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7세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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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7세는 시칠리아에서 프리드리히 2세와 아라곤의 콘스탄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 그는 쾰른 대주교와 바이에른 공작의 후견을 받았으며,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으나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하인리히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감금되었으며, 1242년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져 '괄호 속 하인리히'로 불렸으나, 최근에는 그의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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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7세 (독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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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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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마인의 왕 (사실상 독일 왕) |
재위 기간 | 1222년–1235년 |
선임자 | 프리드리히 2세 |
후임자 | 콘라트 4세 |
대관식 | 1222년 5월 8일 (아헨) |
왕가 | 호엔슈타우펜 가문 |
배우자 | 마르가레테 폰 바벤베르크 (1225년 결혼) |
아버지 | 프리드리히 2세 |
어머니 | 콘스탄사 데 아라곤 |
출생일 | 1211년 |
출생지 | 시칠리아 왕국 (현재의 이탈리아) |
사망일 | 1242년 2월 12일 |
사망지 | 시칠리아 왕국 칼라브리아 마르티라노 |
매장지 | 시칠리아 왕국 칼라브리아 코센차 |
기타 정보 | |
시칠리아 왕 재위 기간 | 1212년–1217년 |
시칠리아 왕 선임자 | 프리드리히 2세 |
시칠리아 왕 후임자 | 프리드리히 2세 |
이탈리아 왕 재위 기간 | 1217년–1217년 |
이탈리아 왕 선임자 | 프리드리히 2세 |
이탈리아 왕 후임자 | 콘라트 4세 |
2. 아버지의 영향권 아래
하인리히는 아버지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정치적 구상 아래 성장기를 보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약속을 지켜 독일과 시칠리아의 통합을 피하고자, 어린 하인리히를 먼저 시칠리아의 왕(엔리코 2세)으로 즉위시켰다.[41]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신성 로마 황제 즉위와 이탈리아 정책에 집중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 유지를 위해 아들 하인리히를 로마왕(독일왕)으로 선출시키는 데 힘썼다.[42] 이 과정에서 황제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유리한 교회 제후법을 발표하는 등,[42] 아들의 왕권 강화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주로 이탈리아에 머물렀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독일에서 쾰른 대주교 엥엘베르트 1세와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 등 유력 제후들의 후견을 받으며 자랐다.[42] 그의 결혼 또한 아버지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이루어졌다.[40]
이처럼 하인리히의 삶과 지위는 상당 부분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의도와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독립적인 군주라기보다는 독일 내 자신의 대리인, 즉 '독일 총독'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황제는 하인리히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보다는 제후들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며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하인리히의 실질적인 권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부자간의 교류마저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이러한 아버지의 정책은 점차 둘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명목상 로마왕이었던 하인리히가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13]
2. 1. 초기 생애와 시칠리아 왕 즉위
하인리히는 시칠리아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첫 부인인 아라곤의 콘스탄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40][2] 그는 후에 왕위를 계승한 콘라트 4세의 형이었다.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는 경쟁자였던 벨프가의 오토 4세에 맞서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212년 3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중재를 통해 갓 태어난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 왕 엔리코 2세로 즉위시켰다.[41][3] 이는 독일과 시칠리아 왕국이 한 명의 통치자 아래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 사이의 합의에 따른 조치였다. 이 때문에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콘스탄사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독일로 불러들여 슈바벤 공작위를 맡겼고,[42][4] 1217년에는 다시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가지게 했다. 하인리히의 어머니 콘스탄사는 1220년까지 남편을 대신하여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남아 있었다. 1219년 슈바벤의 체링겐가가 단절되자, 하인리히는 그들이 가졌던 '부르군트의 렉토르(Rector of Burgundy, 부르군트 총독)'라는 칭호도 받게 되었으나,[42][4] 이 칭호는 그가 왕으로 선출되면서 사라졌다.

