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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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만 괴링은 독일 제국의 영사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공군 에이스로 활약했다. 나치당에 입당하여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고, 돌격대(SA)를 이끌었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프로이센 내무장관, 항공 총감, 4개년 계획 총책임자 등을 역임하며 나치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루프트바페 사령관으로 독일 공군을 지휘했지만, 연합군의 공습에 대응하지 못하며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전쟁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형 집행 직전 자살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미술품 수집으로 유명했으며, 유대인 재산 약탈에도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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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괴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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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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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헤르만 빌헬름 괴링 |
로마자 표기 | Hermann Wilhelm Göring |
출생일 | 1893년 1월 12일 |
출생지 | 로젠하임, 독일 제국 |
사망일 | 1946년 10월 15일 |
사망지 | 뉘른베르크, 독일 |
사망 원인 | 청산가리 중독을 이용한 자살 |
거주지 | 카린할 |
직업 | 비행사 정치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나치당 (1922–1945) |
총통 | 아돌프 히틀러 |
국가원수 | 파울 폰 힌덴부르크 (1932–1934), 아돌프 히틀러 (1934–1945) |
수상 |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 |
국가의회 의장 | 재임 시작: 1932년 8월 30일 재임 종료: 1945년 4월 23일 전임: 파울 뢰베 후임: 폐지 (에리히 쾰러 (서독 연방의회 의장) 1949년, 요하네스 디크만 (동독 인민의회 의장) 1949년) |
프로이센 국가지사 권한대행 | 재임 시작: 1933년 4월 25일 재임 종료: 1945년 4월 23일 전임: 아돌프 히틀러 후임: 폐지 |
프로이센 총리 | 재임 시작: 1933년 4월 11일 재임 종료: 1945년 4월 23일 전임: 프란츠 폰 파펜 (국가판무관) 후임: 폐지 |
국방각료회의 의장 | 1939년–1945년 |
경제부 장관 | 1937년–1938년 |
4개년 계획 전권 대리인 | 1936년–1945년 |
산림부 장관 | 1934년–1945년 |
항공부 장관 | 1933년–1945년 |
프로이센 주평의회 의장 | 1933년–1945년 |
대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33년–1945년 |
국가의회 의원 | 1928년–1933년 |
SA 최고 지도자 | 1923년 |
SA '펠트헤른할레' 경비연대 명예 사령관 | 1937년 1월 12일 – 1945년 |
원자재 및 외환 담당 국가 위원 | 1936년 4월 4일 - 1945년 4월 23일 |
게슈타포 장관 | 1933년 12월 2일 - 1936년 6월 26일 |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 | 1933년 1월 30일 - 1934년 4월 30일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독일 제국 항공대 돌격대 루프트바페 |
복무 기간 | 1912년–1918년 1933년–1945년 |
최종 계급 | 국가원수 SA 대장 육군보병대장 명예 |
공군 총사령관 | 재임 시작: 1935년 3월 1일 재임 종료: 1945년 4월 24일 후임: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부관: 에르하르트 밀히 |
지휘 부대 | 제1차 세계 대전 제1 전투 비행단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카린 폰 칸초프 (1923년-1931년) 에미 존네만 (1935년) |
자녀 | 에다 괴링 |
부모 |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 (아버지) 프란치스카 티펜브룬 (어머니) |
친척 | 알베르트 괴링 (형제) |
출신 학교 | 뮌헨 대학교 |
훈장 | |
주요 훈장 | 푸르 르 메리트 대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
재판 및 형벌 | |
범죄 혐의 | 평화에 대한 죄 공모 침략 범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형벌 | 사형 |
형 집행 | 사망 (자살) |
2. 생애
2. 1. 유년기 및 청년기
아이티 주재 독일 제국 영사였던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과 그의 후처 사이에서 차남으로, 독일 제국 알프스산맥과 가까운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에서 태어났다.[2] 알베르트 괴링은 그의 동생이다.1896년 3살 때 아버지가 알렉산드리아 주재 총영사직에서 은퇴하여 가족은 독일에서 함께 살았다. 어린 시절 괴링은 뉘른베르크 근처의 작은 성인 펠덴슈타인 성에서 자랐는데, 1913년까지 그 성의 주인은 어머니의 연인이자 아이들의 대부(代父)였던 유대인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다.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유년 시절을 부유하게 보냈다.[2][4]

괴링은 1893년 1월 12일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의 마리엔바트 요양원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1839년 10월 31일 – 1913년 12월 7일)은 전직 기병 장교였으며, 최초의 독일 남서아프리카 총독(오늘날 나미비아)이었다.[4] 하인리히는 이전 결혼에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괴링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인 바이에른 농민 프란치스카 티펜브룬(1859년–1943년 7월 15일)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네 번째였다. 괴링의 형제자매는 카를, 올가, 파울라였고, 남동생은 알베르트였다. 괴링이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아이티에서 총영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출산을 위해 잠시 귀향했었다. 그녀는 6주 된 아기를 바이에른의 친구에게 맡겨두고 3년 동안 아이를 보지 못했으며, 그 후 그녀와 하인리히가 독일로 돌아왔다.[2]
괴링의 대부는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부유한 유대인 의사이자 사업가였다. 에펜슈타인은 하인리히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괴링 가족에게 먼저 베를린-프리데나우에 가족 주택을,[5] 그 후에는 뉘른베르크 근처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을 제공했다. 괴링의 어머니는 이 무렵 에펜슈타인의 정부가 되었고, 약 15년 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다. 에펜슈타인은 왕실에 대한 봉사와 기부를 통해 리터(기사) 폰 에펜슈타인이라는 작위를 얻었다.[4][6][7]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괴링은 장난감 병정으로 놀고 아버지가 준 보어 군복을 입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거기서는 음식이 부실하고 규율이 엄격했다. 그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바이올린을 팔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일어났다.[8] 그는 펠덴슈타인 성을 포위 공격하는 척하며 전쟁 놀이를 계속 즐겼고, 튜턴족 전설과 사가를 연구했다. 그는 등산가가 되어 독일, 몽블랑 산맥,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등반했다. 16세에 그는 베를린-리히터펠데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6][7]
괴링은 1912년 프로이센 군대의 빌헬름 왕자 연대(제112보병연대, 주둔지: 뮐하우젠)에 입대했다. 그 다음 해 그의 어머니는 에펜슈타인과 불화를 겪었고, 가족은 펠덴슈타인을 떠나 뮌헨으로 이사했으며, 그 직후 그의 아버지는 사망했다. 괴링은 바이에른에서 나치즘 하에서 더욱 발전한 그의 "낭만적인 독일 정체성"을 발전시켰다.[8]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괴링은 그의 연대와 함께 뮐하우젠에 주둔해 있었다.[6][7]


1900년부터 에펜슈타인은 자신의 소유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교외 마우터ンド르프(Mauterndorf)에 있는 마우터ンド르프 성(Burg Mauterndorf), 그리고 독일 뉘른베르크 북쪽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Neuhaus an der Pegnitz)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Burg Veldenstein)에 괴링 가족을 초대하여, 그곳에서 살게 했다.[9]
에펜슈타인은 중세 귀족과 같은 생활에 동경을 품고 있었기에, 성 안은 매우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졌고, 시종들은 중세 궁정풍 의상을 입고 일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인 지배자로서 대했다. 괴링의 후일 화려한 장식에 대한 취향도 이 시기에 에펜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9][6]
한편, 아버지 하인리히는 퇴직 후 알코올 중독 상태로 지내고 있었고, 어린 시절 괴링의 눈에는 무능한 아버지로 비쳤다. 그 때문에 이 무렵 괴링은 에펜슈타인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존경했다.[10] 에펜슈타인도 괴링 가족의 아이들을 귀여워했다. 특히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알베르트를 귀여워했지만, 알베르트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등 기질이 에펜슈타인과 비슷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사교적이고 대담하며 모험을 동경하는 괴링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6]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는 자주 밤을 함께 보냈다. 동거인인 하인리히는 불만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묵인했다. 부모와 에펜슈타인 세 사람은 에펜슈타인의 성에서 기묘한 삼각관계 생활을 보냈다.[11] 1913년에 에펜슈타인이 릴리라는 젊은 여성과 재혼하고, 릴리의 요구로 괴링 가족이 성에서 퇴거하여 뮌헨으로 이주할 때까지 이 상태는 계속되었다.[12]
괴링은 10세부터 등산에 열중했다. 13세 무렵에는 험준한 암벽 등반을 통해 해발 3600미터의 그로스글록너 산(Groβglockner)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사냥에도 자주 데려가 주었다. 괴링의 사냥을 좋아하는 것도 에펜슈타인의 영향이었다.[13]
학업에서는 1904년 퓌르트의 초등학교(Volksschule)를 졸업하고, 그 후 안스바흐의 기숙제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규율이 엄격하여 입학 초기부터 괴링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괴링이 이 학교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의 작문이었다. 괴링이 에펜슈타인에 대해 쓴 글을 본 교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에펜슈타인은 유대인이다. 안스바흐 학교 학생이 유대인을 존경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괴링은 에펜슈타인은 가톨릭이라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교장의 명령으로 "유대인을 찬양하는 작문은 다시는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100번 쓰게 된 데다, 유대인 명부를 A부터 E까지 베껴 쓰게 되었다. 이 처벌은 학우들에게도 알려지면서, 괴링은 학교에서 조롱당했다. 그리고 "내 대부는 유대인입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개구리 뛰기를 강요받는 괴롭힘을 당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학교를 뛰쳐나와 노이하우스의 펠덴슈타인 성으로 돌아가 버렸다(이때 학교의 악기 현을 모두 끊어버리는 복수를 했다).[14]
1912년 장교로 임관되었으며, 독일 제국 공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맹활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괴링은 독일 제국에서 대표적인 공군 에이스였다.
1918년 독일의 위대한 비행사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복무했던 유명한 비행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한 뒤, 혼란기에 군 장교들에 대한 민간인들의 푸대접에 몹시 분개하여 독일을 떠났다. 이후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민간 비행사로 일했으며, 스웨덴의 남작 부인 카린 폰 칸트초프를 만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뒤인 1922년 2월 3일에 독일 뮌헨에서 결혼했다.
괴링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아, 장난감 병정으로 놀고 아버지가 준 보어 군복을 입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거기서는 음식이 부실하고 규율이 엄격했다. 그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바이올린을 팔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일어났다. 그는 펠덴슈타인 성을 포위 공격하는 척하며 전쟁 놀이를 계속 즐겼고, 튜턴족 전설과 사가를 연구했다. 그는 등산가가 되어 독일, 몽블랑 산맥,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등반했다. 16세에 베를린-리히터펠데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괴링은 1912년 프로이센 군대의 빌헬름 왕자 연대(제112보병연대, 주둔지: 뮐하우젠)에 입대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괴링은 그의 연대와 함께 뮐하우젠에 주둔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첫 해, 괴링은 프랑스 국경에서 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주둔 도시 뮐하우젠 지역에서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참호전의 습기로 인한 류머티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회복 중에 그의 친구 브루노 뢰르처는 괴링에게 1916년 10월까지 독일군의 한국어 발음표기=공중전투부대/Luftstreitkräftede가 될 부대로 전속할 것을 설득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그해 후반, 괴링은 뢰르처의 관측병으로 한국어 발음표기=펠트플리거 압타일룽/Feldflieger Abteilungde 25(FFA 25)에서 비행했다. 괴링은 비공식적으로 자신을 전속시켰던 것이다. 그는 발각되어 3주간의 병영 감금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을 때 괴링과 뢰르처의 관계는 공식화되었다. 그들은 황태자의 5군에 있는 FFA 25에 한 팀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정찰 및 폭격 임무를 수행했으며, 황태자는 괴링과 뢰르처 모두에게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조종사 훈련 과정을 마친 후 괴링은 '''야그트슈타펠''' 5에 배속되었다. 공중전에서 엉덩이에 심한 부상을 입고 거의 1년 동안 회복했다. 그 후 1917년 2월 뢰르처가 지휘하는 '''야그트슈타펠''' 26로 전속되었다. 그는 5월에 '''야그트슈타펠''' 27의 지휘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꾸준히 공중전 승리를 거두었다. 5, 26, 27 ''야스타''에서 복무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철십자훈장(1급 및 2급) 외에도 그는 검이 달린 자링거 사자 훈장, 프리드리히 훈장, 검이 달린 3급 호엔촐레른 가문 훈장을 받았고, 마침내 1918년 5월에는 탐내던 한국어 발음표기=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프랑스어를 받았다. 헤르만 달만에 따르면, 괴링은 뢰르처에게 상을 위한 로비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22승으로 전쟁을 마쳤다. 전후 연합군 손실 기록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결과, 그의 수여된 승리 중 두 개만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세 개는 가능성이 있고, 17개는 확실하거나 매우 가능성이 높았다.

1918년 7월 7일, 빌헬름 라인하르트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의 후임)의 사망에 따라 괴링은 "비행 서커스" '''야그트게슈바더''' 1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오만함은 그의 비행대원들 사이에서 그를 인기 없게 만들었다.
전쟁 말기에 괴링은 그의 비행대를 먼저 텔랑쿠르 비행장으로, 그다음 다름슈타트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여러 번 받았다. 한때 그는 연합군에게 항공기를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의 많은 조종사들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많은 다른 독일 참전 용사들처럼 괴링 또한 돌격대의 배신 신화를 지지했다. 이 신화는 독일군이 실제로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대신 마르크스주의자, 유대인, 그리고 특히 독일 군주제를 전복한 공화주의자 등 민간 지도자들에게 배신당했다는 믿음이었다.[39]
|thumb|right|150px|1907년. 카를스루에 육군 사관학교 시절
이후, 괴링은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 하인리히와 대부 에펜슈타인의 도움으로 1905년부터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의 육군 사관학교(Kadettenanstalt)에 입학했다. 1909년에는 훈련, 승마, 역사, 영어, 프랑스어, 음악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13]
이어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베를린 한국어 발음표기=그로스리히터펠데/Groß-Lichterfeldede에 있던 명문 프로이센 육군 사관학교에 재학했다. 여기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입학 조건이 가장 까다로운 동아리에 선발되기도 하고, 한국어 발음표기=루레벤/Ruhlebende의 경마에 참가하거나, 한국어 발음표기=베를린-반제/Berlin-Wannseede의 수영 대회에 참가하는 한편, 학업에서도 거의 모든 과목에서 최상위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14]
1911년 "우수"한 성적으로 하급 소위급 사관 후보생(Fähnrich) 시험에 합격하여, 하급 소위급 사관 후보생으로 임관했다. 1913년에는 아비투어에도 합격했다.
뛰어난 사관 후보생이었던 괴링은 베를린 사교계에 데뷔하여 상류층과의 교류도 경험했다.
1914년 1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알자스-로렌 제국령 알자스-로트링겐의 뮐하우젠에 주둔하고 있던 제112보병연대 "프린츠 빌헬름(Prinz Wilhelm)"(바덴 대공국 보병 연대)에 입대했다.
1914년 7월 말부터 8월 초에 걸쳐 제1차 세계 대전이라 불리는 각국의 전투가 잇따라 발발했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1914년 8월 3일에 개전했다.
괴링이 소속된 제112보병연대는 프랑스 국경 지역인 알자스-로렌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프랑스 개전 후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괴링이 이끄는 부대는 뮐루즈(독일어 명칭: 뮐하우젠)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의 전초 기지를 하나 공격하여 프랑스 병사 4명을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2급 철십자훈장을 수훈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류머티즘 열을 앓아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5]
프라이부르크 병원에 입원 중에 제112보병연대 친구이자 한국어 발음표기=루프트슈트라이트크레프테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Luftstreitkräfte (Deutsches Kaiserreich)de로 전속한 브루노 릴츠를 문병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항공대에 대한 동경을 품고 항공대 전속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처음에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괴링은 명령을 위반하고 원대에 복귀하지 않고, 릴츠의 알바트로스 비행기의 관측원으로 독단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군법회의가 명령 불복종 혐의로 괴링을 수사하여 출두 거부로 21일간의 병영 감금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궁정에 영향력 있는 대부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의 도움으로 제5군 사령관 황태자 빌헬름의 명령에 따라 판결이 집행되지 않았고, 게다가 괴링의 항공대 배속이 승인되었다.[16]
1914년 10월 말부터 1915년 6월 말까지 괴링은 제5군 예하 제25야전비행대(Feldflieger Abteilung 25 (FFA25)) 소속 릴츠가 조종하는 정찰기의 관측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봄 무렵부터 릴츠와 괴링의 비행기는 전장에 출격하여 정찰 활동을 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면 괴링은 릴츠에게 고도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기체 밖으로 나가, 발끝만으로 조종석 안에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카메라를 構えた。그리고 지상에서 격렬한 총격을 받으면서 수분에 걸쳐 목표물을 촬영했다. 등산 경험이 있는 괴링은 이것을 잘 해내어, 신선한 사진을 찍는 뛰어난 관측원이 되었다. 이윽고 "나는 브랑코 타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른 많은 비행기가 실패한 베르됭 요새의 포화를 뚫고 상세한 사진 촬영에 릴츠와 괴링의 비행기는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1915년 3월 릴츠와 함께 제5군 사령관 황태자 빌헬름으로부터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17] 릴츠와 괴링은 사진 설명을 위해 고급 장교들의 작전 회의에도 자주 불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괴링은 관측원으로만 만족하지 않았다. 1915년 7월부터 9월까지 프라이부르크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고, 1915년 9월부터 제25야전비행대 소속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15년 10월 3일에는 쌍발 전투기 조종사로서 첫 출격을 했다. 1915년 11월에는 영국 공군의 핸들리 페이지 대형 폭격기와 조우하여 공격을 가했지만, 소피스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파손된 항공기를 간신히 조종하여 독일 영토로 돌아왔지만, 부상 치료 때문에 1년 정도 전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18]
1916년 11월에 전선에 복귀. 제7비행중대(Jagdstaffel 7), 제5비행중대(Jagdstaffel 5), 제10비행보충대(Flieger Ersatz Abteilung 10), 제26비행중대(Jagdstaffel 26) 등에 소속되어 싸웠다. 착실히 격추 득점을 늘려, 1917년 5월에는 제27비행중대장(Jagdstaffel 27)으로 발탁되었다. 1917년부터 운용되기 시작한 단좌 전투기 알바트로스 D.V에 탑승하여 비행중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공중전은 더욱 격렬해졌다. 괴링의 비행중대와 라이쳐의 비행중대는 종종 공동 작전을 펼쳤고, 플랑드르 상공에서의 공중전에서는 프랑스군기에 괴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라이쳐가 구해주고, 그 후 반대로 영국군기에 라이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괴링이 구해주는 등의 장면이 목격되었다.
그중에서 괴링은 기량과 전의 모두 인정받아 독일군 조종사 중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철인 헤르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개성이 묻히기 쉬운 육군 육상 부대나 해군과 비교하여 항공대의 에이스 조종사들은 무엇보다 눈에 띄었기 때문에, 전 독일군의 스타였다. 그들의 사진이 독일 전역에 유통되었는데, 1917년부터는 괴링의 사진도 유통되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검 십자 훈장과 바덴 대공국의 한국어 발음표기=밀리테어-카를 프리드리히 페어딘스트오르덴/Militär-Karl-Friedrich-Verdienstordende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18년 6월 2일에는 18기 격추의 공로로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일반 군인의 사실상 최고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전공장을 수여받았다.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전공장의 조종사 수여는 일반적으로 적기 25기 격추가 필요했지만, 괴링은 특별히 뛰어난 조종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특례로 일찍 수여받게 된 것이다.

