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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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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국경은 미성년, 부재, 정신 질환 등으로 인해 국정을 수행할 수 없는 군주를 대신하여 통치하는 왕자나 귀족에게 사용된 칭호이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6세, 에드워드 5세, 에드워드 6세 시기에 호국경이 임명되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5세와 메리 여왕을 위해 호국경이 임명되었다. 1653년에는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임명되어 군사 독재를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뒤를 이었으나 1660년 왕정 복고로 호국경 칭호는 폐지되었다. 이후 '호국경'은 세속 군주가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에도 사용되었으며, 대중문화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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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경
기본 정보
로버트 워커의 올리버 크롬웰 초상화
로버트 워커의 올리버 크롬웰 초상화
직책호국경
원어 명칭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존칭전하
관저화이트홀 궁전
임기 방식임명
세습 (헌법 개정 후)
설치일1653년 12월 16일
폐지일1659년 5월 25일
역대 호국경
초대올리버 크롬웰
마지막리처드 크롬웰
역사
수립1653년 12월 16일
폐지1659년 5월 25일

2. 역사적 배경

"호국경"이라는 칭호는 국왕이 섭정 위원회 역할을 수행하면서, 미성년, 십자군 원정 등으로 인해 국정을 수행할 수 없을 때, 국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왕자나 귀족에게 사용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이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6세 시기에 베드포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공동으로, 요크 공작 리처드가 세 번,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 시기에,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에드워드 6세 시기에 호국경을 역임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가 제임스 5세를 위해,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이 메리 여왕을 위해 "왕국의 총독 겸 호국경"을 역임했다.

2. 1. 잉글랜드

베드포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헨리 6세를 위해 1422년 12월 5일부터 1429년 11월 6일까지 공동으로 호국경을 역임했다.[3]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는 헨리 6세의 호국경을 세 차례 역임했다. (1454년 4월 3일 – 1455년 2월; 1455년 11월 19일 – 1456년 2월 25일; 1460년 10월 31일 – 1460년 12월 30일)[3]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5세 (타워의 왕자 중 한 명)의 명목상 통치 기간(1483년 5월 10일 – 1483년 6월 26일) 동안 "왕국의 호국경"이었으며, 이후 리처드 3세로 왕위를 제안받았다.[3]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어린 에드워드 6세 통치 초기(1547년 2월 4일 – 1549년 10월 11일)에 호국경을 역임했다.[3]

최초의 호국경인 베드퍼드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 형제는 조카 헨리 6세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1422년에 임명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의 성과로 1420년에 체결된 트루아 조약으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을 겸임하여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이 탄생했고, 베드퍼드 공작은 프랑스를, 글로스터 공작은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로스터 공작은 제후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권력을 제한받았고, 외적과 내란으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임무만을 부여받아 성직 귀족 2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조언을 받아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글로스터 공작은 종종 숙부인 헨리 보퍼트 추기경과 대립했다. 1429년, 헨리 6세의 대관식 거행에 따라 호국경은 폐지되었다.[4]

두 번째 호국경은 1454년, 헨리 6세의 먼 친척인 요크 가문 출신의 요크 공작 리처드가 임명되었다. 헨리 6세는 1453년에 발광하여 통치 불능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요청으로 요크 공작이 취임하여 세력 확대를 꾀했지만,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자 측근인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권세를 떨치면서 요크 공작은 1455년에 호국경에서 해임되어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요크 공작은 반격에 나서 장미 전쟁 첫 번째 전투인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서머셋 공작을 물리치고, 헨리 6세가 다시 발광했기 때문에 호국경으로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서머셋 공작을 대신하여 궁정을 장악한 왕비 마거릿 오브 앙주가 새로운 적대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1456년에 요크 공작은 또다시 호국경 자리에서 물러났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대립으로 장미 전쟁이 격화되었다.[5]

1460년 7월 노샘프턴 전투에서 헨리 6세를 사로잡은 요크 공작은 10월 의회에서 왕위를 요구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고, 대신 헨리 6세 사후 왕위 계승을 약속받아 타협하여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세 번째 호국경이 되어 강력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거릿의 저항을 뿌리뽑기 위해 북쪽으로 향한 요크 공작은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했다.[6]

