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행정 구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번'은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 유래하여 제후의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다이묘의 영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사용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쇼군에게 영지를 받은 다이묘의 영지를 '번'으로 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번'이 공식적인 제도 명칭은 아니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고, 다이묘를 '번주', 가신을 '번사'로 부르게 되었다. 일본의 번은 막번체제 하에서 반쯤 국가와 같은 자치성을 가졌으며, 서양의 봉건주의와 달리 영지의 가치는 지리적 크기가 아닌 예상 연간 수입으로 결정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번'은 공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나, 폐번치현으로 인해 사라졌다. '번'의 명칭은 번청 소재지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소령, 다이묘, 성하 마을 등 무엇을 지칭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번주 가문의 분가에 의해 지번이 생기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폐지된 행정 구역 - 부번현 삼치제
부번현 삼치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체제로, 막부 직할지를 부와 현으로 나누고 번을 존속시키다가 1871년 폐번치현으로 종료되었다. - 일본의 폐지된 행정 구역 - 판적봉환
판적봉환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로, 봉건적 막번 체제를 개혁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각 번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 에도 시대의 정치 - 참근교대
참근교대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가 다이묘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에 머물게 한 제도로, 다이묘의 재정 약화와 도로망 발전, 에도 문화 확산 등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다. - 에도 시대의 정치 - 공무합체
공무합체는 1850년대 일본에서 막부와 조정의 협력을 통해 외세에 대응하고 국론을 통일하려던 정치적 시도였으나, 존왕양이 운동과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실패했다. - 중국의 제도사 - 녹영군
녹영군은 청나라가 한족 군인 중심으로 창설한 군대로, 삼번의 난을 거치며 핵심 군사력으로 부상했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신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해체되었으며 청나라 군사력 변화와 흥망성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 중국의 제도사 - 이갑제
이갑제는 명나라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및 세금 징수 제도로, 110호 단위로 백성을 편성하여 납세와 노역을 담당하게 했으며, 경제 변화로 인해 한계에 직면하여 일조편법으로 대체되었다.
번 (행정 구역) | |
---|---|
개요 | |
유형 | 봉건제 |
존속 기간 | 1603년 ~ 1868년 |
관련 국가 |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
주요 특징 | 다이묘의 영지 지배 사농공상 계급 질서 중앙 집권적 봉건 체제 |
봉건 시스템 | |
봉건 계층 | 쇼군 (Shōgun) 다이묘 (Daimyō) 사무라이 (Samurai) 농민 (Nōmin) 장인 (Kōmin) 상인 (Shōnin) |
다이묘 유형 | 신판 다이묘 (Shinpan daimyō) 후다이 다이묘 (Fudai daimyō) 도자마 다이묘 (Tozama daimyō) |
토지 소유 | 다이묘의 영지 (번) |
경제 기반 | 농업 생산량 (쌀) |
행정 구역 | |
단위 | 번(Han) |
통치자 | 다이묘 |
역할 | 자체적인 행정 및 군사 조직 보유 막부에 대한 충성 의무 막부의 명령에 따라 군사 동원 |
막부와의 관계 | |
통제 메커니즘 | 산킨코타이 (Sankin-kōtai, 参勤交代) 무가제법도 (Buke shohatto, 武家諸法度) |
충성 서약 | 다이묘는 쇼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복종해야 함 |
역사적 맥락 | |
배경 | 센고쿠 시대의 혼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확립 |
목적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및 다이묘 통제 |
영향 | 사회 안정 및 경제 발전 독자적인 문화 발전 막부 말기의 사회적 변화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Hunter, Janet. The Emergence of Modern Japan: An Introductory History Since 1853. Routledge, 2014. |
2. 중국의 번
고대 중국 주(周) 왕조에서 왕실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은 제후들을 울타리라는 뜻의 '''번'''(藩)으로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13] 여기에서 파생되어 봉지(국國)를 받은 제후들을 널리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14] 이는 다시 나아가서는 제후들이 받은 영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며, '''번국'''(藩國, 또는 蕃國)이라고도 한다.[15] 청(淸) 왕조에는 삼번의 난으로 유명한 삼번과 같은 번들이 존재했다.
