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혼혈소년 연쇄 살인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혼혈 소년 연쇄 살인 사건은 196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일련의 살인 사건으로, 1950년 미군 흑인 병사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츠카모토 류이치가 저질렀다. 그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세 건의 강도 살인 사건을 일으켰다. 츠카모토는 1967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소년법에 따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89년 가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소년 범죄, 사회적 차별, 형사 사법 제도 등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관련 서적이 출판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7년 살인 사건 - 조 믹
    조 믹은 영국의 음반 프로듀서이자 송라이터, 오디오 엔지니어로, 독자적인 녹음 방식으로 1960년대 초 여러 히트곡을 제작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말년에는 정신 건강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 집주인을 살해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1967년 살인 사건 - 조 오튼
    조 오튼은 사회적 규범과 권위에 대한 풍자와 블랙 유머가 특징인 작품을 남긴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그의 대표작으로는 《슬론 씨를 즐겁게 하는 법》, 《루트》, 《집사가 뭘 봤지?》 등이 있다.
  • 경찰청 광역중요지정사건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은 괴도 21면상을 자칭하는 범인들이 글리코 사장 유괴를 시작으로 글리코와 모리나가 제과 등 식품 회사를 협박하며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를 유통시키겠다고 위협한 미해결 기업 협박 사건이다.
  • 경찰청 광역중요지정사건 - 적보대 사건
    적보대 사건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적보대를 자칭하는 범인들이 아사히 신문사를 주요 대상으로 총격, 방화, 협박 등의 테러를 일으켜 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나, 모든 사건이 미해결 상태로 공소 시효가 만료된 사건이다.
  • 일본의 여성에 대한 폭력 -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 사건
    오케가와 스토커 살인 사건은 1999년 사이타마현 오케가와시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 사건으로, 스토커 고마츠 카즈히토가 사주한 야쿠자에게 피해자 이노 시오리가 살해당했으며, 경찰의 부실한 대응과 언론 보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스토킹 방지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 일본의 여성에 대한 폭력 - 이토 시오리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영화감독인 이토 시오리는 2015년 성폭력 피해 고발을 통해 일본 사회 내 성폭력 문제 공론화를 이끌었으며, 저서 출간 및 영화 제작 등 관련 활동으로 2020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었다.
혼혈소년 연쇄 살인 사건
류이치 츠카모토
출생 이름알 수 없음
별칭해당 없음
출생일1950년 6월 16일
출생지미야기현 시오가마시
사망일해당 없음
사망 장소해당 없음
사망 원인해당 없음
유죄 판결살인 (3건)
강도
강도 미수
절도
절도 미수
형벌무기징역
피해자 수3명
범행 시작 년도1966년
범행 종료 년도1967년
범행 국가일본
범행 지역아이치현
지바현
야마나시현
체포일1967년 1월 23일
수감 여부해당 없음
범죄 상태가석방
혼혈 소년 연쇄 살인 사건
관련 사건아이치현, 지바현, 야마나시현에서 발생한 젊은 여성 살인 사건

2. 범행 이전

츠카모토 류이치는 1950년 6월 16일 미야기현 시오가마시에서 주일 미군 흑인 병사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출생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아버지가 참전했다가 전사했다.[2] 4살 때 어머니는 다른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고, 츠카모토는 센다이에 있는 외조부모에게 맡겨졌다.[2]

1955년, 두 명의 미국 군인이 츠카모토의 외할머니에게 그를 입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5만 을 요구하여 거절당했다.[4] 3년 후 외할머니가 사망하자, 츠카모토는 일본국유철도 직원인 삼촌에게 맡겨졌다.[4]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았지만, 츠카모토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학교를 자주 결석하며 들판을 걷거나 절을 탐험하고, 자동차 밑에 숨어 지냈다.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성적이 하락했지만, 높이뛰기에서는 나이가 많은 학생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4]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칼로 가구를 자르거나 지붕 타일을 부수는 등 흉폭한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4]

