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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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신군부의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광주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된 후,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통해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면서 발생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졌으나,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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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서울역 시위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약 10만 명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어진 대규모 시위이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직전에 발생하여 민주화 열망을 보여주었으나 신군부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 전라남도의 역사 - 전라남도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전라남도는 일제의 경제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으로 고통받았지만, 민중들은 항일 운동을 통해 저항했고, 광주형무소와 목포형무소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황민화 정책이 강요되었다. - 전라남도의 역사 - 명량 해전
명량 해전은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일본 수군을 물리친 해전으로,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 속에서 이순신의 지휘, 지형적 이점, 조류 활용 등으로 일본 수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아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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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다른 명칭 | 오일팔 (Oilpal) 광주 민주화 항쟁 (Gwangju minjuhwa hangjaeng) 광주 항쟁 (Gwangju hangjaeng) |
시기 | 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7일 |
장소 | 광주광역시 |
원인 |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 박정희 암살 사건 대한민국 내 권위주의 전라도 지역의 사회적, 정치적 불만 |
목표 | 민주화 대한민국 독재 통치 종식 |
방법 | 시위 정치 시위 시민 불복종 운동 무장 봉기 |
결과 | 봉기 진압 대한민국 정부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인해 민주화 시위가 무장 봉기로 확대됨 민중 운동에 대한 지지 증가, 1987년 대한민국 독재 통치의 종식으로 이어짐 |
교전 세력 | |
대한민국 정부군 | 하나회 보안사령부 대한민국 육군 경찰 |
광주 시민 | 시위대 무장 시민 시민 수습 위원회 학생 수습 위원회 |
주요 인물 | |
대한민국 정부군 |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윤흥정 안병하 (반군에 의한 잔혹 행위를 목격한 후 편을 바꿈) |
시민군 | '분권화된 지도부', 전라남도 통치 기구 |
병력 규모 | |
대한민국 정부군 | 초기: 3,000명의 공수부대원 광주 봉쇄: 23,000명의 병력 |
시민군 | 200,000명 (추정) |
피해 규모 | |
대한민국 정부군 | 전사: 22명 (아군 오사 13명 포함) 경찰 사망: 4명 (봉기 후 군에 의해 여러 명 추가 사망) 부상: 군인 109명, 경찰 144명 총계: 사망 26명, 부상 253명 |
광주 시민 | 사망: 165명 (확인된 사망자만) 실종: 76명 (사망 추정) 부상: 3,515명 체포: 1,394명 |
총 사망자 추정치 | 600–2,300명 |
투입 부대 | |
대한민국 정부군 | 초기: 제7공수특전여단 제11공수특전여단 보안사령부 505 방위 보안 부대 전남 경찰 광주 봉쇄: 제3공수특전여단 제7공수특전여단 제11공수특전여단 제31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전투병과훈련단 |
시민군 | 미상 (다양한 시민 민병대) |
추가 정보 | |
관련 사건 | 서울의 봄 |
기념 | 5·18 민주묘지 5·18 기념재단 5·18 기념문화센터 |
유네스코 기록 유산 | 1980년 광주 군사 정권에 맞선 5.18 민주화 운동 기록 유산 |
관련 인물 | 윤상원 박남선 김종배 |
관련 작품 | 소년이 온다 (한강) 택시운전사 (영화) 화려한 휴가 (영화) |
지도 | |
이미지 | |
2.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사건 당시 신군부는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로 불렀는데, 이는 민주화 운동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153][154]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움직임과 함께 민주화 요구가 높아졌다. 그러나 12·12 군사 반란으로 전두환 등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18] 신군부는 K-공작 계획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려 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명칭이 나왔다.[155] 이후 문민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이라는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에서 1980년대부터 사용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된다.
3. 발생 배경
1980년 5월, 신군부는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하여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추진했다.[157] 이는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의도였다. 신군부는 '북괴남침설'을 조작하여 집권 명분을 확보하려 했으나,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이를 근거 없는 구실로 판단했다.[158][159]
같은 시기 정부와 국회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신민당과 공화당은 개헌안을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임시국회 소집을 공고했다.[160] 신현확 총리는 헌법 개정 및 개헌 일정 단축을 발표했다.[161]
그러나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이를 저지했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인들을 체포, 연금하고, 학생, 교수, 재야인사 등을 체포했다.[81]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항의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공수부대의 과격 진압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공수부대 투입에는 제31향토방위사단장 정웅의 개입이 있었다.[163]
3. 1.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발생할 반대 집회에 대비하여 진압 병력 투입 및 강경 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1980년 3월부터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실시되었다.[164]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는 체포 위주의 진압 지시를 내려 공수부대원들의 과격 진압을 부추겼다. 실제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 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 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165]
계엄사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5월 21일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상층부의 왜곡된 인식과 지침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165]
4. 전개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계엄령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고,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공수부대가 대학교를 봉쇄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군부대와 기동대의 진압은 점차 과격해져 진압봉을 이용한 폭력과 집단 사격 등 잔혹 행위가 반복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사살당했다.[84] 시위 참가자는 약 20만 명까지 증가했고, 목포를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까지 확산되었다.
5월 19일, 시위 주체는 학생에서 격앙된 시민으로 변화했다. 21일에는 시민들이 버스와 택시를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각목, 철파이프, 화염병 등으로 저항했다. 향토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하고 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최소 54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81] 시민들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 계엄군을 일시 후퇴시켰으나,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고 포위했다.
한국 정부는 광주 시민들을 “스파이에 선동된 폭도”라고 규정했고,[85] 한국 언론은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86] 반면 해외 언론에서는 뉴욕타임스의 헨리 스콧 스톡스 도쿄 지국장 등이 김대중을 “민주화 운동 투사”로 지지했고,[87] 독일 공영방송(ARD) 도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88]가 사건을 보도했다.
