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분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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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분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태위와 승상을 역임했으며 무안후에 봉해졌다. 그는 경제 시대에 고귀한 신분이 되었고, 무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열후에 봉해졌다. 승상 위관이 사직하자 두영을 승상으로, 자신을 태위로 임명하도록 황태후에게 제안하여 관직에 올랐다. 이후 승상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관부와의 갈등, 두영과의 대립 끝에 실각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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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은 전한 무제 시대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젊은 나이에 표기장군과 대사마에 오르며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24세에 병사했으며, 그의 묘는 흉노를 짓밟는 말의 석상으로 유명하다. - 전한의 은택후 - 여록
여록은 전한 고황후 시기에 고황후의 신임을 받아 군권을 장악하고 조왕에 봉해지는 등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주살된 여씨 일족의 핵심 인물이다.
전분 (전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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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전분 |
한자 | 田蚡 |
생몰 | ? ~ 기원전 131년 |
관직 | |
전한의 승상 | 재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131년 |
봉호 | 무안후 |
가계 | |
아버지 | 전긍 |
어머니 | 왕씨 |
누이 | 효경황후 |
이복형 | 전안국 전인 |
아들 | 전갑 전최 전간 |
손자 | 전당 |
기타 | |
시대 | 전한 |
2. 생애
전분(田蚡)은 두영이 대장군이었을 때 제(諸) 조랑(曹郎)으로,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기에 두영에게 자식처럼 대우받았다.[1]
경제 말년에 중대부(中大夫)가 되면서 신분이 고귀해졌다. 그는 변설에 능했으며, 잡가의 반우(盤盂) 등의 책을 읽었다. 이복 누이 왕황후(王皇后)는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 경제 후 3년(기원전 141년)에 경제가 죽고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전분은 이복 누이가 황태후가 된 덕분에 열후(무안후)에 봉해졌다.[1]
빈객(賓客)을 모아 무제에게 추천했다.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 승상 위관이 사직하자, 전분은 두영을 승상, 자신을 태위로 임명하도록 황태후에게 암시했다. 결국 두영은 승상이 되었고, 전분은 태위에 임명되었다.[1]
회남왕 유안이 장안에 입조했을 때, 전분은 "폐하에게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고조의 가장 나이 많은 손자인 대왕 외에 누가 후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기뻐하며 전분에게 재물을 보냈다.[1]
두영과 전분은 유학을 좋아하여 조관을 어사대부에, 왕장을 낭중령에 임명했다. 또한 노(魯)나라 유학자 신공(申公)을 초빙하여 명당을 설치하고 관소를 폐지하며, 유학의 예에 따라 복제를 만들고 열후를 각자 영지로 보내는 정책을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두태후는 황로(黃老)를 좋아했고, 외척과 공주는 후국(侯國)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아 두영 등을 두태후에게 모함했다. 이듬해 조관이 황태후에게 상소를 중단하도록 제안하자, 두태후는 노하여 조관과 왕장을 내쫓고 두영과 전분을 파면했다.[1]
건원 6년 (기원전 135년), 전분은 승상이 되었다. 그가 상주한 안건은 모두 재가되었으며, 추천한 인물이 갑자기 이천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무제는 "그대의 인사는 끝났는가? 나도 사람을 임용하고 싶은데."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분이 소부의 용지를 받아 저택을 넓히려 하자, 무제는 "결국에는 무고(武庫)까지 차지하려는 건가."라며 분노했다. 전분의 저택은 사치를 극도로 누렸고, 풍요로운 전원을 소유했으며, 보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읍의 역에서 책임을 져야 했던 왕회에게 뇌물을 받고 이복 누이 왕황후를 통해 왕회의 사면을 청탁하기도 했다.[1]
전분은 두영의 친구 관부와 대립했고, 서로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관부의 연회 폭언을 빌미로 전분은 관부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려 했다. 두영은 변호하며 구하려 했지만, 어사대부 한안국 이하 대신들의 의견도 갈렸고, 결국 두영도 무제에게 문책받았다. 두영은 경제의 유언으로 정치에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기록이 없어 사형당했다. 원광 4년 (기원전 131년), 관부와 두영이 처형되었다. 얼마 후 전분도 온몸에 통증이 생기는 병에 걸렸고, 무제가 무당에게 காரணம்을 묻자 두영과 관부가 채찍으로 때려 죽이려 한다고 했다. 곧 전분도 사망했고, 무안후 작위는 아들 전염이 이었다.[1]
이후 회남왕 유안의 반란 계획이 발각되었을 때, 유안과 전분의 대화를 알게 된 무제는 "만약 무안후(전분)가 살아 있었다면 일족을 몰살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
