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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안군 (만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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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안군은 만주국군 산하의 몽골족으로 구성된 부대로, 1932년 관동군의 지시로 창설되었다. 흥안군은 몽골인 군관 양성을 위해 흥안군관학교를 설립하고, 1938년 흥안군관구로 통합된 후 제9, 제10 군관구로 개편되었다. 중일 전쟁, 노몬한 사건 등에 참전했으며, 1945년 소련군의 만주 침공으로 해체되었다. 몽골족 특유의 기동성과 유격전 능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받았으며, 몽골 민족 부흥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만주국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

2. 역사

만주국 육군의 일부였던 흥안군은 주로 몽골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교관으로 일본인이 배속되었으나 병사들은 몽골족만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초원 지대 활동에 능숙하고 마술(馬術)이 뛰어나 만주국의 유격대로서 활동했다.

1932년 만주국군 창설 이후, 일본 관동군의 주도 하에 만주 사변 당시의 내몽골 자치군 등 몽골인 부대를 흡수하여 편성되었다[1]. 초기에는 흥안동·서·남·북의 4개 경비군으로 나뉘어 조직되었으며[1], 1938년에는 이들을 통합하는 '''흥안군관구'''가 설치되었다가[2] 이후 제9군관구와 제10군관구로 재편되었다.

몽골인 군관의 전문적인 양성을 위해 1934년 '''흥안군관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었으며, 이는 군사 교육뿐 아니라 몽골인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기도 했다[3][4].

흥안군은 만주국 내의 반란 진압 작전, 1933년 열하 작전 지원, 하얼하묘 사건 등 국경 분쟁, 중일 전쟁 참전 등 다양한 군사 활동에 동원되었다[1][6]. 특히 1939년 노몬한 사건에서는 주력 부대로 투입되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7][8][9][10].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 시 전투 배치 명령을 받았으나, 후퇴 과정에서 내부 반란과 지휘관의 도주 등으로 인해 급격히 와해되었다. 각 군관구와 예하 부대들은 해산하거나 소련군에 투항했으며[11][12], 일부 봉기한 병력은 동몽골 자치 정부의 인민 자치군에 합류했다[13].

2. 1. 창설 배경 (1932년)

1932년 4월 만주국군이 성립되자, 일본관동군은 만주 사변 당시 몽골인으로 편성되었던 내몽골 자치군을 만주국군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4월 22일, 사이토 쿄헤이 소좌, 가네카와 고사쿠 대위, 이쿠타 기치고로 대위, 혼마 마코토 대위가 흥안군의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혼마 고문은 내몽골 자치군의 개편 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흥안동분성, 흥안남분성, 흥안북분성에서 몽골인 청년들을 선발하여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1].

이러한 과정을 거쳐 5월에는 흥안남분성에서 내몽골 자치군을 개편한 '''흥안남경비군'''이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사령관은 바트마라브탄 소장, 참모장은 간주르자브였다[1].

2. 2. 편성과 개편 (1932년 ~ 1938년)

1932년 4월 만주국군이 창설되자, 관동군은 만주 사변 당시 몽골인으로 구성된 의용군인 내몽골 자치군을 만주국군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4월 22일에는 흥안군의 군사 고문으로 사이토 쿄헤이 소좌, 가네카와 고사쿠 대위, 이쿠타 기치고로 대위, 혼마 마코토 대위가 임명되었다. 혼마 고문은 내몽골 자치군을 개편하는 동시에 흥안동분성, 남분성, 북분성에서 몽골인 청년들을 선발하여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1]

이후 각 지역별로 경비군이 편성되었다.

시기부대명사령관 (초대)참모장 (초대)비고
1932년 5월흥안남경비군바트마라브탄 소장간주르자브흥안남분성, 내몽골 자치군 개편
1933년 4월흥안북경비군울진 갈마예프 소장흥안북분성 기반
1933년 4월흥안동경비군초르바토르 상교 (대리)흥안동분성 기반
열하 작전 후흥안서경비군우구팅 상교 (대리)찰동경비군 제4지대(몽골인 부대) 편입, 흥안서분성 기반[1]



1938년 3월, 이 4개의 경비군을 총괄하는 '''흥안군관구'''가 창설되었고, 바트마라브탄이 사령관을 맡았다.[2] 이후 흥안군관구는 '''제9군관구'''(사령부: 퉁랴오)와 '''제10군관구'''(사령부: 하이랄)로 재편되었다.

한편, 만주국군 군관(장교) 교육은 1932년 9월부터 중앙 육군 훈련처에서 실시되었으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한족과 몽골인을 함께 훈련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1934년 7월 1일, 군정부는 몽골인 군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흥안군관학교'''를 정가툰에 임시로 개교했다.

