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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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상시는 후한 영제 시기에 권력을 장악한 환관 12명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남용하여 부패를 저질렀으며, 친족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백성을 수탈했다.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장준의 탄핵을 무마하고, 봉서와 같은 환관들이 반란과 내통하는 등 폐단을 일으켰다. 대장군 하진과의 대립 끝에 하진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원소 등의 공격으로 몰락했다. 십상시의 난은 후한 왕조의 멸망을 가속화시켰고, 이후 동탁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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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 | |
---|---|
십상시 정보 | |
유형 | 환관 집단 |
활동 시기 | 후한 영제 시대 |
주요 인물 | 장양 조충 하운 건석 단규 후람 곽승 손장 조절 정광 |
배경 | |
시대적 배경 | 후한 영제의 통치 기간 |
원인 | 영제의 무능과 환관의 권력 남용 |
구성원 | |
인원 | 10명 (주로 환관) |
특징 | 영제의 측근에서 권력을 행사 탐욕스럽고 부패한 행태를 보임 정치적 혼란을 야기 |
주요 활동 | |
권력 남용 | 관직 매매 재물 축적 정치 개입 |
폐단 | 백성들의 고통 증가 국가 재정 악화 사회 불안 심화 |
결과 및 영향 | |
황건적의 난 | 십상시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발생 |
후한 멸망의 원인 | 십상시의 정치적 혼란이 후한 멸망에 기여 |
평가 | |
부정적 평가 | 부패와 무능의 상징 후한 멸망의 주요 원인 제공 |
관련 인물 | |
영제 | 십상시의 권력 남용을 방조한 황제 |
하진 | 십상시 제거를 시도하다가 암살당함 |
원소 | 십상시를 진압하는 데 참여 |
2. 역사적 배경
장양과 조충은 한나라 황궁에서 지사성중(給事省中) 벼슬을 하며 시중을 들었다. 장양은 영천군(현재의 허창시, 허난성) 출신이고, 조충은 안평군(현재의 지저우시, 허베이성) 출신이다.[1] 이들은 환제 ( 146–168) 재위 기간 동안 소황문으로 승진했다. 159년, 조충은 150년대에 국가 권력을 독점했던 장군 양기에 대항하는 쿠데타에 참여하여 그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환제는 조충의 공을 치하하여 그를 도향후(都鄉侯)로 봉했다. 165년, 조충은 관내후(關內侯)로 승진했으며 연간 1,000''곡''의 곡식을 녹봉으로 받았다.[2]
황건적의 난에서 봉서와 같이 환관 내통자가 나오면서 환관의 세력은 다소 쇠퇴했다. 이후 외척 출신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세력과 대립했다. 하진은 영제 사후, 총신이었던 환관 견석을 살해하고 환관 세력 섬멸을 위해 군세를 모으려 했으나, 장양 등은 하태후를 이용하여 하진을 함정에 빠뜨려 살해했다. 하진 살해에 격노한 원소는 궁중에 난입하여 환관과 그 일당을 거의 살해했다. 장양과 단규는 유변과 유협을 데리고 도망쳤지만, 추격자가 다가와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189년). 유변과 유협 두 사람을 보호한 동탁이 십상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후한은 환관에 의해 정치가 농락당한 것을 반성하여, 선양을 받은 위에서는 환관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2. 1. 환관의 발호
후한서에 따르면, 환관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된 것은 환제 시대, 외척인 양기를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운 단초, 서황, 구원, 좌관, 당형 다섯 환관이 중용되어 '오후'라고 불리게 된 때이다.[32] 단초가 죽은 후, 오만해진 오후는 실각하지만, 그 후 영제 시대에도 후람, 조절, 왕보가 나타나, 당고의 금 등 여러 정쟁에서 승리하여 권세를 떨쳤다. 이때에는 여남 원씨와 같은 명문 일족에서도 원사와 같은 환관이 나오게 된다. 최종적으로 후람은 자결하고, 왕보는 형사(刑死)에 몰리지만, 조절은 181년까지 살아 천수를 누렸다.조절이 죽은 후에는 십상시라고 불리는 환관 집단이 존재했던 것이 기록상 확인되었으며, 그들은 영제의 총애를 받아 절대적인 권세를 떨쳤다. 그 중에서도 장양과 조충의 권세가 컸으며, 장양과 조충은 황제에게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렸다.
그들의 친족 대부분은 지방관으로 발탁되어, 곳곳에서 백성을 탐욕스럽게 착취했다. 십상시를 군주의 간신으로 여기고, 그 횡포에 한 왕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러한 자는 십상시에 의해 난심자로 처벌되거나 못 본 척해야 했다. 여강[32]이나 장균과 같은 양심적인 인물은 십상시의 부패를 탄핵했지만, 역시 거꾸로 처벌받았다. 반대로 환관에게 아첨하여 관직을 얻으려는 자들도 나타났다.
