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민공 이경직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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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민공 이경직 묘역은 조선 시대 문신인 이경직의 묘역이다. 이경직은 학문적 재능과 강직한 성품을 갖춘 인물로, 광해군 때 관직에 진출하여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의주부윤, 전라도절도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병자호란 시기에는 청나라와의 외교에 힘썼다. 1640년 강화유수로 재직 중 사망했으며,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고 효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역에는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은 김류가 짓고 이정영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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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공 이경직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묘역 정보 | |
![]() | |
이름 | 효민공 이경직 묘역 |
한자 표기 | 孝敏公 李景稷 墓域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산57-10번지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105 |
지정일 | 1997년 12월 31일 |
수량 | 1기 |
2. 이경직의 생애와 업적
효민공 이경직(1577~1640)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 후손으로,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이다. 이항복과 김장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재능과 강직한 성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2. 1. 관직 생활
이경직은 선조 34년(160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했다.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광해군 때 승정원·시강원·춘추관·홍문관·병조 등에서 봉직했고, 광해군 9년(1617) 회답사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 폐위 사건 때 조회에 불참한 일로 탄핵받아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철산군 가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곳을 부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했는데, 백성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진다.2. 2. 인목대비 폐위 사건과 시련
1618년 인목대비 폐위 사건 때 조회에 불참한 일로 탄핵받아 5년간 향리에 머물렀다.[1]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철산군 가도(島)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그곳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했는데,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진다.[1]2. 3. 철산부사 시절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철산군 가도(加島)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가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철산군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이경직을 철산부사로 파견하였다. 이경직은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 명군을 감화시키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2. 4. 인조반정 이후 활동
1623년 인조반정 후 의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전라도절도사로서 왕을 호종했다. 그 뒤 수원부사와 개성유수를 지냈다. 1626년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으로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다. 1629년 도체찰부사로 활약했고 이후 호조참판,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모친상을 마친 뒤 1634년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다시 부친상을 당했고, 1636년 호군(護軍)에 제수되어 비변사 당상관을 겸하였다. 그해 12월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모화관에서 청의 장수를 만났으나 그들의 의도가 강화(講和)에 있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남한산성으로 왕을 뒤따라갔다. 산성에서 청과의 교섭에 있어 중국어에 능통한 그가 활약했고 도승지가 되었다.2. 5. 병자호란과 외교적 노력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 최명길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청나라 장수를 만났으나, 그들의 의도가 강화(講和)에 있지 않음을 알고 바로 남한산성으로 왕을 뒤따라갔다. 이경직은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교섭 과정에서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도승지가 되었다.1637년 봄, 인조가 서울로 환궁하자 호조판서로 승진하고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1639년 봄, 강화유수에 제수되어 전후 복구에 힘썼으나, 1640년 7월 병으로 임소에서 64세로 순직했다.
2. 6. 사망과 추증
1639년 봄 강화 유수에 제수되어 전후 복구에 힘썼는데, 1640년 7월 병으로 임소에서 64세로 순직했다.[1]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1] 시호는 효민(孝敏)이다.[1]3. 이경직 신도비
이경직 신도비는 1668년 3월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비각에 보호되어 있다.[3]
3. 1. 구조와 양식
신도비는 1668년 3월에 세워졌고 현재 비각(碑閣)에 보호되어 있다. 대좌(臺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신도비 양식을 따르고 있다. 대좌 윗면에는 연꽃잎을 새기고 앞면·뒷면에는 각각 귀면(鬼面)과 비운(飛雲)을 새겨 넣어 장식했다.[3] 비문은 친우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지었고 셋째 아들 형조판서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상단의 "贈右議政行戶曹判書諡孝敏李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도 이정영이 썼다. 비문 말미에 새겨진 이정영 추기(追記)에는 김류 사망 이후 이경직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진 사실과 큰형 이장영(李長英)과 작은형 이기영(李起英) 자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3] 신도비 왼편의 산자락에는 위로부터 부친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묘, 이경직의 묘, 아들 상주목사 이장영의 묘가 차례로 위치한다.[3]3. 2. 비문 내용
비문은 이경직의 친우인 영의정 김류가 지었고, 셋째 아들 형조판서 이정영이 글씨를 썼다. 머리전서(頭篆) 역시 이정영이 썼다. 비문에는 이경직의 생애와 업적, 인품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3]이정영의 추기(追記)에는 김류 사망 이후 이경직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진 사실과 큰형 이장영과 작은형 이기영 자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3]
참조
[1]
간행물
서울특별시문화재지정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1997-12-31
[2]
간행물
서울특별시 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명칭 변경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08-10-30
[3]
서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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