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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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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카와 용수는 1663년 후쿠오카 번에 의해 건설된 일본의 관개 시설로, 11km의 주 용수로와 77km의 지선 용수로를 갖추고 있다. 아사쿠라 지역의 가뭄과 홍수 피해를 해결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야마다 제방, 아사쿠라 양수차 등 관련 시설과 함께 곡창 지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야마다 제방은 독특한 구조로 인해 기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아프가니스탄 농지 개발 사업에 영감을 주었으며, 나카무라 테츠 의사의 페샤와르회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관개 용수 모델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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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카와 용수
지도
기본 정보
원어 명칭
개요
위치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 일본
지역규슈
유형용수로
지정일본 국가 지정 사적
수리 시설 정보
길이본선: 11km
전체 길이지류 포함: 약 88km
관개 면적664
취수원지쿠고강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 야마다의 야마다 댐)
합류 지점지쿠고강 (남쪽 물길,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 나카)
역사
시대에도 시대
건설에도 시대
폐지없음
관리 및 접근
일반 공개
추가 정보
기타 지정국가 지정 사적

2. 역사적 배경

호리카와 용수는 일본 에도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1663년(간분 3년)에 후쿠오카번의 무사 기무라 쵸헤이(木村忠兵衛)와 우오즈미 고로에몬(魚住五郎右衛門)에 의해 착공되어 이듬해 준공된 관개 수로이다.[4][5] 당시 에도 막부의 신전 개발 정책에 따라, 잦은 가뭄홍수로 어려움을 겪던 아사쿠라 지역을 안정적인 곡창 지대로 만들기 위해 건설되었다.[3][8][6][10][11]

초기 취수구는 현재의 야마다 제방보다 하류에 있었으나, 1722년(교호 7년) 토사 퇴적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재 위치로 옮겨지며 암반을 깎아 만든 '기리누키 스이몬'(切抜水門, 절관 수문)이 설치되었다.[11][3][8][12] 이후 1764년(메이와 원년)에는 고가 쥬사쿠 요시시게(古賀十作義功, 코가 햨코)에 의해 기존 용수로(북선)가 확장되고 새로운 수로인 '신호리카와'(新堀川, 남선)가 건설되어 관개 면적이 크게 늘어났다.[6] 또한, 1790년(간세이 2년)에는 고가 효고(古賀百工)가 주도하여 치쿠고강에 현재의 야마다 제방을 건설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물 공급이 가능해졌다.[3][6][10]

호리카와 용수와 야마다 제방은 오랜 역사와 독특한 기술을 인정받아 여러 문화유산으로 지정 및 선정되었다.


  • 국가 사적: 1990년 "'''호리카와 용수 및 아사쿠라 양수차'''"로 지정[8]
  • 수리백선: 2006년 "'''호리카와 용수'''" 선정 (농림수산성)[4][5]
  • 토목 학회 선정 토목 유산: 2012년 "'''야마다 제방'''" 선정 (토목 학회)[4][23][5]
  • 관개 시설 유산: 2014년 "'''야마다 제방, 호리카와 용수, 수차군'''" 등록 (국제 관개 배수 위원회)[4][23][5]


또한, 용수 주변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실용 수차로 알려진 삼련 수차 1기와 이련 수차 2기가 여전히 가동 중이며[5], "아사쿠라의 삼련 수차"는 1987년 수제 향토상 "물가의 풍물시 부문"을 수상했다.[7] 2017년에는 지역 주민 단체인 "호리카와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과 "야마다 제방 토지 개량구"가 시설 보존 노력을 인정받아 국토교통성으로부터 수제 향토상 대상을 수상했다.[9]

2. 1. 에도 시대 초기: 건설 배경 및 초기 역사

에도 시대 초기,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각 들은 재정 상황 개선을 위해 새로운 개발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2] 당시 후쿠오카번 역시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농업 생산량 증대를 모색했다. 특히 아사쿠라 지역은 에도 시대 초기에 잦은 가뭄과 메뚜기 피해, 지쿠고강홍수로 농작물 수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11] 이러한 상황에서 1662년의 큰 가뭄은 안정적인 수자원 확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3][8][6][10][11]