중학교 2학년 때, 츠카모토는 총포상에서 공기총을 훔치려다 처음 체포되어 센다이에 있는 소년 보호 시설로 보내졌다.[4] 그곳에서 피부색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자 가해자들을 폭행했고, 입소 2개월 만에 격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카모토는 기숙사 감독관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녀를 부모처럼 여겼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츠카모토 류이치'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4]

학교에서처럼 츠카모토는 종종 수업을 빼먹고 도요하시와 오사카로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항상 센다이로 돌아왔다.[4] 장래 희망으로 선원이 되어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했으나, 고용 안정 사무소를 통해야 했기에 1966년 4월 자동차 정비소에서 견습을 시작했다. 상사는 그를 부지런하고 순종적인 직원이라고 묘사했지만, 6월부터 일을 빼먹기 시작했고 결국 그만두었다. 그 후 집에서 돈을 훔쳐 어머니의 고향인 규슈로 여행을 갔다가 센다이로 돌아왔다.[4] 그는 절도 30건, 현금 333,200엔을 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츠카모토 류이치는 1950년 6월 16일 미야기현 시오가마시에서 주일 미군 흑인 병사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출생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아버지가 참전했다가 전사했다.[2] 4살 때 어머니는 다른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고, 츠카모토는 센다이에 있는 외조부모에게 맡겨졌다.[2]

1955년, 두 명의 미국 군인이 츠카모토의 외할머니에게 그를 입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5만 을 요구하여 거절당했다.[4] 3년 후 외할머니가 사망하자, 츠카모토는 일본국유철도 직원인 삼촌에게 맡겨졌다.[4]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았지만, 츠카모토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학교를 자주 결석하며 들판을 걷거나 절을 탐험하고, 자동차 밑에 숨어 지냈다.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성적이 하락했지만, 높이뛰기에서는 나이가 많은 학생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4]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칼로 가구를 자르거나 지붕 타일을 부수는 등 흉폭한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4]

중학교 2학년 때, 츠카모토는 총포상에서 공기총을 훔치려다 처음 체포되어 센다이에 있는 소년 보호 시설로 보내졌다.[4] 그곳에서 피부색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자 가해자들을 폭행했고, 입소 2개월 만에 격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카모토는 기숙사 감독관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녀를 부모처럼 여겼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츠카모토 류이치'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4]

학교에서처럼 츠카모토는 종종 수업을 빼먹고 도요하시와 오사카로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항상 센다이로 돌아왔다.[4] 장래 희망으로 선원이 되어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했으나, 고용 안정 사무소를 통해야 했기에 1966년 4월 자동차 정비소에서 견습을 시작했다. 상사는 그를 부지런하고 순종적인 직원이라고 묘사했지만, 6월부터 일을 빼먹기 시작했고 결국 그만두었다. 그 후 집에서 돈을 훔쳐 어머니의 고향인 규슈로 여행을 갔다가 센다이로 돌아왔다.[4]

2. 2. 초기 범죄 행적

류이치 츠카모토는 1950년 6월 16일, 미야기현 시오가마시에서 흑인 미국 군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2] 4살 때, 어머니는 다른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고, 츠카모토는 센다이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2]

1955년, 두 명의 미국 군인이 츠카모토의 할머니에게 그를 입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5만 을 요구하자 거절했다.[4] 3년 후 할머니가 사망하자, 츠카모토는 아내와 자녀가 있는 일본국유철도 직원인 삼촌에게 맡겨졌다.[4]

츠카모토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종종 차별을 받았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 덕분에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4] 그러나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학교를 자주 결석하고 혼자 시간을 보냈다. 체육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체육에서는 높이뛰기에서 나이가 많은 학생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츠카모토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칼로 가구를 자르거나 지붕 타일을 부수는 등 흉폭한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4]

중학교 2학년 때 츠카모토는 총포상에서 공기총을 훔치려다 처음으로 체포되었다.[4] 이로 인해 센다이에 있는 소년 보호 시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피부색 때문에 다른 청소년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는 가해자들을 폭행하여 격리되었지만, 기숙사 감독관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녀를 부모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 그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류이치 츠카모토"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4]

