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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배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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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무라 배척 사건은 1956년 일본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들이 후지무라 시게루 감독의 리더십, 불공정한 대우, 구단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고 퇴진을 요구하며 발생한 사건이다. 선수들은 다이에이 스타스 감독으로 취임 예정이던 마쓰키 겐지로를 만나 퇴진 요구서를 제출했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건이 공론화되었다. 구단은 후지무라 감독 유임을 결정하고 주동 선수들과의 재계약을 거부하며 갈등이 심화되었으나, 사회적 중재와 선수들의 조건부 타협을 통해 후지무라 감독 유임, 가네다 마사야스의 복귀, 선수단과의 계약 갱신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한신 타이거스의 팀 구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프로 야구계에 다양한 시사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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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배척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후지무라 배척 사건
다른 명칭후지무라 사에키 배척 사건, 제2차 문예 논쟁
발생 시기1956년
관련 인물후지무라 사에키
주요 내용신일본문학회 내에서의 후지무라 사에키 비판 및 제명 시도
배경
시대적 배경전후 일본의 문학계의 이념 대립 심화
신일본문학회의 변화일본공산당의 영향력 확대 및 계급문학 강조
후지무라 사에키의 입장민족문학 옹호 및 스탈린 비판
사건 전개
비판 시작1956년 신일본문학회 전국 협의회에서 후지무라 사에키에 대한 비판 제기
비판 내용민족문학 옹호, 스탈린 비판, 다자이 오사무 옹호 등
제명 시도신일본문학회 중앙위원회에서 후지무라 사에키 제명안 상정
찬반 논쟁제명 찬성론과 반대론 격렬하게 대립
결과제명안 부결, 후지무라 사에키는 신일본문학회를 자진 탈퇴
논쟁의 핵심 쟁점
민족문학 논쟁민족문학의 계급문학에 대한 우위성 주장
스탈린 비판스탈린 격하운동에 대한 상반된 평가
다자이 오사무 평가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이견
문학의 정치성문학의 이념적 역할과 자율성 간의 갈등
영향 및 의의
문학계의 분열 심화진보적 문학 운동 진영의 내분 격화
전후 문학 논쟁의 중요한 사례문학의 이념적 역할에 대한 논쟁 심화
후지무라 사에키의 입지 약화문단 내에서의 영향력 감소

2. 배경

1956년 11월 상순, 선수 12명과 매니저 겸 스카우트 아오키 이치조가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를 구단주 노다 세이조에게 제출했고, 이는 스포츠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12월 4일, 구단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시키고, 퇴진 요구에 관련된 가네다 마사야스, 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는 다음 시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구단 대표 도자와시 가즈타카가 관계자들과 협상하여 12월 25일 가네다와의 재계약을 발표했다. 12월 30일, 도자와시 구단 대표, 후지무라 감독, 가네다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1]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1991년)와 마쓰키 겐지로의 《타이거스의 성장》(1973년)에는 사건 발단 부분을 제외하면 위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스포츠 신문들은 최초 요구서 제출부터 보도를 과열시켰는데, 도자와시 구단 대표는 "현실보다 기사가 훨씬 앞서 있다"고 평했다. 따라서 사건 발단부터 해결까지의 자세한 과정은 관계자들과 후년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지만, 증언자나 시기에 따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2]

2. 1. 1950년대 한신 타이거스

1950년 2리그 체제가 출범하면서, 한신은 전시에 팀을 떠났던 마쓰키 겐지로가 감독으로 복귀했다(당초에는 선수 겸임). 마쓰키는 프로 야구 재편 문제로 주력 선수들이 이적하여 약체화된 팀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선수들은 마쓰키를 신뢰했지만, 1954년 시즌 후 마쓰키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4]。 당시 마쓰키는 후임으로 조감독이었던 후지무라 후미오를 추천했고, 세간에서는 후지무라나 미소노오 다카오 중 한 명이 감독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5]。 그러나 구단 대표였던 다나카 요시이치는 센트럴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를 통해 후지모토 사다하루를 초빙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 결국 구단주 노다 세이조가 직접 기시 이치로를 후임 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기시는 한신은 물론 프로 야구 경험이 전무했다. 기시는 베테랑과 신인 구분 없이 선수를 기용하는 방침을 내세웠고, 이에 후지무라와 사나다 시게조 등 베테랑 선수들은 강하게 반발했다[7]1955년 시즌 중반인 5월 하순, 기시는 병을 핑계로 휴양에 들어갔고[8], 후지무라가 선수 겸임 대리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3위로 이끌었다.