이에 후쿠오카번은 안정적인 벼농사를 지원하고 지역을 곡창 지대로 만들어 번의 수입원을 확보하고자[2][11], 1663년 번의 가신이었던 기무라 쵸베(木村忠兵衛)와 우오즈미 고로에몬(魚住五郎右衛門)에게 용수로 건설을 명했다.[4][5][3][8][6][10][11] 공사는 다음 해인 1664년에 완공되었으며[32], 이를 통해 약 150ha의 새로운 농지가 개간되었다.[4][3][8][6][10][11] 초기 취수구는 현재 야마다 제방의 약 20m 하류 지점에 설치되었다.[3][8][6][10][11]

기리누키 스이몬(절관 수문)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취수구에 토사가 쌓여 물을 끌어들이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2][11]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22년, 후쿠오카번의 가신 가와사키 덴지로(川崎伝次郎)와 아소 시로에몬(麻生四郎右衛門)의 주도로 취수구를 현재의 야마다 제방 옆 위치로 옮기는 공사가 진행되었다.[11][32] 이때 지쿠고강 우안의 단단한 암반을 사용하여 길이 약 20m(11간), 내부 폭과 높이가 각각 약 1.5m(5척)인 터널 형태로 파내어 새로운 취수구를 만들었는데, 이를 '기리누키 스이몬'(切抜水門, 절관 수문)이라고 부른다.[2][11] 이 공사는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공사 중 안전과 완공 후 물의 안녕을 기원하며 수문 위에 수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3][8][12] 이 개선 공사 이후 호리카와 용수의 관개 면적은 약 220ha로 늘어났다.[4][32]

2. 2. 18세기: 개수 및 확장

1664년 완공 이후 호리카와 용수는 아사쿠라 지역의 농업 발전에 기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취수구에 토사가 쌓이는 문제가 발생했다.[2][11]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22년(교호 7년), 후쿠오카번의 번사 川崎伝次郎|가와사키 덴지로일본어와 麻生四郎右衛門|아소 시로에몬일본어의 주도로 취수구를 기존 위치에서 약 20m 상류이자 현재의 야마다 제방 옆인 치쿠고강 우안으로 옮겼다.[11][32] 이때 강가의 단단한 암반을 사용하여 파낸 길이 11(약 20m), 내부 너비와 높이가 각각 5척(약 1.5m)인 터널 형태의 새로운 취수구를 만들었는데, 이를 切抜水門|기리누키스이몬일본어(절관 수문)이라고 부른다.[11] 이 공사는 난공사였기 때문에 공사 중 안전과 완공 후 물의 안정적인 공급을 기원하며 수문 위에 수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水神社|스이진자일본어)을 세우기도 했다.[3][8][12] 이 개수를 통해 호리카와 용수의 관개 면적은 220ha로 늘어났다.[4]

그러나 에도 시대 중기 신전 개발 정책으로 새로운 이 계속 늘어나면서 1759년(호레키 9년) 무렵에는 호리카와 용수의 물이 부족해져 하류 지역 논까지 물이 닿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2][11] 특히 용수가 지나가지 않는 조자군(上座郡) 남서부의 여러 마을은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렸다.[11] 이에 당시 下大庭村|시모오바니무라일본어의 촌장이었던 古賀百工|고가 효고일본어(1718년 - 1798년)는 용수로를 확장하고 새로운 수로를 팔 계획을 세웠다.[11] 그는 마을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 측량을 하고 계획서를 작성하여 번청에 제출했다.[11] 조자군 봉행 島井下総|시마이 시타유일본어의 검토를 거쳐 용수로 폭 확장, 신규 수로(新堀川|신호리카와일본어) 굴착, 취수구 확장 등이 결정되었다.[11] 우선 기존의 절관 수문을 약 2배 크기인 10척(약 3m) 사방으로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었다.[13][32]

1764년(메이와 원년),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호리카와 용수 확장과 연장 공사가 완료되었다.[2][6][11] 확장된 호리카와 용수(북선)의 관개 면적은 218정보 9단보로 증가했다.[11] 동시에 조자군 田中村|다나카무라일본어 부근의 분기점(田中突分|다나카 톳분일본어)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지는 새로운 수로인 新堀川|신호리카와일본어(남선)가 완성되었다.[6][11] 고가 효고가 주도하여 완성한 이 신호리카와 덕분에 호리카와 용수 전체가 물을 공급하는 논의 면적은 약 370ha까지 크게 늘어났다.[8][6][11][4]