가정 법원을 거쳐 교호원인 전 기숙사제 중학교로 보내진 츠카모토는, 자동차 수리공으로 취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단 결석이 잦았고, 결국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도요하시와 오사카 등지로 여행을 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빈집털이를 하여 돈을 훔쳐 여행 경비로 삼았다.[4] 그는 절도 30건, 현금 333,200엔을 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범행 및 수사 과정

센다이로 돌아온 직후, 츠카모토는 사람들의 집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9월 초에 붙잡혀 11건의 절도 혐의를 자백했고, 그로 인해 소년원에 수감되었다.[1] 그러나 그가 수감된 직후, 소년원에서 이질이 발생했고, 츠카모토가 그 원인으로 의심되어 츠츠지가오카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보내졌다.[4] 그는 10월 4일 병원에서 탈출하여 니가타시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10월 11일부터 그는 침입한 집에서 돈을 훔치며 현에서 현으로 이동하며, 붙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호텔에 묵었다.[4]

츠카모토의 첫 번째 살인은 1966년 12월 13일, 도요하시시의 한 집에 침입했을 때 발생했다.[1] 그곳에서 그는 24세의 임신한 주부 안도 가즈코를 마주쳤는데, 츠카모토는 그녀를 공격하여 자신의 옷으로 손을 묶은 다음 수건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4] 그는 시신을 욕실로 끌고 가 욕조에 물을 채우고 머리를 물 속에 집어넣었다. 안도를 살해한 후, 그는 2만 엔을 훔쳐 집에서 도망쳤고, 안도의 시신은 나중에 남편에게 발견되었다.[4]

12월 27일 한밤중에 츠카모토는 아비코시의 다른 집에 침입했는데, 그곳에는 28세의 주부 와타나베 요시코와 그녀의 3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츠카모토는 그녀를 구타한 다음 신발끈으로 손을 묶고, 요로 그녀의 머리와 목을 감싸 질식시켜 살해했다.[4] 그는 그런 다음 그녀의 스웨터를 찢고, 날카로운 물건으로 와타나베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그녀를 살해한 후, 그는 2만 4천 엔을 훔쳐 아기를 살려두고 집을 떠났다. 와타나베의 시신은 다음 날 남편에게 발견되었다.[4]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살인은 1967년 1월 16일 고후시의 한 집에 침입했을 때 발생했다. 안에 들어가자 그는 25세의 와타나베 요시미를 마주쳤고, 그녀를 묶고 재갈을 물렸다. 그런 다음 칼을 들고 그녀의 옷을 찢은 후, 전기 코드를 잡아 그녀를 목 졸라 살해했다.[4] 츠카모토는 그런 다음 둔기를 잡고 그녀의 머리를 때린 후, 근처에 있던 소시지, 오이, 계란을 잡아 그녀의 성기에 강제로 집어넣었다.[2] 마지막으로 그는 시신을 위층으로 끌고 가 토코노마에 매달아 놓았다. 츠카모토는 그런 다음 서랍을 뒤져 1만 엔을 훔쳐 달아났다.[1] 입과 사타구니에서 피가 솟구치는 와타나베의 시신은 나중에 그녀의 어머니와 관리인의 아내에게 발견되었다.[4]

도요하시시, 아비코시, 고후시의 경찰서는 세 건의 살인이 유사점을 보임에 따라 사건 해결을 위해 협력했다.[1] 경찰은 목격자들을 면담한 후 각 사건에서 짧은 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젊은 남자가 해당 지역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봤다는 결론을 내렸다.[2] 단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살인에 사용된 수건에 후타바 료칸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호텔 직원과의 대조를 통해 그들은 "츠카모토 류이치"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고 센다이시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용의자와 일치하는 투숙객이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4]

1967년 1월 23일, 가시와시의 한 경찰관 부인은 남편에게서 들었던 범인의 묘사와 일치하는 소년이 가방을 들고 기차역으로 걸어가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즉시 경찰에 연락했고, 경찰은 그 십 대를 구금했다.[4] 구금된 사람은 거류증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일본 시민이라고 답했고, 추가 조사를 위해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츠카모토 류이치라고 자백했지만, 수사관들이 그의 가방에서 칼, 드라이버 및 접착 플라스터를 발견한 후, 그는 무너져 자신의 진짜 이름과 범죄를 자백했다.[4]

3. 1. 범행 개요

츠카모토는 1966년 12월부터 1967년 1월 사이에 아이치현 도요하시시, 지바현 아비코시,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3건의 살인을 저질렀다.[1] 그는 주로 주택에 침입하여 여성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했다.

