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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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시(平氏)는 일본의 씨족으로, 간무 천황의 자손에게 하사된 성씨에서 유래했다. 헤이안 시대에 미나모토 씨와 함께 천황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성씨 중 하나였으며, 간무 천황의 손자들을 시작으로 닌묘, 몬토쿠, 고코 천황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졌다. 헤이시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으며, 특히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기요모리 일족은 '헤이케'로 불리며 정권을 수립했으나 멸망했다. 헤이시는 도고쿠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 씨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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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헤이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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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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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姓) | 다이라 아손 |
가문 | 헤이시 |
헤이시 (로마자 표기) | Heishi |
헤이케 (로마자 표기) | Heike |
헤이 (로마자 표기) | hei |
시 (로마자 표기) | shi |
케 (로마자 표기) | ke |
본거지 | 히타치 국, 이세 국 |
창시자 | 다이라노 다카모치 |
마지막 통치자 | 다이라노 무네모리 |
창건 연도 | 기원후 825년경 |
소멸 연도 | 1185년 |
부모 가문 | 일본 황실 (간무 천황) |
주요 분가 | 호조 씨 지바 씨 미우라 씨 나가오 씨 우치마 다지리 씨 하타케야마 씨 오다 씨 다네가시마 씨 기타 |
역사적 배경 | |
기원 | 간무 천황의 후손 |
주요 인물 (간무 헤이시) | 다이라노 마사카도 다이라노 사다모리 다이라노 다다모리 다이라노 기요모리 다이라노 도키타다 |
주요 인물 (방계 후손) | 호조 도키마사 구마가이 나오자네 이세 소즈이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
주요 분파 | |
분파 | 간무 헤이시 닌묘 헤이시 몬토쿠 헤이시 고코 헤이시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일본의 씨족 (고대 씨족) |
2. 기원
겐지(源氏) ・ 후지와라 우지(藤原氏) ・ 다치바나 우지(橘氏)와 함께 「겐페이도시쓰(源平藤橘)」(사성四姓)로 통칭되는 대표적인 가바네(姓) 중 하나이다.
헤이시로는 간무 천황에서 나온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닌묘 천황에서 나온 '''닌묘 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천황에서 나온 '''몬토쿠 헤이시'''(文徳平氏), 고코 천황에서 나온 '''고코 헤이시'''(光孝平氏)의 네 파가 있었다. 하지만 후세까지 남은 대부분은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후손인 간무 헤이시이며, 그 밖에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후손으로 무가(武家)로서 활약하게 되는 반도 헤이시(坂東平氏)가 알려졌을 뿐이다. 헤이시 정권을 세운 다이라노 기요모리 가문을 비롯하여, 히타치 헤이시(常陸平氏),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씨나 반도 하치 헤이시(坂東八平氏)도 모두 간무 헤이시의 자손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이라 씨라고 하면 간무 헤이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간무 헤이시에는 다카모치 왕 계통 외에 요시무네 왕(善棟王) 계통과 다카무네 왕(高棟王) 계통이 있는데, 요시무네 왕의 후손은 기록에 남은 바가 없지만 다카무네 왕의 계통은 구게로서 교토에서 활약했다.
825년 간무 천황의 손자 중 일부가 처음으로 다이라 성을 받았다. 이후 닌묘 천황, 몬토쿠 천황, 고코 천황의 후손들도 다이라 성을 받았다. 이러한 천황들의 특정한 세습 계보는 천황의 시호에 헤이시(平氏)를 붙여 표기하는데, 예를 들어 '간무 헤이시'와 같다.[5]
간무 헤이시 계보에는 두 개의 주요 가지가 있다. 하나는 889년 다이라노 타카모치(간무 천황(재위 781~806)의 증손자)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동안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계보임이 증명되었다.[6] 타카모치의 증손자인 다이라노 코레히라는 이세 국(현재 미에현의 일부)으로 이주하여 중요한 다이묘 가문을 세웠다.[7] 그의 손자인 마사모리와 증손자인 타다모리는 각각 시라카와 천황과 토바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타다모리의 아들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을 세웠다.[8] 호겐의 난(1156)과 헤이지의 난(1160)에서 승리한 기요모리는 다이조다이진(태정대신)의 지위에 올랐고,[8] 1180년 자신의 손자를 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는데, 이는 겐페이 전쟁(1180~1185)으로 이어졌다. 간무 헤이시 혈통의 마지막 지도자는 결국 단노우라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이 이야기는 헤이케 이야기에 나온다.[9] 간무 헤이시에는 호조, 치바, 미우라, 하타케야마 등 많은 분가가 있었다.[10][7]
간무 헤이시의 또 다른 주요 가지는 가즈라와라 친왕의 장남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인 다카무네 왕(804~867)이 825년에 다이라노 아손 칭호를 받으면서 창시되었다.[11][7] 이 가지의 구성원들은 교토 궁정의 중류 쿠게로 일했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 시대의 오다 씨도 다이라노 시게모리(1138~1179)의 손자인 다이라노 치카자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12] 겐지(源氏)·후지와라씨(藤原氏)·타치바나씨(橘氏)와 함께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사성)이라고 총칭되나, 헤이시(平氏)는 다른 세 성과 달리 씨족장(氏長者)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다.[16]
2. 1. 다이라 씨의 성립 배경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平) 씨는 헤이안 시대(794~1185) 천황들이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자녀와 손자들에게 하사한 명예로운 성씨 중 하나였다.[5]이 씨족은 궁정이 너무 커지면서 천황이 여러 세대 전의 역대 천황의 후손들을 더 이상 왕자로 인정하지 않고 귀족의 성씨와 품계를 부여하도록 명령하면서 생겨났다. 이 결정은 간무 천황(782~805) 재위 시기에 시행되었고, 따라서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 씨가 탄생하게 되었다.[4]
흔히 간무 천황의 손자가 신적강하하면서 하사받은 것을 시작으로 한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1세 왕, 2세 왕은 미나모토(源), 3세 이하는 다이라(平)라는 성이 내려졌음이 판명되어 있다.