지역 유력 인사들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 측과 협상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시민들은 무기를 확보해 한국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86] 지도부는 투쟁파와 협상파로 분열되었다. 5월 26일, 시민군은 미국 개입으로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동지들은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89] 일부 투쟁파를 제외하고 자주적 무장 해제를 하자,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전남도청 진압 명령이 내려졌다. 5월 27일, 윤상원[89] 등이 사살되었지만, 한국군과 경찰도 사상자를 내며 진압 작전이 종료되었다.
군은 최종 희생자가 144명이라 발표했지만(1980년 5월 31일 계엄군 사령관 발표), 시민들은 실제 사망자가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81] 광주 투입 총 병력은 2만 5천 명이었다.[86] 1980년 9월 17일, 김대중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90]
이 사건은 “북한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치부되었지만, 끈질긴 진상 규명 노력으로 1997년 국가 기념일이 되었고, 2001년 사건 관계자를 민주화 유공자로 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91]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이자, 6월 민주항쟁의 원동력이 되었다.[91][86]
2004년 1월 29일, 내란 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100]
4. 1. 사건 초기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령에 항의하던 학생들과 공수부대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오전 10시경, 군인들이 학생들에게 돌격하면서 시위는 전라남도청 앞으로 이동했고, 시위대 규모는 2000명으로 늘어났다.[26] 오후 4시경부터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시위 진압은 잔혹해졌다. 제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 소속 686명의 군인들은 시위대와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폭행, 고문, 살해했으며, 시위와 관련 없는 건물까지 공격했다.[26][27]5월 20일 광주역 근처에서 군의 발포로 다수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같은 날, 시위대는 MBC 광주 방송국을 방화했는데, 이는 광주 상황에 대한 왜곡 보도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28] 도청 근처 경찰 바리케이드에서 차량이 경찰을 덮쳐 경찰 4명이 사망했다.[29]
같은 날 밤, 수백 대의 택시가 버스, 트럭 등과 함께 도청 앞으로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부의 잔혹 행위에 분노하여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민주주의의 운전사들"이었다. 군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이들을 폭행하며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택시 운전사들이 부상당하거나, 택시를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다 총격을 받기도 했다.
5월 21일 오후 1시경, 군은 전남도청 앞 군중에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일부 시위대는 인근 마을의 예비군 무기고와 경찰서를 급습하여 M1 소총과 M1/M2 카빈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북한 선동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경계하며 "북괴는 오판말라"(북괴는 오판말라한국어)는 플래카드를 들기도 했다.[30][29] 오후 5시 30분경, 시민 민병대는 경기관총 2정을 확보하여 군에 사격했고, 군은 시내에서 후퇴했다.
4. 1. 1.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1980년 5월 15일, 광주에서는 대학생 3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81] 5월 17일, 신군부의 압력으로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가 의결되었다. 보안사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되어 대학 휴교령, 보도 검열 강화, 정치활동 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81]4. 1. 2.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은 학교 폐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전 9시 30분경, 약 200명의 학생들이 학교 앞에 모였고, 30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이들에 맞섰다. 오전 10시경, 군인들이 학생들에게 돌격했고, 시위는 광주 시내 전라남도청 앞으로 이어졌다. 하루 동안 충돌에 참여한 사람은 약 2000명으로 늘어났다.[26]초기에는 지역 경찰이 시위를 진압했지만, 오후 4시경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진압에 나섰다. 제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에서 온 686명의 군인들이 도착하면서 봉기 진압은 잔혹한 단계가 시작되었다.[26] 이들은 시위대와 방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군인들은 총검을 사용하여 주민들을 무차별 공격, 고문, 살해했다. 또한 호텔, 카페, 이발소 등 시위와 관련 없는 건물들을 급습했다.[27] 최초로 알려진 사망자는 29세의 청각장애인 김경철로, 방관자임에도 불구하고 곤봉으로 맞아 사망했다.
4. 1. 3.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1980년 5월 18일,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에 투입하여 시위 진압을 시도했다.[26]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26] 군인들은 총검을 사용하여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고문했으며,[27] 호텔, 카페, 이발소 등 시위와 관련 없는 건물들을 급습했다.[27] 최초로 알려진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29세) 씨로, 시위와 관련 없이 길을 걷다 군인들에게 곤봉으로 맞아 사망했다.[27]4. 2. 전개 과정
1980년 5월,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신군부는 정치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을 체포했다.[26]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26] 신군부는 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강경 진압을 통해 시위를 잠재우려 했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했다.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위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폭행했다. 이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은 10대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5월 21일 13시경, 계엄군은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후 철수했다. 같은 날 저녁,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와 지역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5월 27일 0시,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여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제3공수여단, 제7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 병력이 투입되었으며, M16A1 소총과 섬광탄으로 무장하고 시내로 진입하여 90분 만에 시민군을 제압했다.[26][39]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26] 호남 지역에서는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당시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학생운동권 내 반미 감정이 높아졌고, 이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반미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4. 2. 1.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모여 학교 폐쇄에 항의하던 약 200명의 학생들은 30명의 공수부대원들과 맞섰다. 오전 10시경, 군인들이 학생들에게 돌격했고, 시위는 광주 시내 전라남도청 앞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지역 경찰이 시위를 진압했지만, 오후 4시경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26]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시위대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심지어 총검을 사용하여 공격, 고문, 살해했다.[27] 최초로 알려진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로, 시위와 관련 없음에도 불구하고 곤봉으로 맞아 사망했다.[26]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하여, 대학생 중심의 시위에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합류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 폭행하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과격 진압을 자행했다.[84] 일부 시민들은 전투교육사령부에 항의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언론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했다.[85][86]
5월 20일, 시위대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고,[84] 광주 MBC 방송국이 방화되었다.[28] 이날 밤, 수백 대의 택시가 버스, 트럭, 승용차 행렬을 이끌고 도청 앞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부의 잔혹함에 분노하여 시위대를 지지하기 위해 나타났으며, 군인들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이들을 폭행했다. 많은 택시 운전사들이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려다 공격을 받았고, 일부는 택시를 무기 또는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려다 총격을 받았다.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28]