1918년 7월 7일에는 “리히트호펜 중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한국어 발음표기=야크트게슈바더 1 (벨트크리크)/Jagdgeschwader 1 (World War I)영어의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대대의 초대 대대장인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80대의 항공기를 격추시켜 연합국으로부터 두려움을 받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리히트호펜은 1918년 4월 21일 영국군기를 저공에서 추격 중 오스트레일리아 제53포병중대의 경기관총에 격추되어 전사했고, 그의 후임이 된 한국어 발음표기=빌헬름 라인하르트 (야크트플리거)/Wilhelm Reinhard (Jagdflieger)de도 7월 3일 아들러쇼프에서 열린 제2회 전투 경기 대회(신형 비행기 공개 경연)에서 도르니에 D-1형 복엽기의 공중 분해로 추락사했다.
그 다음 대대장으로 낙점된 사람은 에이스 파일럿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괴링이었다. 그러나 괴링은 그때까지 이 대대에 속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대대에는 괴링보다 더 많은 격추 숫자를 가진 에른스트 우데트나 한국어 발음표기=에리히 뢰벤하르트/Erich Loewenhardtde 등의 에이스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의외의 인선이었다. 우데트도 이 인사를 들었을 때, “이런 일이 있나. 외부인이 대대장이 되다니”라며 경악했다고 한다. 괴링이 대대장으로 선택된 것은, 그가 파일럿들 중에서 선임 중위였던 것과, 또한 조직 통제 능력이 뛰어난 지휘관으로 군부가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히트호펜 중대는 우데트, 뢰벤하르트, 로타르 폰 리히트호펜(만프레드의 동생) 등 유명한 에이스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괴링을 대대장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지만, 괴링은 대대장으로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격추 기록을 늘리려고 독자 행동을 취하기 쉬운 리히트호펜 중대의 각 파일럿들을 억제하고 팀 플레이를 성공시켰다. 특히 괴링이 영국군 편대에 돌격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 후, 우데트, 뢰벤하르트, 리히트호펜 등이 격추시키는 전법은 자존심이 강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목표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제공해 준 것이 지휘관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그 대신 괴링 자신의 격추 기록은 신통치 않아 최종적으로 22기에서 그쳤다). 1918년 8월 초 무렵에는 대대원들의 신뢰를 완전히 얻어, 초대 대대장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 이상으로 인망이 있는 대대장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의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대대는 쉴 새 없이 여러 전선의 하늘에서 공중전을 벌였지만, 당연히 소모도 심해져 결국 중대 수준까지 전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을 대대장으로 하는 하나의 전투 비행대의 보강을 받았다. 또한 작전 활동에서도 한국어 발음표기=베르톨트/Bertholdde를 대대장으로 하는 제3전대와 연계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편 연합군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다. 괴링은 1918년 9월 1일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적 복엽기는 무장이 견고하고, 그 다수기로 하는 편대 행동은 지극히 밀접하다. 우리 단좌 전투기의 수기 동
2. 1. 1. 출생
아이티 주재 독일 제국의 영사인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과 그의 후처의 차남으로, 독일 제국의 알프스산맥과 가까운 지역인 로젠하임(바이에른 왕국령)에서 태어났다. 알베르트 괴링은 그의 동생이다.[2]1896년, 3살 때 아버지가 알렉산드리아 주재 총영사직에서 은퇴하여 가족들은 함께 독일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괴링은 뉘른베르크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성(城)인 펠덴슈타인 성에서 자랐는데, 1913년까지 그 성의 주인은 어머니의 연인이자 아이들의 대부(代父)인 유대 사람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다.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유년시절을 부유하게 지냈다.[2][4]
괴링은 1893년 1월 12일,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의 마리엔바트 요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1839년 10월 31일 – 1913년 12월 7일)은 전직 기병 장교였으며, 최초의 독일 남서아프리카 총독(오늘날 나미비아)이었다.[2] 하인리히는 이전 결혼에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괴링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인 바이에른 농민 프란치스카 티펜브룬(1859년–1943년 7월 15일)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네 번째였다. 괴링의 형제자매는 카를, 올가, 파울라였고, 남동생은 알베르트였다. 괴링이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아이티에서 총영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출산을 위해 잠시 귀향했었다. 그녀는 6주 된 아기를 바이에른의 친구에게 맡겨두고 3년 동안 아이를 보지 못했으며, 그 후 그녀와 하인리히가 독일로 돌아왔다.[2]
괴링의 대부는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부유한 유대인 의사이자 사업가였다. 에펜슈타인은 하인리히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괴링 가족에게 먼저 베를린-프리데나우에 가족 주택을, 그 후에는 뉘른베르크 근처에 있는 펠덴슈타인이라는 작은 성을 제공했다. 괴링의 어머니는 이 무렵 에펜슈타인의 정부가 되었고, 약 15년 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다. 에펜슈타인은 왕실에 대한 봉사와 기부를 통해 리터(기사) 폰 에펜슈타인이라는 미미한 작위를 얻었다.[4][5][6][7]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괴링은 장난감 병정으로 놀고 아버지가 준 보어 군복을 입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거기서는 음식이 부실하고 규율이 엄격했다. 그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바이올린을 팔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일어났다.[8] 그는 펠덴슈타인 성을 포위 공격하는 척하며 전쟁 놀이를 계속 즐겼고, 튜턴족 전설과 사가를 연구했다. 그는 등산가가 되어 독일, 몽블랑 산맥, 그리고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등반했다. 16세에 그는 베를린-리히터펠데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2. 1. 2. 성장 배경
헤르만 괴링은 아이티 주재 독일 제국 영사였던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과 그의 후처 사이에서 차남으로, 독일 제국 알프스산맥과 가까운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에서 태어났다.[1] 알베르트 괴링은 그의 동생이다.1896년 3살 때 아버지가 알렉산드리아 주재 총영사직에서 은퇴하여 가족은 독일에서 함께 살았다. 어린 시절 괴링은 뉘른베르크 근처의 작은 성인 펠덴슈타인 성에서 자랐는데, 1913년까지 그 성의 주인은 어머니의 연인이자 아이들의 대부(代父)였던 유대인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다.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유년 시절을 부유하게 보냈다.[2][3]
괴링은 1893년 1월 12일 바이에른 왕국 로젠하임의 마리엔바트 요양원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1839년 10월 31일 – 1913년 12월 7일)은 전직 기병 장교였으며, 최초의 독일 남서아프리카 총독(오늘날 나미비아)이었다.[4] 하인리히는 이전 결혼에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괴링은 하인리히의 두 번째 부인인 바이에른 농민 프란치스카 티펜브룬(1859년–1943년 7월 15일)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네 번째였다. 괴링의 형제자매는 카를, 올가, 파울라였고, 남동생은 알베르트였다. 괴링이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아이티에서 총영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출산을 위해 잠시 귀향했었다. 그녀는 6주 된 아기를 바이에른의 친구에게 맡겨두고 3년 동안 아이를 보지 못했으며, 그 후 그녀와 하인리히가 독일로 돌아왔다.[1][2]
괴링의 대부는 헤르만 에펜슈타인이었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부유한 유대인 의사이자 사업가였다. 에펜슈타인은 하인리히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괴링 가족에게 먼저 베를린-프리데나우에 가족 주택을,[5] 그 후에는 뉘른베르크 근처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을 제공했다. 괴링의 어머니는 이 무렵 에펜슈타인의 정부가 되었고, 약 15년 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다. 에펜슈타인은 왕실에 대한 봉사와 기부를 통해 리터(기사) 폰 에펜슈타인이라는 작위를 얻었다.[2][3]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괴링은 장난감 병정으로 놀고 아버지가 준 보어 군복을 입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거기서는 음식이 부실하고 규율이 엄격했다. 그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바이올린을 팔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일어났다.[6] 그는 펠덴슈타인 성을 포위 공격하는 척하며 전쟁 놀이를 계속 즐겼고, 튜턴족 전설과 사가를 연구했다. 그는 등산가가 되어 독일, 몽블랑 산맥,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등반했다. 16세에 그는 베를린-리히터펠데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6][7]
괴링은 1912년 프로이센 군대의 빌헬름 왕자 연대(제112보병연대, 주둔지: 뮐하우젠)에 입대했다. 그 다음 해 그의 어머니는 에펜슈타인과 불화를 겪었고, 가족은 펠덴슈타인을 떠나 뮌헨으로 이사했으며, 그 직후 그의 아버지는 사망했다. 괴링은 바이에른에서 나치즘 하에서 더욱 발전한 그의 "낭만적인 독일 정체성"을 발전시켰다.[8]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괴링은 그의 연대와 함께 뮐하우젠에 주둔해 있었다.[6][7]
1900년부터 에펜슈타인은 자신의 소유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교외 마우터ンド르프(Mauterndorf)에 있는 마우터ンド르프 성(Burg Mauterndorf), 그리고 독일 뉘른베르크 북쪽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Neuhaus an der Pegnitz)에 있는 펠덴슈타인 성(Burg Veldenstein)에 괴링 가족을 초대하여, 그곳에서 살게 했다.[9]
에펜슈타인은 중세 귀족과 같은 생활에 동경을 품고 있었기에, 성 안은 매우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졌고, 시종들은 중세 궁정풍 의상을 입고 일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인 지배자로서 대했다. 괴링의 후일 화려한 장식에 대한 취향도 이 시기에 에펜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9][6]
한편, 아버지 하인리히는 퇴직 후 알코올 중독 상태로 지내고 있었고, 어린 시절 괴링의 눈에는 무능한 아버지로 비쳤다. 그 때문에 이 무렵 괴링은 에펜슈타인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존경했다.[10] 에펜슈타인도 괴링 가족의 아이들을 귀여워했다. 특히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알베르트를 귀여워했지만, 알베르트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등 기질이 에펜슈타인과 비슷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사교적이고 대담하며 모험을 동경하는 괴링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6]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는 자주 밤을 함께 보냈다. 동거인인 하인리히는 불만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묵인했다. 부모와 에펜슈타인 세 사람은 에펜슈타인의 성에서 기묘한 삼각관계 생활을 보냈다.[11] 1913년에 에펜슈타인이 릴리라는 젊은 여성과 재혼하고, 릴리의 요구로 괴링 가족이 성에서 퇴거하여 뮌헨으로 이주할 때까지 이 상태는 계속되었다.[12]
괴링은 10세부터 등산에 열중했다. 13세 무렵에는 험준한 암벽 등반을 통해 해발 3600미터의 그로스글록너 산(Groβglockner)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사냥에도 자주 데려가 주었다. 괴링의 사냥을 좋아하는 것도 에펜슈타인의 영향이었다.[13]
학업에서는 1904년 퓌르트의 초등학교(Volksschule)를 졸업하고, 그 후 안스바흐의 기숙제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규율이 엄격하여 입학 초기부터 괴링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괴링이 이 학교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의 작문이었다. 괴링이 에펜슈타인에 대해 쓴 글을 본 교장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에펜슈타인은 유대인이다. 안스바흐 학교 학생이 유대인을 존경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괴링은 에펜슈타인은 가톨릭이라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교장의 명령으로 "유대인을 찬양하는 작문은 다시는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100번 쓰게 된 데다, 유대인 명부를 A부터 E까지 베껴 쓰게 되었다. 이 처벌은 학우들에게도 알려지면서, 괴링은 학교에서 조롱당했다. 그리고 "내 대부는 유대인입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개구리 뛰기를 강요받는 괴롭힘을 당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학교를 뛰쳐나와 노이하우스의 펠덴슈타인 성으로 돌아가 버렸다(이때 학교의 악기 현을 모두 끊어버리는 복수를 했다).[14]
2. 1. 3. 군인 생활
1912년 장교로 임관되었으며, 독일 제국 공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맹활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괴링은 독일 제국에서 대표적인 공군 에이스였다.1918년 독일의 위대한 비행사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복무했던 유명한 비행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한 뒤, 혼란기에 군 장교들에 대한 민간인들의 푸대접에 몹시 분개하여 독일을 떠났다. 이후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민간 비행사로 일했으며, 스웨덴의 남작 부인 카린 폰 칸트초프를 만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뒤인 1922년 2월 3일에 독일 뮌헨에서 결혼했다.
괴링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아, 장난감 병정으로 놀고 아버지가 준 보어 군복을 입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거기서는 음식이 부실하고 규율이 엄격했다. 그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바이올린을 팔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을 핑계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일어났다. 그는 펠덴슈타인 성을 포위 공격하는 척하며 전쟁 놀이를 계속 즐겼고, 튜턴족 전설과 사가를 연구했다. 그는 등산가가 되어 독일, 몽블랑 산맥,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등반했다. 16세에 베를린-리히터펠데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괴링은 1912년 프로이센 군대의 빌헬름 왕자 연대(제112보병연대, 주둔지: 뮐하우젠)에 입대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괴링은 그의 연대와 함께 뮐하우젠에 주둔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첫 해, 괴링은 프랑스 국경에서 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주둔 도시 뮐하우젠 지역에서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참호전의 습기로 인한 류머티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회복 중에 그의 친구 브루노 뢰르처는 괴링에게 1916년 10월까지 독일군의 공중전투부대/Luftstreitkräfte}}({{translationde)가 될 부대로 전속할 것을 설득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그해 후반, 괴링은 뢰르처의 관측병으로 한국어 발음표기=펠트플리거 압타일룽/Feldflieger Abteilungde 25(FFA 25)에서 비행했다. 괴링은 비공식적으로 자신을 전속시켰던 것이다. 그는 발각되어 3주간의 병영 감금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을 때 괴링과 뢰르처의 관계는 공식화되었다. 그들은 황태자의 5군에 있는 FFA 25에 한 팀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정찰 및 폭격 임무를 수행했으며, 황태자는 괴링과 뢰르처 모두에게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조종사 훈련 과정을 마친 후 괴링은 '''야그트슈타펠''' 5에 배속되었다. 공중전에서 엉덩이에 심한 부상을 입고 거의 1년 동안 회복했다. 그 후 1917년 2월 뢰르처가 지휘하는 '''야그트슈타펠''' 26로 전속되었다. 그는 5월에 '''야그트슈타펠''' 27의 지휘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꾸준히 공중전 승리를 거두었다. 5, 26, 27 ''야스타''에서 복무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철십자훈장(1급 및 2급) 외에도 그는 검이 달린 자링거 사자 훈장, 프리드리히 훈장, 검이 달린 3급 호엔촐레른 가문 훈장을 받았고, 마침내 1918년 5월에는 탐내던 한국어 발음표기=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프랑스어를 받았다. 헤르만 달만에 따르면, 괴링은 뢰르처에게 상을 위한 로비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22승으로 전쟁을 마쳤다. 전후 연합군 손실 기록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결과, 그의 수여된 승리 중 두 개만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세 개는 가능성이 있고, 17개는 확실하거나 매우 가능성이 높았다.
1918년 7월 7일, 빌헬름 라인하르트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의 후임)의 사망에 따라 괴링은 "비행 서커스" '''야그트게슈바더''' 1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오만함은 그의 비행대원들 사이에서 그를 인기 없게 만들었다.
전쟁 말기에 괴링은 그의 비행대를 먼저 텔랑쿠르 비행장으로, 그다음 다름슈타트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여러 번 받았다. 한때 그는 연합군에게 항공기를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의 많은 조종사들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많은 다른 독일 참전 용사들처럼 괴링 또한 돌격대의 배신 신화를 지지했다. 이 신화는 독일군이 실제로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고, 대신 마르크스주의자, 유대인, 그리고 특히 독일 군주제를 전복한 공화주의자 등 민간 지도자들에게 배신당했다는 믿음이었다.[39]
|thumb|right|150px|1907년. 카를스루에 육군 사관학교 시절
이후, 괴링은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 하인리히와 대부 에펜슈타인의 도움으로 1905년부터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의 육군 사관학교(Kadettenanstalt)에 입학했다. 1909년에는 훈련, 승마, 역사, 영어, 프랑스어, 음악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13]
이어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베를린 한국어 발음표기=그로스리히터펠데/Groß-Lichterfeldede에 있던 명문 프로이센 육군 사관학교에 재학했다. 여기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입학 조건이 가장 까다로운 동아리에 선발되기도 하고, 한국어 발음표기=루레벤/Ruhlebende의 경마에 참가하거나, 한국어 발음표기=베를린-반제/Berlin-Wannseede의 수영 대회에 참가하는 한편, 학업에서도 거의 모든 과목에서 최상위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14]
1911년 "우수"한 성적으로 하급 소위급 사관 후보생(Fähnrich) 시험에 합격하여, 하급 소위급 사관 후보생으로 임관했다. 1913년에는 아비투어에도 합격했다.
뛰어난 사관 후보생이었던 괴링은 베를린 사교계에 데뷔하여 상류층과의 교류도 경험했다.
1914년 1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알자스-로렌 제국령 알자스-로트링겐의 뮐하우젠에 주둔하고 있던 제112보병연대 "프린츠 빌헬름(Prinz Wilhelm)"(바덴 대공국 보병 연대)에 입대했다.
1914년 7월 말부터 8월 초에 걸쳐 제1차 세계 대전이라 불리는 각국의 전투가 잇따라 발발했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1914년 8월 3일에 개전했다.
괴링이 소속된 제112보병연대는 프랑스 국경 지역인 알자스-로렌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프랑스 개전 후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괴링이 이끄는 부대는 뮐루즈(독일어 명칭: 뮐하우젠)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의 전초 기지를 하나 공격하여 프랑스 병사 4명을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2급 철십자훈장을 수훈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류머티즘 열을 앓아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5]
프라이부르크 병원에 입원 중에 제112보병연대 친구이자 한국어 발음표기=루프트슈트라이트크레프테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Luftstreitkräfte (Deutsches Kaiserreich)de로 전속한 브루노 릴츠를 문병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항공대에 대한 동경을 품고 항공대 전속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처음에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괴링은 명령을 위반하고 원대에 복귀하지 않고, 릴츠의 알바트로스 비행기의 관측원으로 독단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군법회의가 명령 불복종 혐의로 괴링을 수사하여 출두 거부로 21일간의 병영 감금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궁정에 영향력 있는 대부 헤르만 폰 에펜슈타인의 도움으로 제5군 사령관 황태자 빌헬름의 명령에 따라 판결이 집행되지 않았고, 게다가 괴링의 항공대 배속이 승인되었다.[16]
1914년 10월 말부터 1915년 6월 말까지 괴링은 제5군 예하 제25야전비행대(Feldflieger Abteilung 25 (FFA25)) 소속 릴츠가 조종하는 정찰기의 관측원으로 근무했다. 1915년 봄 무렵부터 릴츠와 괴링의 비행기는 전장에 출격하여 정찰 활동을 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면 괴링은 릴츠에게 고도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기체 밖으로 나가, 발끝만으로 조종석 안에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카메라를 構えた。그리고 지상에서 격렬한 총격을 받으면서 수분에 걸쳐 목표물을 촬영했다. 등산 경험이 있는 괴링은 이것을 잘 해내어, 신선한 사진을 찍는 뛰어난 관측원이 되었다. 이윽고 "나는 브랑코 타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른 많은 비행기가 실패한 베르됭 요새의 포화를 뚫고 상세한 사진 촬영에 릴츠와 괴링의 비행기는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1915년 3월 릴츠와 함께 제5군 사령관 황태자 빌헬름으로부터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17] 릴츠와 괴링은 사진 설명을 위해 고급 장교들의 작전 회의에도 자주 불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괴링은 관측원으로만 만족하지 않았다. 1915년 7월부터 9월까지 프라이부르크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고, 1915년 9월부터 제25야전비행대 소속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15년 10월 3일에는 쌍발 전투기 조종사로서 첫 출격을 했다. 1915년 11월에는 영국 공군의 핸들리 페이지 대형 폭격기와 조우하여 공격을 가했지만, 소피스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파손된 항공기를 간신히 조종하여 독일 영토로 돌아왔지만, 부상 치료 때문에 1년 정도 전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18]
1916년 11월에 전선에 복귀. 제7비행중대(Jagdstaffel 7), 제5비행중대(Jagdstaffel 5), 제10비행보충대(Flieger Ersatz Abteilung 10), 제26비행중대(Jagdstaffel 26) 등에 소속되어 싸웠다. 착실히 격추 득점을 늘려, 1917년 5월에는 제27비행중대장(Jagdstaffel 27)으로 발탁되었다. 1917년부터 운용되기 시작한 단좌 전투기 알바트로스 D.V에 탑승하여 비행중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공중전은 더욱 격렬해졌다. 괴링의 비행중대와 라이쳐의 비행중대는 종종 공동 작전을 펼쳤고, 플랑드르 상공에서의 공중전에서는 프랑스군기에 괴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라이쳐가 구해주고, 그 후 반대로 영국군기에 라이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괴링이 구해주는 등의 장면이 목격되었다.
그중에서 괴링은 기량과 전의 모두 인정받아 독일군 조종사 중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철인 헤르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개성이 묻히기 쉬운 육군 육상 부대나 해군과 비교하여 항공대의 에이스 조종사들은 무엇보다 눈에 띄었기 때문에, 전 독일군의 스타였다. 그들의 사진이 독일 전역에 유통되었는데, 1917년부터는 괴링의 사진도 유통되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검 십자 훈장과 바덴 대공국의 한국어 발음표기=밀리테어-카를 프리드리히 페어딘스트오르덴/Militär-Karl-Friedrich-Verdienstordende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18년 6월 2일에는 18기 격추의 공로로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일반 군인의 사실상 최고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전공장을 수여받았다.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전공장의 조종사 수여는 일반적으로 적기 25기 격추가 필요했지만, 괴링은 특별히 뛰어난 조종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특례로 일찍 수여받게 된 것이다.
1918년 7월 7일에는 “리히트호펜 중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한국어 발음표기=야크트게슈바더 1 (벨트크리크)/Jagdgeschwader 1 (World War I)영어의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대대의 초대 대대장인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 남작은 80대의 항공기를 격추시켜 연합국으로부터 두려움을 받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리히트호펜은 1918년 4월 21일 영국군기를 저공에서 추격 중 오스트레일리아 제53포병중대의 경기관총에 격추되어 전사했고, 그의 후임이 된 한국어 발음표기=빌헬름 라인하르트 (야크트플리거)/Wilhelm Reinhard (Jagdflieger)de도 7월 3일 아들러쇼프에서 열린 제2회 전투 경기 대회(신형 비행기 공개 경연)에서 도르니에 D-1형 복엽기의 공중 분해로 추락사했다.
그 다음 대대장으로 낙점된 사람은 에이스 파일럿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괴링이었다. 그러나 괴링은 그때까지 이 대대에 속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대대에는 괴링보다 더 많은 격추 숫자를 가진 에른스트 우데트나 한국어 발음표기=에리히 뢰벤하르트/Erich Loewenhardtde 등의 에이스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의외의 인선이었다. 우데트도 이 인사를 들었을 때, “이런 일이 있나. 외부인이 대대장이 되다니”라며 경악했다고 한다. 괴링이 대대장으로 선택된 것은, 그가 파일럿들 중에서 선임 중위였던 것과, 또한 조직 통제 능력이 뛰어난 지휘관으로 군부가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히트호펜 중대는 우데트, 뢰벤하르트, 로타르 폰 리히트호펜(만프레드의 동생) 등 유명한 에이스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괴링을 대대장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지만, 괴링은 대대장으로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격추 기록을 늘리려고 독자 행동을 취하기 쉬운 리히트호펜 중대의 각 파일럿들을 억제하고 팀 플레이를 성공시켰다. 특히 괴링이 영국군 편대에 돌격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 후, 우데트, 뢰벤하르트, 리히트호펜 등이 격추시키는 전법은 자존심이 강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목표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제공해 준 것이 지휘관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그 대신 괴링 자신의 격추 기록은 신통치 않아 최종적으로 22기에서 그쳤다). 1918년 8월 초 무렵에는 대대원들의 신뢰를 완전히 얻어, 초대 대대장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 이상으로 인망이 있는 대대장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의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대대는 쉴 새 없이 여러 전선의 하늘에서 공중전을 벌였지만, 당연히 소모도 심해져 결국 중대 수준까지 전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을 대대장으로 하는 하나의 전투 비행대의 보강을 받았다. 또한 작전 활동에서도 한국어 발음표기=베르톨트/Bertholdde를 대대장으로 하는 제3전대와 연계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편 연합군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다. 괴링은 1918년 9월 1일 사령부에 대한 보고서에서 “적 복엽기는 무장이 견고하고, 그 다수기로 하는 편대 행동은 지극히 밀접하다. 우리 단좌 전투기의 수기 동시 공격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 편대를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기는 대개 방탄 또는 방화 처리된 연료 탱크를 장비하고 있다. 제7군 및 제2군 전선에서 적 기구를 공격한 경험에 의하면, 그중 몇 건은 전혀 발화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라고 그 고전을 호소하고 있다. 같은 달, 괴링의 부관 카를 보덴샤츠는 일기에 “이러한 긴장은 괴링 중위의 얼굴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야위고 엄격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모두도 모두 엄격한 표정을 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연합군의 우세는 숫자상으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10월 30일 전투에서는 대대는 67대의 희생을 치르면서 41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데 그쳤다.
괴링은 대대를 이끌고 끝까지 싸웠지만, 11월 초 킬의 수병 반란을 계기로 전 독일에 반란이 확산되어(독일 혁명), 빌헬름 2세 황제는 퇴위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11월 11일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공화국 정부가 파리의 콩피에뉴 숲에서 연합국과 휴전 협정에 조인했다.
휴전 협정 후, 리히트호펜 중대는 비행기를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군에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괴링은 대원들과 상의한 끝에 이 명령을 무시하고 대대를 독일의 다름슈타트로 날아가게 했다. 그러나 악천후였기 때문에, 대대원 일부는 만하임에 긴급 착륙했다. 혁명을 일으켜 만하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만하임 노병 위원회는 이 대원들로부터 무기를 빼앗았다. 대원들은 다름슈타트로 트럭으로 향하여 괴링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격노한 괴링은 대대의 항공기를 이끌고 만하임으로 출격하여, 만하임 노병 위원회에 무기를 반환시키고, 사과문을 쓰게 했다. 이후 다름슈타트에 착륙할 때 괴링들은 고의로 착륙에 실패하여 대대의 항공기를 차례차례 파괴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연합군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리히트호펜 중대의 해산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괴링은 “오늘날 독일에서만, 그 이름은 진흙에 묻히고, 그 기록은 잊혀지고, 장교는 조롱받고 있다. 그러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도덕의 힘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예속시키려는 세력과 싸워,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리히트호펜 중대를 빛나는 존재로 만든 자질은 전시에도 평시에도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다시 올 것이다. 여러분, 나는 건배하고 싶습니다. 조국에 대해, 리히트호펜 중대에 대해.”라고 인사하고, 잔을 단숨에 비우고 잔을 바닥에 내리쳤다. 대원들도 괴링을 본받았다. 괴링과 대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리히트호펜 중대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을 괴링은 평생 잊지 않았다. 1943년 리히트호펜 중대에서 함께 싸운 루터라는 유대인이 체포되자, 괴링은 게슈타포에 압력을 가하여 그의 석방에 힘썼고, 그 후 개인적인 보호하에 두었다. 또한 이 대대원이었던 우데트와 보덴샤츠 등은 후에 독일 공군의 간부로 발탁되었다.
2. 2. 나치당 입당과 활동
## 나치당 입당과 활동### 나치당 입당
1921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 말 나치당에 입당했다.[36] 1922년 11월 뮌헨의 정치 집회에서 처음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을 보았고, 연설이 끝난 후 히틀러와 개별적으로 면담했다.[36]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독일이 패전국이 된 것은 전쟁에서 진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배신 때문이다"라는 배후의 칼침설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히틀러에게 매료되었다. 괴링은 2년 후 회고록에서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그에게 푹 빠져 버렸다"고 말했다. 히틀러 또한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공군 영웅에게 이용 가치를 보았다.[36] 당시 히틀러 주변에 상류층 출신의 남자는 에른스트 뢸름밖에 없었기에 괴링은 귀중한 인재였다.[36]
1922년 12월에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시 당원 번호는 불명. 1928년에 당원 번호 23이 부여되었다).[36]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3년 3월에는 돌격대(SA) 최고 지도자에 임명되었다. 괴링은 이때 히틀러에게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나는 당신에게 운명을 맡기겠습니다. 그것이 제 목숨을 걸게 되더라도"라고 맹세했다.[36] 괴링은 단기간에 돌격대에 훈련을 시켜 통제된 군대로 만들었다. 규율 정연해진 돌격대의 행진은 많은 행인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37] 히틀러도 "나는 괴링에게 규율 없는 야지마 연합을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순식간에 1만 1천 명의 사단으로 만들어냈다"라고 후에 말했다. 그러나 괴링이 매료되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히틀러 개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당의 활동이나 강령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루돌프 헤스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등 히틀러 이외의 당 동지들을 깔봤다.[36]