'다이라(平)'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오타 아키라(太田亮)가 제창하여 후지키 구니히코(藤木邦彦)・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清) 등이 발전시킨 것으로, 최초로 '다이라'라는 집안을 열었던 간무 헤이시의 선조 간무 천황이 지은 헤이안쿄를 기념하여 '헤이(平, 일본식 음독으로 다이라多比良)'라고 명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분파
헤이시는 크게 간무 천황에서 나온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닌묘 천황에서 나온 '''닌묘 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천황에서 나온 '''몬토쿠 헤이시'''(文徳平氏), 고코 천황에서 나온 '''고코 헤이시'''(光孝平氏)의 네 파로 나뉜다.[15] 이 중 간무 헤이시가 가장 번성했으며, 무사 가문으로 유명한 헤이케(다이라노 기요모리 가문)도 간무 헤이시의 일파이다.
각 분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겐지(源氏), 후지와라 씨(藤原氏), 다치바나 씨(橘氏)와 함께 "겐페이토키쓰(源平藤橘)"(사성)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가바네(姓) 중 하나이다.[16] 다만, 헤이시는 다른 세 성과 달리 씨족장(氏長者)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없다.[16]
3. 1. 간무 헤이시 (桓武平氏)
겐지(源氏), 후지와라 우지(藤原氏), 다치바나 우지(橘氏)와 함께 「겐페이도시쓰(源平藤橘)」(사성四姓)로 통칭되는 대표적인 가바네(姓) 중 하나이다.헤이시는 간무 천황에서 나온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닌묘 천황에서 나온 '''닌묘 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천황에서 나온 '''몬토쿠 헤이시'''(文徳平氏), 고코 천황에서 나온 '''고코 헤이시'''(光孝平氏)의 네 파가 있다. 하지만 후세까지 남은 대부분은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후손인 간무 헤이시이며, 그 밖에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후손으로 무가(武家)로서 활약하게 되는 반도 헤이시(坂東平氏)가 알려졌을 뿐이다. 히타치 헤이시(常陸平氏)나 헤이시 정권을 세운 헤이케(平家, 다이라노 기요모리 가문을 지칭)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씨나 반도 하치헤이시(坂東八平氏)도 모두 간무 헤이시의 자손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이라 씨라고 하면 간무 헤이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간무 헤이시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아들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 만다 친왕(万多親王), 나카노 친왕(仲野親王) 및 가야 친왕(賀陽親王)의 자손이다.
- '''가즈라와라 친왕 계통'''(葛原親王流): 간무 천황의 제3황자 가즈라와라 친왕의 후손이다.
- * 다카무네 왕 계통(高棟王流): 가즈라와라 친왕의 맏아들인 다카무네 왕(高棟王)의 자손으로, 825년에 다이라 성을 받아 '다이라노 다카무네(平高棟)'가 되었다. 다이라노 도키코(平時子)와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 겐슌몬인(建春門院)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 등을 배출하였다. 단노우라 전투 이후 가라바시 가(唐橋家), 니시토인 가(西洞院家), 안고인 가(安居院家), 가라스마루 가(烏丸家) 등이 구게(公家)로서 존속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니시토인 가와 함께 히라마쓰 가(平松家), 하세 가(長谷家), 가타노 가(交野家), 이시이 가(石井家) 등 다이라 계통의 다섯 집안이 도조케(堂上家)로 불렸다. 노토반도(能登半島)에는 도키쿠니 가(時國家)가 호농(豪農)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 요시무네 왕 계통(善棟王流): 가즈라와라 친왕의 셋째 아들 요시무네 왕(善棟王)의 자손으로, 825년에 다이라 성을 받아 '다이라노 요시무네(平善棟)'가 되었다. 기록에 남은 자손은 없다.