1956년, 후지무라는 선수 겸임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7월부터 8월까지 연승을 거듭하며 8월 11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를 5경기 차로 앞선 선두를 질주했다. 후지무라는 훗날 회고에서 당시 프런트로부터 "선수권 상대 팀을 분석하게 할까"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팀 내 불협화음으로 인해 "잠시만 기다려 달라. 사실 팀 내부가 이런 상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9]。 그러나 곧 연패에 빠지며 요미우리에 선두를 내주고 말았다.

한편, 당시 매니저 겸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가즈미는 노다 구단주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한신 전기 철도 본사에서 파견된 시모바야시 요시유키 전무와 의견 충돌이 잦아 뜻대로 일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10]。 아오키는 한신 고시엔 구장 야간 경기를 빌미로 노다에게 사표를 제출했지만, 노다의 설득으로 철회했다. 하지만 아오키는 선수들의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며 "이대로 두면 연말에 큰 사건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11]。 아오키가 지적한 '대우 문제'는 고야마 마사아키, 요시다 요시오, 미야케 히데후미 등 젊은 선수들이 주전으로 활약함에도 낮은 연봉을 받는 현실을 의미했다[12]。 선수 연봉은 후지무라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는데, 후지무라가 구단의 제시액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다른 선수들의 연봉도 낮게 책정되는 문제가 있었다[13]。 아오키는 시모바야시 전무가 한신 본사의 의향을 내세워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단했지만, 선수가 구단 전무의 사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여겨 후지무라에게 책임을 돌리기로 했다[14]

결국 1956년 시즌은 요미우리에 4.5경기 차 뒤진 2위로 마감되었다.

시즌 후 11월 2일, 다이에이 스타즈 감독으로 취임한 마쓰키가 한신을 방문하자, 선수들은 마쓰키의 감독 취임을 축하하는 모임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13명을 중심으로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가 작성되었다[15]。 아오키는 저서에서 "팀에서 절대 해고할 수 없는 13명을 모았다"고 밝혔다[16]。 아오키에 따르면, '배척파'는 가네다 마사야스와 연결된 멤버(도쿠아미 시게루, 타미야 겐지로, 시라사카 나가에 등), 아오키가 영입한 멤버(요시다 요시오, 고야마 마사아키, 미야케 히데후미 등), 사나다 시게조 중심 멤버(이시가키 가즈오 등)로 구성되었지만, 모두 마쓰키를 따르던 '마쓰키 파'였다[17]

2. 2. 후지무라 감독 체제와 선수들의 불만

1950년 2리그 체제(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로 전환되면서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전시(戰時)에 팀을 떠났던 마쓰키 겐지로가 복귀했다. 마쓰키는 프로 야구 재편 문제 당시 주력 선수들의 이적으로 약체화된 팀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쓰키는 선수들에게 신뢰를 받았지만, 1954년 오프 시즌에 감독직을 사임했다.[4] 당시 마쓰키는 조감독이었던 후지무라 후미오를 후임으로 추천했고, 세간에서는 후지무라나 미소노오 다카오 중 한 명이 감독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5] 그러나 구단 대표였던 다나카 요시이치는 센트럴 리그 회장인 스즈키 류지를 통해 후지모토 사다하루를 초빙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 결국 구단주인 노다 세이조가 직접 인선에 개입하여 기시 이치로를 후임 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기시는 한신은 물론 프로 야구 경험이 전무했다. 게다가 베테랑과 신인 구분 없이 선수를 기용하는 방침을 내세워 후지무라와 사나다 시게조 등 베테랑 선수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7] 1955년 시즌 중반인 5월 하순, 기시는 병을 핑계로 휴양에 들어갔고,[8] 후지무라가 선수 겸 대리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3위로 이끌었다.

