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명량대첩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해남 명량대첩비는 임진왜란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이순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1947년 해남으로, 201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비문에는 명량해전의 상황과 이순신의 충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1686년에 쓰여지고 1688년에 세워졌다. 난중일기와의 비교를 통해 기록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철거와 이전 과정에서 비문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06년 문화재청은 1910년 촬영된 사진과 대조하여 진품임을 확인했다. 또한, 국난이 있을 때 비석이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의 석비 -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조선 중종 시대에 세워진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묘비 훼손을 막기 위한 경계문이 한글로 새겨진 비석으로, 국어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으로 평가받으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 조선의 석비 - 정렬사비
정렬사비는 임진왜란 의병장 김천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70년에 건립된 비석으로, 그의 의병 활동 기록이 담겨있어 임진왜란 초기 의병 활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해남군의 문화유산 - 해남 전라우수영
해남 전라우수영은 1377년 무안 당곶포에 설치되어 해남군 황원곶으로 이전된 전라도 수군의 본영으로, 임진왜란 때 명량대첩의 배후 기지 역할을 했으며 조선 시대 수군 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 해남군의 문화유산 - 해남 우항리 공룡·익룡·새발자국화석 산지
해남 우항리 공룡·익룡·새발자국화석 산지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에 형성된 퇴적층으로, 다양한 공룡, 익룡, 새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익룡과 새 발자국 화석이 동일 지층에서 발견되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 발자국 화석 산지이다.
해남 명량대첩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명량대첩비 정보 | |
![]() | |
개요 | |
이름 | 해남 명량대첩비 (海南 鳴梁大捷碑) |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503 |
지정일 | 1969년 6월 16일 |
시대 | 조선시대(1688년) |
소유자 | 이충무공유적보존회 |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
2. 지정 사유
임진왜란(1592년 ~ 1598년) 당시 명량대첩(1597)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일제강점기때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1947년에 해남의 해안지역(문내면 학동리 1186-7번지)으로 옮겨졌고, 2011년 3월 원래 위치로 이전되었다.[1]
정유재란(1597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울돌목(명량)에서 일본 함대와 교전하기 전에 진을 쳤던 곳이다. 이순신은 모함으로 경질되어 한양으로 압송, 투옥되었다가 백의종군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전함과 흩어진 수군 지휘관, 선병(船兵)을 수습하며 조선 수군 재건에 힘썼다. 한편,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권유를 하였으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싸울 수 있는 전함이 열두 척이나 있습니다"라며 수군 폐지를 무산시켰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은 진도 앞바다 울돌목에서 300여 척의 일본 함대에 응전, 격전 끝에 격퇴시켰다.[1] 이후 이순신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뒤쫓아 싸우다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하였다.[1]
1686년(숙종 12년) 예조판서 이민서(1633~1688)가 비문을 지었다. 이민서는 어릴 적부터 이순신의 사람됨을 그려보았으며, 울돌목(명량)에서의 승리와 이순신의 행적을 추모하는 비석 건립을 위해 비문을 짓게 되었다고 밝혔다. 비석의 높이는 2.67m, 너비는 1.14m로, 조선 시대 석비 양식을 따르고 있다.[1]
일제강점기 때 명량대첩비는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1947년에 해남군의 해안 지역으로 옮겨졌다.[1] 2011년 3월, 비석은 원래 세워졌던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되었다.[1]
이순신이 울돌목 전투에 대해 직접 쓴 《난중일기》와 비교하면 대체로 내용은 일치한다. 그러나 명량대첩비에는 울돌목에서 격파한 왜군 적선 수가 500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난중일기》에 기록된 33척보다 훨씬 부풀려진 것이다. 또한 명량대첩비에는 《난중일기》에 없는 울돌목 전투 당시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 때에 남쪽 백성들이 전란을 피하여 공에게 와서 따르는 자들의 고기잡이 배가 1백여 척이 되었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공이 이 배들을 나누어 바다에 띄어 놓아 마치 전투함인 것처럼 가장하였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철거와 이전으로 인해 비문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해남 향토사학자 민부삼은 《호남읍지》, 민병석 문집과의 비교를 통해 비문 조작 가능성을 주장했다. 민부삼은 현존 비문의 글자 수가 다르고, 일본식 한자 표기가 있으며, 비석 상태가 너무 양호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2]
명량대첩비는 대한민국에 국난이 벌어질 때면 비신이 눈물을 흘려 그것을 예고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1927년 6월 23일자 기사에도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으며, 6.25 전쟁과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명량대첩비 표면이 눈물 흘리듯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명대사의 비석인 밀양 표충비의 전승과도 유사하다.[1]
[1]
뉴스
1950년 5월 6일자 기사
경향신문
1950-05-06
이 석비는 직사각형 받침 위에 비 몸돌을 꽂고, 그 위에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 선조 30년(1597) 이순신 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전라우수영)과 진도 사이 좁은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왜적의 대규모 함대를 무찌른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철천량해전 이후 수습한 10여 척의 배로 왜적 함대 500척을 격파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명량대첩의 의미 및 장군의 충의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1]
비문은 1686년에 쓰여졌으나 비가 세워진 것은 2년 뒤인 1688년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건립하였다.[1]
3. 역사적 배경
4. 건립 과정
비문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1616~1686)이 썼으며, 비신 윗부분에는 홍문관대제학 김만중이 쓴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이 완성되고 2년 뒤인 1688년(숙종 14년) 3월, 전라우수사 박신주가 비를 건립하였다.[1]
5.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6. 난중일기와의 비교
7. 비문 조작 해프닝
민부삼 등이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현존하는 《명량대첩비》 비문과 《호남읍지》(1895년 제작)에 나온 비문 내용이 서로 다르다.
# 《명량대첩비》 비문은 민병석(민부삼의 할아버지)의 문집에도 소개되어 있고 《호남읍지》의 내용과도 일치하며, 문집에 수록된 비문과 《호남읍지》상의 비문은 글자 수가 1,082자인 반면 현존 비문 글자 수는 1,095자로 일본식 한자 표기가 새로 들어갔거나 빠진 글자가 30여 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예: 조부의 문집에는 '丁酉年'으로 기록된 표기가 지금의 비문에는 '丁酉年 九月'로 바뀌어 있다)
# 숙종 때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는 《명량대첩비》가 아직까지 너무 정교하며, 같은 수성암이면서도 정조 때에 건립된 《서산대사비》보다 상태가 더 양호하며, 1942년 당시 일본인들이 초등학생을 동원, 명량대첩비를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비문에는 상처 하나 없다.
명량대첩사업회장 홍형덕은 비문을 옮길 때 동원된 300~400명의 소학교 학생 가운데 자신도 있었음을 증언하며, 비문을 살펴봐도 조작 흔적이 없고 전쟁 중인 당시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비문을 바꿀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비문 조작 가능성을 일축했다.
2006년 2월 22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민부삼 등이 근거 자료로 제시한 《호남읍지》와 민병석 문집 등이 오히려 잘못되었고, 1910년 당시 촬영한 《명량대첩비》의 유리 필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의 대조를 거쳐 현존하는 《명량대첩비》는 진품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3]
8. 이야기거리
참조
[2]
뉴스
2006년 1월 31일자 보도
뉴시스
2006-01-31
[3]
뉴스
2006년 2월 22일자 보도
연합뉴스
2006-02-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