2. 2. 영제 시대와 십상시
영제(靈帝|영제중국어) 즉위 후, 환관 조절(181년 사망)과 왕보(179년 사망) 등이 권력을 장악했다.[3] 이들은 당고의 금 등 여러 정쟁에서 승리하며 권세를 떨쳤다. 조절 사후, 조충은 황후의 대장추(大長秋) 직책을 맡았다.[3]그 무렵 장양과 조충을 비롯하여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람(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괴(韓悝), 송전(宋典) 등 열 명의 환관이 모두 중상시(中常侍)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제후 작위도 받았다.[14] 이들을 십상시라고 불렀다. 십상시의 친척과 측근들은 한나라 제국의 여러 성과 군에 널리 퍼져 부패로 악명이 높았다.[4] 특히 장양과 조충의 권세가 컸으며, 영제는 이들을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렀다.
3. 십상시의 구성원
역사서에 따르면 후람은 172년에, 조절은 181년에 이미 죽었고, 조충은 하묘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31]
건석은 하진을 죽이려다가 들켜 곽승에게 죽었고, 봉서는 황건적과 내통했다.[31]
3. 1. 후한서에 등장하는 십상시
3. 2.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십상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십상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31]이름 | 행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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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 | 황건적 토벌 이후 하진에 의해 궁지에 몰리자 하태후에게 하소연하여 궁궐로 복귀했다. 이후 하진을 유인하여 살해했으나, 원소에게 쫓겨 장온과 함께 물에 빠져 자살한다. |
조충 | 장양과 함께 하진을 살해하고 원소에게 쫓기다가, 원술과 오광(吳匡)에게 살해당했다. |
봉서 | 십상시 중 서열이 낮았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 황건적과 내통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
단규 | 하진 사후 원소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오자, 소제와 진류왕을 납치해 달아났다가 민공에게 살해당했다. |
조절 | 장양과 조충이 대두하기 이전에 왕보와 함께 권세를 떨친 환관이다. |
후람 | 장양과 조충이 대두하기 이전에 왕보와 함께 권세를 떨친 환관이다. |
건석 | 하진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곽승에게 살해당했다. |
정광 | 원술과 오광에게 살해당했다. |
하운 | 원술과 오광에게 살해당했다. |
곽승 | 원술과 오광에게 살해당했다. |
역사서에 따르면 후람은 172년에, 조절은 181년에 이미 죽었고, 조충은 하묘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또한 하묘도 환관 세력을 격파하는데 일조하였는데, 소설에서는 그것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정광은 허구의 인물이며, 봉서와 견석은 역사적으로 존재했지만, 후한서에는 십상시에 포함되지 않았다.
4. 십상시의 전횡과 폐단
영제 재위 기간(168년~189년) 동안 조충과 장양은 중상시(中常侍) 자리에 올라 황제로부터 제후 작위를 받았다. 이들은 조절과 왕보의 측근이었다. 조절이 사망한 후 조충은 황후의 대장추(大長秋) 직책을 맡았다.[3] 장양과 조충을 비롯하여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람(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괴(韓悝), 송전(宋典) 등 열 명이 모두 중상시 직책과 제후 작위를 받았다.[14] 이들의 친척과 측근들은 한나라 제국 여러 성과 군에 퍼져 부패로 악명이 높았다.[4]
장양은 필람에게 낙양 궁궐 근처에 물을 공급하도록 지시했고, 필람은 안문(安門) 밖에 연쇄 펌프와 흡입 펌프를 설치했다.[5]
『후한서』에 따르면, 환관이 본격적으로 정치 권력을 갖게 된 것은 환제 시대 외척 양기를 배척하는데 공을 세운 단초, 서황, 구원, 좌관, 당형 등 다섯 환관이 중용되어 '오후'라고 불린 때이다. 단초 사후 오후는 실각했지만, 영제 시대에도 후람, 조절, 왕보가 나타나 당고의 금 등 여러 정쟁에서 승리하여 권세를 떨쳤다. 여남 원씨 같은 명문가에서도 원사 같은 환관이 나왔다. 후람은 자결, 왕보는 형사(刑死)되었지만, 조절은 181년까지 살아남았다.
십상시 친족 대부분은 지방관으로 발탁되어 백성을 탐욕스럽게 착취했다. 십상시를 군주의 간신으로 여기고 그 횡포에 한 왕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자도 있었지만, 십상시에 의해 처벌되거나 못 본 척해야 했다. 여강[32]이나 장균 같은 양심적인 인물은 십상시의 부패를 탄핵했지만, 거꾸로 처벌받았다.