괴링은 1923년 3월 1일 한스 울리히 클린츠의 후임으로 Sturmabteilungde(SA)의 Oberster SA-Führerde로 임명되어 1923년 11월 해체될 때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1931년 12월 18일 SA-Gruppenführerde로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1일 그는 새로 만들어진 SA-Obergruppenführerde 계급으로 승진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1945년까지 SA 명부에 이 계급을 유지했다.
초창기에는 히틀러를 좋아했던 카린이 남편과 히틀러, 루돌프 헤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에른스트 뢰름 등 주요 나치 인사들의 회의에서 종종 주최자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괴링과의 초기 관계를 이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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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당은 1920년대 초 뮌헨과 그 외 지역에서 대규모 집회와 집회를 열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지지자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서 영감을 얻은 나치는 1923년 11월 8~9일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전쟁부로의 행진을 이끌던 히틀러와 함께 있던 괴링은 사타구니에 총을 맞았다. 나치 1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고,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카린의 도움으로 괴링은 인스브루크로 밀반출되어 수술을 받고 통증 완화를 위해 모르핀을 투여받았다. 그는 12월 24일까지 병원에 머물렀다. 이것이 뉘른베르크 감금까지 지속된 그의 모르핀 중독의 시작이었다.
1923년 8월 말 어머니 프란치스카(フランツィスカ)가 뮌헨에서 사망했다. 아버지 하인리히와 마찬가지로 뮌헨의 베스트프리트호프 묘지(ヴェストフリートホーフ墓地)에 안장되었다.[38]

1923년 9월 26일 구스타프 폰 카르가 바이에른주 총독이 되었다. 그는 나치당을 비롯한 바이에른의 각 우익 세력과 연계하여 바이에른 독립과 베를린 진군을 노렸으나, 중앙 정부의 압력으로 베를린 진군을 억제하게 되었고, 특히 베를린 진군을 강경하게 주장한 나치당과의 연계를 배제하게 되었다. 불만을 품은 히틀러는 뮌헨 폭동을 계획하여 카르 등의 신병을 확보하여 자신의 협력을 얻고 베를린 진군을 실행하려 했다.
1923년11월 8일 밤, 히틀러는 돌격대를 이끌고 카르가 연설을 하고 있던 「뷔르거브로이켈러」에 돌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위협하여 현장을 제압하고 카르 등의 신병을 확보했다. 히틀러가 카르의 협력을 얻기 위해 안쪽 대기실에서 설득하는 동안, 괴링은 청중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친구입니다. 맥주라도 마십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1월 9일 아침, 히틀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이끄는 괴링 이하 돌격대는 뮌헨 중심부 오데온 광장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선두에는 히틀러, 루덴도르프, 그리고 돌격대 사령관 괴링이 있었다. 그러나 오데온 광장의 펠트헤르할레까지 수 미터라는 곳에서 경찰대의 총격을 받았다. 이때 괴링은 허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돌격대원들은 그를 부축하여 그 자리를 떠나 근처 민가로 뛰어들었다. 그 집에는 일제 바르린이라는 유대인 가구상의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해질녘까지 괴링을 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직 간호사였기에 응급 처치를 해 주었다[39]. 괴링은 이때 일제의 헌신을 잊지 않았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유대인인 그녀를 보호하고 아르헨티나 망명을 도왔다. 유대인의 해외 망명은 일반적으로 재산 몰수를 수반하지만, 괴링의 보호를 받은 그녀는 재산을 빼앗기지 않았다[40].
그 후, 나치당 지지자인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소식을 들은 카린 부인이 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카린의 친구가 있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으로 이동한 후, 다시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로 해외 망명했다[39].
### 나치당 간부
괴링은 1921년에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말 소규모 나치당에 입당했다. 전직 장교로서 히틀러의 나치 돌격대를 지휘했으며, 1923년 1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성급하게 일으켰다가 실패한 맥주홀 쿠데타에도 가담해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39]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상처의 아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하다가 심하게 중독되어 1925년~1926년 2번이나 스웨덴 스톡홀름의 롱브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927년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의 베를린으로 돌아온 괴링은 독일 산업계와의 접촉에 성공하여 다시 당 지도부 자리에 앉았고, 1928년 5월 20일의 독일 국회 선거에서 나치스당이 얻은 12개 의회의석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다.

국회의원이 된 괴링은 상류 계급 출신이라는 점, 제1차 세계대전의 에이스 파일럿이라는 점,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수상자라는 점, 유머러스한 화술, 세련된 매너, 아름답고 기품 있는 아내 카린 등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층 계급 출신자들이 많은 나치당 간부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상류 사회·재계 인사들과 접촉하여 인맥 구축에 힘썼다. 나치당 최대의 후원자였던 루르 지역의 철강왕 프리츠 티센도 괴링이 얻은 후원자였다. 프리츠 티센은 괴링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어느 날, 제 석탄 채굴 회사의 이사 중 한 명인 텐겔만의 아들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베를린에 괴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을 위해 일을 하려고 하지만, 독일의 산업계로부터는 조금도 지지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와 알고 지낼 생각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를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그는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확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 개조 비용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괴링은 매우 쾌적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정치에 관한 일에서는 그는 항상 신중하고 분별 있는 태도였습니다. 저는 또 그의 부인 카린도 알게 되었

그런데 1928년 봄이 되자 히틀러의 심경에 변화가 생겨, 괴링을 다시 측근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괴링은 산수시 호텔(Hotel Sanssouci)에서 히틀러와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이 회담에서 히틀러는 괴링을 1928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의 후보로 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의 선거 제도는 비례 대표제였으며, 괴링은 당의 후보 명부 최상위에 올랐다. 이 선거전에서 나치당은 적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전술을 취했고, 괴링도 연합국(특히 대독 강경파인 프랑스),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자, 자본가 등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인플레이션, 실업, 기아의 공포를 부추기는 연설을 활발하게 했다. 괴링의 연설은 짧고 거친 부분이 있었지만, 능숙한 편이었다고 한다. 선거 자체는 좌익의 압승으로 끝났고, 나치당은 12석밖에 얻지 못했지만, 괴링은 당선되었다.
국회에서 인정받는 당 지도자가 되었고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이 230석을 점하자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괴링의 유일한 관심은 1933년 3월까지 국회가 겉으로나마 내세웠던 민주주의 체계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84세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역대 총리들, 특히 쿠르트 폰 슐라이혀와 프란츠 폰 파펜을 계략에서 앞질러 결국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 1933년 3월 23일에야 히틀러에게 독재권력을 주는 전권 위임법이 통과되었다. 괴링은 끈기있게 밀고 나가 독일에서 제일 크고 영향력있는 프로이센 자유주의 내무장관직을 맡았다. 이 직책을 이용하여 프로이센 경찰을 나치화했으며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했다. 또한 다루기 힘든 반대파들을 교정하기 위한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1933년 2월 27일 나치가 선동한 것으로 추측되는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구실로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몇몇 사회민주당 의원들도 체포해 다음 달 전권 위임법의 통과에 방해되는 자들을 제거했다.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로서 괴링의 위치는 1930년대 말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마음대로 국가직책을 골라서 역임했다. 그는 독일 제국 항공 분야의 총책임자, 새로 편성하여 1935년 3월 1일까지 민간사업체로 위장했던 루프트바페의 총사령관, 1933년에는 독일 수렵지 및 산림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1934년 6월 30일 나치스당이 나치 돌격대(SA)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같은 해 안보책임자 직책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게슈타포와 강제수용소에서 손을 떼었다. 1937년에는 1934년부터 히틀러 정부의 경제계획부 장관인 히알마르 샤하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히틀러는 1936년에 이미 샤하트와 의논도 하지 않고 괴링에게 전시 경제(戰時經濟)를 위한 4개년 계획의 책임을 맡겼었다. 괴링은 또한 히틀러의 순회대사도 계속 맡았다.
독일 국민뿐 아니라 외국 대사와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괴링은 나치스 지도자들 중데 가장 인기 있었으며,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했다. 성격이 무자비했는데 그것은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병합'(Anschluss)하도록 협박한 전화 대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독일에 사는 유대인뿐 아니라 히틀러에게 무너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사람도 바로 괴링이었다.
괴링은 전처가 1931년 죽은 뒤 1935년 4월 10일 여배우 에미 존네만과 재혼했다. 전처에게처럼 후처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사냥에 관심이 많아 베를린 북쪽의 쇼르프하이데에 드넓은 산림지를 소유했고, 그곳에 1933년부터 그의 야망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을 짓기 시작했으며 전처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 저택을 카린할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카린할에 자신이 모아들인 막대한 예술 소장품의 대부분을 보관했다. 1938년 6월 2일 에미는 괴링의 유일한 자식인 외동딸 에다 괴링을 낳았다.
괴링은 1922년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는 1923년 3월 1일 한스 울리히 클린츠의 후임으로 Sturmabteilungde(SA)의 Oberster SA-Führerde로 임명되어 1923년 11월 해체될 때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1931년 12월 18일 SA-Gruppenführerde로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1일 그는 새로 만들어진 SA-Obergruppenführerde 계급으로 승진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1945년까지 SA 명부에 이 계급을 유지했다.
초창기에는 히틀러를 좋아했던 카린이 남편과 히틀러, 루돌프 헤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에른스트 뢰름 등 주요 나치 인사들의 회의에서 종종 주최자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괴링과의 초기 관계를 이렇게 회상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1920년대 초 뮌헨과 그 외 지역에서 대규모 집회와 집회를 열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지지자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서 영감을 얻은 나치는 1923년 11월 8~9일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전쟁부로의 행진을 이끌던 히틀러와 함께 있던 괴링은 사타구니에 총을 맞았다.[39] 나치 1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고,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카린의 도움으로 괴링은 인스브루크로 밀반출되어 수술을 받고 통증 완화를 위해 모르핀을 투여받았다. 그는 12월 24일까지 병원에 머물렀다. 이것이 뉘른베르크 감금까지 지속된 그의 모르핀 중독의 시작이었다. 한편, 뮌헨 당국은 괴링을 지명 수배했다.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해외 나치 동조자들의 호의에 의존하던 괴링 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베니스로 이사했다. 1924년 5월에는 피렌체와 시에나를 거쳐 로마를 방문했다. 1924년 어느 시점에 괴링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원들과의 접촉을 통해 무솔리니를 만났다. 무솔리니는 당시 감옥에 있던 히틀러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표명했다. 히틀러는 투옥 중에 Mein Kampfde를 집필했고, 1924년 12월 석방되었다.
한편, 괴링의 개인적인 문제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1925년까지 카린의 어머니가 병들었다. 괴링 부부는 1925년 봄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단치히(현재 그단스크)를 거쳐 스웨덴으로 여행할 자금을 어렵게 마련했다. 괴링은 폭력적인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고, 카린의 가족은 그의 쇠퇴에 충격을 받았다. 간질과 심장이 약했던 카린은 의사들이 괴링을 담당하도록 허용해야 했고, 그녀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데려가졌다. 괴링은 위험한 마약 중독자로 인정되어 1925년 9월 1일 롱브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는 억지로 속박해야 할 정도로 폭력적이었지만, 그의 정신과 의사는 그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했고, 그 상태는 모르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약물에서 벗어나 시설을 잠시 떠났지만, 추가 치료를 위해 돌아와야 했다. 그는 1927년 사면령이 선포되었을 때 독일로 돌아와 항공 산업에서 일을 재개했다. 간질과 결핵을 앓던 카린 괴링은 1931년 10월 17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한편, 나치당은 재건과 대기의 시기를 맞았다. 경제가 회복되어 나치들이 선동할 기회가 줄었다. SA는 재조직되었지만 괴링이 아닌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이 수장이 되었고, 1925년 히틀러의 경호원으로 처음 설립된 Schutzstaffelde(SS)가 설립되었다. 당원 수는 1925년 2만 7천 명에서 1928년 10만 8천 명, 1929년 17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1928년 5월 선거에서 나치당은 Reichstagde에서 총 491석 중 12석만 획득했다. 괴링은 바이에른 출신 대표로 선출되었다. Reichstagde에서 의석을 확보한 괴링은 히틀러가 그를 이러한 역할에서 나치즘의 홍보 담당자로 여겼기 때문에 나치 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괴링은 바이마르와 나치 정권 동안 모든 후속 선거에서 계속해서 라이히스타그에 선출되었다. 선거에서의 성공은 괴링에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보수적인 기업가인 프리츠 티센과 히알마르 샤흐트와 같은 나치 대의에 대한 강력한 동조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엄청난 침체를 겪었고, 1930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6,409,600표와 107석을 얻었다. 1931년 5월 히틀러는 괴링을 바티칸으로 파견하여 미래의 피우스 12세를 만나게 했다.
1932년 7월 선거에서 나치는 230석을 얻어 Reichstagde에서 단연 최대 정당이 되었다. 오랜 전통에 따라 나치는 Reichstagde 의장을 선출할 자격이 있었고, 괴링을 그 자리에 선출했다. 그는 1945년 4월 23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라이히슈타크 방화 사건은 1933년 2월 27일 밤에 발생했다. 괴링은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마리누스 반 데어 루베라는 공산주의자 급진주의자가 체포되었고 방화에 대한 단독 책임을 주장했다. 괴링은 즉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단속을 명령했다.
나치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방화 사건을 이용했다. 히틀러의 촉구로 다음 날 통과된 라이히슈타크 방화 칙령은 기본권을 정지시켰고 재판 없이 구금을 허용했다.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탄압되었고 약 4,000명의 당원이 체포되었다. 괴링은 포로들을 사살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프로이센 정치경찰의 책임자였던 루돌프 딜스는 명령을 무시했다. 윌리엄 L. 샤이러와 앨런 불록을 포함한 일부 연구자들은 나치당 자체가 방화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프란츠 할더 장군은 괴링이 방화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42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 오찬에서 괴링이 "라이히슈타크에 대해 정말로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불을 질렀으니까!"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괴링은 자신의 뉘른베르크 증언에서 이 이야기를 부인했다.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로 임명되자, 괴링은 무임소 장관(Reichsminister ohne Portefeuille)이자 항공 총감(Reichskommissar)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33년 4월 11일 프로이센 주총리, 프로이센 내무장관, 프로이센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3년 4월 25일, 히틀러는 프로이센의 제국 총독(Reichsstatthalter) 권한을 괴링에게 위임했다. 1933년 5월 18일, 괴링은 프로이센 지방 의회(Landtag of Prussia)를 통해 모든 입법권을 내각에 부여하는 권한 부여 법(enabling act)을 통과시켰다.

