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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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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1세는 876년경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아들로 태어나 936년 사망한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이다. 91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센 공작이 되었으며, 919년 프랑켄과 작센 귀족들에게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영토를 확장했고, 925년에는 로타링기아를 재병합했다. 하인리히 1세는 '조류 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그의 업적을 이어받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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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925년 3월 30일 문서에 있는 하인리히의 인장
925년 3월 30일 문서에 있는 하인리히의 인장. 창과 방패를 든 전사로 묘사되어 있다. 단어는 (하인리히 왕).
이름하인리히 1세
독일어 이름Heinrich der Vogler (하인리히 데어 포글러)
다른 독일어 이름Heinrich der Finkler (하인리히 데어 핑클러)
라틴어 이름Henricus Auceps (헨리쿠스 아우켑스)
출생876년경 7월 7일
출생지동프랑크 왕국, 메멜레벤
사망936년 7월 2일 (59세 ~ 60세)
사망지동프랑크 왕국, 메멜레벤
매장지퀘들린부르크 수도원
통치 정보
작위동프랑크 왕국의 왕
재위 기간919년 5월 24일경 – 936년 7월 2일
즉위919년 5월 24일경
이전 통치자콘라트 1세
다음 통치자오토 1세 (신성 로마 황제)
가문
왕가오토 왕조
종류왕조
아버지오토 1세 (작센 공작)
어머니헤드비가
배우자
배우자하테부르크 폰 메르제부르크
마틸데 폰 링겔하임
자녀
자녀탱크마르
하트비히 폰 작센
오토 1세 (신성 로마 황제)
프랑스의 왕비 게르베르가
하인리히 1세 (바이에른 공작)
브루노 (쾰른 대주교)
종교
종교칼케돈 기독교

2. 생애

912년 11월 30일 아버지 오토가 사망하여 작센 공작위를 계승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지인 작센의 도시를 정비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으나, 주변의 프랑켄 공작령과 자주 충돌하였다.[3] 918년 12월 23일 프랑켄 공작이자 동프랑크의 왕 콘라두스 1세가 사망하였다. 아들이 없던 콘라트 1세는 자신의 동생 대신 하인리히를 차기 국왕으로 내정하고 사망했다.[3]

919년 5월 6일,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 회의에서 하인리히는 정식으로 왕위에 추대되었다. 이때 그를 선출한 제후들은 선제후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왕을 선출하거나 형식적으로 선출할 때 선제후들이 참여하도록 정착되었다.[36] 볼테르는 그가 즉위하기 전 자신의 손에 올라온 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새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인리히는 마인츠대주교로부터 세례와 기름부음 의식을 받을 것을 권고받았지만, 이를 가치 없는 짓이라며 거절했다.[37][38] 그는 자신의 조상과 신들 앞에서 왕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슈바벤의 부르크하르트 2세는 곧 하인리히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921년까지 두 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굴복했다. 하인리히는 아르눌프에게 자치권과 자신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권리를 승인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지었다. 프랑크 족 역시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920년 부활절, 하인리히 1세는 풀다 수도원을 방문하여 자신이 독일인 왕 루트비히와 콘라두스 1세의 합법적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통치권이 미약했고, 스스로도 왕국을 공국과 제후들의 연맹체 또는 연합체 정도로 인식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귀족들과 갈등하였고, 마자르 족의 침략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는 샤를마뉴처럼 관료를 파견하여 지방과 제후들을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바이에른 공국 등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승인하였다. 그는 종교적으로 수도원과 교회의 설립을 장려했지만, 수도원과 교회의 공적 기능 행사를 억제하려 하였다.

독일 왕관을 새 그물을 고치는 동안 하인리히에게 바치는 전설, 헤르만 포겔 그림


퀘들린부르크에 있는 ''핀켄헤르트''(방울새 덫), 1530년경 왕이 새를 잡던 전설적인 장소에 건설됨

2. 1. 초기 생애와 가계

하인리히 1세는 873년 또는 876년에 작센안할트 주의 멤레벤에서 오토 1세와 프랑켄의 헤드비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머니 인겔트루데는 루트비히 1세의 외손녀이며, 모계로 샤를마뉴의 증손녀였다.

그는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아들이자 리우돌프의 손자였다. 어머니 헤드비가는 프랑켄의 하인리히 1세와 프리울리의 헤드비가의 딸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외손녀이자 대머리 카를 2세의 외조카였다.

아버지 오토 일루트로스는 샤를마뉴에게 저항한 작센 공작 비두킨트 이후 몇 대 뒤 작센의 공작이 되었다. 하인리히와 비두킨트의 정확한 촌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인리히 1세의 가문은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고모 리우트가르트는 루트비히 청년왕의 왕비였다가 루트비히 사후 부르하르트 1세와 재혼했다. 누이 오타는 아르눌프 폰 케른텐의 서자 츠벤티볼트와 결혼했다가 츠벤티볼트 사후 제라르와 재혼하였다.