1956년, 후지무라는 선수 겸임으로 정식 감독에 취임했다. 이 시즌 7월부터 8월까지 연승을 거듭하며 8월 11일에는 요미우리를 5경기 차로 앞서며 리그 선두를 달렸다. 후지무라는 훗날 회상에서 당시 프런트로부터 "선수권 상대 팀을 분석해볼까"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팀 내 불협화음이 발생하여 "잠깐만 기다려 달라. 사실 팀 내부가 이런 상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9] 그러나 곧 패배가 이어지며 요미우리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한편, 당시 매니저 겸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치조는 노다 구단주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한신 전기 철도 본사에서 파견된 시모바야시 요시유키 전무와 의견 충돌이 잦아 뜻대로 일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10] 아오키는 한신 고시엔 구장 야간 경기 때 노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노다의 설득으로 사표를 철회했다. 하지만 아오키는 당시 선수들의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연말에 사건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11] 아오키가 언급한 '대우 문제'는 싼 연봉으로 계약한 고야마 마사아키, 요시다 요시오, 미야케 히데후미 등 젊은 선수들이 주전이 되어도 연봉이 오르지 않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12] 계약 갱신 시 후지무라의 연봉을 기준으로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결정되었는데, 후지무라 자신이 구단의 제시 금액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13] 아오키는 시모바야시 전무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았지만, 선수가 구단 전무의 사임을 요구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후지무라에게 책임을 돌리기로 했다.[14]

결국 이 시즌 한신은 요미우리에 4.5경기 차로 뒤진 2위에 머물렀다.

3. 경과

1956년 11월 상순, 12명의 선수와 매니저 겸 스카우트 아오키 이치조가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 퇴진 요구서를 구단주 노다 세이조에게 제출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고, 이는 스포츠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2] 12월 4일, 구단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하고, 퇴진 요구에 관여한 가네다 마사야스, 사나다 주조 두 선수는 다음 시즌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구단 대표 도자와 가즈타카는 관계자들과 협상하여 12월 25일 가네다와의 재계약을 발표했다. 가네다와 사나다의 해고 보도는 이 사건을 세간의 관심사로 만들었고, 일본 야구 기구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의 요청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 등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12월 20일,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신 오사카 호텔(현재의 리가 로얄 호텔 전신)에서 후지무라와 가네다가 면담했다. 가네다는 후년 인터뷰에서 당시 "선수 은퇴는 이제 됐습니다"라고 했지만, '좋아. 내가 수렁으로 들어가겠다'는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후지무라는 "가네다와 협력하여 팀 운영에 일조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다음 날인 21일, 도자와는 가네다와 다시 회담하여 복귀를 약속받았고, 25일에 시즌 계약을 공식 발표했다. 도자와는 사나다에 대해서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아 탈퇴했다"고 설명했고, 사나다는 그대로 팀을 떠났다. 가네다 복귀로 다른 '배척 파' 선수들은 대응을 재촉받았고, 가미카제 쇼이치의 조언으로 '퇴진 요구서'를 철회했다.

12월 30일, 한신 본사에서 다미야도쿠아미가 도자와와 만나 합의했다. 도자와, 후지무라, 가네다는 각각 성명서를 발표했고, 후지무라 감독 유임과 가네다 등 선수들의 계약 갱신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도자와 대표를 중심으로 후지무라, 가네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새해 간사이 스포츠 신문 일면을 장식했다.

한편, 아오키는 다른 증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해고되어 다이에이에 입사한 후에도 한신 본사와 협상했다고 한다. 아오키는 자신과 가네다, 사나다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선수들은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했고, 이후 가네다 복귀, 사나다와 아오키 퇴단 조건으로 협상이 마무리 단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쿄 한신 후원 회장 개입으로 아오키는 '1인극'이 되었고, 12월 30일 다른 선수들에게 팀 복귀를 지시하며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3. 1. 퇴진 요구서 제출과 발각

