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제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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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연제선우는 흉노의 선우로, 호록고선우의 아들이며 좌록리왕이었다. 기원전 85년, 부친의 사망 후 권신들의 옹립으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 후 한나라와 화친을 시도했으나, 흉노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한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구탈왕이 사로잡히는 등 흉노는 쇠퇴했으며, 오손을 공격했으나 한나라의 공격으로 쇠약해졌다. 호연제선우는 기원전 68년에 사망했으며, 동생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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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68년 사망 - 곽광
곽광은 곽거병의 이복 동생으로,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아 섭정하며 어린 소제를 보좌하고 한 선제를 옹립했으며, 훌륭한 통치 능력으로 존경받았으나 독재적인 통치 스타일과 족벌주의로 비판받기도 한다. - 기원전 68년 사망 - 유장 (선처절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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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제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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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작위 | 탱리고도선우 |
재위 | 기원전 85년-기원전 68년 |
작위2 | 좌록리왕 |
재위2 | ??-기원전 85년 |
휘 | (알 수 없음) |
별호 | (알 수 없음) |
시호 | (알 수 없음) |
능호 | (알 수 없음) |
가문 | |
왕조 | 흉노 |
가문 | 연제씨 |
아버지 | 호록고선우 |
어머니 | Zhuanqu Yanzhi |
배우자 | 전거연지 |
자녀 | (알 수 없음) |
친인척 | (알 수 없음) |
기타 정보 | |
중국어 (병음) | Hú yǎn dī |
활동 시기 | 기원전 85년 - 기원전 68년 |
전임자 | 호록고선우 |
후임자 | 허려권거선우 |
2. 생애
시원 2년(기원전 85년), 호록고선우가 죽자 위율과 호록고선우의 전거연지(제1황후)가 공모하여 유명을 위조해 호연제선우가 옹립되었다. 호록고선우는 생전에 호연제선우가 아닌 다른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었고, 동생 우록리왕을 후계로 정했으나, 호연제선우가 옹립된 것이다.
호연제선우는 즉위 후, 한나라 사신에게 에둘러 화친 의사를 밝혔다. 선우가 되지 못한 우록리왕과 좌현왕은 한나라에 망명하려 했으나, 여도왕을 협박해 오손에 투항해 흉노를 공격하려 했다. 여도왕이 이를 고변하자, 호연제선우는 우록리왕을 심문했으나, 우록리왕은 오히려 여도왕에게 죄를 돌렸다. 흉노 사람들은 이를 원통하게 여겼고, 두 왕은 용성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 흉노는 대군으로 쳐들어가 대군도위를 죽였다. 호연제선우는 흉노에 억류된 한나라의 소무와 마굉 등을 한나라로 돌려보내는 교섭을 시작했는데, 시원 6년(기원전 81년)의 일이었다.
시원 5년(기원전 82년), 흉노는 좌우부의 2만 기병을 보내 한나라 변경을 침범했다. 한나라 군대는 이를 추격하여 9천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고, 구탈왕을 생포했다. 흉노는 구탈왕이 한나라에 사로잡힌 것을 알고 두려워하여 서북쪽으로 멀리 달아났고, 백성들을 구탈 지역에 주둔시켰다.
시원 6년(기원전 81년), 9천 기병을 보내 수강성(受降城)에 주둔하여 한나라에 대비했다. 이때 위율은 이미 죽었는데, 위율은 생전에 한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했지만, 흉노가 믿지 않아 흉노는 병력 부족과 국력 약화를 겪었다. 호연제선우의 동생인 좌록리왕은 위율의 말을 믿고 한나라와 화친을 꾀하여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 후, 좌록리왕은 죽었다.
시원 7년(기원전 80년), 호연제선우는 리오왕에게 한나라 변경을 정찰하게 하고 주천과 장액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우현왕과 리오왕이 이끄는 4천 기병은 한나라 군대에 대패하고, 리오왕은 전사했다. 이후 흉노는 감히 장액군에 쳐들어가지 못했다.
