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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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다이묘, 정치가이다. 그는 미카와 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인질로 보내는 등 고난을 겪었지만,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치며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다졌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개창하고, 260여 년간 지속된 막부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일본을 통치했으며, 검약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에야스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능력을 보였으며, 사후에는 도쇼 다이곤겐으로 신격화되어 일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본 정보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칭호도쇼 다이곤겐
본명마쓰다이라 다케치요 (松平 竹千代)
출생일1543년 1월 31일
출생지미카와국 오카자키 (현재의 아이치현 오카자키)
사망일1616년 6월 1일
사망지슨푸 (현재의 시즈오카)
기타 이름마쓰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 (松平 次郎三郎 元信)
마쓰다이라 구라도노스케 모토야스 (松平 蔵人佐 元康)
마쓰다이라 이에야스 (松平 家康)
정치 경력
직책쇼군
재임 시작1603년 3월 24일
재임 종료1605년 4월 16일
군주고요제이 천황
이전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
다음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
가문 정보
가문마쓰다이라 가문
도쿠가와 가문
마쓰다이라 가문 수장 시작1549년
마쓰다이라 가문 수장 종료1616년
도쿠가와 가문 수장 시작1567년
도쿠가와 가문 수장 종료1616년
배우자쓰키야마도노
아사히노가타
자녀마쓰다이라 노부야스
가메히메
도쿠히메
유키 히데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다케다 노부요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마쓰다이라 마쓰치요
마쓰다이라 센치요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요리노부
도쿠가와 요리후사
후리히메
마쓰히메
이치히메
외 다수
가계
아버지마쓰다이라 히로타다
어머니오다이노가타
군사 정보
소속마쓰다이라 가문
이마가와 가문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동군
일본 조정
도쿠가와 막부
부대도쿠가와 가문
지휘에도 성
주요 전투데라베 성 포위전
마루네 성 포위전
가미노고 성 포위전
바토가하라 전투
도토미 전투
아네가와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스루가 전투
다카텐진 성 포위전
덴모쿠잔 전투
덴쇼-진고 전쟁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오다와라 성 포위전
구노헤 반란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직위
태정대신일본
임명 시작1616년 5월 2일
임명 종료1616년 6월 1일
기타
로마자 표기Tokugawa Ieyasu
한자 표기徳川 家康
통칭관동의 너구리
신호도쇼다이곤겐 (東照大権現)
계명안고쿠인덴 도쿠렌샤 스우요 도오와다이코지 (安国院殿徳蓮社崇誉道和大居士)
묘소구노산 도쇼구
닛코 도쇼구
다이쥬지
고야산
관위종5위하, 미카와노카미, 사쿄다이부, 종5위상, 시종, 정5위하, 종4위하, 우콘에노쇼쇼, 종4위상, 정4위하, 사콘에노츄죠, 종3위, 산기, 곤츄나곤, 정3위, 종2위, 곤다이나곤, 사콘에노다이쇼, 사마료고칸, 정2위, 나이다이진, 종1위, 우다이진, 세이이타이쇼군, 다이조다이진, 겐지초자, 증위 정1위
막부에도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재임: 1603년 ~ 1605년)
주군이마가와 요시모토이마가와 우지자네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리고요제이 천황고미즈노오 천황
씨족마쓰다이라 씨 → 도쿠가와 씨
아버지마쓰다이라 히로타다
어머니오다이노가타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계부히사마쓰 도시카쓰
형제자매이에야스
마쓰다이라 이에모토?
나이토 노부시게?
쇼오쿠 게사이?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이치바히메
야다히메
이복 동생: 마쓰다이라 야스모토, 마쓰다이라 야스토시, 마쓰다이라 사다카쓰
이복 자매: 다코우히메
정실쓰키야마도노
계실아사히히메
측실운코인 외 다수
자녀마쓰다이라 노부야스, 가메히메, 도쿠히메, 유키 히데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후리히메, 다케다 노부요시,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도쿠가와 요시나오, 도쿠가와 요리노부, 도쿠가와 요리후사 외 다수
참전 전투
센고쿠 시대아네가와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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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오카자키성 천수각
오카자키성 천수각