2. 3. 18세기 말 ~ 19세기: 야마다 제방 건설

기존의 야마다 제방(堰)은 치쿠고강의 전체 폭에 걸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호리카와 용수로 유입되는 수량이 불안정했다.[3][6][10]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87년, 당시 70세였던 시모오바무라 촌장 고가 효고(古賀百工)는 촌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취수구의 전면적인 개수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제방을 강폭 전체로 확장하여 더 많은 물을 안정적으로 호리카와 용수로 끌어들임으로써, 조자군과 게자군 일대의 만성적인 가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고가 효고는 직접 현재의 야마다 제방과 같은 석축 형태의 제방 설계도를 작성하며 계획을 구체화했다.[3][6][10]

1790년 (간세이 2년), 후쿠오카번은 고가 효고의 계획을 받아들여 야마다 제방의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명령했다.[3][6][10] 공사는 같은 해에 성공적으로 완료되었고[4], 새로 건설된 야마다 제방 덕분에 호리카와 용수는 총 487 9에 달하는 넓은 농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공사를 통해 약 120정보의 새로운 농지(신전 개발)가 추가로 개발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3][6][10]

2. 4. 근현대: 피해 복구 및 유지 보수

치쿠고강은 빈번하게 홍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야마다 제방(山田堰)도 1874년, 1885년, 1953년, 1980년에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까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3][4] 특히 1980년의 수해 때는 야마다 제방의 42%가 파손되었으나, 현에서 6.5억을 투입하여 총 장석 콘크리트 구조로 원형 복구하였다.[10]

1990년에는 용수로와 함께 "'''호리카와 용수 및 아사쿠라 양수차'''"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8]

이후 2017년 7월 5일 발생한 헤이세이 29년 7월 규슈 북부 호우로 인해 물레방아 부근에 다량의 유목토사가 흘러들어 물레방아가 멈추는 피해가 발생했으나, 다행히 원형은 유지되었다.[14] 아사쿠라시와 야마다 제방 토지 개량구의 복구 작업 끝에 약 1개월 후인 8월 2일 오전 5시에 다시 물이 통하고 물레방아 가동이 재개되었다.[15][16][17][18]

2. 5. 연표


  • 1663년 (간분 3년) - 호리카와 용수 개착 공사 착공.[32]
  • 1664년 (간분 4년) - 호리카와 용수 준공[32], 150ha 개답.[4]
  • 1722년 (교호 7년) - 취수구를 에소하치만구 앞에서 12칸(약 21.6m) 상류의 현재 위치로 이동하여 절관 수문으로 함[32], 관개 면적 220ha.[4]
  • 1759년 (호레키 9년) - 절관 수문을 확대.[32]
  • 1764년 (메이와 원년) - 호리카와 용수를 연장하여 관개 면적을 370ha로 함.[4][32]
  • 1789년 (간세이 원년) - 히시노의 3연 수차가 완성.[4][19]
  • 1790년 (간세이 2년) - 시모오바무라 촌장 고가 효쿠에 의해 야마다 제방 완성.[4]
  • 1913년 (다이쇼 2년) - 다이후쿠촌 외 3개 촌 호리카와 토목 조합이 설립.[4]
  • 1955년 (쇼와 30년) - 다이후쿠촌 외 3개 촌 호리카와 토목 조합 폐지, 아사쿠라군 야마다 제방 토지 개량구가 설립.[4]
  • 1981년 (쇼와 56년) - 야마다 제방 대개수.[4]
  • 1990년 (헤이세이 2년) - "호리카와 용수 및 아사쿠라 양수차"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4]
  • 2006년 (헤이세이 18년) - 농림수산성의 수리백선으로 인정.[4]
  • 2008년 (헤이세이 20년) - "호리카와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이 결성.[4]
  • 2014년 (헤이세이 26년) - 국제 관개 배수 위원회가 인정하는 "관개 시설 유산"으로 등록.[4]