906년 하인리히는 에르빈의 딸 하테부르크 폰 메르게부르크와 결혼하여 아들 탕크마르[35]를 얻었지만, 하테부르크가 수녀였다는 이유로 909년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909년 하인리히 1세는 테오도리히의 딸 마틸다 폰 링겔하임과 재혼하였다. 마틸다는 로마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마틸다는 비두킨트의 5대손으로, 이 결혼으로 하인리히는 작센 서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마틸다는 오토 1세, 바이에른 백작 하인리히 1세, 게르베르가, 헤드비가 등을 낳았다. 게르베르가는 기셀베르트와 결혼했다가 루이 4세와 재혼했다. 헤드비가는 위그 르 그랑과 결혼하여 위그 카페를 낳았다. 마틸다는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을 설립했고, 이곳에 마틸다와 하인리히가 매장되었다.

912년11월 30일 부친 오토가 사망하여 작센 공작위를 계승했다.

하인리히 1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오토 1세작센 공작
어머니프랑켄의 헤드비가바벤베르크 가문 출신, 하인리히 폰 프랑코니아의 딸
첫 번째 부인하테부르크 폰 메르게부르크906년 결혼, 909년 무효화, 탕크마르 출산
두 번째 부인마틸다 폰 링겔하임909년 재혼, 오토 1세, 바이에른 백작 하인리히 1세, 게르베르가, 헤드비가 등 출산


2. 2. 작센 공작 (912년 ~ 919년)

912년 11월 30일 아버지 오토가 죽자 하인리히는 작센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작센의 도시를 정비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주변의 프랑켄 공작령과 자주 충돌하였다.[3] 아버지 오토가 소유하던 클로스터 평신도 수도원의 원장직을 이으려 했지만, 이 직책은 913년 2월 8일콘라두스 1세가 가져갔다.[3]

918년 12월 23일 프랑켄 공작이자 동프랑크의 왕 콘라두스 1세가 사망하였다. 하인리히는 912년~915년 콘라두스 1세와 튀링겐 땅을 차지하는 일을 놓고 경쟁하다가 두 번 전쟁을 하였으나, 마지막에는 콘라두스 1세와 화해했다. 아들이 없던 콘라두스 1세는 자신의 동생 대신 하인리히를 차기 국왕으로 내정하고 사망했다.[3]

하인리히는 912년 부친의 사망으로 작센 공작이 되었다. 유능한 통치자였던 그는 쇠퇴해가는 동프랑크 왕국 내에서 자신의 공작령의 지위를 강화했으며, 남쪽의 프랑켄 공작령에 있는 이웃들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4]

2. 3. 독일 왕 즉위 (919년)

919년 5월 6일,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 회의에서 하인리히는 정식으로 왕위에 추대되었다. 이때 그를 선출한 제후들은 선제후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왕을 선출하거나 형식적으로 선출할 때 선제후들이 참여하도록 정착되었다.[36] 볼테르는 그가 즉위하기 전 자신의 손에 올라온 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새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인리히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이 아니었다. 그의 고모는 소 루트비히의 왕비였고, 누나는 로타링기아의 왕 츠벤티볼트의 왕비였다.[36] 그는 마인츠대주교로부터 세례와 기름부음 의식을 받을 것을 권고받았지만, 이를 가치 없는 짓이라며 거절했다.[37][38] 그는 자신의 조상과 신들 앞에서 왕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프리츨라어 회의에서는 작센과 프랑켄 귀족들만이 찬성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 귀족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특히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대머리와는 921년까지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하인리히는 라티스본을 아르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아르눌프는 이를 거절했다. 919년 일부 귀족들은 아르눌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후 두 차례의 전쟁 끝에 921년 바이에른을 격파하여 승리했다. 아르눌프는 자치권과 자신의 얼굴을 새긴 동전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권리를 요구했고, 하인리히 1세는 이를 승인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슈바벤의 부크하르트 2세도 하인리히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계속 반발하였고, 하인리히 1세는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부크하르트 2세가 죽자 하인리히는 다른 귀족을 슈바벤 공작에 임명한다. 프랑크 족 역시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귀족들과의 불화는 그의 즉위 정당성과 왕국의 안정에 위협적이었고, 마자르 족의 침략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920년대 내내 하인리히는 마자르 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콘라두스 1세가 아들이 없어 하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슈바벤, 바이에른 귀족들은 그에게 반발했고 한동안 무정부 상태였다. 그는 바이에른 등 일부 지역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재위 기간 내내 불안정했다. 즉위 직후 바이에른 공국과 전쟁을 벌였고, 하인리히는 자신이 주교를 임명할 능력이 있는 것을 들어 우위를 선점하려 했다. 바이에른 공작의 일부 권한을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료시켰지만, 끝내 바이에른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무력으로 바이에른을 점령하였다.

920년 부활절, 하인리히 1세는 풀다 수도원을 방문하여 자신이 독일인 왕 루트비히와 콘라두스 1세의 합법적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통치권이 미약했고, 스스로도 왕국을 공국과 제후들의 연맹체 또는 연합체 정도로 인식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귀족들과 갈등하였다. 하인리히는 샤를마뉴처럼 관료를 파견하여 지방과 제후들을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바이에른 공국 등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승인하였다. 그는 종교적으로 수도원과 교회의 설립을 장려했지만, 수도원과 교회의 공적 기능 행사를 억제하려 하였다.