1956년 11월 상순, 선수 12명과 매니저 겸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치조는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 퇴진 요구서를 구단주 노다 세이조에게 제출했다.[2] 이 사건은 스포츠 신문에 보도되면서 표면화되었다. 12월 4일, 구단 측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시키고, 퇴진 요구에 관여한 가네다 마사야스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는 다음 시즌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구단 대표인 도자와 가즈타카가 관계자들과 협상을 계속한 결과, 12월 25일 구단은 가네다와의 재계약을 발표했다. 12월 30일, 도자와 대표, 후지무라 감독, 가네다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당시 스포츠 신문들은 이 사건을 과열 보도했는데, 도자와 구단 대표는 "현실보다 기사가 훨씬 앞서 있다"고 평할 정도였다.[3] 이 때문에 사건의 발단부터 해결까지의 자세한 과정은 관계자들의 후년 증언에 의존해야 하지만, 증언자나 시기에 따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마쓰키 겐지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기록했고,[42] 도자와 구단 대표는 "그라운드에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팀을 보고 안심했다. 감개무량하다"라고 회고했다.[32] 아오키 이치조가 '진정한 이유'라고 언급한 선수 대우 문제는 "반년, 1년이 지나면 도자와 씨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후년의 발언처럼, 선수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형태로 마무리되었다.[40]

3. 2. 구단의 대응과 갈등 심화

1956년 12월 4일, 구단 측은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의 유임을 결정하고, 감독 퇴진을 요구했던 가네다 마사야스, 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는 다음 시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2] 구단 대표인 도자와 가즈타카는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선수들과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1월 16일, 도자와는 모든 선수들을 고시엔 구장에 모아 난카이 호크스와의 시범 경기 원정 중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자중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도자와는 아오키 이치조에게 사태 수습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으나, 아오키가 이를 거부하자 그를 '사건의 흑막'으로 지목하여 해고했다.[2]

11월 28일, 노다 세이조 구단주, 한신 본사의 마에다 상무, 도자와 구단 대표, 시모바야시 전무는 회의를 열어 후지무라 감독 유임과 가네다, 사나다와의 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12월 4일 구단 사무실에서 이를 발표했다.[2]

가네다와 사나다가 사실상 해고되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 내분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한신 팬들의 중재로 이어졌고, 이는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일본 야구 기구 리그 회장인 스즈키 류지의 요청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 두 선수도 중재역으로 오사카에 왔다.[2] 가와카미와 지바는 후지무라 및 가네다와 면담했고, 후지무라는 가와카미로부터 다시 한번 가네다를 팀에 복귀시킬 것을 권유받았다.[2]

12월 20일,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신 오사카 호텔(현재의 리가 로얄 호텔의 전신, 현존하지 않음)에서 후지무라와 가네다가 면담을 가졌다.[2] 이 자리에서 후지무라는 "가네다와 협력하여 팀 운영에 일조하고 싶다"고 제의했다.[2] 다음날인 21일, 도자와는 다시 가네다와 회담하여 복귀를 약속받았고, 25일에 정식으로 계약을 발표했다.[2] 이때 도자와는 사나다에 대해서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아 탈퇴했다. 이 사건과는 관계없다"고 설명했다.[2] 결국 사나다는 그대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가네다의 복귀로 다른 '배척 파' 선수들은 대응을 재촉받았다. 중재에 들어갔던 한신 팬 가미카제 쇼이치의 조언으로 '조건을 붙여 회사와 타협한다'는 형식으로 정책을 변경해 '퇴진 요구서'를 철회하게 되었다.[2] 12월 30일, 한신 본사에서 다미야와 도쿠아미가 도자와와 만나 합의했다.[2] 도자와 대표는 후지무라와 가네다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후지무라 감독의 유임과 가네다 등 다른 선수와의 계약 갱신을 하는 형태로 결착을 냈다.[2]