4. 2. 2.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1980년 5월 21일,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했다. 오후 1시경, 계엄군은 전남도청 앞에 모인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30][29]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건물에서 조준 사격을 가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27]4. 2. 3. 광주 시민의 항쟁
5월 21일 오후 1시경,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하자 일부 시민들은 인근 마을의 예비군 무기고와 경찰서를 급습하여 M1 소총과 M1/M2 카빈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30][29] 또한, 아시아자동차 공장(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고, 나주, 화순 등지에서 무기를 획득하여 시민군을 결성했다.[86] 시민군은 북한의 선동자로 여겨지는 자들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북괴는 오판말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30][29]오후 늦게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도청 광장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오후 5시 30분경 시민군은 두 정의 경기관총을 확보하여 계엄군에게 사격, 시내에서 후퇴시켰다.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고, 시민군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86]
한편,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는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4. 2. 4.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와 지역 주민들이 희생되었다.[26] 5월 23일, 지원동에서 도시를 빠져나가려던 버스에 군인들이 발포하여 승객 18명 중 15명이 사망했고, 부상당한 승객 2명은 현장에서 처형되었다.5월 24일에는 원제저수지를 건너려던 전재수[31]와 방광범[32] 두 10대 소년이 제11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사살되었다.[33] 같은 날 오후 1시 55분, 송암동에서 제11공수여단 제63특수작전대대와 전투병과교육사령부(CATC) 육군보병학교 훈련대대 병력 간 오인 사격이 발생하여 13명의 군인이 사망했다.[34] 제11공수여단 병력은 송암동 인근 마을에서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과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근처 상점들을 약탈했다.[35] 계엄사령부는 공수여단 병력이 다른 통신 채널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암동에서 발생한 아군 오인사격을 군 내부 반란분자의 소행으로 잘못 해석했다.[36]
4. 2. 5. 광주 시민의 자치
5월 22일, 모든 군대는 증원을 기다리기 위해 도시 외곽의 시골 지역으로 후퇴했다. 군대는 도시로부터 모든 도로와 통신을 차단했고, 민병대와 군대 사이의 싸움은 일시적으로 잠잠해졌다.[30]이후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고립되었지만, 시민들은 자치 질서를 찾아갔다. 시민군은 계엄 해제와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계엄군과 협상에 나섰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86]
지역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지도부는 투쟁파와 협상파로 분열되었다. 5월 26일, 시민군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개입하면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동지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89]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며, 프랑스 파리 코뮌에 비유되기도 한다.
4. 2. 6. 평화집회
5월 21일, 일부 시위대는 인근 마을의 예비군 무기고와 경찰서를 급습하여 M1 소총과 M1/M2 카빈 소총을 확보했다.[30] 민병대는 또한 북한의 선동자로 여겨지는 자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북괴는 오판말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30][29]'해방 광주' 시기, 일부 시민들은 무기를 자진 반납하기도 했지만, 일부는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했다.
4. 2. 7. 광주 재진입 작전
1980년 5월 27일 0시,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여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26]5월 27일 새벽 4시, 계엄사령부는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에는 M16A1 소총과 섬광탄으로 무장한 제3공수여단, 제7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 병력이 동원되었다. 병사들은 방탄조끼, 흰색 띠가 달린 잎사귀 위장 헬멧을 착용하고 계급장과 패치가 없는 일반 보병 전투복으로 위장했다. 3개 공수여단이 작전의 선봉에 섰고,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 제31보병사단이 후속 지원 부대로 참여했다. 육군교육사령부(CATC) 예하 3개 부대(보병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병력은 작전 중 차단 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시내로 진입하여 90분 만에 민병대를 제압했다.[26][39]
5월 26일, 시민군은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면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동지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89] 일부 투쟁파를 제외하고는 자주적인 무장 해제를 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점령당한 전남도청에 대한 진압 명령이 내려졌다. 5월 27일, 시민군의 선봉에 서서 무기고를 공격했던 윤상원[89] 등이 사살되었지만, 한국군과 경찰도 사상자를 내면서 진압 작전이 종료되었다.
4. 3. 미국 측의 반응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 및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미국은 5월 18일 계엄령 실시에 항의했다.[58]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에 있지 않았다. 미국은 5·18 초기에는 방관적이었으나, 5월 21일부터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은 신군부와 반대 세력 양쪽으로부터 입장 표명 압력을 받았다. 5월 22일, 미국은 광주 상황에 대해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질서 회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방침을 정했다.[76]2021년 7월,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는 미국 대사 윌리엄 H. 글리스틴(William H. Gleysteen)이 군대의 진압 계획에 대해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하루 전에 통보받았다는 것을 밝혔다.[78] 공개된 문서는 글리스틴이 미국이 군사 진압에 개입했다는 방송 보도들 속에서 광주 지역의 반미 감정 고조에 대한 워싱턴의 우려를 표명했음을 보여준다. 해제되기 전까지 미국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사전 지식과 개입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해왔다.[58]
4. 4. 날짜별 상세 일지
날짜 | 주요 내용 |
---|---|
5월 16일 이전 | 전국 대학생들의 서울역 광장 집회 |
5월 17일 |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민주인사 예비 검속, 국회 기능 마비[81] |
5월 18일 |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항의 시위, 계엄군의 강경 진압,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 사망[26] |
5월 19일 | 시민들의 시위 참여 증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 |
5월 20일 | 택시 및 버스 차량 시위, 광주 MBC 방화,[28] 계엄군 발포[29] |
5월 21일 | 계엄군 집단 발포, 시민들의 무장, 계엄군 광주 외곽 철수,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 발표[29] |
5월 22일 | 광주 고립, 시민군 계엄군 축출, 시민수습위원회 구성 |
5월 23일 |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5월 24일 | 송암동 계엄군 오인 사격,[34]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5월 25일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5월 26일 | 계엄군 재진입 시도, 시민군 결사 항전 결의[26] |
5월 27일 | 계엄군 광주 재진입, 도청 점령, 진압 작전 종료[26] |
5. 피해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 동안 이어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42][43][44] 5·18 유족회에 따르면 5월 18일부터 27일 사이에 최소 165명이 사망했고, 76명은 여전히 실종된 상태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47]
광주 민주화 운동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수치가 없다. 1980년 5월 광주의 사망자 수는 과거 평균보다 약 2,300명 증가한 것으로 추산되며, 사망자 수는 1,000명에서 2,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민간인 부상자 수 또한 1,800명에서 3,500명으로 추산되는 등 그 수치가 크게 차이가 난다.[45]
학살 직후 정부의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이 부상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46]
5·18 기념재단에서 지급한 보상금 내역은 다음과 같다.
