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게이츠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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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휴 게이츠컬은 영국의 정치인이자 노동당 당수였다. 1906년 런던에서 태어난 게이츠컬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사회주의에 심취했고, 1945년 리즈 사우스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47년 연료동력장관, 1950년 경제문제 담당 장관을 역임하며 정부 내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게이츠컬은 1955년부터 1963년 사망할 때까지 노동당 대표를 지냈으며, 국유화에 대한 입장을 재검토하고 핵 군축 문제,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반대 등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1963년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정치적 유산은 현재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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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게이츠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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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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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휴 토드 네일러 게이츠컬 |
출생일 | 1906년 4월 9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런던 |
사망일 | 1963년 1월 18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안장 장소 | 세인트 존-앳-햄스테드, 런던 |
배우자 | 안나 도라 크레디터(1937년 결혼) |
국적 | 영국 |
정당 | 노동당 |
모교 | 뉴 칼리지, 옥스퍼드 |
자녀 | 2명 |
경력 | |
소속 의회 | 영국 |
지역구 | 리즈 남부 |
임기 시작 | 1945년 7월 5일 |
임기 종료 | 1963년 1월 18일 |
이전 의원 | 헨리 찰턴 |
다음 의원 | 멀린 리스 |
관직 | |
명예 칭호 | 존경하는 분 |
존경 칭호 접미사 | CBE |
정부 직책 | |
임기 시작 | 1947년 10월 24일 |
임기 종료 | 1950년 2월 15일 |
총리 | 클레멘트 애틀리 |
이전 장관 | 매니 신웰 |
다음 장관 | 필립 노엘베이커 |
임기 시작 | 1950년 10월 19일 |
임기 종료 | 1951년 10월 26일 |
총리 | 클레멘트 애틀리 |
이전 장관 | 스태퍼드 크립스 |
다음 장관 | 랩 버틀러 |
정당 직책 | |
임기 시작 | 1955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963년 1월 18일 |
부대표 | 짐 그리피스, 아neurin 베번, 조지 브라운 |
이전 대표 | 클레멘트 애틀리 |
다음 대표 | 해럴드 윌슨 |
임기 시작 | 1951년 10월 26일 |
임기 종료 | 1955년 12월 14일 |
대표 | 클레멘트 애틀리 |
이전 장관 | 랩 버틀러 |
다음 장관 | 해럴드 윌슨 |
임기 시작 | 1955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963년 1월 18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
이전 대표 | 허버트 모리슨 |
다음 대표 | 조지 브라운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휴 게이츠컬은 1906년 4월 9일 런던 켄싱턴에서 인도 공무원 아서 게이츠컬(1869~1915)과 애덜레이드 메리 사이의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3] 어릴 적 별명은 "샘"이었다. 게이츠컬 가문은 인도 육군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는 어린 시절을 미얀마(버마)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곧 재혼하여 버마로 돌아갔고, 그는 기숙학교에 남게 되었다.[4]
1927년부터 1928년까지 게이츠컬은 노팅엄셔 광부들을 대상으로 노동자교육협회에서 경제학 강의를 했다. 그의 헌장운동에 관한 논문은 1928년 WEA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그가 노동계급과 처음으로 교류한 경험이었다.[7] 게이츠컬은 결국 콜의 길드 사회주의와 산업별 노동조합주의 모두에 반대하게 되었고, 총파업이 이미 1921년의 실패한 3자 동맹 파업에서 시도되었던 전략(직접적인 노조 행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의 마지막 실패한 발작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이츠컬이 당시 노동당의 미래 지도자로 여겨졌던 오스왈드 모즐리에게 호의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게이츠켈의 아내는 그가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마가렛 콜(에번 더빈의 아내)과 노엘 홀은 그가 그랬다고 믿었지만, 파벌 분열에 반대했던 그는 1931년 모즐리의 신당에 가입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았다.[8]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1940년 5월 처칠 연립 정부 수립 이후 게이츠컬은 댈턴과 함께 경제전쟁부(Ministry of Economic Warfare)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며 정부 경험을 쌓았다.[9] 댈턴의 비서관으로서 게이츠컬은 사실상 수석 비서관(Chef de Cabinet)이자 신뢰받는 고문 역할을 했다. 댈턴과 함께 1942년 2월 무역위원회(Board of Trade)로 이동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광부 노조 지도자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들은 후에 1950년대 아뉴린 비반과의 갈등에서 그를 지지하게 된다.[23] 이러한 공로로 1945년 대영 제국 훈장 사령관(Commander)으로 임명되었다.
