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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목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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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목성황후는 청나라 가경제의 며느리이자 도광제의 비(妃)로, 도광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니오후루씨 가문 출신으로, 가경 원년(1796년) 도광제와 혼인하여 적복진이 되었으나 가경제 즉위 전에 사망했다. 도광제는 즉위 후 그녀를 황후로 추존하고 '효목'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이후 '효목온후장숙단성각혜관흠부천유성성황후'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묘소 공사 과정에서 문제로 인해 보화곡으로 개장되었으며, 서청릉의 목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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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목성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효목성황후의 예복 초상화
효목성황후의 예복 초상화
(알 수 없음)
씨족니오후루 (鈕祜祿) (출생 시)
씨족 (혼인 후)아이신 교로 (愛新覺羅)
출생1781년 (건륭 46년)
사망1808년 5월 17일 (가경 13년 1월 21일)
배우자도광제 (1796년 결혼, 1808년 사망)
매장지서청 동릉의 목릉
아버지부얀달라이
시호효목온후장숙단성각혜관흠부천유성성황후 (孝穆溫厚莊肅端誠恪惠寬欽孚天裕聖成皇后)
만주어 시호hiyoošungga cibsunggo šanggan hūwangheo

2. 생애

효목성황후는 에빌룬의 5대손녀이며, 상서 부얀다라이(布顔達賚)의 딸이다. 가경제 원년(1796년) 면녕과 가례를 올렸으나, 도광제 즉위 이전에 사망하여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

2. 1. 가경제 시대

가경제 원년(1796년) 12월 22일, 니오후루씨는 면녕(훗날의 도광제)에게 시집가 적복진(嫡福晉)이 되었다.[1] 가경 13년(1808년) 1월 21일(2월 17일)에 사망하였다.[1]

2. 2. 도광제 시대

도광제가 즉위하자 황후로 추존되었고, "효목(孝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남편의 시호를 더하여 최종적으로 "효목온후장숙단성각혜관흠부천유성성황후(孝穆溫厚莊肅端誠恪惠寬欽孚天裕聖成皇后)"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1828년, 동청릉에서 누수가 발생하여 침수가 일어났다.[3] 1829년 니오후루씨의 관은 임시로 보화곡 정전(寶華峪正殿)으로 옮겨졌으며,[3] 1835년 서청릉의 목릉으로 이장되었다.[3]

구릉 묘소는 시공 당시 효목성황후의 친척들의 비리로 인해 "용수구(龍須溝)"를 설치하지 않아 관이 침수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알게 된 도광제에 의해 보화곡(寶華峪)으로 개장되었는데, 도광제의 꿈에 나타나 침수를 알렸다는 전설이 있다.

2. 3. 사후

도광제가 즉위한 후 황후로 추존되었고, 효목온후장숙단성각혜관음부천유성성황후(孝穆溫厚莊肅端誠恪惠寬欽孚天裕聖成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1]

1820년 9월 2일, 가경제가 사망하고 민닝이 뒤를 이어 즉위하여 도광제가 되었다. 니오후루씨는 사후 "효목성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3]

1828년, 동청릉에서 누수가 발생하여 침수가 일어났다. 1829년, 니오후루씨의 관은 임시로 보화곡 정전(寶華峪正殿)으로 옮겨졌다. 1835년, 그녀의 관은 서청릉의 목릉으로 이장되었다.[3]

구릉 묘소는 시공 당시 효목성황후의 친척들의 비리로 인해 "용수구(龍須溝)"를 설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관이 침수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알게 된 도광제에 의해 보화곡(寶華峪)으로 개장되었다. 기이하게도 도광제의 꿈에 나타나 침수를 알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남편의 시호를 더하여 "효목온후장숙단성각혜관흠부천유성성황후(孝穆溫厚莊肅端誠恪惠寬欽孚天裕聖成皇后)"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3. 가계

효목성황후 가계
아버지호부상서를 지낸 부얀다라이(布彥達賚, 1801년 사망). 삼등공(三等公)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의 아버지아리군(1769년 사망). 어비륭의 손자.
아버지의 삼촌네친(1749년 사망). 1749년까지 병부상서를 지냈다.
아버지의 숙부펑성어(1777년 사망). 1770년 병부상서, 1773년 호부상서를 지냈다.


4. 시호 추증 과정

1796년 면녕(훗날의 도광제)과 가례를 올렸으나 도광제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하여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 도광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고, '효목(孝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함풍제 즉위 후에는 "효목성황후"(孝穆成皇后)라는 시호가 더해졌다.[2]

이후, 남편 도광제의 시호를 더하여 최종적으로 "효목온후장숙단성각혜관흠부천유성성황후(孝穆溫厚莊肅端誠恪惠寬欽孚天裕聖成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5. 일화

효목성황후의 친척들이 황후의 구릉 묘소를 건설할 때 비리를 저질러 "용수구(龍須溝)"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결과 관이 침수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고, 도광제가 이를 알게 되어 보화峪(寶華峪)으로 개장되었다. 기이하게도 도광제의 꿈에 나타나 침수를 알렸다는 전설이 있다.[1]

참조

[1] 문서 嘉慶元年 十一月 二十四日
[2] 문서 道光三十年 九月 二十二日
[3] 시 悼孝穆皇后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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