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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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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뢰관은 중국 허난성에 위치한 요새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춘추 시대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 여러 시대에 걸쳐 중요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특히 삼국지연의에서 반동탁 연합군과 동탁 군대의 전투 장소로 묘사되어 널리 알려졌다. 당나라 시대에는 관문으로 사용되었으며, 당 태종 이세민이 왕세충과 두건덕을 토벌하는 호뢰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연의 조상 이름과 같은 글자가 사용되어 무뢰관으로 개명되기도 했다. 현재는 삼의묘, 장비채 등 관광 명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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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뢰관
위치 정보
위치중국 허난성 싱양시
산맥숭산
일반 정보
이름호뢰관
중국어 간체虎牢关
중국어 정체虎牢關
영어Hulao Pass
다른 이름무뢰관
사수관
로마자 표기병음: Hǔláo Guān
통과 도로
도로 정보
허난성 지방도 S315

2. 역사

호뢰관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다. 현재 이곳의 주요 관광지로는 삼의묘(三義廟), 장비채(張飛寨), 화웅령(華雄嶺), 옥문고도(玉門古渡) 등이 있다.

2. 1. 고대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기원전 673년에 주나라 혜왕정나라 여공에게 과거 무공이 다스리던 호뢰(虎牢) 동쪽을 주었다고 한다. 100여 년 뒤인 기원전 571년 노나라 맹헌자가 호뢰에 성을 쌓아 정나라를 견제하자는 제안을 양공이 받아들여 그해 겨울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백극단우언(鄭伯克段于鄢)>에 의하면 무강이 공숙단을 위해 장공에게 '제(制)' 지역을 하사해 주기를 요청했다가 험준한 지세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는데, '제' 지역이 호뢰이다.

2. 2. 삼국시대

삼국지연의》에서는 190년 후한의 조정을 장악한 권신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결성된 반동탁 연합군이 처음으로 동탁의 군대와 싸운 곳으로 등장하며, 관우화웅의 목을 벤 사수관 전투와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여포를 퇴각시킨 호뢰관 전투가 발생하였다.[1] 하지만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실제로 화웅의 목을 벤 것은 손견이다.[1] 또한 전투가 발생한 지역도 호뢰관이 아닌 양인에서 발생한 양인 전투이며, 사수관과 호뢰관은 동일한 지역이다.[1]

이 당시에는 관문이 아닌 요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

2. 3. 당나라 시대

신당서》에 호뢰관이 관문으로 이용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등장한다. 수말당초(隋末唐初) 시기에 당나라 이세민왕세충두건덕을 토벌한 호뢰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으며, 당나라 초대 황제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의 휘(諱)인 '호'와 호뢰관의 '호' 글자가 같아 피휘를 위해 호뢰관을 '''무뢰관'''으로 개명하기도 하였다.

3. 현대

현재 호뢰관은 역사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를 기리는 삼의묘(三義廟), 장비채(張飛寨), 화웅령(華雄嶺), 옥문고도(玉門古渡) 등이 있다.

4. 기타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호뢰관은 기원전 673년 주나라(周) 혜왕(惠王)이 정나라(鄭) 여공(厲公)에게 하사한 땅이며, 100여 년 뒤 노나라(魯)의 맹헌자(孟獻子)가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동탁(董卓)의 군대와 처음으로 싸운 곳으로 등장한다.[1] 수말당초(隋末唐初) 시기에는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을 토벌한 호뢰 전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1]

현재 호뢰관의 주요 관광지로는 삼의묘(三義廟), 장비채(張飛寨), 화웅령(華雄嶺), 옥문고도(玉門古渡) 등이 있다.[1] 당나라피휘를 위해 '''무뢰관'''()으로 개명하기도 하였다.

삼국지연의》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고전 소설이며, 호뢰관은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역사적 장소로 인식된다.

4. 1. 대중문화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호뢰관은 기원전 673년 주나라(周) 혜왕(惠王)이 정나라(鄭) 여공(厲公)에게 하사한 땅이며, 100여 년 뒤 노나라(魯)의 맹헌자(孟獻子)가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190년 반동탁 연합군이 동탁(董卓)의 군대와 처음으로 싸운 곳으로 등장한다. 특히 관우(關羽)가 화웅(華雄)의 목을 벤 사수관 전투와 유비(劉備) · 관우(關羽) · 장비(張飛) 삼형제가 여포(呂布)를 퇴각시킨 호뢰관 전투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1] 하지만 이는 소설 속 창작으로, 실제 화웅을 벤 것은 손견(孫堅)이며, 전투는 양인에서 발생한 양인 전투이다.[1]

수말당초(隋末唐初) 시기에는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을 토벌한 호뢰 전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1]

현재 호뢰관의 주요 관광지로는 삼의묘(三義廟), 장비채(張飛寨), 화웅령(華雄嶺), 옥문고도(玉門古渡) 등이 있다.[1]

4. 2. 한국과의 관계

당나라피휘를 위해 '''무뢰관'''()으로 개명하기도 하였다.

삼국지연의》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고전 소설이며, 호뢰관은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역사적 장소로 인식된다. 소설에서는 190년 후한의 조정을 장악한 권신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결성된 반동탁 연합군이 처음으로 동탁의 군대와 싸운 곳으로 등장하며, 관우화웅의 목을 벤 사수관 전투와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여포를 퇴각시킨 호뢰관 전투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실제로 화웅의 목을 벤 것은 손견이다. 또한 전투가 발생한 지역도 호뢰관이 아닌 양인 전투이며, 사수관과 호뢰관은 동일한 지역이다.[1]

참조

[1] 서적 穆天子伝
[2] 서적 春秋左氏伝
[3] 서적 新唐書
[4] 서적 新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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