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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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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무라 후미오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아수라의 후지무라",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36년부터 1958년까지 오사카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1940년대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는 뛰어난 타격 능력과 화려한 수비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1949년에는 MVP를 수상하고, 46개의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등 다양한 기록을 세웠다. 1956년 "후지무라 배척 사건"으로 은퇴 후,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1974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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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후미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지무라 후미오 (1948년)
후지무라 후미오 (1948년)
이름후지무라 후미오
원어 이름藤村 富美男
로마자 표기Fumio Fujimura
출생일1916년 8월 14일
출생지히로시마현 구레시
사망일1992년 5월 28일
신장173cm
체중79kg
포지션3루수, 2루수, 투수
투구우투
타석우타
등번호10 (영구 결번)
선수 경력
소속팀오사카 타이거스 (1936년 ~ 1938년)
한신군 (1943년 ~ 1956년)
오사카 타이거스 (1958년)
데뷔1936년 4월 29일
마지막 경기1958년 9월 28일
감독 및 코치 경력
소속팀오사카 타이거스 (1946년, 1950년 ~ 1957년)
고쿠테쓰 스왈로스 (1963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4년 ~ 1965년, 1967년 ~ 1968년)
수상
주요 수상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1949년)
베스트 나인 (3회)
사이클링 히트 (2회): 1948년 10월 2일, 1950년 5월 25일
명예의 전당 헌액1974년
영구 결번한신 타이거스 #10
통계
통산 타율0.300
통산 안타1,694개
통산 홈런224개
통산 타점1,126점
통산 승패34승 11패
통산 자책점2.43
통산 탈삼진183개
기타 정보
별칭후지산(フジさん)
관련 작품진호전(真虎伝)
해설해설자 후지무라 후미오의 명조

2. 선수 경력

후지무라 후미오는 1936년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투수와 2루수를 겸하며 활약했다. 초기에는 선발 투수로도 나섰으나 점차 구원 투수로 주로 등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인해 5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중단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으며, 이 해는 투수로서 실질적인 마지막 시즌이었다. 이후 타격에 집중하여 1949년에는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고, 1950년에는 센트럴 리그 초대 수위 타자에 올랐으며, 1953년에는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등 뛰어난 타격 능력을 선보였다.

투수로서 통산 0.756이라는 높은 승률을 기록했으며, 타자로서 통산 1,694안타, 224홈런, 1,126타점, 타율 0.300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특히 일본 야구 연맹 시절(1948년)과 현재의 양대 리그 시대(1950년)에 각각 사이클 히트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2] 3루수 부문에서 총 세 차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인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다시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다. 1974년에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일본 프로 야구 전문가인 짐 올브라이트는 후지무라를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

2. 1. 프로 입단 전

藤村 富美男|후지무라 후미오일본어는 4남 4녀 중 일곱째(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레 해군 공창에서 근무했고, 둘째 형 역시 같은 공창 야구팀의 간판 선수로 제1회 전일본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전 구레(全呉)' 팀의 6번 타자 겸 2루수로 출전한 경력이 있다. 당시 구레 지역은 상급 학교가 없어 고등 교육 기관 출신 교사들이 야구를 전파한 다른 지역과 달리, 구레 해군 공창 직원들 사이에서 야구가 먼저 퍼져나갔다.

후지무라는 쓰루오카 가즈토와 동갑으로, 구레 시 니카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6] 야구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는 니카와강 강변에서 야구를 즐겼으며, 훗날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가 되는 유키 스스무와 집이 가까웠다. 유키 스스무의 형 유키 토시하루는 후지무라와 함께 1934년 여름 고시엔 우승 당시 팀의 주장을 맡았다. 후지무라는 심상 소학교 졸업 후 고등 소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며 아버지나 형처럼 해군 공창에 취직할 생각이었으나, 다이쇼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부터 "후지무라 군, 다이쇼 중학교에 와서 우리와 함께 야구를 하지 않겠나"라는 권유를 받고 1931년 다이쇼 중학교(5년제)에 입학했다.

1932년, 2학년(16세) 때 이미 팀의 에이스 투수가 되어 현내 라이벌인 쓰루오카 가즈토가 소속된 히로시마 상업, 그리고 노우토 와타루, 몬젠 마사토, 시라이시 가쓰미 등이 있던 고료 중학교 등을 제치고 봄과 여름 고시엔 대회에 총 6번 출전하는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아카시 중학교의 구스모토 다모쓰, 교토 상업의 사와무라 에이지, 주고쿠 상업의 요시다 마사오, 현립 기후 상업의 가토 하루오 등 당대 중등 야구의 명투수들과 명승부를 펼치며 '''고시엔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후지무라가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외야 스탠드에서 빈 상자 위에 올라서서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들을 위한 '빈 상자 장수'가 성업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시엔 최초의 슈퍼스타로 후지무라 후미오를 꼽는 사람도 많다.

1933년 봄 고시엔에서는 에이스 사와무라 에이지를 보유한 교토 상업에 패배했다. 같은 해 여름 고시엔에서는 준준결승에서 대회 3연패를 노리던 주고쿠 상업과 맞붙어 완봉패를 당했다.

