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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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시는 죄인의 목을 베어 전시하는 형벌을 의미하며, 한국과 일본에서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효수형이 존재했으며, 일본에서는 '고쿠몬'으로 불리며 죄인의 목을 옥사 앞에 걸어두는 형벌로, '교슈' 또는 '사라시 구비'라고도 불렸다.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 효수가 시행되었으며, 특히 에도 시대에는 중죄인에게 적용되는 형벌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효수형이 유지되다가 1879년에 폐지되었다. 효수 방식으로는 옥문대 위에 목을 전시하거나, 시중을 행진하는 '오지도'가 행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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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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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효수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효수형이 시행되었다. 특히 반역죄나 중범죄에 대해 효수형이 집행되었으며, 죄인의 목을 군중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매달아 공개함으로써 범죄 예방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일본에서는 '''고쿠몬'''(獄門)이라고 한다. 고쿠몬은 죄인의 목을 베어 옥사(獄舎) 앞 문에 걸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교슈(梟首) 또는 사라시 구비(晒し首)라고도 한다.
3. 일본의 효수
3. 1. 역사
15세기를 마지막으로 옥문에서의 효수는 행해지지 않게 되었지만, "옥문"이라는 단어는 그 후에도 살아남았다. 근세 초기의 『국역 일포사전』에서는 "옥문"을 "사형에 처해진 자의 목을 못 박거나 설치하는 곳"이라고 설명하여,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효수하는 장소로서 일반 명사화되었다[31][32]。
에도 시대에는 참수 후 효수하는 형벌로서 옥문이 법으로 정해졌다. 참수형인 사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었고, 죄상에 따라 시중 견인이 부가되기도 했다[4]。옥문에는 궐소가 부가형으로 과해졌으며, 시신은 시참에 사용되었다. 참수는 덴마초 감옥에서 집행하고, 효수하는 장소까지 비인과 검사의 동심이 짚단에 목을 넣어 행렬을 이루어 운반했다[5][4]。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혼초 4가에서 효수했다고 하며, 에도 시대 초기에는 쓰쿠다지마나 혼조 3쓰메 요코보리에서 옥문을 한 예가 있지만, 겐로쿠 연간 무렵부터 스즈가모리 형장과 고즈카하라 형장에서 효수하게 되었다[4]。출신지가 서쪽 나라인 경우에는 스즈가모리, 동쪽 나라인 경우에는 고즈카하라에서 옥문을 했지만, 분카 6년(1809년) 이후에는 에도 거주자에 대해서는 주소와 범행 장소에 따라 결정하게 되었다[4]。
효수 장소에는 옥문대(후술)를 세우고, 그 위에 목을 설치한다. 옥문대 옆에는 비인 번소, 도구 걸이, 죄상을 적은 버리는 팻말을 설치한다. 목은 3일 2밤 동안 효수되며, 그 동안 비인이 밤낮으로 번을 섰다. 기간이 끝나면 목은 버려졌지만, 버리는 팻말은 30일 동안 세워두었다[4]。
옥문 형벌은 강도 살인, 주인의 친족 살해, 지주나 집주인 살해, 가짜 저울이나 되 제조, 독약 판매 등에 과해졌다[6]。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효시'로 이름을 바꾸어 효수형이 계속 시행되었다. 1871년 (메이지 4년) 메이지 정부를 비판했던 요네자와 번사 구모이 다쓰오, 1874년 (메이지 7년) 사가의 난 주모자 중 한 명인 에토 신페이의 처형이 유명하다. 에도의 형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형률에서는 강도 살인, 강제 성교 살인, 가족 관계자 및 고용주 살인 외에도 사상(死傷)을 동반하지 않는 강도, 가족 관계자 및 고용주의 어머니 또는 아내에 대한 강제 성교, 고용주 상해, 탈옥, 금전 및 정부 공인 위조 등 인명 피해가 없는 범죄도 효시 대상이었다. 그러나 1870년 (메이지 3년) 12월 "신률강령"부터는 살인으로만 제한되었고, 1873년 (메이지 6년) 6월 13일 개정률례 역시 살인에만 적용되었으며, 주로 가족 관계자 살인에 적용되었다[37]。
1878년 (메이지 11년) 6월, 겐로인 회의에서 "효시형 폐지" 의제가 논의되었다. 고노 도시카마가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그는 에토 신페이에게 오쿠보 도시미치의 뜻에 따라 효시 판결을 내린 인물이다. 고노는 사형 집행 방법을 교수형으로 한정하는 의견서도 제출했다. 회의 결과 효시 폐지가 인정되었고, 1879년 (메이지 12년) 1월 4일 태정관 포고 제1호[38]에 의해 폐지되었다. 폐지 배경에는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중앙 집권 국가 형성 과정에서 형벌 공개형 폐지 필요성, 위정자와 지식인 사이에서 참수형의 혐오감과 공개형의 일반 예방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점이 있었다[37]。
겐로인 회의 후, 이나 이시는 불륜 의심과 부부 싸움 끝에 취침 중인 남편을 살해하여 10월 14일 시즈오카시 아베 강 강변에서 참수 후 효수되었는데, 일본 내 마지막 효수된 여죄수였다[33][34][39]。4일 후, 하야시 헤이지는 변호사 면허 취득 학비를 위해 5월 12일 23시에 타인의 집에 침입하여 부부와 장녀를 살해하고 차녀에게 상해를 입힌 죄로 효수 판결을 받았다[40]。
참수형 자체는 1882년 (메이지 15년) 1월 1일 시행된 구·형법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다.