항목내용
설립일1934년 7월 1일
초기 위치정가툰 가교사
이전1935년 8월 1일, 왕예묘 본교사
초대 교장바트마라브탄 (겸임)
초대 고문시모나가 겐지 소좌
제1기 입교생72명
목적몽골인 군관 및 지도자 양성, 몽골 민족 부흥
개칭1939년 10월, 육군 흥안 학교[3][4]



흥안군관학교는 몽골 민족의 부흥을 내세우며, 군인뿐 아니라 장래 몽골 사회의 지도자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몽골인에게는 유일한 고등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주국군 간행 위원회가 편찬한 『만주국군』에 따르면, 몽골 병사들은 광활하고 표식 없는 초원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야간에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서 용감하고 말타기 기술이 뛰어나 고삐 없이 사격하거나 장시간 말을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5]

2. 3. 흥안군관학교 설립과 운영 (1934년 ~ 1945년)

만주국군의 군관(사관) 교육은 1932년 9월부터 펑톈의 중앙 육군 훈련처에서 통합 실시되었으나, 언어와 생활 습관이 다른 한족몽골인을 함께 훈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3] 이에 군정부는 몽골인 군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별도의 기관 설립을 추진하여, 1934년 7월 1일 정가툰의 임시 건물에 '''흥안군관학교'''를 개교했다. 초대 교장은 당시 흥안남경비군 사령관이던 바트마라브탄 소장이 겸임했으며, 일본 관동군에서 파견된 시모나가 겐지 소좌가 고문을 맡았다.[3]

제1기생으로는 72명이 입교하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학교는 이듬해인 1935년 8월 1일, 왕예묘(현재의 우란하오터 시)에 새로 지어진 본교사로 이전하였다. 흥안군관학교는 단순히 군사 기술 교육에만 그치지 않고, '몽골 민족 부흥'을 교육 이념으로 내세웠다. 당시 몽골인 사회에서 유일한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군 장교뿐만 아니라 장차 몽골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3] 1939년 10월, 학교 명칭은 '''육군 흥안 학교'''로 변경되었다.[3][4]

2. 4. 주요 참전 (1932년 ~ 1945년)

1932년 9월, 쑤빙원이 반란을 일으키자 만주국군은 쑤빙원 토벌 작전에 동원되었고, 혼마 마코토 고문이 이끄는 흥안남 경비군도 참가했다.[1] 1933년 열하 작전에서는 흥안남 경비군 사령관 바토마라프탄이 2개 단(연대급) 병력을 이끌고 린시현·린둥현 방면으로 진출하여 관동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1935년 이후 발생한 하얼하묘 사건과 오라호드가 사건, 타우란 사건 등의 국경 분쟁에서는 흥안 북경비군이 출동했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국민혁명군이 열하성 국경의 장성선으로 진출하자 만주국군의 흥안남 경비군 외 일부 부대에도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흥안남 경비군은 차하얼성 내로 전진하여 일본군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산시성에서는 양가오현 방면의 전투를 거쳐 9월 13일에 가토 연대가 최선봉에서 다퉁시를 점령했다. 그 후 산시성 북부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10월 하순에 귀환했다. 1938년에는 팔로군이 열하성 경계로 진출하자, 7월 3일, 간주르자브 소장을 지대장으로 하는 '''간지대'''(흥안 기병 제5단, 제2단의 약 1,000명)가 파견되었다. 간지대는 허베이성 동부의 지둥 지역을 전전하며 12월까지 45회의 전투를 치렀고, 가오샹윈 군 약 5,000명을 격파했다.[6]

1939년 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자 울진 중장의 지휘 하에 '''우얼진 부대'''(흥안 기병 제1, 제2, 제8단)가 출동했다. 그 후 5월에 국방군으로 새로 편성된 흥안사(사단장: 노무라 토키에 중장)를 기간으로 한 '''흥안 지대'''(흥안 기병 제4, 제5, 제6, 제12단 외 약 6,000~7,000명)가 파견되었다.[7] 흥안 지대는 7월 1일, 노로 고지 공격을 앞두고 소련군의 포격을 받으면서 부대 통솔에 어려움을 겪었고 전의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어진 전투에서 지대의 피해가 늘어나고 일본인 군관의 사상도 잇따르자, 사기가 떨어진 일부 부대에서는 이탈 및 도주자가 속출했다.[8] 나가노 지대의 증원을 받아 7월 10일, 흥안 지대는 남은 병력으로 삼각산을 탈취했다. 7월 21일의 전투에서 노무라 지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고 300여 명만 남게 된 흥안 지대는 8월 2일에 일본군과 수비를 교대하고 후방으로 집결했다.[9] 흥안 지대의 손실은 사상자 2,895명에 달했다.[10]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제9군관구와 제10군관구 모두 전투 배치 명령을 받았다. 제9군관구는 퉁랴오에서 펑톈 방면으로 후퇴하던 중 일부 부대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일본인 군관들이 살해되었다.[11] 8월 16일 새벽에는 사령관 간주르자브 중장이 도주했고, 사령관을 잃은 제9군관구는 그날 해산했다. 제10군관구는 명령에 따라 시네헤이(석니하) 부근으로 전진했으나, 8월 11일, 참모장 존주르자브 소장이 주도한 반란으로 일본인 군관 29명이 살해되었고, 이후 부대는 소련군에 투항했다.[12]

육군 흥안 학교는 3개 제대로 나뉘어 행군을 시작했지만, 모두 행군 도중 소식이 끊겼다. 노몬한 전투에 참가했던 흥안사는 이후 개편되어 '''제2사'''가 되었고, 1945년 1월부터 서부 국경 방면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 침공 당시, 제2사(사단장: 하야시 야스하루 소장)의 병력 일부는 지둥 지역에 출동 중이었고, 주둔 병력은 약 3,000명 정도였다. 제2사는 소련군 격퇴 명령을 받았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부대 내에서 이탈과 반란이 발생하여 8월 11일 사단장은 남은 부대의 해산을 결정했다.[13] 봉기한 병사들은 이후 동몽골 자치 정부의 인민 자치군에 합류했다.