하인리히는 912년 부친의 사망으로 작센 공작이 되었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 내에서 자신의 공작령 지위를 강화했으며, 남쪽의 프랑켄 공작령 이웃들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918년 12월 23일 콘라트 1세가 사망했다. 하인리히는 912년에서 915년 사이에 튀링겐 영토를 놓고 콘라트 1세에 반기를 들었지만, 콘라트는 하인리히를 자신의 후계자로 추천했다. 왕위는 프랑크족에서 작센족으로 넘어갔는데, 작센족은 샤를마뉴의 정복 기간 동안 큰 고통을 겪었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작센족 출신인 하인리히는 왕위에 오른 최초의 비 프랑크족이었다.

콘라트의 선택은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콘라트의 형제인 프랑켄의 에버하르트 3세 공작에 의해 전달되었다. 프랑켄과 작센 귀족들이 모여 다른 지역 공작들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했다. 마인츠 대주교 헤리거는 통상적인 의식에 따라 하인리히에게 도유를 하려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이는 교회가 아닌 백성의 환호로 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프리츨라어에서 작센족과 프랑켄족에 의해 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는 다른 공작들을 제압해야 했다.

슈바벤의 부르하르트 2세 공작은 곧 새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가 죽자 하인리히는 프랑켄 출신 귀족을 새로운 공작으로 임명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은 왕과 같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문서에서도 그렇게 불릴 정도로 인상적인 영토를 다스렸는데, 그를 굴복시키기는 훨씬 더 어려웠다. 그는 921년 하인리히가 두 차례의 원정에서 그를 물리칠 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에 관한 단편 (de)"에서, 저자는 하인리히의 주장이 바이에른에서 야기한 당혹감에 대한 매우 생생한 인상을 준다. 이 조각은 한 구절로 갑작스럽게 시작한다. 하인리히 1세(''작소 헤이르쿠스'')가 이름 없는 주교의 조언에 따라 적대적인 방식으로 바이에른 왕국(''레그넘 바이오리아'')을 침략했다고 말한다. 바이에른이 하인리히의 조상 중 어느 누구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영토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침해의 불법성을 암시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Dei nutu)에 따라 그가 이 첫 번째 원정에서 패배한 이유였다. 하인리히가 바이에른, 그리고 아르눌프를 상대로 여러 차례 원정을 벌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장에서, 알려지지 않은 연대기 작가는 하인리히의 전임자인 콘라트 1세 역시 불법적이고 적대적인(non regaliter, sed hostiliter) 방식으로 바이에른을 침략했음을 암시한다. 콘라트는 그 땅을 약탈하고 살해하고 약탈하여 많은 아이들을 고아(orphanos)로 만들고 여자들을 과부(viduas)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작의 거처인 레겐스부르크는 불태워지고 약탈당했다. 콘라트가 이 모든 범죄(peccatis)를 저지른 후, 신의 섭리(divino nutu)가 그를 철수하도록 강요했다고 보고한다. 그 이유는 언급되지 않았다. 마지막 부분은 영광스러운 지도자(gloriosus dux)로 묘사된 아르눌프 공작에 대한 찬사로, 하늘(ex alto)로부터 모든 종류의 덕, 용기 및 역동성을 부여받았다. 그는 혼자서 자신의 백성을 작센족의 재앙(de sevienti gladio paganorum)으로부터 구원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되돌려주었다. 바이에른 공작에 대한 이 찬사는 그 시대에는 비할 데가 없으며, 해체로 인해 위협받는 동프랑크 왕국의 남동부에서 그의 권력 위치를 강조하며, "아르눌프는 ... 그의 시대의 희소한 역사 기록에서, 하인리히 왕과 같은 반향을 거의 발견했다."

하인리히는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아르눌프의 거처를 포위하고 공작을 항복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919년 바이에른의 왕으로 스스로 즉위했지만, 921년 왕관을 포기하고 하인리히에게 굴복하면서 상당한 자치권과 자체 주화를 주조할 권리를 유지했다.

당시 왕은 ''primus inter pares (동등한 사람들 중 으뜸)''으로 여겨졌다. 왕과 제후들은 함께 정책을 수립했으며, 군주의 위치는 점진적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 오토 대제와 후대의 군주들 아래서도 합의 구축은 중요하게 유지될 것이다.[3][4] 하인리히 1세는 919년에 즉위식을 거행했지만, 고위 성직자(마인츠 대주교 헤리거)에 의한 성유(Anointing)를 거부했다.[13][14] 즉위식에서의 성유는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 (소 피핀)의 즉위식 이후의 전통으로,[16] 지상에서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의 상징적인 행위로 여겨져 왔다. 하인리히 이후의 왕들은 즉위식에서 성유를 받았는데, 그가 유일하게 왜 받지 않았는지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17]

하인리히의 국왕 즉위에 대해, 슈바벤과 바이에른 양 부족은 국왕 선출에 참여하지 않았다.[13][14] 그뿐만 아니라 바이에른에서는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대립왕으로 선출했다.[18] 하인리히는 먼저 919년에 슈바벤 공작부르크하르트 2세로부터 싸우지 않고 신종의 맹세를 얻어냈고,[19], 다음으로 921년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굴복시켜 양쪽으로부터 국왕으로 승인을 받았다.[14][20]

  • 919년 국왕 즉위.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2세를 굴복시킴.
  • 921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굴복시킴.