1185년 가마쿠라 막부가 등장한 이후, 일본에서 봉건제와 사무라이 귀족 무사 계급이 부상하면서 유력한 무사들의 개인 장원으로 시작된 반(행정 구역)의 개념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1185–1333), 짧았던 겐무 신정(1333–1336), 그리고 아시카가 막부(1336–1573) 시대에 걸쳐 4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후 쇼군들이 황제의 국(kuni)과 그 관료들의 법적 권한을 박탈하면서, 반은 ''사실상''의 행정 구역으로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
번이라는 말은 주 시대~청 시대에 사용되었지만,[16] 일본과 달리 고유 명사로서 "○○번"과 같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당 후반에서 오대십국에 걸쳐 지방에 할거한 절도사 세력을 번진이라고 불렀지만, 이 제번의 영지를 부를 때에는 "선무절도사의 주전충", "하동절도사의 이극용"과 같이, 지명+절도사명으로 불렀고, "선무번", "하동번"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청대의 변경의 반독립국이었던 삼번이 유명하지만, 이 제번도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왕호로 불렀으며, "○○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명대에서는 복번, 로번, 계번 등 자주 사용되었다.
3. 일본의 번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제도와 용어를 받아들여, 쇼군에게 영지를 인정받은 다이묘들을 제후로 보았다. 이들은 다이묘가 통치하는 영지를 '번국'(藩国일본어)이라 칭하며 '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6] 번은 1만 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가진 봉건 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하는 영역과 그 지배 기구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아니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藩主일본어), 그 가신들을 '번사'(藩士일본어)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명칭은 당시의 표현이 아닌 현대의 역사 용어이다. 실제로는 '〇〇家中'처럼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侯) 칭호를 붙이거나(예: 센다이 번의 번주는 '仙台侯일본어') 본래 관직명을 사용해 번주를 불렀다. 번사의 경우도 공식적으로는 어느 지역에 속한 '게라이'(家来일본어)라고 불렀고, 간혹 '惣士'라고 부른 예도 있다.[26]
일본은 신국(神國)의 신성한 영토라는 관념이 있어 근대 국가처럼 강한 영토 의식이 있었고, 막번체제 하에서 번은 반쯤 국가와 같았다. 에도 시대에는 중국 한족 말로 번을 '국가'라고 칭했고, '번'이라는 말을 쓴 예가 드물었다.[26] 최근 일본사 연구자들은 번체제를 봉건제보다 초기 근대 국가로 보기도 하며, 막번체제를 일종의 연방 국가와 같다고 보기도 한다. 번은 미국의 주보다 독립성이 훨씬 강했으며, 검문소(세키쇼)가 있었고 인근 번 영지로 갈 때는 여권인 데가타가 필요했다.[2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 말기(1467–1603)의 뛰어난 무장으로, 일본의 봉건 구조 개혁을 통해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히데요시의 시스템은 이 명확하게 구분된 영토보다는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바뀌었다.[3]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밀려났지만, 이에야스는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설립한 후 그의 새로운 봉건 시스템을 유지했다. 은 강력한 사무라이 봉건 영주인 다이묘에게 속했으며, 다이묘는 도쿠가와 쇼군의 가신으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개인 재산으로 이를 통치했다.
서양의 봉건주의와는 달리, 일본 봉건 영지의 가치는 지리적 크기가 아닌 예상 연간 수입으로 정의되었다. 은 세금을 위해 시스템을 사용하여 평가되었으며, 이 시스템은 1년 동안 한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으로 간주되는 일본 단위 부피인 의 쌀 생산량을 기준으로 가치를 결정했다.[5] 다이묘는 도쿠가와에 의해 10,000 (50,000 부셸) 이상의 을 이끄는 영주로 결정되었다.[6][7] 1690년에 가장 부유한 은 가가, 엣추, 노토에 위치한 가가 번으로, 100만 를 약간 넘었다.[10]
1868년 메이지 유신에서 친천황 사무라이 연합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했다.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일본의 봉건제를 폐지하려 했으며, 제도에서 다이묘의 칭호는 지번사(藩知事) 또는 지한사(知藩事)로 변경되었다.[11] 1871년, 거의 모든 영지가 해산되었고 현의 새로운 메이지 체제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도쿄의 일본 정부에 직접 종속되었다.[1]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옛 막부령을 부와 현으로 편성하면서 다이묘의 영지에 대해 천황의 '번'이라는 개념에서 번을 공식 명칭으로 삼고, 각 영지마다 번주의 소재지 이름 뒤에 번을 붙여 'OO번'과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번주는 지번사로 명칭이 바뀌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현으로 바뀌면서 번 체제는 사라졌다. 단, 류큐 왕국은 1872년 류큐 번으로 바뀌었고, 1879년 류큐 처분 때까지 폐번치현 이후 유일한 번으로 남아 있었다.