우타가와 호토(歌川芳虎) 그림 「미카와 영웅전」에서 「종일위우대신 정이대장군 원가강공」
우타가와 호토(歌川芳虎) 그림 「미카와 영웅전」에서 「종일위우대신 정이대장군 원가강공」

다케치요 시대를 보낸 린자이지 (시즈오카시)(2016년 8월 14일 촬영)
다케치요 시대를 보낸 린자이지 (시즈오카시)(2016년 8월 14일 촬영)

※ 날짜는 태음력에 의한 화력이다. 서력의 역법은 편의상 율리우스력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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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연호서력월일나이(세는나이)내용
덴분 11년1542년12월 26일1세미카와 국오카자키 성에서 출생.
에이로쿠 3년1560년5월 19일19세오케하자마 전투
에이로쿠 5년1562년1월 15일21세기요스 성을 방문하여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다.
에이로쿠 9년1566년12월 29일25세후지와라 도쿠가와씨로 개성. 종오위하에 서위하고, 미카와노카미에 임관
에이로쿠 11년1568년1월 11일27세사쿄다이부
겐키 원년1570년6월 28일29세아네가와 전투
겐키 2년1571년1월 5일30세종오위상
1월 11일지쥬
겐키 3년1572년10월 16일31세후타마타 성 전투
1573년12월 22일미카타가하라 전투
텐쇼 2년1574년1월 5일33세정오위하
텐쇼 3년1575년5월34세나가시노 전투
텐쇼 5년1578년12월 10일36세종시위하
12월 29일우곤에곤쇼쇼
텐쇼 8년1580년1월 5일39세종시위상
텐쇼 10년1582년6월 2일41세혼노지의 변, 신군 이가고에
텐쇼 11년1583년10월 5일42세정사위하 (소급)
10월 7일사콘에곤추쇼 (소급)
텐쇼 12년1584년2월 27일43세종삼위산기 (소급)
3-4월고마키·나가쿠테 전투
텐쇼 14년1586년10월 4일45세곤추나곤
10월 27일오사카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종
11월 5일정삼위
텐쇼 15년1587년8월 8일46세종이위곤다이나곤. 하시바씨를 하사받음(도요토미 성도 그런가?)
1588년12월 28일사콘에다이쇼·사마료고간 양 관직 겸임
텐쇼 16년1588년1월 13일까지47세사콘에다이쇼·사마료고간 양 관직 겸임 사임.
텐쇼 18년1590년8월49세관동 이봉. 8월 초하루, 에도 성에 입성.
텐쇼 20년1592년9월 16일51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칙주에 의해 세이카가의 가격 칙허.
게이쵸 원년1596년5월 8일55세정이위나이다이진
게이쵸 5년1600년9월 15일59세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쵸 7년1602년1월 6일61세종일위
게이쵸 8년1603년2월 12일62세우다이진, 정이대장군 선하·겐지장자 선하
10월 16일우다이진 사임
게이쵸 10년1605년4월 16일64세정이대장군 사직·겐지장자는 그대로
게이쵸 19년1614년3월 8일73세조정으로부터의 다이조다이진 또는 준삼후의 내지를 사퇴.
1614년 - 1615년11월-12월오사카 겨울의 진
게이쵸 20년/겐와 원년1615년5월74세오사카 여름의 진
7월 7일무가쇼하토 제정
7월 17일킨츄나미쿠게쇼하토 제정
겐와 2년1616년3월 17일75세다이조다이진
4월 17일사망
겐와 3년1617년3월 9일증정일위

2.1. 어린 시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和暦일본어 덴분 11년 12월 26일) 미카와국 오카자키성에서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마쓰다이라 다케치요(松平竹千代일본어)였다. 어머니는 가리야성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오다이노가타(於大の方일본어)이다. 이에야스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히로타다는 17세, 어머니 오다이는 15세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지인 오카자키 성(岡崎城)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지인 오카자키 성(岡崎城)

당시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씨는 모리야마의 변으로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살해당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카와 국 동부는 이마가와 씨가 지배하고 있었고, 서부는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히데가 계속 노리던 상황이었다.

