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한야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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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한야선우는 흉노의 선우로, 기원전 61년 흉노 내부의 분열과 내전으로 인해 선우가 되었다. 그는 악연구제선우와 도기선우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5선우가 난립하는 혼란을 겪었다. 이후 전한에 투항하여 지원을 받았고, 형인 질지선우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의 왕소군과 혼인하여 관계를 더욱 강화했으며, 기원전 31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복주류약제선우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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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야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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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호한야 선우 |
원래 이름 | 呼韓邪單于 |
휘 | 계후산 |
별호 | 알 수 없음 |
통치 정보 | |
작위 | 탱리고도선우 |
재위 기간 | 기원전 58년 - 기원전 31년 |
전임자 | 악연구제선우 |
후임자 | 복주류약제선우 |
가문 정보 | |
왕조 | 흉노 |
가문 | 연제씨 |
아버지 | 허려권거선우 |
어머니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전거연지(顓渠閼氏), 대연지(大閼氏), 영호연지(寧胡閼氏), 왕소군(王昭君), 도기연지(屠耆閼氏), 제5연지 |
자녀 | 복주류약제선우 등 (가계 참조) |
친인척 | 형 질지골도후선우 |
기타 정보 | |
종교 | 알 수 없음 |
2. 흉노의 분열과 내전
기원전 58년, 흉노는 악의후 선우가 살해되면서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내전을 겪었다. 그중에는 악의후의 전임자의 두 아들인 호한야와 지치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였고, 기원전 51년에 호한야는 지치에게 패배했다.
이에 앞서 호한야선우는 아버지 허려권거선우가 기원전 61년에 사망하자, 우현왕이 악연구제선우로 즉위하면서 아내의 아버지인 오선막에게 의탁했다. 오선막은 오손, 강거 사이의 작은 국가 출신으로 흉노에 항복하여 일축왕의 누이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일축왕이 악연구제선우와 사이가 나빠 한나라에 항복하자, 악연구제선우는 분노하여 일축왕의 동생들을 살해했다. 또한 악연구제선우의 태자(좌현왕)가 좌지(동쪽)의 귀인들을 참소하면서, 오선막과 좌지의 귀인들은 호한야선우를 옹립하여 악연구제선우와 싸웠고, 기원전 59년 악연구제선우는 패배 후 자살했다.[2]
이후, 도기선우, 오차선우, 호계선우, 차려선우 등이 자립하여 다섯 선우가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호한야선우의 형인 호도오사도 질지골도후선우(질지선우)로 자립하여 호한야선우를 격파했다.
2. 1. 악연구제 반란
기원전 61년 아버지 허려권거선우가 죽자 우현왕이던 악연구제선우가 즉위했다. 계후산(稽侯狦)은 장인인 오선막에게 의탁했다. 오선막은 강거와 오손 사이의 소국에 있었는데 흉노에 칭신하고 오른쪽 땅을 받아서 일축왕(日逐王) 선현전의 누이와 결혼한 인물이다. 그러나 일축왕은 악연구제선우와 사이가 나빴기에 부하 수만 기와 함께 한나라에 항복, 귀덕후에 봉해졌다. 악연구제선우는 노하여 일축왕의 동생들을 죽였다. 또한 악연구제선우의 태자 좌현왕이 좌측 지역(동방)의 귀족들을 중상모략했기 때문에 이들이 계후산을 호한야선우로 옹립하고 싸웠다. 악연구제선우는 패배하였고 동생 좌현왕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좌현왕이 거절해 기원전 59년 자살했다.[2]2. 2. 5선우 난립과 통합