게이츠켈은 1946년 5월 에마뉘엘 "매니" 신웰(신웰) 아래에서 연료 및 동력부(Ministry of Fuel and Power)의 의회 차관으로 첫 장관직을 맡았다.[29] 그는 하원에서 석탄 국유화 법안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47년 연료 위기 당시에는 석탄 배분 장소를 결정하는 핵심 위원회를 운영했다. 또한, 1947년에는 하원에서 전기 국유화를 처리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드래곤 스쿨에서 공부하며 미래의 시인 존 베트제먼과 친구가 되었다.[5] 이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옥스퍼드 뉴 칼리지에서 G. D. H. 콜의 지도를 받으며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차티즘에 관한 장문의 에세이를 썼다. 1926년 영국 총파업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부를 지지했지만, 게이츠컬은 파업을 지지하며 옥스퍼드 동기인 에반 더빈 등과 함께 노동조합 신문 배포를 도왔다. 총파업 이후 6개월 동안 광부들을 위해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6] 1927년 철학, 정치, 경제학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노팅엄셔 광부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쳤고, 1930년대에는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정치경제학부 연구자이자 버크벡 칼리지 강사로 근무했다.[145]
게이츠컬은 빈에서 엥겔베르트 돌푸스 정부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보수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는 거부하며 수정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3. 학문 및 초기 정치 경력
게이츠켈은 G. D. H. 콜이 1931년 3월에 설립한 새로운 패비안 연구소 운영을 도왔다. 그는 1932년 가을 채텀의 노동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30년대 초 노엘 홀의 초청으로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자리를 옮겼다.[9] 1934년 그는 노동당 재정 전문가(예: 그의 후원자가 된 휴 댈턴, 더글러스 제이, 에번 더빈)와 니콜라스 데이븐포트 같은 도시 사람들을 위한 클럽인 XYZ 클럽에 가입했다. 댈턴과 게이츠켈은 그 후 15년 동안 "큰 휴와 작은 휴"로 불리곤 했다.[10]
1934년 게이츠켈은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빈에 있었다. 그는 1933년부터 1934년까지 학년도 동안 빈 대학교에 소속되어 있었고, 1934년 2월 엔겔베르트 돌푸스 정부의 보수적인 조국전선에 의한 사회민주당 노동자 운동의 정치적 탄압을 직접 목격했다.[9] 이 사건은 그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주어 보수주의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갖게 했지만, 많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무익한 것으로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를 사회주의 수정주의 진영에 놓이게 했다.
1935년 총선에서 그는 채텀의 노동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1937년 "노동당의 긴급 프로그램" 초안 작성을 도왔다. 이것은 그의 멘토인 댈턴이 원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은행이나 철강 산업의 국유화 계획이 없는 계획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었다. 그는 또한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에 있을 선거에 사용될 문서들을 작성했다. 댈턴은 그가 1937년 사우스 리즈의 후보로 선출되도록 도왔고,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그는 1940년까지 매우 가능성이 높게 국회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1938년 홀이 국립 경제사회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면서 게이츠컬은 폴 로젠슈타인 로단과 함께 UCL 정치경제학과장이 되었다.[11] [12] 그는 또한 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유화 정책에 반대했고 재무장을 지지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정계 입문
1945년 3월 게이츠컬은 과로로 인한 심근 경색(coronary thrombosis)을 겪었다. 휴식을 취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리즈에서의 의원직 출마를 철회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지역구 당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들은 그가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그를 위해 선거 운동을 하겠다고 제안했다.[24]
게이츠컬은 1945년 총선에서 리즈 사우스 선거구의 노동당 국회의원(Member of Parliament, MP)으로 당선되었다. 병세에도 불구하고, 댈턴의 후원을 받아 곧바로 차관, 무역위원회(Board of Trade)의 의회 차관(Parliamentary Under-Secretary)으로 임명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받았다.[26]
후방 의원으로서 댈턴의 영국은행 국유화(nationalisation)에 관한 1946년 영국은행법을 지지하는 토론에서 발언했고, 이 법은 결국 1946년 2월 14일에 왕실의 재가를 받았다.[28]
5. 장관 경력
1947년 10월 7일, 게이츠켈은 신웰의 뒤를 이어 연료 및 동력부 장관으로 승진했다. 비록 내각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그의 의견이 필요할 때 종종 내각 회의에 참석했다.[30] 그는 개인 자동차 운전자의 기본 휘발유 배급을 폐지하여 많은 반감을 샀지만, 정유소 건설을 장려했는데, 이는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조치였다.
1945년 노동당의 압승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게이츠켈은 1947년 연료동력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2월에는 경제문제 담당 장관(Minister of Economic Affairs)에 임명되어 짧은 기간 재임했다.
5. 1. 1951년 예산과 베반의 사임
1950년 10월, 스태퍼드 크립스는 건강 문제로 재무장관직에서 물러났고, 휴 게이츠컬이 그 뒤를 이었다. 재무장관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한국 전쟁에서 영국의 역할에 필요한 재정 지출에 힘을 쏟았지만, 한국 전쟁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전쟁 비용은 다른 예산에서 충당해야 했다. 1951년 게이츠컬의 예산은 그 재원을 국민건강보험에서 찾았다.[61]
게이츠컬은 1951년 봄 예산에서 국민건강보험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의 처방 안경과 의치에 대한 요금을 도입하는 논란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61] 내각은 1951년 2월에 치과와 안경에 대한 요금 부과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1951~1952년도에 베번은 4.22억파운드의 건강 지출을 요구했지만, 게이츠켈은 4억파운드를 허용하려 했다. 게이츠컬은 틀니와 안경 비용의 절반을 부담시켜 1951~1952년에 1300만파운드, 1년 후에는 2300만파운드를 확보하고자 했다. 아동, 빈민, 환자는 면제되었다.[62]