이에야스는 태어난 지 2년 만인 1544년 어머니와 헤어졌다. 외조부 미즈노 다다마사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가 친(親)오다 정책을 유지하면서, 히로타다는 오다이와 이혼하고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1548년에는 히로타다의 숙부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씨와 내통하여 히로타다를 오카자키 성에서 몰아내려는 모반을 일으켰다. 히로타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고, 요시모토는 당시 여섯 살이던 이에야스를 슨푸에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히로타다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오다 노부히데는 도다 야스미쓰를 이용하여 슨푸로 향하던 이에야스를 오와리 국으로 납치했다.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아 히로타다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히로타다는 강경하게 거절했다. 노부히데는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고 나고야 반쇼지에 가두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오와리 국에서 2년 동안 인질 생활을 했다.

1549년 히로타다가 가신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마가와 씨는 다이겐 셋사이의 헌책에 따라 안쇼 성을 공략하여 성주 오다 노부히로와 이에야스를 교환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오카자키가 아닌 슨푸로 호송되어 8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서 생활하였다. 그는 셋사이를 스승으로 섬기며 6년 간 학문과 병법을 배웠다.

2.2. 센고쿠 시대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후, 이에야스는 독립하여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체결했다. 기요스 동맹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5,000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씨의 본거지인 기요스 성을 포위하였으나, 오다 군의 기습을 당해 전투 중 모리 요시카쓰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마가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군 중 가장 뒤늦게 적지를 탈출했지만, 노부나가의 추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카자키에 들어온 후에도 성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다이주 사(大樹寺)에 머물러있다가, 5월 23일 오카자키 성의 조다이였던 미우라 고즈케노스케가 슨푸로 돌아간 후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함으로써 인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이후 혼다 다다카쓰, 이시카와 가즈마사, 고리키 기요나가,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앞세워 마쓰다이라 씨의 확장에 몰두하다가, 1561년 이마가와 씨를 배신하였다. 노부나가는 미노 국의 사이토 요시다쓰와의 전쟁을 앞두고 미즈노 노부모토에게 이에야스 측과의 교섭을 의뢰했고, 미즈노의 중재 하에 이에야스는 1562년 기요스 성에서 비밀리에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

조구 사, 쇼만 사, 혼쇼 사 등 3대 사찰을 중심으로 미카와의 일향종이 벼의 징수 문제로 잇키를 일으켰다. 이에야스는 일향종의 잇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데, 이 때문에 이에야스의 가신 중 사카이 다다나오, 기라 요시아키, 아라카와 요시히로, 하치야 한노조 등, 일향종을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 적으로 돌아서 잇키에 가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잇키는 1563년 2월 이에야스가 주동자 시쓰다 사쿠주로를 죽이고, 주동자를 추방한 다음 가담한 가신들을 용서함으로써 끝났는데, 이후 이에야스는 미카와 국 내의 일향종 사원을 전부 부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명하여, 미카와 국 동부에 있는 이마가와 씨의 최대 거점인 요시다 성을 공략하여 점령하도록 했다. 그 직후에는 혼다 히로타카가 다하라 성을 점령하며 미카와 국 동부에서 이마가와 씨를 완전히 몰아내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