3. 통치와 업적

하인리히 1세는 91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작센 공작이 되었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 내에서 자신의 공작령 지위를 강화했으며, 남쪽의 프랑켄 공작령의 이웃들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918년 콘라트 1세가 사망하면서 왕위는 작센족에게 넘어갔고, 하인리히는 왕위에 오른 최초의 비 프랑크족 출신이 되었다.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는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도유 의식은 거절했다. 그는 다른 공작들을 제압해야 했으며, 슈바벤의 부르하르트 2세는 곧 충성을 맹세했지만,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921년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1세는 부르군트 왕 루돌프 2세에게 바젤 주변 영토를 받는 대신 성창을 양도받았다.[21][31] 이 성창은 이후 역대 국왕들에게 계승되어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고, 현재 호프부르크 왕궁의 보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인리히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이 성창을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부르는 영보(靈寶)로 사용했다.[33]

하인리히 1세의 주요 통치 및 업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시기내용
912년부친 사망, 작센 공작위를 계승.
915년국왕 콘라트 1세와 화의 성립.
919년국왕 즉위.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2세를 굴복시킴.
921년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굴복시킴. 서프랑크 왕 샤를 3세로부터 동프랑크 왕으로 승인받음.
925년로트링겐을 동프랑크 왕국으로 되찾음.
926년마자르족과 휴전 협정 체결. 부르군트 왕 루돌프 2세로부터 성창을 양도받음.
928년슬라브인의 도시 브란덴부르크를 공략.
929년왕위 계승에 관한 왕령 발포, 분할 상속을 금지. 마이센에 성을 축조. 보헤미아 침공, 바츨라프 1세에게 종주권을 인정받음.
933년리데 전투.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마자르족에게 승리.
934년유틀란트 반도에서 데인족에게 승리.
935년왕국 회의에서 차남 오토를 다음 왕으로 지명.
936년사망


3. 1. 국내 통치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프랑켄과 작센 귀족들은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했다. 마인츠 대주교 헤리거가 도유하려 했으나, 하인리히는 교회가 아닌 백성의 환호로 왕이 되고 싶다며 거절했다.[3]

슈바벤의 부르하르트 2세 공작은 곧 새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가 죽자 하인리히는 프랑켄 출신 귀족을 새로운 공작으로 임명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은 921년 하인리히가 두 차례의 원정에서 그를 물리칠 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3] 하인리히는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아르눌프의 거처를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아르눌프는 919년 바이에른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921년 왕관을 포기하고 하인리히에게 굴복하면서 상당한 자치권과 자체 주화를 주조할 권리를 유지했다.[3]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에 관한 단편 (de)에 따르면, 하인리히 1세는 바이에른을 침략했는데, 이는 하인리히의 조상 중 어느 누구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영토였다는 점에서 불법적인 침해였다. 하인리히는 바이에른과 아르눌프를 상대로 여러 차례 원정을 벌였다고 한다. 하인리히의 전임자인 콘라트 1세 역시 바이에른을 침략하여 약탈, 살해, 방화를 저질렀고, 많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고 여자들을 과부로 만들었다고 한다. 레겐스부르크는 불태워지고 약탈당했다. 아르눌프 공작은 백성을 작센족으로부터 구원하고 자유를 되돌려주었다고 칭송받는다.

당시 왕은 ''primus inter pares (동등한 사람들 중 으뜸)''으로 여겨졌다. 왕과 제후들은 함께 정책을 수립했으며, 군주의 위치는 점진적으로 강화될 수 있었다. 오토 대제와 후대의 군주들 아래서도 합의 구축은 중요하게 유지될 것이다.[3][4]

하인리히 1세는 각 부족 대공에 대한 국왕의 관계를 "동료 중 수석(Primus inter pares)"으로 규정하고, 각 지방의 대공의 교회 지배권 및 기타 자치권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따라서 하인리히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서보다는 작센 공작으로서 주로 활동했다.[28] 작센 및 튀링겐 각 도시의 방어를 굳건히 하고, 마이센 등 새롭게 점령한 영토에 다수의 요새를 구축하는 동시에 작센인의 봉신을 이주하게 했다.

하인리히는 929년 9월 16일, 퀘들린부르크 왕궁에서 왕위 계승에 관한 왕령을 발포하여, 분할 상속 대신 단독 상속으로 왕권 약화를 막고자 했다.[29] 935년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왕국 회의에서 차남 오토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8][31]

3. 2. 로타링기아 재병합 (925년)

920년, 서프랑크의 왕 단순왕 샤를이 보름스 근처 페프더스하임까지 진군했지만, 하인리히가 군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3] 921년 11월 7일, 하인리히와 샤를은 만나 본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 하인리히는 동프랑크 왕으로, 샤를은 로타링기아 통치자로 인정받았다.[3] 하인리히는 로베르 1세의 대관식 이후 서프랑크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시작되자 로타링기아를 차지할 기회를 보았다.[3] 923년 하인리히는 라인강을 두 번 건너 공국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3]

925년 로타링기아 공작 길베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는 공국을 침략하여 쥘피히 (톨비악)에서 길베르트를 포위하고 마을을 점령하여 그의 영토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하인리히는 길베르트를 공작으로 권력을 유지하도록 허용하고 928년에 자신의 딸 게르베르가를 그의 새로운 봉신과 결혼시켰다. 그리하여 910년에 잃었던 로타링기아 왕국을 다섯 번째 간선 공작령으로 왕국에 다시 편입시켰다.

