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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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하며 한국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30년 시로 등단하여 시집과 소설을 발표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한국인의 저항 정신과 사랑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소나기》, 《카인의 후예》 등이 있으며, 1955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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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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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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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5년 3월 26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순안구역 재경리) |
사망일 | 2000년 9월 14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직업 | 시인 소설가 수필가 |
국적 | 대한민국 |
필명 | 자(字)는 만강(晩岡) |
배우자 | 양정길 |
부모 | 황찬영(부), 장찬붕(모) |
형제 | 남동생 2명 |
자녀 | 황동규(첫째아들) 황남규(둘째아들) 황선혜(딸) 황진규(셋째아들) |
친척 | 황시내(손녀)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언어 | 한국어 |
활동 기간 | 1930년 ~ 2000년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장르 | 시문학 소설 수필 평론 영어영문학 |
주요 작품 | 《소나기》 《별》 《독 짓는 늙은이》 《학》 |
웹사이트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
경력 |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
2. 생애
황순원은 해방 이후 북한이 공산화되자 지주 계급으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6년에 월남했다.[7] 월남 후 서울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며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했고, 1953년에는 장편 소설 《카인의 후예》를 발표하며 장편 작가로도 인정받았다.[9] 1957년에는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임용되어 김광섭, 주요섭, 조병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7]
1985년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를 발표할 때까지 창작열을 불태웠으며, 2000년 타계할 때까지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간간이 시작품을 발표하며 만년을 보냈다. 아들 황동규는 시인이자 영문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황순원의 단편 소설 《소나기》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뮤지컬로도 제작되었다.
1930년대부터 일제의 언론 통제로 조선 문학은 단순화되었고, 현실 비판과 민족 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40년대부터 소설가로 전향한 황순원은 당시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시인으로서 갈고 닦은 서정적 감성을 소설에 담아 순수 서정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 거주했다. 황순원의 작풍도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3·1 운동을 다룬 『아버지(父)』와 문세광 사건의 혼란을 상징적으로 그린 『별과 함께 살다(星と共に生きる)』는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황순원의 연보이다.
연도 | 사건 |
---|---|
1915년 |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남. |
1919년 | 3·1 운동에 참여한 아버지 황찬영이 일제 당국에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음. |
1921년 | 평양으로 이주함. |
1923년 | 평양 숭덕소학교에 입학함. |
1929년 | 숭덕소학교 졸업 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 건강 악화로 숭실중학교로 전학함. |
1930년 | 신문에 시와 동화를 투고하기 시작함. |
1932년 5월 | 『동광』에 김해강, 모윤숙, 이응수 등과 함께 시단의 신예로 소개됨. |
1934년 | 숭실중학교 졸업,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 도쿄에서 "학생예술좌"를 창립함. |
1935년 | 양정길과 결혼함. |
1936년 |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동인지 『창작』을 발행함. |
1938년 4월 9일 | 장남 동규가 태어남. |
1939년 | 와세다대학교 졸업. |
1940년 7월 17일 | 차남 남규가 태어남. |
1943년 | 고향인 빙장리로 피난, 장녀 선혜가 태어남. |
1946년 | 삼남 진규가 태어남, 월남하여 서울중학교 교사에 취임함. |
1950년 6월 25일 | 한국 전쟁으로 인해 광주,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함. |
1955년 | 『카인의 후예』로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 『현대문학』 추천 작품 심사위원이 됨. |
1956년 | 『문학예술』 추천 작품 심사위원이 됨. |
1957년 | 예술원 회원이 됨.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교수에 취임함. |
1960년 |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위원장이 됨. |
1961년 7월 | 『나무들 비탈에 서다』로 예술원상 수상. |
1964년 | 서울시 문화위원이 됨. |
1966년 | 장편 『일월』로 3·1 문화상 수상, 3·1 문화상 심사위원이 됨. |
1968년 | 일본을 여행, 한글전용심의위원이 됨. |
1970년 |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
1982년 | 경희대학교 명예교수가 됨. |
1983년 12월 |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
1987년 | 제1회 인촌상 수상. |
2000년 9월 14일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자택에서 별세. |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아버지 황찬영(黃贊永)과 어머니 장찬붕(張贊朋)[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7] 1921년 당시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1929년에는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교장 출신인 남강 이승훈을 만나게 된다.[8]1930년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31년 7월 《동광(東光)》에 실은 〈나의 꿈〉이 등단작이다. 이후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중학교 시절 거듭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였고, 이 단체 이름으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했다. 1936년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 해 5월에 두 번째 시집 《골동품(骨董品)》을 냈다.
