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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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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열은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장수로, 제갈탄의 난, 촉한 정벌, 종회의 난 등 굵직한 사건에 참여했다. 257년에는 오나라 주이를 습격하여 군수 물자를 불태웠고, 263년 촉한 정벌에 종회를 따라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연루되어 감금되었으나 아들 호연의 도움으로 풀려나 종회를 죽이는 데 기여했다. 서진 시기에는 형주 자사, 진주 자사를 역임했으며, 270년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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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
기본 정보
생애
출생생년 미상
출신지옹주안정군 임경현
사망태시 6년 6월 4일 (270년7월 9일)
사망지진주 만곡퇴
소속
섬긴 세력조모 → 조환 → 사마염

2. 행적

위나라의 거기장군 호준(胡遵)의 손자이자 호분(胡奮)의 셋째 아들이다.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러 가 도육에 주둔한 오나라의 주이를 은밀한 길을 이용해 습격하여 물자와 식량을 태웠다. 이 패배로 손침과 주이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면서 손침은 주이의 목을 베었다.[13]

263년, 위나라의 촉한 정벌에 호군으로써 진서장군 종회를 따라 참전했으며, 옹주자사 제갈서가 기산에서 무위를 공격해 강유의 퇴로를 끊자 호열은 종회를 따라 낙곡으로부터 전장군 이보와 함께 한중을 습격했다. 한중 침공 때 호열은 관성을 공격해 함락시켜 많은 식량을 얻었으며, 등애가 음평을 뚫어 성도로 향하자 호열은 종회와 함께 검각에서 농성하는 강유를 상대로 싸웠다.

등애가 음평 돌파를 성공해 면죽관에서 제갈첨을 격파하자 강유는 군사를 돌려 파(巴) 땅으로 들어갔는데, 종회는 이를 알고 부까지 진격해 전속, 방회, 호열을 파견해 강유를 추격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 강유는 호열에게 부절과 전거를 보내 항복했다.

264년, 촉한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종회가 강유와 손을 잡아 독립을 꾀하자 강유의 책략을 따라 종회는 호열 등 제장들을 죽이려 했지만 미적미적대서 호열은 감금되었으며, 호열의 옛 부하였던 구건은 종회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호열이 홀로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병사들이 한 명씩 방문해서 음식을 나르도록 허락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호열은 밖에 있는 아들 호연에게 친필 편지를 전하는 데 성공해 이런 상황에 병사들 사이에서 종회가 병사들을 모두 몰살시킨다는 소문이 밖으로 퍼졌다.

호연이 아버지의 병사를 이끌고 오자 아무런 지휘도 없었으나 모두 호열을 따라서 성도로 진격했으며, 종회는 사건의 심각성을 이제야 알아채 아문에 갇혀있는 자들을 뒤늦게 죽이려고 했지만 모두 책상으로 문을 막아서 방어에 성공하였고 강유는 종회의 병사를 좌우로 인솔하여 5, 6명을 맨 손으로 죽이는 등의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진압되고 종회도 유시에 맞아 죽었다.

같은 해, 촉한의 파동태수 나헌이 영안에서 2천 명으로 오나라 육항의 3만 대군을 6개월간 방어했지만 성의 병력 중 절반이 질병에 걸려 고전했는데, 양종진건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진건이 사마소에게 고하였고, 호열을 2만의 기병과 보병으로 출격시켜서 이릉을 침공하자 육항은 포위를 풀고 호열에게 격퇴당했다.

269년, 관농 지방에 진주가 새로 설치되었는데 일찍이 등애가 선비족 사람들과 옹주, 양주의 주민들끼리 섞여 살도록 하면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로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호열이 그 쪽 지방에 밝기에 안심하고 그를 진주자사로 부임시켰다.

270년, 만곡퇴에서 일어난 독발수기능의 난을 호열이 토벌하다가 전사하면서 10여 년 간의 반란이 관농 지방에 벌어지게 되었고, 문앙마륭의 분전해 겨우 난을 진압했다.

호열의 전사에 파장이 있었는지 도독옹양주제군사 사마량유기를 파견해서 그를 구원하게 했으나 유기는 그저 관망할 뿐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참수하려고 했으나 사마량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니 유기를 죽이지 말라고 해서 애꿎은 사마량만 면직되어 유기는 살아난 일화가 있다.