이 권한을 이용하여 괴링은 1933년 7월 8일 프로이센 주의회(Prussian State Council)의 상원에 해당하는 프로이센 주의회를 폐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대신 그는 단순히 자문 기구 역할을 하는 개정된 비입법적 프로이센 주의회(Prussian State Council (Nazi Germany))를 설립했다. 괴링은 의장을 역임했으며, 프로이센 내각 장관과 국무장관, 괴링이 직접 선발한 나치당 간부 및 기타 산업 및 사회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1933년 10월, 괴링은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학원(Academy for German Law) 창립 회의에서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7월, 그는 신설된 제국 임업청(Reich Forestry Office)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Reichsminister의 직급을 부여받았다.
제국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과 SS 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전역의 통합 경찰을 설립하기를 원했지만, 괴링은 1933년 4월 26일 루돌프 디엘스를 수장으로 하는 특별 프로이센 경찰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 비밀국가경찰)로 불렸다. 괴링은 디엘스가 게슈타포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SA의 권력에 대응하기에는 너무 무자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1934년 4월 20일 게슈타포의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당시 SA의 규모는 200만 명이 넘었다.
히틀러는 SA 사령관 에른스트 뢰름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게슈타포와 SS를 이용해 SA를 분쇄하기 위해 괴링과 공모했다. SA 대원들은 이 계획을 눈치채고 1934년 6월 29일 밤 수천 명이 거리로 나가 폭력 시위를 벌였다. 격분한 히틀러는 SA 지도부의 체포를 명령했다. 뢰름은 자살을 거부했을 때 감방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괴링은 수천 명에 달하는 수감자 명단을 직접 검토하여 추가로 처형해야 할 사람들을 결정했다.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소 85명이 사망했는데, 이 기간은 현재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으로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7월 13일 국회에서 이 살인 행위가 완전히 불법이었다고 시인했지만, 쿠데타 음모가 진행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행위를 합법화하는 소급 법률이 통과되었고, 비판은 체포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시행된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 중 하나는 독일이 공군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체결 이후 경찰 항공기가 허용되었고, 괴링은 1933년 5월 항공 교통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독일은 조약을 위반하여 항공기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1935년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괴링은 제국 항공 장관이 되었다.
1936년 9월 각료 회의에서 괴링과 히틀러는 독일 재군비 프로그램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8일 히틀러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괴링을 4개년 계획 총책임자(Plenipotentiary)로 임명했다. 괴링은 이 계획
2. 2. 1. 나치당 입당
1921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 말 나치당에 입당했다.[36] 1922년 11월 뮌헨의 정치 집회에서 처음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을 보았고, 연설이 끝난 후 히틀러와 개별적으로 면담했다.[36]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독일이 패전국이 된 것은 전쟁에서 진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배신 때문이다"라는 배후의 칼침설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히틀러에게 매료되었다. 괴링은 2년 후 회고록에서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그에게 푹 빠져 버렸다"고 말했다. 히틀러 또한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은 이 공군 영웅에게 이용 가치를 보았다.[36] 당시 히틀러 주변에 상류층 출신의 남자는 에른스트 뢸름밖에 없었기에 괴링은 귀중한 인재였다.[36]1922년 12월에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시 당원 번호는 불명. 1928년에 당원 번호 23이 부여되었다).[36]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3년 3월에는 돌격대(SA) 최고 지도자에 임명되었다. 괴링은 이때 히틀러에게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나는 당신에게 운명을 맡기겠습니다. 그것이 제 목숨을 걸게 되더라도"라고 맹세했다.[36] 괴링은 단기간에 돌격대에 훈련을 시켜 통제된 군대로 만들었다. 규율 정연해진 돌격대의 행진은 많은 행인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37] 히틀러도 "나는 괴링에게 규율 없는 야지마 연합을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순식간에 1만 1천 명의 사단으로 만들어냈다"라고 후에 말했다. 그러나 괴링이 매료되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히틀러 개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당의 활동이나 강령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루돌프 헤스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등 히틀러 이외의 당 동지들을 깔봤다.[36]
괴링은 1923년 3월 1일 한스 울리히 클린츠의 후임으로 Sturmabteilungde(SA)의 Oberster SA-Führerde로 임명되어 1923년 11월 해체될 때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1931년 12월 18일 SA-Gruppenführerde로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1일 그는 새로 만들어진 SA-Obergruppenführerde 계급으로 승진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1945년까지 SA 명부에 이 계급을 유지했다.
초창기에는 히틀러를 좋아했던 카린이 남편과 히틀러, 루돌프 헤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에른스트 뢰름 등 주요 나치 인사들의 회의에서 종종 주최자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괴링과의 초기 관계를 이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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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당은 1920년대 초 뮌헨과 그 외 지역에서 대규모 집회와 집회를 열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지지자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서 영감을 얻은 나치는 1923년 11월 8~9일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전쟁부로의 행진을 이끌던 히틀러와 함께 있던 괴링은 사타구니에 총을 맞았다. 나치 1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고,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카린의 도움으로 괴링은 인스브루크로 밀반출되어 수술을 받고 통증 완화를 위해 모르핀을 투여받았다. 그는 12월 24일까지 병원에 머물렀다. 이것이 뉘른베르크 감금까지 지속된 그의 모르핀 중독의 시작이었다.
1923년 8월 말 어머니 프란치스카(フランツィスカ)가 뮌헨에서 사망했다. 아버지 하인리히와 마찬가지로 뮌헨의 베스트프리트호프 묘지(ヴェストフリートホーフ墓地)에 안장되었다.[38]
2. 2. 2. 나치당 간부
1921년에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으며, 1922년말 소규모 나치당에 입당했다. 전직 장교로서 히틀러의 나치 돌격대를 지휘했으며, 1923년 1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성급하게 일으켰다가 실패한 맥주홀 쿠데타에도 가담해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39]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상처의 아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르핀을 사용하다가 심하게 중독되어 1925년~1926년 2번이나 스웨덴 스톡홀름의 롱브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1927년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의 베를린으로 돌아온 괴링은 독일 산업계와의 접촉에 성공하여 다시 당 지도부 자리에 앉았고, 1928년 5월 20일의 독일 국회 선거에서 나치스당이 얻은 12개 의회의석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다. 국회에서 인정받는 당 지도자가 되었고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이 230석을 점하자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괴링의 유일한 관심은 1933년 3월까지 국회가 겉으로나마 내세웠던 민주주의 체계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84세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역대 총리들, 특히 쿠르트 폰 슐라이혀와 프란츠 폰 파펜을 계략에서 앞질러 결국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 1933년 3월 23일에야 히틀러에게 독재권력을 주는 전권 위임법이 통과되었다. 괴링은 끈기있게 밀고 나가 독일에서 제일 크고 영향력있는 프로이센 자유주의 내무장관직을 맡았다. 이 직책을 이용하여 프로이센 경찰을 나치화했으며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했다. 또한 다루기 힘든 반대파들을 교정하기 위한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1933년 2월 27일 나치가 선동한 것으로 추측되는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구실로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몇몇 사회민주당 의원들도 체포해 다음 달 전권 위임법의 통과에 방해되는 자들을 제거했다.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로서 괴링의 위치는 1930년대 말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마음대로 국가직책을 골라서 역임했다. 그는 독일 제국 항공 분야의 총책임자, 새로 편성하여 1935년 3월 1일까지 민간사업체로 위장했던 루프트바페의 총사령관, 1933년에는 독일 수렵지 및 산림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1934년 6월 30일 나치스당이 나치 돌격대(SA)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같은 해 안보책임자 직책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게슈타포와 강제수용소에서 손을 떼었다. 1937년에는 1934년부터 히틀러 정부의 경제계획부 장관인 히알마르 샤하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히틀러는 1936년에 이미 샤하트와 의논도 하지 않고 괴링에게 전시 경제(戰時經濟)를 위한 4개년 계획의 책임을 맡겼었다. 괴링은 또한 히틀러의 순회대사도 계속 맡았다.
독일 국민뿐 아니라 외국 대사와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괴링은 나치스 지도자들 중데 가장 인기 있었으며,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했다. 성격이 무자비했는데 그것은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병합'(Anschluss)하도록 협박한 전화 대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독일에 사는 유대인뿐 아니라 히틀러에게 무너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사람도 바로 괴링이었다.
괴링은 전처가 1931년 죽은 뒤 1935년 4월 10일 여배우 에미 존네만과 재혼했다. 전처에게처럼 후처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사냥에 관심이 많아 베를린 북쪽의 쇼르프하이데에 드넓은 산림지를 소유했고, 그곳에 1933년부터 그의 야망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을 짓기 시작했으며 전처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 저택을 카린할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카린할에 자신이 모아들인 막대한 예술 소장품의 대부분을 보관했다. 1938년 6월 2일 에미는 괴링의 유일한 자식인 외동딸 에다 괴링을 낳았다.
괴링은 1922년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는 1923년 3월 1일 한스 울리히 클린츠의 후임으로 Sturmabteilungde(SA)의 Oberster SA-Führerde로 임명되어 1923년 11월 해체될 때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1931년 12월 18일 SA-Gruppenführerde로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1일 그는 새로 만들어진 SA-Obergruppenführerde 계급으로 승진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1945년까지 SA 명부에 이 계급을 유지했다.
초창기에는 히틀러를 좋아했던 카린이 남편과 히틀러, 루돌프 헤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에른스트 뢰름 등 주요 나치 인사들의 회의에서 종종 주최자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나중에 괴링과의 초기 관계를 이렇게 회상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1920년대 초 뮌헨과 그 외 지역에서 대규모 집회와 집회를 열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지지자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서 영감을 얻은 나치는 1923년 11월 8~9일 맥주홀 폭동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전쟁부로의 행진을 이끌던 히틀러와 함께 있던 괴링은 사타구니에 총을 맞았다.[39] 나치 1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고, 히틀러를 포함한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카린의 도움으로 괴링은 인스브루크로 밀반출되어 수술을 받고 통증 완화를 위해 모르핀을 투여받았다. 그는 12월 24일까지 병원에 머물렀다. 이것이 뉘른베르크 감금까지 지속된 그의 모르핀 중독의 시작이었다. 한편, 뮌헨 당국은 괴링을 지명 수배했다.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해외 나치 동조자들의 호의에 의존하던 괴링 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베니스로 이사했다. 1924년 5월에는 피렌체와 시에나를 거쳐 로마를 방문했다. 1924년 어느 시점에 괴링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원들과의 접촉을 통해 무솔리니를 만났다. 무솔리니는 당시 감옥에 있던 히틀러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표명했다. 히틀러는 투옥 중에 Mein Kampfde를 집필했고, 1924년 12월 석방되었다.
한편, 괴링의 개인적인 문제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1925년까지 카린의 어머니가 병들었다. 괴링 부부는 1925년 봄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단치히(현재 그단스크)를 거쳐 스웨덴으로 여행할 자금을 어렵게 마련했다. 괴링은 폭력적인 모르핀 중독자가 되었고, 카린의 가족은 그의 쇠퇴에 충격을 받았다. 간질과 심장이 약했던 카린은 의사들이 괴링을 담당하도록 허용해야 했고, 그녀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데려가졌다. 괴링은 위험한 마약 중독자로 인정되어 1925년 9월 1일 롱브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그는 억지로 속박해야 할 정도로 폭력적이었지만, 그의 정신과 의사는 그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했고, 그 상태는 모르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약물에서 벗어나 시설을 잠시 떠났지만, 추가 치료를 위해 돌아와야 했다. 그는 1927년 사면령이 선포되었을 때 독일로 돌아와 항공 산업에서 일을 재개했다. 간질과 결핵을 앓던 카린 괴링은 1931년 10월 17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한편, 나치당은 재건과 대기의 시기를 맞았다. 경제가 회복되어 나치들이 선동할 기회가 줄었다. SA는 재조직되었지만 괴링이 아닌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이 수장이 되었고, 1925년 히틀러의 경호원으로 처음 설립된 Schutzstaffelde(SS)가 설립되었다. 당원 수는 1925년 2만 7천 명에서 1928년 10만 8천 명, 1929년 17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1928년 5월 선거에서 나치당은 Reichstagde에서 총 491석 중 12석만 획득했다. 괴링은 바이에른 출신 대표로 선출되었다. Reichstagde에서 의석을 확보한 괴링은 히틀러가 그를 이러한 역할에서 나치즘의 홍보 담당자로 여겼기 때문에 나치 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괴링은 바이마르와 나치 정권 동안 모든 후속 선거에서 계속해서 라이히스타그에 선출되었다. 선거에서의 성공은 괴링에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보수적인 기업가인 프리츠 티센과 히알마르 샤흐트와 같은 나치 대의에 대한 강력한 동조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엄청난 침체를 겪었고, 1930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6,409,600표와 107석을 얻었다. 1931년 5월 히틀러는 괴링을 바티칸으로 파견하여 미래의 피우스 12세를 만나게 했다.
1932년 7월 선거에서 나치는 230석을 얻어 Reichstagde에서 단연 최대 정당이 되었다. 오랜 전통에 따라 나치는 Reichstagde 의장을 선출할 자격이 있었고, 괴링을 그 자리에 선출했다. 그는 1945년 4월 23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라이히슈타크 방화 사건은 1933년 2월 27일 밤에 발생했다. 괴링은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마리누스 반 데어 루베라는 공산주의자 급진주의자가 체포되었고 방화에 대한 단독 책임을 주장했다. 괴링은 즉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단속을 명령했다.
나치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방화 사건을 이용했다. 히틀러의 촉구로 다음 날 통과된 라이히슈타크 방화 칙령은 기본권을 정지시켰고 재판 없이 구금을 허용했다.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탄압되었고 약 4,000명의 당원이 체포되었다. 괴링은 포로들을 사살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프로이센 정치경찰의 책임자였던 루돌프 딜스는 명령을 무시했다. 윌리엄 L. 샤이러와 앨런 불록을 포함한 일부 연구자들은 나치당 자체가 방화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프란츠 할더 장군은 괴링이 방화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42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 오찬에서 괴링이 "라이히슈타크에 대해 정말로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내가 불을 질렀으니까!"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괴링은 자신의 뉘른베르크 증언에서 이 이야기를 부인했다.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로 임명되자, 괴링은 무임소 장관(Reichsminister ohne Portefeuille)이자 항공 총감(Reichskommissar)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33년 4월 11일 프로이센 주총리, 프로이센 내무장관, 프로이센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었다. 1933년 4월 25일, 히틀러는 프로이센의 제국 총독(Reichsstatthalter) 권한을 괴링에게 위임했다. 1933년 5월 18일, 괴링은 프로이센 지방 의회(Landtag of Prussia)를 통해 모든 입법권을 내각에 부여하는 권한 부여 법(enabling act)을 통과시켰다.
이 권한을 이용하여 괴링은 1933년 7월 8일 프로이센 주의회(Prussian State Council)의 상원에 해당하는 프로이센 주의회를 폐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대신 그는 단순히 자문 기구 역할을 하는 개정된 비입법적 프로이센 주의회(Prussian State Council (Nazi Germany))를 설립했다. 괴링은 의장을 역임했으며, 프로이센 내각 장관과 국무장관, 괴링이 직접 선발한 나치당 간부 및 기타 산업 및 사회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1933년 10월, 괴링은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학원(Academy for German Law) 창립 회의에서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7월, 그는 신설된 제국 임업청(Reich Forestry Office)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Reichsminister의 직급을 부여받았다.
제국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과 SS 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전역의 통합 경찰을 설립하기를 원했지만, 괴링은 1933년 4월 26일 루돌프 디엘스를 수장으로 하는 특별 프로이센 경찰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 비밀국가경찰)로 불렸다. 괴링은 디엘스가 게슈타포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SA의 권력에 대응하기에는 너무 무자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1934년 4월 20일 게슈타포의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당시 SA의 규모는 200만 명이 넘었다.
히틀러는 SA 사령관 에른스트 뢰름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게슈타포와 SS를 이용해 SA를 분쇄하기 위해 괴링과 공모했다. SA 대원들은 이 계획을 눈치채고 1934년 6월 29일 밤 수천 명이 거리로 나가 폭력 시위를 벌였다. 격분한 히틀러는 SA 지도부의 체포를 명령했다. 뢰름은 자살을 거부했을 때 감방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괴링은 수천 명에 달하는 수감자 명단을 직접 검토하여 추가로 처형해야 할 사람들을 결정했다.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소 85명이 사망했는데, 이 기간은 현재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으로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7월 13일 국회에서 이 살인 행위가 완전히 불법이었다고 시인했지만, 쿠데타 음모가 진행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행위를 합법화하는 소급 법률이 통과되었고, 비판은 체포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시행된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 중 하나는 독일이 공군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체결 이후 경찰 항공기가 허용되었고, 괴링은 1933년 5월 항공 교통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독일은 조약을 위반하여 항공기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1935년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괴링은 제국 항공 장관이 되었다.
1936년 9월 각료 회의에서 괴링과 히틀러는 독일 재군비 프로그램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8일 히틀러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괴링을 4개년 계획 총책임자(Plenipotentiary)로 임명했다. 괴링은 이 계획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노동부와 농업부를 그 휘하에 두었다. 그는 경제 장관 할마르 샤흐트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경제부를 우회했다. 적자가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재군비에 막대한 지출이 이루어졌다. 샤흐트는 1937년 11월 26일 사임했고, 괴링은 1938년 1월까지 임시로 경제부 장관직을 맡았다. 그 후 그는 발터 푼크를 그 자리에 임명했고, 푼크는 1939년 1월 샤흐트가 그 자리에서도 쫓겨났을 때 라이히스방크(Reichsbank)의 통제권도 넘겨받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두 기관 모두 4개년 계획의 명목 하에 괴링의 통제 아래에 있게 되었다. 1937년 7월, 민간 기업이 경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철강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유화된 라이히스베르케 헤르만 괴링(Reichswerke Hermann Göring)이 설립되었다(괴링이 이끌었다).