얼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은 3월 9일 외무부에서 물러났고, 한 달 후 사망했다. 그를 계승하기를 바랐던 베번은 6개월 만에 두 번째로 주요 직책 승진에서 제외되었다. 이 시점에서 다른 장관들은 베번이 사임할 문제를 찾고 있으며, 그를 잘못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양보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63]
또한, 자동차, 텔레비전, 가전제품과 같은 특정 사치품에 대한 구매세(Purchase Tax)가 33%에서 66%로 인상되었고, 영화 티켓에 대한 오락세도 인상되었다.[64] 그러나 동시에 이윤에 대한 세금이 인상되고 생활비 상승에 대한 보상으로 연금이 인상되었다.[65] 미망인, 실업자, 환자에게 지급되는 부양 자녀 수당과 결혼 수당, 자녀 수당도 인상되었다.[66] 또한 구매세에서 여러 가지 소액 품목이 제외되었고, 국가 연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허용 소득이 주당 20shillings(1GBP)에서 40shillings(2GBP)로 인상되었다.[67] 부유층에 대한 세금 부과와 연금 보호 외에도 게이츠켈은 실제로 NHS 지출을 증가시켰다.[68] 이 예산은 크립스가 물려준 흑자와 낙관적인 성장 전망에 힘입어 1951~1952년 국방비를 5억파운드 증액하여 15억파운드로 증가시켰다. 자본 이득세 도입 계획은 1952년까지 연기되었다.[69]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은 예산 초안에 대한 초기 반응으로, 그 예산으로는 많은 표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이츠컬은 재군비 기간에는 표를 기대할 수 없다고 답했다. 얼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은 건강 요금에 대한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고 타협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교육부 장관 조지 톰린슨은 전년도의 공식인 4억파운드의 지출 상한선을 반복할 것을 제안했다. 게이츠컬은 요금 도입을 연기할 의향이 있었지만, 애틀리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상한선을 요금 없이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톰린슨 공식을 거부했다. 애틀리는 3월 21일 십이지장궤양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병상에서 케네스 오 모건이 "놀라울 정도로 공허한 편지"라고 부르는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는 "쟁점이 되는 실질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70] 3월 22일 내각 회의에서 게이츠컬은 처방전 요금이 진정으로 아픈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의도했던 처방전 요금 고집을 그만두었다.[71]
게이츠컬과 애틀리는 재무장 계획이 완전히 이행되지 못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게이츠컬은 경제정책위원회(1951년 4월 3일)에 기계 공구 부족을 경고하고, 일부는 미국에서 수입할 수 있지만 이는 국제수지(balance of payments)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72]
매우 화가 난 베번은 이러한 주장을 무료 의료 서비스 원칙에 대한 타격으로 여기며, 버먼지(Bermondsey)에서 연설 중 한 야유자에게 의료비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사임하겠다고 말했다(1951년 4월 3일). 게이츠컬은 새로운 재무장관이 권위를 확립해야 할 명백한 필요성 외에도, 이를 내각을 공개적으로 압박하려는 의도적인 시도로 보았고, 달턴에게 베번의 "영향력은 과장되었으며" 그가 로이드 조지가 자유당에 했던 것처럼 노동당을 분열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4월 9일 두 차례의 장시간 내각 회의에서 베번은 해롤드 윌슨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다.[73] 애틀리가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내각을 주재했던 허버트 모리슨은 다시 한번 공공 지출 상한선에 대한 합의는 있지만 NHS 요금은 없다는 절충안을 제안했다.[74] 게이츠컬은 경제적 투자나 재무장을 희생하면서 복지 지출에 대한 무제한적인 약속이 없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모리슨의 제안을 거부했다. 두 번째 회의에서 게이츠컬은 내각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조용히 그리고 공개적인 소동 없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예산 전날 재무장관의 사임은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을 것이다. 더글러스 제이와 다른 사람들은 게이츠켈을 설득하여 타협하도록 애썼지만, 그는 거부하며 내각 구성원 두 명이 18명에게 명령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요금이 시행될 날짜는 아직 명시하지 않겠다고 동의했다. 애틀리가 병상에서 타협을 협상하려는 마지막 시도(4월 10일)는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 사건은 게이츠켈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게이츠켈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재무부 공무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예산 당일 아침 에드워드 브리지 경이 그에게 부서에서 얻은 존경심을 말하고 "재무부에서 지난 10년 동안 가장 좋은 날"이라고 말하러 왔다. 게이츠켈은 브리지, 플라우든, 레슬리(정보국장), 암스트롱이 모두 그에게 단호하게 서 있으라고 촉구했고, 암스트롱의 말에 "감격에 겨웠다"고 기록했다.[75]
게이츠켈의 예산은 당시 칭찬을 받았다. 그의 전임자였던 스태퍼드 크립스는 그에게 "정치적 편의"에 굴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하는 편지를 썼고, 나중에 그의 충실한 동맹이 될 두 명의 젊은 국회의원인 로이 젠킨스와 앤서니 크로슬랜드의 공개적인 지지를 받았다.[76] 예산 후 토니 벤은 당시 노동당 우파에 있었는데, 4월 11일 당 회의(즉, 노동당 의원 회의) 분위기를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아서 "순수한 안도감"이라고 기록했다. 의회 노동당(PLP)은 예산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나 베번은 곧 의료비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고 발표하자는 게이츠켈의 제안된 타협안을 "진정제"라고 거부했다. 베번의 동맹인 마이클 풋은 ''트리뷴''에 게이츠켈을 필립 스노든(1931년 감축으로 제2차 노동당 정부를 무너뜨린 재무장관, 그 후 그와 다른 내각 주요 구성원들은 보수당이 주도하는 국민정부에 들어갔다)과 비교하는 사설을 썼다. 베번은 4월 21일 해롤드 윌슨, 존 프리먼과 함께 사임했다.[77]
게이츠컬은 4월 24일 당 회의에서 자신의 예산을 옹호했다. 그는 재무장 계획이 실제로 달성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벤은 회의 후 게이츠켈의 위대함은 "지적 능력과 정치적 단호함"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런 다음 베번은 많은 PLP 구성원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한 분노에 찬 연설을 했다.[78]
이 예산은 정부의 분열을 야기했고, 게이츠컬과 애나이린 베번 사이의 갈등을 초래했다. 베번은 이 사건으로 사임했다. 후에 베번은 마찬가지로 사임한 해롤드 윌슨, 존 프리먼과 연대했다.