1934년, 학교 이름이 구레항 중학교로 변경된 후 참가한 여름 고시엔에서는 후지무라 외에도 다카와 유타카, 쓰카모토 히로무, 호테하마 아키라, 하라 이치로 등 뛰어난 선수들이 포진하여 높은 종합력으로 전국의 강호들을 압도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에서는 구마모토 공업을 상대로 후지무라가 2안타 14탈삼진으로 완봉승을 거두었으며, 상대 팀의 강타자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3타수 3삼진(3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여름 고시엔 결승전 14탈삼진은 당시 최다 기록이었다.[7] 가와카미는 훗날 후지무라에 대해 "공 하나만 스쳤지만, 나머지는 안 돼. 11구로 3삼진이었던가. 턱수염도 났었고, 혼자만 어른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반면 후지무라는 "가와카미가 있었다니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두 사람은 프로 무대에서 '숙명의 라이벌'로 불리게 된다.[8] 우승기를 들고 개선한 선수들을 환영하는 구레 시민들의 열기는 연합 함대가 입항했을 때 이상이었다고 하며, 후지무라가 구레역에서 우승기를 흔들려는 순간 깃대 손잡이가 부러졌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1935년 여름 고시엔에서는 이이다 상업과의 경기에서 1경기 19탈삼진을 기록했다. 이는 1925년 여름 고시엔에서 히가시야마 중학교의 모리타 이사무가 세운 기록과 같은 것으로, 2012년 여름 고시엔에서 마쓰이 유키가 22탈삼진으로 경신하기 전까지 77년간 여름 고시엔 1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후지무라는 고교 4년간 고시엔 12경기에 등판하여 통산 111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1936년, 후지무라가 구레항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직업 야구 연맹이 결성되었다. 새로 창단된 오사카 타이거스(현 한신 타이거스)는 고시엔 최대의 스타였던 후지무라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전년도인 1935년 11월 11일 구단 역사상 4번째 선수로 계약을 맺어 투수로 입단하게 되었다. 당시 월급은 100JPY이었고,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원래 후지무라 자신과 학교 측은 호세이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신보다 먼저 영입 제안을 했던 나고야 긴샤치군은 후지무라의 아버지와 형에게 거절당했다. 이후 오사카 타이거스의 지배인 나카가와 마사토가 후지무라의 아버지와 형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낸 뒤, 정작 당사자인 후지무라에게는 상황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도장을 건네 계약서에 날인하게 함으로써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는 후지무라 본인이 반대하여 계약이 무산될 것을 우려한 아버지와 나카가와 지배인의 판단이었으나, 이로 인해 후지무라는 원했던 대학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훗날 후지무라의 장남 데쓰야와 차남 마사미는 호세이 대학에 입학했다). 후지무라의 아버지와 형이 프로 입단에 동의하게 된 데에는 당시 직업이 없던 후지무라의 둘째 형을 구단 매니저로 채용하겠다는 타이거스 측의 조건도 영향을 미쳤다.

이 계약 과정으로 인해 학교 측과 후지무라 가문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후지무라는 모교 야구부로부터 출입 금지 조치를 당했다. 당시 야구계는 6대학 야구가 주류였고, 막 창설되어 리그전조차 열리지 않았던 프로 야구는 사회적으로 '야쿠자 사업'처럼 여겨지며 평가가 매우 낮았다. 따라서 후지무라처럼 장래가 유망한 중학교 졸업생이 프로 구단과 계약하고 입단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1936년 2월, 후지무라가 둘째 형과 함께 타이거스 입단을 위해 구레역을 떠날 때 배웅 나온 사람은 가족과 소수의 친구들뿐이었으며, 이는 전국 우승 후 역 앞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후지무라가 처음 합류했을 당시 타이거스는 선수단 규모가 매우 작아 투수 7명, 포수 3명, 내야수 3명 등 총 13명에 불과했다. 팀의 초대 감독 모리 시게오는 내야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수 중에서 내야수 후보를 찾으려 했고, 후지무라와 게이우라 마사루가 투수와 내야수를 겸임하게 되었다. 후지무라는 2루수, 게이우라는 3루수를 맡았다.

2. 2. 오사카/한신 타이거스

후지무라는 1936년 일본 야구 연맹의 창립 시즌에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투수와 2루수를 겸하며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처음에는 선발 투수로 등판했으나 점차 구원 투수로 더 많이 활동했다. 프로 데뷔 첫해인 1936년, 타이거스의 첫 공식 경기(4월 29일, 대 나고야 긴코치군 전)에 선발 등판하여 1안타 완봉승을 거두는 인상적인 데뷔를 장식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데뷔전 완봉승 제1호 기록이다. 같은 해 7월 15일에는 도쿄 교진군과의 첫 대결에서 구원 등판하여 팀의 역사적인 첫 대 자이언츠전 승리 투수가 되었다. 투수로서 활약하는 동시에 팀의 내야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야수로도 출전했으며, 그해 가을 시즌에는 규정 타석에 미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홈런 2개로 일본 프로 야구 '''초대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3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2루수로 전향하여 2번 타순에서 활약하며 팀의 리그 2연패에 기여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 복무로 인해 4년간 팀을 떠나야 했다. 그는 남방 전선 등 여러 전장을 경험했으며, 이 기간 동안 부상을 입거나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1943년 여름, 팀에 복귀했을 때는 적성어 사용 금지 정책으로 인해 팀명이 '한신군'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오랜 군 생활의 영향으로 복귀 초기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1944년 봄 시즌에는 타격감을 되찾아 3루수로 전향했고, 타율 0.315, 25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46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59승 46패의 성적을 이끌었다. 이 해는 그가 투수로서 많은 이닝을 소화한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으며, 13승 2패, 평균자책점 2.44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1949년, 일본 프로 야구가 현재의 양대 리그 체제로 재편되기 전 마지막 시즌에 후지무라는 46개의 홈런, 142타점, 타율 0.332를 기록하며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1950년 양대 리그 분열 과정에서 벳토 카오루 등 많은 주축 선수들이 신생팀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하는 혼란 속에서도, 후지무라는 "나는 타이거스의 후지무라다"라며 팀에 잔류하여 전력이 약화된 팀을 지탱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 해 센트럴 리그 원년 시즌에 타율 0.362로 초대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이었던 시즌 191안타를 기록했다. 이 안타 기록은 1994년 이치로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44년간 일본 기록으로, 2010년 맷 머튼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60년간 한신 타이거스 구단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이 해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1953년에는 27홈런과 98타점으로 센트럴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 2관왕에 올랐다. 같은 해 요기 신스케가 입단하면서 주로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의 1루수 전향 소식을 들은 라이벌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미국에서 구입한 1루 미트를 선물했다는 일화도 있다.