3. 3. 대외 전쟁

920년 서프랑크의 왕 샤를 르 생쁠이 군사를 이끌고 보름스 근처 페더르스하임까지 쳐들어왔지만, 하인리히 1세가 미리 군사를 준비해둔 것을 알고 퇴각했다. 911년 11월 7일 동프랑크를 대표해 샤를 르 생쁠과 동맹, 협약을 체결했지만, 샤를 3세는 이를 어기고 로타링기아(로렌)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하인리히 1세는 샤를 3세가 로베르 1세에게 축출당하자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923년 말, 하인리히는 두 번 라인강을 건너 로타링기아로 들어갔고, 924년 10월까지 로타링기아 동부 지역은 하인리히의 영향력하에 남게 되었다.

925년부터 로트링겐을 공략하여 928년 줄피히에서 로트링겐 군대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로트링겐을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대신 그는 로트링겐의 왕이었던 기셀베르트에게 자신의 가신으로 충성을 약속받고 로트링겐 공작 직위를 주고,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딸 게르베르가를 주어 반발을 무마시켰다.[39] 하인리히는 910년 이후 잃어버린 다섯번째 영역을 다시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927년부터 929년에 걸쳐, 엘베강을 넘어 서 슬라브계 사람들이 정주하는 지역을 국토에 추가했다. 928년에 브렌나보르(현재의 브란덴부르크)를 공략하여 작센 영토를 동쪽으로 넓혔다.[25] 929년에는 엘베강 연안의 마이센에 성을 건설하여, 마자르족과 슬라브인으로부터의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24] 같은 해, 프르셰미슬 왕조바츨라프 1세가 통일을 진행하는 보헤미아에도 침공하여, 프랑크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했다.[26]

마자르족, 보헤미안, 모라비아, 바이킹 등이 동프랑크 왕국을 수시로 유린하는 가운데,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마이센, 슐레스비히, 고타, 헤르포드, 고슬라, 크베들린부르크 등 작센 지역도 이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측근, 봉신들에게 군사 및 민병대, 군량 등을 제공받아 작센 지역에 침입한 이민족들을 몰아냈다. 그는 측근, 봉신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게 도시 헌장이라는 일종의 규약을 제시하였다.

3. 3. 1. 마자르족과의 전쟁

9세기 후반 이후 동프랑크 왕국, 특히 남동부는 마자르족(헝가리인)의 습격을 받았다.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현재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도나우강 서쪽에 설치된 마르크(변방령)는 궤멸되었다. 마자르족의 공격은 영토 확장보다는 전리품 획득을 목적으로 했으며, 기마를 사용하여 이동했기 때문에 국경 부근의 도시뿐만 아니라 동프랑크의 중심부까지 공격했다. 915년에는 브레멘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특히 피해가 컸던 곳은 바이에른 동부와 작센 남동부였다. 전 왕 콘라트는 이에 대해 효과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하인리히는 926년 포로 반환과 공납금 지불을 약속하여 마자르족과 9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21][24] 그는 이 기간을 활용하여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고 군의 무장을 정비했으며 훈련을 반복했다.[21] 특히 기마를 사용하는 마자르족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 강화에 힘썼다.[24]

933년 휴전 협정 기한이 만료되기 전, 하인리히는 전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운슈토르트 강 연안의 리테(리테부르크)에서 마자르군과 전투하여 크게 승리했다.[21][27] 이후에도 마자르족의 습격은 계속되었지만, 이 승리로 하인리히는 국왕으로서의 위신을 강화할 수 있었다.[27] 또한 각 부족이 공동으로 외적에 대항하는 경험은 독일 민족으로서의 동포 의식을 형성·발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이 마자르족과의 싸움을 통해 군대 구성이 보병 중심에서 기병 중심으로 전환되어 갔다.

934년에는 작센 북쪽 유틀란트 반도로 진격하여 과거 고트프레드가 대 작센 방어 목적으로 건설한 헤제뷔에서 데인족을 격파하고 아이더 강과 슐라이 강 사이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하인리히 1세와 마자르족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시기내용
919년퓌헨 전투에서 마자르족에게 패배.
921년마자르족의 동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 침략. 에버하르트와 메란 백작이 케른텐 변경백국 근처 블라이부르크에서, 알자스 백작 리우트프리트가 마자르족 군대를 격파했지만, 마자르족은 동프랑크 왕국을 계속 약탈.
924년헝가리 왕자를 포로로 잡은 하인리히는 10년 동안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매년 조공을 바치는 데 동의.
926년마자르족과 휴전 협정 체결.
932년하인리히는 마자르족에게 연례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
933년리아데 전투에서 향상된 군대를 이끌고 마자르족을 완전히 격파하여 그들이 하인리히 왕국의 북부 지역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함.[21][27]


3. 3. 2. 슬라브족과의 전쟁

하인리히는 마자르족과의 휴전 기간 동안 동쪽 국경에 살고 있던 폴라비안 슬라브족을 제압했다. 928년 겨울, 그는 슬라브족 헤벨리 부족을 공격하여 그들의 수도인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했다. 그 후 그는 엘베강 중류에 있는 글로마체 영토를 침략하여 포위 후 수도인 가나(야나)를 정복했으며, 마이센에 요새(후일 알브레히츠부르크)를 건설했다.[39] 929년,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의 도움을 받아 하인리히는 보헤미아 공작국에 진입하여 공작 바츨라프 1세에게 매년 왕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한편, 슬라브족 레다리는 그들의 족장을 몰아내고, 발스레벤 마을을 점령하여 주민들을 학살했다. 백작 베르나르와 티트마르는 엘베강 너머의 렌첸 요새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929년 9월 4일 적을 완전히 격파했다. 루사티아인과 하류 오데르강에 살던 우크라니는 각각 932년과 934년에 정복되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정복한 땅에 그의 후계자 오토 1세가 시행한 변경 행정을 만들지 않았다.