4. 1.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
장양과 조충을 비롯한 십상시는 영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들은 관직을 매매하고, 뇌물을 수수하며, 백성들을 수탈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14]맹타(孟佗)가 량주(涼州)자사(刺史)가 된 사례는 십상시의 부정부패를 잘 보여준다. 맹타는 장양의 집사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뇌물로 바쳤고, 그 대가로 장양의 환심을 사 량주자사라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11]
십상시는 황제의 눈을 가리고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 영제가 영안궁대(永安宮臺)라는 높은 전망대에 오르려 하자, 십상시는 자신들의 호화로운 저택이 발각될까 두려워 "폐하께서 더 높은 곳에 오르시면 백성들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여 황제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다.[15]
185년 황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십상시는 영제에게 궁궐 재건 비용 마련을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걷을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건축 자재를 운반하는 관리들에게 낮은 가격을 강요하고, 자재를 재판매하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건설 공사는 지연되고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커졌다.[12]
4. 2. 사치와 향락
영제는 "상시 장(장양)은 나의 아버지이고, 상시 조(충)은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십상시를 신임했다.[13][14] 이들은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법을 어기며 권력을 남용했고, 심지어 황궁과 같은 디자인으로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15] 영제가 높은 전망대에 오르려 하자, 십상시는 자신들의 저택을 보고 의심할까 봐 "폐하께서 더 높은 곳에 오르시면 백성들이 흩어질 것입니다."라며 황제를 속이고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15]185년, 황궁 남부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십상시는 영제에게 궁궐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경작지 1무당 10마의 세금을 징수할 것을 제안했다.[12] 또한 태원(太原), 하동(河東), 적도(狄道) 군의 관리들에게 건축 자재를 낙양으로 운송하도록 명령했다. 환관들은 운송된 자재의 품질이 낮다는 핑계로 시세의 10분의 1 가격으로 헐값에 사들인 후, 다른 환관들에게 되팔았지만, 그들은 사기를 거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있던 목재는 부패했고, 건설 공사는 수년 동안 지연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방 관료들은 영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더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고 더 많은 양의 건축 자재를 생산하도록 강요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12]
186년, 영제는 환관들에게 새로운 궁궐, 거대한 청동상과 종, 물을 뿜는 동물 조각상 등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를 감독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도록 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를 황제의 사치스러운 행위로 인식하고 동전이 결국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조짐으로 보았다.[16]
4. 3. 황건적의 난과의 관계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십상시의 전횡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관료 장균은 상주문을 올려 십상시와 그 친척, 관련자들이 부패를 저질러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영제에게 십상시를 처형하고 한나라 전역에 이를 알려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우라고 촉구했다.[6]영제가 환관들에게 이 상소문을 보여주자 그들은 관과 신을 벗고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투옥시켜 달라고 간청하며, 반란 진압을 위한 군자금으로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황제는 그들에게 관과 신을 쓰게 하고 이전처럼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장준을 꾸짖기를, "네가 미쳤구나! 십상시 중에 좋은 자가 없다는 말이냐?"[7]라고 하였다. 장준은 이전과 비슷한 내용의 상소문을 다시 올렸지만, 이 상소문은 영제의 책상에 전달되지 못했다.[8]
영제는 나중에 사법부 장관(廷尉)과 어사(御史)에게 장각과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그의 태평도(太平道)를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장양과 환관들은 비밀리에 조사관들에게 장준이 태평도의 가르침을 배운 죄를 씌우도록 지시했고, 장준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결국 옥사했다.[9]
환관들 스스로는 사실 비밀리에 장각과 접촉하거나 협력하고 있었다. 환관 봉서와 서봉(徐奉) 두 명이 체포되어 처형된 후, 격노한 영제는 환관들을 꾸짖었다. "너희는 자주 관리들이 좋지 않다고 말했지. 그들 중 일부는 투옥되었고 다른 일부는 처형되었다. 이제 그들은 제국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너희는 장각과 함께 일하고 있다니, 누구를 처형해야 하겠는가?" 환관들은 용서를 구하며 그 책임을 왕보와 후람에게 돌렸다. 영제는 그들을 풀어주었다.[10]
여강[32]과 같은 양심적인 인물은, 십상시의 부패를 탄핵했지만, 역시 거꾸로 처벌받았다.
5. 십상시의 난과 몰락
후한 말, 황건적의 난 등으로 환관 세력은 다소 약해졌지만, 십상시라 불리는 환관 집단은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32] 이들은 자신들의 친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백성들을 착취했고, 이에 대한 비판은 묵살되거나 처벌받았다.
황건적의 난 이후, 외척 출신 대장군 하진은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세력과 대립했다. 하진은 영제 사후 환관 건석을 제거하고 환관 세력을 없애려 했으나, 장양 등은 하태후를 이용하여 하진을 함정에 빠뜨려 살해했다.