3. 주요 시설

호리카와 용수는 여러 중요한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시설로는 호리카와 용수로 본류와 지선, 지쿠고강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야마다 제방, 용수로보다 높은 지대의 논에 물을 대는 아사쿠라 양수차, 그리고 초기 취수 시설의 일부인 절관 수문 등이 있다. 각 시설은 호리카와 용수의 기능 유지와 지역 농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 호리카와 용수로: 에도 시대 초기에 건설된 관개 수로로, 주 용수로와 다수의 지선으로 구성되어 넓은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 야마다 제방: 지쿠고강의 물을 효과적으로 취수하기 위해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진 석축 제방(취수보)이다.
  • 아사쿠라 양수차: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동 중인 수차로, 용수의 물을 이용하여 높은 지대의 논에 물을 공급한다. 현재 세 곳(히시노, 미시마, 히사시게)에 남아 있다.
  • 절관 수문: 초기 용수 건설 시 토사 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쿠고강 우안의 암반을 깎아 만든 터널형 수문이다.


각 시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호리카와 용수로

에도 시대 초기인 1663년, 후쿠오카번은 관리 기무라 쵸헤이와 우오즈미 고로에몬에게 용수로 건설을 지시하여 이듬해 준공했다.[4][5][3][8][6][10][11] 당시 아사쿠라 지역은 잦은 가뭄황충 피해, 지쿠고강홍수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도쿠가와 막부 아래 각 들이 재정 개선을 위해 새 논밭 개발을 추진하던 정책의 일환으로 호리카와 용수가 건설되었다.[2][3] 용수로 건설로 이 지역은 곡창 지대로 변모하여 후쿠오카번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2] 초기 용수로는 조자군 고모무라에서 게자군 조리키무라까지 2리에 걸쳐 9개 마을의 150정보 남짓한 에 물을 공급했다.[3][8][6][10][11]

주 용수로의 길이는 약 11km이며, 지선 용수로가 77km 더 뻗어 있다.[2] 현재의 취수구는 아사쿠라시 야마다에 위치한 '''야마다 제방'''(山田堰|야마다zeki일본어)이다.[4][5] 초기 취수구는 현재 야마다 제방의 약 20m 하류에 있었으나, 1722년에 토사 퇴적으로 인해 취수구를 옮기게 되었다.[3][11] 이때 후쿠오카번의 관리 가와사키 덴지로와 아소 시로에몬이 현재 야마다 제방 옆 지쿠고강 우안의 암반에 길이 11간, 내부 너비 5척 사방의 터널로 파내어 '''기리누키 스이몬'''(切抜水門|기리누키스이몬일본어)을 만들었다.[11] 공사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수호신으로 수신을 모시는 수신사를 수문 위에 세웠다.[3][8][12]

1759년에는 늘어난 논 면적에 비해 용수의 수량이 부족해져 하류 지역에 물 공급이 어려워졌다. 또한 용수가 닿지 않는 조자군 남서부 마을들은 항상 가뭄에 시달렸다. 이에 당시 시모오바니무라 촌장이었던 코가 쥬사쿠 요시시게(古賀 百工|코가 햨코일본어, 1718년~1798년)는 용수로 확장과 새로운 용수로(신호리카와) 개착을 계획했다.[8][6][11] 그는 마을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 측량 후 계획서를 번청에 제출했고, 조자군 봉행 시마이 시타유의 검토를 거쳐 용수로 폭 확장, 신호리카와 굴착, 취수구 확장 등이 결정되었다.[8][6][11] 기리누키 스이몬은 약 2배인 10척 사방으로 넓혀졌고, 호리카와 용수의 관개 면적은 218정 9단으로 증가했다.[13] 조자군 다나카무라 부근에 분기점을 설치하여 남서 방향으로 갈라지는 신호리카와 공사는 5년에 걸쳐 1764년에 완공되었다.[6] 이로써 호리카와 용수를 수원으로 하는 논 면적은 약 370정보까지 넓어졌다.[8][6][11] 용수로 중간의 분기점(다나카 톳분)에서 북쪽 노선은 원래의 호리카와 용수, 남쪽 노선이 신호리카와이다.[6]