3. 3. 3. 데인족과의 전쟁

하인리히는 북쪽 영토를 평정했는데, 그곳에서 덴마크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프리지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수도사이자 연대기 작가인 코르베이의 비두킨트는 그의 저서 ''작센 연대기''에서 덴마크인들이 하인리히 1세의 신하였다고 보고한다.[5] 하인리히는 덴마크인들과 함께 독일을 공격했던 벤드족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자신의 왕국에 병합했으며, 934년에는 슐레스비히를 정복했다. 같은 해 유틀란트 반도에서 데인족에게 승리했다.

3. 4. 왕위 계승

하인리히 1세는 919년에 즉위식을 거행했지만, 마인츠 대주교 헤리거가 집전하는 성유(Anointing) 의식은 거부했다.[13][14] 성유 의식은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 즉위식 이후 왕에게 신이 부여한 통치권을 상징하는 행위로 여겨졌는데,[16] 하인리히 1세 이후의 왕들은 모두 받았기에 그가 왜 받지 않았는지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17]

슈바벤과 바이에른 부족은 하인리히 1세의 국왕 선출에 참여하지 않았고,[13][14] 바이에른에서는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대립왕으로 선출하기도 했다.[18] 하인리히 1세는 919년에 슈바벤 공작부르크하르트 2세와 싸우지 않고 신하로서 충성 맹세를 받아냈고,[19] 921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굴복시켜 양쪽 모두에게 국왕으로 인정받았다.[14][20] 같은 해,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와 에서 조약을 맺어 "동프랑크인의 왕(''rex orientalium francorum'')"으로 공식 인정받았다.[21][22]

로트링겐 공작령은 동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 군주인 샤를 3세를 국왕으로 선택하며 동프랑크에서 서프랑크로 귀속을 바꿨다.[23] 하인리히 1세는 923년에 로트링겐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925년에 다시 공격하여 로트링겐을 동프랑크로 되찾았다.[21][22] 928년에는 로트링겐의 유력 귀족 기젤베르트를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하고, 딸 게르베르가를 시집보냈다.[21][22]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은 프랑켄,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로트링겐의 5개 공작령으로 구성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각 부족 대공에 대한 국왕의 관계를 "동료 중 수석(Primus inter pares)"으로 규정하고, 각 지방 대공의 교회 지배권 및 기타 자치권을 최대한 인정했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서보다는 작센 공작으로서 주로 활동했다.[28]

하인리히 1세는 929년 9월 16일, 퀘들린부르크 왕궁에서 왕위 계승에 관한 왕령을 발표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여러 자녀에게 분할 상속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하인리히 1세는 이를 단독 상속으로 고쳐 분할로 인한 왕권 약화를 막고자 했다.[29] 929년(혹은 930년)에 차남 오토와 잉글랜드 왕애설스탠의 이복 여동생 에디타를 결혼시킨 후,[30] 935년 에르푸르트 왕국 회의에서 오토를 다음 국왕으로 지명했다.[8][31]

4. 죽음과 유산

936년 7월 2일, 하인리히는 사냥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멤레벤(Memleben)의 왕궁에서 사망했다.[31] 934년 하인리히는 데인 족의 공격에 직접 출정하여 덴마크를 침공, 덴마크 왕 크누트 1세와 교전하였고, 슐레스비히에서 데인 족을 격파하고 슐레스비히를 독일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는 덴마크 족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받고 밴드 족의 영토까지 쳐들어갔다. 그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는 한편 독일 내 후작급 반대파 귀족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은 포기하고 종주권을 획득하는 선에서 그쳤다. 슈바벤과 바이에른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919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켰지만 부르하르트에게 통치권과 민사행정권을 허락하고 종주권만을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방어하는 한편 왕국 내에서의 권위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이탈리아 방문은 실패하고 만다. 935년에는 하르츠로 사냥을 나갔다가 뇌졸중으로 되돌아왔다. 936년 초여름에 하인리히는 아들 오토 1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한다.

이탈리아로 갈 준비를 하던 도중 936년 2월 1일 그는 튀링겐의 멤레벤의 한 수도원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사후 아들 오토 1세에게 자연스러운 승계를 위해 공동 국왕으로 선포했다. 아들 오토 1세는 아버지의 영향력에 의해 바로 독일 국왕으로 즉위했고, 이미 즉위한 상태에서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마인츠 대주교의 집전 하에 즉위식을 진행하였다. 하인리히는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의 아내 마틸다는 그의 사후, 작센 귀족의 딸들을 위해 퀘들린부르크에 여자 수도원 (후에 성 셀바티우스 교회(Stiftskirche St. Servatius)가 됨)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이 되었다. 하인리히와 마틸다는 이 교회 부속 성당의 지하실에 함께 매장되었다.