분류 | 신청자 수 | 취하자 수 | 기각 수 | 인정 수 | 지급액 () | 비고 (중복 인원) |
---|---|---|---|---|---|---|
합계 | 7,716 | 130 | 2,526 | 5,060 | 229,732 | (698) |
사망 | 240 | 16 | 70 | 154 | 17,042 | |
행방불명 | 409 | 18 | 317 | 70 | 9,048 | |
부상 | 5,019 | 50 | 1,761 | 3,028 | 172,775 | (12) |
기타 | 2,052 | 48 | 378 | 1,628 | 30,867 | (686) |
송암동에서 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13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22명의 군인과 4명의 경찰이 학살 과정에서 사망했다. 체포된 시위대를 풀어준 경찰관들이 군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경찰 피해자 수는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47]
5. 1. 연행자 고문 피해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 및 연행되었고,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조작을 위해 허위 자백을 강요하는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피해자들은 석방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렸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55.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고 있으며, 자살자 비율은 10.4%이다.6. 영향과 평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묵인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반미 감정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91]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소요 사태로 왜곡했다. 그러나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 속에서 국회 광주진상특위가 열려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를 통해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되었다.[150][151]
1996년 검찰 수사를 통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1997년에 5·18 및 12·12 군사 반란 관련자들을 처벌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재평가했다.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 문란 행위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 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하고,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주영복 등을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152]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광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광주민중봉기', '광주시민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초기에는 신군부와 관변 언론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불렸으나, 이는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왜곡된 호칭이었다.[153][154]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노태우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다.[155] 이후 문민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1980년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사건 발생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된다.
6. 1. 의의 및 교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에 맞서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봉기했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을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다른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감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2. 사건 당시에 언론으로 말미암은 왜곡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하기 시작했다.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다. 당시 대한민국 내 언론은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153][154][91]
6. 3. 정치인들의 평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며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추진했다.[150][151] 그는 전두환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5.18의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5.18의 교훈을 인권 정신, 비폭력 정신, 시민 정신, 평화 정신이라고 규정했다. 2004년 1월 2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100] 재판부는 "피고인의 내란음모 사건은 전두환 등 헌정질서 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것으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판시했다. 판결 후 김대중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대해 "신군부의 반민주적인 행동이었다"고 비판했다.[100]
노무현 전 대통령은 5.18을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습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는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 요청합니다"라고 말했다.[101][102][103] 2020년 5월 17일, 광주문화방송 인터뷰에서는 서울역 회군에 참여했던 것에 대해 "아직도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104]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8년도 기념식에는 참석했지만, 2009년 이후 위령제에는 참석하지 않았다.[99]
박근혜 전 대통령은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6. 4. 지만원의 북한 특수부대 개입 주장
지만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폄하하며, 북한군 개입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5·18이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 사건이며, 북한 특수부대의 공작이었다고 주장했다.[120][121][122] 지만원은 5·18 희생자 대다수가 한국군이 사용하던 M16 소총이 아닌 다른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는 점을 북한군 개입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122]2012년 대법원은 지만원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법적·역사적 평가가 확립"되었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120][121][122] 이는 지만원의 주장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124] 이후 지만원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모델인 김사복 등 5·18 민주화운동 참여 시민들을 북한 특수부대라고 지칭하여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2023년 1월 징역 2년의 실형을 확정받았다.[125]
자유북한군인연합 등 일부 탈북자 단체 역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6. 4. 1. 공작부대 개입설을 둘러싼 논란과 반박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부족하며 신빙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지만원은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5·18 당시 촬영된 사진 속 인물들을 북한군 특수부대원, 이른바 '광수'라고 지칭하며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117] 그러나 사진 속 인물들 대부분은 당시 광주 시민이었고, 북한으로 복귀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117] 심지어 탈북자들조차 지만원의 주장이 허황되다고 비판하며, 탈북자 단체는 2019년 지만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117]
지만원은 5·18 희생자들의 사망 원인이 M16 소총이 아닌 다른 총기라는 점을 근거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기도 했다.[122] 그러나 1995년 국방부 재조사 결과, 희생자 대부분은 한국군이 사용하던 M16 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126]
2006년 조선일보는 북한군 출신 전직 군인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지만,[118] 5·18 관련 단체들은 증언과 증거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119]
조갑제는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하며 북한군 개입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1980년 계엄사령부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 청문회, 1995~97년 5·18 재판, 2012년 국가정보원 조사 등에서 북한군 개입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131] 또한 당시 시위대가 '김일성은 오판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점을 들어 친북 세력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131]
2013년 탈북자 출신 임천영은 TV 프로그램에서 북한군 600명과 함께 5·18에 개입했다고 주장했지만,[132][133]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여러 언론에서 조작 의혹을 제기했고,[134][133] 해당 방송사는 사과 방송을 했다.[136][137] 다른 탈북자들 역시 북한군 개입설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139]
2017년 기밀 해제된 CIA 문서는 "북한은 한국의 정치적 불안을 구실로 어떤 군사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명시하며 북한 개입설을 부인했다.[94] 5·18 기념재단 김양래 상임이사는 이 문서가 북한 개입설을 완전히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평가했다.[94]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희생자들을 "종북 좌파가 만든 괴물"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일었다.
