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허려권거선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허려권거선우는 좌현왕이었다가 형의 죽음으로 선우가 된 흉노의 군주이다. 재위 기간 동안 한나라와의 관계, 주변 민족과의 갈등, 내부적인 권력 다툼을 겪었다. 그는 한나라와의 화친을 시도했지만, 내부 반발과 질병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흉노는 혼란에 빠졌고, 악연구제선우의 폭정으로 아들 호한야선우가 옹립되어 그를 무찌르면서 다섯 선우가 난립하는 분열기를 맞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60년 사망 - 유언 (한구절후)
    유언은 전한 선제의 아들로 한구후에 봉해졌으며 사망 후 그의 작위는 아들에게 계승되었다.
  • 기원전 60년 사망 - 유동 (악향헌후)
    유동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악향후에 봉해졌으며 기원전 60년에 사망하여 헌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 유괴가 작위를 계승했다.
  • 흉노의 선우 - 호한야선우
    호한야선우는 흉노의 선우로서, 흉노 분열기에 한나라에 귀순하여 지원을 받아 흉노를 통일하고 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통해 흉노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 흉노의 선우 - 어부라
    어부라는 후한 말 남흉노의 선우로, 흉노족 내분으로 낙양에 망명하여 용병으로 활동하다 195년 사망했으며, 그의 손자 유연은 한조를 건국했다.
허려권거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허려권거선우
원래 이름虛閭權渠單于
작위탱리고도선우
통치 기간기원전 68년-기원전 60년
이전호연제선우
이후악연구제선우
작위 2좌도기왕
재위 2??-기원전 68년
이전 2??
이후 2??
가문흉노
씨족연제씨
아버지호록고선우
배우자대연지
자녀질지골도후선우
호한야선우
우록리왕

2. 생애

허려권거선우는 흉노선우로, 좌현왕을 지내다 기원전 68년(지절 2년) 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1] 즉위 직후 선대 선우의 연지를 폐위시키는 과정에서 내부 갈등이 시작되었고, 이는 한나라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치세 동안 흉노는 기근, 내부 분열, 서역정령 등 주변 세력과의 충돌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거사국 문제로 한나라와 직접적인 군사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기원전 60년(신작 2년), 대규모 한나라 침공을 계획했으나 내부 정보 유출과 본인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실패하였고, 한나라와 화친을 모색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1][2]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흉노는 후계자 문제로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며 다섯 선우가 동시에 존재하는 분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1]

2. 1. 즉위와 내부 갈등

좌현왕을 지내다가 기원전 68년(지절 2년), 형의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1]

즉위 직후, 우대장의 딸을 새로운 대연지(제2황후)로 삼고 선대 선우의 전거연지(제1황후)를 폐위시켰다.[1] 이 조치에 불만을 품은 전거연지의 아버지 좌대저거는 이후 허려권거선우와 갈등하게 된다. 당시 흉노는 한나라 변경을 침략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한나라도 변경 방비를 완화한 상태였다. 허려권거선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귀족들과 상의하여 한나라와의 화친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좌대저거는 호려자왕과 함께 각각 1만 기병을 이끌고 사냥을 명분 삼아 남쪽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하여 한나라를 침공하려 했다. 이들의 계획은 출발 직후 흉노 기병 3명이 한나라로 투항하면서 누설되었고, 한 선제는 조서를 내려 변경 수비를 강화하고 대장군 등에게 5천 기병을 주어 대응하게 했다. 침공군은 병력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고 계획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같은 해(기원전 68년), 흉노에는 큰 기근이 들어 백성과 가축의 6~7할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한나라의 기습에 대비해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가을에는 흉노 휘하의 서욕 부족 내에서 내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일부가 한나라에 투항하는 일도 있었다.

기원전 67년(지절 3년), 서역의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거사국을 공격해 왕과 백성들을 사로잡아갔다. 허려권거선우는 거사국 왕의 동생인 두막을 새 왕으로 세우고 남은 백성들을 동쪽으로 이주시켰다. 거사국 땅이 비자 한나라는 군대를 보내 그곳에 둔전을 설치하고 점령했다. 이에 흉노는 기원전 66년(지절 4년), 거사국을 공격한 서역 국가들에 대한 보복과 서역 지역에 대한 영향력 회복을 위해 좌우대장에게 각각 1만여 기병을 주어 서쪽 지역(전우지)에 둔전하게 하여 서역을 압박했다. 기원전 62년(원강 4년), 좌·우오건에게 각각 6천 기병을 주어 좌대장과 함께 거사성에 주둔한 한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기원전 61년(신작 원년), 북방의 정령이 3년간 흉노를 침입하여 인명 피해와 가축 약탈을 자행하자, 1만여 기병을 보내 보복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왔다.