원봉 2년(기원전 79년), 흉노의 3천여 기병은 오원군에 침입하여 수천 명을 살해했다. 이 해, 오환족이 역대 선우의 묘를 파헤치자, 호연제선우는 2만 기병을 보내 오환을 공격했다. 한나라 대장군 곽광은 범명우를 도요장군으로 임명하여 3만 기병을 이끌고 요동군에서 출진시켰다. 범명우는 흉노를 쫓았지만, 흉노는 이미 철수한 후였다. 오환은 흉노에게 큰 피해를 입은 직후였고, 범명우는 오환을 공격하여 6천여 명의 목을 베고 3명의 왕의 머리를 취해 귀환하여 평릉후에 봉해졌다.
흉노는 이를 두려워하여 출병할 수 없게 되자 오손을 공격하여 차연(車延)·악사(惡師)의 땅을 빼앗았다. 오손 공주는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나라에서는 소제가 죽고 선제가 즉위했고, 오손의 곤미(오손의 군주 호칭)는 다시 구원을 요청했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한나라는 오손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는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오손 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겨울, 호연제선우는 오손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가했지만, 폭설로 인해 많은 백성과 가축이 얼어 죽었다. 게다가 북쪽의 정령, 동쪽의 오환, 서쪽의 오손에게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가축을 잃었다. 이로 인해 흉노에 종속되었던 주변 국가들도 등을 돌려 흉노는 매우 약해졌다.
이후에도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변방을 침범할 수 없게 되었고, 지절 2년(기원전 68년)에 호연제선우는 사망했으며, 동생 좌현왕이 허려권거선우로 즉위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호연제선우(壺衍鞮單于)는 흉노 호록고 선우의 아들로, 좌록리왕을 지냈다.시원 2년(기원전 85년), 아버지 호록고 선우가 죽자, 위율과 호록고 선우의 전거연지(제1황후)가 공모하여 유명을 위조해 호연제선우를 옹립했다. 호록고 선우는 생전에 호연제선우가 아닌 다른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었고, 동생 우록리왕을 후계로 정했으나, 호연제선우가 옹립된 것이다.
호연제선우는 즉위 후, 한나라 사신에게 에둘러 화친 의사를 밝혔다. 한편, 선우가 되지 못한 우록리왕과 좌현왕은 한나라에 망명하려 했으나, 여도왕을 협박해 오손에 투항해 흉노를 공격하려 했다. 여도왕이 이를 고변하자, 호연제선우는 우록리왕을 심문했으나, 우록리왕은 오히려 여도왕에게 죄를 돌렸다. 흉노 사람들은 이를 원통하게 여겼고, 두 왕은 용성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 흉노는 대군으로 쳐들어가 대군도위를 죽였다. 호연제선우는 흉노에 억류된 한나라의 소무와 마굉 등을 한나라로 돌려보내는 교섭을 시작했다. 시원 6년(기원전 81년)의 일이었다.
2. 2. 한나라와의 관계
호연제선우는 즉위 후 한나라와 화친을 꾀했다. 한편, 선우가 되지 못한 좌현왕과 우록리왕은 한나라에 망명하려다 실패하고, 오손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기원전 83년, 흉노는 한나라 대군을 침공하여 도위를 죽였다. 호연제선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가 섭정을 하는 등 국내 사정이 어지러웠고, 한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이에 위율은 19년간 흉노에 억류되었던 소무와 마굉 등을 한나라로 돌려보내 화친을 꾀했다.기원전 82년, 흉노는 한나라 변경을 침범했으나 한나라 군대에 격퇴당하고 구탈왕이 사로잡혔다. 흉노는 두려워하여 서북쪽으로 물러났고, 백성들을 구탈 지역에 주둔시켰다. 기원전 81년, 흉노는 수항성에 주둔하여 한나라에 대비했다. 위율은 생전에 한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했지만, 흉노가 따르지 않아 흉노는 쇠퇴하고 가난해졌다. 호연제선우의 동생 좌록리왕은 위율의 주장을 따라 한나라와 화친을 꾀하고 변방 침범을 줄였다.
기원전 80년, 호연제선우는 리오왕에게 한나라 변경을 정찰하게 하고 주천과 장액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우현왕과 리오왕이 이끄는 4천 기병은 한나라 군대에 대패하고, 리오왕은 전사했다. 이후 흉노는 감히 장액군에 쳐들어가지 못했다.