1955년


1955년, 새로 부임한 기시 이치로 감독이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후지무라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을 배제하려 하자, 후지무라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감독과 충돌했다. 경기 중 감독의 교체 지시를 거부하는 등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선수단과의 갈등 속에서 기시 감독은 시즌 도중 불과 한 달 반 만에 경질되었고, 후지무라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부터는 정식으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감독 업무를 우선시하여 출전 기회는 줄었지만, 그해 대타로 출전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두 번째 대타 역전 사요나라 만루 홈런을 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현역 마지막 홈런이었다. 같은 해, 격렬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한신이 영입한 신인 이자키 킨야(마에오카 킨야)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약금 700만에 불만을 품고 오픈전에서 혹사시켜 부상을 입혔다는 비판도 받았다.

감독으로서의 독선적인 운영 방식, 선수들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 낮은 연봉 문제 등이 누적되면서 선수단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1956년 시즌 종료 후, 선수들이 후지무라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후지무라 배척 사건'이 발생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여파로 후지무라는 1956 시즌을 끝으로 현역 선수에서 은퇴하고, 1957년부터는 감독직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감독으로서는 통산 4시즌 동안 5할 8푼 3리의 준수한 승률을 기록했으며, 특히 1957년에는 팀을 리그 2위(우승팀 거인과 1.0 게임 차)로 이끄는 등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13][14]

1957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은 다나카 요시오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고 후지무라에게는 대타 요원으로 현역 복귀를 통보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후지무라는 계약 기간 중 발표 보류와 현역 복귀 여부의 신중한 결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 1958년 현역으로 복귀했으나 1경기에 선발 출전하는 데 그쳤고, 총 26타수 3안타(타율 .115)라는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결국 통산 타율 3할을 유지하기 위해 그해 11월 말 최종 은퇴를 선언하며 정들었던 타이거스 유니폼을 완전히 벗었다. 일본 시리즈 우승을 염원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한 것에 대해 후일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1959년 3월 2일, 고시엔 구장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공식 은퇴 경기(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가 열렸다. 후지무라가 오사카 타이거스 창단 시절부터 계속 사용했던 등번호 '''10'''번은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후지무라는 투수로서 통산 76경기에 등판하여 34승 11패, 승률 0.756, 방어율 2.34를 기록했으며, 타자로서 통산 1,694안타, 224홈런, 1,126타점, 통산 타율 0.300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3루수 부문에서 베스트 나인에 세 차례 선정되었다. 또한, 일본 야구 연맹 시절(1948년)과 현재의 양대 리그 시대(1950년)에 각각 사이클 히트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2]

197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일본 프로 야구 전문가 짐 올브라이트는 후지무라를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

3. 지도자 경력



후지무라 후미오는 선수 생활 중에도 지도자 역할을 겸임했으며, 은퇴 후에도 코치로 활동했다. 주요 지도자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50년부터 타격 코치를, 1954년부터는 수석 코치를 겸임했다. 1955년 시즌 도중, 세대 교체를 추진하던 기시 이치로 감독이 후지무라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다. 기시 감독은 젊은 선수 위주 기용 방침을 밝혔으나, 후지무라 등 베테랑 선수들은 이에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팀 내 혼란이 심화되면서 기시 감독은 시즌 개막 후 약 한 달 반 만인 5월 20일에 경질되었고, 후지무라가 감독 대행으로 취임했다. 이듬해부터는 정식으로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1956년에는 감독 업무를 우선시하며 선수로서는 대타로 주로 출전했고,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두 번째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현역 마지막 홈런이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후지무라는 독선적인 선수 기용과 작전 지시, 고압적인 태도, 승리 시 공로 독차지, 팬을 의식한 개인주의적 행동(늦은 타격 연습 시작, 긴 연습 시간 등) 등으로 선수단의 반감을 샀다. 또한, 유망주 이자키 킨야를 오픈전에서 혹사시켜 선수 생명에 지장을 주었다는 비판과 함께, 후지무라의 낮은 연봉이 다른 선수들의 연봉 책정 기준이 되면서 선수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결국 1956년 시즌 종료 후, 선수들이 후지무라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후지무라 배척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마쓰키 겐지로를 중심으로 한 반(反) 후지무라 파벌과의 갈등 및 선수들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결과였다. 구단 수뇌부가 사태 수습 과정에서 주모자로 지목된 선수들을 해고했다가 복귀시키는 등 미숙하게 대처하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사건은 한신 구단 내부의 갈등이 외부로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한신 구단이 스캔들에 자주 휘말리는 이미지의 시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후지무라는 195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1957년에는 감독직에 전념했다.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4시즌 동안 통산 승률 .583을 기록했으며, 특히 1957년에는 팀 내 악재 속에서도 거인과 1.0 게임 차의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이는 등[13]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14]

그러나 1957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은 우승 경쟁에도 불구하고 다나카 요시오를 후임 감독으로 임명하고 후지무라에게는 대타 요원으로의 현역 복귀를 통보했다. 계약 기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무라의 의사는 무시되었으며[15], 이는 전년도 배척 사건의 여파로 해석되기도 한다. 결국 후지무라는 1958년 선수로 잠시 복귀했으나 26타수 3안타(타율 .115) 1타점에 그쳤고, 시즌 후 완전히 은퇴하며 타이거스를 떠났다.

타이거스를 떠난 후에는 고쿠테쓰 스왈로스(1963년)와 도에이 플라이어스(1964년 ~ 1965년, 1967년 ~ 1968년)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4. 후지무라 배척 사건



1955년 감독으로 취임한 기시 이치로는 세대 교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젊은 선수를 우선적으로 기용하겠다. 팀의 대스타인 후지무라 후미오라도 타격이 부진하면 벤치에 앉힐 수도 있다"고 선언하며, 후지무라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보다 젊은 선수들을 우선 기용하는 방침을 세웠다. 기시 감독은 침체된 팀 분위기를 선수 교체를 통해 바꾸려 했지만, 이는 후지무라 등 베테랑 선수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팀은 심각한 내부 혼란에 빠졌다.