감로 2년(257년) 8월, 호열은 위나라 태산 태수였다.[4]

경원 2년(261년) 3월, 양양 태수를 맡았다.[5]

경원 4년(263년), 정촉 호군을 맡았다.[4] 양안관을 습격하여 장서를 항복시키고, 부첨을 격파했다.[6] 등애가 성도에 이르자, 유선이 항복하여 정촉은 달성되지만, 후에 종회와 함께 등애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호소하여 체포했다.[7]

함희 원년(264년), 형주 자사를 맡았다.[9]

태시 4년(268년) 10월, 오나라 만욱이 양양에 침공했기 때문에 이를 격퇴했다.[1]

태시 5년(269년) 2월, 진주가 신설되었고, 서방에 이름을 떨치는 호열이 자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270년) 6월, 호열은 독발수기능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10]

2. 1. 삼국시대 위나라에서의 활약

위나라의 거기장군 호준(胡遵)의 손자이자 호분(胡奮)의 셋째 아들이다. 호열은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고, 263년 촉한 정벌에 참전하는 등 굵직한 사건에서 활약했다.

261년 3월, 양양 태수를 맡아 오나라의 등유 등이 귀순하는 것에 호응하여 적의 둔영을 함락시키고 싶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왕기가 이 귀순을 거짓으로 의심하고, 사마소가 그 판단을 따랐기 때문에 출병이 중지되어, 결국 등유 등이 귀순하는 일은 없었다.[5]

269년, 관농 지방에 진주가 새로 설치되었는데, 일찍이 등애가 선비족 사람들과 옹주, 양주의 주민들끼리 섞여 살도록 하면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로 여러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호열이 그 쪽 지방에 밝아 그를 진주자사로 부임시켰다.

270년,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면서 10여 년 간의 반란이 관농 지방에 벌어졌다. 이후 문앙(文鴦)과 마륭(馬隆)의 분전으로 겨우 난을 진압했다.

호열의 전사에 파장이 있었는지 도독옹양주제군사 사마량유기를 파견해서 그를 구원하게 했으나, 유기는 그저 관망할 뿐 구원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를 참수하려고 했으나, 사마량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니 유기를 죽이지 말라고 하여 애꿎은 사마량만 면직되고 유기는 살아났다.

이보다 앞서 진나라의 중신 진건사마염에게 "호열과 견홍은 용감하지만 사려 깊은 점이 부족합니다. 변경의 임무는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두 사람 모두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패사하게 되자, 사마염은 진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12]

268년 10월, 오나라의 만욱이 양양에 침공했기 때문에 이를 격퇴했다.[1]

2. 1. 1. 제갈탄의 난 진압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러 가 도육에 주둔한 오나라의 주이를 은밀한 길을 이용해 습격하여 물자와 식량을 태웠다. 이 패배로 손침과 주이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손침은 홧김에 주이의 목을 베었다.[13] 같은 해 8월, 호열은 위나라 태산 태수였다. 제갈탄의 증원에 온 주이를 지름길로 통과하여 도륙에서 습격해 군수품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4]

2. 1. 2. 촉한 정벌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러 가서 도육에 주둔한 오나라의 주이를 습격하여 물자와 식량을 태웠다. 이 패배로 손침과 주이 사이에 불화가 생겨 손침은 주이의 목을 베었다.[13] 같은 해 8월, 위나라 태산 태수를 지냈다.[4]

263년, 위나라의 촉한 정벌에 호군으로써 진서장군 종회를 따라 참전했다. 옹주자사 제갈서가 기산에서 무위를 공격해 강유의 퇴로를 끊자, 호열은 종회를 따라 낙곡으로부터 전장군 이보와 함께 한중을 습격했다. 한중 침공 때 호열은 관성을 공격해 함락시켜 많은 식량을 얻었으며, 등애가 음평을 뚫고 성도로 향하자 호열은 종회와 함께 검각에서 농성하는 강유를 상대로 싸웠다.[4] 양안관을 습격하여 장서를 항복시키고, 부첨을 격파했다.[6]

등애가 음평 돌파를 성공해 면죽관에서 제갈첨을 격파하자 강유는 군사를 돌려 파(巴) 땅으로 들어갔는데, 종회는 이를 알고 부까지 진격해 전속, 방회, 호열을 파견해 강유를 추격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 강유는 호열에게 부절과 전거를 보내 항복했다. 등애가 성도에 이르자, 유선이 항복하여 정촉은 달성되었지만, 후에 종회와 함께 등애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호소하여 체포했다.[7]