3. 3. 중재 노력과 해결 과정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 등 외부 인사들이 중재에 나섰다.[3] 한신 팬들도 중재에 참여하여 선수들과 구단 간의 대화를 주선했다. 가와카미와 지바는 후지무라 및 가네다와 면담했고, 후지무라는 가와카미로부터 가네다를 다시 팀으로 복귀시키라는 권유를 받았다. 한신 본사 마에다 상무는 "후지무라가 그렇게 말했다면 복귀시키겠다"고 말했다.[35] 12월 20일,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신 오사카 호텔(현재의 리가 로얄 호텔 전신, 현존하지 않음)에서 후지무라와 가네다는 면담을 가졌다.[36] 가네다는 가와카미, 지바와 만났을 때 "선수 은퇴는 이제 됐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좋다. 내가 수렁에 들어가겠다'는 심정이 되었다고 후년 인터뷰에서 밝혔다.[21]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후지무라는 "가네다와 협력하여 팀 운영에 힘쓰고 싶다"고 제의했다고 한다.[36] 그러나 후지무라의 후년 증언에 따르면, 가네다는 후지무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팀 동료인 와타나베 히로유키 이야기만 했고, 후지무라는 "어쨌든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한다.[35] 다음 날인 21일, 도자와시는 가네다와 회담하여 복귀를 약속받았고, 25일에 시즌 계약을 공식 발표했다.[37] 이때 도자와시는 사나다에 대해서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아 탈퇴했다. 이 사건과는 관계없다"고 설명했다.[37] 결국 사나다는 그대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가네다의 복귀로 다른 '배척 파' 선수들은 대응을 재촉받았다. 중재에 들어갔던 한신 팬 가미카제 쇼이치의 조언으로 '조건을 붙여 회사와 타협한다'는 형식으로 정책을 변경, '퇴진 요구서'를 철회하게 되었다.[38] 12월 30일, 한신 본사에서 다미야도쿠아미가 도자와시와 만나 합의했다. 도자와시 대표, 후지무라 감독, 가네다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후지무라 감독 유임과 가네다 등 다른 선수와의 계약 갱신을 하는 형태로 결착을 냈다.[39] 도자와시 대표가 중간에 서서 후지무라, 가네다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새해 간사이 지역 스포츠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아오키는 이 과정에 대해 약간 다른 증언을 남겼다.[40] 아오키는 자신이 해고되어 다이에이에 입사한 후에도 뒤에서 한신 본사와 협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오키는 자신의 주장만 관철하면 전철 노동조합도 곤란해질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과 가네다, 사나다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선수들은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가네다가 복귀하고 사나다와 아오키가 퇴단하는 대신 조건을 채워 협상이 끝나는 지점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도쿄의 한신 후원 회장이 개입해 가네다와 협상하고, 아오키는 '1인극'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안된다면 12월 30일을 기해 다른 선수에게 팀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형태로 해결한 것이라고 한다. 아오키는 이에 대해 "가네다는 합의점을 오인했다"고 말했다. 또한, 저서에서는 요구로 '후지무라 감독의 시즌 중 해임'을 낸 13명의 선수가 계약 갱신 시 다미야의 금액을 보고 납득했기 때문에 후에는 할당으로 물러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41]

4. 사건의 원인과 쟁점

1955년 일본 프로 야구 시즌이 끝난 후, 한신 타이거스 선수단 내에서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배경에는 복합적인 원인과 쟁점들이 얽혀 있었다.

선수들은 낮은 연봉과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가졌고, 고야마 마사아키, 요시다 요시오, 미야케 히데시 등 주력 선수들의 연봉은 그들의 활약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후지무라 감독의 선수 기용 방식과 소통 부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일부 선수들은 후지무라 감독이 스타 선수 위주로 기용하고 다른 선수들과 소통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1956년 일본 프로 야구 11월, 12명의 선수와 아오키 이치조가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를 노다 세이조 구단주에게 제출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선수들은 구단의 불투명한 운영 방식과 선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4. 1. 선수들의 대우 문제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낮은 연봉과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컸다. 고야마 마사아키, 요시다 요시오, 미야케 히데시 등 주력 선수들의 연봉은 그들의 활약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28] 이러한 대우 문제는 아오키 이치조가 '진정한 이유'라고 언급할 정도로 선수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28]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는 형태로 나타났다.[28]

4. 2. 후지무라 감독의 리더십 문제

藤村排斥事件|후지무라 배척 사건일본어에서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의 리더십은 선수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특히 선수 기용 방식과 관련하여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일부 선수들은 후지무라 감독이 스타 선수 위주의 기용을 선호하고 다른 선수들과의 소통이 부족하다고 느꼈다.[30]