기원전 79년, 흉노는 오원군을 침입하여 수천 명을 살해했다. 이 해, 흉노에 복속되어 있던 오환이 선우들의 무덤을 파헤치자, 호연제선우는 2만 기병을 보내 오환을 공격했다. 한나라 곽광은 범명우에게 3만 기병을 주어 요동으로 보내 흉노를 치게 했으나, 흉노는 이미 달아난 후였다. 범명우는 오환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흉노는 한나라를 치지 못하고 오손을 공격하여 거연과 악사 땅을 탈취했다. 오손공주와 오손의 곤미(왕) 옹귀미는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72년, 한나라는 오손을 구원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일으켰다. 흉노는 싸우지 않고 달아났으나, 오손의 공격과 퇴각 도중의 피해로 큰 손실을 입었다. 오손에게 원한을 품은 흉노는 오손을 공격했다가 폭설로 인해 9할의 병력을 잃었다. 흉노는 크게 쇠약해져 정령, 오환, 오손의 공격을 받았고, 흉노에 복속되었던 나라들도 흉노를 공격했다. 한나라도 3천 기병을 내어 흉노를 공격했다.
지절 2년(기원전 68년), 호연제선우는 재위 17년 만에 죽고, 동생 좌현왕이 허려권거선우로 즉위했다.
2. 3. 오환, 오손과의 갈등
호연제선우는 즉위 후 한나라와 화친을 꾀했다. 좌현왕과 우곡려왕은 선우로 즉위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에 귀순하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노도왕을 협박하여 오손으로 가서 흉노를 치려 했다. 그러나 노도왕이 이를 호연제선우에게 보고했고, 호연제선우는 우곡려왕을 심문했지만, 우곡려왕은 죄를 노도왕에게 덮어씌웠다. 흉노 사람들은 이를 억울하게 여겼고, 좌현왕과 우곡려왕은 이후 용성(龍城) 회의(흉노의 국회)에 참석하지 않았다.시원 4년(기원전 83년) 가을, 흉노는 대군을 침공하여 도위를 죽였다. 호연제선우는 나이가 어려 즉위했기에, 어머니 왈씨가 섭정을 하면서 국내는 혼란스러웠고, 한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이에 위율은 흉노에 19년간 억류되어 있던 소무와 마굉 등을 한나라로 돌려보내 한나라와 화친을 꾀했다.
시원 6년(기원전 81년), 9천 기병을 보내 수강성(受降城)에 주둔하여 한나라에 대비했다. 이때 위율은 이미 죽었는데, 위율은 생전에 한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했지만, 흉노가 믿지 않아 흉노는 병력 부족과 국력 약화를 겪었다. 호연제선우의 동생인 좌곡려왕은 위율의 말을 믿고 한나라와 화친을 꾀하여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 후, 좌곡려왕은 죽었다.
원봉 2년(기원전 79년), 흉노의 3천여 기병은 오원군에 침입하여 수천 명을 살해했다. 이 해, 동호의 생존자로 흉노에 복속되었던 오환족이 역대 선우의 묘를 파헤치고 묵돌선우에게 당했던 치욕에 보복했다. 호연제선우는 분노하여 2만 기병을 보내 오환을 공격했다. 한나라 대장군 곽광은 범명우를 도요장군으로 임명하여 3만 기병을 이끌고 요동군에서 출진시켰다. 범명우는 흉노의 뒤를 쫓아 공격했지만, 흉노는 이미 철수한 후였다. 오환은 흉노에게 큰 피해를 입은 직후였고, 범명우는 오환을 공격하여 6천여 명의 목을 베고 3명의 왕의 머리를 취해 귀환하여 평릉후에 봉해졌다.