1220년 4월 20일(또는 26일),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를 로마왕(독일왕)으로 선출했다. 이를 위해 아버지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후들에게 유리한 내용의 교회 제후법(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을 발표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42][4] 당시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참석한 주요 제후들로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 대주교들과 마그데부르크 및 일부 주교들, 바이에른과 브라반트 공작, 튀링겐 방백, 나뮈르와 바덴 변경백, 홀란트와 클레베 백작 등이 있었다.[43][5] 이 선출은 프리드리히 2세가 이전에 약속했던 제5차 십자군 원정 이행을 위한 조건이기도 했다. 만약 황제가 십자군 원정 중 사망할 경우, 하인리히의 선출을 통해 왕위 계승 문제를 미리 정리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새로운 교황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독일과 시칠리아의 통합을 우려하여 이 선출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인리히의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권리도 박탈하려 했다. 또한 일부 독일 제후들도 처음에는 이 선출을 거부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1220년 이탈리아로 돌아간 후, 하인리히는 쾰른 대주교 엥엘베르트 1세의 후견을 받게 되었다.[42][4] 엥엘베르트 대주교는 1222년 5월 8일 아헨에서 하인리히에게 독일 왕관을 씌워주었다. 하인리히는 본래 보헤미아의 국왕 오타카르 1세의 딸인 프르셰미슬 가문의 공주 보헤미아의 아녜스와 약혼한 상태였으나,[44][6] 엥엘베르트는 잉글랜드의 존 왕의 딸 잉글랜드의 이사벨라와의 혼인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1225년 엥엘베르트가 사망하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가 새로운 후견인이 되었다. 이 시기 어린 왕은 주로 황제의 미니스테리알레(가신)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이들은 슈바벤 공국의 행정 관리 역할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하인리히와 보헤미아 공주 아녜스와의 약혼은 결국 취소되었다.
1225년 11월 29일 뉘른베르크에서, 하인리히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명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의 딸이자 자신보다 일곱 살 연상인 바벤베르크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40][2] 16개월 후인 1227년 3월 23일, 마르가레테는 아헨에서 독일 왕비로 즉위했다. 이 결혼으로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라는 두 아들이 태어났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하인리히는 활기차고 교양 있는 통치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궁정에 여러 민네장(Minnesänger, 중세 독일의 연애 시인 겸 가수)을 두었다. 그 자신이 직접 일부 민네리더(궁정 연애시)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다리를 저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건장했으며, 키는 약 1.66m 정도였다.
2. 2. 독일 왕으로의 선출과 그 배경
하인리히는 1211년 시칠리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첫 부인 아라곤의 콘스탄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2][15]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는 경쟁자인 벨프가 출신의 오토 4세에 맞서 독일 왕으로 선출되려 했으며,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의 합의에 따라 독일과 시칠리아 왕국이 한 명의 통치자 아래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했다.[3]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1212년 3월, 갓 태어난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의 왕(엔리코 2세)으로 즉위시키고, 섭정은 어머니 콘스탄체에게 맡긴 채 독일로 떠났다.[3][15]
그러나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계획을 바꿔 아들 하인리히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하인리히는 1217년에 슈바벤 공작위를 수여받았고,[4] 1219년에는 체링겐가 단절 이후 공석이 된 '부르군트의 렉토르(총독)'라는 직위도 받게 되었다.[4] 이 렉토르 직위는 그가 왕으로 선출되면서 사라졌다. 하인리히의 어머니 콘스탄체는 1220년까지 남편을 대신하여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남아 있었다.
1220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했다.[4][16][17] 이 선출은 프리드리히 2세가 이전에 약속했던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이행하는 조건이었으며, 황제가 십자군 원정 중 사망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왕위 계승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5] 선출을 위해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후들에게 유리한 교회 제후법(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을 발표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4] "프랑크푸르트에 참석한 주요 제후들에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 대주교들과 마그데부르크 및 일부 주교들, 바이에른, 브라반트 공작들, 튀링겐 방백, 나뮈르, 바덴 변경백들, 홀란트, 클레베 백작들, 프리드리히 궁전의 관료들이 있었다."[5]
하지만 새로운 교황 교황 호노리오 3세는 독일과 시칠리아의 통합을 우려하여 이 선출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인리히의 시칠리아 왕위 계승권도 박탈했다.[5] 또한 일부 독일 제후들도 처음에는 이 선출에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1220년 이탈리아로 돌아간 후, 하인리히는 쾰른 대주교 엥엘베르트 1세의 후견을 받게 되었다.[4] 엥겔베르트 대주교는 1222년 5월 8일 아헨에서 하인리히에게 독일 왕관을 씌워주며 대관식을 거행했다.[4] 이후 1225년 엥겔베르트가 사망하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가 후견인 자리를 이어받았다.[18] 어린 왕은 주로 황실 미니스테리알레의 보살핌 아래 있었으며, 이들은 슈바벤 공국의 행정도 관리했다.
