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기리 사다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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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기리 사다타카는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차남이자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하리마국에서 영지를 받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했으나 영지를 유지했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오사카 전투 이후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영지를 받았다. 형보다 격렬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가타기리 사다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가타기리 씨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에이로쿠 3년 음력 7월 3일(1560년7월 25일)
사망간에이 4년 음력 10월 1일(1627년11월 8일)
아명고마치요
통칭가베에
관위종5위하, 주젠노카미
가문Katagiri Chigai Taka-no-ha inverted.png
가몬설명마루에 다른 매의 깃털, 귀갑의 내화릉
가계
아버지가타기리 나오사다
형제가쓰모토, 사다타카
아내정실: 다케다 이치운의 딸
측실: 이마이 소쿤의 딸
자녀사다마사, 사다하루, 잇시키 노리카제, 딸 (잇시키 노리미 실), 딸 (가타기리 모토 양녀), 딸 (혼다 다다즈미 정실)
관직
섬긴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이에미쓰
막부에도 막부
야마토국고이즈미번 번주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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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력

가타기리 사다타카는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차남이자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하리마국에 영지를 받았으며, 오다와라 정벌, 분로쿠의 역 등에 종군한 공으로 하리마 국내에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형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오쓰성 전투에 참여했지만 영지는 안도되었다. 1614년 오노 하루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히데요리로부터 5천 석을 추가로 받고, 슨푸의 이에야스와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방문했다. 그러나 호코지 종명 문제로 이에야스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고,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 1615년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1만 6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형보다 훨씬 격렬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2.1. 도요토미 가문 섬김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차남이자,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이다. 21세 때 형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하리마국에 150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 분로쿠의 역 등에 종군한 공으로 하리마 국내에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형과 함께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며, 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오쓰성 전투에 참여했지만, 영지는 안도되었다. 게이초 19년 6월, 오노 하루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5천 석을 히데요리로부터 가증받아, 그 답례로 하루나가와 슨푸에 있는 오고쇼 이에야스, 이어서 에도의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방문했다. 그러나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호코지 종명 문제가 터져 나와 이를 계기로 이에야스와의 내통을 의심받게 되었고, 형과 함께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으며,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인 1615년,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1만 6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형보다 훨씬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2.2. 세키가하라 전투와 도요토미 가문 이탈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차남이자,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하리마국에 영지를 받았으며, 오다와라 정벌, 분로쿠의 역 등에 종군한 공으로 하리마 국내에 10000석 이상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형과 함께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오쓰성 전투에 참여했지만, 영지는 안도되었다. 1614년 6월, 오노 하루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5000석을 히데요리로부터 추가로 받아, 그 답례로 하루나가와 슨푸에 있는 오고쇼 이에야스, 이어서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방문했다. 그러나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호코지 종명 문제가 터져 나와 이를 계기로 이에야스와의 내통을 의심받게 되었고, 형과 함께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으며,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인 1615년,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16000석을 영지로 받았다.

2.3. 도쿠가와 가문 섬김과 이후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차남이자,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이다. 21세 때 형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하리마국에 150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 분로쿠의 역 등에 종군한 공으로 하리마 국내에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형과 함께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오쓰성 전투에 참여했지만, 영지는 안도되었다. 1614년 6월, 오노 하루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5천 석을 히데요리로부터 가증받아, 그 답례로 하루나가와 슨푸에 있는 오고쇼 이에야스, 이어서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방문했다. 그러나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호코지 종명 문제가 터져 나와 이를 계기로 이에야스와의 내통을 의심받게 되었고, 형과 함께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으며,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인 1615년,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1만 6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형보다 훨씬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3. 인물

가타기리 나오사다의 차남이자,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이다. 21세 때 형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하리마국에 150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후, 오다와라 정벌, 분로쿠의 역 등에 종군한 공으로 하리마 국내에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형과 함께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며, 게이초 5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오쓰성 전투에 참여했지만, 영지는 안도되었다. 게이초 19년 (1614년) 6월, 오노 하루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5천 석을 히데요리로부터 가증받아, 그 답례로 하루나가와 슨푸에 있는 오고쇼 이에야스, 이어서 에도의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방문했다. 그러나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호코지 종명 문제가 터져 나와 이를 계기로 이에야스와의 내통을 의심받게 되었고, 형과 함께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으며,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인 1615년, 야마토국 고이즈미에 1만 6천 석을 영지로 받았다.

형보다 훨씬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