1848년 독일의 통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요한을 비롯한 범독일주의자, 대독일주의자들은 그에게 독일의 모든 부족의 첫 실질적 통치자의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 로헨그린(1850년작)에서 하인리히 1세를 캐릭터로 등장시켜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 했다.

후에 아돌프 히틀러 및 나치당은 독일 민족, 독일 국가, 단독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찾으려 하였고, 그 게르만 국가의 기원을 하인리히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1세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나치 당원이었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자신이 하인리히 1세의 환생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40] 하인리히 히믈러는 매년 7월 2일 그의 사망일을 기념하여 추도행사를 하기 위해 크베들린부르크를 여러 번 방문했다. 히믈러는 그를 최초의 "게르만인의 왕"으로 규정하고, 하인리히의 무덤을 독일 국민들을 위한 순례지로 선언했다. 1937년에 그의 관은 개봉되어 새로운 석관에 안치되었다.

1938년 하인리히의 무덤에 있는 히믈러


하인리히 1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1850)''의 등장인물로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브라반트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마자르족에 맞서 싸우려 했다. 1848년 혁명으로 독일 민족 통일을 이루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바그너는 범게르만주의와 같은 범게르만주의 활동가들이 옹호한 하인리히를 모든 독일 부족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묘사하는 데 크게 의존했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

하인리히 히믈러가 스스로를 독일 최초의 왕으로 선포된 하인리히의 환생으로 여겼다는 징후가 있다. 히믈러는 왕의 서거일인 7월 2일에 퀘들린부르크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지하 묘실에서 기념 행사를 열었다. 이는 하인리히가 사망한 지 1,000년이 되는 1936년에 시작되었다. 히믈러는 그를 "최초의 독일 왕"으로 여기고 그의 무덤을 독일인들의 순례지로 선포했다. 1937년에 왕의 유해는 새로운 석관에 다시 안치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926년 부르군트 왕 루돌프 2세로부터 동프랑크 왕국 남서단에 해당하는 바젤 주변 영토와 교환하여 성창을 양도받았다.[21][31] "롱기누스의 창"이라고도 "성 마우리시우스의 창"이라고도[32], 또는 "운명의 성창"이라고도 불리는 이 창(의 창날)은 하인리히 1세 이후 역대 국왕, 즉 로마왕에게 계승되어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가 현재 호프부르크 왕궁의 보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인리히 1세, 그리고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동프랑크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마자르족과 싸울 때 승리를 부르는 영보(靈寶)로서 이 성창을 전두에 내걸었다.[33]

하인리히의 지명은 존중되어 차남 오토가 국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했지만, 곧 바이에른 및 프랑켄의 대공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대공들은 오토의 형 탄크마르와 동생 하인리히를 옹립하여 내란이 일어났다.[34] 게다가 3년 정도 조용했던 마자르인도 방위 체제가 무너진 동프랑크에 대한 습격 활동을 재개했다(자세한 내용은 오토 1세 (신성 로마 황제) 참조).

'''하인리히 1세의 주요 일생'''

연도사건
876년출생
906년하테부르크와 결혼
909년이혼. 마틸다와 재혼
912년부친 사망, 작센 공작위를 계승
915년국왕 콘라트 1세와 화의 성립
919년국왕 즉위. 슈바벤 공작 부르크하르트 2세를 굴복시킴
921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를 굴복시킴
925년로트링겐을 동프랑크 왕국으로 되찾음
926년* 마자르족과 휴전 협정 체결
928년슬라브인의 도시 브란덴부르크를 공략
929년* 왕위 계승에 관한 왕령 발포, 분할 상속을 금지
933년리데 전투.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마자르족에게 승리
934년유틀란트 반도에서 데인족에게 승리
935년왕국 회의에서 차남 오토를 다음 왕으로 지명
936년사망


5. 가계

하인리히 1세는 작센-안할트의 멤레벤에서 오토 1세와 그의 부인 프랑켄의 헤드비가(바벤베르크 출신 하인리히 폰 프랑코니아와 인겔트루데의 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머니 인겔트루데는 에버하르트 프리울리와 프랑크의 기셀라의 딸로, 루트비히 1세의 외손녀이며, 모계로 샤를마뉴의 증손녀였다.

906년 작센 백작이자 메르게부르크 백작 에르빈의 딸 하테부르크 폰 메르게부르크와 결혼하여 첫 아들 탕크마르[35]를 얻었지만, 하테부르크가 첫 남편이 죽은 뒤 가톨릭 수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909년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909년 겨울, 하인리히 1세는 하테부르크와 헤어지고, 베스트팔리아 백작 테오도리히 또는 디트리히의 딸 마틸다 폰 링겔하임과 재혼하였다. 마틸다는 그에게 오토 1세, 브루노, 바이에른 백작 하인리히 1세 등의 아들과 게르베르가, 헤드비가 등의 딸을 낳았다. 프랑스 카페 왕조의 첫 번째 왕 위그 카페는 하인리히 1세의 외손자가 된다.

