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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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유는 의성부 출신으로, 고려 초기의 인물이다. 본래 이름은 홍술이었으나, 왕건으로부터 홍유라는 이름과 성을 하사받았다. 궁예를 섬기다 고려 건국에 기여하여 개국 일등 공신으로 태조 왕건 묘정에 배향되었다. 918년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역성혁명을 모의하여 왕건을 추대하고 고려 건국에 기여했다. 이후 유금필과 함께 청주 호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유민을 정착시키는 등 고려의 안정을 위해 활동했으며, 딸을 태조 왕건에게 시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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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겸은 태봉의 마군 장군으로,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에 공헌하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994년 태사로 추증되고 시호는 무공이다.
홍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홍유 | |
한글 | 홍유 |
한자 | 洪儒 |
로마자 표기 | Hong Yu |
인물 정보 | |
작위 | 고려의 태사삼중대광 |
군주 | 고려 태조 |
군주 칭호 | 국왕 |
휘 | 유(儒) |
별호 | 술(術), 술(述)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의성부 |
사망일 | 936년 |
사망지 | 미상 |
재위 기간 | 901년~918년 |
재위 기간 2 | 918년‐936년? |
성별 | 남성 |
자녀 |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
시호 | 충렬공(忠烈公) |
종교 | 불교 |
가문 | 의성 홍씨 |
서훈 | 개국일등공신 태조 묘정 배향 |
군사 정보 | |
계급 | 마군장군 |
복무 | 고려군 |
지휘 | 고려 기병 |
주군 | 고려 태조 |
참전 | 일리천 전투 |
2. 생애
의성부 출신으로, 초명은 홍술이었다. 왕건에게서 홍유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1] 조상 홍천하는 동란으로 인해 신라로 귀화했다.[1]
918년 유금필과 함께 청주 호족의 반란을 저지했고, 919년에는 예산현에 유민을 정착시켰다. 929년 고창 전투에서는 공훤과 함께 죽령 장악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935년 나주 탈환 작전 지휘권을 유금필에게 양보했다.[1]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우익 기병을 이끌어 큰 공을 세우고, 복지겸, 배현경, 박술희, 신숭겸 등과 함께 개국 일등 공신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활동
의성부(義城府) 출신으로, 초명은 홍술(弘述)이었다. 왕건에게서 홍유(洪儒)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1] 궁예를 섬겨 마군장군에 올랐으나, 태봉 시기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조상 홍천하는 동란으로 인해 신라로 귀화했다.[1]
2. 2. 역성혁명과 고려 건국
918년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몰래 모의하여 밤에 태조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 왕건에게 역성혁명을 권유하였다.[1]태조 왕건이 요좌(遼左) 지방의 3분의 1에서 그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나라를 건설한 지 24년이 넘었으나, 궁예의 포악한 행위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 같이 여기게 되었으니,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므로, 태조 왕건에게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할 것을 요청하였다.[1]
그러나 태조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다며,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는 혁명은 박덕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후세의 난신들이 구실로 삼을 것을 두려워하며 거절하였다.[1]
이에 홍유 등은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이라며, 온 백성들이 궁예를 전복할 것을 생각하고 있고, 덕망이 높은 태조 왕건에게 모든 사람들의 뜻이 향하고 있으니, 만약 수락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며 왕건을 설득하였다.[1]
왕건의 제1부인(훗날의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들고 들어와 왕건에게 입혀주었고, 왕건이 결단을 내리자 여러 장수들이 그를 부축하고 나가 동틀 무렵에 노적가리 위에 앉게 하고 군신의 예를 거행하였다.[1]
그리고 사람을 시켜 “왕공(王公)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도망하였으나, 왕건에게 호응하는 무리가 1만여 명에 달했다는 삼국사기 궁예편의 기록 등을 보았을 때, 이 날의 정변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 이렇게 정변에 성공하여 태봉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된다.
2. 3. 고려 건국 이후의 활약
왕건은 청주가 배반할 것을 우려하여 그와 유금필에게 군대 1,500명을 이끌고 진주에 주둔하여 반란을 막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주의 반란을 진압하여 불안정했던 고려 정권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왕건은 그 공으로 그를 대상(大相)으로 승진시켰다.[1] 919년에는 오산성을 예산현으로 개칭하고 그와 대상 애선안(哀宣安)을 파견하여 유랑민 500여 호를 모아 들였다.[1] 이처럼 그는 고려 개국 초반에는 서부 전선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1]929년 말 고창을 구하기 위해 왕건이 출전할 때, 공훤과 함께 죽령을 장악하여 퇴로를 확보하자는 발언을 하였으나 유금필의 결사적 공격 방침이 채택됨에 따라 기각되었다.[1]
935년에는 나주 탈환 작전을 지휘하고자 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그리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 하여 유금필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1] 고려의 거의 모든 군사력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는 우익의 기병을 이끌었다.[1]
태조 왕건의 묘정에 복지겸, 배현경, 박술희, 신숭겸 등과 함께 개국 일등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3. 가계
4. 평가
홍유는 의성부 출신으로, 918년 유금필과 함께 청주 호족의 반란을 막았고, 919년에는 예산현에 유민을 정착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936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복지겸, 배현경, 박술희, 신숭겸 등과 함께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어지는 개국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홍유의 조상 홍천하는 난을 피해 신라로 귀화하였다.[1] 처음 이름은 '홍술'이었으나, 왕건이 중국 은나라의 명재상 부열과 같다 하여 은열이라는 이름을 내렸다.[1]
5. 기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송용태가 홍유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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