1938년 괴링은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Blomberg–Fritsch Affair)에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전쟁 장관인 원수(Generalfeldmarschall)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사령관인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이 사임했다. 괴링은 1938년 1월 12일 블롬베르크의 26세 타이피스트 마르가레테 그룬과의 결혼식에서 증인으로 참석했다. 경찰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젊은 신부는 매춘부였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알려야 할 의무를 느꼈지만, 이 사건을 블롬베르크를 제거할 기회로 여겼다. 블롬베르크는 사임을 강요받았다. 괴링은 프리치가 그 자리에 임명되어 자신의 상관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며칠 후, 하이드리히는 동성애 활동과 협박에 대한 주장이 포함된 프리치에 대한 파일을 공개했다. 그 주장은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되었지만, 프리치는 히틀러의 신뢰를 잃고 사임을 강요받았다. 히틀러는 이 해임을 군 지휘부를 개편할 기회로 이용했다. 괴링은 전쟁 장관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원수(Generalfeldmarschall) 계급을 받았다.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 사령관(Oberkommando der Wehrmacht)이 되어 3개 주요 부서를 이끌 최하위 직책을 만들었다.
4개년 계획 담당 장관으로서 괴링은 독일의 천연자원 부족에 우려를 표명하고 오스트리아의 라이히 편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슈타이어마르크 주에는 풍부한 철광석 매장량이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유용한 많은 숙련 노동자의 고향이었다. 히틀러는 항상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점령을 지지해왔다. 그는 1938년 2월 12일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를 만나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침략을 위협했다. 나치당은 권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합법화되었고,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가 3월에 예정되었다. 히틀러가 국민투표의 어구에 승인하지 않자, 괴링은 슈슈니크와 오스트리아 국가원수 빌헬름 미클라스에게 전화를 걸어 독일군의 침략과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의 사회적 불안을 위협하며 슈슈니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3월 11일 사임했고 국민투표는 취소되었다. 다음날 새벽 5시 30분, 국경에 집결해 있던 독일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오스트리아로 진군했다.
1938년 2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괴링은 계속 외교에 개입했다. 그해 7월 그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도를 논의하기 위해 공식 방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국 정부에 연락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회의에 찬성했고, 영국과 독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1938년 2월 괴링은 폴란드 침공에 대한 소문을 진압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그는 그해 여름 헝가리 정부와도 대화를 나누며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9월 누렘베르크 집회에서 괴링과 다른 연설자들은 체코인을 정복해야 하는 열등한 민족으로 비난했다. 체임벌린과 히틀러는 일련의 회담을 가진 끝에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는 뮌헨 협정(1938년 9월 29일)을 체결했다. 1939년 3월 괴링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차를 위협하며 프라하 폭격을 위협했다. 하차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독일 점령을 받아들이는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데 동의했다.
전쟁 전 괴링은 사교성, 색깔, 유머 감각 때문에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인기를 누렸지만, 당 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경제 문제에 가장 큰 책임을 지는 나치 지도자로서 그는 부패한 대기업과 구 독일 엘리트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웠다. 나치 언론은 괴링 편이었다. 헤스와 리벤트로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은 그의 인기에 질투심을 느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괴링을 다른 나치보다 더 받아들일 만하고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 히틀러 사이의 중재자로 여겼다.
1923년 9월 26일 구스타프 폰 카르가 바이에른주 총독이 되었다. 그는 나치당을 비롯한 바이에른의 각 우익 세력과 연계하여 바이에른 독립과 베를린 진군을 노렸으나, 중앙 정부의 압력으로 베를린 진군을 억제하게 되었고, 특히 베를린 진군을 강경하게 주장한 나치당과의 연계를 배제하게 되었다. 불만을 품은 히틀러는 뮌헨 폭동을 계획하여 카르 등의 신병을 확보하여 자신의 협력을 얻고 베를린 진군을 실행하려 했다.
1923년11월 8일 밤, 히틀러는 돌격대를 이끌고 카르가 연설을 하고 있던 「뷔르거브로이켈러」에 돌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위협하여 현장을 제압하고 카르 등의 신병을 확보했다. 히틀러가 카르의 협력을 얻기 위해 안쪽 대기실에서 설득하는 동안, 괴링은 청중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친구입니다. 맥주라도 마십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1월 9일 아침, 히틀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이끄는 괴링 이하 돌격대는 뮌헨 중심부 오데온 광장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선두에는 히틀러, 루덴도르프, 그리고 돌격대 사령관 괴링이 있었다. 그러나 오데온 광장의 펠트헤르할레까지 수 미터라는 곳에서 경찰대의 총격을 받았다. 이때 괴링은 허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돌격대원들은 그를 부축하여 그 자리를 떠나 근처 민가로 뛰어들었다. 그 집에는 일제 바르린이라는 유대인 가구상의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해질녘까지 괴링을 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직 간호사였기에 응급 처치를 해 주었다[39]. 괴링은 이때 일제의 헌신을 잊지 않았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유대인인 그녀를 보호하고 아르헨티나 망명을 도왔다. 유대인의 해외 망명은 일반적으로 재산 몰수를 수반하지만, 괴링의 보호를 받은 그녀는 재산을 빼앗기지 않았다[40].
그 후, 나치당 지지자인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소식을 들은 카린 부인이 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카린의 친구가 있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으로 이동한 후, 다시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로 해외 망명했다[39].
그런데 1928년 봄이 되자 히틀러의 심경에 변화가 생겨, 괴링을 다시 측근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괴링은 산수시 호텔(Hotel Sanssouci)에서 히틀러와 회견할 기회를 얻었다. 이 회담에서 히틀러는 괴링을 1928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의 후보로 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의 선거 제도는 비례 대표제였으며, 괴링은 당의 후보 명부 최상위에 올랐다. 이 선거전에서 나치당은 적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전술을 취했고, 괴링도 연합국(특히 대독 강경파인 프랑스),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자, 자본가 등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인플레이션, 실업, 기아의 공포를 부추기는 연설을 활발하게 했다. 괴링의 연설은 짧고 거친 부분이 있었지만, 능숙한 편이었다고 한다. 선거 자체는 좌익의 압승으로 끝났고, 나치당은 12석밖에 얻지 못했지만, 괴링은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괴링은 상류 계급 출신이라는 점, 제1차 세계대전의 에이스 파일럿이라는 점,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수상자라는 점, 유머러스한 화술, 세련된 매너, 아름답고 기품 있는 아내 카린 등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층 계급 출신자들이 많은 나치당 간부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상류 사회·재계 인사들과 접촉하여 인맥 구축에 힘썼다. 나치당 최대의 후원자였던 루르 지역의 철강왕 프리츠 티센도 괴링이 얻은 후원자였다. 프리츠 티센은 괴링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어느 날, 제 석탄 채굴 회사의 이사 중 한 명인 텐겔만의 아들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베를린에 괴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을 위해 일을 하려고 하지만, 독일의 산업계로부터는 조금도 지지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와 알고 지낼 생각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를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그는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확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 개조 비용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괴링은 매우 쾌적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정치에 관한 일에서는 그는 항상 신중하고 분별 있는 태도였습니다. 저는 또 그의 부인 카린도 알게 되었
2.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스웨덴의 산업가 비르게르 달레루스와 협상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괴링은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거나 늦추기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행동이 계속되면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박살내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약화시킨 전격작전을 실행한 것은 바로 괴링의 공군이었다. 괴링의 방종한 기질은 혹독한 전쟁을 견뎌내거나, 전투기보다는 폭격기 생산을 선호한 히틀러의 맹목적 편견에 반대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히틀러가 북유럽에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장함에 따라 나치스 공군의 방위능력은 약해졌고, 나치스 공군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지고 연합군의 독일 폭격을 막지 못하게 되자 괴링은 체면을 잃었다. 괴링은 건강을 구실로 은퇴했는데 이는 히틀러도 바라던 바였다. 괴링은 카린할에 보관한 사치품을 즐겼고, 점령국의 유대인들에게서 약탈한 예술품들로 소장품은 계속 늘어났으며 많은 선물들을 타인들로부터 받았다.괴링은 엄청나게 뚱뚱해졌으며 모르핀에서 추출한 약물인 파라코데인을 지나치게 써 자주 약물중독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약물중독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기분이 좋아졌다가 곧 우울해지기도 했으며 자기중심적이며, 허황하여 눈부시게 찬란한 의상과 군복, 훈장들과 자기과시욕을 만족시킬 보석들을 좋아했다. 히틀러는 괴링의 결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권과 깊게 밀착된 괴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39년에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으며, 1940년에는 '대(大)독일제국의 제국원수 '(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hes)라는 특별계급을 주었다. 다른 나치스 지도자들은 편파적인 괴링의 지위에 분개하거나 방종한 괴링의 성격을 경멸했지만, 히틀러는 전쟁 마지막 기간까지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 괴링은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포위되어 절망적이라 생각하고 1939년에 내려진 포고령에 따라 퓌러의 권력을 계승하려 했다가 히틀러에게 해임당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자살한 뒤 괴링은 자신이 전권대사로 대우 받기를 바라고 가족들과 함께 미군 장교에게 스스로 항복했다.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c707f913_2ec6ec8d.jpg|thumb|1942년 괴링과 핀란드 원수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소련군이 베를린에 접근하자, 히틀러의 베를린 방어 준비 노력은 점점 더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 되었다. 1945년 4월 20일, 베를린의 총통지하벙커de에서 맞이한 그의 마지막 생일은 괴링을 포함한 많은 나치 고위 간부들이 작별을 고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무렵 괴링의 사냥 별장 카린할은 이미 피난처로 사용되었고, 건물은 파괴되었으며, 그곳의 예술품들은 베르히테스가덴 등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괴링은 4월 22일 오베르잘츠베르크에 있는 그의 저택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날 히틀러는 장군들을 향한 긴 비난 연설에서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끝까지 베를린에 남아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괴링이 평화 협상을 위한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OKW 작전국장 알프레드 요들은 히틀러의 폭언에 참석했고, 몇 시간 후 회의에서 괴링의 참모총장인 칼 콜러(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콜러는 그 의미를 감지하고 즉시 베르히테스가덴으로 날아가 괴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소련 침공이 시작된 지 일주일 후, 히틀러는 사망 시 괴링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법령을 발표하여 전쟁 초기에 한 선언을 공식화했다. 이 법령은 또한 히틀러가 행동의 자유를 잃을 경우 괴링에게 히틀러의 대리인으로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괴링은 권력을 잡으려 한다면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직무 태만으로 고발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망설인 끝에 괴링은 자신을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한 1941년 법령 사본을 검토했다. 콜러와 한스 람머스(국무총리청 국무장관)와 상의한 후, 괴링은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베를린에 남은 히틀러가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모두 법령의 조건에 따라 괴링이 히틀러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또한 라이벌인 마르틴 보르만이 히틀러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을 반역자로 처형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괴링은 히틀러에게 자신이 히틀러의 대리인으로서 독일 지도자직을 인계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는 신중하게 작성된 전보를 보냈다. 그는 만약 히틀러가 그날 밤 22시(4월 23일)까지 답장을 하지 않으면, 히틀러가 행동의 자유를 잃었다고 간주하고 라익의 지도자직을 인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45년 4월 23일, 총통 지하벙커(총통지하壕)를 빠져나온 공군참모총장 카를 코러(カール・コラー) 대장이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알프레트 요들(アルフレート・ヨードル) 상장의 전갈을 가지고 오베르잘츠베르크(オーバーザルツベルク)의 별장을 방문한다. 괴링(ゲーリング)은 역시 오베르잘츠베르크로 피신해 있던 나치당 총통사무장 필립 보울러(フィリップ・ボウラー)와 함께 코러를 맞이했다.
코러가 괴링에게 전달한 요들의 전갈은 "총통이 자결할 의지를 굳히고, 연합군과의 협상에는 괴링이 적임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코러는 덧붙여 "지금 당신이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원수 각하."라고도 건의했다. 그러나 이 전갈에 대해 괴링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치당 관방장 마르틴 보르만(マルティン・ボルマン)의 책동을 의심하고 있었다.
괴링은 먼저 히틀러 자신으로부터 국가의 지휘권 이양 동의를 얻고 싶어 하며, 오베르잘츠베르크로 피신해 있던 총통관저 관방장 한스 하인리히 라머스(ハンス・ハインリヒ・ラマース)를 소집하여, 그에게 1941년 6월 29일 히틀러가 공포한 괴링을 총통의 후계자로 정한 법률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했다. 라머스는 그 효력을 부정하는 다른 명령이나 법률은 전혀 없으므로 당연히 유효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괴링은 망설였지만 결국 정오에 베를린 총통 지하벙커에 있는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치기로 했다.[151]
또한 외무대신 리벤트로프(リッベントロップ)에게도 "폰 리벤트롭(フォン・リッベントロップ) 장관 각하. 저는 총통에게 4월 23일 오후 10시까지 저에게 지시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약 그 시간까지 총통이 행동의 자유를 잃고, 국사 행위의 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 총통의 1941년 6월 29일 공포의 포고에 기초하여, 저는 총통 대리로서 모든 정부 기관을 통괄할 생각입니다. 1945년 4월 23일 밤 12시까지 만약 귀관에게 총통으로부터 직접, 또는 저로부터 연락이 없다면, 귀관은 즉시 항공편으로 제게로 오십시오. 괴링 국가원수(ゲーリング国家元帥)"라는 전보를 보냈다.[152]
그 후 괴링은 코러와 보울러와 함께 미국(アメリカ合衆国) 대통령 해리 트루먼(ハリー・トルーマン),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ドワイト・アイゼンハワー) 미 원수, 영국(イギリス) 수상 윈스턴 처칠(ウィンストン・チャーチル)에게 보낼 친서 초고 작성에 힘썼다. 코러에 따르면 이때의 괴링은 오랜만에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코러는 "마치 그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153]

한편, 총통 지하벙커에서 괴링의 전보를 받은 보르만은 “괴링이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전보를 히틀러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기력한 궁지에 빠져 있었고, 전보를 봐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괴링이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전보가 총통 지하벙커로 보내져 왔다. 보르만은 이것을 총통에게 전달하며 다시 “괴링이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정부 각료에게 이 전보를 보내고, 당신의 포고를 빌미로 오늘밤 12시에 당신의 후계자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히틀러는 여기서 처음으로 분노를 폭발시켜 “나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괴링은 게으름뱅이다. 녀석은 공군의 붕괴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녀석은 부패했다. 녀석이 앞장서서 우리나라를 부패시켰다. 게다가 녀석은 오래전부터 마약 중독자다. 오래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라고 고함쳤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히틀러는 타버린 듯 무기력 상태로 돌아가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 괴링이라면 냉정한 항복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 졌다면, 누가 그것을 하든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히틀러는 보르만이 기초한 총통 명의의 전보를 되돌려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히틀러가 허락한 전보에는 자신의 행동의 자유에 문제가 없다는 것, 1941년 6월 29일의 포고는 취소하므로 괴링은 총통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괴링이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모든 관직을 사임한다면 그 이상의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보르만은 독단으로 오버잘츠베르크 지역의 친위대 부대 지휘관 베른하르트 프랑크 SS 중좌에게 괴링 체포를 명령하는 전보도 보냈다 (국가원수 체포라는 대담한 명령에 프랑크가 주저할 가능성을 고려한 보르만은 “만약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귀관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총통 지하벙커에서 전보를 받은 괴링은 즉시 모든 계획을 중단하고, 리벤트로프에게 “총통은 아직 행동의 자유를 유보하는 뜻을 나에게 연락했고, 오늘 정오의 전보는 이것을 취소한다. 하일 히틀러. 헤르만 괴링”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4월 23일 오후 9시경, 프랑크 등 친위대 부대에 의해 괴링들은 별장째 포위되었다. 괴링의 가족, 직원, 부하들은 일괄적으로 감금되었고,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고 하면 사살하겠다는 뜻을 통고받았다. 불안해하는 아내 에미를 괴링은 “내일이면 모든 오해는 풀릴 거야. 푹 자도록 하세요.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체포를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23년 동안 좋은 시절도 고난의 시절도 함께 걸어온 나를 말이야? 기운을 내세요. 그런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라고 격려했다.
4월 25일에는 영국 공군이 오버잘츠베르크를 공습하여 괴링의 별장과 베르크호프를 포함한 시설이 소실되었다. 친위대와 괴링들은 산비탈의 방공호에 숨었다. 방공호 안에서도 괴링과 그의 가족은 친위대원에 의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고, 대화가 금지되었다. 방공호를 나온 후, 파괴된 자신의 별장을 본 괴링은 프랑크에게 “만약 내가 총통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어겼다고 여겨진다면 나를 사살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내, 딸, 측근들은 마지막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히틀러에게 전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한편 에미는 프랑크에게 “총통께서는 저의 결혼식 날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총통께서 남편을 사살하라고 하신다면 저와 에다도 동시에 사살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프랑크는 그들의 호소에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말씀을 총통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프랑크는 보르만으로부터 “베를린의 상황은 더욱 긴박해지고 있다. 베를린이 함락되고 총통이 사망하신 경우에는 4월 23일의 반역자는 사살하라. 이 임무는 완전히 수행해야 한다. 귀관의 생명과 명예는 그 일에 달려 있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히틀러도 보르만도 죽었다면 명령을 이행할 의미가 없을 뿐더러, 어쩌면 괴링이 연합국과의 협상에 큰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명령을 이행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프랑크는 괴링을 처형하지 않고 감금을 계속하기로 했다.
괴링은 프랑크에게 “베르히테스가르텐에서 사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자신 소유의 마우테른돌프 성으로 이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프랑크는 이를 승낙했다. 괴링과 가족, 하인들, 친위대 부대가 탄 자동차 행렬이 마우테른돌프로 향했다. 그런데 그 도중에 라디오 함부르크 방송이 “헤르만 괴링 국가원수는 심장병 발작으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국가원수는 독일 공군 총사령관직 사임을 총통에게 청원했다. 총통은 이를 승인하고, 리터 폰 그라임(Robert Ritter von Greim) 상급대장을 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원수로 승진시켰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4월 30일에 히틀러는 자살했다. 히틀러는 유서에서 “괴링과 히믈러는 나 개인에 대한 배신은 별론으로 하고,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나의 승인을 얻지도 않고 적과 비밀 협상을 벌였으며, 또 불법적으로 국가 권력을 탈취하려고 해서 국가와 전 국민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다” “독일 공군의 실패는 완전히 국가원수의 책임이다”라고 괴링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후계자는 괴링이 아니라 해군 총사령관 카를 되니츠(Karl Dönitz) 원수로 정했다. 5월 1일에 마우테른돌프 성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히틀러의 죽음을 알게 된 괴링은 에미에게 “히틀러는 죽었어. 이제 나는 끝까지 충실했다고 그에게 전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친위대에 의한 감금은 계속되었지만, 곧 친위대원들은 보르만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우연히 지나가던 독일 공군 부대에 괴링을 인계하여 그를 석방했다.
5월 6일에 괴링은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되니츠 대통령에게 “귀관은 마르틴 보르만 관방장이 나를 제거하려 했던 독일의 안보에 극히 위험한 음모를 알고 있는가? 나에게 취해진 조치는 총통에게 전적으로 충실한 내가, 그에게 후계자에 관한 명령의 이행을 원하는지 질문한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그 조치는 보르만이 서명한 전보에 의한 것이다. 여러 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로부터도 사정 청취를 받지 못했고, 나의 입장을 설명해도 무시당했다. SS 장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이러한 음모의 전모를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귀관이 요들(Alfred Jodl)을 아이젠하워에게 파견할 작정이라고 들었다. 요들의 공식 협상 외에, 내가 "원수 대 원수"로 아이젠하워와 회담하여 독일에게 명예로운 평화를 얻는 협상을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이익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쟁 전 총통으로부터 많은 중요한 국제 협상을 위임받아, 그 협상을 모두 성공시킨 나의 경험을 살리면, 요들의 공식 협상에서도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더욱이 근년 영미의 정치가들이 신문 라디오를 통해 보여준 나에 대한 태도는 독일의 다른 정치 지도자의 그것보다 호의적인 것이 증명되고 있다. 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어서, 나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독일의 미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원수 괴링”이라는 전보를 쳤다. 하지만 되니츠로부터의 답신은 없었고 무시되었다.
괴링은 되니츠의 허락 없이도 아이젠하워와 "원수 대 원수" 회담을 할 작정이었다. 5월 7일, 괴링은 첼 암 제 근처의 피쉬호른 성으로 이동하여 부관 베른트 폰 브라우히치 대령을 미군 사절로 삼았다. 아이젠하워에게 "원수 대 원수" 회담을 신청하는 편지와 현지 미군 사령관에게 "게슈타포와 SS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부관에게 맡겼다. 그러나 브라우히치 대령이 미군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고, 미군은 피쉬호른 성에 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괴링은 직접 차를 몰고 미군을 찾으러 나섰다. 마침내 미군이 피쉬호른 성에 도착했지만, 서로 어긋났다. 미군들은 라트슈타트 근처 산길에서 피난민과 혼란스러운 차량 정체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던 괴링의 차를 발견하고 그를 체포했다.
초기 미군의 괴링에 대한 처우는 완벽한 VIP 대우였으며, 그에게 "원수 대 원수" 회담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한 대우는 전혀 없었다. 괴링은 일단 피쉬호른 성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받고, 성에서 미군 준장 로버트 스택 (군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괴링은 다음 날 키츠뷔엘의 알렉산더 패치 대장 예하 미군 제7사령부로 이송되어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 카를 슈파르츠 대장의 환영을 받았다. 슈파르츠는 "하늘에서 싸웠던 인연"이라며 샴페인을 괴링에게 건넸다. 괴링의 기자 회견도 열렸다. 밤에는 장교 식당에서 괴링 환영회가 열렸다. 미군 장교들이 경쟁하듯 괴링에게 술을 따라주었기 때문에 괴링도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장교가 '텍사스의 깊은 시골'을 피아노로 연주하기 시작하자 괴링도 피아노를 둘러싼 합창의 대열에 합류했다. 또한 괴링은 "내 짐 속에 아코디언이 있는데"라고 말하며 아코디언을 가져오게 하자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를 연주했다. 즐거운 환영회는 오전 2시까지 이어졌고, 만취한 괴링은 기분 좋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한편 괴링의 VIP 대우를 들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일반 포로의 취급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이후 괴링은 가혹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다음 날, 아우크스부르크의 미군 제7군 심문 센터로 이송된 괴링은 대철십자장과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비롯한 여러 훈장, 원수 지팡이,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모두 압수당했다(훈장을 좋아했던 괴링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군이 이러한 고급품이 미군 감시병의 매수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욕실과 화장실도 없고 거실과 침실, 부엌만 있는 노동자 주택에 괴링을 밀어 넣었다.
아이젠하워의 냉담한 태도를 알고 "원수 대 원수" 회담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괴링은 완전히 낙담했다. 괴링의 부관 브라우히치 대령도 괴링과 자신에 대한 대우가 갑자기 악화된 것에 당황하여 "국가 원수 각하에게 걸맞는 주거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미군에 의해 그 호소가 거부되자, 울면서 "독일군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격분했다. 한편 괴링 본인은 낙담하여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괴링에 대한 예비 심문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미군 장교의 보고서는 괴링의 높은 지능과 기지, 교활함을 강조하고 있다.