하인리히 1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자녀비고
하테부르크 폰 메르게부르크탕크마르909년 이혼
마틸다 폰 링겔하임오토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게르베르가로트링겐 공작 기젤베르트, 서프랑크 왕 루이 4세와 결혼
헤드비히위그 대공과 결혼, 위그 카페의 모친
하인리히 1세바이에른 공작
브루노쾰른 대주교


6. 기타

하인리히 1세의 황제 칭호는 그 당대에서 끝났다. 하지만 그의 황제 직위 추대를 놓고 프랑크족이 평소부터 바라던 것으로, 로마와는 관련이 없는 제국에 대한 염원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생애 후반 그는 이탈리아로마를 방문하려 했고, 935년 뇌졸중에 걸렸지만 이탈리아 방문을 시도하던 도중 이듬해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1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1850)''의 등장인물로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브라반트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마자르족에 맞서 싸우려 했다. 1848년 혁명으로 독일 민족 통일을 이루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바그너는 범게르만주의 활동가들이 옹호한 하인리히를 모든 독일 부족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묘사하는 데 크게 의존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스스로를 독일 최초의 왕으로 선포된 하인리히의 환생으로 여겼다. 히믈러는 왕의 서거일인 7월 2일에 퀘들린부르크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지하 묘실에서 기념 행사를 열었다. 이는 하인리히가 사망한 지 1,000년이 되는 1936년에 시작되었다. 히믈러는 그를 "최초의 독일 왕"으로 여기고 그의 무덤을 독일인들의 순례지로 선포했다. 1937년에 왕의 유해는 새로운 석관에 다시 안치되었다.


  • 하인리히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 하인리히는 2001년 게임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의 최종 미션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두 명의 적대자 중 한 명이다. 게임에서는 그를 사악한 강령술사로 묘사하며, 실제 사망 연도인 936년보다 7년 후인 943년에 그를 등장시키는 시대착오적인 설정을 사용한다.


사냥을 좋아하고 왕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자가 그의 곁에 도착했을 때에도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설치하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어, '''하인리히 조류 사냥꾼 왕'''(Heinrich der Vogler, Heinrich der Finkler|하인리히 데어 포글러, 하인리히 데어 핑클러de, Henricius Auceps|헨리키우스 아우켑스la)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냥꾼 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12]

요한 포글의 시에 의한 카를 뢰베의 가곡 '조류 사냥꾼 왕 하인리히 ''Heinrich der Vogler''' 작품 56-1은 이 일화에 기초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Die Regesten des Kaiserreichs unter den Herrschern aus dem Sæchsischen Hause, 919–1024 https://books.google[...] 1893
[2] 서적 Encyclopae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 United Soft Media 2013
[3] 서적 The Origins of the German Principalities, 1100–1350: Essays by German Historians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7-07-06
[4] 서적 Europe and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Pearson Prentice Hall 2004
[5] 간행물 First churches on Gotland as described in GUTA LAGH https://www.academia[...]
[6] 문서 瀬原、p. 62
[7] 문서 瀬原、p. 65
[8] 문서 Collins, p. 143
[9] 문서 瀬原、p. 65 - 66
[10] 문서 瀬原、p. 63
[11] 문서 Reuter, p. 136
[12] 문서 菊池、p. 51
[13] 문서 成瀬 他、p. 112
[14] 문서 瀬原、p. 66
[15] 문서 シュルツェ、p. 27
[16] 서적 図説 ヨーロッパの王朝 河出書房新社 2005
[17] 문서 諸侯が独立路線を示し王国が解体の危機に瀕する中で、王国内の諸侯の上に立つ神権的君主ではなく、諸侯と並ぶ第一人者として王国を支配するというハインリヒの和解と協調の姿勢を示したものとも(成瀬 他、p. 111 - 112)、これまでの王のように高位聖職者の思い通りになることを避けたかったため(瀬原、p. 66)とも考えられている。
[18] 문서 成瀬 他、p. 113。バイエルンの独立した王として擁立されたとも考えられている。
[19] 문서 コルヴァイのヴィドゥキント、p. 64
[20] 문서 成瀬 他、p. 114
[21] 문서 成瀬 他、p. 115
[22] 문서 瀬原、p. 67
[23] 문서 成瀬 他、p. 101, p. 111
[24] 문서 瀬原、p. 68
[25] 문서 瀬原、p. 68
[26] 문서 瀬原、p. 68 - 69
[27] 문서 瀬原、p. 69
[28] 문서 菊池、p. 52
[29] 문서 菊池 他、p. 116
[30] 문서 瀬原、p. 72
[31] 문서 瀬原、p. 71
[32] 문서 シュルツェ、p. 112
[33] 문서 シュルツェ、p. 115
[34] 문서 成瀬 他、p. 120
[35] 문서 938년 이복 동생 오토 1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다.
[36] 문서 할아버지 리우돌프의 딸 리우트가르트나, 그의 아버지 오토의 딸 오다는 모두 남편 사후 재혼하였다.
[37] 서적 Pouvoirs, Église et société dans les royaumes de France, de Bourgogne et de Germanie aux xe et xie siècles (888-vers 1110) Ellipses 2008
[38] 문서 그에 따라 당시 프랑크 족의 사회에서 그는 처음으로 세례 의식을 받지 않고 사람들의 천거로 즉위한 유일한 왕이 되었다.
[39] 문서 게르베르가는 기셀베르트 사후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재혼한다.
[40] 서적 Himmler, the Evil Genius of the Third Reich Odhams 1953
[40] 서적 The Kersten Memoirs: 1940-1945 Macmillan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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