1787년, 70세의 코가 햨코는 여전히 불안정한 물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수구의 전면 개수, 즉 석축으로 된 현재의 야마다 제방 건설을 제안했다.[3][6][10] 1790년 후쿠오카번의 명령으로 공사가 완료되자 호리카와 용수는 487정 9단의 농지를 관개할 수 있게 되었고, 약 120정보의 새 논밭이 추가로 개발되었다.[3][6][10]

야마다 제방은 이후 1874년, 1885년, 1953년, 1980년 등 여러 차례 홍수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복구되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3][4] 1980년 수해 때는 제방의 42%가 파손되었으나, 현에서 6.5억(엔)을 투입하여 총 장석 콘크리트 구조로 원형 복구했다.[10] 2017년 7월 규슈 북부 호우 때도 유목과 토사가 유입되었으나[14], 복구 작업을 거쳐 약 1개월 만에 통수가 재개되었다.[15][16][17][18]

호리카와 용수와 연선의 수차군은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0년 국가 사적 "호리카와 용수 및 아사쿠라 양수차"로 지정되었다.[8] 또한, "호리카와 용수"는 2006년 농림수산성의 수리백선에[4], "야마다 제방"은 2012년 토목학회 선정 토목 유산에[23], "야마다 제방, 호리카와 용수, 수차군"은 2014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관개시설유산에 각각 선정 및 등록되었다.[4][5] 2017년에는 지역 단체들이 국토교통성의 수제 향토상 대상을 수상했다.[9]

3. 2. 야마다 제방

'''야마다 제방'''(山田堰|야마다zeki일본어)은 아사쿠라시 야마다(구 아사쿠라군 아사쿠라마치)의 지쿠고강(하구에서 55.2km 지점[20])에 위치한 표면적 25370m2의 돌 제방(취수보)이다.[4]

1787년 당시 70세였던 고가 햨코(古賀百工, 코가 쥬사쿠 요시시게)는 촌장으로서 지쿠고강 취수구의 전면적인 개수 필요성을 느껴, 강폭 전체에 걸쳐 물을 막는 현재와 같은 석축 제방의 구상을 담은 그림을 작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1790년 (간세이 2년) 후쿠오카번은 고가 효고에게 야마다 제방의 대대적인 개수를 명령했고, 같은 해 공사가 완료되었다.[3][6][10] 이로써 호리카와 용수는 487 9단의 농지를 관개할 수 있게 되었고, 약 120정보의 새로운 논밭이 개발되었다.[3][6][10]

수신사 경내에서 바라본 야마다 제방


지쿠고강의 강변에서 바라본 야마다 제방


축조 당시에는 돌을 그대로 쌓아 올린 빈돌 쌓기 구조[21]였으며 제방 길이는 350m였다. 이후 1980년(쇼와 55년)의 홍수 피해 복구 과정에서 돌과 돌 사이를 콘크리트나 몰탈로 메우는 찰쌓기 방식으로 개수되었으며[23], 현재 제방 길이는 176.6m, 폭은 47m이다. 시설로는 토사 배출구(물 배출 통로) 1개, 과거 하천 뱃길에 사용되었던 배 통로 1개, 어도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중간 배 통로와 남쪽 배 통로가 모두 어도를 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3][22][10]

야마다 제방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강바닥에 돌을 깔아 경사지게 만든 경사 제방 바닥식 돌 쌓기 제방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23][11] 주요 구조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제방의 앞면 벽(전벽)은 물의 흐름 방향에 대해 약 20도의 각도로 비스듬하게 설치되어, 유속이 빠른 지쿠고강의 강한 수압을 완화시키는 치수 구조를 갖추고 있다.