기원전 58년, 폭군 악의후 선우가 살해될 무렵, 이미 약해진 흉노 연맹은 서로 싸우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그중에는 악의후의 전임자의 두 아들 호한야와 지치가 있었다. 호한야선우는 아버지 허려권거선우였으나, 한나라 신작 2년(기원전 61년)에 아버지가 죽자 우현왕이 악연구제선우가 되었다. 호한야선우는 아내의 아버지인 오선막에게 의탁했다. 오선막은 오손, 강거 사이의 작은 국가였지만 흉노에 항복하여 일축왕의 누이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일축왕은 악연구제선우와 사이가 좋지 않아 수만 기의 병력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하여 귀덕후에 봉해졌다. 악연구제선우는 분노하여 일축왕의 동생들을 오선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해했다. 또한 악연구제선우의 태자(좌현왕)는 좌지(동쪽)의 귀인들을 참소했기 때문에, 오선막과 좌지의 귀인들은 호한야선우를 선우로 세워 악연구제선우와 싸웠다. 악연구제선우는 패배하고 우현왕에게 버려져 신작 4년(기원전 59년)에 자살했다.[2]이후 좌현왕을 암살하려 했으나 들통나, 좌현왕과 예전 악연구제선우를 옹립한 도륭기(都隆奇)가 함께 새로 옹립한 도기선우(屠耆單于)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도기선우 세력이 내분에 빠져 오자선우(烏藉單于), 호걸선우(呼揭單于), 거리선우(車犁單于)가 자립하는 5선우 난립기가 시작되었다. 이 중 오자선우와 거리선우가 도기선우에 격파됐고, 달아난 오자선우·거리선우가 호걸선우와 연합, 거리선우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선우 칭호를 포기하고 거리선우를 보좌했다. 호한야선우는 동생 우녹리왕(右谷蠡王)을 보내 도기선우가 자신을 대비하기 위해 배치한 좌대장과 도위를 격파했다. 이에 기원전 56년 도기선우가 6만 기를 이끌고 흡돈(闟敦)에서부터 천 리를 가서 자신을 치러 오자, 4만 기를 거느리고 도기선우를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도기선우가 져 자살하고, 거리선우와 그를 보좌하는 옛 호걸선우와 옛 오자선우인 오자도위(烏藉都尉)를 항복시켜 일시적으로 통일을 이룩했다.[2]
그 후, 도기선우, 오차선우, 호계선우, 차려선우도 자립하여 다섯 선우가 난립하며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호한야선우의 형인 호도오사도 자립하여 질지골도후선우(질지선우)가 되어 호한야선우를 격파했다.[2]
2. 3. 형과의 내전
이릉의 아들이 오자도위를 도로 오자선우로 세워 그 둘을 쳐 죽였다. 겨우 선우정(單于庭)으로 돌아왔지만, 이 시점에서 분명 유일한 선우임에도 그가 거느린 무리는 수만 명에 불과했다. 도기선우의 종제 휴순왕(休旬王)이 5~6백 기를 거느리고 좌대저거(左大且渠)를 쳐 죽이고 그 세력을 빼앗아 흉노의 우편(서편)에서 자립해 윤진선우(閏振單于)라 일컬었다. 그리고 호한야선우의 형 연제호도아사(攣鞮呼屠吾斯)가 자립하여 질지선우를 칭하고 흉노의 동편에 웅거했다. 질지선우는 윤진선우를 요격해 죽이고 호한야선우를 격파했다.[2]기원전 58년에 폭군 악의후 선우가 살해될 무렵, 이미 약해진 흉노 연맹은 서로 싸우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는데, 그중에는 악의후의 전임자의 두 아들 호한야와 질지가 있었다. 두 형제는 서로에게 등을 돌렸고, 호한야는 기원전 51년에 질지에게 패배했다.[3]
3. 전한(前漢)과의 관계
기원전 61년, 아버지 허려권거선우가 죽자 우현왕이 악연구제선우가 되었고, 호한야선우는 아내의 아버지인 오선막에게 의탁했다. 오선막은 오손, 강거 사이의 작은 국가였지만 흉노에 항복했다. 그러나 일축왕은 악연구제선우와 사이가 좋지 않아 수만 기의 병력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고, 악연구제선우는 일축왕의 동생들을 살해했다. 또한 악연구제선우의 태자(좌현왕)는 좌지(동쪽)의 귀인들을 참소했기 때문에, 오선막과 좌지의 귀인들은 호한야선우를 선우로 세워 악연구제선우와 싸웠다. 악연구제선우는 패배하고 기원전 59년에 자살했다.[2]
그 후, 도기선우, 오차선우, 호계선우, 차려선우 등 다섯 선우가 난립하며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호한야선우의 형인 호도오사도 자립하여 질지골도후선우(질지선우)가 되어 호한야선우를 격파했다. 기원전 58년 악의후 선우가 살해될 무렵, 흉노는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웠는데, 그중에는 호한야와 지치 형제가 있었다. 기원전 51년, 호한야는 지치에게 패배했다.[2]
이후 호한야는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흉노를 평정하고, 기원전 33년 원제에게 왕소군을 하사받아 혼인하였다.