3. 1. 용어
'번'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의 주(周) 왕조에서 왕실을 호위하는 제후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 '번'은 울타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봉지(封地)를 받은 제후들을 널리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시 제후들이 받은 영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며, '번국'(藩國, 또는 蕃國)이라고도 불렀다. 청(淸) 왕조에는 삼번의 난으로 유명한 삼번과 같은 번들이 존재했다.[26]
하지만 '번왕'이라고 할 때에는 번국의 왕뿐만 아니라 군왕도 함께 일컫는다. 그리고 일본과 같이 고유명사로써 '○○번'이라고 사용되는 경우는 중국에는 없었다. 예를 들어, 당(唐) 말기에서 오대 십국 시대에 걸쳐 지방에서 할거하던 절도사(節度使) 세력을 번진(藩鎭)이라고 불렀지만, 이들 번을 부를 때는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극용(李克用)' 등 지명 + 절도사(관직) 이름으로 불렀으며, 청 왕조의 삼번은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왕호를 사용했지 '○○번'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26]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 중국으로부터 제도, 용어 등을 받아들이면서, 쇼군에게 영지를 안도받은 다이묘들을 제후로 보았을 때, 통치하고 있는 영지를 '번국'(藩国|번국일본어)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만 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아니었으나 간혹 그 용례가 보이고, 메이지 시대에 비로소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26]
오늘날은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藩主|번주일본어), 그 밑의 가신들을 '번사'(藩士|번사일본어)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일련의 명칭은 사실 당대의 표현이 아닌 현대의 역사용어이다. 번이 실제 존재했을 당시에는 '〇〇家中'과 같이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侯) 호칭을 붙이거나(예를 들어 센다이 번의 번주는 '仙台侯|센다이 후일본어') 본래 관직명을 부름으로써 번주를 호칭했다. 번사의 경우도 공식적으로는 어느 지역에 속한 '게라이'(家来|게라이일본어)라고 불렀고, 간혹 '惣士'라고 부른 예도 있다.[26]
일본은 신국(神國)의 신성한 영토라는 관념이 있어서 근대국가처럼 강한 영토의식이 있었고, 막번체제가 있어서 번 자체가 반쯤 국가였다. 에도 시대에는 중국 한족 말로 번을 가리켜 전부 '국가'라고 썼고 도리어 '번'이라는 말을 쓴 예가 드물다. 그래서 최근 일본사 연구자 가운데 번체제를 봉건제보다 오히려 초기 근대국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막번체제는 일종의 연방국가와 같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번은 미국의 주보다 독립성이 훨씬 더 강하다. 검문소(세키쇼)가 있고, 인근의 번 영지로 갈 때 여권인 데가타가 있어야 했다.[26]
3. 2. 에도 시대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 중국의 제도와 용어를 받아들이면서, 쇼군에게 영지를 인정받은 다이묘들을 제후로 보고 그들이 통치하는 영지를 '번국'(藩国일본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번은 1만 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가진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에는 공식 명칭이 아니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藩主일본어), 그 밑의 가신들을 '번사'(藩士일본어)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명칭은 당시의 표현이 아닌 현대의 역사 용어이다.
일본은 신국(神國)의 신성한 영토라는 관념이 있어서 근대국가처럼 강한 영토의식이 있었고, 막번체제가 있어서 번 자체가 반쯤 국가였다. 에도 시대에는 중국 한족 말로 번을 가리켜 전부 '국가'라고 썼고 도리어 '번'이라는 말을 쓴 예가 드물다.[26] 그래서 최근 일본사 연구자 가운데 번체제를 봉건제보다 오히려 초기 근대국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막번체제는 일종의 연방국가와 같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번은 미국의 주보다 독립성이 훨씬 더 강했다. 검문소(세키쇼)가 있고, 인근의 번 영지로 갈 때 여권인 데가타가 있어야 했다.[2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 말기(1467–1603)의 뛰어난 무장으로, 일본의 봉건 구조 개혁을 통해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왔다. 히데요시의 시스템은 이 명확하게 구분된 영토보다는 정기적인 지적도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바뀌었다.[3]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밀려났지만, 이에야스는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설립한 후 그의 새로운 봉건 시스템을 유지했다. 은 강력한 사무라이 봉건 영주인 다이묘에게 속했으며, 다이묘는 도쿠가와 쇼군의 가신으로서 자율성을 가지고 개인 재산으로 이를 통치했다.
서양의 봉건주의와는 달리, 일본 봉건 영지의 가치는 이제 지리적 크기가 아닌 예상 연간 수입으로 정의되었다. 은 세금을 위해 시스템을 사용하여 평가되었으며, 이 시스템은 1년 동안 한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으로 간주되는 일본 단위 부피인 의 쌀 생산량을 기준으로 가치를 결정했다.[5] 다이묘는 도쿠가와에 의해 10,000 (50,000 부셸) 이상의 을 이끄는 영주로 결정되었다.[6][7] 1690년에 가장 부유한 은 가가, 엣추, 노토에 위치한 가가 번으로, 100만 를 약간 넘었다.[10]
번의 내부는 쇼군과 에도 막부의 권위·권력의 틀 안에서 일정한 자립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결합을 가지며, 작은 국가처럼 기능했다.