2. 1. 황제의 총애를 받다
두영이 대장군을 지내던 시절, 전분은 제조랑(諸曹郞)이었다. 이때 전분은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고, 두영은 전분을 아들처럼 대하였다.[1]경제 말년에 전분은 신분이 고귀해져 중대부가 되었다. 그는 말솜씨가 좋고 《반우》(盤盂)를 비롯한 잡가의 서적을 읽었는데, 효경황후는 전분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1]
경제가 죽고 무제가 즉위하니, 전분은 효경황후가 황태후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졌다. 전분은 빈객을 모아 무제에게 천거하였다.[1]
승상 위관이 면직되고, 승상과 태위의 후임을 누구로 할지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적복이 전분을 설득하여, 전분은 태후에게 귀띔을 하였고, 결국 두영과 전분은 각각 승상 · 태위가 되었다.[1]
두영과 전분은 유학을 좋아하여, 유학자 조관을 어사대부에, 왕장을 낭중령에 임명하였다. 또 노나라의 신공을 초빙하여 명당(明堂)을 설치하고 관소를 폐지하여 유학의 예를 따라 복식 제도를 갖추고 열후를 봉국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듬해 조관이 황태후에게는 아뢰지 말 것을 권하니, 노한 두태후는 조관·왕장을 내쫓고 전분·두영을 파면시켰다.[1]
전분은 파면되었지만 총애를 받았으며, 종종 건의가 받아들여졌다. 시류에 민감한 사람들은 두영에서 전분으로 갈아타기 시작했고, 전분은 점차 오만해졌다.[1]
2. 2. 권력 투쟁과 승상 등극
두영이 대장군을 지내던 시절, 전분은 제조랑(諸曹郞)으로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기에 두영은 전분을 아들처럼 대하였다.경제 말년에 전분은 신분이 고귀해져 중대부가 되었다. 그는 말솜씨가 좋고 《반우》(盤盂)를 비롯한 잡가의 서적을 읽었으며, 효경황후는 전분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경제가 죽고 무제가 즉위하면서 전분은 효경황후가 황태후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졌다. 전분은 빈객을 모아 무제에게 천거하였다.
승상 위관이 면직되자, 승상과 태위의 후임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적복이 전분을 설득하여, 전분은 태후에게 귀띔을 하였고, 결국 두영과 전분은 각각 승상 · 태위가 되었다.[1]
두영과 전분은 유학을 좋아하여, 유학자 조관을 어사대부에, 왕장을 낭중령에 임명하였다. 또 노나라의 신공을 초빙하여 명당(明堂)을 설치하고 관소를 폐지하여 유학의 예를 따라 복식 제도를 갖추고 열후를 봉국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조관이 황태후에게는 아뢰지 말 것을 권하니, 노한 두태후는 조관·왕장을 내쫓고 전분·두영을 파면시켰다.[1]
전분은 비록 쫓겨났지만 총애를 받았고, 때때로 진언이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두영에서 전분으로 갈아탔고, 전분은 점점 오만해졌다.[1]
건원 6년(기원전 135년) 전분은 승상이 되었다. 전분이 제시한 안건은 전부 채택되었고, 추천한 사람들은 단번에 2천 석에 이르렀다. 무제는 농으로 전분에게 자신도 임용을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1]
전분은 소부의 땅을 자신의 집을 넓히는 데 쓰게 해달라고 하였다. 무제는 "이제는 무기고까지 차지할 셈인가!"라고 말하며 노하였다. 전분의 집은 매우 사치스러워, 비옥한 농원을 갖추었고 재화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1]
2. 3. 전횡과 몰락
전분은 비록 쫓겨났지만 총애를 받았고, 때때로 진언이 받아들여졌다. 줄을 서려는 사람들은 두영에서 전분으로 갈아탔고, 전분은 점점 오만해졌다.[1]건원 6년(기원전 135년)에 전분은 승상이 되었다. 전분이 제시한 안건은 전부 채택되었고, 추천한 사람들은 단번에 이천석에 이르렀다. 무제는 농으로 전분에게 자신도 임용을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1]
전분은 소부의 땅을 자신의 집을 넓히는 데 쓰게 해달라고 하였다. 무제는 "이제는 무기고까지 차지할 셈인가!"라고 말하며 노하였다. 전분의 집은 매우 사치스러워, 비옥한 농원을 갖추었고 재화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1]
전분은 두영의 친구인 관부와 대립하였는데, 서로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관부가 잔치에서 폭언을 내뱉은 일로 전분은 관부를 죽일 것을 상주하였는데, 두영이 이를 구해내려 하였으나 어사대부 한안국 이하의 의견이 갈렸고 결국 송사는 효경황후의 노골적인 비호를 받은 전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원광 4년(기원전 131년)에 관부와 두영은 처형되었다.[1]
얼마 후 전분은 온몸이 아파지는 병에 걸렸는데, 무제가 무당을 시켜 알아보니 무당은 두영과 관부가 전분을 매질하여 죽이려는 것이라고 아뢰었다. 머지않아 전분 또한 죽었고, 작위는 아들 전염이 이었다.[1]
원삭 연간, 회남왕 유안이 모반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울러 유안이 예전에 입조하였을 때, 전분이 유안에게 당신이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아첨하여 재화를 받은 사실 또한 밝혀졌는데, 이를 전해 들은 무제는 만일 전분이 살아있었다면 일족을 모두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였다.[1]
3. 평가
전분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그의 평가는 사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전분에 대한 평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그의 행적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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