# 막다른 취수구 쪽으로 물살이 강하게 쏠리는 것을 방지하고 하천수를 효과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높낮이가 다른 구조물을 적절히 배치했다. 물의 저항이 가장 강한 남쪽 배 통로 수로 쪽의 돌 쌓기를 높게 하고, 거기서 중앙부까지는 낮게 만들었다가 다시 수문 취수구 부근을 향해 돌길을 점차 높이는 경사를 주었다. 이를 통해 돌길 표면 중앙부에 완만한 웅덩이가 형성되어 여수 토출구 역할을 함으로써, 제방 본체에 가해지는 강한 수압을 줄이면서도 취수구로 충분한 수량을 보낼 수 있다.[10] 또한 제방이 돌길로 덮여 있어 하천 유량이 증가했을 때 물이 제방 위를 넘쳐흐르며 발생하는 도수 현상으로 물의 기세를 약화시키는 기능도 가진다.[24]

# 배 통로, 어도, 토사 배출구에서 나오는 물의 흐름을 제방 끝부분에서 합류시켜 물살의 힘을 줄이는(감세시키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쿠고강홍수가 잦아 야마다 제방 역시 1874년, 1885년, 1953년, 1980년에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복구 공사가 이루어져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3][4] 특히 1980년 수해 때는 제방의 42%가 파손되었으나, 후쿠오카현에서 6.5억의 예산을 투입하여 총 장석 콘크리트 구조로 원형에 가깝게 복구했다.[10] 2017년 7월 5일 발생한 헤이세이 29년 7월 규슈 북부 호우 당시에는 다량의 유목토사가 아사쿠라 수차 부근으로 흘러들어 수차가 멈추기도 했으나, 제방 자체는 원형을 유지했다.[14] 이후 시와 야마다 제방 토지 개량구의 복구 작업으로 약 1개월 뒤인 8월 2일 오전 5시에 통수 및 가동이 재개되었다.[15][16][17][18]

야마다 제방은 그 역사적, 기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토목 학회로부터 토목 학회 선정 토목 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4][23][5], 2014년 9월에는 "야마다 제방, 호리카와 용수, 수차군"이라는 명칭으로 국제 관개 배수 위원회(ICID)가 인정하는 관개 시설 유산으로 등재되었다.[4][23][5] 또한, 2017년 3월에는 "호리카와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과 "야마다 제방 토지 개량구"가 "향토의 보물·재산 '야마다 제방·호리카와 용수·수차군'을 지역에서 지키자"라는 활동으로 국토교통성의 헤이세이 28년도 수제 향토상 대상을 수상했다.[9]

3. 3. 아사쿠라 양수차

아사쿠라의 양수차는 대략 1760년대부터 1780년대 사이에 설치되었으며[2],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실제로 가동 중인 수차이다.[5] 호리카와 용수가 완공된 후, 용수 상류 지역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농지에 물을 공급할 필요성이 생겨 건설되었다.[2] 이 지역은 지대가 높아 호리카와 용수의 물을 직접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1759년경부터 자가 회전식 양수차를 설치하기 시작했다.[2] 야마다 제방 배출구에서 나오는 빠른 물살을 동력으로 삼아 회전하며, 부착된 바가지(버킷)로 물을 퍼 올려 높은 곳으로 보낸다.[2]

양수차는 1759년경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여[2], 1788년(덴메이 8년)까지 상류부 히시노(菱野) 마을을 중심으로 3기의 이련(二連) 양수차가 먼저 설치되었고[6], 1789년(간세이 원년)에는 히시노 양수차가 삼련(三連)으로 증설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6] 원래는 4곳에 양수차가 있었으나, 가장 상류에 있던 것은 수로 끝부분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전동 양수기로 대체되었다.

현재는 3곳의 양수차가 남아 가동 중이며, 각 양수차는 소재지 마을의 이름을 따 상류부터 각각 히시노 양수차(菱野水車일본어), 미시마 양수차(三島水車일본어), 히사시게 양수차(久重水車일본어)로 불린다.[2] 이 중 히시노 양수차는 삼련 양수차이고, 미시마와 히사시게 양수차는 이련 양수차이다.[2][5] 히시노 삼련 양수차는 1분당 6,100L의 물을 퍼 올릴 수 있으며[2], 퍼 올린 물은 나무 도이로 모아진 뒤 땅속에 묻힌 사이펀을 통해 더 높은 지대의 농지로 보내진다.[2]

이 양수차들이 관개하는 면적은 총 약 35ha에 달하며[2], 매년 재배 시기에 맞춰 6월 17일부터 10월 중순까지 가동된다. (단,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까지 약 1주일간은 논의 물을 빼는 시기이므로 가동을 멈춘다.)[2] 양수차는 5년마다 지역 장인들의 손에 의해 전통 방식 그대로 재건되며, 제작 기술 또한 계승되고 있다.[2]