5월 21일, 룩셈부르크 바트 몬도르프의 팔래스 호텔 한 방에 감금되어 4개월 정도 그곳에서 지냈다. 이곳은 미군의 최중요 포로 수용소(아슈칸 수용소)였고, 곧 카를 되니츠, 요아힘 폰 리벤트롭,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알베르트 케셀링크, 프란츠 폰 파펜, 히알마르 샤흐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히ャー 등이 속속 수용되었다.

수용소 소장인 미군 대령 버튼 안드라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괴링이 몬도르프에 왔을 때, 약을 가득 채운 두 개의 트렁크를 가지고 바보
2. 3. 1. 전쟁 전 활동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국총리로 임명되면서 괴링은 무임소 장관, 항공 총감(Reichskommissar),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67] 프로이센 주총리로는 1933년 4월 11일에 임명되었다.[67] 히틀러는 1933년 4월 25일에 프로이센의 제국 총독(Reichsstatthalter) 권한을 괴링에게 위임했다.[67] 괴링은 1933년 5월 18일에 프로이센 지방 의회(Landtag of Prussia)를 통해 모든 입법권을 내각에 부여하는 권한 부여 법(enabling act)을 통과시켰다.[67]이 권한을 이용하여 괴링은 1933년 7월 8일에 프로이센 주의회(Prussian State Council)를 폐지했다.[67] 대신 그는 자문 기구 역할을 하는 개정된 비입법적 프로이센 주의회(Prussian State Council (Nazi Germany))를 설립했다.[67] 괴링은 의장을 역임했으며, 프로이센 내각 장관과 국무장관, 괴링이 직접 선발한 나치당 간부 및 기타 산업 및 사회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67] 1933년 10월, 괴링은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학원(Academy for German Law) 창립 회의에서 회원으로 임명되었다.[67] 1934년 7월, 그는 신설된 제국 임업청(Reich Forestry Office)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Reichsminister의 직급을 부여받았다.[67]
제국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와 SS 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전역의 통합 경찰을 설립하기를 원했지만, 괴링은 1933년 4월 26일 루돌프 디엘스를 수장으로 하는 특별 프로이센 경찰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 비밀국가경찰)로 불렸다. 괴링은 1934년 4월 20일 게슈타포의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67] 당시 SA의 규모는 200만 명이 넘었다.[67]
히틀러는 SA 사령관 에른스트 뢰름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게슈타포와 SS를 이용해 SA를 분쇄하기 위해 괴링과 공모했다.[67] SA 대원들은 1934년 6월 29일 밤 수천 명이 거리로 나가 폭력 시위를 벌였다. 격분한 히틀러는 SA 지도부의 체포를 명령했다. 뢰름은 자살을 거부했을 때 감방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괴링은 수천 명에 달하는 수감자 명단을 직접 검토하여 추가로 처형해야 할 사람들을 결정했다.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최소 85명이 사망했는데, 이 기간은 현재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으로 알려져 있다.[67] 히틀러는 7월 13일 국회에서 이 살인 행위가 완전히 불법이었다고 시인했지만, 쿠데타 음모가 진행 중이었다고 주장했다.[67]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시행된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 중 하나는 독일이 공군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체결 이후 경찰 항공기가 허용되었고, 괴링은 1933년 5월 항공 교통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독일은 조약을 위반하여 항공기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1935년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67] 괴링은 제국 항공 장관이 되었다.[67]
1936년 9월 각료 회의에서 괴링과 히틀러는 독일 재군비 프로그램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8일 히틀러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괴링을 4개년 계획 총책임자(Plenipotentiary)로 임명했다. 괴링은 이 계획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노동부와 농업부를 그 휘하에 두었다. 그는 경제 장관 할마르 샤흐트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경제부를 우회했다. 적자가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재군비에 막대한 지출이 이루어졌다.[67] 샤흐트는 1937년 11월 26일 사임했고, 괴링은 1938년 1월까지 임시로 경제부 장관직을 맡았다.[67] 그 후 그는 발터 푼크를 그 자리에 임명했고, 푼크는 1939년 1월 샤흐트가 그 자리에서도 쫓겨났을 때 라이히스방크(Reichsbank)의 통제권도 넘겨받았다.[67] 1937년 7월, 민간 기업이 경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철강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국유화된 라이히스베르케 헤르만 괴링(Reichswerke Hermann Göring)이 설립되었다(괴링이 이끌었다).[67]
1938년 괴링은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Blomberg–Fritsch Affair)에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전쟁 장관인 원수(Generalfeldmarschall)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사령관인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이 사임했다. 괴링은 1938년 1월 12일 블롬베르크의 결혼식에서 증인으로 참석했다. 경찰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젊은 신부는 매춘부였다.[67] 괴링은 히틀러에게 알려야 할 의무를 느꼈지만, 이 사건을 블롬베르크를 제거할 기회로 여겼다. 블롬베르크는 사임을 강요받았다. 괴링은 프리치가 그 자리에 임명되어 자신의 상관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며칠 후, 하이드리히는 동성애 활동과 협박에 대한 주장이 포함된 프리치에 대한 파일을 공개했다. 그 주장은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되었지만, 프리치는 히틀러의 신뢰를 잃고 사임을 강요받았다.[67] 히틀러는 이 해임을 군 지휘부를 개편할 기회로 이용했다. 괴링은 전쟁 장관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원수(Generalfeldmarschall) 계급을 받았다.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 사령관(Oberkommando der Wehrmacht)이 되어 3개 주요 부서를 이끌 최하위 직책을 만들었다.[67]
4개년 계획 담당 장관으로서 괴링은 독일의 천연자원 부족에 우려를 표명하고 오스트리아의 라이히 편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슈타이어마르크 주에는 풍부한 철광석 매장량이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유용한 많은 숙련 노동자의 고향이었다. 히틀러는 항상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점령을 지지해왔다. 그는 1938년 2월 12일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를 만나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침략을 위협했다. 나치당은 권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합법화되었고,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가 3월에 예정되었다. 히틀러가 국민투표의 어구에 승인하지 않자, 괴링은 슈슈니크와 오스트리아 국가원수 빌헬름 미클라스에게 전화를 걸어 독일군의 침략과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의 사회적 불안을 위협하며 슈슈니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3월 11일 사임했고 국민투표는 취소되었다. 다음날 새벽 5시 30분, 국경에 집결해 있던 독일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오스트리아로 진군했다.[67]
1938년 2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괴링은 계속 외교에 개입했다.[67] 그해 7월 그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도를 논의하기 위해 공식 방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국 정부에 연락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회의에 찬성했고, 영국과 독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1938년 2월 괴링은 폴란드 침공에 대한 소문을 진압하기 위해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그는 그해 여름 헝가리 정부와도 대화를 나누며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9월 누렘베르크 집회에서 괴링과 다른 연설자들은 체코인을 정복해야 하는 열등한 민족으로 비난했다.[67] 체임벌린과 히틀러는 일련의 회담을 가진 끝에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는 뮌헨 협정(1938년 9월 29일)을 체결했다.[67] 1939년 3월 괴링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차를 위협하며 프라하 폭격을 위협했다. 하차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독일 점령을 받아들이는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데 동의했다.[67]
전쟁 전 괴링은 사교성, 색깔, 유머 감각 때문에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인기를 누렸지만,[67] 당 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67] 경제 문제에 가장 큰 책임을 지는 나치 지도자로서 그는 부패한 대기업과 구 독일 엘리트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웠다. 나치 언론은 괴링 편이었다. 헤스와 리벤트로프와 같은 다른 지도자들은 그의 인기에 질투심을 느꼈다.[67] 영국과 미국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괴링을 다른 나치보다 더 받아들일 만하고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 히틀러 사이의 중재자로 여겼다.[67]
1939년 스웨덴의 산업가 비르게르 달레루스와 협상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괴링은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거나 늦추기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67]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행동이 계속되면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박살내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약화시킨 전격작전을 실행한 것은 바로 괴링의 공군이었다.[67]
1939년에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으며, 1940년에는 '대(大)독일제국
의 제국원수 '(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
hes)라는 특별계급을 주었다.[67]
2. 3. 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1939년 스웨덴의 산업가 비르게르 달레루스와 협상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괴링은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거나 늦추기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행동이 계속되면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박살내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약화시킨 전격작전을 실행한 것은 바로 괴링의 공군이었다.[114] 괴링의 방종한 기질은 혹독한 전쟁을 견뎌내거나, 전투기보다는 폭격기 생산을 선호한 히틀러의 맹목적 편견에 반대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히틀러가 북유럽에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장함에 따라 나치스 공군의 방위능력은 약해졌고, 나치스 공군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지고 연합군의 독일 폭격을 막지 못하게 되자 괴링은 체면을 잃었다. 괴링은 건강을 구실로 은퇴했는데 이는 히틀러도 바라던 바였다. 괴링은 카린할에 보관한 사치품을 즐겼고, 점령국의 유대인들에게서 약탈한 예술품들로 소장품은 계속 늘어났으며 많은 선물들을 타인들로부터 받았다.
괴링은 엄청나게 뚱뚱해졌으며 모르핀에서 추출한 약물인 파라코데인을 지나치게 써 자주 약물중독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약물중독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기분이 좋아졌다가 곧 우울해지기도 했으며 자기중심적이며, 허황하여 눈부시게 찬란한 의상과 군복, 훈장들과 자기과시욕을 만족시킬 보석들을 좋아했다. 히틀러는 괴링의 결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권과 깊게 밀착된 괴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39년에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으며,[116] 1940년에는 '대(大)독일제국의 제국원수 '(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hes)라는 특별계급을 주었다.[126] 다른 나치스 지도자들은 편파적인 괴링의 지위에 분개하거나 방종한 괴링의 성격을 경멸했지만, 히틀러는 전쟁 마지막 기간까지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 괴링은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포위되어 절망적이라 생각하고 1939년에 내려진 포고령에 따라 퓌러의 권력을 계승하려 했다가 히틀러에게 해임당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자살한 뒤 괴링은 자신이 전권대사로 대우 받기를 바라고 가족들과 함께 미군 장교에게 스스로 항복했다.
괴링과 다른 고위 장교들은 독일이 아직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우려했지만, 히틀러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9년 8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히틀러는 괴링을 전시 내각으로 운영될 새로운 6인의 국가방위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폴란드 침공은 1939년 9월 1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같은 날,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괴링을 독일 전체의 지도자(퓌러)로서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고, 헤스를 차석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후 독일은 잇따라 대승을 거두었다. 루프트바페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공군은 1주일 만에 패배했다. }} 낙하산부대는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전투 첫날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비행장을 점령(베저 연습 작전)하고 벨기에의 에벤-에마엘 요새를 점령했다. 괴링의 루프트바페는 1940년 5월 네덜란드 전투, 벨기에 전투 및 프랑스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함락 후 히틀러는 성공적인 지휘에 대해 괴링에게 철십자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했다. 1940년 원수 임명식에서 히틀러는 괴링을 라이히스마르샬 데스 그로스도이체 라이히스de(Reichsmarschall des Großdeutschen Reiches, )로 임명했는데, 이는 특별히 만들어진 계급으로 그를 군대의 모든 원수보다 상급으로 만들었다. 이 승진으로 인해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서 최고위급 군인이었다. 괴링은 이미 1939년 9월 30일에 루프트바페 사령관으로서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을 받았다.









영국은 폴란드 침공 3일째인 1939년 9월 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1940년 7월 히틀러는 영국 침공 준비를 시작했다. 계획의 일환으로 영국 공군(RAF)을 무력화해야 했다. 영국 공군 기지와 도시, 산업 중심지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괴링은 이미 라디오 연설에서 "적기 한 대라도 독일 영토 상공을 비행한다면 내 이름은 마이어다!"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RAF가 1940년 5월 11일에 독일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을 때 그를 괴롭히는 말이 되었다. 그는 루프트바페가 며칠 안에 RAF를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괴링은 에리히 레더 제독, 해군 최고사령부(Kriegsmarine) 사령관과 마찬가지로 계획된 침공(암호명 바다사자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괴링은 공중에서의 승리가 침공 없이 평화를 강요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했고, 바다사자 작전은 1940년 9월 17일에 무기한 연기되었다. 영국 전투에서 패배한 후 루프트바페는 전략폭격을 통해 영국을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히틀러는 겨울이 시작됨에 따라 바다사자 작전을 취소했다. 연말까지 영국의 사기가 블리츠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있음이 분명해졌지만, 폭격은 194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1939년에 체결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했다. 초기에 루프트바페는 우세를 점하여 전투 첫 달에 수천 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했다. 히틀러와 그의 최고 참모들은 크리스마스까지 작전이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고, 병력이나 장비의 예비군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7월까지 독일은 운용 가능한 항공기가 1,000대 미만으로 줄었고, 병력 손실은 21만 3천 명이 넘었다. 광대한 전선의 한 부분에만 공격을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모스크바 점령에 노력을 기울였다. 길고 성공적인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히틀러는 중앙집단군에게 모스크바 진격을 중단하고 일시적으로 기갑부대를 북쪽과 남쪽으로 돌려 레닌그라드와 키예프 포위 작전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일시적인 정지는 적군에게 새로운 예비군을 동원할 기회를 제공했고, 역사가 러셀 스톨피는 이를 1941년 10월 모스크바 공방전로 재개된 모스크바 공세 실패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간주한다. 악천후, 연료 부족, 동유럽의 항공기 기지 건설 지연, 과도하게 늘어난 보급선도 요인이었다. 히틀러는 1942년 1월 중순까지 부분적인 후퇴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 손실은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과 비슷했다.
1941년 10월 말 또는 11월 초, 히틀러와 괴링은 강제 노동을 위해 소련 포로와 더 많은 수의 소련 민간인을 독일로 대량 강제 이송하기로 결정했지만, 곧 유행병으로 인해 포로 수송이 중단되었다. 독일로 이송된 사람들은 점령된 소련보다 나은 조건에 처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적어도 130만 명의 소련 포로가 독일 또는 합병 지역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이 중 40만 명이 사망했고, 이러한 사망자 대부분은 1941/1942년 겨울에 발생했다.
진주만 공격 후, 괴링은 원수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과 제독 에리히 레더(Erich Raeder)과 함께 히틀러에게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촉구했다.
[[File:Marski_Goringin_vieraana_1942.jpg|thumb|1942년 괴링과 핀란드 원수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히틀러는 1942년 여름 작전을 남쪽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코카서스의 유전을 점령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의 주요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 23일 루프트바페의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독일 제6군이 도시에 진입했지만, 전선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증원이나 보급 없이 포위할 수 있었다. 11월 말 우라누스 작전에서 제6군이 포위되자 괴링은 루프트바페가 매일 최소 300톤의 보급품을 포위된 병사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후퇴를 금지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고 요구했다. 일부 공수 작전이 성공했지만, 실제 공급량은 하루 120톤을 넘지 못했다. 28만 5천 명의 병력 중 9만 1천 명에 달하는 제6군의 잔여 병력은 1943년 2월 초에 항복했고, 이 포로 중 5천 명만이 소련 포로 수용소를 벗어나 다시 독일을 보게 되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 부대의 전력은 증강되었다. 영국을 기지로 하여, 이들은 독일 목표물에 대한 작전을 시작했다. 최초의 1,000대 폭격기 공습은 1942년 5월 30일 쾰른에서 이루어졌다. 보조 연료 탱크가 미국의 전투기(fighter aircraft)에 장착된 후, 영국에서 더 먼 목표물에 대한 공습이 계속되었다. 괴링은 1942년-1943년 겨울에 미국 전투기가 아헨(Aachen)까지 동쪽으로 격추되었다는 보고를 믿지 않았다. 그의 명성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롭 탱크(drop tank)를 사용할 경우 가 넘는 전투 반경(combat radius)을 가진 미국의 P-51 머스탱(P-51 Mustang)이 1944년 초부터 대편대를 이루어 폭격기를 목표 지역까지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루프트바페는 충분히 보충할 수 없는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연합군 폭격기는 1944년 말까지 정유소와 철도 통신을 표적으로 삼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저해했다. 독일 민간인들은 고국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괴링을 비난했다. 히틀러는 그를 회의에서 배제하기 시작했지만, 루프트바페 사령관이자 4개년 계획의 전권 대표직에는 그를 유임시켰다. 그는 히틀러의 신뢰를 잃으면서 여러 저택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D-Day(1944년 6월 6일)에 루프트바페는 상륙 지역에 약 300대의 전투기와 소수의 폭격기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연합군은 총 1만 1,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과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폴란드 전에는 독일 공군에서 He 111과 Do 17 등의 중거리 폭격기로 구성된 20개의 폭격 비행대, Ju 87(슈투카)로 구성된 5개의 급강하 폭격 비행대, Bf 109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10~12개의 전투기 비행대, 총 1929대가 동원되었다. 이는 독일 공군의 총 보유 항공기 수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전투 항공기는 3분의 2).[114]
슈투카의 정확한 급강하 폭격이 폴란드의 항공 기지, 통신 시설, 공장을 잇달아 파괴했다. 개전 직후 며칠 동안 폴란드 공군도 PZL P.11 등으로 독일 폭격기에 과감한 요격을 가했지만, 독일 육군 부대의 진격으로 폴란드는 후방 기지를 상실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통신 시설과 연료 시설도 상실하여 9월 8일까지는 폴란드 공군의 활동이 거의 중단되었다. 폴란드군 지상 부대도 슈투카와 He 111의 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115]
히틀러는 바르샤바 공방전이 장기화되는 것을 꺼리고, 괴링을 통해 케셀링크에게 바르샤바 공습을 명령했다. 9월 25일 독일 폭격기 400대에 의한 바르샤바 공습 (1939)이 감행되었다. 비행장과 철도역을 목표로 했지만, 시가지 공습에서는 일반 시민들도 다수 희생되었다(하지만 케셀링크는 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바르샤바 시민 피해자의 대부분은 독일 공군의 공습이 아니라 폴란드군의 고사포탄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9월 27일 바르샤바는 함락되었고, 폴란드는 항복했다。
독일 공군은 이 전투에서 285대의 항공기와 734명의 인원을 잃었는데, 예상보다 손실이 많았지만, 이 전투는 정확한 급강하 폭격으로 적의 통신망과 교통망을 파괴할 수 있다면 적 지상 부대를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다는 실례가 되었다. 즉, 전격전의 기반이 된 것이다.[115]
폴란드 점령 후, 괴링은 독일 공군이 폭격한 바르샤바와 리비우를 시찰했다. 또한 폴란드인을 동원하여 독일 국내 공장에서 일하게 하는 명령서와 유대인 소유의 미술품을 압수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괴링이 후에 뉘른베르크에서 변명한 바에 따르면 "연합군이 이치에 눈을 뜨고 평화에 동의할 때까지의 임시 조치"라는).[116]
괴링은 개전 후에도 영국과의 조기 강화를 희망하고, 그 허가를 얻기 위해 9월 26일에도 다렐스를 데리고 히틀러와 회담했다. 히틀러는 구상 복귀(폴란드에서의 완전 철수)를 전제로 한 평화 협상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영토 중 독일인 거주 지역을 독일에 병합하고, 그 외의 폴란드 영토는 재편성하여 유대인의 피난처로 하는 평화 협상은 허가했다. 다렐스는 즉시 그 취지를 스웨덴 주재 영국 대사를 통해 영국 정부에 전달했다. 챔벌린 수상은 괴링과의 협상에 적극적이었지만, 전쟁을 갈망하는 처칠 일파가 완전한 구상 복귀를 주장하여 챔벌린의 평화 의지를 방해했다. 그 결과, 영국과의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괴링도 영국의 완고한 태도에 실망하고, "오만한 영국에게 이치를 깨우치게 하려면 뼈아픈 교훈을 주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117]
그래서 괴링은 히틀러에게 독일 공군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영국에 대한 항공전을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영국의 대공 방어력은 7개월 후와 비교하면 허약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공격을 가했다면 영국에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전격전에 집착하여, 공군의 공격은 지상군의 프랑스 침공과 연동하여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118]

