시대의 건축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으며,[1]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족: 권세의 발자취 (568-774년)의 일부로서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비극 아델키 (만초니)에서 데시데리우스는 허영심이 강하고 자신의 권력욕으로 왕국과 유산을 멸망시키는 남자로 묘사되며, 아들 아델키는 평화를 원하지만 아버지의 야망에 꺾여 굶어 죽는다.[2]

6. 2. 부정적 평가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1822년 비극 ''아델키''에서 데시데리우스를 권력욕 때문에 자신의 왕국과 유산을 파괴하는 허영심 많은 인물로 묘사한다. 그의 아들 아델키(아달기스)는 아버지의 뜻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굶어 죽는다. 만초니는 이 극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6. 3. 한국의 관점에서의 재평가

데시데리우스의 유산은 오늘날 이탈리아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을 지닌다. 롬바르드 건축의 증거이자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름다운 수도원 교회인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는 데시데리우스에 의해 건설되었다.[1] 그의 이름은 이탈리아어 "Desiderio"로, 영어로는 "욕망"으로 번역된다.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1822년에 쓴 비극 ''아델키''에서 데시데리우스를 권력욕 때문에 자신의 왕국과 유산을 파괴하는 허영심 많은 인물로 묘사했다. 그의 아들 아델키(아달기스)는 아버지의 뜻과 평화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 굶어 죽는다. 만초니는 이 극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감정을 표현했다.[2]

단테 알리기에리는 천국편 VI (95행)에서 데시데리우스를 신성한 교회를 물어뜯고 이후 샤를마뉴에게 패배한 "롬바르드 치아"(또는 "뱀")라고 언급한다.

참조

[1] 서적 Ulwencreutz's The Royal Families in Europe V https://books.google[...] Lulu.com 2013-11
[2] 서적 The Deaths of the Popes. Comprehensive Accounts Including Funerals, Burial Places and Epitaphs. McFa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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