1966년 12월 13일, 츠카모토는 도요하시의 한 집에 침입하여 24세의 임신한 주부 안도 가즈코를 살해하고 2만 엔을 훔쳤다.[1][4] 12월 27일에는 아비코시의 다른 집에 침입하여 28세 주부 와타나베 요시코를 살해하고 2만 4천 엔을 훔쳤으며, 당시 옆방에서 자고 있던 생후 3개월 아기는 무사했다.[4] 1967년 1월 16일에는 고후시의 한 집에 침입하여 25세 여성 와타나베 요시미를 살해하고 1만 엔을 훔쳤다.[1][4]

1967년 1월 23일, 이 사건은 광역 중요 106호로 지정되었고, 같은 날 츠카모토는 지바현 가시와시에서 체포되었다.[1] 츠카모토는 흑인과의 혼혈이었다.

3. 2. 수사 및 체포

도요하시시, 아비코시, 고후시의 경찰서는 세 건의 살인이 유사점을 보임에 따라 사건 해결을 위해 협력했다.[1] 경찰은 목격자들을 면담한 후 각 사건에서 짧은 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젊은 남자가 해당 지역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봤다는 결론을 내렸다.[2] 단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살인에 사용된 수건에 후타바 료칸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호텔 직원과의 대조를 통해 "츠카모토 류이치"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고 센다이시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용의자와 일치하는 투숙객이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4]

1967년 1월 23일, 가시와시의 한 경찰관 부인은 남편에게서 들었던 범인의 묘사와 일치하는 소년이 가방을 들고 기차역으로 걸어가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즉시 경찰에 연락했고, 경찰은 그 십 대를 구금했다.[4] 구금된 사람은 거류증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일본 시민이라고 답했고, 추가 조사를 위해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츠카모토 류이치라고 자백했지만, 수사관들이 그의 가방에서 칼, 드라이버 및 접착 플라스터를 발견한 후, 그는 무너져 자신의 진짜 이름과 범죄를 자백했다.[4]

4. 재판 및 판결

1967년 5월 25일, 츠카모토 류이치는 세 건의 살인, 여러 건의 절도, 강도 미수, 강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 츠카모토는 절도, 절도 미수, 주거침입, 강도강간,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츠카모토는 "그들의 눈이 싫어서" 여성을 죽였다고 진술하는 등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4]

다수의 강도살인의 누범이지만, 소년법 51조 1항의 규정에 의해 범행 당시 18세 미만인 피고인에게 사형을 적용할 수 없었다.[6] 검사는 S에 대해 적용 가능한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972년 9월 9일, 지바 지방재판소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 피해자 유족들은 츠카모토의 사형을 원했지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다. 그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형에 대해 항소하지 않았다.[2][11][12]

1971년 9월 9일, 지바 지방재판소는 츠카모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11][12] 범행 당시 18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소년법에 따라 사형 대신 무기징역이 선고된 것이다.[4] 소년법 51조 1항은 범행 당시 18세 미만인 피고인에게 사형을 적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6] 츠카모토는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되었다.[2][11]

츠카모토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했다.[2] 1997년, 언론인 아즈치 시게루는 다카라지마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오사카 형무소에서 츠카모토를 만났으며, 그가 30대 후반에 가석방되었다고 밝혔다.[5]

4. 1. 기소 및 재판

1967년 5월 25일, 츠카모토 류이치는 세 건의 살인, 여러 건의 절도, 강도 미수, 강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 츠카모토는 절도, 절도 미수, 주거침입, 강도강간,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츠카모토는 "그들의 눈이 싫어서" 여성을 죽였다고 진술하는 등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4]