2. 3. 쾰른 대주교와 바이에른 공작의 후견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가 1220년 이탈리아로 돌아간 후, 하인리히는 쾰른 대주교 엥겔베르트 1세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되었다.[4] 엥겔베르트는 1222년 5월 8일 아헨에서 하인리히에게 독일 왕관을 씌워주었다.[4] 하인리히는 공식적으로 보헤미아의 아녜스와 약혼한 상태였으나,[6] 엥겔베르트는 잉글랜드의 이사벨라와의 혼인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225년 엥겔베르트가 사망하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가 후견인 자리를 이어받았다.[4] 이 시기 어린 왕은 주로 황실 미니스테리알레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이들은 하인리히의 슈바벤 공국 행정관 역할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하인리히와 보헤미아 공주와의 약혼은 취소되었다.
1225년 11월 29일 뉘른베르크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명에 따라, 하인리히는 자신보다 일곱 살 연상인 바벤베르크의 마르가레테와 혼인했다.[2] 그녀는 16개월 뒤인 1227년 3월 23일 아헨에서 독일 왕비로 즉위했다. 엥겔베르트와 루트비히 1세의 후견을 거쳐, 하인리히는 1228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18]
2. 4. 바벤베르크 가문과의 결혼
1225년 11월 29일 뉘른베르크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명에 따라, 하인리히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의 딸이자 자신보다 일곱 살 연상인 바벤베르크의 마르가레트와 혼인했다.[2][40] 이 결혼은 오스트리아 공국과의 관계를 구축하려는 프리드리히 2세의 정치적 의도도 반영된 것이었다.[23] 이전에 하인리히는 보헤미아 왕국의 공주 아네슈카와의 결혼을 원하여 마르가레트와의 이혼까지 생각했으나, 아네슈카가 수녀가 되고 아버지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무산되었다.[22][23]16달 뒤인 1227년 3월 23일, 마르가레트는 아헨에서 독일 왕비로 즉위했다. 이 결혼에서 하인리히(Heinrich, ?-1254?)와 프리드리히(Friedrich, ?-1251?) 등 아들 둘이 태어났으나, 둘 다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하인리히 7세가 사망한 후, 마르가레테는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와 재혼했다.
3. 성년 및 아버지에 대한 반란
1228년 무렵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하인리히는 곧 아버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이는 제국 자유 도시 정책에 반발하는 독일 제후들과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탈리아 정책에 집중하며 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프리드리히 2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1231년 제후들이 주도하여 통과시킨 ''제후들의 이익을 위한 규정''(Statutum in favorem principumde)은 하인리히의 왕권을 제약하고 아버지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5]
아버지와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정책적 대립과 개인적인 갈등이 누적되면서 하인리히는 점차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1232년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에게 복종을 강요했으나[28], 이후에도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이어갔고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파문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프리드리히 2세는 1234년 7월, 아들 하인리히를 반역자로 선포했다.[40][2]
이에 하인리히는 1234년 9월, 일부 귀족 및 주교들과 함께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롬바르디아 동맹 등 외부 세력과의 연대 시도는 실패했고,[32] 독일 내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독일로 돌아와 군대를 이끌자 하인리히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결국 1235년 7월 빔펜 성에서 아버지에게 항복했다.[14] 하인리히는 보름스에서 열린 재판을 통해 폐위되고 모든 권리와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14] 그의 동생 콘라트가 새로운 로마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사건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1235년 8월 마인츠 제국 회의에서 '란트 평화령'(Landfriedensgesetzde)을 공포하며 약화된 왕권을 재정비했다.