아사쿠라 양수차는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다양한 지정을 받았다. 1987년에는 "아사쿠라의 삼련 수차"로 수제 향토상 "물가의 풍물시 부문"을 수상했으며[7], 1990년에는 호리카와 용수로와 함께 '호리카와 용수 및 아사쿠라 양수차'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8] 또한 2014년에는 "야마다 제방, 호리카와 용수, 수차군"의 일부로서 국제 관개 배수 위원회(ICID)의 관개 시설 유산으로 등록되었다.[4][23][5]

2017년 7월 5일 발생한 헤이세이 29년 7월 규슈 북부 호우 당시에는 양수차 부근으로 다량의 유목토사가 밀려와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양수차 자체의 원형은 보존되었다.[14] 이후 복구 작업을 거쳐 약 한 달 만인 8월 2일 오전에 통수 및 가동이 재개되었다.[15][16][17][18]

3. 4. 절관 수문

기존 호리카와 용수의 취수구는 토사가 쉽게 쌓이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22년 (교호 7년), 후쿠오카번의 번사였던 川崎伝次郎|가와사키 덴지로일본어와 麻生四郎右衛門|아소 시로에몬일본어의 주도로 취수구를 현재의 山田堰|야마다 보일본어 옆으로 옮기게 되었다.[11] 이때 치쿠고강 우안의 단단한 암반로 파내어 길이 11간(약 20m), 내부 너비 5척(약 1.5m) 사방의 터널형 수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절관 수문'''(切貫水門|기리누키스이몬일본어)이다.[11] 공사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수호신을 모시고자 수문 바로 위에 수신을 모시는 水神社|수신사일본어를 세웠다.[3][8][12]

1759년 (호레키 9년)에는 새로 개간된 이 늘어나면서 용수의 수량이 부족해지자, 절관 수문을 기존의 약 2배 크기인 10척(약 3m) 사방으로 넓히는 공사를 진행했다.[13] 이 확장 공사 덕분에 호리카와 용수가 물을 대는 면적은 218정 9단보(약 217ha)로 늘어났다.[8][6][11]

용수 쪽에서 바라본 절관 수문과 그 위의


절관 수문은 터널 출구 부근의 바닥을 호리카와 용수로 바닥보다 더 낮게 파서, 취수된 물이 사이펀 원리처럼 강하게 솟아오르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 토사가 수문 내부에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한 지혜로운 구조이다.[10]

현재도 수문 위에는 水神社|수신사일본어가 자리하고 있으며, 매년 6월 17일에는 이곳에서 야마다 보의 물을 흘려보내는 通水式|통수시키일본어가 열린다. 오전 9시 30분에 궁사가 신사를 지낸 후 수문을 열면, 호리카와 용수를 따라 흐른 물이 약 15분 뒤 2km 떨어진 물레방아 군에 도착하여 물레방아를 돌리기 시작한다.[31]

4. 국제적 협력 및 의의

야마다 제방과 호리카와 용수는 그 이수(利水) 구조의 기술적 우수성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제적인 협력 사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NGO 페샤와르회 대표였던 나카무라 테츠 의사는 아프가니스탄의 농지 개발 및 부흥 지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야마다 제방의 취수 구조와 호리카와 용수의 수로 건설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4][25][26] 나카무라 의사가 야마다 제방 방식을 주목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특별한 기술 없이 현지 주민들의 힘만으로도 시설의 유지 및 관리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22]

페샤와르회(PMS, Peace Japan Medical Services)는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Kunar River|쿠나르 강eng을 수원으로 하는 말와리드 용수로 건설을 주도하여 2003년 3월부터 2010년까지 약 7년에 걸쳐 완공했다.[11][28][29] 총 길이는 25.5km에 이르며, 이 용수로의 완공으로 약 3000ha에 달하는 황폐한 땅이 비옥한 농경지로 변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1]