다수의 강도살인의 누범이지만, 소년법 51조 1항의 규정에 의해 범행 당시 18세 미만인 피고인에게 사형을 적용할 수 없었다.[6] 검사는 S에 대해 적용 가능한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972년 9월 9일, 지바 지방재판소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 피해자 유족들은 츠카모토의 사형을 원했지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다. 그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형에 대해 항소하지 않았다.[2][11][12]

4. 2. 판결 및 확정

1971년 9월 9일, 지바 지방재판소는 츠카모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11][12] 범행 당시 18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소년법에 따라 사형 대신 무기징역이 선고된 것이다.[4] 소년법 51조 1항은 범행 당시 18세 미만인 피고인에게 사형을 적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6] 츠카모토는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되었다.[2][11]

츠카모토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했다.[2] 1997년, 언론인 아즈치 시게루는 다카라지마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오사카 형무소에서 츠카모토를 만났으며, 그가 30대 후반에 가석방되었다고 밝혔다.[5]

5. 범행 동기 및 사회적 배경

소년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흑인 미국 군인과 일본 여성 사이에서 미야기현시오가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고, 어머니는 다른 미국 군인과 결혼하여 소년을 외가 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조부모가 사망한 후, 소년은 어머니의 형인 삼촌에게 맡겨졌지만, 학교에서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그 울분을 풀려는 듯 가정 폭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가게에 있던 공기총을 훔치려다 체포되었다.

소년은 가정 법원에서 교호원인 전 기숙사제 중학교로 보내졌고, 이윽고 자동차 수리공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무단 결근이 잦아, 어느 날을 기점으로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빈집털이를 하여 돈을 훔쳐 여행 경비로 삼았지만, 집 안을 수색하던 중 발각된 3건에서는 강간 후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재판 판결문에 따른 인정에 따르면 일련의 피해는 절도 30건, 현금 333,200엔이었다.

5. 1. 범행 동기

츠카모토는 일본에 주둔하던 흑인 미군 병사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고, 어머니는 다른 미군과 재혼하여 츠카모토를 외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조부모가 사망한 후에는 삼촌에게 맡겨졌으나, 학교에서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가정에서는 가정 폭력이 심해졌다. 이러한 환경은 츠카모토의 반사회적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츠카모토는 가정법원을 거쳐 아동 자립 지원 시설 및 중학교에 보내졌지만, 무단결석과 방랑 생활을 반복하며 절도 행각을 벌였다.

5. 2. 사회적 배경

츠카모토는 일본에 주둔하던 흑인 미군 병사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고, 어머니는 다른 미군과 재혼하여 그를 외조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조부모가 사망한 후에는 삼촌에게 맡겨졌으나, 학교에서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가정에서는 폭력이 심해졌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했던 혼혈에 대한 편견과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해 및 지원 부족을 보여준다.

6. 사건 이후

타카라지마샤의 취재에 의해, 범인 S(츠카모토 류이치)의 소식이 밝혀졌다.[13] 범죄 및 사채 관련 저널리스트인 아즈치 시게루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사카 형무소 복역 중 두 사람이 만나 먼저 출소한 아즈치가 출소한 범인 S의 보호자가 되어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S는 1989년 4월 12일 38세에 가석방된 이후 현재까지 정식 직장을 다니며 성실하게 일하고 있으며, 피해자들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으며, 아즈치를 포함한 형무소 시절의 사람들과 현재도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13]

츠카모토 류이치는 1967년 5월 25일, 세 건의 살인, 여러 건의 절도, 강도 미수, 강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 1972년 9월 9일, 치바 지방 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피해자 유족들은 츠카모토의 사형을 원했지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 그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형에 대해 항소하지 않았다.[2]

