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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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경래는 조선 시대의 인물로, 평안도 용강군 출신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추정되며, 1811년 조선 정부에 대항하여 농민 반란인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다. 유교적 가르침과 정감록의 예언을 내세워 지지자를 모았으며,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으나, 1812년 정주성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사망했다. 그는 여러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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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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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표기 | 홍경래 |
한자 표기 | 洪景來 |
개정 로마자 표기 | Hong Gyeongrae |
매큔-라이샤워 표기 | Hong Kyŏngnae |
예일 표기 | Hong Kyenglay |
출생일 | 1780년 |
사망일 | 1812년 음력 4월 19일 (33세)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룡강군 다미면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룡강군 대안구역 다미리) |
사망지 | 조선 평안도 정주시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정주시) |
본관 | 남양 |
소속 조직 | 농민군 |
정당 | 무소속 |
종교 | 유교(성리학) → 도교 |
복무 기간 | 1811년 ~ 1812년 |
배우자 | 최씨 부인 |
자녀 | 슬하 1남 |
지휘 | 평서대원수 |
최종 계급 | 조선국 평안도 농민군 대원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홍경래의 난 |
호 | 산남(山南) |
가족 관계 | |
부모 | 홍씨(부), 유씨(모) |
친척 | 유학권(외숙부), 홍이팔 |
기타 | |
관련 인물 | 홍범도: (증조부와 친척) |
2. 생애
평안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고 전해지지만 거의 평민 수준으로 곤궁하게 살았다. 그는 유교, 병법, 풍수지리 등을 익히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1811년 홍경래는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정주를 비롯한 서북 지방 상당수를 지배했다.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1797년 평양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1798년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방랑하면서 거사를 꿈꾸었다. 홍경래는 조선(朝鮮)의 팔도(八道) 중 하나였던 평안도(平安道) 남부 용강(龍岡)에서 남양 홍씨(南陽洪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양반(兩班)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한국어로 번역된 중국 소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삶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상민(常民), 아마도 지방 군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학식은 그를 전문적인 풍수사(風水師)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여행 기회를 가졌는데, 풍수사의 임무 중 하나가 묘자리(墓址)의 길지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홍경래는 자신이 아버지의 묘자리로 선택한 곳이 매우 좋고 아버지를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곳의 의뢰인을 위해 길지를 찾기 위해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이는 그가 그들의 불만을 이해하고 혁명적인 이념을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선 시대 평안도 룡강군 다미면(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대안군 다미리)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거의 평민 수준으로 궁핍하게 살았다. 그는 유교, 병법, 풍수 지리 등을 배우고, 서당(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1797년 평양에서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1798년 사마시에 낙방하고 집을 나섰다. 지사가 되어 여러 곳을 방랑하며 동지를 모으고, 위업을 꿈꾸었다.
3. 홍경래의 난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심복들인 우군칙(1776년~1812년)과 홍총각(1785년?~1812년)도 관군에 체포되어 정주에서 처형되었다.
3. 1. 난의 전개
1811년 홍경래는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정주를 비롯하여 서북 지방 상당수를 지배했다.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홍경래는 난을 일으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 주장을 내세워 지지자를 모았다.
#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백성들의 고통과 최근 발생한 자연재해는 현 통치 왕조가 천명을 잃었다는 징후이자 결과라는 주장을 펼쳤다. 부패한 정부와 기근, 겨울 번개, 지진과 같은 사건들은 한 왕조가 다른 왕조로 대체되는 영속적인 왕조 순환과 연관 지어졌다.
# 정감록의 비밀 문서에는 오래전부터 왕조의 멸망과 거의 이상적인 새 왕조의 건설이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정(鄭)씨 성을 가진 진인이 군대를 이끌고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심지어 1812년이라는 연도까지 예언되어 있었다고 주장되었다. 반란을 주도한 자들은 추종자들이 진인 정씨의 선봉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씨 성을 가진 인물을 꼭두각시 지도자로 내세웠다.
정부 문서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홍경래는 강하고 유능한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기존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이유로 "의로운" 인물로 여겨지는 고위 관료를 제대로 매장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모범적인 유교적 행동을 보였다. 또한 반란에 저항하다 죽은 효자로 알려진 한 남자의 시신을 그의 아들이 제대로 매장할 수 있도록 그의 아들에게 넘겨주고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그는 체격이 강하고 무술에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쟁 준비를 지휘하고 직접 반란을 지휘했다. 그러나 반란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초기 패배 후 정부군을 신속하게 공격하려던 계획이 채택되지 않은 두 명의 지도자는 반란이 실패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정부의 눈에 들기 위해 그들은 홍경래를 칼로 암살하려 했지만, 홍경래는 그들을 막고 죽였다. 이로 인한 지연은 정부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어 반란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홍경래는 반란군이 포위된 정주읍 성이 함락될 때까지 반란군을 지휘했다. 그는 이 마지막 전투에서 총에 맞아 죽었고, 사후에 처벌을 받았다.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심복들인 우군칙(1776년 ∼ 1812년)과 홍총각(1785년? ~ 1812년)도 관군에 체포되어 정주에서 처형되었다.
3. 2. 난의 실패와 영향
1811년 홍경래는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정주를 비롯한 서북 지방 상당수를 지배했다.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심복들인 우군칙(1776년 ~ 1812년)과 홍총각(1785년? ~ 1812년)도 관군에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홍경래는 반란군이 포위된 정주읍 성이 함락될 때까지 반란군을 지휘했으며, 이 마지막 전투에서 총에 맞아 죽었고, 사후에 처벌을 받았다.[3]
4. 홍경래가 등장한 작품
홍경래는 여러 TV 드라마에서 다뤄졌다. 2001년 MBC 드라마 ''상도''에서는 박찬환이,[4] 2016년 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정해균이 홍경래 역을 연기했다.[5]
4. 1. TV 드라마
참조
[1]
서적
순조실록
1812-04-21
[2]
일반
[3]
일반
[4]
일반
[5]
서적
순조실록
18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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