3. 1. 전한에 투항
기원전 53년, 패배한 호한야선우의 신하 좌이질자왕이 한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도움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 호한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켰다. 질지선우 역시 한나라에 도움을 청하며 아들을 입조시켰다.[2]이듬해, 호한야선우는 스스로 오원의 요새를 찾아갔고, 기원전 51년 정월에 입조할 것을 청원했다.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자 선제는 감천궁에서 그를 만나 제후왕보다 상위에 두었다. 또한, 신하를 칭하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되게 하고, 중국의 왕관, 옷, 황금 옥새 등을 내리고 군사와 식량을 지원했다.[2]
질지선우는 서쪽의 오손을 공격했으나, 오손은 한나라가 호한야선우를 지원한다는 것을 알고 질지선우를 거부했다.[2]
원제 때도 한나라는 호한야선우에게 식량을 공급하면서, 한나라 사자를 죽인 질지선우를 토벌하도록 촉구했다. 호한야선우는 북쪽으로 돌아갈 때 동행한 한나라의 거기도위 한창, 광록대부 장맹과 함께 월지 왕의 두개골로 만든 술잔으로 “오늘 이후로 한과 흉노는 가족이며 대대로 서로 속이고 공격할 수 없다”는 맹세를 맺었다. 호한야선우가 북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하여 흉노는 평정되었다.[2]
기원전 36년, 질지선우는 서역도호 감연수와 서역부교위 진탕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호한야선우는 기뻐하면서도 한나라를 두려워하여 기원전 33년에 다시 입조했다. 이때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바랐고, 원제는 후궁 왕소군을 녕호연지(寧胡閼氏)로 하사했다.[2]
3. 2. 전한의 지원과 질지선우 격파
기원전 53년, 호한야선우는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켰다. 질지선우 역시 한나라에 도움을 청하며 아들을 입조시켰다.[2]이듬해 호한야선우는 스스로 오원의 요새를 찾아갔고 기원전 51년 정월 입조할 것을 청원했다.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자 선제는 감천궁에서 호한야선우를 만나 그를 제후왕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신(臣)을 칭하지 않아도 되고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중국의 왕관이나 옷, 황금옥새 등을 내리고 군사와 식량을 내어 호한야선우를 도왔다.[2]
질지선우는 서쪽의 오손을 공격했는데, 오손은 한나라가 호한야선우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질지선우를 거부했다.[2]
원제 때도 한은 호한야선우에게 식량을 공급하면서, 한나라 사자를 죽인 질지선우를 토벌하도록 촉구했다. 호한야선우는 북으로 돌아갈 때 동행한 한나라의 거기도위 한창, 광록대부 장맹과 함께 월지 왕의 두개골로 만든 술잔으로 “오늘 이후로 한과 흉노는 가족이며 대대로 서로 속이고 공격할 수 없다”고 연맹을 맺었다.[2] 호한야선우가 북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하여 흉노는 평정되었다.[2]
기원전 36년, 질지선우는 서역도호 감연수와 서역부교위 진탕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호한야선우는 기뻐하면서도 한나라를 두려워하여 기원전 33년 재차 입조하였다. 이때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바랬고 원제는 후궁 왕소군을 녕호연지(寧胡閼氏)로 하사했다.[2][3]
3. 3. 왕소군과의 혼인
기원전 33년, 호한야는 한나라와 흉노 정부 사이에 존재했던 조공 시스템의 일환으로 장안을 방문했다. 그는 황실의 사위가 될 기회를 얻고자 했다.[2] 원제는 호한야에게 진짜 공주를 며느리로 주는 것을 꺼려하여 궁궐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를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왕소군이라는 시녀가 자원했고 황제는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왕소군은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밝혀졌고 (뇌물을 주지 않은 화가가 평범하게 묘사했기 때문),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서시, 초선, 양귀비와 함께 꼽힌다.[2]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총애를 받아 두 아들을 낳았다. 그중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아들만 기록에 남아있고, 이도지아사는 정치에 참여했다. 그들은 또한 두 딸, 섭부거차(须卜居次)로 알려진 운(雲)과 당우거차(当于居次)를 두었다. 운은 이모 공주로 책봉되었고, 흉노 정치에서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2]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원했고, 원제는 후궁 왕소군을 알씨(閼氏)로 하사했다.[3]
4. 후계 문제와 사망
호한야선우는 좌이질자왕의 형 호연왕의 두 딸을 사랑해 장녀를 전거연지, 차녀를 대연지로 들였다. 전거연지에게서는 삼남 저막거와 사남 낭지아사를, 대연지에게서는 장남 조도막고와 차남 저미서를 보았다. 저막거가 사랑을 받았고 전거연지가 가장 귀했으므로 호한야선우는 저막거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2]
그러나 전거연지는 이미 쇠퇴해 한나라에 복종하는 흉노의 선우로서 어리고 사랑받는 저막거는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족이자 동생인 대연지의 장남 조도막고를 세우려 했다. 대연지는 자신이 전거연지보다 지위가 낮으므로 조도막고는 안 된다고 했지만, 호한야선우는 결국 전거연지의 말을 따랐다. 대신 조도막고의 동생들이 차례로 선우가 되게 했다.[2]
호한야선우는 재위 28년만인 기원전 31년에 사망했고, 아들 연제조도막고가 복주류약제선우로 즉위하여 뒤를 이었다.[4]
5. 가계
wikitext
참조
[1]
문서
단우
[2]
문서
장건의 손자
[3]
문서
단우의 아내
[4]
문서
'「若鞮」とは「孝」の意味であるとされ、単于の号に加わったのは呼韓邪単于以降、漢の皇帝の諡号に「孝」が入っていることに倣ったものだという(『[[後漢書]]』南匈奴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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