후지무라를 중심으로 한 선수들(이른바 '후지무라 파')은 기시 감독을 공개적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무시했고, 논프로 출신인 기시 감독에게 후지무라는 "이 풋내기가"라며 폄하하고 그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개막 3번째 경기인 하마마쓰 구장에서의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는, 안타를 치고 나간 후지무라에게 기시 감독이 대주자 야마모토 테츠야를 기용하려 하자, 후지무라는 많은 관중 앞에서 1루 베이스 위에서 "무슨 소리야! 나는 아직 할 수 있어!"라고 소리치며 대주자를 돌려보내는 이례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기시 감독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갈등 끝에 기시 감독은 시즌 시작 불과 1개월 반 만인 5월 20일, 34경기 만에 사실상 경질되었고, 후지무라가 감독 대행으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56년부터는 정식으로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1956년, 후지무라는 감독 업무에 집중하며 주전 자리를 내주었으나,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대타 역전 사요나라 만루 홈런을 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홈런은 그의 현역 마지막 홈런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격렬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한신이 영입한 유망주 이자키 킨야(마에오카 킨야)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700만의 계약금이 지급된 것에 불만을 품고, 오픈전에서 그를 혹사시켜 선수 생명에 지장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한신 선수단 내에서 후지무라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선수 겸 감독으로서 후지무라의 행동은 계속해서 논란을 낳았다. 상대 투수에 따라 자신의 출전 여부를 결정하고, 불필요한 히트 앤드 런 작전을 남발했으며, 선수들을 고압적으로 대하고, 승리의 공을 독차지하려 했으며, 선수들에게 막말을 하는 등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전부터 그의 스탠드 플레이를 좋지 않게 보는 선수들이 있었고, 타격 연습도 팬들을 의식해 일부러 늦게 시작하여 혼자 오랫동안 하는 등의 행동은 선수단 전체의 반감을 샀다. 또한, 후지무라가 구단이 제시하는 낮은 연봉을 받아들이자, 구단은 이를 기준으로 다른 선수들의 연봉을 책정하여 선수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신문 보도를 통해 후지무라가 "시끄러운 선수는 다음 시즌 2군으로 떨어뜨리겠다"고 공언하면서 선수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오사카 야구 클럽(한신 타이거스의 전신) 창립 이래 한신 역사상 유일하게 존재했던 파벌은 후지무라를 중심으로 한 '후지무라 파'와 이에 반발하는 마쓰키 겐지로 중심의 '마쓰키 파'였는데, 두 파벌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56년 시즌 종료 후, 언론까지 휘말리게 한 대규모 소동, 이른바 '''후지무라 배척 사건'''이 발생했다. 기시 감독을 몰아냈던 후지무라는 이제 자신이 선수단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구단은 당시 입원 중이던 다나카 요시카즈 대표를 대신해 토자와 카즈타카 신임 대표가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사건의 "배후 인물"로 아오키 이조, "주모자"로 가네다 마사야스와 사나다 시게조를 해고(이후 복귀)하는 강경책을 쓰면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신 OB들은 '후지무라 파', '마쓰키 파', '무파벌'로 명확히 나뉘게 되었고, 이후 '마쓰키 파'의 후계자인 무라야마 미노루가 팀의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OB회의 주류는 '마쓰키 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맥을 잃은 후지무라는 이후 한신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2리그 분열 이후 비교적 조용했던 한신 타이거스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내부 갈등과 스캔들이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팀이 되었다. 스포츠 신문들은 이러한 갈등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고, 스캔들 보도를 통해 판매 부수를 늘리려 했다. 이 사건은 "선수가 반발하면 감독이 물러난다"는 이른바 '선수 중심 체질'을 탄생시키고, "타이거스의 싸움은 기사거리가 된다"는 인식을 미디어에 심어준 부정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후지무라 배척 사건 보도는 그 시작이었으며, 스포츠 신문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후지무라는 1956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1957년부터는 감독직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배척 운동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감독으로서 무능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감독으로 재임한 4시즌 동안 통산 승률 0.583을 기록했다. 특히 1957년에는 시즌 중 유행성 감기로 주력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는 악재 속에서도 거인과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여 1.0 게임 차이로 아쉽게 2위에 머물렀다[13]. 1956년 감독 대행 취임 직후 20경기에서 15승 5패의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대해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는 "승부사적 기질만큼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평가했다[14].

그러나 1957년 11월, 우승 경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단 대표 토자와 가즈타카로부터 갑작스럽게 다나카 요시오로 감독을 교체하고, 후지무라에게는 대타 요원으로 현역에 복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던 후지무라는 계약 만료 시점인 11월 말까지 발표를 보류해 줄 것과, 현역 복귀는 캠프에서 컨디션을 보고 결정하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토자와 대표는 이를 거절하며 "(대타 요원으로서) 세간의 시선이 좋지 않으면 직함을 붙여주겠다"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했다. 후지무라는 훗날 이에 대해 "머리가 돌았다"고 회고했다[15]. 결국 후지무라의 의사는 무시된 채 감독 교체가 발표되었다. 이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감독 교체에 대해 남만만(미나미 노부오)은 전년도 배척 사건에 대한 구단의 징계성 조치가 아니었겠냐는 견해를 보였다.

1958년 현역으로 복귀했지만, 선발 출장은 단 1경기에 그쳤고, 7번 타자 1루수로 주로 경기 도중 교체 출전했다. 결국 그해 26타수 3안타(타율 .115), 1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통산 타율 3할을 유지하기 위해 11월 말 은퇴를 최종 결정하며 타이거스를 완전히 떠났다. 1950년 주력 선수들이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을 때 "나간 놈들이랑 남은 놈들이랑 어느 쪽이 이기는지 확실히 보여주자"고 다짐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을 염원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일본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고, 1984년 인터뷰에서는 리그 분열 당시 마이니치로 이적한 동료들이 그해 일본 시리즈에 출전한 것을 매우 부러워했으며, 긴 야구 인생에서 일본 시리즈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술회했다.