- * 다카모치 왕 계통(高望王流): 가즈라와라 친왕의 삼남인 다카미 왕(高見王)의 아들 다카모치 왕(高望王)이 다이라 성을 받아 '다이라노 다카모치(平高望)'가 된 데서 비롯되었다. 889년에 다이라 성을 받은 황족 5명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 ** 반도 헤이시: 898년 가즈사노스케(上総介)로 임명된 다카모치는 아들들과 함께 부임지로 떠났고, 임기가 끝난 뒤에도 교토로 돌아오지 않았다. 히타치 국이나 시모우사 국에까지 세력을 넓혀 반도 땅에 무사단을 형성하고 도고쿠에서 '반도 헤이시'라고 불리는 무가 헤이시의 기반을 굳혔다. 반도 하치헤이시(坂東八平氏)가 여기서 나왔다.
- ** 이세 헤이시(헤이케):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의 계통(로쿠하라류六波羅流・로쿠하라케六波羅家)을 '헤이케(平家)'라 부른다. 다다모리가 처음으로 승전(昇殿)을 허락받고, 기요모리는 헤이시 정권을 수립하여 번영을 누렸으나,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에서 멸망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이세씨(伊勢氏)가 막부 신하로 활동했고, 에도 시대에는 하타모토로서 이어졌다. 이세 모리토키는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 오다와라 호조씨(小田原北條氏)의 시조가 되었다.
- ** 헤이케의 도망자(落人): 단노우라 전투 이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숨어 살았던 「헤이케의 도망자」의 자손을 자칭하는 무가가 오늘날 일본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 '''만다 친왕 계통'''(万多親王流): 간무 천황의 제9황자 만다 친왕의 후손이다. 862년 마사미 왕(正躬王)의 아들 스미요 왕(住世王) 이하 12명이 다이라 성씨를 하사받았다.
- '''나카노 친왕 계통'''(仲野親王流): 간무 천황의 제12황자 나카노 친왕의 후손이다. 나카노 친왕의 아들 모치요 왕(茂世王) 등이 '다이라노 아손(平朝臣)'이라는 가바네를 하사받았다.
- '''가야 친왕 계통'''(賀陽親王流): 간무 천황의 제10황자 가야 친왕의 후손이다. 878년 가야 친왕의 여섯째 아들 도시모토 왕(利基王)의 아들 기요유키 왕(潔行王)이 다이라 성을 하사받았다.

3. 1. 1. 가즈라와라 친왕 계통 (葛原親王流)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은 간무 천황의 셋째 황자로, 그의 후손들은 특히 번성하였다. 825년 3월 5일, 가즈라와라 친왕은 자녀들을 신적강하(臣籍降下)시키고 다이라노 아손(平朝臣) 성씨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처음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6일에 다시 요청하여 허락받았다.[24] 여러 계보에 따르면, 가즈라와라 친왕의 아들 중 다이라노 아손 성씨를 받은 인물로는 다카무네 왕(高棟王), 요시무네 왕(善棟王), 다카미 왕(高望王)이 있었다. 한편, 830년 종오위하(従五位下)에 오른 다이라노 기요히토(平清人)[25]와 840년 작위를 받은 다이라노 하루카(平春香)[26]도 가즈라와라 친왕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가즈라와라 친왕의 장남인 다카무네 왕(高棟王)은 825년에 성씨를 하사받아 '다이라노 다카무네(平高棟)'가 되었다. 다카무네는 다이나곤(大納言)까지 승진했으며, 그의 셋째 아들 다다노리(平惟範), 그 아들 도키모치(平時望)와 고레모치(平伊望), 도키모치의 손자 다다나카(平惟仲)도 의정관(議政官)까지 출세했다. 그 후 도키모치의 손자인 지카노부(平親信)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쿠시(国司)를 역임하는 중급 귀족으로 존속하였다. 지카노부의 손자 노리쿠니(平範国) 가계는 헤이안 시대 말기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총애를 받은 겐슌몬인(建春門院)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가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을 낳으면서, 그의 동생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와 누이 다이라노 도키코(平時子), 그리고 시게코가 시집간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를 필두로 하는 다이라 가문(平家一門)의 번영을 가져왔다.
도키타다의 동생 지카무네(平親宗)의 자손(가라바시 가(唐橋家))과 그의 삼촌 노부노리(平信範)의 자손(니시토인 가(西洞院家)・안고인 가(安居院家)・가라스마루 가(烏丸家))는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도 구게(公家)로서 이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니시토인 가와 그 서류인 히라마쓰 가(平松家)・하세 가(長谷家)・가타노 가(交野家)・이시이 가(石井家)가 도조케(堂上家)가 되었다. 또한 지게(地下家)인 나이시마 가(生島家)도 이 계통이다. 지카노부의 또 다른 손자인 유키치카(平行親)의 계보는 가마쿠라 시대 전기에 다이라노 쓰네타카(平経高)를 배출했으나, 그 후에는 쇠퇴하였다. 이 두 계보는 역사 이야기인 《이마카가미(今鏡)》에 "일기의 집(日記の家)"으로 소개될 정도로, 《헤이키(平記)》, 《효한키(兵範記)》, 《헤이토키(平戸記)》를 비롯한 많은 고기록을 남겼다.