5. 2. 경제 철학과 버츠켈리즘
휴 게이츠컬은 자산 재분배를 자신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여겼다.[55]
1949년 7월, 게이츠컬은 재무장관 스태퍼드 크립스와 마찬가지로 재무부 관료들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며 사회주의 정책 시행에 소극적이라고 우려했다.[32] 크립스와 돌턴처럼 게이츠컬도 저금리 정책을 지지했다. 고금리는 1920년대 금본위제 및 디플레이션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으며, 1940년대 정책 기조는 가격 통제가 아닌 양적 통제(예: 외환 통제, 물품 배급)였다. 1930년대에 매우 낮아졌던 금리는 보수당이 1952년 집권한 후에야 다시 정책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3]
애틀리는 크립스가 건강 악화로 7월 18일 스위스로 요양을 떠나자, 게이츠컬이 크립스의 책임을 맡고 재정적으로 유능한 세 명의 젊은 장관(해럴드 윌슨, 더글러스 제이)이 그를 보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들 모두 전시 공무원이었다. 게이츠컬은 곧 이 그룹의 리더로 부상했다.
젊은 장관들은 파운드화 가치를 현재의 4.03달러에서 절하하는 것을 지지했다. 1949년 7월 20일, 제이는 게이츠컬과 점심을 먹으며 평가절하가 영국 자본 유출을 막고, 미국이 추가적인 영미 차관이나 마셜 계획 지원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영연방 국가들이 달러화 상품 대신 영국 상품을 구매하도록 장려하고, 달러 지역으로의 수출을 늘릴 수 있으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준비금이 고갈되고 파운드화가 붕괴되어 영국이 미국의 뜻대로 움직일 위험이 있다는 데 동의했다. 7월 21일, 게이츠컬, 제이, 윌슨은 수상을 만나 준비금이 계속 감소하고 있어 평가절하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7월 29일, 내각은 재무부 고위 공무원 에드워드 브리지스 경(재무부 상임차관)과 두 명의 재무부 차관(로버트 홀 경, 에드윈 플로든 경)의 보고서를 받고 평가절하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크립스는 8월 18일 런던으로 돌아와 게이츠컬의 두 건의 각서를 받았다. 하나는 평가절하 후 가을에 총선을 치를 것을 권고하는 짧은 문서였고, 크립스는 애틀리에게 그러한 권고를 했지만 거절당했다. 다른 하나는 평가절하에 관한 10페이지 분량의 문서였는데, 에드먼드 델은 크립스가 읽었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다. 게이츠컬은 고용이 높고, 국제수지가 양호하며, 인플레이션은 통제 가능한 문제인 상황에서 유일한 문제는 달러 부족이며, 미국 여론은 영국을 더 이상 돕는 것을 매우 꺼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지출 삭감을 권고했지만, 얼마나 삭감해야 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또한 파운드화가 2.80달러~2.60달러 범위에서 처음에는 변동 환율제를 채택할 것을 권고했는데, 이는 홀과 플로든과 논의한 제안이었다. 그는 9월 4일까지 평가절하를 권고했지만,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통화가 완전하게 전환 가능해지는 것은 정부가 완전 고용을 보호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거부했다. 델은 게이츠컬의 각서가 젊은이가 직책에 매달리는 어른들에 대한 조급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평가절하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느렸다고 주장한다.[34]
8월 19일, 게이츠컬과 윌슨은 체커스에서 애틀리, 어니스트 베빈, 크립스를 만났고, 베빈과 크립스는 평가절하에 어느 정도 꺼리는 태도를 보이면서 동의했다. 이 결정은 8월 9일 내각에서 최종 확정되었지만, 크립스는 변동 폭을 가진 변동 환율제에 대한 게이츠컬의 계획을 거부했다.[35] 평가절하(4.03달러에서 2.80달러로)는 전날 비밀 내각 회의 후 9월 18일 일요일에 발표되었다. 많은 다른 국가들도 뒤따랐기 때문에, 주로 달러를 사용하는 국가들과의 영국의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36]
게이츠컬은 처음에는 평가절하를 가격 메커니즘이라는 이유로 의심했지만, 이 위기 동안 로버트 홀의 찬사를 받았다.[37] 그는 평가절하를 성공시키고 미국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출 삭감의 필요성을 받아들였고, 전 재무장관 돌턴이 경제정책위원회에서 삭감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을 "다소 부정직하다"고 생각했다. 평가절하 방송에서 평가절하가 삭감의 ''대안''이라고 암시했던 크립스는 3억파운드의 삭감이 합의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고, 아뉴린 베반(보건부 장관)과 A. V. 알렉산더 경(국방장관)도 마찬가지로 사임을 위협했다. 결국 베반의 주택 예산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삭감은 미래 지출 계획에 대한 것이었다.[38]
랍 버틀러와 새뮤얼 브리튼은 1970년대 초에 게이츠컬이 그 당시까지 20세기 최고의 전문성을 갖춘 재무장관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델은 그가 경제 전망을 직접 감독하는 등 과도한 세부 사항에 몰두하고 지나치게 긴 회의를 주재했다고 말한다. 이는 미세 관리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거나, 통제와 계획의 옹호자로서 자유 시장 메커니즘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한 재무부 관리들을 의심했기 때문일 수 있다.[56]
1950년 12월, 게이츠컬은 캐머런 코볼드(영란은행 총재)와 홀의 금리 인상 제안을 거부하고 그러한 정책을 "완전히 구식"이라고 불렀다.