2. 2. 문단 데뷔와 초기 활동
1930년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31년 7월 《동광》에 실은 〈나의 꿈〉이 등단작이다.[7][1] 숭실중학교로 전학 후, 중학교 시절 거듭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였고,[1] 이 단체 이름으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했다. 1936년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 해 5월에 두 번째 시집 《골동품(骨董品)》을 냈다. 이후 시를 더 이상 쓰지 않고 소설로 전향한다. 1937년 7월 《창작(創作)》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부사(副詞)〉가 첫 소설 작품이다. 이듬해 10월에 〈돼지계(系)〉를 발표하고, 이 두 작품을 비롯해서 창작 연대가 확실치 않은 다른 11편의 단편과 함께 묶어 1940년에 《황순원 단편집》(나중에 《늪》이라는 제목으로 고쳐 펴냄)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2. 3. 소설가로서의 전향과 광복 이후
1936년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한 황순원은 이후 시를 더 이상 쓰지 않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7] 1937년 7월 《창작(創作)》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부사(副詞)〉가 소설로서 첫 작품이다. 이듬해 10월에는 〈돼지계(系)〉를 발표했다.[7] 이 두 작품을 포함해 창작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11편의 단편을 묶어 1940년에 《황순원 단편집》(이후 《늪》으로 개칭)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7]1942년 이후,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인해 고향인 빙장리에 은거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채 여러 단편 소설을 집필했다.[7] 1945년 광복 이후, 평양으로 돌아갔으나 북조선이 공산주의화되면서 지주 계급으로 몰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이듬해 1946년에 월남했다.[7]
월남 후, 황순원은 서울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며 꾸준히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1953년에는 장편 소설 《카인의 후예》를 발표하여 장편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9] 1957년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임용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기반으로 김광섭, 주요섭, 조병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더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7]
2. 4. 경희대학교 교수 재직과 문학적 성취
1953년 장편 소설 《카인의 후예》를 발표하면서 장편 작가로 인정받았다.[9] 1957년 경희대학교 국문과 조교수로 전임하여 생활이 안정되면서 김광섭, 주요섭, 조병화 등 동료 문인들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9] 한국 전쟁 이후 남한에서 경희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2] 1957년 경희대학교 교수에 취임한 후에도 문학 활동을 계속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3·1문화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2. 5. 타계
2000년 9월 14일 노환으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자택에서 별세했다(향년 86세).[7]3. 작품 세계
황순원은 1937년 첫 작품을 발표하고 1980년대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 강점기, 이념 대립, 한국 전쟁, 산업화, 군사 독재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황순원이 주목한 것은 단순한 역경이 아니라, 그 역경 속에서도 빛나는 한국인의 끈기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사랑과 선의였다.[1]
20세기 한국 문단에서 단편소설은 가장 중요한 장르로 여겨졌는데, 황순원은 여러 시집과 8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지만, 단편소설 작가로서 큰 인정을 받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로 글을 쓰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3]
1950년대부터 황순원은 장편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3. 1. 소설 창작 경향
황순원의 단편은 주로 현재형 문장을 사용하고 직접적 대화보다는 감각적 묘사와 서술적 진술이 주를 이룬다. 이를 두고 김현은 "그가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10] 그 때문에 그의 소설은 '시적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옛날 이야기나 전설을 현재의 사건과 융합시키는 환상적인 수법을 통해 소설에 설화적 분위기를 부여했다.황순원은 1937년 첫 작품을 발표한 후 198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긴 문학 경력 동안 식민지배, 이념 대립, 한국 전쟁, 산업화, 군사 독재 등 다양한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평범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역경 자체가 아니라 역경 속에서도 빛나는 한국인의 저항력과 가장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견되는 사랑과 선의였다.[1]
시집 여러 권과 장편소설 8편을 발표했지만, 황순원은 20세기 한국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로 여겨졌던 단편소설 작가로서 가장 큰 찬사를 받았다. 특히 초기에는 일본어로 글을 쓰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했다.[3] (염상섭도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 황순원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별"(1940), "황토기"(1942), "독짓는 늙은이"(1944), "소나기"(1952), "학"(1953), "소나기"(1959) 등이 있다.