3. 1. 아버지와의 갈등 심화
1228년 하인리히는 친정을 시작했으나, 곧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와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 해, 하인리히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손잡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와 충돌했다. 하인리히는 루트비히 1세를 굴복시킨 후 스트라스부르크 주교와도 대립했다. 그러나 하인리히가 제국 자유 도시들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자, 독일 제후들은 크게 반발했다. 제후들은 1231년 5월 1일 보름스에서 모여 도시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강화하는 ''제후 특권 칙령''(Statutum in favorem principumde)을 하인리히가 승인하도록 압박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갈등 속에서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독일 제후들의 지지가 절실했으므로, 결국 제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16][25]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의 미성년자 시절 권한을 제한했던 규정 일부를 폐지하고, 자신의 정적인 우라흐 가문의 슈바벤 백작 에게노 5세를 하인리히의 주요 조언자로 임명하면서 부자간의 불화를 더욱 키웠다.
1232년,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화해하고 ''제후 특권 칙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하인리히에게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에서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28] 같은 해, 하인리히는 호엔슈타우펜가와 프랑스 카페 왕조 간의 동맹을 다시 추진하려 시도했다. 이듬해에는 비텔스바흐가와 분쟁을 벌여,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팔츠의 오토 2세를 제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제후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하인리히에게 모든 인질의 석방을 명령했다.
1233년과 1234년 사이, 하인리히는 슈테딩겐 지역 농민 봉기에 대한 브레멘 대주교의 십자군 활동 등 일부 이단심문 조치에 개입하며 다시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이 십자군을 승인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하인리히를 파문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1234년 7월 5일, 아들 하인리히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독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2][40]
이에 하인리히는 1234년 9월 반란을 일으켜 일부 독일 주교들과 슈바벤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왕 루이 9세 및 롬바르디아 동맹과 추가적인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협상은 실패했다.[29][30] 대부분의 독일 제후들은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을 취했고, 하인리히의 군대는 호엔로에 영주들, 바덴 변경백 헤르만 5세, 보름스 시와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에 도착하자 많은 지지자들이 황제에게 합류했다.[33] 결국 1235년 7월 2일, 슈바벤의 빔펜 성에서 하인리히는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은 채 아버지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4] 프리드리히 2세와 제후들은 1235년 7월 4일 보름스에서 하인리히를 재판에 회부하여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상속권을 박탈했다.[14] 하인리히의 동생 콘라트가 대신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로마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의 동맹자들은 대부분 사면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과의 갈등으로 약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하기 위해 1235년 8월 25일 마인츠에서 제국 회의를 열어 최초의 '란트 평화령'(Landfriedensgesetzde)을 통과시키고 레갈리아(국왕 대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조치를 취했다.
3. 2. 교황과의 화해와 동맹 시도
1232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화해하고, ''제후 특권 칙령''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하인리히는 치비달레에서 아버지에게 복종을 맹세해야 했다.[28] 같은 해, 하인리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프랑스 왕가인 카페 왕조 간의 동맹을 갱신하려고 시도했다.이듬해인 1233년, 하인리히는 비텔스바흐 가문과 분쟁을 벌여 팔츠의 오토 2세를 제압했다. 그러나 독일 제후들의 불만을 우려한 프리드리히 2세는 모든 인질의 석방을 요구하며 개입하였다. 1233년과 1234년에 걸쳐 하인리히는 일부 종교 재판 조치, 특히 슈테딩겐의 반란 농민에 대한 브레멘 대주교의 십자군에 반대하면서 다시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이 십자군을 승인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하인리히를 파문했다.