하진의 죽음에 분노한 원소는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환관들을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27] 장양과 단규 등은 유변과 유협을 데리고 도망쳤으나, 추격해 온 민공에게 따라잡히자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28][29][30]
이후 유변과 유협 두 황제를 보호한 동탁이 십상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위나라에서는 환관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정치를 하여 후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5. 1. 하진과의 대립
하진은 영제 사후, 총신이었던 환관 건석을 살해하고 환관 세력을 없애려 했다. 이를 위해 군사를 모으려 했으나, 장양 등은 하태후를 이용하여 하진을 함정에 빠뜨려 살해했다.[25]189년 9월경, 환관들은 하진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하태후의 이름으로 가짜 조서를 발행해 하진에게 태후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189년 9월 22일,[18] 하진은 매복에 빠져 환관들에게 살해되었고, 환관들은 그를 반역죄로 고발했다.[25]
5. 2. 십상시의 난 발생
189년 영제가 위독해지자, 그는 어린 아들 유협을 측근 환관 건석에게 은밀히 맡겼다. 황제가 죽자 건석은 유협을 황위에 앉히려 했으나 계획은 실패했다. 영제의 큰아들, 13세의 유변이 대신 황제가 되었고 소제라고 알려졌다. 하태후 (소제의 어머니)와 대장군 하진 (하태후의 오빠)은 미성년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19][20]189년 여름, 건석은 하진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료 환관들에게 하진을 암살하는 계획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태후 측근인 곽승의 설득으로 건석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진은 이후 건석을 체포하여 처형했고, 건석의 지휘 하에 있던 군대를 장악했다.[21] 189년 가을, 원소는 하진에게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하태후는 매일 남성과 정기적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점에 불쾌감을 느껴 즉시 그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와 하묘는 환관들의 보호를 위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하진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며, 환관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말했다. (하태후는 환관들의 도움으로 영제의 후궁이 되었다.)[22]
하진은 이후 원소의 다른 제안을 따랐다. 그는 몇몇 지방의 군사 관리나 군벌 (동탁, 왕광, 교모, 정원)에게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 근처로 가서 환관을 처형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도록 은밀히 지시했다. 이는 하태후가 환관에 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하태후는 처음에는 환관을 해치는 것을 거부했지만, 동탁의 군대가 낙양에 접근하자 환관들에게 궁궐을 떠나 봉읍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많은 환관들이 영제에 의해 제후로 임명되었다.)[23] 장양의 양자는 하태후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장양은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어머니 (무양군)에게 말했고, 그녀는 하태후에게 말했다. 태후는 마음을 풀고 환관들을 궁궐로 다시 불렀다.[24]
189년 9월경, 환관들은 하진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하태후의 이름으로 가짜 조서를 발행하여 하진에게 태후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189년 9월 22일,[18] 하진은 매복에 빠져 환관들에게 살해당했으며, 환관들은 그를 반역죄로 선언했다.[25] 하진이 죽은 후, 그의 부하 오광과 장장이 원소, 원술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습격하여 복수를 위해 환관들을 죽였다. 그들은 환관처럼 보이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일부 젊은 남자는 수염이 없어 필사적으로 바지를 내려 군인들 앞에서 자신이 환관이 아님을 증명했다. 공격 중에 환관들은 하태후, 소제, 진류왕 (유협)을 인질로 잡고 황하를 따라 장안으로 도주하려 했다. 노식은 환관 단규를 가로막아 태후를 그에게서 구출했다.[26] 환관에게 동정심을 가진 하묘는 오광과 동탁의 동생 동민에게 살해당했다. 2,000명 이상이 이 공격으로 사망했다.[27]
장양과 다른 10명 정도의 환관들은 소제와 진류왕을 강가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고, 노식과 민공이 이끄는 황실 군대가 그들을 쫓았다. 장양은 소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멸망할 것이고 제국에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폐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강에 몸을 던져 익사했다.[28][29][30]
5. 3. 동탁의 집권과 후한의 쇠퇴
십상시의 난은 189년 9월 22일(음력 8월 25일)에 십상시에 의해 발생하여 2000명에 달하는 환관과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이용하여 동탁이 권력을 잡았고, 대장군 하진이 죽었다.[18]하진이 죽은 후, 그의 부하 오광과 장장은 원소, 원술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습격하여 환관들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27] 장양을 비롯한 십상시들은 소제와 진류왕을 데리고 강가로 도망쳤으나, 노식과 민공이 이끄는 황실 군대에 쫓기게 되었다. 장양은 소제에게 "우리는 망할 것이고 제국에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폐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라고 말한 뒤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28][29][30]
이후 소제와 진류왕을 보호한 동탁이 십상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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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in pump
https://www.rober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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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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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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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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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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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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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9]
후한서
[20]
후한서
[21]
후한서
[22]
후한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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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unuchs and Castrati: A Cultural History
Markus Weiner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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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ree Kingdoms: A Historical Novel
Foreign Language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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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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