츠카모토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89년 4월 12일 38세에 가석방되었다.[13] 가석방 이후에는 정식 직업을 가지고 성실하게 생활하며, 피해자들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다고 알려져 있다.[13][5] 이는 1997년, 언론인 아즈치 시게루가 다카라지마샤와 인터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5] 아즈치는 자신이 오사카 형무소에서 사기 혐의로 15년형을 살면서 츠카모토를 만났으며, 조기 출소 후에도 친구로 지냈다고 주장했다. 아즈치는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 책을 써서 1999년 3월에 출판했다.[4]

타카라지마사의 인터뷰 후, 아즈치는 이 사건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소년법과 형사 사법 제도, 그리고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소년 범죄의 처벌 수위와 범인의 인종적 배경, 그리고 그가 겪은 차별과 불우한 환경 등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 1. 범인의 행적

츠카모토 류이치는 1967년 5월 25일, 세 건의 살인, 여러 건의 절도, 강도 미수, 강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 1972년 9월 9일, 치바 지방 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피해자 유족들은 츠카모토의 사형을 원했지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했다.[4] 그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형에 대해 항소하지 않았다.[2]

츠카모토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89년 4월 12일 38세에 가석방되었다.[13] 가석방 이후에는 정식 직업을 가지고 성실하게 생활하며, 피해자들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다고 알려져 있다.[13][5] 이는 1997년, 언론인 아즈치 시게루가 다카라지마샤와 인터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5] 아즈치는 자신이 오사카 형무소에서 사기 혐의로 15년형을 살면서 츠카모토를 만났으며, 조기 출소 후에도 친구로 지냈다고 주장했다. 아즈치는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 책을 써서 1999년 3월에 출판했다.[4] 아즈치를 포함한 형무소 시절의 사람들과 현재도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13]

6. 2.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소년법과 형사 사법 제도, 그리고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3] 특히, 소년 범죄의 처벌 수위와 범인의 인종적 배경, 그리고 그가 겪은 차별과 불우한 환경 등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타카라지마사의 취재에 의해, 범인 S의 소식이 밝혀졌다. 범죄 및 사채 관련 저널리스트인 아즈치 시게루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사카 형무소 복역 중 두 사람이 만나 먼저 출소한 아즈치가 출소한 범인 S의 보호자가 되어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S는 1989년 4월 12일 38세에 가석방된 이후 현재까지 정식 직장을 다니며 성실하게 일하고 있으며, 피해자들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으며, 아즈치를 포함한 형무소 시절의 사람들과 현재도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타카라지마사의 인터뷰 후, 아즈치는 이 사건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다.

7. 관련 서적


  • 제1심 판결문을 수록한 문헌 - 『가정재판 월보』 제24권 제2호(쇼와 47년 2월), 174-185쪽.
  • * 13 강도강간, 강도살인 등 피고 사건(지바 지방법원 마츠도 지부 쇼와 42(わ)25호, 59호 쇼와 46・9・9 판결 확정) 재판 사항 "강도강간, 강도살인 등을 범한 범행 당시 16세의 소년에 대해, 강도살인으로 사형을 선택하고, 소년법 제51조 전단에 의해 무기징역에 처한 사례" [참조 조문] 소년법 제51조, 형법 제240조 전단, 제241조 전단 [소년] T・K/T・K일본어(쇼와 25・6・16생)
  • * 주문: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압수해 둔 요리 여관 ○잎의 명의가 새겨진 흰 수건 1개(단, 둘로 잘려 있음)(쇼와 42년 압수 제12호의 2) 및 칼 1개(칼날 길이 7.1cm, 2단 접이식, 손잡이 갈색)(동 압수 제17)를 몰수한다.
  • * 재판관: 아사노 토요히데(재판장)・히라야마 미키오・야자키 마사히코
  • * 수록 문헌: 『TKC 로 라이브러리』(LEX/DB 인터넷) 문헌 번호 25461235
  • 아즈치 시게루 『증오는 사랑보다 깊다 - 실록・16세 연쇄 여성 살인 사건』 가와이데 쇼보 신샤, 1999년 3월. ISBN 4309473776