교황청의 주선에 따라,[29][30] 1234년 하인리히는 롬바르디아 동맹과 결탁하여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234년 7월 5일 아들을 불법화하고[2] 독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
3. 3. 반란과 실패
1228년 하인리히는 친정을 시작했으나, 곧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손잡고 황제에 대항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와 다툼을 벌였고, 루트비히를 굴복시킨 뒤에는 스트라스부르크 주교와 대립했다. 하인리히의 제국 자유 도시를 우대하는 정책은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제후들은 1231년 5월 1일 보름스에서 도시들을 겨냥한 독일 제후 지지 법령(''제후 특권 칙령'')을 통과시켜 하인리히의 왕권을 제한했고, 자신들의 불만을 내세워 프리드리히 2세가 아들을 지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대립 속에서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제후들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이었다.[25] 아버지와의 불화는 하인리히의 조언자 문제 등으로 더욱 깊어졌다.
1232년,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 화해하고 제후들의 요구대로 칙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하인리히에게 치비달레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28] 같은 해, 하인리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프랑스 왕가 카페 왕조 간의 동맹을 갱신했다. 이듬해에는 비텔스바흐가와 분쟁을 벌여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팔츠의 오토 2세를 제압했으나, 제후들의 불만을 우려한 프리드리히 2세는 모든 인질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1233년과 1234년 사이, 하인리히는 일부 이단심문 조치, 특히 슈테딩겐 지역 농민 봉기에 대한 브레멘 대주교의 십자군 파병에 개입한 것이 다시 한번 아버지의 분노를 샀다. 이 십자군을 승인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하인리히를 파문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1234년 7월 5일 아들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독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40][2]
이에 하인리히는 1234년 9월 반란을 일으켜 일부 독일 주교들과 슈바벤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 루이 9세 및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추가적인 동맹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32] 대부분의 제후들은 사태를 관망했고, 하인리히의 군대는 호엔을로에 영주, 바덴 변경백 헤르만 5세, 보름스 시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독일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2세는 곧바로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했다. 양측 군대가 슈바벤에서 대치했을 때, 하인리히는 이미 대부분의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은 상태였다. 결국 그는 1235년 7월 2일 빔펜 성에서 아버지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4] 프리드리히 2세와 제후들은 7월 4일 보름스에서 하인리히를 재판에 부쳐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상속권도 박탈했다.[14] 하인리히의 동생 콘라트 4세가 대신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로마인의 왕으로도 선출되었다.
하인리히의 동맹들은 대부분 사면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과의 분쟁 과정에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1235년 8월 25일 마인츠에서 제국 회의를 열어 최초의 '란트 평화령'(Landfriedensgesetzde)을 통과시키고 레갈리아(왕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조치를 취했다.
4. 감금과 죽음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1235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 왕위와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폐위되었다.[14] 이후 여러 장소에 감금되었으며,[34] 1242년 2월 칼라브리아의 마르티라노 인근에서 이송 도중 사망하였다.[40][2][34]
4. 1. 죽음과 그 해석

폐위된 하인리히는 여러 장소에 감금되었다.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와 알레르하임 성이었고, 이후에는 풀리아와 캄파니아의 로카산펠리체로 옮겨졌다. 그가 격리된 이유는 반항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건강 문제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된 유골 분석 결과, 그가 말년에 심각한 나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5][8][10] 이 질병이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그를 끝내 용서하지 않은 실질적인 이유였을 가능성이 있다.