264년, 촉한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종회가 강유와 손을 잡아 독립을 꾀하자 강유의 책략을 따라 종회는 호열 등 제장들을 죽이려 했지만 미적미적대서 호열은 감금되었다. 호열의 옛 부하였던 구건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호열이 홀로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병사들이 한 명씩 방문해서 음식을 나르도록 허락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호열은 밖에 있는 아들 호연에게 친필 편지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상황에 병사들 사이에서 종회가 병사들을 모두 몰살시킨다는 소문이 밖으로 퍼졌다. 호열 등이 반란을 꾀하는 종회에 의해 유폐되었으나, 유폐 중 구건의 종졸과 호열의 종졸이 호열에게 식량을 드리러 왔다. 호열은 "구건이 극비리에 정보를 줬다. 종회는 큰 구멍을 파고, 몽둥이를 수천 개 준비해서, 다른 병사를 차례로 몽둥이로 때려 죽여 구멍에 던져 넣을 셈인 것 같다"는 허보를 흘렸다. 이것을 들은 아들 호연을 비롯한 여러 군이, 종회 등을 습격·살해하고, 호열은 구출되었다.[8] (촉한의 멸망)

호연이 아버지의 병사를 이끌고 오자 아무런 지휘도 없었으나 모두 호열을 따라서 성도로 진격했으며, 종회는 사건의 심각성을 이제야 알아채 아문에 갇혀있는 자들을 뒤늦게 죽이려고 했지만 모두 책상으로 문을 막아서 방어에 성공하였다. 강유는 종회의 병사를 좌우로 인솔하여 5, 6명을 맨 손으로 죽이는 등의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진압되고 종회도 유시를 맞고 죽었다.

같은 해, 촉한의 파동태수 나헌이 영안에서 2천 명으로 오의 마지막 명장으로 불리는 진군장군 육항의 3만 대군을 6개월간 방어했지만 성의 병력 중 절반이 질병에 걸려서 고전했다. 다행히도 일찍이 파견한 참군 양종이 안동장군 진건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진건이 사마소에게 이에 대해서 고하였고, 호열을 2만의 기병과 보병으로 출격시켜서 이릉을 침공하자 육항은 포위를 풀고 호열에게 격퇴당했다. 함희 원년(264년), 형주 자사를 맡아, 오나라의 포위를 받은 영안의 라헌을 구원하러 가서, 적군을 철퇴시켰다.[9]

2. 1. 3. 종회의 난 진압

263년, 위나라의 촉한정벌에 호군으로써 진서장군 종회(鐘會)를 따라 참전했으며, 옹주자사 제갈서(諸葛緖)가 기산에서 무위를 공격해 강유(姜維)의 퇴로를 끊자 종회를 따라 낙곡으로부터 전장군 이보(李輔)와 함께 한중을 습격했다.[4] 호열은 관성을 공격해 함락시켜서 많은 식량을 얻었다.[6] 등애(鄧艾)가 음평을 돌파하여 성도로 향하자 종회와 함께 검각에서 농성하는 강유를 상대로 싸웠다.

등애가 음평 돌파를 성공해 면죽관에서 제갈첨(諸葛瞻)을 격파하자 강유는 군사를 돌려 파(巴)땅으로 들어갔다. 종회는 부까지 진격해 전속(田續), 방회(龐會), 호열을 파견해 강유를 추격하게 했다. 그러던 중 촉한의 2대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에게 항복하자 강유는 호열에게 부절과 전거를 보내 항복했다.

264년, 촉한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종회가 강유와 손을 잡아 독립을 꾀하자 강유의 책략을 따라 종회는 호열 등 제장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미적미적대는 사이 호열은 감금되었고, 호열의 옛 부하였던 구건(丘建)은 종회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호열이 홀로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병사들이 한 명씩 방문해서 음식을 나르도록 허락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호열은 밖에 있는 아들 호연(胡淵)에게 친필편지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 병사들 사이에서 종회가 병사들을 모두 몰살시킨다는 소문이 밖으로 퍼졌다.[8]

호연이 아버지의 병사를 이끌고 오자 아무런 지휘도 없었으나 모두 호열을 따라서 성도로 진격했다. 종회는 사건의 심각성을 이제야 알아채고 아문에 갇혀있는 자들을 뒤늦게 죽이려고 했지만, 모두 책상으로 문을 막아서 방어에 성공했다. 강유는 종회의 병사를 좌우로 인솔하여 5, 6명을 맨 손으로 죽이는 등 분전했으나 결국 진압되고 종회도 유시에 맞아 죽었다. (\촉한의 멸망)

2. 2. 서진에서의 활동과 죽음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러 가던 중, 호열은 도육에 주둔한 오나라 주이를 은밀한 길로 습격하여 물자와 식량을 불태웠다. 이 패배로 손침과 주이 사이에 불화가 생겨 손침은 주이를 죽였다.[13]

263년, 위나라의 촉한 정벌에 호군으로 참전한 호열은 종회를 따라 한중을 습격, 관성을 함락시켜 많은 식량을 얻었다. 등애성도로 향하자, 호열은 종회와 함께 검각에서 농성하는 강유와 싸웠다.