마셜 계획은 이전 3년 동안 총 31억달러에 달했으며, 실제로는 6주 전에 종료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1951년 1월 1일에 종료되었다. 국제수지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강해졌다고 여겨졌다.
게이츠컬은 여전히 스털링 무역을 우대하고 스털링 전환성에는 반대했지만, 1950년 10월 워싱턴 방문 이후 훨씬 더 친미적인 입장을 취했다. 1951년 2월까지 그는 내각의 반미주의를 강력히 비판했다.[59]
1950년 영국의 국제수지 흑자 3억파운드가 1951년에는 4억파운드 적자로 돌변했는데, 이는 그 당시까지 기록된 가장 급격한 역전이었다. 이는 기업들이 수출 증대 대신 재군비로 전환한 데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또 다른 이유는 교역조건 악화였다. 이란 석유 위기 이후 유가 상승으로 달러 유출이 발생한 반면, 양모, 주석, 고무 가격이 하락하여 나머지 스털링 지역은 수출에서 달러를 그다지 많이 벌지 못했다. 1951년 하반기까지 해외 스털링 지역은 북미로부터 1950년 대비 두 배의 수입을 하고 있었다. 1951년까지 인플레이션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정부 예산 흑자는 사라졌으며, 과열 경제의 또 다른 징후로 실업률은 1945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1951년 하반기 게이츠컬은 생활비 상승의 정치적 영향을 우려했지만, ''파이낸셜 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는 그가 소비를 억제하고 소비재 생산 대신 재군비를 위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높은 가격을 이용했다고 비난했다.[82]
게이츠컬은 1951년 6월, 7월, 8월에 경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라는 재무부의 조언을 다시 거부했다. 그는 금리 인상이 은행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은행의 신용 제한을 요구하는 것만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51년 8월~9월까지 재무부는 전면적인 스털링 위기에 놀랐고, 이를 새로 들어선 보수당 정부에 넘겼다. 스털링은 비공식적으로 2.80달러의 공식 환율보다 낮은 2.40달러에 거래되었다.[84]
보수당이 집권하자, 새로운 재무장관 랍 버틀러는 해외 지출을 삭감하여 1952년 국제수지를 흑자로 전환했는데, 델은 이 조치가 게이츠컬이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던 조치라고 제안한다. 그의 회고록 (''Art of the Possible'', p. 163)에서 버틀러는 나중에 그를 "국제수지의 엄청난 악화에 직면하여 치즈 배급량을 조금 줄이는 정치적 쥐"라고 불렀다.[87]
6. 야당 대표 시절 (1955-1963)
1955년 클레멘트 애틀리가 노동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게이츠컬은 베번과 허버트 모리슨을 제치고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100] 제임스 추터 이드는 이 당 대표 선거를 "내가 알았던 가장 뛰어난 선전가 두 명의 정치적 장례식"이라고 묘사하며, 게이츠컬은 적극적으로 선전을 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101] 게이츠컬은 한 친구에게 "베번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나에게 당 대표직을 던져주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찍 당 대표가 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애틀리와 해롤드 윌슨도 동의하는 견해였다.[102]
게이츠컬의 당 대표 당선은 노동당의 쇠퇴기와 맞물렸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영국이 보수당 집권 하에 경험했던 전후 호황 때문이었다. 그의 당 대표 시절은 베번이 이끄는 노동당 좌파인 "베번파(Bevanite)"와 우파인 "게이츠켈파(Gaitskellite)" 간의 파벌 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1956년 수에즈 위기는 게이츠컬 당수 시절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앤서니 이든 수상의 개입 행위를 강력히 비난했다.
195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패배했는데, 이는 영국의 전후 호황과 "보수당과 함께라면 삶이 더 나아집니다. 노동당이 망치도록 두지 마세요"라는 해럴드 맥밀런의 효과적인 선거 운동, 그리고 연금 인상 제안에 대한 대중의 불신 때문이었다.
총선 패배 후, 게이츠컬은 패배의 책임이 좌파에게 있다고 비난하며 노동당 강령 4조항 수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동시에 핵무기 일방적 핵 군축론자의 입장에 두려는 시도에 저항하며, 1960년 표결에서 패배하자 "우리의 소중한 당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싸우고, 끝까지 싸우자"라고 말했다. 이 결정은 다음 해 철회되었지만, 갈등의 씨앗을 남겼고 좌파는 계속해서 당수 교체를 요구했다. 그는 1960년과 1961년 당수 선거에서 도전을 받았다.