도키타다는 단노우라 전투 후 노토 국(能登国)으로 유배되어 몰락했으나, 노토 국 와지마 시(輪島市)의 호농(豪農)인 도키쿠니 가(時国家)는 도키타다가 유배지에서 낳은 아들 도키쿠니(時国)의 후예라고 자칭하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덴료(天領) 쇼야(庄屋)를 역임했고, 가미토키쿠니(上時国)・시모토키쿠니(下時国)의 두 가문으로 나뉘어 있다.
가즈라와라 친왕의 셋째 아들인 다카미 왕(高見王)의 아들인 다카모치(高望王)의 자손들이다. 다카모치가 성씨를 하사받아 다이라노 다카모치가 된 것을 시초로 한다. 다만, 다카미 왕의 이름은 당시의 사료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계보에는 의문이 남는다. (「望」과 「見」은 모두 이름 읽기로 "미"로 읽을 수 있다.) 간표(寛平) 원년(889년)에 황족 5명이 다이라노 아손(平朝臣)을 하사받았다는 기록(개별 이름은 전해지지 않음)이 있으므로, 다카모치는 그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다카모치는 쇼타이(昌泰) 원년(898년)에 가즈사 국(上総国)의 스케(介)에 임명되었고, 요닌(遥任) 고쿠시(国司)가 많은 가운데, 아들인 구니카(国香), 요시카네(良兼), 요시마사(良将)를 데리고 임지로 내려갔다. 그리고 임기가 지나도 귀경하지 않고, 구니카는 히타치 국(常陸) 다이조(大掾)(다이조 씨(大掾氏)), 요시마사는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을 역임하는 등 가즈사 국뿐만 아니라 히타치 국과 시모우사 국(下総国)에도 세력을 확장하여 간토(坂東)에 무사단(武士団)을 형성하여 무가 다이라 씨(武家平氏)의 기반을 다졌다. 요시마사의 아들인 마사카도(平将門)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 이를 토벌한 구니카의 아들 사다모리(平貞盛)의 자손은 간토 각지에 세력을 떨쳤다.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던 호조 씨(北条氏)와 고케닌(御家人)인 구마가야 씨(熊谷氏)는 사다모리의 증손인 나오카타(平直方)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또한, 다카모치의 측실(側室)의 아들인 요시후미(平良文)는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이 되는 등 무사로서 활약하며 주로 간토에 세력을 떨쳤다. 도이 씨(土肥氏), 지치부 씨(秩父氏) 등은 요시후미의 자손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그러나 손자인 다다쓰네(平忠常)가 반란을 일으켰고(다이라노 다다쓰네의 난(平忠常の乱)), 미나모토노 요리노부(源頼信)의 토벌을 받으면서 그 자손들은 겐지(源氏)의 가신으로서 대우받게 되었다. 다다쓰네의 자손들은 지바 씨(千葉氏), 가즈사 씨(上総氏) 등의 보소 헤이시(房総平氏)를 배출했다. 지바 씨의 서류에는 무쓰 국(陸奥国) 우다 군(宇多郡), 유키카타 군(行方郡)을 영지로 한 소마 씨(相馬氏)가 있으며, 에도 시대까지 다이묘(大名)로 이어졌다.
특히 요시후미 계통의 간토 헤이시(坂東平氏) 중에서 유명한 지바 씨, 가즈사 씨, 미우라 씨(三浦氏), 지치부 씨(秩父氏), 하타케야마 씨(畠山氏) (헤이시), 가마쿠라 씨(鎌倉氏), 나카무라 씨(中村氏), 오바 씨(大庭氏)는 간토 하치헤이시(坂東八平氏)라고 불린다.
3. 1. 2. 만다 친왕 계통 (万多親王流)
닌묘 천황의 손자인 마사모치 왕(雅望王), 유키타다 왕(行忠王) 및 고레토키 왕(惟時王)의 자손이다.모토야스 친왕의 자손 가운데 마사모치 왕・유키타다 왕・고레토키 왕의 자손만을 닌묘 헤이시(仁明平氏)라 한다.[30]
3. 1. 3. 나카노 친왕 계통 (仲野親王流)
仲野親王|나카노 친왕일본어 계통은 몬토쿠 천황(55대)의 아들 고레히코 친왕(惟彦親王)의 자손이다.고토우 왕(高棟王)은 825년(천장 2년)에 성을 하사받아 평고토우(平高棟)가 되었다. 고토우(高棟)는 대납언(大納言)까지 승진하였고, 그의 삼남 유범(惟範), 그 아들 시망(時望)·이망(伊望), 시망(時望)의 손자 유중(惟仲)도 의정관(議政官)까지 출세하였다.
그 후 시망(時望)의 손자 친신(親信)의 자손들은 대대로 수령(受領)을 역임하는 중급 귀족으로 존속하였다. 친신(親信)의 손자 범국(範国)의 가계는 헤이안 말기에 고시라카와 법황의 총애를 받은 시즈코(滋子)(겐슌몬인)가 다카쿠라 천황을 낳은 것을 계기로, 그의 동생 시추(時忠)와 누이 시코(時子)(이위니), 그리고 시즈코(滋子)가 시집간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필두로 하는 평가(平家) 일문의 번영을 가져왔다.