번은 수호 다이묘가 장원이나 공령을 해체하고, 여기에 소령을 가진 이키 맹약으로 조직된 소무라를 권력 기반으로 하는 국인급 무사나 무사화된 묘슈층(지사무라이)을 피관화하여, 일원적인 영역 지배를 구축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발탁한 무사의 소령을 세력·진전에 따라 차례로 움직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복속한 센고쿠 다이묘를 그들의 기반인 영국에서 화분식으로 신영토로 이봉했으므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무사와 백성 간의 직업적·신분적 분리가 진행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에도 시대 초기의 대다이묘의 성행한 가증·이봉에 의해 완성되었다.
3. 3. 메이지 시대
1868년,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 정부가 옛 막부령을 부와 현으로 편성하면서, 다이묘의 영지에 대해서는 천황의 ‘번’이라는 개념에서 번이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삼고, 각 영지마다 번주의 소재지 이름 뒤에 번을 붙여 ‘OO번’과 같은 명칭을 행정구역명으로 삼았다.[23][20] 1869년 판적봉환이 행해지면서 번주는 지번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11]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현으로 바뀌면서 에도 시대 이래의 번 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1] 단, 류큐 왕국의 경우 1872년 류큐 번으로 바꾸었고,[12] 1879년 류큐 처분이 있을 때까지 폐번치현 이후 유일한 번으로 남아 있었다.
3. 4. 번의 명칭 (번명)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 중국의 제도와 용어를 받아들이면서, 쇼군에게 영지를 인정받은 다이묘들을 제후로 보고 그들이 통치하는 영지를 '번국'(藩国|번국일본어)이라고 칭하며 '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26] 번은 1만 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가진 봉건 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하는 영역과 그 지배 기구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아니었지만, 메이지 시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藩主|번주일본어), 그 가신들을 '번사'(藩士|번사일본어)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명칭은 당시의 표현이 아닌 현대의 역사 용어이다. 실제로는 '〇〇家中'처럼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侯) 칭호를 붙이거나(예: 센다이 번의 번주는 '仙台侯|센다이 후일본어') 본래 관직명을 사용해 번주를 불렀다. 번사의 경우도 공식적으로는 어느 지역에 속한 '게라이'(家来|게라이일본어)라고 불렀고, 간혹 '惣士'라고 부른 예도 있다.
일본은 신국(神國)의 신성한 영토라는 관념이 있어 근대 국가처럼 강한 영토 의식이 있었고, 막번체제 하에서 번은 반쯤 국가와 같았다. 에도 시대에는 중국 한족 말로 번을 '국가'라고 칭했고, '번'이라는 말을 쓴 예가 드물었다. 최근 일본사 연구자들은 번체제를 봉건제보다 초기 근대 국가로 보기도 하며, 막번체제를 일종의 연방 국가와 같다고 보기도 한다. 번은 미국의 주보다 독립성이 훨씬 강했으며, 검문소(세키쇼)가 있었고 인근 번 영지로 갈 때는 여권인 데가타가 필요했다.[26]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옛 막부령을 부와 현으로 편성하면서 다이묘의 영지에 대해 천황의 '번'이라는 개념에서 번을 공식 명칭으로 삼고, 각 영지마다 번주의 소재지 이름 뒤에 번을 붙여 'OO번'과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번주는 지번사로 명칭이 바뀌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현으로 바뀌면서 번 체제는 사라졌다. 단, 류큐 왕국은 1872년 류큐 번으로 바뀌었고, 1879년 류큐 처분 때까지 폐번치현 이후 유일한 번으로 남아 있었다.