은퇴 기자회견은 고시엔 구장의 식당에서 열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선수에게는 다소 초라한 마무리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9년 3월 2일, 고시엔 구장에서 '후지무라 후미오 은퇴 경기'(오픈전, 상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열렸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은퇴 경기였다. 오사카 타이거스 창단 시절부터 후지무라가 달았던 등번호 '''10'''번은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5. 은퇴 이후

1956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14], 1957년부터 감독에 전념하게 되었다. 감독으로서는 4시즌 동안 승률 5할 8푼 3리의 성적을 남겼으며, 특히 1957년에는 팀 내 유행성 감기로 인한 선수 이탈 속에서도 우승팀 교진과 1.0 게임 차의 2위를 기록했다.[13][14]

그러나 1957년 시즌 종료 후, 구단 대표 토자와 카즈타카로부터 다나카 요시오로의 감독 교체 및 대타 요원으로서의 현역 복귀를 통보받았다. 후지무라는 계약 기간 중임을 이유로 발표 보류와 컨디션 점검 후 복귀 결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감독 교체가 발표되었다.[15] 이러한 결정 배경에는 전년도 '후지무라 배척 사건'의 여파가 있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1958년에 현역으로 복귀했으나, 선발 출장은 1경기에 그쳤고 26타수 3안타(타율 .115) 1타점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결국 통산 타율 3할을 유지하기 위해 그해 11월 말 최종 은퇴를 선언하며 타이거스를 완전히 떠났다. 평생의 염원이었던 일본 시리즈 출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게 된 것이다. 은퇴 기자회견은 고시엔 구장의 식당에서 열려, 과거의 명성에 비해 조촐하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59년 3월 2일, 고시엔 구장에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은퇴 경기'(오픈전,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개최되었다. 오사카 타이거스 창단 때부터 후지무라가 달았던 등번호 '''10'''번은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TV의 초대 해설자(1959년~1962년)를 맡았다. 이는 요미우리 TV가 방송 개시 전 할당받은 채널 번호 "10"번과 후지무라의 등번호 "10"번을 연결하여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고자 의뢰한 것이 계기였다. 1969년에는 긴키 방송 해설자와 오사카 스포츠 평론가도 역임했다.

코치로서는 1963년, 같은 고향 출신인 하마자키 신지 감독의 요청으로 고쿠테쓰 스왈로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아 도쿠타케 사다유 등을 지도했으나, 스나고시 구니노부 헤드 코치와의 불화로 1년 만에 퇴단했다.[16] 이후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요청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1군 타격 코치(1964년~1965년, 1968년)와 2군감독(1967년)을 맡았다. 도에이 시절에는 오스기 가쓰오의 입단을 권유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기술적인 지도보다는 정신론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선수들 사이에서는 그의 지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었다. 후지무라는 한신 외 다른 구단에서 코치를 맡은 이유에 대해 "코치로서라도 일본 시리즈를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훗날 밝혔다.

도에이 퇴단 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수도 공사 회사, 부동산 회사 등에서 샐러리맨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72년 주간 문춘과의 인터뷰에서는 한신 구단의 체질을 강하게 비판하며 "감독 시절 구단 대표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한신은 선수나 감독을 쓰고 버리는 곳"이라며 구단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은 후지무라 배척 사건 이후 구단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료였던 타미야 겐지로는 "자이언츠와 달리 한신은 OB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쁜 전통이 있다. 후지무라 씨 정도 되는 인물이 구장에 와도 다들 못 본 척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야구계와 거리를 두던 중, 1974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77년에는 배우로 변신하여 시대극 드라마 신・필살 사형인에서 암흑 살인 조직 '호랑이의 회' 두목 역으로 고정 출연했으며,[4] 1979년에는 영화 그 후의 의리 없는 싸움에도 출연했다. 1977년 말, 한신 구단이 후지무라를 총감독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고토 쓰구오 감독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대신 무보수 비상근 구단 사장 부속 어드바이저라는 직함으로 잠시 구단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1985년 한신 타이거스 우승 당시에는 오사카 스포츠 전속 평론가로서 축하 코멘트를 보냈고, 그해 고시엔 구장에서 만난 가와토 고조에게 "타이거스의 역사는 너희 같은 보결 선수들이 만들어 온 것이다. 그대로 젠체하고 있어라"라고 격려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18][19]

1988년 이후 병상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나, 그해 무라야마 미노루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시엔 구장에 '후지무라 시트'를 마련하는 등 구단과의 관계가 다소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다. 1992년 5월 28일, 효고현 고베시 주오구의 신코 기념 병원에서 당뇨병 합병증인 신부전으로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20] 그의 사망 소식에 고시엔 구장에는 조기가 게양되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은퇴 시 증정받았던 니시노미야시의 자택은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전파되어 현재는 빈터로 남아있으며, 입단 계약금으로 재건했던 구레시의 본가 역시 2001년 게이요 지진으로 붕괴되었다.

'''미스터 타이거스'''

후지무라 이후 무라야마 미노루, 타부치 고이치, 카케후 마사유키 등 여러 선수들이 '미스터 타이거스'로 불렸지만, 많은 팬들과 야구 관계자들은 후지무라 후미오야말로 '최초이자 유일한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평가한다. 라이벌 구단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아오타 노보루는 "미스터 타이거스는 저 아저씨(후지무라)밖에 없다. 2리그 분열 때 그가 한신을 나갔다면 지금의 한신도, 프로야구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으며, 가와카미 테츠하루 역시 "사무라이였다. 혼자서 팀을 지탱했다. 후지무라 씨가 다른 팀으로 갔다면 한신은 망했을 것"이라고 그의 존재감을 높이 평가했다.

팀 동료였던 요시다 요시오는 후지무라를 "한신 타이거스 역사의 상징"이라고 칭하며, 코야마 마사아키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화려한 슈퍼스타였다면 후지무라 씨는 야성미 넘치는 슈퍼스타였다. 전후 황폐했던 일본에 나타나 밝은 빛을 비춘 그의 공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24] 후지무라의 장례식에서 당시 OB 회장이었던 타미야 겐지로는 조사(弔詞)를 통해 "선배는 프로야구 역사 그 자체"라고 추모했다.