당내 투쟁 결과, 게이츠컬파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1960년대 초 "민주사회주의 운동(Campaign for Democratic Socialism, CDS)"이 설립되었고, CDS의 젊은 회원들 중 다수는 1981년 사회민주당(SDP)의 창립 멤버였다. 게이츠컬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 자격에 대한 반대로 일부 지지자들을 멀어지게 했다. 1962년 10월 당 대회 연설에서 그는 연방 유럽에 대한 영국의 참여가 "유럽에서 독립 국가로서의 영국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저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1000년 역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했다.[126]
6. 1. 수에즈 위기 (1956)
1956년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 대령이 수에즈 운하 회사를 국유화하면서 수에즈 위기가 시작되었다.[103] 게이츠컬은 1956년 7월 26일 이라크의 파이살 2세 국왕과의 만찬에서 앤서니 이든 경과 재무장관 해럴드 맥밀런에게 나세르에 대한 군사 행동에 여론의 지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든에게 신속하게 행동하고 미국과 긴밀히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경고했다.[103][104] 게이츠컬은 7월 27일 오전 11시 하원 토론에서 나세르의 행동을 비난했다.[105]여름 동안 게이츠컬의 입장은 더욱 신중해졌고, 그는 이집트와의 분쟁을 유엔에 회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의 첫 수에즈 연설(1956년 8월 2일)은 나세르를 공격하는 내용이었고 많은 보수당원들로부터 환영받았으며, 그는 무력 사용을 지지할 것이라는 암시를 했지만, 브리바티(Brivati)의 견해에 따르면 유엔을 통한 행동이라는 그의 조건에 충분한 강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이든이 무력 사용 의도가 없다는 확신을 믿었다.[106] 8월 3일과 10일에 이든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게이츠컬은 나세르를 비난했지만, 유엔 헌장을 위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03] 8월 10일 자 편지에서 게이츠컬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 개인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에 대한 무력 공격은 나세르가 지금까지 한 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유엔 헌장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또한, 제 생각에는 운하에 대한 국제적 통제 시스템을 부과하기 위해서도 그러한 공격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비록 이것이 바람직하더라도. 물론, 만약 이 문제 전체가 유엔에 회부되어 이집트가 침략자로 규탄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세르가 이집트의 명백한 침략에 해당하는 추가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역시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세르가 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위협, 심각한 위협에 해당하며, 분명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위협일 뿐이며, 제 생각에는 전쟁으로 보복할 만큼 정당화되지 않습니다.영어[103]
게이츠컬은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열렬히 비난했는데, 이는 국제법을 시행하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전투원들을 분리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공격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모 하에 침략의 구실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103] 10월 31일 그는 공개적으로 그 침략을 "재앙적인 어리석음의 행위"라고 부르며 대서양 동맹, 유엔 및 연방의 연대를 위협한다고 말했다. 1956년 11월 4일 게이츠켈은 강력한 방송을 통해 이든이 사적으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수상을 공격했다. 게이츠켈은 보수당으로부터 노동당 좌파에 호소하려 하고 배신 행위를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07]
게이츠켈의 수에즈에 대한 입장은 일부 자유당의 지지를 받았다. 여론조사 전문가 마크 아브람스(Mark Abrams)는 반식민지주의 표를 얻음으로써 노동당의 호소력을 넓힐 필요성을 그에게 확신시켰지만, 이것은 노동당에 장기적으로 중요한 발전이 될 것이다. 당시 게이츠컬은 특히 보수당 반대파로 하여금 이든을 실각시키도록 설득하려는 그의 잘못된 판단과 실패한 간청으로 언론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보수당은 영국군을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게이츠켈을 비애국적인 것으로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해 초에 그림자 내각에 복귀하고 이제 그림자 외무장관으로 승진한 비번과 게이츠켈 사이의 인식된 차이점을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크로스먼(Crossman)은 이것이 비번으로 하여금 게이츠켈에게 충성하도록 강요했고(1956년 12월 15일), 두 사람을 일종의 동맹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108]
6. 2. 국유화와 정치 철학 (게이츠켈리즘)
게이츠켈은 처음에는 국유화가 도덕적으로 옳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고 믿었으며, 관리자와 노동자 간의 관계가 변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956년에 그는 패비안 소책자 "사회주의와 국유화"를 발표하여 더 이상 공공 소유의 필요성이 없으며, 그의 목표는 완전 고용, 산업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력의 더 넓은 분배라고 주장했다. 게이츠켈은 여전히 물리적 통제를 지지했으며, 그의 견해는 앤서니 크로슬랜드가 "사회주의의 미래"(1956)에서 표명한 견해보다 약간 좌파적이었다.[110]게이츠켈리즘으로 알려지게 된 그의 정치 철학은 1950년대 후반부터 국유화 문제로 노동조합과 점점 더 많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111] 생산 수단의 공공 소유에 대한 의심 없는 헌신을 거부하고, 이제 단지 여러 유용한 수단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 외에도, 그는 개인의 자유, 사회 복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평등의 목표를 강조했다. 게이츠켈리즘은 노동 운동에 대한 충성을 중심적인 윤리적 목표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시장 지향적 혼합 경제의 맥락에서 정부가 적절한 재정 및 사회 정책 조치를 사용하면 새로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 그의 지지자 그룹에는 앤서니 크로슬랜드, 로이 젠킨스, 더글러스 제이, 패트릭 고든 워커, 그리고 제임스 캘러핸이 포함되었다.[112]
1956년 프랭크 쿠진스가 TGWU의 사무총장이 되면서 노동조합은 좌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957년 회의에서는 소규모 민간 기업의 주식 국가 매입을 포함한 더 큰 유연성을 요구하는 "산업과 사회"라는 문서를 승인했다. 이것은 제니 리와 마이클 풋에 의해 강력하게 비난받았다.