시추(時忠)의 동생 친소(親宗)의 자손(당교가)과 그의 삼촌 신범(信範)의 자손(니시토인가(西洞院家)·아게리인가(安居院家)·우마루가(烏丸家))는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도 공가(公家)로 이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니시토인가(西洞院家)와 그 서류인 히라마츠가(平松家)·하세가(長谷家)·코노가(交野家)·이시이가(石井家)가 당상가(堂上家)가 되었다. 또한 지가(地下家)의 나이시마가(生島家)도 이 계통이다.
친신(親信)의 또 다른 손자인 행친(行親)의 계보는 가마쿠라 시대 전기에 평쓰네타카(平経高)를 배출하였으나, 그 후에는 쇠퇴하였다. 이 두 계보는 역사 이야기인 이마가쿄(今鏡)에 "일기의 집(日記の家)"으로 소개되어 있듯이, 많은 고기록을 남겼다.
시추(時忠)는 단노우라 전투 후 노토국(能登国)으로 유배되어 몰락하였으나, 노토국 와지마시(輪島市)의 호농(豪農)인 토키쿠니야(時国家)는 시추(時忠)가 유배지에서 낳은 아들 토키쿠니(時国)의 후예라고 자칭하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덴료(天領) 대장야(庄屋)를 역임하였고, 조토키쿠니(上時国)·게토키쿠니(下時国)의 두 가문으로 나뉘어 있다.
3. 1. 4. 가야 친왕 계통 (賀陽親王流)
賀陽親王|가양 친왕일본어 계통은 58대 고코 천황의 손자인 시키센 왕, 고가 왕 및 다다모치 왕의 자손이다.「고코 천황의 아들 고레타다 친왕의 자손이 '다이라노 아손'을 사성받아 신적강하한 데서 성립된 씨족」을 고코 헤이시로 정의한 문헌도 있지만, 고레타다 친왕의 자손은 이밖에도 미나모토노 야스히사(미나모토노 야스유키의 아들로 할아버지 에이가 왕은 고레타다 친왕의 아들)처럼 '미나모토노 아손'을 사성받아 고코 겐지라 칭한 자도 있어, 정확히는 시키센 왕・고가 왕・다다모치 왕의 자손들을 고코 헤이시로 볼 수 있다.[30] 다이라노 다카무네의 손자인 다이라노 나카키는 고레타다 친왕의 아들 다다모치 왕의 양자가 되어, 혈통으로는 다카모치 왕의 후손이지만 나카키의 자손도 고코 헤이시로 분류된다.[30] 따라서 나카키의 아들인 다이라노 모토나리도 고코 헤이시에 속한다.[30]
3. 2. 닌묘 헤이시 (仁明平氏)
에도 시대에 다이묘(大名)가 된 나가이씨 등이 있다.3. 3. 몬토쿠 헤이시 (文徳平氏)
평번성(平繁盛)의 아들 평유간(平維幹)은 히타치국(常陸国)에 토착했다. 그의 후예로는 타케시(多気氏), 다이죠시(大掾氏), 조시(城氏)(에치고 헤이시(越後平氏)), 이와키시(岩城氏), 헤이씨 니나카시(平姓仁科氏) 등이 있다.[1]3. 4. 고코 헤이시 (光孝平氏)
갈원친왕의 차남 선동왕은 덴초 2년(825년) 고동왕과 함께 사성을 받아 평선동(平善棟)이 되었다. 아우인 고동, 고견 등과는 달리, 기록에 남는 자손은 없다.4. 헤이시의 세력 기반
헤이시는 겐지(源氏), 후지와라 우지(藤原氏), 다치바나 우지(橘氏)와 함께 「겐페이토키쓰(源平藤橘)」(사성四姓)로 불리는 대표적인 가바네(姓) 중 하나이다.