미나미 만만의 《진호전》에 따르면, 후지무라 감독이 좋은 기회에만 대타로 나오는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선수들이 합의한 힛앤런 작전 성공을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증언이 있다.[30] 또한, 혼자만 타격 연습을 길게 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제기되었다.[30] 이러한 정황들은 후지무라 감독의 스탠드 플레이 성향과 선수들과의 소통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미나미 만만은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족을 리더십 문제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비교하며, 한신 타이거스에는 감독과 선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리더가 부족했다고 평가했다.[30]

4. 3. 구단의 운영 방식 문제

1956년 11월, 12명의 선수와 매니저 겸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치조가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를 구단주 노다 세이조에게 제출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선수들은 구단의 불투명한 운영 방식과 선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30]

특히, 한신 전기 철도 본사에서 파견된 시모바야시 요시유키 전무의 개입은 선수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11월 28일, 노다 구단주, 한신 본사의 마에다 상무, 도자와시 구단 대표, 시모바야시 전무는 회의를 열어 후지무라 감독 유임과 더불어 가네다 마사야스, 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는 다음 시즌 계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선수들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 가네다와 사나다는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 가네다는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팀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생각이었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이에 배척 파 선수들은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결속을 다졌다. 구단 측의 계약 갱신 제안에도 선수들은 응하지 않았고, 후지무라 감독은 2군을 단련하여 시즌에 임하겠다는 발언으로 선수들을 더욱 자극했다.[23]

5. 사건의 영향과 의의

후지무라 배척 사건은 단순한 감독 퇴진 요구 사건을 넘어, 당시 일본 프로 야구계에 만연했던 선수단의 열악한 처우와 구단의 불합리한 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5. 1. 한신 타이거스에 미친 영향

1956년 시즌 후,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신 타이거스는 큰 혼란을 겪었다. 이 사건은 선수단의 불만과 구단 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사건의 발단은 1956년 11월, 12명의 선수와 매니저 겸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치조가 구단 오너에게 후지무라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후지무라 감독의 리더십과 선수단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젊은 선수들의 낮은 연봉 문제와 후지무라 감독의 소통 부족을 문제 삼았다.

구단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시키는 대신, 퇴진 요구에 앞장섰던 가네다 마사야스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는 다음 시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구단 대표의 노력으로 가네다와의 재계약은 성사되었고, 결국 후지무라 감독과 가네다를 포함한 관계자들이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감독 퇴진 요구를 넘어, 선수단의 처우 개선과 구단 운영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였다. 선수들은 낮은 연봉과 불합리한 계약 조건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는 후지무라 감독의 소통 부족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일부 선수들은 후지무라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과 연습 태도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했다.

결국 1957년 시즌, 후지무라 감독은 성적 부진과 선수단 장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한신 타이거스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팀 분위기 쇄신과 선수단 재정비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6. 관련 인물

아오키 이치조는 선수 겸 매니저,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선수들의 대우 문제에 불만을 품고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 퇴진을 주도했다. 그는 젊은 선수들의 낮은 연봉 문제를 지적하며, 후지무라의 연봉을 기준으로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결정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오키는 이 사건이 선수들의 대우 개선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주장했다.

노다 세이조는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주였다. 선수들이 제출한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를 받고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도자와 가즈타카는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 대표였다. 노다 세이조 구단주를 대신하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수들과의 협상을 통해 가네다 마사야스의 복귀를 이끌어냈다.

가네다 마사야스는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였다.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에 가담했다가 구단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여러 중재 노력 끝에 팀에 복귀했다. 가네다는 이 사건이 마쓰키 겐지로와 아오키의 다이에이 이적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나다 주조는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였다. 가네다와 함께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에 가담했다가 구단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가미카제 쇼이치는 한신의 팬으로, 선수들이 구단과 타협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등 중재에 참여했다.