6. 3. 1959년 총선과 4조항 논쟁
195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승리할 것으로 널리 예상되었으나,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을 늘리며 패배했다. 이는 당시 영국의 전후 호황과 "보수당과 함께라면 삶이 더 나아집니다. 노동당이 망치도록 두지 마세요"라는 해럴드 매컬런의 효과적인 선거 운동 때문이었다.[117] 게이츠컬은 연금 인상 제안에 대한 대중의 불신도 패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117]선거 패배 후, 게이츠컬은 좌파를 비난하며 노동당 강령 4조항 수정을 시도했다. 당원들은 4조항이 산업의 국유화를 약속한다고 믿었지만, 게이츠컬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 조항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애셔리지에서 베번과 당 개혁을 논의했지만, 처음에는 4조항 개정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스먼의 조언을 받아들여 국유화 정책 변경에 대해 베번에게 거부권을 허용했다.[118]
1959년 11월 당대회는 게이츠켈의 4조항 개정 소문으로 분열되었다. 게이츠켈은 추가적인 국유화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이를 수단으로 보았다. 베번은 게이츠켈의 계획을 "오해"했다며 "격분"했고, 결국 화해적인 연설을 했다.[119] 벤은 베번의 연설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의 모범"이었다고 평가했다.[120] 그러나 베번은 1959년 말 심각하게 병들어 1960년 7월 사망했다.[121]
1960년 3월, NEC는 4조항에 추가되는 노동당 목표에 대한 새로운 성명에 동의했다. 그러나 많은 노조 대회는 새로운 제안에 반대했고, 결국 6개의 가장 큰 노조 중 4개가 게이츠켈의 계획에 반대했다. 새로운 제안은 "가치 있는 표현"으로 강등되었다.
6. 4. 일방적 핵 군축 논쟁
1960년 스카버러 회의에서 운수노동조합(TGWU)과 기술자 노동조합이 제안한 일방적 핵 군축 찬성 결의안 두 건이 통과되었고, 공식적인 국방 정책 문서는 부결되었다.[122] 휴 게이츠컬은 이 결정을 뒤집기 위해 "싸우고, 싸우고, 다시 싸우겠다"고 약속하며 지지자들을 규합했다.[122]노동당의 교리는 의회 당(PLP)이 당 대회 정책의 시행 시기를 결정할 재량권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당 대회에서 블록 투표로 영향력을 행사한 노동조합들이 대체로 PLP를 지지했지만, 이제 이러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122]
1960년 11월 해럴드 윌슨이 게이츠컬에게 도전했지만 실패했다.[123] 1961년 10월 블랙풀 회의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다자간 군축을 지지하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이로써 게이츠컬은 당내 권위와 국가적 명성을 회복했다.[124]
일방적 핵 군축은 여전히 당내 분열의 원인이었고,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당수 교체를 계속 요구했다. 1961년 11월 앤서니 그린우드가 다시 한번 게이츠컬에게 도전했지만, 게이츠컬은 또다시 당수직을 유지했다.[125]
6. 5. 유럽 경제 공동체 (EEC) 가입 반대
1961년 해롤드 맥밀런 보수당 수상이 추진한 영국의 EEC 가입에 대해 게이츠컬은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지지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128][129] 그는 영국이 EEC에 가입하는 것 자체를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EEC가 개혁에 소극적이며, 가입 시 영국의 영연방과의 관계가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128][129]1962년 10월 당 대회 연설에서 게이츠컬은 영국이 연방 유럽에 참여하는 것은 "독립된 유럽 국가로서의 영국의 종말, 1000년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126] 그는 또한 비미 능선과 갈리폴리에서 캐나다와 ANZAC 군대가 영국군과 함께 싸웠던 사실을 언급하며,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영연방의 전통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했다.
이 연설은 게이츠컬을 지지하던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좌파 진영에서는 큰 호응을 얻었다. 게이츠컬의 아내 도라는 "잘못된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고 평했다.
7. 사망 (1963)
Hugh Gaitskell영어은 1962년 12월 중순 독감에 걸렸으나, 의사는 소련으로 여행할 만큼 건강하다고 판단하여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회담을 가졌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다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상태가 악화되었다. 1963년 1월 4일, 메들섹스 병원(Marylebone 소재)에 입원했고, 의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월 18일 아내가 곁에 있는 가운데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과 신장에 영향을 미친 갑작스러운 루푸스(자가면역질환) 발병의 합병증이었다. 향년 56세였다.[130][61][131]
게이츠컬의 시신은 1963년 1월 23일 골더스 그린 화장장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유골은 런던 북부의 세인트 존 앳 햄프스테드 교회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아내는 1989년에 사망하여 그의 곁에 묻혔다.