예를 들어 "학"에서는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두 소년 시절 친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발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소나기"는 두 아이들 사이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부각한다. 황순원의 단편소설에는 순수함의 그릇으로서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늪"과 "별"에서도 어린 시절의 덧없음에 대한 우려가 나타난다.[1]
황순원은 1950년대부터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한국 전쟁 중 세 병사의 삶을 그린 "목넘이 마을의 개"(1960)가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다. "해와 달"(1962-65)은 서울 도시의 과거 불가촉천민 계층의 삶을 묘사하고, "무지개"(1968-72)는 급속도로 현대화되는 한국에서 서구 문화와 토착 문화의 복잡하고 문제적인 융합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 샤머니즘의 성 역할을 소설에서 다룬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3]
3. 2. 주요 작품
황순원은 20세기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단편소설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3]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글을 쓰기를 거부한 작가로 유명하다.[3] (염상섭도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별"(1941), "황토기"(1942), "독짓는 늙은이"(1950), "소나기"(1952), "학"(1953)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현대 한국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학"은 이념 대립 속에서도 우정을 잃지 않은 두 소년의 이야기를, "소나기"는 순수한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황순원의 작품에는 순수함을 간직한 아이들이 자주 등장하며, "늪"과 "별"에서는 어린 시절의 덧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1]
1950년대부터는 장편소설 창작에도 힘을 쏟았는데, 한국 전쟁 중 세 병사의 삶을 그린 "목넘이 마을의 개"(1960)가 대표적이다. "해와 달"(1962-65)은 서울 도시 빈민층의 삶을, "무지개"(1968-72)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서구 문화와 전통 문화의 융합을 다루고 있으며, 한국 샤머니즘의 성 역할을 다룬 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
황순원의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종류 | 발표 연도 | 제목 | 비고 |
---|---|---|---|
단편 | 1941년 | 별 | 『인문평론』 |
단편 | 1942년 | 황로인 | |
단편 | 1950년 | 독짓는 늙은이 | 『문예』 |
단편 | 1952년 | 소나기 | 1979년 영화화, 2002년 한일 공동 TV 드라마화, 한국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 |
단편 | 1953년 | 학 | |
단편 | 1956년 | 잃어버린 사람들 | 『현대문학』 |
중·장편 | 1960년 | 목넘이 마을의 개 | |
중·장편 | 1964년 | 일월 | 완성 |
중·장편 | 1968년 | 움직이는 성 | 『현대문학』에 연재 |
3. 3. 주제 의식
황순원의 단편은 주로 현재형 문장을 사용하고 직접적 대화보다는 감각적 묘사와 서술적 진술이 주를 이룬다. 이를 두고 김현은 "그가 단편까지를 시의 연장으로 본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10] 그 때문에 그의 소설은 '시적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옛날 이야기나 전설을 현재의 사건과 융합시키는 환상적인 수법을 통해 소설에 설화적 분위기를 부여했다.황순원은 1937년 첫 작품을 발표한 후 198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긴 문학 경력 동안 황순원은 식민지배, 이념 대립, 한국 전쟁, 산업화, 군사 독재 등 다양한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평범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역경 자체가 아니라 역경 속에서도 빛나는 한국인의 저항력과 가장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견되는 사랑과 선의였다.[1]
염상섭도 일본어로 글을 쓰기를 거부한 작가였다.[3] 황순원은 "별"(1940), "황토기"(1942), "독짓는 늙은이"(1944), "소나기"(1952), "학"(1953) 등 현대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학"에서는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두 소년 시절 친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발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소나기"는 두 아이들 사이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부각한다. 황순원의 단편소설에는 순수함의 그릇으로서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늪"과 "별"에서도 어린 시절의 덧없음에 대한 우려가 나타난다.[1]
황순원은 1950년대부터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한국 전쟁 중 세 병사의 삶을 그린 "목넘이 마을의 개"(1960)가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다. "해와 달"(1962-65)은 서울 도시의 과거 불가촉천민 계층의 삶을 묘사하고, "무지개"(1968-72)는 급속도로 현대화되는 한국에서 서구 문화와 토착 문화의 복잡하고 문제적인 융합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 샤머니즘의 성 역할을 소설에서 다룬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3]
4. 수상 경력
亞細亞自由文學賞|아시아 자유 문학상중국어(1955년), 예술원상(1961년), 3·1문화상(1966년),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1983년), 인촌상(1987년)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과 금관문화훈장(2000년)을 받았다.[12]
5. 기타
황순원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해외에도 소개되었다. 일본어 번역으로는 장장길이 번역한 「곡예사」(창토사, 1974년), 삼지이리승이 번역한 「곡예사」(이와나미쇼텐, 1988년), 강상구가 번역한 「죽을 곳」(백서방, 1992년), 芹川哲世가 번역한 『움직이는 성』(일본기독교단출판국출판서비스, 2010년) 등이 있다.
5. 1. 가족 관계
5. 2. 영화 출연
1970년 이형표가 감독한 영화 《시집은 가야지요》에 방진훈[11] 역으로 조연하여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하였다.5. 3. 추모 사업
황순원은 아시아자유문학상(1955), 예술원상(1961), 3·1문화상(1966),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1983), 인촌상(1987)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1970)과 금관문화훈장(2000)을 받았다.[12]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klti.or.kr/ke[...]
2013-09-03
[2]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3]
서적
The Descendants of Cain
M.E. Sharpe
[4]
웹사이트
Hwang Sun-won's 100th Birthday
https://doodles.goog[...]
2015-03-26
[5]
웹사이트
ファン・スンウォン(黄順元)とは
https://kotobank.jp/[...]
2022-09-10
[6]
웹사이트
黄順元(ファン・スノン)の短編小説「にわか雨」
http://world.kbs.co.[...]
2019-07-02
[7]
웹인용
작가 황순원 연대기
http://www.sonagivil[...]
양평군 소나기마을
2012-11-02
[8]
웹인용
황순원의 연대기
http://www.soonone.c[...]
황순원 사이버 문학관
2008-11-17
[9]
서적
카인의 후예
[10]
서적
안과 밖의 변증법
문학과지성사
[11]
기타
[12]
웹사이트
황순원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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