부·번·현 삼치제에서 번청 소재지를 번명으로 하는 규칙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게이오 4년(1868년) 음력 2월 11일에 대·중·소 번의 구별이 제정되었을 때, 국지·대신국지의 번 등은 구 국명을 번명으로 했다. 최종적으로 판적봉환 시에 번청 소재지를 번명으로 하는 규칙이 적용되었고, 호칭이 겹치는 번은 번명이 개칭되었다.[24]
구보타 번은 에도 시대 번주의 관위로서 "아키타 시종"이 있었고, 보신 전쟁 때 "아키타 번"을 칭하며 "아키타번인"으로 하는 번인을 메이지 정부에 제출했지만, 번청 소재지를 번명으로 하는 원칙에 따라 "구보타 번"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이후 번명을 구보타 번에서 아키타 번으로 개명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역사 용어로서 번명을 사용하는 경우, 소령, 다이묘, 성하 마을의 세 가지 해석에 따라 다른 명명법이 병존한다.[25]3. 5. 본번과 지번
에도 시대의 번주 가문의 일족이 동생이나 서자 등 가독 상속의 권리가 없는 자에게 소령을 분여하는 등 새롭게 번을 성립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지번이라고 한다. 지번에 대해 분지한 번주 가문의 번을 본번이라고 한다. 번주 가문 이외의 유력 가신의 소령도 지번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번의 개념이 애매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번의 개념도, 성립 시 혈연이었을 뿐 막부에서는 각각 독립된 번으로 여겨진 것에서, 영내에서 비교적 독립성이 강한 영분의 의미까지, 그 지시하는 바는 확정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4. 인도와 파키스탄의 번
- 인도 번왕국
- 파키스탄의 번왕국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
서적
The Emergence of Modern Japan: An Introductory History Since 1853
Routledge
[3]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4]
서적
Handbook to Life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Japan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서적
Capitalism from Within: Economy, Society, and the State in a Japanese Fishe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7]
서적
Wages and Currency: Global Comparisons from Antiquity to the Twentieth Century
Peter Lang
[8]
서적
Ancien Japon
https://books.google[...]
[9]
서적
Mercantilism in a Japanese Domain: the merchant origins of economic nationalism in 18th-century Tosa
https://books.google[...]
[10]
서적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11]
서적
Above the Clouds: Status Culture of the Modern Japanese Nobility
https://books.google[...]
[12]
서적
Becoming Okinawan: Japanese Capitalism and Changing Representations of Okinawa
https://books.google[...]
[13]
문서
漢字学者の白川静によると、「藩」という漢字の意味は「説文解字」では「屏なり」といい、藩屏(原義は垣根)を巡らして帝王を守護するように地方の従属国を藩と呼んだのだという。例えば春秋左氏伝では「昔、武王、商に克つ。成王之を定め、明徳を選び建てて、以って周に藩屏とす」とあるという。白川「字通」平凡社、1298ページ
[14]
문서
例えば漢書・諸侯王表には「藩国の大なるものは、州に跨がり郡を兼ね、連城数百、宮室百官、制を京師に同じうす」とある。白川「字通」平凡社、1299ページ
[15]
문서
元来は「国の藩屏となる諸侯」の意味であった。白川「字通」平凡社、1299ページ
[16]
문서
既に詩経・春秋左氏伝に用例がある。
[17]
문서
『三百藩藩主人名事典』(新人物往来社)のように豊臣政権期にあたる関ヶ原の戦い当時に存在していた大名の領域およびその支配機構に対しても「藩」を用いている文献もある。更に遡って、江戸期まで存続した織田政権期の大名の支配機構についても「藩」を用いる文献がある。例えば、別所氏の但馬八木藩は1585年立藩であるが、立藩以前の1580年に自殺した別所家当主別所長治についても「藩主長治の(辞世は)『今はただうらみもあらじ諸人のいのちにかはる我が身と思えば』という一首であって一命にかえて藩民を救う切々とした訴えが胸を打つ」という用例がある(橋本哲二「新西国巡礼の寺」保育社)。また、1922年編纂の「青森県史」では青森県の歴史を「藩政時代以前」「藩政時代」「近世時代」の三年代に分け、津軽藩政時代として「元亀天正中、津軽為信蹶起し郡中を統一して以来」とし、津軽為信が家督を継いだ永禄10年(1567年)を以って「藩政時代」の記述の初めとしている。ただしこれは津軽藩立藩(1590年)以前の史料が極めて少なかったためであると青森県史編纂委員は序文で断っており、織田信長上洛以前の戦国大名を「藩」と称することは殆ど無い。
[18]
서적
近世国家史の成立
吉川弘文館
[19]
서적
譜代大名の創出と幕藩体制
吉川弘文館
[20]
간행물
目で見る 毛利家あれこれ 〜毛利博物館収蔵資料と歴史ばなし〜第254回
地域情報新聞社
2015-08-07
[21]
서적
麑藩名勝考
[22]
문서
将軍家より松平姓を賜っている。「松平氏#外様大名」参照。
[23]
문서
例えば、毛利博物館に所蔵されている毛利敬親宛の任命書には「山口藩知事」と明記されている。
[24]
논문
明治初年における府藩県
[25]
서적
江戸幕府崩壊論
塙書房
[26]
서적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