더불어민주당은 5·18을 왜곡하거나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5·18 역사 왜곡 처벌법" 제정을 추진했고, 2020년 12월 9일 국회에서 해당 법안이 통과되었다.[141]
6. 4. 2. 특수부대 개입설 및 탈북자 주장에 대한 판결
2013년 5월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결탁하여 특수부대를 보냈다는 글을 쓴 지만원에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탈북자의 수기는 출처와 증언자가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과 김일성의 공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라고 판단했다.[127] 판결에 불복한 지만원은 즉시 항소하며 북한이 개입한 도시 게릴라 작전이었다는 글을 인터넷에 게재했다.[127]6. 5. 여타 보수 인사들의 입장
조갑제는 5.18 민주화 운동을 "반공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하며, 일부 우파에서 제기된 북한군 개입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129][130] 그는 이러한 주장이 좌파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30] 조갑제는 1980년 사건 직후 계엄사령부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 청문회, 1995~97년 5·18 재판, 2012년 국가정보원 비공개 조사 등에서도 북한군 개입 증거나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고, 당시 시위대는 "김일성은 오판하지 마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점을 지적했다.[131]6. 6. 언론 보도
1980년 당시 한국 언론은 신군부의 언론 사전검열과 관제보도로 인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86] 한국 정부는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스파이에 선동된 폭도”라고 규정했다.[85]해외 언론에서는 뉴욕타임스의 헨리 스콧 스톡스 도쿄 지국장이 김대중을 “민주화 운동 투사”로 지지하며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설을 썼고,[87] 독일 공영방송(ARD) 도쿄 특파원이었던 위르겐 힌츠페터[88]가 이 사건을 보도했다.
6. 6. 1. 대한민국의 언론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는 5·18을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한다.[91] 당시 계엄군이었던 이경남 목사는 5.21 도청 앞 집단 발포의 계기가 진압군 장갑차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는 계엄군의 폭력성을 증언했다. 중앙일보 장재열 기자는 5.18 당시 수첩에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했다. 조선일보 서청원은 5.18이 정치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JTBC는 1980년 당시 TBC 동양방송의 미공개 영상을 방송했다.1980년 당시 한국 언론은 신군부의 언론 사전검열과 관제보도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93] 신군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하여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왜곡 보도했다.[85][91]
하지만, 해외 언론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뉴욕타임스의 헨리 스콧 스톡스 도쿄 지국장은 김대중을 "민주화 운동 투사"로 지지하는 사설을 썼다.[87] 독일 공영방송(ARD) 도쿄 특파원이었던 유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광주 현장을 취재하여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88] 그의 보도는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95]
2021년 5월 27일, 아사히신문은 오사카 본사 사진부와 사회부 기자 2명이 당시 광주에서 촬영한 컬러 사진을 포함한 사진 필름을 다량 발견했다고 보도했다.[96]
6. 6. 2. 외국의 언론 및 기자
AFP프랑스어 통신은 광주 시민들이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보도했다.[87] 르 몽드 지의 필립 퐁스는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87] 요미우리 신문의 마쓰나가 세이타로는 광주항쟁이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87] AP 통신의 샘 제임슨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87] 뉴욕타임스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계엄군의 만행을 비판하고, 김대중을 “민주화 운동 투사”로 지지하며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설을 실었다.[87] 선 지의 블레들리 마틴 볼티모어는 광주항쟁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87] 시카고 트리뷴 특파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대한민국 사회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87] 독일의 사진작가 마티아스 라이는 광주 시민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87] 노먼 소프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 투쟁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다.[87] 독일 공영방송 ARD 도쿄 특파원이었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의 참상을 서방 세계에 알렸다.[88] AP 통신 기자인 테리 앤더슨은 5.18이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고 진술했다.[87]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병실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87]2017년 8월, 위르겐 힌츠페터를 모델로 한 한국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해 가장 많이 관람된 한국 영화가 되었다.[95]
2021년 5월 27일, 아사히신문은 오사카 본사 사진부와 사회부 기자 2명이 당시 광주에서 촬영한 컬러 사진을 포함한 사진 필름을 다량 발견했다고 보도했다.[96]
6. 7. 학계의 평가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 의식을 강조했다.[74]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5.18을 '미래 사회에 자유라는 빛을 던져준 사건'으로 평가했다.[74]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한국어에 기고한 "신자유주의와 광주항쟁"이라는 논문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었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이 독재로부터의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되었다고 말했다.[74] 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은 5.18을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기술했다.[74]6. 8. 인권, 시민운동가들의 평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여러 인권 및 시민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들의 평가를 통해 5·18의 의미와 가치가 재조명되었다.광주인권상 수상자들은 5·18과 광주의 인권 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바울 슈나이스 목사는 광주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아웅산 수치 여사는 5·18의 정신과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5·18을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광주를 방문하여 광주 시민들을 위로했다.
7. 관련 판결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를 통해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며 재평가가 시작되었다.[150][151] 이후 신군부 인사들이 고소, 고발되었고, 1996년 검찰 수사를 통해 신군부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7. 1. 5.18 사건 대법원 판결
1997년 대법원은 12·12와 5·18 진압 관련자들을 처벌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재평가했다.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 문란 행위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헌법 수호를 위해 결집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152]8.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은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되었고,[150][151] 1996년 검찰 수사를 통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대법원은 1997년에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152]
9. 5.18 민주유공자 예우
1993년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은 5·13 담화를 통해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며 재평가가 가시화되었다.[150][151] 1996년 검찰 수사 결과,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은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공식적으로 재평가했다.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152]
10. 기타
5·18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윤기권은 광주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이후 월북했다.[150] 5·18 현장 증인들은 진압군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151] 5·18 당시 '여학생 유방 난자' 유언비어가 있었고, 관련 증언과 기록이 존재한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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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8
[133]
뉴스
「光州事件に北朝鮮が介入」…歴史わい曲めぐる議論広がる(1)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13-05-20
[134]
뉴스
‘光州事件への北韓軍介入’報道は看過できない
http://japan.hani.co[...]