기원전 60년(신작 2년), 허려권거선우는 10만여 기병을 동원하여 만리장성 부근에서 대규모 사냥을 벌이며 한나라 변경 약탈을 계획했다. 그러나 흉노의 제거거당이라는 인물이 이 계획을 한나라에 밀고하고 투항했다. 한나라는 투항한 제거거당을 녹계노후(祿谿鹵侯)로 봉하고, 후장군 조충국에게 4만여 기병을 주어 변경 9군[2]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며칠 후, 허려권거선우는 갑자기 병을 얻어 토혈 증세를 보였고, 결국 침공 계획을 중단했다. 그는 두리호차 등을 한나라에 보내 화친을 제의했으나, 사절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허려권거선우 사후, 흉노는 후계자 선정을 위한 회의를 열었으나, 그가 폐위시켰던 전거연지가 자신과 내연 관계였던 우현왕 악연구제선우(오유선우의 이손)를 독단적으로 추대하면서 내부 혼란이 가중되었다. 악연구제선우의 폭정은 허려권거선우의 아들 계후산(훗날의 호한야선우)이 반발하여 그를 몰아내는 계기가 되었으나, 이는 곧 흉노가 다섯 선우가 난립하는 극심한 분열기로 접어드는 시작이었다.

2. 2. 한나라와의 관계

지절 2년(기원전 68년) 허려권거선우가 즉위할 당시, 흉노한나라의 변경을 침략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약해져 있었다. 이에 한나라는 국경의 방비를 풀고 백성들을 쉬게 하였다. 허려권거선우는 이를 반기며 귀족들과 한나라와의 화친을 논의했다.

그러나 선우가 즉위 초 선대 선우의 연지(황후)였던 전거연지를 내쫓은 일로[1] 전거연지의 아버지인 좌대저거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좌대저거는 호로자왕과 함께 화친을 방해하고자 각기 1만 기병을 이끌고 만리장성 부근에서 사냥한다는 명분으로 한나라 침공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들이 출발하기도 전에 흉노 기병 3명이 한나라에 투항하여 침공 계획을 알렸고, 계획이 드러나자 흉노군은 후퇴했다. 한 선제는 조서를 내려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대장군 등에게 5천 기병을 주어 대응하게 했다.

같은 해(기원전 68년), 흉노 지역에 기근이 들어 백성과 가축의 10분의 6~7이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그해 가을, 흉노 휘하의 서욕(西嗕, 원본에 따라 구탈(甌脫)로도 표기됨)이라는 부족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한나라에 투항하는 일도 있었다.

지절 3년(기원전 67년), 서역의 도시 국가들이 흉노를 공격하여 거사국을 점령하고 왕과 백성을 사로잡아갔다. 허려권거선우는 거사 왕의 동생 두막을 새 왕으로 삼고 남은 백성들을 동쪽으로 이주시켰다. 한나라는 비어있는 거사 땅에 군대를 보내 둔전을 설치하고 점령했다.

지절 4년(기원전 66년), 흉노는 거사국을 공격한 서역 국가들에 대한 보복과 한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좌대장과 우대장에게 각각 1만여 기병을 주어 서쪽 지역(전우지)에 둔전하게 하여 서역 방면을 압박했다. 원강 4년(기원전 62년), 흉노는 좌오건과 우오건 각 6천 기병과 좌대장을 동원하여 거사 땅의 한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 정령이 3년간 흉노를 침략하여 인명과 가축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신작 2년(기원전 60년), 허려권거선우는 10만여 대규모 기병을 동원하여 한나라 변경 약탈을 계획했다. 그러나 출발 직전 제거거당이라는 흉노인이 한나라에 투항하여 계획을 밀고했고, 한나라는 그를 녹계노후(祿谿路侯)에 봉했다. 이에 한나라는 후장군 조충국에게 4만여 기병을 주어 변경 9개 군[2]에 주둔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허려권거선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토혈하는 병을 얻어 침공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허려권거선우는 제왕(諸王) 두리호차 등을 한나라에 보내 화친을 시도했으나, 사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흉노는 악연구제선우호한야선우 등이 난립하는 내분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2. 3. 주변 민족과의 분쟁

좌현왕을 지내다가 기원전 68년(지절 2년) 형의 뒤를 이어 선우 자리에 올랐다. 즉위 직후 우대장의 딸을 새로운 대연지(황후)로 삼고 선대 선우의 전거연지를 폐위시켰다.[1] 이 결정은 전거연지의 아버지인 좌대저거(좌대차거)의 원한을 샀다.