7. 1. 재판 기록


  • 제1심 판결문을 수록한 문헌 - 『가정재판 월보』 제24권 제2호(쇼와 47년 2월), 174-185쪽.
  • * 13 강도강간, 강도살인 등 피고 사건(지바 지방법원 마츠도 지부 쇼와 42(わ)25호, 59호 쇼와 46・9・9 판결 확정) 재판 사항 "강도강간, 강도살인 등을 범한 범행 당시 16세의 소년에 대해, 강도살인으로 사형을 선택하고, 소년법 제51조 전단에 의해 무기징역에 처한 사례" [참조 조문] 소년법 제51조, 형법 제240조 전단, 제241조 전단 [소년] T・K/T・K일본어(쇼와 25・6・16생)
  • * 주문: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압수해 둔 요리 여관 ○잎의 명의가 새겨진 흰 수건 1개(단, 둘로 잘려 있음)(쇼와 42년 압수 제12호의 2) 및 칼 1개(칼날 길이 7.1cm, 2단 접이식, 손잡이 갈색)(동 압수 제17)를 몰수한다.
  • * 재판관: 아사노 토요히데(재판장)・히라야마 미키오・야자키 마사히코
  • * 수록 문헌: 『TKC 로 라이브러리』(LEX/DB 인터넷) 문헌 번호 25461235
  • 아즈치 시게루 『증오는 사랑보다 깊다 - 실록・16세 연쇄 여성 살인 사건』 가와이데 쇼보 신샤, 1999년 3월. ISBN 4309473776

7. 2. 아즈치 시게루의 저서

아즈치 시게루의 저서로는 가와이데 쇼보 신샤에서 1999년 3월에 출간된 ''증오는 사랑보다 깊다 - 실록・16세 연쇄 여성 살인 사건''이 있다. ISBN 4309473776. 이 책은 16세 소년이 강도강간, 강도살인 등을 범한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강도살인으로 사형을 선택하고, 소년법 제51조 전단에 의해 무기징역에 처한 사례를 담고 있다. 제1심 판결문은 『가정재판 월보』 제24권 제2호(쇼와 47년 2월)에 수록되어 있으며, 174-185쪽에 해당한다. 판결문은 『TKC 로 라이브러리』(LEX/DB 인터넷) 문헌 번호 2546123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実録 戦後殺人事件帳―人を殺したい夜に読む本 Aspect 1998-03-01
[2] 뉴스 愛知・千葉・山梨で相次いで若い女性が殺害『混血少年連続殺人事件』【衝撃の未成年犯罪事件簿】 https://news.nicovid[...] 2021-08-02
[3] 서적 犯罪専科 Kawade Shobo Shinsha 1985-04-01
[4] 서적 憎しみは愛よりも深し―実録・16歳連続女性殺人事件 Kawade Shobo Shinsha 1999-03-01
[5] 서적 隣りの殺人者たち―彼や彼女はなぜ、人を殺したのか? Takarajimasha 1997-09-01
[6] 뉴스 金沢の夫婦刺殺 元少年の無期確定 遺族、絶えぬ苦しみ=石川 読売新聞北陸支社 2007-02-15
[7] 뉴스 大高緑地アベック殺人 名地裁判決 主犯少年(当時)に死刑 『残虐、冷酷な犯罪』 共犯の5被告 無期―不定期刑に 中日新聞社 1989-06-28
[8] 뉴스 アベック殺人死刑判決破棄 少年への極刑に慎重 集団心理などを考慮 중일신문사 1996-12-16
[9] 뉴스 夫婦殺害 犯行時17歳に無期判決 成年なら死刑に相当/金沢地裁 読売新聞中部支社 2006-12-19
[10] 뉴스 金沢・夫婦強殺:当時17歳に無期確定 控訴取り下げ 毎日新聞大阪本社 2007-02-14
[11] 뉴스 【松戸】女性三人殺しに無期の判決 毎日新聞東京本社 1971-09-10
[12] 뉴스 【松戸】混血青年に無期の判決 3女性絞殺 千葉地裁判決 朝日新聞東京本社 1971-09-10
[13] 간행물 別冊宝島333 隣りの殺人者たち-彼や彼女はなぜ、人を殺したのか Takarajimasha 199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