호시노 센이치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 중계로 본 후지무라의 끝내기 홈런 장면이 한신 팬이 된 계기였다고 밝혔으며, 가마모토 쿠니시게 역시 어린 시절 영웅이 후지무라였다고 회고했다. 카케후 마사유키는 후지무라가 '신사'를 강조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달리, '야만무사'나 '맹호'로 표현되는 한신 특유의 호쾌함과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2010년 리뉴얼 오픈한 고시엔 역사관에서는 영구 결번인 후지무라, 무라야마 미노루, 요시다 요시오 세 명의 공적을 특별히 기리는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6. 수상 및 기록

후지무라 후미오는 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투수와 타자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원조 이도류'로 평가받는다. 그는 오사카 타이거스(현 한신 타이거스)의 창단 멤버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선수 시절 MVP 1회, 수위타자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5회 등 다수의 주요 타격 타이틀을 석권했으며, 6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등 리그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1949년에는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46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MVP를 수상하는 등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또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두 번 달성한 선수이며[2], 2경기 연속 만루 홈런이라는 진기록도 가지고 있다. 3루수로서도 뛰어난 수비력을 보여주며 관련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투수로서도 통산 34승과 0.756이라는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일본 프로 야구 전문가 짐 올브라이트는 후지무라를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

6. 1.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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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수상 내역
타이틀횟수수상 연도
수위타자1회1950년
홈런왕3회1936년 추계, 1949년, 1953년
타점왕5회1944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3년
최다 안타 (당시에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며, 1994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2회1949년, 1950년
최우수 선수(MVP)1회1949년
베스트 나인 (3루수 부문)3회1950년 등


6. 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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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내역횟수연도
MVP1회1949년
베스트 나인6회1947년 ~ 1952년
수위타자1회1950년
홈런왕1회1953년
타점왕2회1944년, 195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74년


6. 3. 개인 기록



후지무라는 투수로서 통산 34승, 0.756의 높은 승률을 기록했으며[2], 일본 프로 야구에서 "원조 이도류"로 평가받는다. 1948년1950년 두 차례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는데, 이는 일본 야구 연맹 시대와 현재의 양대 리그 시대에 걸쳐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2] (1991년 마쓰나가 히로미가 달성하기 전까지). 당시에는 사이클링 히트 개념이 알려지지 않아 나중에 재조명되었다.

타자로서 통산 1,694안타, 224홈런, 1,126타점, 타율 0.300을 기록했다. 1949년에는 당시 신기록인 46홈런으로 MVP를 수상했고, 1950년에는 타율 0.362로 타격왕과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1953년에는 27홈런, 98타점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차지했다.

투지를 드러내는 플레이 스타일로 "아수라의 후지무라"로 불렸으며, 심판 판정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1948년 10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홈으로 돌진하며 포수 타케미야 토시아키에게 몸통 박치기를 하여 뇌진탕을 일으켰는데, 이는 포수 상대 몸통 박치기의 시초로 여겨진다.

겉모습과 달리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쓰키 겐지로는 후지무라가 승부 근성과 손재주 면에서 최고라고 평가했다.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3루 수비로도 유명했으며, 얇은 글러브를 사용하고 맨손으로 강습 타구를 잡아내는 플레이("맹인 후지무라")로 팬들을 매료시켰다. 수비 범위가 넓었고, 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경험했다.

팬들을 즐겁게 하려는 쇼맨십도 뛰어났다. 경기 전 연습부터 곡예 같은 수비와 타격을 선보였고, 투수 시절에는 다리 사이로 견제구를 던지기도 했다. 홈런을 치면 양손을 흔들며 베이스를 돌거나, 격렬한 슬라이딩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상 중 대타 홈런을 치고 한 발로 홈까지 들어온 일화도 있다. 이러한 플레이는 팬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지만, 때로는 스탠드 플레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상대 심리를 이용하는 플레이에도 능했다. 약점으로 알려진 코스의 공을 일부러 놓친 척하며 상대를 유인한 뒤 장타를 치는 모습에서, 상대를 속이는 행위를 뜻하는 "샤미센을 켜다"라는 말이 야구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기시타 시게루는 후지무라가 이러한 심리전에 능했다고 증언했다.

1948년, 화려하게 입단한 벳토 카오루에게 강한 경쟁심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장타력을 갖춘 벳토에 대항하기 위해 속칭 "빨랫대" 방망이를 사용했다는 설도 존재한다[21]. 다만, 구단사나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알려진 것과 같은 심각한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1950년 4월 22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상대 선발 투수를 파악하기 위해 선발 명단에 야수를 대신해 투수 호바 가즈오를 1번 타자 겸 좌익수로 기용하는, 이른바 정찰 멤버 작전을 처음으로 고안하여 감독 마쓰키 겐지로에게 제안했다.

1951년에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 해 10월 7일의 다이요 전에서 처음으로 "4번·투수, 후지무라 후미오"가 실현되어 고시엔 팬들은 술렁였다. 팀 순위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팬 서비스로, 감독 마쓰키의 멋진 지휘였지만, 후지무라는 선발 등판하여 4회까지밖에 던지지 않았는데 승리 투수가 되었다. 공식 기록원은 명 기록원이라고 불린 히로세 겐조였는데, 왜 룰상으로는 의문이 붙는 승리를 붙여버렸는가, 이것은 히로세가 "투수로 4번"인 후지무라에게 경의를 표하여 일부러 승리 투수로 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기록을 정리한 야마우치 이쿠시가 "원서대로 승리 투수로 한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1953년에는 4월 28일과 29일에 2경기 연속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2010년 현재, 프로 야구에서는 후지무라를 포함해 6명이 기록했지만, 후지무라는 그 제1호이다. 또한, 후지무라의 만루 홈런은 통산 7개인데, 그 중 1/3을 이 2일 동안 날린 셈이 된다.

1956년 6월 24일의 대 히로시마 카프 전에서, 카프의 에이스·하세가와 료헤이에게 0-1로 맞이한 9회말 2사 만루에서 3루 베이스 코치로 서 있던 선수 겸임 감독·후지무라는 "내가 대타다"라고 구심에게 알리고 타석에 들어서, 좌익선상으로 호쾌한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날려 경기를 결정지었다. 이 일화는 "'''대타 와시'''"로 유명하다. 이것이 후지무라 생애 마지막 홈런이었다.