1940년 3월, 괴링은 히틀러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 해군 사령관 레더 원수가 노르웨이에 해군 전선 기지를 몇 개 건설해 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히틀러에게 진언했고, 히틀러가 그것에 찬성했기 때문이다다. 또한 히틀러는 독일과 노르웨이 사이에 있는 덴마크, 철광석이 산출되는 스웨덴에 대한 침공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괴링에게는 전처 카린과 의붓아들 토마스의 고향이었고, 개인적으로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개전 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에게 “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든 독일은 스웨덴의 중립을 존중한다”는 개인적인 보증을 주었다. 그 때문에 괴링은 큰 충격을 받고, 그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히틀러에게 정면으로 직접 항의하여 스웨덴 침공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는 이미 스웨덴 정부가 철광석을 독일에 계속 수출하기로 약속했고, 침공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또한 독일군이 스웨덴을 경유하여 노르웨이로 진군하는 것과 스웨덴 정부 내 친영파를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스웨덴에 협력하여 반드시 실현시키겠으니 스웨덴 침공만큼은 그만두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만두어 주지 않는다면 사직하겠다고까지 말했다. 이때 괴링의 고뇌하는 모습에 히틀러도 동정했고, 최종적으로 히틀러는 스웨덴을 침공 대상에서 제외했다.[119]
1940년 4월 9일부터 노르웨이와 덴마크에 대한 동시 침공이 시작되었다(스칸디나비아 반도 전투)다. 독일 공군에서는 한스-페르디난트 가이스러가 이끄는 제10항공군단(수평폭격기 290기, 급강하폭격기 40기, 전투기 100기, 수송기 500기)과 제1강하사냥병연대 제1대대가 동원되었다.[120] 노르웨이 침공은 해군이 주체인 수륙양용 작전이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의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처음에는 주로 오슬로 지역에 대한 공수 작전과 공수를 주로 담당했다[120]. 그러나 노르웨이군의 전면 저항이 시작되자, He111, 슈투카, 새로 투입된 쌍발 폭격기 Ju88 등을 사용하여 노르웨이의 군사 기지와 노르웨이 해상의 영국 해군 함정에 대한 폭격이 감행되었다.[120] 영국군은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 1개 중대를 항공모함글로리어스로 보냈지만, 얼어붙은 레스예스코프 호를 비행장으로 사용하고 있던 중, 독일 공군 폭격기에 습격당하여 일찍이 전멸했다. 이로써 트론헤임 공략을 목표로 침공하고 있던 영국 육군은, 항공 지원 없이 싸우게 되어 참패를 당했다다.
북부 노르웨이에서는 영국군이 항공 기지를 확보했기 때문에, 끝까지 영국군의 저항이 치열했지만, 5월 10일부터 독일군이 서부 전격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싸움의 초점은 서유럽으로 옮겨갔고, 연합군은 노르웨이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연합군은 노르웨이 포기를 결정했고, 북유럽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로 끝났다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북유럽 전투의 패배로 평화를 원하는 체임벌린이 실각하고, 전쟁파 처칠이 수상에 취임했다. 평화는 더욱 어려워졌다.
1940년 5월 10일부터 서부 전격전이 시작되었다.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대규모 공세를 펼쳐 연합군의 주의를 끌면서, 방비가 허술한 내륙 아르덴을 통과하여 프랑스 영토로 급속히 진격하는 작전이었다. 독일 공군에서는 수평폭격기 1120기(전 보유기체의 65%), 급강하폭격기 342기(동 82%), 단발・쌍발 전투기 1264기(동 80%), 수송기 430기
2. 3. 3. 몰락
1939년 스웨덴의 산업가 비르게르 달레루스와 협상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괴링은 진정으로 전쟁을 피하거나 늦추기를 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군사행동이 계속되면서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박살내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약화시킨 전격작전을 실행한 것은 바로 괴링의 공군이었다. 괴링의 방종한 기질은 혹독한 전쟁을 견뎌내거나, 전투기보다는 폭격기 생산을 선호한 히틀러의 맹목적 편견에 반대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히틀러가 북유럽에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장함에 따라 나치스 공군의 방위능력은 약해졌고, 나치스 공군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지고 연합군의 독일 폭격을 막지 못하게 되자 괴링은 체면을 잃었다. 괴링은 건강을 구실로 은퇴했는데 이는 히틀러도 바라던 바였다. 괴링은 카린할에 보관한 사치품을 즐겼고, 점령국의 유대인들에게서 약탈한 예술품들로 소장품은 계속 늘어났으며 많은 선물들을 타인들로부터 받았다.괴링은 엄청나게 뚱뚱해졌으며 모르핀에서 추출한 약물인 파라코데인을 지나치게 써 자주 약물중독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약물중독 때문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기분이 좋아졌다가 곧 우울해지기도 했으며 자기중심적이며, 허황하여 눈부시게 찬란한 의상과 군복, 훈장들과 자기과시욕을 만족시킬 보석들을 좋아했다. 히틀러는 괴링의 결점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권과 깊게 밀착된 괴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39년에 히틀러는 괴링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으며, 1940년에는 '대(大)독일제국
의 제국원수 '(Reichsmarschall des Grossdeutschen Reic
hes)라는 특별계급을 주었다. 다른 나치스 지도자들은 편파적인 괴링의 지위에 분개하거나 방종한 괴링의 성격을 경멸했지만, 히틀러는 전쟁 마지막 기간까지 그를 해임하지 않았다. 괴링은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포위되어 절망적이라 생각하고 1939년에 내려진 포고령에 따라 퓌러의 권력을 계승하려 했다가 히틀러에게 해임당했다. 그런데도 히틀러가 자살한 뒤 괴링은 자신이 전권대사로 대우 받기를 바라고 가족들과 함께 미군 장교에게 스스로 항복했다.
1939년에 체결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했다. 초기에 루프트바페는 우세를 점하여 전투 첫 달에 수천 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했다. 히틀러와 그의 최고 참모들은 크리스마스까지 작전이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고, 병력이나 장비의 예비군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7월까지 독일은 운용 가능한 항공기가 1,000대 미만으로 줄었고, 병력 손실은 21만 3천 명이 넘었다. 광대한 전선의 한 부분에만 공격을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모스크바 점령에 노력을 기울였다. 길고 성공적인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히틀러는 중앙집단군에게 모스크바 진격을 중단하고 일시적으로 기갑부대를 북쪽과 남쪽으로 돌려 레닌그라드와 키예프 포위 작전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일시적인 정지는 적군에게 새로운 예비군을 동원할 기회를 제공했고, 역사가 러셀 스톨피는 이를 1941년 10월 모스크바 전투로 재개된 모스크바 공세 실패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간주한다. 악천후, 연료 부족, 동유럽의 항공기 기지 건설 지연, 과도하게 늘어난 보급선도 요인이었다. 히틀러는 1942년 1월 중순까지 부분적인 후퇴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 손실은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과 비슷했다.
1941년 10월 말 또는 11월 초, 히틀러와 괴링은 강제 노동을 위해 소련 포로와 더 많은 수의 소련 민간인을 독일로 대량 강제 이송하기로 결정했지만, 곧 유행병으로 인해 포로 수송이 중단되었다. 독일로 이송된 사람들은 점령된 소련보다 나은 조건에 처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적어도 130만 명의 소련 포로가 독일 또는 합병 지역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이 중 40만 명이 사망했고, 이러한 사망자 대부분은 1941/1942년 겨울에 발생했다.
진주만 공격 후, 괴링은 원수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과 제독 에리히 레더(Erich Raeder)과 함께 히틀러에게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촉구했다.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c707f913_2ec6ec8d.jpg|thumb|1942년 괴링과 핀란드 원수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히틀러는 1942년 여름 작전을 남쪽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코카서스의 유전을 점령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의 주요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 23일 루프트바페의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독일 제6군이 도시에 진입했지만, 전선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증원이나 보급 없이 포위할 수 있었다. 11월 말 우라누스 작전에서 제6군이 포위되자 괴링은 루프트바페가 매일 최소 300톤의 보급품을 포위된 병사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후퇴를 금지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고 요구했다. 일부 공수 작전이 성공했지만, 실제 공급량은 하루 120톤을 넘지 못했다. 28만 5천 명의 병력 중 9만 1천 명에 달하는 제6군의 잔여 병력은 1943년 2월 초에 항복했고, 이 포로 중 5천 명만이 소련 포로 수용소를 벗어나 다시 독일을 보게 되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 부대의 전력은 증강되었다. 영국을 기지로 하여, 이들은 독일 목표물에 대한 작전을 시작했다. 최초의 1,000대 폭격기 공습은 1942년 5월 30일 쾰른에서 이루어졌다. 보조 연료 탱크가 미국의 전투기(fighter aircraft)에 장착된 후, 영국에서 더 먼 목표물에 대한 공습이 계속되었다. 괴링은 1942년-1943년 겨울에 미국 전투기가 아헨(Aachen)까지 동쪽으로 격추되었다는 보고를 믿지 않았다. 그의 명성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개 아래 드롭 탱크(drop tank)를 사용할 경우 1800마일(약 2897 km)가 넘는 전투 반경(combat radius)을 가진 미국의 P-51 머스탱(P-51 Mustang)이 1944년 초부터 대편대를 이루어 폭격기를 목표 지역까지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루프트바페는 충분히 보충할 수 없는 항공기 승무원의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연합군 폭격기는 1944년 말까지 정유소와 철도 통신을 표적으로 삼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저해했다. 독일 민간인들은 고국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괴링을 비난했다. 히틀러는 그를 회의에서 배제하기 시작했지만, 루프트바페 사령관이자 4개년 계획의 전권 대표직에는 그를 유임시켰다. 그는 히틀러의 신뢰를 잃으면서 여러 저택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D-Day(1944년 6월 6일)에 루프트바페는 상륙 지역에 약 300대의 전투기와 소수의 폭격기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연합군은 총 1만 1,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베를린에 접근하자, 히틀러의 베를린 방어 준비 노력은 점점 더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 되었다. 1945년 4월 20일, 베를린의 총통지하벙커de에서 맞이한 그의 마지막 생일은 괴링을 포함한 많은 나치 고위 간부들이 작별을 고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무렵 괴링의 사냥 별장 카린할은 이미 피난처로 사용되었고, 건물은 파괴되었으며, 그곳의 예술품들은 베르히테스가덴 등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괴링은 4월 22일 오베르잘츠베르크에 있는 그의 저택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날 히틀러는 장군들을 향한 긴 비난 연설에서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끝까지 베를린에 남아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괴링이 평화 협상을 위한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OKW 작전국장 알프레드 요들은 히틀러의 폭언에 참석했고, 몇 시간 후 회의에서 괴링의 참모총장인 칼 콜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콜러는 그 의미를 감지하고 즉시 베르히테스가덴으로 날아가 괴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소련 침공이 시작된 지 일주일 후, 히틀러는 사망 시 괴링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법령을 발표하여 전쟁 초기에 한 선언을 공식화했다. 이 법령은 또한 히틀러가 행동의 자유를 잃을 경우 괴링에게 히틀러의 대리인으로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괴링은 권력을 잡으려 한다면 반역자로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직무 태만으로 고발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망설인 끝에 괴링은 자신을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한 1941년 법령 사본을 검토했다. 콜러와 한스 람머스(국무총리청 국무장관)와 상의한 후, 괴링은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베를린에 남은 히틀러가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모두 법령의 조건에 따라 괴링이 히틀러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또한 라이벌인 마르틴 보르만이 히틀러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을 반역자로 처형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괴링은 히틀러에게 자신이 히틀러의 대리인으로서 독일 지도자직을 인계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는 신중하게 작성된 전보를 보냈다. 그는 만약 히틀러가 그날 밤 22시(4월 23일)까지 답장을 하지 않으면, 히틀러가 행동의 자유를 잃었다고 간주하고 라익의 지도자직을 인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45년 4월 23일, 총통 지하벙커(総統地下壕)를 빠져나온 공군참모총장 카를 코러(カール・コラー) 대장이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알프레트 요들(アルフレート・ヨードル) 상장의 전갈을 가지고 오베르잘츠베르크(オーバーザルツベルク)의 별장을 방문한다. 괴링(ゲーリング)은 역시 오베르잘츠베르크로 피신해 있던 나치당 총통사무장 필립 보울러(フィリップ・ボウラー)와 함께 코러를 맞이했다.
코러가 괴링에게 전달한 요들의 전갈은 "총통이 자결할 의지를 굳히고, 연합군과의 협상에는 괴링이 적임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코러는 덧붙여 "지금 당신이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원수 각하."라고도 건의했다. 그러나 이 전갈에 대해 괴링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치당 관방장 마르틴 보르만(マルティン・ボルマン)의 책동을 의심하고 있었다.
괴링은 먼저 히틀러 자신으로부터 국가의 지휘권 이양 동의를 얻고 싶어 하며, 오베르잘츠베르크로 피신해 있던 총통관저 관방장 한스 하인리히 라마스(ハンス・ハインリヒ・ラマース)를 소집하여, 그에게 1941년 6월 29일 히틀러가 공포한 괴링을 총통의 후계자로 정한 법률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했다. 라마스는 그 효력을 부정하는 다른 명령이나 법률은 전혀 없으므로 당연히 유효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괴링은 망설였지만 결국 정오에 베를린 총통 지하벙커에 있는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치기로 했다.[151]
또한 외무대신 리벤트롭(リッベントロップ)에게도 "폰 리벤트롭(フォン・リッベントロップ) 장관 각하. 저는 총통에게 4월 23일 오후 10시까지 저에게 지시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약 그 시간까지 총통이 행동의 자유를 잃고, 국사 행위의 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 총통의 1941년 6월 29일 공포의 포고에 기초하여, 저는 총통 대리로서 모든 정부 기관을 통괄할 생각입니다. 1945년 4월 23일 밤 12시까지 만약 귀관에게 총통으로부터 직접, 또는 저로부터 연락이 없다면, 귀관은 즉시 항공편으로 제게로 오십시오. 괴링 국가원수(ゲーリング国家元帥)"라는 전보를 보냈다.[152]
그 후 괴링은 코러와 보울러와 함께 미국(アメリカ合衆国) 대통령 해리 트루먼(ハリー・トルーマン),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ドワイト・アイゼンハワー) 미 원수, 영국(イギリス) 수상 윈스턴 처칠(ウィンストン・チャーチル)에게 보낼 친서 초고 작성에 힘썼다. 코러에 따르면 이때의 괴링은 오랜만에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코러는 "마치 그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153]
한편, 총통 지하벙커에서 괴링의 전보를 받은 보르만은 “괴링이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전보를 히틀러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기력한 궁지에 빠져 있었고, 전보를 봐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괴링이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전보가 총통 지하벙커로 보내져 왔다. 보르만은 이것을 총통에게 전달하며 다시 “괴링이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정부 각료에게 이 전보를 보내고, 당신의 포고를 빌미로 오늘밤 12시에 당신의 후계자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히틀러는 여기서 처음으로 분노를 폭발시켜 “나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괴링은 게으름뱅이다. 녀석은 공군의 붕괴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녀석은 부패했다. 녀석이 앞장서서 우리나라를 부패시켰다. 게다가 녀석은 오래전부터 마약 중독자다. 오래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라고 고함쳤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히틀러는 타버린 듯 무기력 상태로 돌아가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 괴링이라면 냉정한 항복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 졌다면, 누가 그것을 하든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히틀러는 보르만이 기초한 총통 명의의 전보를 되돌려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히틀러가 허락한 전보에는 자신의 행동의 자유에 문제가 없다는 것, 1941년 6월 29일의 포고는 취소하므로 괴링은 총통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괴링이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모든 관직을 사임한다면 그 이상의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보르만은 독단으로 오버잘츠베르크 지역의 친위대 부대 지휘관 SS 중좌에게 괴링 체포를 명령하는 전보도 보냈다 (국가원수 체포라는 대담한 명령에 프랑크가 주저할 가능성을 고려한 보르만은 “만약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귀관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총통 지하벙커에서 전보를 받은 괴링은 즉시 모든 계획을 중단하고, 리벤트로프에게 “총통은 아직 행동의 자유를 유보하는 뜻을 나에게 연락했고, 오늘 정오의 전보는 이것을 취소한다. 하일 히틀러. 헤르만 괴링”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4월 23일 오후 9시경, 프랑크 등 친위대 부대에 의해 괴링들은 별장째 포위되었다. 괴링의 가족, 직원, 부하들은 일괄적으로 감금되었고,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고 하면 사살하겠다는 뜻을 통고받았다. 불안해하는 아내 에미를 괴링은 “내일이면 모든 오해는 풀릴 거야. 푹 자도록 하세요. 나도 그럴 생각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체포를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23년 동안 좋은 시절도 고난의 시절도 함께 걸어온 나를 말이야? 기운을 내세요. 그런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라고 격려했다.
4월 25일에는 영국 공군이 오버잘츠베르크를 공습하여 괴링의 별장과 베르크호프를 포함한 시설이 소실되었다. 친위대와 괴링들은 산비탈의 방공호에 숨었다. 방공호 안에서도 괴링과 그의 가족은 친위대원에 의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고, 대화가 금지되었다. 방공호를 나온 후, 파괴된 자신의 별장을 본 괴링은 프랑크에게 “만약 내가 총통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어겼다고 여겨진다면 나를 사살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내, 딸, 측근들은 마지막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히틀러에게 전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한편 에미는 프랑크에게 “총통께서는 저의 결혼식 날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총통께서 남편을 사살하라고 하신다면 저와 에다도 동시에 사살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프랑크는 그들의 호소에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말씀을 총통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프랑크는 보르만으로부터 “베를린의 상황은 더욱 긴박해지고 있다. 베를린이 함락되고 총통이 사망하신 경우에는 4월 23일의 반역자는 사살하라. 이 임무는 완전히 수행해야 한다. 귀관의 생명과 명예는 그 일에 달려 있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히틀러도 보르만도 죽었다면 명령을 이행할 의미가 없을 뿐더러, 어쩌면 괴링이 연합국과의 협상에 큰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명령을 이행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프랑크는 괴링을 처형하지 않고 감금을 계속하기로 했다.
괴링은 프랑크에게 “베르히테스가르텐에서 사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자신 소유의 마우테른돌프 성으로 이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프랑크는 이를 승낙했다. 괴링과 가족, 하인들, 친위대 부대가 탄 자동차 행렬이 마우테른돌프로 향했다. 그런데 그 도중에 라디오 함부르크 방송이 “헤르만 괴링 국가원수는 심장병 발작으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그 때문에 국가원수는 독일 공군 총사령관직 사임을 총통에게 청원했다. 총통은 이를 승인하고, 리터 폰 그라임(Robert Ritter von Greim) 상급대장을 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원수로 승진시켰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4월 30일에 히틀러는 자살했다. 히틀러는 유서에서 “괴링과 히믈러는 나 개인에 대한 배신은 별론으로 하고,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나의 승인을 얻지도 않고 적과 비밀 협상을 벌였으며, 또 불법적으로 국가 권력을 탈취하려고 해서 국가와 전 국민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다” “독일 공군의 실패는 완전히 국가원수의 책임이다”라고 괴링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후계자는 괴링이 아니라 해군 총사령관 카를 되니츠(Karl Dönitz) 원수로 정했다. 5월 1일에 마우테른돌프 성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히틀러의 죽음을 알게 된 괴링은 에미에게 “히틀러는 죽었어. 이제 나는 끝까지 충실했다고 그에게 전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친위대에 의한 감금은 계속되었지만, 곧 친위대원들은 보르만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우연히 지나가던 독일 공군 부대에 괴링을 인계하여 그를 석방했다.
5월 6일에 괴링은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되니츠 대통령에게 “귀관은 마르틴 보르만 관방장이 나를 제거하려 했던 독일의 안보에 극히 위험한 음모를 알고 있는가? 나에게 취해진 조치는 총통에게 전적으로 충실한 내가, 그에게 후계자에 관한 명령의 이행을 원하는지 질문한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그 조치는 보르만이 서명한 전보에 의한 것이다. 여러 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로부터도 사정 청취를 받지 못했고, 나의 입장을 설명해도 무시당했다. SS 장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이러한 음모의 전모를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귀관이 요들(Alfred Jodl)을 아이젠하워에게 파견할 작정이라고 들었다. 요들의 공식 협상 외에, 내가 "원수 대 원수"로 아이젠하워와 회담하여 독일에게 명예로운 평화를 얻는 협상을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이익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쟁 전 총통으로부터 많은 중요한 국제 협상을 위임받아, 그 협상을 모두 성공시킨 나의 경험을 살리면, 요들의 공식 협상에서도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더욱이 근년 영미의 정치가들이 신문 라디오를 통해 보여준 나에 대한 태도는 독일의 다른 정치 지도자의 그것보다 호의적인 것이 증명되고 있다. 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어서, 나는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독일의 미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원수 괴링”이라는 전보를 쳤다. 하지만 되니츠로부터의 답신은 없었고 무시되었다.
괴링은 되니츠의 허락 없이도 아이젠하워와 "원수 대 원수" 회담을 할 작정이었다. 5월 7일, 괴링은 첼 암 제 근처의 으로 이동하여 부관 대령을 미군 사절로 삼았다. 아이젠하워에게 "원수 대 원수" 회담을 신청하는 편지와 현지 미군 사령관에게 "게슈타포와 SS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부관에게 맡겼다. 그러나 브라우히치 대령이 미군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고, 미군은 피쉬호른 성에 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괴링은 직접 차를 몰고 미군을 찾으러 나섰다. 마침내 미군이 피쉬호른 성에 도착했지만, 서로 어긋났다. 미군들은 라트슈타트 근처 산길에서 피난민과 혼란스러운 차량 정체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던 괴링의 차를 발견하고 그를 체포했다.
|250px|thumb|포로가 되었을 당시 괴링의 영상.]]
초기 미군의 괴링에 대한 처우는 완벽한 VIP 대우였으며, 그에게 "원수 대 원수" 회담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한 대우는 전혀 없었다. 괴링은 일단 피쉬호른 성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받고, 성에서 미군 준장 로버트 스택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괴링은 다음 날 키츠뷔엘의 대장 예하 미군 제7사령부로 이송되어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 카를 슈파르츠 대장의 환영을 받았다. 슈파르츠는 "하늘에서 싸웠던 인연"이라며 샴페인을 괴링에게 건넸다. 괴링의 기자 회견도 열렸다. 밤에는 장교 식당에서 괴링 환영회가 열렸다. 미군 장교들이 경쟁하듯 괴링에게 술을 따라주었기 때문에 괴링도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장교가 '텍사스의 깊은 시골'을 피아노로 연주하기 시작하자 괴링도 피아노를 둘러싼 합창의 대열에 합류했다. 또한 괴링은 "내 짐 속에 아코디언이 있는데"라고 말하며 아코디언을 가져오게 하자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를 연주했다. 즐거운 환영회는 오전 2시까지 이어졌고, 만취한 괴링은 기분 좋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250px|thumb|right|1945년 5월 15일, 아우크스부르크에 구금 중인 괴링의 컬러 영상.]]
한편 괴링의 VIP 대우를 들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일반 포로의 취급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이후 괴링은 가혹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다음 날, 아우크스부르크의 미군 제7군 심문 센터로 이송된 괴링은 대철십자장과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비롯한 여러 훈장, 원수 지팡이,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모두 압수당했다(훈장을 좋아했던 괴링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군이 이러한 고급품이 미군 감시병의 매수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욕실과 화장실도 없고 거실과 침실, 부엌만 있는 노동자 주택에 괴링을 밀어 넣었다.
아이젠하워의 냉담한 태도를 알고 "원수 대 원수" 회담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괴링은 완전히 낙담했다. 괴링의 부관 브라우히치 대령도 괴링과 자신에 대한 대우가 갑자기 악화된 것에 당황하여 "국가 원수 각하에게 걸맞는 주거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미군에 의해 그 호소가 거부되자, 울면서 "독일군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격분했다. 한편 괴링 본인은 낙담하여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괴링에 대한 예비 심문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미군 장교의 보고서는 괴링의 높은 지능과 기지, 교활함을 강조하고 있다.
|250px|thumb|1945년 8월, 바트 몬도르프의 아슈칸 수용소 포로들의 기념 사진. 중앙이 괴링이다.]]
5월 21일, 룩셈부르크 의 팔래스 호텔 한 방에 감금되어 4개월 정도 그곳에서 지냈다. 이곳은 미군의 최중요 포로 수용소(아슈칸 수용소)였고, 곧 카를 되니츠, 요아힘 폰 리벤트롭,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알베르트 케셀링크, 프란츠 폰 파펜, 히알마르 샤흐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히ャー 등이 속속 수용되었다.
|thumb|right|250px|교도소에서 훈장을 떼이는 괴링(1945년 5월 22일)]]
수용소 소장인 미군 대령 버튼 안드라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괴링이 몬도르프에 왔을 때, 약을 가득 채운 두 개의 트렁크를 가지고 바보
2. 4. 재판 및 최후