한겨레
2013-05-23
[135]
뉴스
"5・18は北の特殊部隊が介入した武装暴動" TV朝鮮 時事番組 出演者の妄言
http://japan.hani.co[...]
한겨레
2013-05-16
[136]
뉴스
[速報] チャンネルA、‘5・18北韓介入報道’公式謝罪放送
http://japan.hani.co[...]
한겨레
2013-05-22
[137]
뉴스
TV朝鮮も‘5・18北韓軍浸透説’放送 謝罪
http://japan.hani.co[...]
한겨레
2013-05-23
[138]
뉴스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사태 개입 주장은 이래서 말이 안 됩니다!(大隊規模の北朝鮮軍の光州事態介入主張はこれで話になりません)
http://www.chogabje.[...]
조갑제.com
2013-05-19
[139]
뉴스
5·18 북한군 개입설?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 "허황된 얘기" 일축(5・18北朝鮮軍介入説?北朝鮮人民軍出身の脱北者たち"荒唐無稽な話"一蹴)
http://news.naver.co[...]
쿠키뉴스(クッキーニュース)
2013-05-21
[140]
뉴스
韓国与党「5・18歪曲処罰法を作る」…調査委に強制調査権与える案も推進
http://japan.hani.co[...]
한겨레
2020-05-19
[141]
뉴스
公捜処、5・18処罰、対北ビラ禁止…与党は一方的処理しておいて「歴史的成果」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20-12-15
[142]
웹사이트
シネマコリア 韓国映画情報『五月 - 夢の国』
http://cinemakorea.o[...]
[143]
웹사이트
光州事件で殺されたの人々の声が聞こえる〜BTS(防弾少年団)から日本と世界を見つめる(3) | 連載 デルクイ | WEB世界
https://websekai.iwa[...]
[144]
뉴스
5월단체, "5.18 관련 사망자 606명"
https://news.naver.c[...]
[145]
뉴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http://news.khan.co.[...]
[146]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사전의 광주민중항쟁 설명
http://enc.daum.net/[...]
[147]
뉴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국가유공자 지정키로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97-05-12
[148]
웹인용
[인터뷰] ‘소년이 온다’ 한강 “압도적인 고통으로 쓴 작품”
https://news.kbs.co.[...]
[149]
뉴스
여고생 일기장에 '5월, 그날의 광주'가 있었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1-05-26
[150]
뉴스
김영삼 대통령, 광주 민주화항쟁 관련 특별담화문 발표
https://web.archive.[...]
MBC 뉴스데스크
1993-05-13
[151]
웹인용
5·18민주화운동사
https://web.archive.[...]
[152]
판결문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http://glaw.scourt.g[...]
[153]
뉴스
노컷뉴스
http://www.cbs.co.kr[...]
[154]
뉴스
해외촛불 파도타기, 다시 타올랐습니다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155]
뉴스
https://imnews.imbc.[...]
[156]
뉴스
http://newslibrary.n[...]
1988-06-21
[157]
뉴스
5·18사건 재수사 종결, 내일 기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6-01-22
[158]
뉴스
광주항쟁 30년 광주가 우리에게 묻는 것 - 남은 자의 과제
https://news.naver.c[...]
[159]
웹사이트
일본 커넥션 - 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http://www.imbc.com/[...]
[160]
뉴스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http://dna.naver.com[...]
[161]
뉴스
정부 개헌일정 2~3개월 단축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0-05-12
[162]
뉴스
시위대열 속 청년 버스탈취 돌진 전경대원 1명사망 5명중상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0-05-16
[163]
웹인용
80년 광주, 정호용과 정웅
http://cafe.daum.net[...]
2007-05-30
[164]
판결문
12·12 5·18 사건 1심, 항소심, 상고심 판결문
[165]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진상조사결과 보고서 과격진압의 배경 (60쪽 ~ 67쪽)
[166]
뉴스
검찰이 밝힌 광주시위와 진압 전말
https://news.naver.c[...]
[167]
뉴스
80년 5월의 광주…그날 무슨일이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10-05-17
[168]
뉴스
<전.노씨등 8명 공소장 전문>-4
https://news.v.daum.[...]
연합뉴스
1996-01-23
[169]
보고서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58쪽 , 1995. 7. 18.
1995-07-18
[170]
웹인용
5·18 상황일지
https://web.archive.[...]
[171]
기타
〈전교사 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 있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 명시돼 있다.
[172]
회의록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7쪽
[173]
회의록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7~8쪽
[174]
보고서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71쪽
[175]
기타
보안사 505보안부대
[176]
보고서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177]
보고서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78]
뉴스
국방부 장관 증언
https://news.naver.c[...]
[179]
뉴스
5·18 '충정명령'은 무차별진압 작전
https://news.naver.c[...]
[180]
뉴스
5ㆍ18 유혈진압 치밀하게 준비
https://news.naver.c[...]
[181]
웹인용
理性회복 질서유지를" 李戒嚴사령관 光州사태에談話
https://newslibrary.[...]
1980-05-22
[182]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진상조사결과 보고서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183]
뉴스
광주생업질서 서서히 되찾아가
http://dna.naver.com[...]
[184]
뉴스
"5·18 당시 행정기관의 역할 유지됐다"
https://news.naver.c[...]
[185]
뉴스
5·18 당시 완전 행정공백 상태 아니었다
https://news.naver.c[...]
[186]
웹인용
"권력은 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http://www.independe[...]
2013-12-12
[187]
성명서
1980년 5월 대한민국 光州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정부 성명서
[188]
간행물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http://shindonga.don[...]
신동아
[189]
간행물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http://shindonga.don[...]
신동아
[190]
간행물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http://shindonga.don[...]
신동아
[191]
간행물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http://shindonga.don[...]
신동아
[192]
뉴스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193]
웹인용
[단독] “고문 뒤 석방 전날 성폭행” … 5월항쟁 38년만의 미투
http://www.hani.co.k[...]
한겨레
2018-05-08
[194]
뉴스
5·18 미완의 과제…관련자료 공개돼야
http://media.daum.ne[...]
