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경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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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경황후는 전한 경제의 황후이자 한 무제의 어머니로, 왕지(王娡)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김왕손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점술가의 예언에 따라 황태자 유계(훗날 경제)에게 바쳐졌다. 경제의 총애를 받아 여러 공주를 낳았으며, 아들 유철(무제)을 낳은 후 황후가 되었다. 무제가 즉위한 후에는 황태후가 되었으며, 기원전 126년에 사망하여 남편 경제와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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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황후 | |
---|---|
기본 정보 | |
![]() | |
휘 | 왕지 |
성 | 왕 (王) |
존호 | 효경황후 (孝景皇后) |
출생 | 기원전 180년대? 괴리현, 전한 |
사망 | 기원전 126년 6월 22일, 전한 |
매장지 | 양릉, 함양시, 섬서성 |
배우자 | 금왕손 한나라 경제 |
자녀 | 금수, 수성군 양신장공주 남궁공주 융려공주 한무제 |
아버지 | 왕중 |
어머니 | 장아, 평원군 부인 |
생애 | |
재위 | 기원전 150년 6월 3일 ~ 기원전 141년 3월 9일 |
칭호 | 황후 |
전임 | 황후 박씨 |
후임 | 황후 진씨 |
2. 생애
왕지(王娡)는 경제가 죽고 아들 유철이 황제에 오르자 황태후가 되었고, 기원전 126년에 사망하여 경제와 함께 양릉에 합장되었다.
무제는 즉위 후 왕태후의 가족들에게 작위를 내리는 등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어머니 장아는 평원군으로 봉해졌고, 이복 형제인 전분과 전승은 제후로 봉해졌다. 또한 전 남편 김왕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금속을 찾아 수성군으로 봉하고 많은 재산을 하사했다.
왕태후는 아들 무제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복 형제 전분은 왕태후의 승인으로 무장군 사령관이 되어 군사 업무를 넘어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 두태후의 영향력과 균형을 이루었으나, 기원전 135년 두태후가 사망하면서 조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후 전분은 재상이 되었지만, 무제가 점차 성숙해지면서 전횡을 일삼기도 했다. 기원전 133년 마읍 전투 실패 후 무제가 책략가 왕회를 처형하려 하자, 전분과 왕태후가 변호했으나 무제는 이를 거부하고 왕회를 자결하게 했다. 그러나 기원전 132년에는 왕태후의 요청에 따라 두영을 처형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혼인
왕지(王娡)는 왕중(王仲)과 장도의 손녀 장아(臧兒) 사이에서 태어났다.[3] 왕중이 죽자 장아는 전씨(田氏)에게 재가하여 전분, 전승 형제를 낳았고, 왕지는 어머니를 따라 전씨 집에서 살았다.왕지는 김왕손(金王孫)과 혼인하여 딸 금속을 낳았다.[3] 그러나 장아는 점술가로부터 두 딸이 모두 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왕지를 김왕손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황궁에 시녀로 보냈다. 왕지는 당시 황태자였던 유계의 총애를 얻어 평양공주, 남궁공주, 융려공주를 낳았다. 또한 유철(훗날의 전한 무제)을 임신했을 때 태양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문제가 죽고 기원전 157년에 경제가 즉위하자 유철을 낳았다. 왕지의 여동생 왕아후(王兒姁) 역시 경제를 모셔 아들 네 명을 낳았다.
당시 경제의 황후 박씨는 자식이 없었고, 율희 소생의 서장자 유영이 황태자로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누나 관도공주는 율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경제에게 율희를 헐뜯고 유철을 칭찬했다. 결국 박씨가 폐위되고, 율희는 유폐되었으며 유영은 폐위되어 임강왕으로 강등되었다. 왕부인은 관도공주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기원전 150년 황후에 책봉되었고, 아들 교동왕 유철은 황태자가 되었다.
2. 2. 황제의 후궁이 되다
왕지는 왕중(王仲)과 장도의 손녀 장아(臧兒)의 장녀로 태어났다. 왕중이 죽자 장아는 전씨(田氏)에게 재가하여 전분·전승 형제를 낳았고, 왕지는 어머니를 따라 전씨 집에서 살았다. 이후 김왕손(金王孫)과 혼인하여 딸 금속을 낳았으나, 어머니 장아가 딸이 귀해질 것이라는 점괘를 듣고 김왕손과 강제로 이혼시킨 후 황궁에 시녀로 보냈다.[3] 왕지는 당시 황태자였던 유계의 총애를 받아 평양공주·남궁공주·융려공주를 낳았다. 유철을 임신했을 때 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4] 문제가 죽고 기원전 157년 유계가 즉위한 해에 유철을 낳았다. 왕지의 여동생 왕아후(王兒姁) 역시 경제를 모셔 아들 넷을 낳았다.박씨 황후는 자식이 없었다. 경제의 장남 유영은 율희 소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경제의 누나인 관도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관도공주는 딸을 유영과 혼인시키려 했으나 율희가 거절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관도공주는 왕지와 손을 잡고 율희를 모함했다. 결국 유영은 태자에서 폐위되고 율희는 죽음을 맞았다.