또한, JICA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수자원·에너지부 차관 등 해외의 여러 관계자들이 야마다 제방을 직접 방문하여 그 구조와 기술을 견학하기도 했다.[27] 이러한 국제적 기여를 기리기 위해 2021년 2월에는 야마다 제방 공원에 나카무라 테츠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22]

참조

[1] 웹사이트 堀川用水及び朝倉揚水車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3-12-20
[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 웹사이트 山田堰(福岡県) https://www.maff.go.[...] 九州農政局 2017-11-03
[4] 웹사이트 山田堰 http://www.city.asak[...] 福岡県朝倉市 2017-11-03
[5] 웹사이트 堀川用水及び朝倉三連水車 https://www.maff.go.[...] 農林水産省 2017-11-03
[6] 웹사이트 ふるさと人物誌3 堀川の恩人「古賀百工」 http://www.city.asak[...] 福岡県朝倉市 2017-11-03
[7] 웹사이트 57.朝倉の三連水車 https://www.mlit.go.[...] 国土交通省 2023-01-23
[8] 웹사이트 堀川用水及び朝倉揚水車 https://kunishitei.b[...] 문화청 2017-11-03
[9] 뉴스 国交省「手づくり郷土賞」山田堰、堀川用水、三連水車を守る活動 朝倉の2団体受賞/福岡 https://mainichi.jp/[...] 2017-12-29
[10] 웹사이트 「山田堰・堀川用水路」の歴史 http://yamadazeki.ne[...] 水土里ネット山田堰 2017-11-03
[11] 웹사이트 水とともに2013年1月号 https://www.water.go[...] 独立行政法人 水資源機構 2017-12-29
[12] 웹사이트 【福岡県】堀川用水 http://midori.inakaj[...] 疏水名鑑 2017-11-03
[13] 뉴스 江戸期の掘削跡 改修工事で出現 朝倉市の国史跡、堀川用水の切貫水門 気が遠くなる手作業に感嘆 https://www.nishinip[...] 2018-02-23
[14] 뉴스 国史跡の三連水車、豪雨の土砂で止まる 米作りに影響も https://www.asahi.co[...] 2017-12-29
[15] 웹사이트 福岡・朝倉の「三連水車」、1カ月ぶり通水再開 https://www.nikkei.c[...] 2017-08-02
[16] 뉴스 朝倉の三連水車が復活、約1か月ぶり https://web.archive.[...] 2017-12-29
[17] 웹사이트 堀川用水の通水再開と三連水車の再稼働を確認 http://www.pref.fuku[...] 福岡県庁 2017-11-03
[18] 뉴스 福岡)三連水車、8月に再始動へ 堀川用水、市が浚渫 http://www.asahi.com[...] 2017-11-03
[19] 뉴스 三連水車回る 豊作祈り、田畑に水 福岡 https://mainichi.jp/[...] 2017-12-30
[20] 웹사이트 山田堰 https://www.qsr.mlit[...] 筑後川河川事務所 2017-12-29
[21] 문서 모ル타르や콘크리트를 使わずに、石を積んだだけの構造
[22] 간행물 【五感紀行】時と国境超える山田堰/命の水 アフガンに導く 北海道新聞 2021-10-31
[23] 웹사이트 2012年 - 山田堰 http://committees.js[...] 土木学会選奨土木遺産選考委員会 2017-11-03
[24] 웹사이트 山田堰 http://www.jsidre.or[...] 水土の知』85 (8) 2017-11-03
[25] 웹사이트 九州の近代土木遺産 - 山田堰 http://www.jsce.or.j[...] 土木学会西部支部 2017-11-03
[26] 뉴스 世界が注目、水を治める江戸の知恵 福岡・山田堰 https://style.nikkei[...] 2017-12-30
[27] 뉴스 アフガン副大臣ら、朝倉の山田堰視察 中村哲医師らが案内 (福岡県)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17-11-03
[28] 뉴스 アフガン人が夢見る「オレンジの歌会」復活 https://web.archive.[...] 2017-12-29
[29] 웹사이트 ペシャワール会報119号 http://www1a.biglobe[...] ペシャワール会 2014-04-01
[30] 웹사이트 福岡県国・県指定文化財:記念物 http://www.pref.fuku[...] 후쿠오카현청 201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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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三連水車 https://www.crossr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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