2. 5. 해체 (1945년)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에 침공하자 제9군관구와 제10군관구 모두 전투 배치 명령을 받았다. 제9군관구는 퉁랴오에서 펑톈 방면으로 후퇴하던 중 일부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본인 군관들이 살해되었다.[11] 8월 16일 새벽에는 사령관 간주르자브 중장이 도주했으며, 지휘관을 잃은 제9군관구는 같은 날 해산했다.

제10군관구는 명령에 따라 시네헤이(석니하) 부근으로 전진했으나, 8월 11일 참모장 존주르자브 소장이 일으킨 반란으로 일본인 군관 29명이 살해되었고, 이후 부대는 소련군에 투항했다.[12]

육군 흥안 학교는 3개 제대로 나뉘어 행군을 시작했지만, 모든 제대가 행군 도중 소식이 끊겼다.

한편, 노몬한 사건에 참전했던 흥안사는 이후 개편되어 '''제2사'''가 되었으며, 1945년 1월부터 서부 국경 방면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 침공 당시 제2사(사단장: 하야시 야스하루 소장)의 일부 병력은 지둥 지역에 파견된 상태였고, 주둔지에 남은 병력은 약 3,000명 정도였다. 제2사는 소련군 격퇴 명령을 받았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부대 내에서 이탈과 반란이 발생했다. 결국 8월 11일, 사단장은 남은 부대의 해산을 결정했다.[13] 봉기한 병사들은 이후 동몽골 자치 정부의 인민 자치군으로 합류했다.

3. 부대 특성

흥안군은 만주국 육군의 다른 부대들이 다민족으로 혼성된 것과 달리, 일본인 교관이 배속되기는 했지만 몽골족만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 부대는 주로 초원 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초원 지대의 거류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겨울에도 낙오자 없이 행군할 수 있었고 야간에도 방향 감각을 잃지 않고 행동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또한 마술(馬術)이 뛰어나 고삐를 잡지 않고도 사격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흥안군은 적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만주국의 유격대로서 활동했다.

4. 편성

흥안군은 창설 초기와 만주국 말기에 편제가 변화하였다.

1934년 당시 흥안군은 흥안동, 흥안서, 흥안남, 흥안북의 4개 경비군 체제로 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3,495명이었다. 부대 단위에서 단(團)은 연대, 영(營)은 대대, 련(連)은 중대에 해당했다.[14]

1945년 당시에는 제9군관구와 제10군관구의 2개 군관구 체제로 개편되었다.[15] 각 시기별 상세한 편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1934년

1934년 당시 흥안군의 총 인원은 3,495명이었다.[14] 부대 단위에서 단(團)은 연대, 영(營)은 대대, 련(連)은 중대에 해당한다.[14] 각 경비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 흥안동 경비군
  • 사령관 대리: 촐바토르 (초라바투얼) 상교
  • 사령부: 박극도(보크토)
  • 예하 부대: 흥안 기병 제1단, 흥안 기병 제2단, 흥안 보병 제1영, 자란툰 병원
  • 흥안서 경비군
  • 사령관 대리: 오고정 상교
  • 사령부: 임서
  • 예하 부대: 흥안 기병 제3단, 흥안 기병 제4단, 독립 산포병 제1련, 독립 통신 제1련, 임서 병원
  • 흥안남 경비군
  • 사령관: 바트마라푸탄 (바특마라부탄) 소장
  • 참모장: 간주르자브
  • 사령부: 전가점
  • 예하 부대: 흥안 기병 제5단, 흥안 기병 제6단, 독립 산포병 제2련, 독립 통신 제2련, 전가둔 병원
  • 흥안북 경비군
  • 사령관: 울르진 갈마예프 (오이얼진) 소장
  • 참모장: 후린(복령)
  • 사령부: 하이랄
  • 예하 부대: 흥안 기병 제7단, 흥안 기병 제8단, 흥안 보병 제2영, 하이랄 병원

4. 2. 1945년

1945년 당시 흥안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15]

'''제9군관구'''
직책/부대이름/정보
사령관간주르자브 중장
참모장도쿠나가 쿄스케 상교
사령부통료
소속 부대



'''제10군관구'''
직책/부대이름/정보
사령관곽문림 중장
참모장정주이얼자부 소장
사령부하이랄
소속 부대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문서 싱안 성, 러허 성 등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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