흉노는 이를 두려워하여 출병할 수 없게 되자 오손을 공격하여 차연(車延)·악사(惡師)의 땅을 빼앗았다. 오손 공주는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나라에서는 소제가 죽고 선제가 즉위했고, 오손의 곤미(오손의 군주 호칭)는 다시 구원을 요청했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한나라는 오손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는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오손 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겨울, 호연제선우는 오손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가했지만, 폭설로 인해 많은 백성과 가축이 얼어 죽었다. 게다가 북쪽의 정령, 동쪽의 오환, 서쪽의 오손에게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많은 가축을 잃었다. 이로 인해 흉노에 종속되었던 주변 국가들도 등을 돌려 흉노는 매우 약해졌다.
2. 4. 쇠퇴와 죽음
호연제선우는 아버지 호록고선우가 죽은 후, 위율 등의 도움으로 선우 자리에 올랐다. 즉위 초, 한나라와 화친을 꾀했으나, 좌현왕과 우록리왕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다.시원 4년(기원전 83년) 흉노는 대군을 침공하여 도위를 죽였다. 호연제선우는 나이가 어려 즉위했기에, 어머니 왈씨가 부정하게 통치하여 국내는 이반되었고, 항상 한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했다. 이에 위율은 선우에게 19년간 흉노에 억류되어 있던 소무와 마굉 등을 한나라로 귀국하게 하여, 한나라와 화친을 꾀했다.
시원 5년(기원전 82년), 흉노는 한나라 변경을 침범했으나 한나라 군대에 격퇴당하고 구탈왕이 사로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흉노는 서북쪽으로 물러나 세력이 약화되었다.
시원 6년(기원전 81년), 9천 기병을 보내 수강성(受降城)에 주둔하여 한나라에 대비했다. 이때, 위율은 이미 죽어 있었다. 위율은 생전에 항상 한나라와의 화친을 설득했지만, 흉노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위율의 사후 흉노는 병력 수에 곤란을 겪고 국익은 빈곤해졌다. 호연제선우의 동생인 좌곡려왕은 위율의 말을 믿고, 한나라와 화친을 꾀하여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 후, 좌곡려왕은 죽었다.
시원 7년(기원전 80년), 주천군과 장액군을 공격했으나, 한나라 군대에 대패하고 리오왕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원봉 2년(기원전 79년), 오원군을 침입하여 수천 명을 살해했다. 이 해, 오환족이 역대 선우의 묘를 파헤치자, 호연제선우는 2만 기병을 보내 오환을 공격했다. 한나라 곽광은 범명우를 보내 흉노를 치게 했으나, 흉노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범명우는 오환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한나라와 오손의 연합 공격을 받은 흉노는 퇴각 중 폭설을 만나고, 정령, 오환, 오손에게 협공까지 당해 크게 쇠약해졌다.
이후에도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변방을 침범할 수 없게 되었고, 지절 2년(기원전 68년)에 호연제선우는 사망했으며, 동생 좌현왕이 허려권거선우로 즉위했다.
3. 흉노의 대외 관계
흉노는 진나라 때부터 조나라, 연나라 등과 대립했다. 진 시황제는 몽염을 파견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하투 지역을 점령했다.
한나라 건국 초기, 한고제는 백등산 포위전에서 흉노에게 패배한 후 화친 정책을 펼쳤다. 한무제는 흉노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한흉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에는 마읍 전투, 하남의 역, 안문 전투, 하남 전투, 삭방의 역, 막남 대전, 하서 전투, 막북 전투, 준계산의 역, 누란 전투, 주천의 역, 천산 전투, 여오수의 역, 연연산의 역, 본시 2년의 역 등 여러 전투가 있었다.
3. 1. 한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71년, 한나라는 오손과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한나라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우록왕에게 패배했다.기원전 71년 겨울, 호연제선우는 오환을 공격하다가 폭설을 만나 많은 백성과 가축을 잃었다. 이 틈을 타 오손, 오환, 정령이 흉노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3. 2. 오손과의 관계
壺衍鞮單于|호연제선우중국어는 오손과 화친하려 했으나, 상혜가 한나라와 오손의 연합을 주장하여 오손이 한나라와 연합했다.3. 3. 오환, 정령 등과의 관계
匈奴傳|흉노전중국어에 따르면, 호연제선우는 오환과 정령 등 주변 민족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4. 평가
호연제선우에 대한 평가는 주로 한서(흉노전)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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