1242년 2월 12일경(다른 기록에는 2월 10일), 하인리히는 니카스트로로 이송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칼라브리아의 마르티라노 인근에서 사망했다.[40][2] 일부 연대기에서는 이 사건을 자살 시도로 기록하기도 한다.[10][32][34][35]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의 시신을 코센차 대성당에 왕가의 예우를 갖춰 고대 로마 양식의 석관(사르코파구스)에 안치했다.[34] 일부 기록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으며,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깊이 슬퍼했다고 전해진다.[36]
하인리히에게 유일하게 생존했던 아들 프리드리히는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2세의 유언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후국, 그리고 10,000 우니카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1251년에 사망했는데, 연대기 작가 매슈 패리스는 그와 그의 형이 모두 독살(veneno interfecit|베네노 인테르페키트la)되었다고 기록했다.[46][9]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 중에서 하인리히는 유일하게 이름 뒤에 괄호 숫자가 붙는데, 이는 그가 단독으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308년부터 실제로 제국을 통치한 후대의 하인리히 7세 황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괄호 속 하인리히'라고 평가절하되기도 했지만, 최근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호엔슈타우펜 정책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4. 2. 사후 평가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 중에서 하인리히는 단독으로 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이름 뒤 숫자가 괄호 안에 표기된다. 이는 1308년부터 실제로 제국을 통치한 후대의 하인리히 7세 황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반역한 인물로 간주되어 정통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보통 "하인리히 (7세)"라고 표기한다.[14]오랫동안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그늘에 가려져 '괄호 속 하인리히'라고 폄하되었으나, 최근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호엔슈타우펜 정책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무계획적인 성격[37] 탓에 그의 정책이 제국 제후들과의 대립을 초래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24] 하인리히는 아버지처럼 시(詩)에 대한 감성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왕위를 상징하는 문장을 빼앗길 때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38]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이탈리아 피사 대학교와 칼라브리아 대학교 연구팀이 코센차 대성당에 안치된 그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하인리히가 말년에 심각한 나병(한센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5][8][10] 연구팀은 그가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한센병을 앓았으며, 사망 직전에는 강제적인 격리가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10] 이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아들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이유였을 수도 있다.
하인리히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프리드리히는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의 유언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후국, 그리고 10,000 온스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1251년, 연대기 작가 매슈 패리스는 프리드리히와 그의 형이 모두 독살되었다고 기록했다(''veneno interfecit'').[46][9]
5. 가계
1225년 11월 25일, 뉘른베르크에서 바벤베르크가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의 딸인 마르가레테 폰 바벤베르크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하인리히(? - 1254년 이전)와 프리드리히(? - 1251년 이전)가 있었으나 모두 요절했다.
하인리히 7세가 사망한 후, 마르가레테는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와 재혼했다.
세대 | 번호 | 인물 |
---|---|---|
본인 | 1 | 하인리히 7세 |
부모 (2대) | 2 |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3 | 아라곤의 콘스탄체, 신성 로마 황후 | |
조부모 (3대) | 4 | 하인리히 6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5 | 시칠리아의 콘스탄체 1세 | |
6 | 아라곤의 알폰소 2세 | |
7 | 카스티야의 산차, 아라곤 여왕 | |
증조부모 (4대) | 8 |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9 |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체 1세 | |
10 |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 | |
11 | 레텔의 베아트리스 | |
12 |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 | |
13 | 아라곤의 페트로닐라 | |
14 |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 | |
15 | 폴란드의 리체자, 카스티야 여왕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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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Frederick II: A Medieval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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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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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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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aleopato[...]
2015
[11]
문서
로마왕은帝位의前提가되었던東프랑크王位에서改稱된王号。現代에서보면実質독일王이지만、当時國家・地域・民族으로서의독일은成立途上이다。また[[이탈리아왕국 (중세)|이탈리아]]와[[아를왕국|브루군트]]에의宗主權을備える。
[12]
문서
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の総称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教皇に任命され戴冠していた。神聖ローマ皇帝は歴史学的用語で実際の称号ではない。
[13]
문서
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の総称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教皇に任命され戴冠していた。神聖ローマ皇帝は歴史学的用語で実際の称号ではない。
[14]
서적
後期シュタウフェン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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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皇帝フリードリヒ二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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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皇帝フリードリヒ二世
[21]
서적
物語 イタリアの歴史
[22]
기타
ハインリヒの教育者として(あるいは、それとしての作中主体の立場で)、ハインリヒの教育は「お手上げだ」(L. 101,23)と歌った [[ヴァルター・フォン・デア・フォーゲルヴァイデ]]は、ハインリヒの離婚の動きに関わる歌(L. 102,1)も作詞している。村尾喜夫訳注『ワルターの歌』(Die Sprüche und der Leich Walthers von der Vogelweide )三修社、1969年8月、216-219頁。- Joerg Schaefer, Walther von der Vogelweide. Werke.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1972 (ISBN 3-534-03516-X), S. 517.
[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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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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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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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フリードリヒ二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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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帝フリードリヒ二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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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æi Parisiensis Monachi Sancti Albani Chronica Maj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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