관도공주와 사이가 좋았던 왕부인은 기원전 150년 황후에 책봉되었고,[4] 아들 유철 역시 황태자에 올랐다.[5]
2. 3. 황후가 되다
경제의 정실 황후였던 박황후는 자식이 없었다. 경제의 장남 유영은 경제가 총애하던 후궁인 이부인에게서 태어났으며, 기원전 153년 5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거만해졌고, 다른 후궁들을 총애하는 경제에게 질투심을 느껴 자주 분노를 터뜨렸다.[4]경제의 누나인 관도장공주 유표(劉嫖)는 자신의 딸 진교(陳嬌)를 유영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이부인은 관도공주가 종종 새로운 후궁을 경제에게 소개한다고 불평하며 무례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이 모욕에 화가 난 관도장공주는 경제가 이부인을 총애하지 않도록 부추겼다.[4]
기회를 엿보던 왕씨는 자신의 다섯 살 된 아들 유철을 진교와 결혼시켜 결혼 동맹을 맺었다. 관도공주는 끊임없이 경제 앞에서 이부인을 비난했다. 경제는 이부인에게 자신이 죽으면 나머지 아들들을 잘 돌볼 것이냐고 물었으나, 이부인은 무례하게 거절했다. 이로 인해 경제는 분노했고, 유영이 왕위를 계승하고 이부인이 태후가 되면 많은 후궁들이 기부인과 같은 운명을 겪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4]
왕씨는 대신을 설득하여 경제에게 유영이 이미 태자이므로 이부인을 황후로 삼으라고 조언하게 했다. 이부인을 황후로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경제는 격분하여 이부인이 관리들과 공모했다고 믿었다. 그는 제안을 한 대신을 처형하고, 기원전 150년에 유영을 임강왕(臨江王)으로 강등시켜 수도 장안에서 추방했다. 이부인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가택 연금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죽었다.[4]
박황후가 폐위된 후 황후 자리는 비어 있었다. 유철을 가장 총애하던 경제는 기원전 150년 6월 6일에 왕씨를 황후로 삼았다.[4] 유철은 황후의 적장자가 되었고, 6월 18일에 태자로 책봉되었다.[5]
2. 4. 황태후 시절
王娡|왕지중국어는 기원전 141년 경제가 사망하자, 태자 유철이 무제로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6]무제는 즉위 후, 왕태후의 가족들을 기리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어머니 장이는 평원부인으로 봉해졌고, 이복 형제들은 제후로 봉해졌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김수(金俗)는 무제가 직접 찾아가 수성군(修成君)으로 봉하고, 300명의 하인, 100에이커의 토지, 웅장한 저택을 하사했다. 김수의 딸은 황족과 결혼했다.[6]
왕태후는 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그녀의 승인으로 이복 형제인 전분은 무장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군사 업무를 넘어 권력을 행사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인 두태후의 영향력과 균형을 이루었으나, 기원전 135년 두태후가 사망하면서 왕태후는 조정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6] 이후 전분은 재상이 되었지만, 무제가 점차 성숙해지면서 이 직책을 정당화했다. 기원전 133년, 마읍 전투에서 흉노 선우를 사로잡으려다 실패한 후, 무제는 주요 책략가인 왕회(王恢, 왕태후와 관련 없음)를 처형하려 했으나, 왕회는 전분에게 뇌물을 주었고, 전분은 왕태후에게 왕회를 변호해 달라고 설득했다. 무제는 중재를 거부하고 왕회를 자결하게 했다. 그러나 무제는 기원전 132년 왕태후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큰 외삼촌인 두영(竇嬰, 두태후의 사촌)을 전분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6]
왕태후는 기원전 126년 사망했으며, 경제와 함께 양릉에 합장되었다.[6]
3. 가계
4. 평가 및 영향
효경황후 왕씨는 아들인 한무제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6] 그녀의 승인으로 이복 형제인 전분이 무장군 사령관이 되어 군사 업무를 넘어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그녀의 영향력이 시어머니인 두태후의 영향력과 균형을 이루었으나, 기원전 135년 6월 두태후가 사망하면서 조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6]
마읍 전투에서 흉노 선우를 사로잡으려다 실패한 후, 한무제는 주요 책략가인 왕회(王恢, 효경황후와 관련 없음)를 처형하려 했다. 이때 전분은 왕회에게 뇌물을 받았고, 효경황후에게 왕회를 변호해 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한무제는 효경황후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왕회를 자결하게 했다.
효경황후는 기원전 126년 6월에 사망했으며, 두 번째 남편인 경제와 함께 묻혔다.
5. 대중문화
- 1996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한무제》에서 리젠췬이 연기했다.
- 2001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대 한 천자》에서 쉬린이 연기했다.
- 2011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미인심계》에서 왕리쿤이 연기했다.
- 2014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위자부》에서 위샤오판이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Shiji Suoyin
[2]
서적
Book of Han
[3]
웹사이트
中國第一個二手皇后:漢武帝的母親王娡-閱讀-新浪新聞中心
http://news.sina.com[...]
[4]
서적
Zizhi Tongjian
[5]
문서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史記索隠
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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