등애제갈첨을 격파하고 유선이 항복하자, 강유는 호열에게 항복했다. 264년, 종회가 강유와 손잡고 독립을 꾀하자 호열은 감금되었으나, 구건의 도움으로 아들 호연에게 편지를 보내 종회가 병사들을 몰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호연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강유종회는 진압되었고 호열은 구출되었다. 이후 호열은 나헌육항에게 포위당한 영안을 구원하기 위해 2만 병력을 이끌고 이릉을 침공, 육항을 격퇴했다.

2. 2. 1. 형주자사 시절

감로 2년(257년) 8월, 호열은 위나라 태산 태수였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을 지원하러 온 나라 장수 주이를 지름길로 습격하여 군수품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4]

경원 2년(261년) 3월, 양양 태수가 된 호열은 "오나라의 등유 등이 귀순하려는 것에 호응하여, 그들을 맞이하고 적의 둔영을 함락시키고 싶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왕기는 이 귀순을 거짓으로 의심했고, 사마소가 그의 판단에 따라 출병을 중지시켜 결국 등유 등의 귀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5]

경원 4년(263년), 호열은 정촉 호군을 맡아 종회의 부하로서 촉한 토벌에 종군했다.[4] 그는 양안관을 습격하여 장서를 항복시키고, 부첨을 격파했다.[6] 별동대 등애가 성도에 이르자, 촉한 황제 유선이 항복하여 정촉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호열은 후에 종회와 함께 등애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여 체포하도록 했다.[7]

그 후 호열은 반란을 꾀하는 종회에 의해 유폐되었다. 유폐 중 구건의 종졸이 호열에게 식량을 주러 왔는데, 이를 본 호열의 종졸도 식량을 가져왔다. 호열은 자신의 종졸에게 "구건이 극비 정보를 주었는데, 종회가 큰 구덩이를 파고 몽둥이 수천 개를 준비해서 다른 병사들을 차례로 때려 죽여 구덩이에 던져 넣을 셈인 것 같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 말을 들은 아들 호연을 비롯한 여러 군사들이 종회 등을 습격하여 살해했고, 호열은 구출되었다.[8] (촉한의 멸망)

함희 원년(264년), 호열은 형주 자사를 맡아 오나라의 포위를 받은 영안의 라헌을 구원하러 가서 적군을 물리쳤다.[9]

위나라에서 진(서진)으로 선양이 이루어진 후 태시 4년(268년) 10월, 오나라 만욱이 양양을 침공하자 호열은 이를 격퇴했다.[1]

2. 2. 2. 진주자사 시절과 독발수기능의 난

269년, 관농 지방에 진주가 새로 설치되었는데, 일찍이 등애가 선비족 사람들과 옹주, 양주의 주민들을 섞여 살게 하면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로 여러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호열이 그쪽 지방에 밝았기에 조정에서는 안심하고 그를 진주자사로 임명했다.[10]

270년, 독발수기능이 만곡퇴에서 난을 일으키자 호열이 토벌에 나섰으나 전사했다. 이로 인해 10여 년간 반란이 관농 지방에서 벌어졌고, 문앙마륭의 분전으로 겨우 진압되었다.[10]

호열의 전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도독옹양주제군사였던 사마량유기를 파견해 호열을 구원하게 했으나, 유기는 관망만 할 뿐 구원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유기를 참수하려 했으나, 사마량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유기를 죽이지 말라고 요청하여, 애꿎은 사마량만 면직되고 유기는 살아남았다.[11]

이보다 앞서 진나라의 중신 진건사마염에게 "호열과 견홍은 용감하지만 사려가 부족하여 변경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 모두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사마염은 진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12]

3. 삼국지연의에서의 호열

정사에서의 행보와 매우 비슷하지만 독발수기능의 난이 서술되어있지 않아 그의 최후가 나오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晋書
[2] 서적 三国志
[3] 서적 晋諸公賛
[4] 서적 晋書
[5] 서적 三国志
[6] 서적 漢晋春秋
[7] 서적 三国志
[8] 서적 三国志
[9] 서적 漢晋春秋
[10] 서적 資治通鑑
[11] 서적 晋書
[12] 서적 晋書
[13]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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