헤이시에는 간무 천황에서 나온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닌묘 천황에서 나온 '''닌묘 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천황에서 나온 '''몬토쿠 헤이시'''(文徳平氏), 고코 천황에서 나온 '''고코 헤이시'''(光孝平氏)의 네 파가 있었다. 하지만 후세까지 남은 대부분은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후손인 간무 헤이시이며, 그 중에서도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후손으로 무가(武家)로서 활약하게 되는 반도 헤이시(坂東平氏)가 널리 알려져 있다. 히타치 헤이시나 헤이시 정권을 세운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씨나 반도 하치 헤이시(坂東八平氏)도 모두 간무 헤이시의 자손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다이라 씨라고 하면 간무 헤이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간무 헤이시에는 다카모치 왕 계통 외에도 요시무네 왕(善棟王) 계통과 다카무네 왕(高棟王) 계통이 있었다. 요시무네 왕의 후손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다카무네 왕의 계통은 구게로서 교토에서 활약했다.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平) 씨는 헤이안 시대(794~1185) 천황들이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자녀와 손자들에게 하사한 명예로운 성씨 중 하나였다.[5] 이 씨족은 궁정이 너무 커지면서 천황이 여러 세대 전의 역대 천황의 후손들을 더 이상 왕자로 인정하지 않고 귀족의 성씨와 품계를 부여하도록 명령하면서 생겨났다. 이 결정은 간무 천황(782~805) 재위 시기에 시행되었고, 따라서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 씨가 탄생하게 되었다.[4]
간무 천황의 손자 중 일부가 825년 이후 처음으로 다이라 성을 받았다. 나중에 닌묘 천황, 몬토쿠 천황과 고코 천황의 후손들도 다이라 성을 받았다. 이러한 천황들의 특정한 세습 계보는 천황의 시호에 헤이시(平氏)를 붙여 표기하는데, 예를 들어 '간무 헤이시'와 같다.[5]
4. 1. 헤이케 (平家)
일본 역사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도고쿠(東國)[31]의 겐지(源氏), 사이고쿠(西國)[32]의 헤이시'라는 말이 통용되지만, 도고쿠(동쪽 지역)에 다이라 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왕임국이 몰려 있던 도고쿠야말로 헤이시 계통 무가들의 기반이었다. 간무 헤이시가 처음 자리잡았던 땅 도고쿠는 자연스럽게 무가 헤이시의 본거지가 되었다. 즉, 반도 헤이시 일족 중에서 중앙 조정에 세력을 뻗쳐 사이고쿠(서쪽 지역)에까지 헤이시 세력이 퍼져갔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간무 헤이시는 도고쿠의 친왕임국이었던 히타치국, 가즈사국, 시모쓰케국을 지배하며 사유화하였고, 이를 통해 헤이안 시대 말기의 헤이시, 즉 헤이케(平家) 대두의 기반을 쌓았다. 저명한 무가 헤이시 출신으로는 가즈사노스케(上總介)를 지냈던 다이라노 다카모치, 간토 지방에서 독립 정권 수립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시모우사국의 다이라노 마사카도, 마사카도를 진압한 히타치국의 다이라노 사다모리 등이 있다. 후대에 헤이시 정권을 세우며 중앙 정계에 등장한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사다모리의 넷째 아들 고레히라의 자손이 이세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 헤이시 정권을 무너트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지지한 싯켄 호조 씨나 반도 하치헤이 씨(坂東八平氏)[33]도 반도에 토착했던 다카모치 왕의 후손 간무 헤이시의 자손들이다. 이 때의 겐페이 전쟁을 '겐지와 헤이시'라고 하지 않고 '겐지와 헤이케'[34]라고 불러서 구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호조 씨나 반도 하치헤이시 등 도고쿠 무가 헤이시는 대부분 겐지 일문과 후지와라 씨 일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각 세력에 공순하여 가신이 되거나, 저항하여 토벌당하는 등 도고쿠 지방에서 화려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본의 서쪽 지역을 제패하고 중앙 정권을 좌우하였다. 이에 맞서 가와치 겐지의 일파인 반도 겐지(坂東源氏)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를 물리치고 도고쿠 땅에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을 도와 반도 겐지의 닛타 요시사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도 헤이시인 호조 씨가 장악한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중앙집권 체제(겐무 신정) 수립에 크게 공헌했다.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가 모두 반도 겐지의 정권이었던 점이 '도고쿠의 겐지, 사이고쿠의 헤이시'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본에서 세이이타이쇼군을 둘러싸고 겐페이(源平)가 다툰다는 사상처럼 속설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가 헤이시의 총칭으로서 다이라 씨의 이름을 떨친 것은 이세 헤이시 등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이세 헤이시의 방류로서, 이른바 '헤이시 정권'을 수립한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그 일족을 특히 구별해 '헤이케'(平家)라고 부른다. 다만 '헤이케'라는 말은 본래 수많은 헤이시 가운데서도 특정 집안 또는 집단을 가리킨 말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간무 헤이시 가운데서도 '무가' 이세 헤이시가 속한 다카모치 왕의 후손이 아니라 수도인 교토에서 문관으로서 활약하고 있던 다카무네 왕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단쇼江談抄》). 