효수 없는 참수 마지막 사례는 야마다 아사에몬이 1881년 (메이지 14년) 7월 27일 이치가야 감옥에서 강도 목적으로 일가족 4명을 살해한 이와오 다케지로, 가와구치 구니조에게 집행한 것이다[41]。돗토리현 사료에 따르면, 일본 법제사상 마지막 참수형 판결(당시 법에 적법)은 같은 해 12월 30일 도쿠다 데쓰오에게 내려졌다. 그는 1880년 (메이지 13년) 12월 21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4건의 침입 강도를 일으키고, 4번째 강도 때 집주인 어머니를 살해했으며, 사족 신분 박탈(제족)도 부가되었다[42]。
1886년 (메이지 19년) 12월, 아오모리현히로사키시 아오모리 감옥 앞에서 「아오모리의 남편 살해」사건 가해자 고야마 우메와 오노 조노스케의 공개 참수형이 마지막으로 행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사실이라면, 이는 사실상 마지막 참수형이자, 관헌에 의한 일본 내 일반 형법범 대상 마지막 비합법(당시 구·형법은 비공개 교수형만 해당) 사형 집행 및 공개 참수형이다[43]。
3. 1. 1. 고대・중세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래된 효수 기록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정미의 난에서 패배한 모노노베노 모리야 등의 시체를 "여덟 단(八段)으로 베어 여덟 나라에 흩어 효수(さらしくしさせ)"[1]했다는 것이다.
율령제 하에서의 효수 첫 사례는 덴케이 3년(940년) 다이라노 마사카도(『조신공기』『부상략기[2]』)의 예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노 나리아키 (『일본기략[3]』『쇼유키』『소기목록』), 다이라노 다다쓰네(『부상략기[5]』), 아베노 사다토・후지이노 쓰네키요 등(『부상략기[6]』『스이사키[7]』『백련초[8]』)의 효수 기록이 있다.
옥문에서의 효수는 호겐의 난, 지쇼・주에이의 난,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빈번하게 행해졌으며, 신제이(『백련초[13]』),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백련초[13]』『구간초[14]』), 미나모토노 요시모토(『백련초[15]』『아즈마카가미[16]』), 기소 요시나카(『백련초[17]』『아즈마카가미[18]』), 다이라노 통모리・다이라노 다다노리 등(『아즈마카가미[19]』), 다이라노 무네모리・다이라노 기요무네 등(『백련초[20]』『교쿠요[21]』『아즈마카가미[22]』), 조 나가시게(『백련초[23]』) 등이 옥문에서 효수되었다.
중세에는 조적이 옥문에서 효수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니치렌은 서장(書狀)에서 "일본국에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이미 모반자 26명…옥문에 목이 걸렸다"라고 말하며, 조적의 목은 옥문에 걸린다고 주장했다.
남북조 시대에는 옥문에서의 효수가 부활하여, 『태평기』에서는 기쿠 다카마사, 이토다 사다요시 (권12), 구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의 위수(僞首) (권12), 닛타 요시아키 (권18), 닛타 요시사다 (권20)가 "조적"으로 지정되어 옥문에 목이 걸렸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 중기 이후 유일한 옥문 효수 기록은 가키의 난에서 쇼군・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살해한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대한 것이다. 당시에는 목을 걸 능수버들도 없어져서, 나무를 새로 심었다고 한다(『사이토 모토쓰네 일기』 가키 원년 조).
3. 1. 2. 근세
에도 시대에는 참수 후 효수하는 형벌로서 옥문이 법정되었다. 서민에게 과해진 참수형인 사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로, 죄상에 따라 시중 견인이 부가되기도 했다.[3] 옥문 형벌은 강도 살인, 주인의 친족 살해, 지주나 집주인 살해 등 중범죄에 적용되었다.[6]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입국 이전에는 혼초 4가에서 효수했다고 하며, 에도 시대 초기에는 쓰쿠다지마나 혼조 3쓰메 요코보리에서 옥문을 한 예가 있지만, 겐로쿠 연간 무렵부터 스즈가모리와 고즈카하라의 형장에서 효수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4]
3. 1. 3. 근대
메이지 초기에는 '효시(梟示)'라는 이름으로 효수형이 계속 시행되었다. 1871년 메이지 정부를 비판했던 구 요네자와 번사(米沢藩士) 구모이 다쓰오(雲井龍雄), 1874년 사가의 난(佐賀の乱) 주모자 중 한 명인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의 처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879년(메이지 12년)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에 의해 효시형이 폐지되었다.
3. 2. 오지도(大路渡)
오지도(大路渡)는 옥문에서의 효수에 앞서, 검비위사가 죄인의 목을 창에 꽂아 대로를 행진하는 의식이다.[44] 1063년 아베노 사다토의 목을 검비위사 미나모토노 요리토시가 받아 창에 꽂아 서옥까지 행진한 것이 최초의 사례이며, 1441년 아카마츠 미츠스케의 효수까지 12건의 사례가 확인된다.[44]
3. 3. 옥문대(獄門台)
옥문대(獄門台)는 목을 거는 대로, 높이 6척(약 1.8미터)의 대에 못을 박아 목을 꽂고 점토로 굳혔다. 밤에는 목이 도난당하거나 야생견 등이 가져가지 않도록 통을 덮어씌우고, 수 명의 비인이 불을 피우며 불침번을 섰다. 옥문대 옆에는 죄상을 쓴 사찰(捨札)이 세워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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