[195]
뉴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http://news.khan.co.[...]
경향신문
[196]
웹사이트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www.518.org/e[...]
[197]
뉴스
[공수부대원 양심선언] "5·18때 민간인 사살 암매장"
https://news.naver.c[...]
[198]
뉴스인용
5.18당시 사망자중 14세 이하 8명
http://media.daum.ne[...]
1995-12-07
[199]
뉴스
'5·18 사망자 606명'…통계자료 발표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05-05-13
[200]
뉴스
광주사태 사망, 발표대로 191명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5-06-07
[201]
뉴스
"5·18 경험자들 아직도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http://www.pdjournal[...]
연합뉴스
2010-05-17
[202]
뉴스
자살, 알콜중독..끝나지 않은 5·18의 상흔(KBS스페셜)
http://media.daum.ne[...]
뉴스엔
2009-05-17
[203]
뉴스
'아직도 5·18'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http://www.dailian.c[...]
[204]
뉴스
5·18 당시 민주인사 고문 현장 '원형 보존'
https://news.naver.c[...]
[205]
뉴스
5·18 수형 피해자 "평균 9.5회 고문당해"
https://news.naver.c[...]
[206]
뉴스
알고 봅시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사살과 고문
https://news.naver.c[...]
[207]
뉴스
기념재단 용역보고회 "피해자 절반 외상후 스트레스" 자살자만 42명…시범프로그램서 분노조절 등 효과
http://www.hani.co.k[...]
한겨레 신문
2012-03-28
[208]
웹인용
광주민주화운동
http://contents.arch[...]
국가기록원
2006-12-01
[209]
뉴스인용
5·18 진압자·간첩조작 유공자 등 훈포장·표창 무더기 박탈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8-07-10
[210]
서적
우리역사 이야기3
돌베개
[211]
보고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12]
뉴스
신문사 안에 상주한 군인들... "사표 내놓고 일해라"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3-01-26
[213]
성명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성명서
[214]
뉴스
광주MBC·KBS의 32년만에 쓰는 반성문
http://news1.kr/arti[...]
[215]
뉴스
김영삼 前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야"
http://www.pdjournal[...]
PD저널
2008-05-19
[216]
뉴스
김대통령 "5·18 특별법 조속 제정"
https://news.naver.c[...]
[217]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photoessay.pr[...]
2010-04-22
[218]
뉴스
노무현 대통령 5·18민주화운동 27주년 기념사
http://media.daum.ne[...]
[219]
뉴스
박근혜, "5·18은 민주화 운동"
http://www.viewsnnew[...]
뷰스앤 뉴스
2009-03-21
[220]
뉴스
李대통령 5·18민주화운동 기념사
https://news.naver.c[...]
[221]
뉴스
스티븐스 대사, 5·18 민주묘지 참배
http://news.chosun.c[...]
조선닷컴
[222]
뉴스
http://media.daum.ne[...]
Daum 미디어다음
[223]
웹페이지
전두환과 미국의 거래에 대해
http://www.ddanzi.co[...]
[224]
잡지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16-06
[225]
웹사이트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홈페이지
http://www.systemclu[...]
[226]
뉴스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http://www.dailian.c[...]
(주)이비뉴스
2009-03-21
[227]
뉴스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 - 프리존뉴스
http://www.freezonen[...]
[228]
뉴스
탈북자들 "5·18때 북한군 6백여명 개입" 파문
http://www.viewsnnew[...]
뷰스앤뉴스
2008-10-31
[229]
뉴스
80년 광주학살을 왜 북한소행이라고 주장하나?
https://news.naver.c[...]
[230]
보고서
12·12, 5·17, 5·18 조사결과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231]
보고서
12·12, 5·17, 5·18 조사결과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232]
뉴스
북한, '5·18'을 반미 운동으로 왜곡 선전
http://www.rfa.org/k[...]
[233]
뉴스
"사진에 나온 시체는 모두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
https://news.naver.c[...]
[234]
뉴스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0-05-12
[235]
뉴스
노컷뉴스
http://www.cbs.co.kr[...]
[236]
웹페이지
5/16 (월) 정수만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장 - "5·18은 북한소행이다" 서석구변호사 발언 반론
http://talk.imbc.com[...]
[237]
뉴스
북한 특수부대 소행? "2차 광주시민 학살 행위"
https://news.naver.c[...]
[238]
뉴스
"김정일 정권 붕괴, 軍이 바뀌어야 가능"
http://www.dailynk.c[...]
[239]
뉴스
5·18 북한군 개입설?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 "허황된 얘기" 일축
https://news.naver.c[...]
[240]
뉴스
"북한특수군이 광주학살" 지만원 항소심도 유죄
https://news.naver.c[...]
[241]
웹페이지
기자 趙 甲 濟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http://www.chogabje.[...]
[242]
웹페이지
기자 趙 甲 濟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http://www.chogabje.[...]
[243]
웹페이지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
http://www.chogabje.[...]
[244]
뉴스
박근혜, "5·18은 민주화 운동"
http://www.viewsnnew[...]
뷰스앤뉴스
2007-08-05
[245]
뉴스
제28주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엄수
http://cnbnews.com/c[...]
CNB 뉴스
2008-05-18
[246]
뉴스
'그 때' 특전사 출신 목사가 고백하는 5·18 광주민중항쟁
http://blog.daum.net[...]
코리아포커스
2006-05-18
[247]
뉴스
5·18 특전사 진압군의 회한 "너 아군이야? 적군이야?"
http://www.cbs.co.kr[...]
[248]
웹사이트
17년 만의 취재수첩! '5·18특파원리포트' 햇빛
http://h21.hani.co.k[...]
[249]
웹사이트
"광주항쟁은 민족의 자존심" 외신기자들이 본 광주의 진실
http://inews.gwangju[...]
[250]
뉴스
TBC의 '80년 광주' 단독 영상, 31년 만에 공개합니다
http://news.jtbc.co.[...]