또한 헤이시 정권기에 접어 들어서도 기요모리의 일족 뿐 아니라 그들을 섬겼던 케닌(家人) · 가신들을 포함한 군사 · 정치 집단을 가리키는 용법으로도 쓰였다. 이 경우의 '헤이케'에는 다이라 씨뿐 아니라 기요모리를 따랐던 후지와라 씨나 겐지의 무사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래의 '헤이케'인 다카무네 왕의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단노우라 전투 이후로도 '헤이케'는 존속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겐지는 '미나모토'라는 성을 자칭한 일족이 대부분이고 조정에서 문관으로서 활약했던 겐케(源家)도 많았기에, 통상 그들까지 모두 아우른다는 의미로 '겐지'라고 불렀고 '겐케'라는 단어는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또한 다이라 씨는 미나모토 씨와 마찬가지로 천황의 계승권이 없는 자녀들에 대한 처우로서의 사성(賜姓)이지만, 천황의 손자 이하의 대에게도 다이라 씨를 내린 경우가 많아서 미나모토 씨보다 격이 낮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平) 씨는 헤이안 시대(794~1185) 천황들이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자녀와 손자들에게 하사한 명예로운 성씨 중 하나였다.[5] 이 씨족은 궁정이 너무 커지면서 천황이 여러 세대 전의 역대 천황의 후손들을 더 이상 왕자로 인정하지 않고 귀족의 성씨와 품계를 부여하도록 명령하면서 생겨났다. 이 결정은 간무 천황(782~805) 재위 시기에 시행되었고, 따라서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 씨가 탄생하게 되었다.[4]
간무 천황의 손자 중 일부가 825년 이후 처음으로 다이라 성을 받았다. 나중에 닌묘 천황, 몬토쿠 천황과 고코 천황의 후손들도 다이라 성을 받았다. 이러한 천황들의 특정한 세습 계보는 천황의 시호에 헤이시(平氏)를 붙여 표기하는데, 예를 들어 '간무 헤이시'와 같다.[5]
간무 헤이시 계보에는 두 개의 주요 가지가 있다. 하나는 889년에 다이라노 타카모치(50대 간무 천황(781~806 재위)의 증손자)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동안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계보임이 증명되었다.[6] 타카모치의 증손자인 다이라노 코레히라는 이세 국(현재 미에현의 일부)으로 이주하여 중요한 다이묘 가문을 세웠다.[7] 그의 손자인 마사모리와 증손자인 타다모리는 각각 시라카와 천황과 토바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 후에 타다모리의 아들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을 세웠다.[8]
타다모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1156)과 헤이지의 난(1160)에서 승리한 후 다이조다이진(태정대신)의 지위에 올랐다.[8] 기요모리는 1180년 자신의 손자를 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는데, 이는 겐페이 전쟁(겐페이의 난, 1180~1185)으로 이어졌다. 간무 헤이시 혈통의 마지막 지도자는 결국 겐페이 전쟁의 최후 결전인 단노우라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이 이야기는 헤이케 이야기에 나온다.[9]
간무 헤이시의 이 가지에는 호조, 치바, 미우라, 하타케야마 등 많은 분가가 있었다.[10][7]
간무 헤이시의 또 다른 주요 가지는 가즈라하라 황태자의 장남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인 타카무네왕(804~867)이 825년에 다이라노 아손의 칭호를 받으면서 창시되었다.[11][7] 이 가지의 구성원들은 교토 궁정의 중류 쿠게로 일했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 시대의 오다 씨도 다이라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들은 다이라노 시게모리(1138~1179)의 손자인 다이라노 치카자네의 후손이었다.[12] 桓武天皇의 제12황자 仲野親王(나카노 친왕)의 계보이다. 仲野親王의 아들인 茂世王(시게요 왕), 利世王(토시요 왕), 惟世王(유키요 왕) 등이 평조신(平朝臣)의 성을 받고 신적(臣籍)에 내려옴으로써 형성된 씨족이다.
4. 2. 겐페이 전쟁 (源平合戦)
일본 역사를 논할 때 흔히 '도고쿠(東國)[31]의 겐지(源氏), 사이고쿠(西國)[32]의 헤이시'라는 말이 통용되지만, 도고쿠에 다이라 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왕임국이 몰려 있던 도고쿠야말로 헤이시 계통 무가들의 기반이었다. 간무 헤이시가 처음 자리잡았던 도고쿠는 자연스럽게 무가 헤이시의 본거지가 되었다. 즉, 반도 헤이시 일족 중에서 중앙 조정에 세력을 뻗쳐 사이고쿠에까지 헤이시 세력이 퍼져갔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간무 헤이시는 도고쿠의 친왕임국이었던 히타치국·가즈사국·시모쓰케국을 지배하며 사유화하였고, 이를 통해 헤이안 시대 말기 헤이시-헤이케(平家) 대두의 기반을 쌓았다. 저명한 무가 헤이시 출신으로는 가즈사노스케(上總介)를 지냈던 다이라노 다카모치(平高望), 간토 지방에서 독립 정권 수립을 시도했다 실패한 시모우사국의 다이라노 마사카도, 마사카도를 진압한 히타치국의 다이라노 사다모리 등이 알려져 있다. 후대에 헤이시 정권을 세운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조도 사다모리의 넷째 아들 고레히라의 자손이 이세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 헤이시 정권을 무너뜨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지지한 싯켄 호조 씨나 반도 하치헤이 씨(坂東八平氏)[33]도 마찬가지로 반도에 토착했던 다카모치 왕의 후손 간무 헤이시의 자손들이다. 이때의 겐페이 전쟁을 '겐지와 헤이시'라고 하지 않고 '겐지와 헤이케'[34]라고 불러서 구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호조 씨나 반도 하치헤이시 등 도고쿠 무가 헤이시는 대부분 겐지 일문과 후지와라 씨 일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각 세력에 공순하여 가신이 되거나, 저항하여 토벌당하는 등 도고쿠 지방에서 화려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본의 서쪽 지역을 제패하고 중앙 정권을 좌우하였다. 