오사카 타이거스 창설과 동시에 입단했기 때문에 한신의 등번호 '''10'''은 후지무라밖에 착용한 적이 없다. 「1선수밖에 달지 못했던 등번호」는, 전체 영구 결번 중에서도 유일한 사례가 되고 있다[22].
논란

  • 난바 사건: 1954년 7월 25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오사카 스타디움)에서는, 대타로 기용된 사나다 시게오의 타구 처리 판정을 둘러싸고 한신 측이 항의했을 때, 구심 스기무라 쇼이치로에게 폭행(어깨, 또는 프로텍터를 수차례 찔렀다고 한다)을 가해 퇴장을 선언받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후지무라가, 경기 재개 후 돌아온 자신의 타석에 서려고 하자, 팬들이 다시 그라운드로 난입하여 수습이 되지 않아 타이거스의 몰수 경기가 되었다. 오사카 스타디움에서의 소동을 겪고 센트럴 리그에서 후지무라에게 출장 정지 처분의 페널티가 가해짐으로써, 자신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1,014경기로 끊어졌다.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주목받게 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이다[23]. 연속 경기 출장을 알고 있던 감독 마쓰키 겐지로는, 후지무라에 대한 징벌을 막기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을 스기무라 구심에게 손을 댔다. 그러나, 그 노력은 보상받지 못했다. 이 사건을 야마토 구시는, 『진설 일본 야구사 7』(베이스볼 매거진사 간행)에서 "난바 사건"이라고 부르며, 『「헤이와다이 사건」과 더불어 프로 야구 사상, 쌍벽을 이루는 대소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교체 거부 사건: 1955년 4월 7일, 누마즈 시영 구장에서의 다이요 웨일스전, 7회 2사 상황에서 볼넷을 골라 출루하자, 감독 기시 이치로는 후지무라에게 대주자로 이시가키 가즈오를 보냈다. 그러나, 후지무라는 이에 반발하며 교체를 거부하려 했다. 이 사건이 기시의 경질에 큰 영향을 미쳤다.

7. 유산 및 평가

투수로서 후지무라는 통산 0.756이라는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는 사이클 히트를 두 번 달성했는데, 한 번은 일본 야구 연맹 시대인 1948년에, 다른 한 번은 현재의 양대 리그 시대에 기록하여, 두 시대에 걸쳐 사이클 히트를 달성한 유일한 선수이다.[2] 타자로서 후지무라는 통산 1,694안타, 224홈런, 1,126타점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 0.300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3루수 부문에서 세 차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의 '적색 배트', 오시타 히로시의 '청색 배트'와는 달리, 후지무라는 매우 긴 배트인 "빨래 건조대"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지무라는 "색을 칠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배트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골프 드라이버에서 영감을 받아 특별히 긴 배트를 주문 제작했다. 이 배트는 암모니아로 건조하면 좋다는 속설 때문에 항상 자택의 화장실에 10개 가까이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후지무라는 훗날 증언에서 배트 끝에 구멍을 뚫어 무게를 약간 줄였다고 밝혔다.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40홈런 이상을 기록했던 1949년에 대해 그는 "공이 멈춰 보였다거나, 실밥이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좌익수 스탠드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고 회상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빨래 건조대'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스탠드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선수 은퇴 후, 후지무라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복귀하여 팀을 이끌었다.

후지무라는 197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일본 프로 야구 전문가인 짐 올브라이트는 후지무라를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으며,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인 쿠퍼스타운 입성 자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3]

8. 기타

후지무라는 1977년 시대극 드라마 신 힛사츠 시오키닌에 배우로 출연했고, 1979년에는 구도 에이이치의 영화 그때, 그 시절에 출연했다.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별명은 무라야마 미노루, 타부치 고이치, 카케후 마사유키에게도 사용되지만, 후지무라를 특별하게 여기며 초대, 2대, 3대 같은 구분 없이 오직 후지무라 후미오만이 진정한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생각하는 팬들도 있다. 야구 관련 서적에서는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료 선수 코야마 마사아키, 요시다 요시오, 오쿠이 세이이치나 라이벌 선수 아오타 노보루, 언론 관계자들로부터도 비슷한 의견을 찾아볼 수 있다.

아오타 노보루는 "미스터 타이거스는 저 아저씨(후지무라)밖에 없어. 2리그 분열 때 아저씨까지 한신을 나갔다면 지금의 한신도, 지금의 프로 야구도 없었을 거야. 프로 야구가 이만큼 성장한 건 동쪽의 가와카미 테츠하루, 오시타 히로시, 서쪽의 후지무라가 있었기 때문이야. 무라야마, 타부치, 카케후도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불렸지만, 후지무라 아저씨에게는 미치지 못해. 미스터 타이거스는 후지무라 아저씨뿐이야"라고 말했으며, "요미우리 선수 아홉 명이 달려들어도 저 아저씨 한 명을 무너뜨려야 했다"고 회상했다. 가와카미 테츠하루 역시 "사무라이였습니다. 혼자서 정말 열심히 했죠. 후지무라 씨가 다른 팀으로 갔다면 한신은 망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 입단 당시 후지무라의 용구 담당이었던 요시다 요시오는 "여러 면에서 미스터 타이거스는 후지무라 씨뿐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요시다는 또한 "한신 타이거스의 역사는 선배들이 만들고 이어온 것입니다. 그 상징이 바로 후지무라 후미오 씨입니다. 가와카미 테츠하루 씨와 나란히 칭송받으며 전후 프로 야구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작은 부상에도 경기에 계속 나섰고, 연속 출장이 중단된 것은 구심을 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맹호 정신이죠. 와카바야시 타다시, 도이카키 타케시, 벳토 카오루 등 주축 선수들이 매일같이 팀을 떠날 때도 후지무라 씨는 유혹을 뿌리치고 한신에 남았습니다. 남자다움 때문이죠. 고토 츠구오, 시라사카 나가에, 카네다 마사야스 씨 등 한신에 남은 선수들과 무라야마 미노루, 코야마 마사아키가 요미우리에 맞서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야구계가 흥행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안도 모토오는 "어릴 때 본 후지무라 씨의 얼굴은 유니폼 소매에 있던 호랑이 그림과 똑같았다"고 말하며, 구단 창설 때부터 사용된 호랑이 엠블럼과 험악해 보이는 후지무라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고 회상했다. 코야마 마사아키는 "당시 '서쪽의 후지무라, 동쪽의 가와카미'라고 했지만, 가와카미 씨도 후지무라 씨처럼 인간적인 매력으로 관중을 끌어모으지는 못했습니다. 훗날의 나가시마 시게오가 '화려한 슈퍼스타'라면 후지무라 씨는 '야성미 넘치는 슈퍼스타'였죠. 야구인으로서 차원이 달랐습니다. 전쟁 직후 황폐해진 일본에 나타나 밝은 빛을 비춘 그의 공적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4]. 후지무라의 장례식에서 당시 OB 회장이었던 타미야 켄지로는 "팀의 대들보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선배는 프로 야구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어져 갈 맹호 정신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조사를 읽었다. 한신 구단 사장 미나미 노부오는 "한신이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후지무라 후미오 씨 덕분이라고, 어느 OB에게 물어봐도 그렇게 말합니다.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하면 역시 후지무라 씨입니다"라고 말했다.

