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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릉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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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혜릉은 조선의 세자빈으로, 본관은 청송 심씨이며,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1718년 2월 7일 병으로 사망했다. 숙종은 단의(端懿)라는 시호를 내리고 단의빈으로 삼았으며, 현종의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했다. 경종 즉위 후 혜릉이라는 능호와 단의왕후로 추봉되었으며, 한국전쟁으로 훼손된 홍살문과 정자각은 1995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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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릉 (조선)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구리 동구릉
혜릉
혜릉 惠陵
유형대한민국의 사적
지정 번호193
지정일1970년 5월 26일
주소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시대조선 1718년
참고단의왕후
문화재청 ID13,01930000,31
꼬리표혜릉(惠陵)

2. 생애

단의왕후 심씨는 1686년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태어나, 1696년 11세의 나이에 세자 윤(경종)의 빈으로 간택되었다.[1] 그러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 병을 얻어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났다.[1] 사후 숙종에 의해 '단의빈'(端懿嬪)으로 추서되었고,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혜릉'(惠陵)이라는 능호와 함께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2] 세자빈 시절 소생 없이 사망하였기에 남편인 경종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홀로 혜릉에 안장되었다.[2]

2. 1. 출생과 가계

단의왕후 심씨는 숙종 12년인 1686년 5월 21일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태어났다. 숙종 22년인 1696년에는 11세의 나이로 당시 세자였던 윤(경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1] 세자 윤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2. 2. 세자빈 간택

단의왕후 심씨는 숙종 12년인 1686년 5월 21일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태어났다. 이후 숙종 22년인 1696년, 11세의 나이로 당시 세자였던 윤(昀, 훗날 경종)의 빈으로 간택되었다.

2. 3. 사망

단의왕후 심씨는 1696년 11세의 나이로 세자 윤(경종)의 빈으로 간택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 2월 7일 (숙종 44년) 병을 얻어 소생 없이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1] 당시 나이는 33세였다.

사망 직후 숙종은 《단의》(端懿)라는 시호를 내리고 《단의빈》으로 삼았다. 1718년 4월 16일 발인하여, 4월 19일 현종의 능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능을 조성하는 데에는 각 도에서 동원된 승군 1,000명이 투입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혜릉》(惠陵)이라는 능호와 《영휘》(永徽)라는 전호를 받고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세자빈 시절 소생 없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남편인 경종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홀로 혜릉에 안장되었다.[2]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함께 묻혀 있다.

3. 사후

단의왕후 심씨는 숙종 44년인 1718년 2월 7일 세자빈의 신분으로 소생 없이 훙서하였다.[1] 사후 숙종에 의해 《단의빈》(端懿嬪)으로 추서되었고, 1718년 4월 19일 현종의 능인 숭릉 인근에 안장되었다. 이후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로 추봉되고 능호는 혜릉(惠陵)으로 정해졌다. 세자빈 시절 소생 없이 승하하였기에 경종과 합장되지 못하고 홀로 혜릉에 모셔졌다.[2] 혜릉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홍살문과 정자각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1995년 복원 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3. 1. 추숭

1718년 숙종은 세자빈 심씨가 2월 7일에 사망하자[1] 《단의》(端懿)라는 시호를 내리고 《단의빈》(端懿嬪)으로 추서하였다. 능을 조성하는 산역(山役)에는 각 도에서 승군(僧軍) 1,000명을 동원하였으며, 같은 해 4월 16일 발인하여 19일에 현종의 능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한 후, 단의빈은 단의왕후로 추봉되었고, 능호는 혜릉(惠陵), 전호(殿號)는 영휘(永徽)로 정해졌다.

3. 2. 혜릉 조성

1718년 2월 7일, 경종의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 심씨가 소생 없이 훙서하자[1], 숙종은 '단의'(端懿)라는 시호를 내리고 '단의빈'으로 삼았다. 능을 조성하는 산역에는 각 도에서 동원된 승군 1,000명이 투입되었다. 같은 해 4월 16일에 발인하여 4월 19일, 현종의 능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면서 단의빈은 단의왕후로 추봉되었고, 능호는 혜릉(惠陵), 전호는 영휘(永徽)로 정해졌다.

세자빈 시절 소생 없이 승하하였기 때문에 남편인 경종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혜릉에 홀로 모셔지게 되었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함께 묻혀 있다.[2]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타 주춧돌만 남았으나, 1995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3. 3. 혜릉의 근현대사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혜릉의 홍살문과 정자각이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의 상흔으로 남아있던 혜릉은 1995년에 이르러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오늘날과 같이 왕릉으로서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참조

[1] 문서 단의왕후
[2] 웹인용 능이야기, 단의왕후 심씨 http://donggu.cha.go[...] 문화재청 200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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