게이츠컬의 유산은 1963년 4월 23일 상속세 납부를 위해 8130억파운드 10실링(2020년 가격으로 약 170만파운드)으로 평가되었다.[133][134]
게이츠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후임 노동당 당수 존 스미스가 1994년 5월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와 비슷했는데, 당시 그 역시 10번가(영국 총리 관저) 문턱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츠켈의 사망은 노동당 당수직에 해럴드 윌슨에게 기회를 열어주었고, 윌슨은 21개월 후 실시된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노동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게이츠켈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죽음은 타살 가능성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유명한 음모론은 윌슨(이 이론 지지자들은 그를 KGB 간첩이라고 주장했다)이 수상이 되도록 하기 위한 소련 KGB의 음모설을 포함하고 있다. 피터 라이트의 논란이 된 1987년 저서 ''스파이캐처''는 이 주장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지만, 세상에 나온 유일한 증거는 소련 망명자 아나톨리 골리친의 증언뿐이었다. MI5는 수년에 걸쳐 윌슨에 대한 조사를 반복적으로 실시한 후 그가 KGB와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136]
8. 유산 및 평가
휴 게이츠켈은 노동당 안팎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우리가 갖지 못한 최고의 수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42]
존 캠벨은 "게이츠켈-비반의 라이벌 관계의 메아리는 1980년대까지 당을 계속 분열시켰다"고 썼다.[138] 닐 키녹(1983~1992 노동당 대표)은 웨일스 남부에서 자라 비반을 존경하며 성장했지만, 1980년대 중반 급진적 경향과의 투쟁은 게이츠켈주의의 메아리를 담고 있었다. 존 스미스(1992~1994 노동당 대표)는 1960년대 초 젊은 시절 게이츠켈 추종자였고, 토니 블레어는 1994년 대표가 된 후 첫 행동으로 4조항을 폐지했는데, 이와 다른 행동들로 인해 당시 자유민주당원이 된 노령의 로이 젠킨스의 지지를 받았다. 블레어는 게이츠켈처럼 노동당의 많은 적들에게 공립학교 출신 중산층 침입자로 여겨졌다.
토니 벤은 수에즈 사태에 대한 게이츠켈의 입장을 토니 블레어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입장과 대조했다. 마가렛 대처는 블레어를 게이츠켈과 비교하며 블레어가 집권했을 때 그가 휴 게이츠켈 이후 가장 강력한 노동당 지도자라고 경고했다.[139]
캠벨에 따르면, 게이츠켈의 사회주의는 세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통치하기를 원하는 공무원의 사회주의였다. 게이츠켈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진정한 사회주의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노동당이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본 최초의 "현대화가"였다.[140]
그의 오랜 측근인 로이 젠킨스는 10년 후, 나중에 회고록에서 인용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그의 모든 투쟁은 뛰어난 강점뿐만 아니라 몇 가지 결점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완벽한 수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완고하고 경솔했으며, 역설적이게도 지나치게 합리적인 입장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 그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을 장점과 비교해 저울에 달아보면 사라져 버립니다. 그는 목적과 방향, 용기와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의 수준을 높인 사람이었습니다. (...) 그는 개인적인 질투의 사소한 악감정을 피했습니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따를 깃발을 세울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지도력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감각과 유머, 그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더 즐겁게 살 수 있도록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드문 현상인, 훌륭한 정치가이자 유난히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141]
브리바티는 그가 "거의 무모할 정도의 정직함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완고함으로 변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의 지도력은 영웅적인 실패"였고 "전후 노동당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963년까지 게이츠켈은 노동당을 다시 권력으로 이끌 듯 보였지만, 브리바티가 "지난 세기 야당 지도자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묘사하는 해롤드 윌슨이 노동당을 근소한 차이로 다시 이끌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브리바티는 게이츠켈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최종 상태가 아니었고… 선호하는 가치를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제도와 관행의 개혁"이었다고 썼다. 에반 더빈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정치』(1940)는 중요한 저술이었다. 브리바티의 견해에 따르면, 게이츠켈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진보적"이 아니었다. 그는 평등을 지지했고 자유 시장을 낭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당 지지자들 내에 자유주의적 의견을 통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후 세대의 현대화 지도자들인 닐 키녹과 토니 블레어는 어느 정도 게이츠켈의 전통을 계승했다.
그의 이름은 때때로 대중문화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휴 게이츠켈 하우스는 《굿나잇 스윗하트》에서 니컬러스 린드허스트가 연기하는 개리 스패로우가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의 런던에서 처음으로 우연히 발견하는 건물이다. 그와 같은 이름의 고층 아파트는 런던 북부 스토크 뉴잉턴 기차역 맞은편에 있다.
휴 게이츠켈 초등학교는 그의 전 선거구였던 리즈 남부의 일부인 비스턴에 위치해 있다.[143][144] 이 지역은 현재 힐러리 벤이 대표하는 리즈 중앙 선거구에 속한다.
그가 사망한 지 15년 후인 1978년, 웨스트 미들랜즈의 티비데일 지역에 있는 샌드웰 지방 의회가 새로운 주택 단지를 조성하여 게이츠켈 테라스라고 이름 지었다.
영국 조각가 레슬리 큐빗 비비스가 1964년에 휴 게이츠켈의 흉상을 제작했고, 1967년에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가 구입했다.
게이츠켈은 햄프스테드에 묻혔고, 그의 이름을 새긴 추모 명판이 옥스퍼드 뉴 칼리지 회랑에 눈에 띄게 놓여 있다.
9.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35년 선거 | 하원의원 (채텀 선거구) | 37대 | 노동당 | 40.94% | 13,315표 | 2위 | 낙선 |
1945년 선거 | 하원의원 (리즈 사우스 선거구) | 38대 | 노동당 | 61.03% | 17,899표 | 1위 | |
1950년 선거 | 하원의원 (리즈 사우스 선거구) | 39대 | 노동당 | 61.11% | 29,795표 | 1위 | |
1951년 선거 | 하원의원 (리즈 사우스 선거구) | 40대 | 노동당 | 65.06% | 30,712표 | 1위 | |
1955년 선거 | 하원의원 (리즈 사우스 선거구) | 41대 | 노동당 | 65.15% | 25,833표 | 1위 | |
1959년 선거 | 하원의원 (리즈 사우스 선거구) | 42대 | 노동당 | 58.56% | 24,442표 |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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