세 번째는 1483년, 요크 공작의 아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형 에드워드 4세로부터 조카 에드워드 5세의 후견을 위임받아 호국경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강압적인 세력 확대로 희생된 유력 귀족층의 지지를 얻은 글로스터 공작은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잉글랜드 왕 리처드 3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호국경은 단기간에 끝났다.[7]

네 번째 호국경은 튜더 왕조의 에드워드 6세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외삼촌인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1547년에 취임하여 서머셋 공작으로도 서임되었다. 서머셋 공작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추진하여 다양한 정책을 펼쳐 프로테스탄트화를 지원했지만, 외교와 농민 반란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고, 그 틈을 타 정적인 워릭 백작 (나중에는 노섬벌랜드 공) 존 더들리에게 실각당하여 1549년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1552년 처형되었다. 이후 호국경은 청교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설치되지 않았다.[8]

2. 2. 스코틀랜드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는 제임스 5세를 위해 "왕국의 총독 겸 호국경" (1515년 7월 12일 – 1524년 11월 16일)을 역임했다.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은 메리 여왕을 위해 "왕국의 총독 겸 호국경" (1543년 1월 3일 – 1554년 4월 12일)을 역임했다.

3. 크롬웰 가문의 통치 (공화정 시대)

청교도 혁명 이후 1653년 잉글랜드는 공화국이 되었고, 올리버 크롬웰이 종신 호국경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성문 헌법인 '통치 장전'에 의해 국가 원수의 지위가 규정된 사례였다. 호국경의 직무 권한은 통치 장전에 의해 정해져 있었지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3개국을 의회와 공동 통치, 입법·행정을 의회와 공유해야 했고, 의회 폐회 중에는 국무회의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국무회의는 크롬웰의 자문 기관이었으며,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규정이 많아, 실제로는 호국경의 권한이 강했다. 중산 계급은 호국경의 지지층이었지만, 왕당파나 평등파 등 다른 파벌은 반대파였다.[10]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군정을 실시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통치했으나, 그의 사후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직을 계승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군부와의 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임했다.

호국경의 지위는 전 국왕을 처형하고서라도 폐지했을 터인 군주의 지위와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었고, 군주의 전권 사항이었던 기사 작위 서임 등도 종전 그대로 호국경이 행하게 되었다. 호국경의 국가 원수로서의 정식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By the Grace of God and Republic Lord Protector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영어''

:(신의 은총과 공화국의 은총에 의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호국경)

1659년 리처드 크롬웰의 사임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부하들이었던 자들과 의회 사이에 세력 다툼이 벌어져 정국이 공전되었다. 1660년 5월 29일에는 찰스 1세의 아들이 망명지에서 귀국, 런던에서 찰스 2세로 즉위하여, 잉글랜드는 왕정 복고를 실현했다.[13]

크롬웰 부자 이후, "호국경" 칭호는 이 두 사람과 불가분한 것이 되었고, 불명예스러운 공화제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 "호국경" 칭호는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호국경생존 기간임기 시작임기 종료
올리버 크롬웰1653년 12월 16일1658년 9월 3일 (사망)
리처드 크롬웰1658년 9월 3일1659년 5월 25일 (사임)



프로텍토레이트 시대 잉글랜드의 문장

3. 1. 올리버 크롬웰 (1653-1658)

1654년,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권력을 잡은 군인 올리버 크롬웰을 대신하여 섭정을 명분으로 군사독재를 시작하였다. 호국경이 된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숙청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1]

1653년 영국 최초의 성문 헌법인 통치 장전은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부재가 된 국가 원수의 지위를 "호국경"(Lord Protector영어)으로 정하고, 12월 16일 상비군인 뉴 모델 군 사령관이자 독립파 정치인인 올리버 크롬웰을 종신 임기의 호국경으로 임명했다.[9]

크롬웰은 호국경에 취임하자 1654년 9월 3일에 제1의회를 열었지만, 정부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의회가 비판을 계속했기 때문에 1655년 1월 22일에 해산하고, 8월에 군정감을 설치하여 호국경을 사실상의 독재자로 하는 군사 정권을 확립했다. 1656년 9월 17일 제2의회를 소집, 1657년 1월 군정감이 폐지되자 사회 안정을 중시하여 군사 정권에서 왕정으로 회귀로 생각을 바꾸고, 5월 25일에 통치 장전을 대신하는 겸손한 청원과 권고 제정을 받아들였다. 크롬웰은 왕은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권력(후계자 지명권 등)을 얻었고, 상원과 추밀원의 부활과 하원의 권력 강화도 이루어져 호국경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체제와 사회의 안정이 도모되었다.[11]