이에 맞서 가와치 겐지의 일파인 반도 겐지(坂東源氏)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시를 물리치고 도고쿠 땅에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더욱이 고다이고 천황을 도와 반도 겐지의 닛타 요시사다·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도 헤이시인 호조 씨가 장악한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중앙집권 체제(겐무 신정) 수립에 크게 공헌했다. 나아가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가 모두 반도 겐지의 정권(굳이 따지면 에도 막부는 반도 겐지인 것처럼 족보를 위조한 것이지만)이었던 점이 '도고쿠의 겐지, 사이고쿠의 헤이시'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본에서 세이이타이쇼군을 둘러싸고 겐페이(源平)가 다툰다는 사상처럼 속설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平) 씨는 헤이안 시대(794~1185) 천황들이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자녀와 손자들에게 하사한 명예로운 성씨 중 하나였다.[5]
이 씨족은 궁정이 너무 커지면서 천황이 여러 세대 전의 역대 천황의 후손들을 더 이상 왕자로 인정하지 않고 귀족의 성씨와 품계를 부여하도록 명령하면서 생겨났다. 이 결정은 간무 천황(782~805) 재위 시기에 시행되었고, 따라서 미나모토 씨와 함께 다이라 씨가 탄생하게 되었다.[4]
간무 천황의 손자 중 일부가 825년 이후 처음으로 다이라 성을 받았다. 나중에 닌묘 천황, 몬토쿠 천황과 고코 천황의 후손들도 다이라 성을 받았다. 이러한 천황들의 특정한 세습 계보는 천황의 시호에 헤이시(平氏)를 붙여 표기하는데, 예를 들어 '간무 헤이시'와 같다.[5]
간무 헤이시 계보에는 두 개의 주요 가지가 있다. 하나는 889년에 다이라노 타카모치(50대 간무 천황(781~806 재위)의 증손자)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동안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계보임이 증명되었다.[6] 타카모치의 증손자인 다이라노 코레히라는 이세 국(현재 미에현의 일부)으로 이주하여 중요한 다이묘 가문을 세웠다.[7] 그의 손자인 마사모리와 증손자인 타다모리는 각각 시라카와 천황과 토바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 후에 타다모리의 아들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을 세웠다.[8]
타다모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1156)과 헤이지의 난(1160)에서 승리한 후 다이조다이진(태정대신)의 지위에 올랐다.[8] 기요모리는 1180년 자신의 손자를 안토쿠 천황으로 즉위시켰는데, 이는 겐페이 전쟁(1180~1185)으로 이어졌다. 간무 헤이시 혈통의 마지막 지도자는 결국 겐페이 전쟁의 최후 결전인 단노우라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군대에 의해 멸망했다. 이 이야기는 헤이케 이야기에 나온다.[9]
간무 헤이시의 이 가지에는 호조, 치바, 미우라, 하타케야마 등 많은 분가가 있었다.[10][7]
간무 헤이시의 또 다른 주요 가지는 가즈라하라 황태자의 장남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인 타카무네왕(804~867)이 825년에 다이라노 아손의 칭호를 받으면서 창시되었다.[11][7] 이 가지의 구성원들은 교토 궁정의 중류 쿠게로 일했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 시대의 오다 씨도 다이라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들은 다이라노 시게모리(1138~1179)의 손자인 다이라노 치카자네의 후손이었다.[12]
헤이지의 난(1160년) 당시,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지도자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상황제 시라카와 천황과 토바 천황과 동맹을 맺고 교토에서 권력을 잡았다. 기요모리는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 요리토모(1147~1199)를 유배 보냈다. 1180년, 요리토모는 다이라 정권에 대한 대규모 반란(겐페이 전쟁(源平合戦) 또는 다이라-미나모토 전쟁)을 조직했고, 5년 만에 미나모토 씨에 의한 다이라 씨의 멸망과 동일본의 평정으로 끝을 맺었다.[13]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쇼군(将軍)이라는 칭호를 받고 가마쿠라(가나가와현)에 첫 막부를 설립했다.[14]
5. 다이라 씨와 관련된 인물
간무 헤이시(桓武平氏)는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후손으로,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후손인 반도 헤이시(坂東平氏)가 무가(武家)로서 활약하며 알려졌다. 헤이시 정권을 세운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씨 등이 이에 속한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마사카도(903–940)
- 기요모리(1118–1181): 헤이시 정권을 세움.
- 시게모리(1138–1179)
- 다다노리(1144–1184)
- 무네모리(1147–1185)
- 도모모리(1152–1185)
- 시게히라(1158–1185)
- 다카키요(1173–1199)
이 외에도 닌묘 천황에서 나온 '''닌묘 헤이시'''(仁明平氏), 몬토쿠 천황에서 나온 '''몬토쿠 헤이시'''(文徳平氏), 고코 천황에서 나온 '''고코 헤이시'''(光孝平氏)가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 시대의 오다 씨도 다이라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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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기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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