호시노 센이치가 한신 팬이 된 계기는 후지무라의 팬이 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8~9살 무렵 쿠라시키의 전기점 앞에 설치된 가두 텔레비전에서, 검은 인파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처음 본 프로 야구 중계에서 후지무라가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홈 베이스를 밟은 뒤 동료들에게 헹가래를 받는 장면에 감격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가마모토 쿠니시게는 "초등학생 시절 저의 영웅은 '미스터 타이거스' 후지무라 후미오 씨였습니다. 멘코 놀이도 자주 했죠. 장래에 프로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카케후 마사유키는 "후지무라 씨는 미스터 자이언츠와 미스터 타이거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신사여야 한다'며 장발이나 금발, 수염을 금지한 자이언츠에 비해, 한신은 '야만무사'나 '맹호'라는 말로 표현되는 호쾌한 강함, 카리스마적인 박력이죠"라고 말했다.

2010년 3월 14일 리뉴얼 오픈한 고시엔 역사관에서는 영구 결번인 후지무라, 무라야마 미노루, 요시다 요시오 세 명에 대해 특히 그들이 남긴 공적을 집중적으로 전달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고 리뉴얼 발표 당시 보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Japan's Top Players http://baseballguru.[...] 2015-03-31
[2] 웹사이트 サイクルヒット達成者 http://www2u.biglobe[...] 2011-09-26
[3] 웹사이트 Who Else From NPB Might Be Worthy of Cooperstown? http://baseballguru.[...] 2015-03-31
[4] 웹사이트 新必殺仕置人とは https://kotobank.jp/[...] 2021-07-26
[5] 문서 『真虎伝』や関三穂『プロ野球史再発掘』(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に収録された証言や座談会での発言に見られる。
[6] 웹사이트 呉市立呉中央小学校ホームページ http://www.city.kure[...]
[7] 웹사이트 大阪桐蔭、春夏連覇!藤浪8球団1位ある https://web.archive.[...]
[8] 웹사이트 トリプルスリー~万能型野球人の証明 写真特集 藤村富美男 https://www.jiji.com[...] 時事通信社 2024-01-27
[9] 서적 特攻隊振武寮 講談社 2009
[10] 뉴스 【内田雅也の追球】ミスター・タイガースが熱望した「選手権」 さあCSを突破して、晴れ舞台へ https://www.sponichi[...]
[11] 문서 前年の青田を抜く。
[12] 웹사이트 阪神・中野 初回先頭打で先制点お膳立て 近本と最多安打争うリーグ2位111本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22-07-24
[13] 뉴스 【虎のソナタ】タカと新選組の強~い助勤 司馬遼太郎氏指摘していた? 日本Sでの強さ (2/2ページ) https://www.sanspo.c[...] 2021-07-25
[14] 문서 阪神タイガース 昭和のあゆみ
[15] 서적 プロ野球史再発掘(7)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87
[16] 서적 48歳の青春 : 球界彦左自伝 野球殿堂シリーズ(浜崎真二 著) / 古ほんや 板澤書房 / 古本、中古本、古書籍の通販は「日本の古本屋」 https://www.kosho.or[...]
[17] 서적 僕がテレビ屋サトーです 名物ディレクター奮戦記 文藝春秋 2004
[18] 서적 牙 江夏豊とその時代 講談社 2002
[19] 뉴스 스포츠ニッポン 2010-12-27
[20] 웹사이트 史上初の大調査 著名人100人が最後に頼った病院 あなたの病院選びは間違っていませんか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19-12-23
[21] 문서 吉田義男が著書『阪神タイガース』(新潮新書)や『牛若丸の履歴書』(日本経済新聞社)で紹介している。
[22] 뉴스 サンケイスポーツ 2008-09-29
[23] 간행물 プロ野球&メジャーリーグ大記録のウラ側 宝島社 2008-08-11
[24] 웹사이트 怖かったぁ 藤村富美男編 その二 こら、貴様! https://www.daily.co[...] 2023-10-09
[25]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7-09
[26] 웹사이트 阪神・浮き沈みが激しくも勝利数3位の伝統球団 https://column.sp.ba[...] 2022-09-28
[27] 웹사이트 100本塁打 https://npb.jp/histo[...] 2022-09-28
[28] 웹사이트 1000安打 https://npb.jp/histo[...] 2022-09-28
[29] 웹사이트 150本塁打 https://npb.jp/histo[...] 2022-09-28
[30] 웹사이트 1000打点 https://npb.jp/histo[...] 2022-09-28
[31] 웹사이트 200本塁打 https://npb.jp/histo[...] 2022-09-28
[32] 웹사이트 サイクル安打 https://npb.jp/histo[...] 2022-09-28
[33] 웹인용 포토 히스토리(일본 야구 기구 홈페이지) http://fan.npb.or.jp[...] 2010-07-11
[34] 문서 ‘진호전’({{lang|ja|真虎伝}})이나 세키 미쓰호 ‘프로 야구사 재발굴’(베이스볼 매거진사)에 수록된 증언이나 좌담회에서의 발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5] 뉴스 日대지진, 巨人 역사도 바꿨다…개막 연기 확정 https://sports.news.[...] 이데일리 20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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