JTBC 뉴스
2011-12-01
[251]
뉴스
계엄사령부 눈 피해 찍은 '80년 광주' 단독 영상 공개
http://news.jtbc.co.[...]
JTBC 뉴스
2011-12-02
[252]
웹사이트
출처 확인
https://news.naver.c[...]
[253]
웹인용
외국인이 증언하는 80년 5월 광주/광주사망자 3백명은 넘는다./필립 퐁스
http://altair.chonna[...]
[254]
웹사이트
5·18 역사현장 누볐던 기자들의 취재기 공개
http://www.munhwa.co[...]
[255]
웹인용
외신기자들이 본 광주의 진실
http://inews.gwangju[...]
[256]
웹사이트
빛이 있다는 것은 모두 거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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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5·18을 말한다-17년만에 공개된 취재수첩
[258]
웹사이트
한겨레 21
http://h21.hani.co.k[...]
[259]
웹사이트
5·18기자 도널드 커크 "'화려한 휴가' 잘 표현" 등 김대중 대통령 발언
http://www.newsen.co[...]
[260]
뉴스
[사람들] 광주서 5·18 기록하는 독일인 사진작가
http://news.joins.co[...]
[261]
웹사이트
서울 첫 상주특파원 눈에 비친 5·18 광주
https://news.naver.c[...]
[262]
웹인용
5·18 세계에 알린 독일기자 광주 안장된다
http://inews.gw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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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광주항쟁은 민족의 자존심" 외신기자들이 본 광주의 진실
http://inews.gw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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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다시 부활한 '광주민주항쟁'
http://www.mediat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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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화려한 휴가', 외신기자들의 생생한 증언 공개
http://www.chosun.co[...]
[266]
웹사이트
한홍구 '5·18 강연'에 새내기 눈물 '펑펑'
http://www.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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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세계인이 말하는 '5·18'
http://media.daum.ne[...]
[268]
웹사이트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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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수치 여사 "5·18은 아시아 민주주의에 큰 영향"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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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김 추기경 5·18서신 "부상자 걱정된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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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광주의 아픔 보듬은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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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당시 대법원 판결문
http://glaw.scour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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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대법원 1983.3.8. 선고 82도3248 판결
http://glaw.scourt.g[...]
1983-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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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이회창 총재가 참여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 (요약)
http://ww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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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2·12 5·18 사건 대법원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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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세계기록유산 등재…5·18 세계화 본격 추진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1-05-25
[277]
뉴스
광주서 5.18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 기념행사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1-05-28
[278]
뉴스
5·18운동, 유네스코 등재 '임박'…보수단체 저지
https://news.naver.c[...]
스포츠서울
2011-05-13
[279]
뉴스
5·18, 유네스코 첫 세계인권교과서에 실린다
https://news.v.daum.[...]
동아일보
2013-05-20
[280]
웹사이트
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 Republic of Korea
http://www.unesco.or[...]
[281]
뉴스
유네스코 “5·18, 아시아 민주화·냉전 해체에 기여”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3-05-22
[282]
뉴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책자 5·18의미 첫 공개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3-05-21
[28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unesco.or[...]
2011-09-10
[284]
뉴스
유네스코 등재 '5·18 여고생의 일기' 주목
http://news.nate.com[...]
뉴시스
2011-05-25
[285]
뉴스
"5·18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선포…헌법 전문 명시 추진"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1-09-04
[286]
뉴스
'임을 위한…' 세계기록유산 추가등재 가능한가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3-06-19
[287]
뉴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선포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1-09-05
[288]
뉴스
5.18유공자 자녀 교사공채 가산점 '논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4-11-15
[289]
뉴스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 입법발의
http://www.mt.co.kr/[...]
머니투데이
2011-12-29
[290]
웹인용
cnu518 > 5.18관련자료 1 페이지
http://altair.chonna[...]
2011-06-10
[291]
뉴스
파시스트 조갑제의 악랄한 '5·18 역사왜곡'
https://news.naver.c[...]
[292]
뉴스
우리 안의 광주 - 30년 전 광주에선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0-05-09
[293]
뉴스
민화위 광주사태 증언 내용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8-02-09
[294]
간행물
〈충정작전과 광주항쟁上: 청문회를 통해 본 역사적 진실과 그 의의〉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부산 민주공원에서 연극 ‘숙희책방’ 보실래요?”
'대통령 4년 연임' 개헌 국민투표 이르면 내년에 추진
"김대중 사형 집행, 한미 관계 위협"…미 대통령 서한 초고 공개
“김대중 사형 집행 땐 한미 관계 위협”···카터 전 미국 대통령 서한 초고 공개
‘14살 의인’부터 광복둥이까지…‘대통령 이재명’ 임명 국민대표 80명
정청래, 5·18 묘지서 "내란세력 척결"
정청래, 5·18 묘지서 "계엄 성공했다면 이 대통령도 불귀의 객"
[책과 삶] 3·1운동부터 12·3 저지까지…시민정신의 기원은
독립운동부터 응원봉까지 ‘민중의 노래’ 전시
“이런 식이면 차라리 주지 말라”···성토장 된 동학농민혁명 유족 수당 공청회
"연 50만 원? 차라리 주지마"…성토장 된 '동학 유족 수당 공청회'
‘계엄 옹호’ 국민통합비서관 사퇴 사건이 남긴 것
'계엄옹호 논란' 강준욱 국민통합비서관 자진사퇴…논란 이틀 만
[속보] '12·3 계엄·법원 폭동 옹호' 강준욱 국민통합비서관 사퇴
정청래·박찬대 일제히 “강준욱 비서관 자진 사퇴해야”
민주 당권주자 정청래·박찬대, 강준욱 사퇴 촉구…"내란 옹호 안돼"
[단독] 강준욱 "법원 난입이 폭도면 5·18은 폭도란 말도 모자라"
제헌절 행사서 ‘임을 위한 행진곡’ 빼라 한 국힘
“전두환 알리기 운동 전개···윤상현 물심 지원” 고민정, 리박스쿨 내부 문건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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