항복 직후 괴링은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며, 계급장과 서훈을 박탈당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약물중독에서 벗어난 괴링은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비밀리에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괴링은 룩셈부르크 몽도르-레-뱅의 캠프 애쉬캔에 수용되었다가 뉘른베르크로 이송되었다. 그는 디히드로코데인 복용을 중단하고 체중을 감량했으며, 지능지수 검사에서 138을 기록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은 카를 되니츠 다음으로 높은 직급의 관리였다. 검찰은 괴링을 공모, 침략 전쟁,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했다. 괴링은 "기소장의 의미에서 무죄"라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강제 수용소와 관련된 영화를 상영했고, 괴링은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괴링은 자신의 변론에서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대 신문에서 크리스탈나흐트 직후 회의 의사록, 탈출 후 재포획된 조종사 살해, 헝가리 유대인의 학살 등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야 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뉘른베르크 재판이 개정되었다. 괴링은 히틀러의 후계자가 된 되니츠를 제치고 가장 주요한 피고인이 앉는 전열 좌측 끝 자리에 배정되었다. 11월 21일에 괴링은 “기소장의 의미에서 무죄를 주장합니다.”라고 말했다.
괴링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나치스 정권 하의 지위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몇몇 그룹을 만들게 되었지만, 히틀러 다음의 2인자였던 괴링은 모든 그룹으로부터 피고인 전체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피고인 중 한 명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에 반감을 가졌다. 1946년 1월 3일 슈페어의 변호사는 증인으로 소환된 SD 국내 정보국장 오토 오렌돌프 친위대 소장에 대한 질문에서, 슈페어가 히틀러 암살 계획을 모의했던 것을 폭로했다. 괴링은 이에 격분하여, 휴정 후 곧바로 슈페어에게 덤볐지만, 슈페어는 괴링을 차갑게 뿌리치고, 괴링은 경비병에게 끌려갔다.
괴링은 네 가지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는 "변론의 여지가 없다. 괴링은 종종, 사실상 거의 항상 지도자 다음으로 움직이는 힘이었다"라고 명시되었다.

괴링은 교수형 대신 총살형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교수형 집행 전날 밤 시안화칼륨 캡슐로 자살했다. 1946년 10월 7일, 아내 에미와 마지막 면회를 했다. 괴링은 "에다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괴링이 어떻게 독극물을 입수했는지는 미 육군 중위 잭 G. 휠리스가 괴링에게 전달했다는 설과 전 미 육군 이등병 허버트 리 스티버스가 독일 여성을 통해 전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괴링의 시체는 처형된 다른 남성들의 시체와 함께 전시된 후 화장되었고, 재는 이자르 강에 뿌려졌다.
3. 유산 및 평가
3. 1. 유산
괴링의 이름은 유대인 재산 약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1945~46년에 미국 육군 정보부가 작성하고 1997년에 기밀 해제된 OSS 미술품 약탈 조사 부대(ALIU) 적색 표시 명단에 135번이나 등장한다. 유대인 재산 몰수는 괴링이 개인 재산을 축적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4개년 계획 책임자로서 유리한 결정을 내려주는 대가로 재벌들로부터 뒷돈을 받았고, 피르칼을 통해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공화파에 무기를 공급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괴링은 1933년에 제국 사냥감 감독관으로, 1934년에 독일 삼림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산림법 개혁을 시행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쇼르파이데 숲에 를 주립 공원으로 지정하고, 첫 번째 아내 카린의 추모를 위해 사냥용 별장인 카린할을 건설했다. 카린할에는 1939년부터 유럽 전역에서 약탈한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미술관이 있었다. 괴링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긴밀히 협력하여 유대인 소장품, 도서관 및 박물관 전역에서 예술 작품과 문화 유물을 약탈하는 임무를 맡은 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de()와 긴밀히 협력했다. 알프레드 로젠베르크가 이끄는 이 부대는 파리에 수집 센터와 본부를 설치했고, 프랑스에서만 약 2만 6천 대의 열차가 예술품, 가구 및 기타 약탈품으로 가득 차 독일로 보내졌다. 괴링은 파리 본부를 방문하여 들어오는 도난품을 검토하고 카린할과 다른 그의 집으로 보낼 물건을 선별했으며, 그의 소장품은 약 1,500점에 달하고 추정 가치는 2억 달러였다.

괴링은 사치스러운 취향과 화려한 의상으로 유명했으며, 다양한 특별 제복을 만들었다. Reichsmarschallde 제복에는 보석이 박힌 지휘봉이 포함되어 있었고, 전쟁 최고의 슈투카de 조종사인 한스-울리히 루델은 괴링이 기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두 번 만났다고 회상했다.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괴링이 "고급 매춘부가 오페라에 갈 때 입는 옷"처럼 보이는 모피 코트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카린할에서 건설이 완료될 때마다 사치스러운 집들이 파티를 열었고, 저녁 내내 여러 번 의상을 갈아입었다.
괴링은 음악에 대한 후원으로 유명했고, 자주 호화롭게 접대를 베풀었으며 자신을 위한 정교한 생일 파티를 열었다.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손님들이 값비싼 선물을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1940년 생일을 맞아 치아노는 괴링에게 안눈치아타 훈장을 수여했다.
연한 파란색 바탕의 Reichsmarschallde 깃발 디자인에는 월계관을 잡고 있는 금색 독일 독수리가 있으며, 월계관 위에는 두 개의 지휘봉이 스와스티카와 겹쳐져 있다. 깃발의 뒷면에는 네 개의 루프트바페 독수리 사이에 월계관으로 둘러싸인 Großkreuz des Eisernen Kreuzesde()가 있다.
그는 "der Eisernede"( )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비만해졌다. 그는 자신에 대한 농담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나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요제프 괴벨스와 히믈러는 괴링보다 훨씬 더 반유대주의적이었지만, 괴링은 당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그러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부관인 에르하르트 밀히는 유대인 부모를 두었지만, 괴링은 1935년의 뉘른베르크 법률을 지지했으며, 나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불리한 경제 조치를 시작했다. 그는 4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모든 유대인 재산의 등록을 요구했으며, 크리스탈나흐트de 이후 열린 회의에서 독일 소유의 보험 회사가 유대인의 손실에 대한 재정적 부담을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유대인들에게 10억 라이히스마르크의 벌금을 부과할 것을 제안했다.
같은 회의에서 유대인과 그들의 재산 처분에 대한 옵션이 논의되었고, 유대인들은 게토에 격리되거나 이민을 장려받을 것이며, 그들의 재산은 아리아화 프로그램에 따라 압류될 것이었다. 이 회의의 상세한 의사록과 다른 문서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낭독되었고, 이는 그가 유대인 박해에 대한 지식과 공모를 증명했다.
1939년 1월 24일, 괴링은 베를린에 중앙 유대인 이민 사무소를 설립했다.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이 기관은 유대인들이 라인강 연방을 떠나도록 촉구하고 유대인 측에서 이민을 조정할 유대인 조직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도록 임무를 맡았다.
1941년 7월, 괴링은 하이드리히에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방안의 실질적인 세부 사항을 조직하라는 각서를 발행했다. 6개월 후 열린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유대인의 집단 학살이 이제 공식적인 라인강 연방의 정책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괴링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살해된 사람들의 수가 논의된 다른 회의에는 참석했다.
괴링은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비알로비에자 숲에서 독일 공군 보안 대대에 의한 반유격대 작전을 지휘했는데, 이는 수천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 민간인의 살인으로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은 구스타브 길버트에게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반유대주의 조치를 결코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헤르만 괴링의 사치스러운 취미 중 하나는 미술품 수집이었다. 독일 국내와 유럽 점령지 곳곳에서 입수한 그림과 미술품을 전처가 잠든 저택인 카린홀에 모아 거대한 미술품 컬렉션을 만들었다.[225] 미술품 수집의 주임 관리자로 화상 발터 안드레아스 호퍼(Walter Andreas Hofer)를 임명하여 수집한 미술품의 기록을 남기게 했다.[225]

폴란드(Polen) 렘베르크(Lemberg)의 미술관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스케치 31점을 입수했다.[226] 네덜란드(Nederland)에서는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의 그림 여러 점을 입수했다.[227] 화상 한 판 메헬렌(Han van Meegeren)으로부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그리스도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Christ and the Adulteress)』 등의 그림을 구입했지만, 이것은 메헬렌 자신이 그린 위작이었다.[227]
이탈리아(Italia)에서는 전해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피리돈의 레다』,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zio) 등의 르네상스(Rinascimento) 회화등을 입수했다.[228] 프랑스(France)에서는 장 시메옹 샤르댕(Jean-Siméon Chardin)의 『라켓을 든 소녀(La jeune fille à la raquette)』, 크라나흐 부자(Cranach the Elder and the Younger),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등의 그림을 수집했다.[228]
180px의 『라켓을 든 소녀』]]
나치 점령하에서도 아리아인(비유대인) 소유의 미술품에 대해서는 구입해야 했지만, 유대인 소유라면 "소유자 없음"으로 간주하여 아무런 질문 없이 빼앗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소유 미술품의 몰수를 담당했던 나치의 공적 기관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가 지휘하는 전국 지도자 로젠베르크 특수 부대(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 ERR)였지만, 괴링은 이 조직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229]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부유층에 대한 미술품 몰수가 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가장 큰 피해자는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이었다.[229] 몰수된 미술품에 대해 히틀러는 항상 괴링에 우선하여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230] 괴링이 수집한 미술품 중에는 나치가 퇴폐 예술(Entartete Kunst)이라고 비판했던 작가들의 그림도 있었다고 한다.[231]

괴링에게 있어 예술은 큰 비중을 차지했고, 전쟁 중 바쁜 시간을 할애해서도 컬렉션 보강에 힘썼다. 주 드 폼에는 자주 방문하여 마음에 드는 몰수 작품을 찾아 자신의 저택으로 가져갔다.[232]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Nürnberger Prozesse) 중 레온 골든슨(Leon Goldensohn)으로부터 받은 인터뷰에서 약탈적인 미술품 수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첫째, 전쟁에서는 누구나 다소 약탈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제가 했다고 하는 약탈은 하나도 불법이 아닙니다."[233] "헤르만 괴링 미술관" 계획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234]

위 인터뷰에서 히틀러와의 예술 취향이 일치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니오. 히틀러는 제가 좋아하는 고딕 양식(Gotik)을 철저히 싫어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235]
3. 2. 평가
헤르만 괴링은 다면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으나, 정치적 능력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22]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서 괴링을 "무능하다"고 비난했으며, 히틀러 정권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약해졌다.[222]모르핀 중독자였던 괴링은 전쟁 중 증세가 악화되어 행동이 불안정하고 오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222] 그러나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에는 모르핀 중독을 극복하고 당당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222] 미군 의학자 더글러스 켈리 소령은 괴링을 "진정한 지도자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222]
괴링은 유머 감각이 있었고 자신에 대한 농담을 즐겼다.[223] 영국 주독일 대사 네빌 헨더슨은 괴링이 유머에 대해 폴스타프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223] 그러나 딸 에다를 모욕하는 농담에는 용서 없는 모습을 보였다.[224]

괴링은 귀족적인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화려함을 좋아하는 성향은 때로는 유아적일 정도였다.[222] 베를린 교외의 저택 "카린할"은 궁전 같은 건물이었다.[222] 애완 사자, 거대한 철도 모형, 특주 메르세데스-벤츠와 호르히의 오픈카, 은으로 장식된 루거 P08 등은 그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사냥과 의복에 대한 집착도 강했으며, 자신이 디자인한 흰색 군복을 즐겨 입었다.[222]
웩슬러-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 따르면 괴링의 지능 지수는 138로 높았으며, 기억력도 뛰어났다.[236][237] 미군 장교와 영국 주재 독일 대사는 괴링의 이해력과 머리 회전이 빠른 점을 강조했다.[167]
괴링은 비만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별명 중 하나는 "뚱보(Der Dicke)"였다.[239] 비만의 원인은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과 식욕 때문으로 보인다.[240] 체중 감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자신의 체중 상한선을 초과하는 경우가 빈번했다.[241] 연설에서 자신의 비만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243]
괴링은 히틀러의 측근으로서는 드물게 반유대주의적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246] 그러나 뉘른베르크 법률을 지지하고 유대인에게 불리한 경제 조치를 시작했으며,[123] 크리스탈나흐트 이후 유대인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123] 1941년 7월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세부 사항을 조직하라는 각서를 발행했다.[123] 반제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른 회의에서 살해된 사람들의 수가 논의된 사실은 알고 있었다.[123] 그는 1942년에서 1944년 사이 비알로비에자 숲에서 독일 공군 보안 대대에 의한 반유격대 작전을 지휘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과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는데 기여하였다.[123]
괴링은 유대인 절멸 정책(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여나 인지를 전면적으로 부인했다.[246] 그는 유대인을 정계와 경제계에서 멀리하려 했지만, 해를 끼치려고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246] 나치당의 인종 정책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과격한 인종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요시되었다고 말했다.[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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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아시아역사자료센터
独国外務大臣男爵「フォン、ノイラート」外三十三名叙勲ノ件
[254]
아시아역사자료센터
独国総統幕僚全権公使「ワルター、ヘーベル」外二十二名叙勲ノ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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