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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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운은 후한 영제 시대의 환관으로, 장양, 조충 등과 함께 십상시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열후에 봉해졌으며, 자제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사복을 채웠다. 황건적의 난 당시 십상시 처형을 주장하는 장균을 모함하고, 여강을 모반죄로 몰아 자살하게 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189년 하진의 탄핵 상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언급되며,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하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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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제 시대 십상시 중 한 명인 곽승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리고 사리사욕을 채웠으나, 십상시의 난 때 하진 암살 시도에 연루되어 살해당했다. - 십상시 - 단규
후한 말기 십상시 중 한 명인 단규는 영제 시대 소황문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장양, 조충 등과 함께 하진 암살 모의에 가담하여 십상시의 난 당시 자살했으며, 환관 정치의 폐단을 심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 2세기 사람 - 루키아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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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운 | |
|---|---|
| 기본 정보 | |
![]() | |
| 성씨 | 힐랄아씨 (喜塔臘氏, Xǐtalā Shì) |
| 휘 | 운주 (惲珠, Yùnzhū) |
| 시호 | 효숙예황후 (孝淑睿皇后, Xiàoshū Ruì Huánghòu) |
| 존호 | 부우강태단정인수목황후 (敷佑康泰端靜仁淑穆皇后, Fūyòu kāng tài duānjìng rén shū mù huánghòu) |
| 능호 | 창릉 (昌陵, Chānglíng) |
| 신위 봉안 | 효의황후와 합사 |
| 생애 | |
| 출생 | 1760년 음력 9월 15일 |
| 사망 | 1797년 음력 2월 7일 (향년 37세) |
| 아버지 | 총관 내무부 대신 부찰 융서 (總管內務府大臣 傅察 永瑞, Zǒngguǎn nèiwùfǔ dàchén Fùchá Yǒngruì) |
| 어머니 | 계실 가라오기씨 (繼室 嘉喇覺羅氏, Jìshì Jiālājuéluō Shì) |
| 배우자 | 가경제 |
| 자녀 | 황자 옹염 (도광제) 2황녀 3황녀 |
| 가계 | |
| 조부 | 문각공 부찰 마제 (文恪公 傅察 馬齊, Wénkè gōng Fùchá Mǎqí) |
| 외조부 | 정헌공 가라오기 윤덕 (定獻公 嘉喇覺羅 尹德, Dìngxiàn gōng Jiālājuéluō Yǐndé) |
2. 생애
영제 시대에 활동했던 환관으로, 장양, 조충 등과 함께 권력을 휘두른 십상시의 한 명이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후에 봉해졌으며, 다른 십상시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일가족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등 사리사욕을 채웠다.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낭중 장균은 십상시들의 탐욕이 난의 근본 원인이라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영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동료 환관 여강이 환관 세력의 자제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하운은 조충과 공모하여 여강을 모반죄로 무고했다. 이로 인해 여강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그의 가족들 또한 재산을 몰수당했다.
189년 영제가 사망한 후, 대장군 하진이 동태후를 탄핵하는 과정에서 "고인(故人)이 된 중상시 하운과 봉서를 시켜 사리사욕을 채웠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하운이 동태후와 결탁하여 권력을 남용했으며, 189년 시점에는 이미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사망 시점이나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하휘(夏輝)'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2. 1. 십상시의 일원
후한 영제 시대에 장양, 조충 등과 함께 중상시에 임명된 12명의 환관 중 한 명이다. 이들은 이른바 십상시로 불렸으며,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모두 후에 봉해졌다. 또한, 자신들의 일가족들을 각지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낭중 장균은 난의 근본 원인이 십상시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이들을 처형하여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고 영제에게 간언했다. 그러나 영제는 오히려 십상시들을 감싸고 장균을 질책했으며, 결국 장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환관이었던 여강은 당인(黨人)들을 사면하고 환관 자제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하운은 조충과 공모하여 여강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했다. 영제의 의심을 받게 된 여강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그의 자제들 역시 무고하게 연루되어 재산을 몰수당했다.
189년 영제가 사망한 후, 외척 세력인 하태후 측과 동태후 측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대장군 하진은 동태후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동태후께서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중상시 하운(夏惲)과 봉서를 시켜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통해 하운이 동태후와 깊은 관계를 맺고 권력을 남용했으며, 189년 시점에는 이미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하휘(夏輝)'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 2.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
영제(靈帝) 시대에 장양(張讓), 조충(趙忠) 등과 함께 중상시에 임명된 12명의 환관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십상시(十常侍)로 불렸으며,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모두 후(侯)에 봉해졌다. 또한, 십상시의 일가족들은 각지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웠다.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낭중(郎中) 장균(張鈞)은 황건적의 난이 십상시들의 탐욕 때문에 발생했다며, 이들을 처형하여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고 영제에게 간언했다. 그러나 영제는 오히려 십상시를 두둔하며 장균을 꾸짖었고, 결국 장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같은 환관이었던 여강(呂強)은 당인(黨人)들을 사면하고 환관들의 자제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하운은 조충과 함께 여강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했다. 영제의 의심을 받게 된 여강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그의 자제들마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189년 영제가 세상을 떠나자 외척인 하태후(何太后) 세력과 동태후(董太后) 세력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대장군이자 하태후의 오빠인 하진(何進)은 동태후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동태후께서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중상시 하운(夏惲)과 봉서(封諝)를 시켜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통해 하운이 동태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89년 시점에는 이미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2. 3. 여강 모함 사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환관 세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낭중 장균은 십상시가 난의 원인이라며 처형을 주장했지만 영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환관 여강은 동료 환관들의 자제들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정을 촉구했다.그러나 하운은 조충과 함께 이러한 여강의 주장에 반발하여 그를 모반죄로 영제에게 무고했다. 영제의 의심을 받게 된 여강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운과 조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강의 자제들까지 무고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2. 4. 사망
189년 영제가 사망한 후 외척 세력 간의 다툼이 벌어졌을 때, 대장군 하진은 동태후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는 "동태후께서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하운(夏惲)과 봉서(封諝)를 시켜서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하운이 동태후와 깊은 관계를 맺고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189년 시점에는 이미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사망 연도나 원인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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