6. 1. 한신 타이거스

1956년 11월 상순, 아오키 이치조를 포함한 12명의 한신 타이거스 선수들이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문서를 노다 세이조 구단주에게 제출했고, 스포츠 신문이 이를 보도하면서 사건이 표면화되었다.[2] 12월 4일, 구단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시키고, 퇴진 요구에 가담한 가네다 마사야스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는 다음 시즌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도자와 가즈타카 구단 대표가 관계자들과 협상하여 12월 25일 가네다와의 재계약을 발표했고, 12월 30일 도자와 대표, 후지무라 감독, 가네다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며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부터 해결까지의 과정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당시 스포츠 신문 보도는 과열된 양상을 보였는데, 도자와 구단 대표는 "현실보다 기사가 훨씬 앞서 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3]

1950년 양대 리그 출범 이후 한신의 감독은 마쓰키 겐지로가 맡았다. 마쓰키는 선수들의 신뢰를 받았지만 1954년 시즌 후 사임했고, 후임 감독으로 기시 이치로가 임명되었다. 기시는 프로 야구 경험이 전무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1955년 시즌 도중 기시가 병으로 휴양하면서 후지무라가 선수 겸임 대리 감독으로 취임해 팀을 3위로 이끌었다.

1956년, 후지무라는 선수 겸임 정식 감독이 되었다. 시즌 중반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팀 내 불협화음이 발생했고,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한편, 매니저 겸 스카우트였던 아오키는 선수들의 대우 문제에 불만을 품고 구단주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아오키는 고야마 마사아키, 요시다 요시오, 미야케 히데후미 등 젊은 선수들의 낮은 연봉 문제를 지적하며, 후지무라의 연봉을 기준으로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결정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12][13]

시즌 종료 후, 선수들은 다이에이 스타스 감독으로 취임하는 마쓰키의 축하 모임을 빌미로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를 작성했다. 아오키는 저서에서 "팀에서 해고할 수 없는 13명을 모았다"고 밝혔다.[16] 이들은 가네다, 아오키, 사나다를 중심으로 그룹이 나뉘어 있었지만, 모두 마쓰키를 따르던 선수들이었다.[17]

아오키는 이 사건이 선수들의 대우 개선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주장했지만,[20] 가네다는 이를 부정하며 마쓰키와 아오키의 다이에이 이적이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다.[21] 당시 젊은 선수였던 요시다는 이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22]

아오키는 선수들의 모임을 언론에 유출했고, 다음날 신문에 보도되었다.[28] 후지무라는 선수들에게 불만을 제기했지만, 구단주는 사태 수습을 위해 도자와를 구단 대표로 임명했다. 도자와는 아오키를 해고하고 선수들과 협상했지만, 결국 후지무라 유임과 가네다, 사나다와의 계약 미체결을 발표했다.

가네다와 사나다는 해고 통보를 받았지만, 가네다는 기자회견을 통해 팀을 위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여러 중재 노력 끝에 가네다는 팀에 복귀했고, 사나다는 팀을 떠났다. 다른 선수들은 퇴진 요구서를 철회하고 구단과 타협했다.

1957년 시즌, 한신은 요미우리와 1경기 차로 2위에 머물렀다. 시즌 후, 후지무라는 감독에서 물러나고 다나카 요시오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6. 2. 그 외 인물

마쓰키 겐지로는 전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선수들의 신망을 받았다.[4] 1954년 감독직을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후지무라 후미오를 추천했다.[5] 후지무라 배척 사건 당시에는 다이에이 스타즈의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선수들이 마쓰키의 감독 취임을 축하하는 모임을 계기로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가 작성되었다.[15] 가네다 마사야스는 마쓰키가 "해고되면 내가 데려가겠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했으며,[18] 오이 히로스케는 마쓰키가 사나다 주조의 재계약 거절 결정 후 "스포츠 닛폰에서 사나다를 데려가 주지 않을까"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18]

미즈하라 시게루, 가와카미 데쓰하루, 지바 시게루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관계자들이다.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의 요청을 받아 사건 중재를 위해 오사카로 왔다. 가와카미와 지바는 후지무라 및 가네다와 면담했고, 후지무라는 가와카미로부터 가네다를 다시 팀으로 복귀시키라는 권유를 받았다.[35]