당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어 한나라 변경을 침략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한나라는 국경 방비를 완화했다. 허려권거선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귀족들과 논의하여 한나라와의 화친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좌대저거는 호로자왕과 함께 각각 1만 기병을 이끌고 만리장성 부근에서 사냥한다는 명분으로 남하하여 한나라를 침공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출발 전에 흉노 기병 3명이 한나라로 망명하여 밀고하면서 탄로 났다. 한 선제는 즉시 조서를 내려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대장군 등에게 5천 기병을 주어 대응하게 했다. 흉노군은 계획이 누설된 것을 알고 침공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같은 해, 흉노는 심각한 기근을 겪어 백성과 가축의 60~70%가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한나라의 기습에 대비하여 병력을 배치했다. 가을에는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서욕(구탈) 부족 내에서 내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생존자들은 한나라에 투항했다.

기원전 67년(지절 3년), 서역의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거사국을 공격하고 왕과 백성들을 사로잡아갔다. 허려권거선우는 거사 왕의 동생 두막을 새로운 거사왕으로 세우고 남은 백성들을 동쪽으로 이주시켰다. 거사 지역이 비게 되자 한나라는 군대를 보내 그 땅을 점령하고 둔전을 설치했다.

기원전 66년(지절 4년), 허려권거선우는 서역 도시 국가들에 대한 보복과 오손 등 서역 지역에 대한 압박을 위해 좌우대장에게 각각 1만여 기병을 주어 흉노 서부 지역(전우지)에 둔전하게 했다.

기원전 62년(원강 4년), 흉노는 좌우오건(좌우옥건)에게 각각 6천 기병을 주어 좌대장과 함께 거사성에 주둔한 한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기원전 61년(신작 원년)부터 3년간 정령이 흉노를 지속적으로 침공하여 수천 명을 살해하고 가축을 약탈해갔다. 허려권거선우는 1만여 기병을 보내 보복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60년(신작 2년), 허려권거선우는 10만여 기병을 동원하여 장성 부근에서 대규모 사냥을 벌이는 동시에 한나라 변경을 약탈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흉노의 제거거당이 이 계획을 한나라에 밀고하고 망명하자, 한나라는 후장군 조충국에게 4만여 기병을 주어 변경 9군[2]에 주둔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며칠 후 허려권거선우는 갑자기 병을 얻어 토혈 증세를 보였고, 결국 침공 계획을 중단했다. 그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다시 제안했으나,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2. 4. 죽음과 흉노의 분열

기원전 60년, 허려권거선우는 10만여 기병을 동원하여 한나라의 변경을 약탈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흉노의 제거거당이 한나라에 투항하여 알리면서 사전에 발각되었다.[1] 이에 한나라 선제는 후장군 조충국에게 4만여 기병을 주어 삭방, 운중, 오원, 대, 서하, 상, 안정, 북지, 천수[2] 변경 9개 군에 주둔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며칠 후, 허려권거선우는 토혈하는 병을 얻어 진군을 중단하고 군대를 물렸다. 이후 두리호차 등을 한나라에 보내 화친을 다시 제안하였으나,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인 기원전 60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1]

허려권거선우가 사망하자, 흉노는 차기 선우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이 모두 모이기도 전에, 이전에 허려권거선우에 의해 폐위되었던 전거연지가 자신과 내연 관계에 있던 오유선우의 외손자이자 우현왕이었던 악연구제선우를 무단으로 새로운 선우로 추대하였다.[1]

악연구제선우는 즉위 후 폭정을 행하여 흉노 내부의 반발을 샀다. 결국 허려권거선우의 아들인 계후산이 기원전 58년 호한야선우로 즉위하여 악연구제선우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무찔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흉노는 다섯 명의 선우가 동시에 난립하는 극심한 내분 상태에 빠지며 오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1]

3. 가계

참조

[1] 문서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르면, 후대 선우는 마땅히 선대 선우의 연지를 자신의 연지로 들여야 했다.
[2] 문서 오원군·삭방군·운중군·대군·안문군·정양·우북평군·상곡군·어양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