하지만 정국은 안정되지 않고, 1658년 2월 4일에 크롬웰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했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9월 3일에 크롬웰이 병사하였다.[12]

호국경생존 기간임기 시작임기 종료
올리버 크롬웰1653년 12월 16일1658년 9월 3일 (사망)


3. 2. 리처드 크롬웰 (1658-1659)

1658년 9월, 아버지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리처드 크롬웰은 제2대 호국경으로 즉위하여 아버지를 계승했다.[1]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 경험과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다.[1]

겸손한 청원과 조언[1]에 따라 호국경에게는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이 주어졌고, 올리버 크롬웰은 장남 리처드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이는 사실상 왕조적인 계승 방식이었다.[1]

리처드 크롬웰은 1659년 1월 27일에 제3의회를 소집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4월 22일에 해산해야 했다. 5월 7일 군이 램프 의회를 소집하여 부활시키자, 정권 유지를 포기한 리처드는 취임 8개월 만인 5월 25일에 호국경 직을 사임했다.[13] 그의 사임으로 잉글랜드 공화정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1660년 왕정복고로 이어졌다.[13]

4. 크롬웰 이후

1658년 9월 아버지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직위를 계승했으나, 1659년 5월에 사임했다.[1] 이후 망명 중이던 찰스 2세가 1660년 5월 왕정복고를 할 때까지 두 번째 연방 통치 기간이 이어졌다.

리처드는 아버지의 만년에 흔들리기 시작한 공화제를 바로잡기 위해 군과 대립하면서도 1659년 1월 27일 제3의회를 소집했지만, 군의 압력으로 4월 22일 해산해야 했다.[12] 5월 7일 군이 램프 의회를 소집하여 부활시키자, 정권 유지를 포기한 리처드는 취임 8개월 만인 5월 25일 호국경 직에서 물러났다.[13] 종신직이었던 호국경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임하면서 잉글랜드 공화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부하였던 이들과 의회 간의 권력 다툼으로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망명지에서 귀국하여 런던에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왕정복고를 맞이했다.[13]

왕정복고 이후 "호국경" 칭호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1811년 섭정으로 임명된 웨일스 공 조지는 "섭정공"으로 불렸다. 조지는 다른 섭정들과 마찬가지로 군주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호국경" 칭호는 공화주의와의 연관성 때문에 기피되었다.

크롬웰 부자 이후 "호국경" 칭호는 이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는 또한 불명예스러운 공화정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서 "호국경" 칭호는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5. 기타 용례

'호국경'은 주로 세속적인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세속 군주(예: 군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Advocatus''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프랑스 칭호인 비담과 비교할 수 있다.

6. 대중문화에서의 호국경

메리 셸리의 소설 《최후의 인간》에서 영국은 국가 원수가 호국경으로 불리는 공화국이 된다. 이 칭호는 레이몬드 경과 라일랜드가 받는다. 1987년 텔레비전 시리즈 《뉴 스테이츠맨》 마지막 에피소드 "앨런 B'스타드의 저항할 수 없는 부상"에서, B'스타드의 신 애국당이 유럽 경제 공동체 회원 자격을 놓고 치러진 특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본인은 의석을 놓고 경쟁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의회 밖의 총리로 봉사하는 것이 허용되기 전에 잠시 호국경이라는 칭호를 채택하는 것을 고려했다.

2008년 C. S. 루이스의 《캐스피언 왕자》의 영화 각색에서, 적대자 미라즈는 소설과는 달리 왕으로 선포되기 전에 나니아의 호국경으로 시작한다. 2020년 영화 《울프워커스》에서, 호국경은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

참조

[1] 백과사전 Instrument of Government
[2] 웹사이트 The Cromwell Museum - Lord Protector Cromwell https://www.cromwell[...] 2023-05-17
[3] 서적 (제목 정보 없음)
[4] 서적 (제목 정보 없음)
[5] 서적 (제목 정보 없음)
[6] 서적 (제목 정보 없음)
[7] 서적 (제목 정보 없음)
[8] 서적 (제목 정보 없음)
[9]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0]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1]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2] 서적 (제목 정보 없음)
[13] 서적 (제목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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