7. 평가 및 논란

이 사건은 1956년 아오키 이치조를 포함한 12명의 선수들이 후지무라 후미오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문서를 구단주 노다 세이조에게 제출하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알려졌다. 구단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시키고, 가네다 마사야스사나다 주조 두 선수와의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구단 대표 도자와시 가즈타카의 협상 끝에 가네다 선수와의 재계약이 이루어졌고, 관계자들의 성명서 발표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1]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1991년)와 마쓰키 겐지로의 《타이거스의 성장》(1973년)에는 이 사건의 발단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위와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언론 보도가 과열되면서, 도자와시 구단 대표는 "현실보다 기사가 훨씬 앞서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건의 자세한 전개 과정은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지만, 증언하는 사람이나 시기에 따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1]

7. 1. 엇갈리는 평가

1956년 11월 상순, 12명의 선수와 매니저 겸 스카우트인 아오키 이치조가 '후지무라 감독 퇴진 요구서'를 구단 오너 노다 세이조에게 제출했고, 스포츠 신문이 이를 보도하면서 사건이 표면화되었다. 12월 4일, 구단 측은 후지무라 감독을 유임하고 퇴진 요구에 관여한 가네다 마사야스사나다 주조 두 선수는 다음 시즌에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구단 대표 도자와시 가즈타카가 관계자들과 협상을 계속한 결과, 12월 25일 구단은 가네다와의 재계약을 발표했다. 12월 30일, 도자와시 구단 대표, 후지무라 감독, 가네다가 각각 성명서를 발표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1]

한신 구단의 역사서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1991년)와 마쓰키 겐지로의 《타이거스의 성장》(고분샤, 1973년)에는 발단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시 최초 요구서 제출 이후 스포츠 신문 보도가 과열되었는데, 도자와시 구단 대표는 "현실보다 기사가 훨씬 앞서 있다"고 평했다. 따라서 발단부터 해결까지의 자세한 과정은 관계자와 후년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증언자나 시기에 따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1]

참조

[1] 문서 正式に「阪神タイガース」となるのは1961年からであるが、その当時においても「阪神タイガース」が通称として使用されていた。以下の本文においては「阪神」で表記を統一する。
[2] 웹사이트 阪神球団公式サイト http://hanshintigers[...] 11月11日
[3] 서적 阪神タイガース 昭和のあゆみ 朝日新聞 11月15日
[4] 서적 タイガースの生いたち 松木
[5] 서적 阪神タイガース 昭和のあゆみ
[6] 문서 藤本はそれから7年後に戸沢一隆が球団代表の時代に監督に就任した。
[7] 서적 真虎伝
[8] 문서 「技術顧問」という肩書きが与えられた。
[9] 서적 真虎伝
[10] 서적 真虎伝
[11] 서적 真虎伝
[12] 서적 真虎伝
[13] 서적 真虎伝
[14] 서적 真虎伝
[15] 서적 真虎伝
[16] 서적 ここだけの話 プロ野球どいつも、こいつも……
[17] 간행물 プロ野球史再発掘(6) デイリースポーツ, 読売新聞 1956-11-16
[18] 서적 真虎伝
[19] 서적 ここだけの話 プロ野球どいつも、こいつも……
[20] 서적 ダイエー/オリックス球団買収の真相
[21] 간행물 プロ野球史再発掘(7)
[22] 서적 牛若丸の履歴書
[23] 서적 真虎伝
[24] 서적 真虎伝
[25] 서적 真虎伝
[26] 서적 真虎伝
[27] 서적 真虎伝
[28] 서적 ここだけの話 プロ野球どいつも、こいつも……
[29] 간행물 デイリースポーツ50年史
[30] 간행물 デイリースポーツ50年史
[31] 간행물 プロ野球史再発掘(7)
[32] 서적 阪神タイガース 昭和のあゆみ
[33] 서적 真虎伝
[34] 뉴스 朝日新聞 1956-12-10
[35] 서적 真虎伝
[36] 뉴스 読売新聞 1956-12-22
[37] 서적 真虎伝
[38] 서적 真虎伝
[39] 문서
[40] 서적 プロ野球史再発掘(6)
[41] 서적 ここだけの話 プロ野球どいつも、こいつも……
[42] 서적 タイガースの生い立ち
[43] 서적 真虎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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