1568년 12월 슨푸 성을 점령하고, 엔슈(遠州일본어)를 공격하고 이에야스는 이듬해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신겐의 배신에 따라 본성을 오카자키에서 히쿠마로 옮겨, 하마마쓰 성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가케가와 성까지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추적하여 그를 처가가 있는 이즈 국으로 낙향시켜 사실상 이마가와 씨를 멸망시키며 도토미와 미카와의 전역을 확보한다. 한편 1568년 이에야스의 동맹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 국에서 가장 인접한 야마토 국을 획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입성해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570년 노부나가가 에치젠 국과 오미 국을 공격할 때 이에야스도 참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노부나가는 같은 해 6월에 다시 오미와 에치젠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를 틈탄 다케다 신겐의 교토 침공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다시 진군, 아자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와의 아네가와 전투,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나가시노 전투를 거치며 입지를 크게 넓혀갔다.

1579년,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요구로 정실 쓰키야마도노와 장남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다만, 이는 이에야스 가문 안의 하마마쓰 파(이에야스 파)와 오카자키 파(노부야스 파)간의 대립의 산물로 보는 시각 또는 단순한 부자 간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국일대를 점령하자, 1582년 호조 씨를 포섭하여 오다, 도쿠가와, 호조가 동시에 가이 국을 공격하여 4월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이에야스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등 세 개의 구니를 장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6월,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려 할복하는 혼노지本能寺의 변이 발생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와 같이 초청받았던 이에야스가 서둘러 미카와 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가 국 닌자 출신인 핫토리 한조와 교토의 대상인大商人인 자야 시로지로의 도움을 받았다. 오다 사후 이에야스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수를 쳐 오사카 부근의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를 죽이자 단념하고 철수하였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벌어진 고마키 산 (아이치현 고마키시 소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벌어진 고마키 산 (아이치현 고마키시 소재)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죽인 후 기요스에서 두 살의 오다 가문의 적손인 산포시(三法師일본어)를 앞세우며 사실상 오다의 세력을 계승하였다. 이에야스는 남은 반 히데요시 세력인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손잡았다.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에야스는 출전에 앞서, 아키국의 모리 데루모토,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 엣추국의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일본어) 등과 동맹을 맺어 히데요시의 배후를 교란하게 하도록 미리 약속을 해두었고, 히데요시도 이에 맞서 시코쿠의 센고쿠 히데히사, 히젠국의 우키타 히데이에, 가가국의 마에다 도시이에를 각각 모리, 조소카베, 삿사와 맞서게 하는 등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이에야스는 같은 시기 미노국 오가키(大垣)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사위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와 더불어 이누야마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마키 산에 진을 친 후 하구로에서 모리 나가요시 군대를 격파하였다.

같은 해 4월 9일 이에야스의 선제 기습으로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의 선봉대가 궤멸당하자 다시 전투는 장기 지구전으로 바뀌었고, 11월에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쓰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가 계속 싸울 명분이 사라지자 차남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강화 이후의 냉전 과정에서 전부터 히데요시와의 우호 관계를 건의해 오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설득을 받아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하면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 와의 정략 결혼을 거쳐 1586년 히데요시에게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하였다.

1590년, 히데요시는 간핫슈(関八州일본어)·오우(奥羽일본어)를 공격하기에 앞서 이에야스와 함께 오다와라(小田原)의 고호조(後北條)에게 신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호조는 히데요시에게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고 군비를 증강하며, 히데요시의 가신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점령하는 등 계속 히데요시를 자극하였다. 히데요시는 2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다와라로 출격하였으며, 이에야스는 2만 8,0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며 가장 먼저 오다와라로 진격하였다. 7월 5일,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켜 간토를 손에 넣고, 오우의 아이즈(会津일본어)까지 점령해 오우 지역의 다이묘를 복종시켜, 100여년의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였다.

|200픽셀|섬네일|왼쪽|지금의 고쿄인 에도 성의 이중교와 후시미 망루 ]]
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오다와라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선약했던 대로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伊豆)를 내렸다. 그리하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의 결과를 받아들인 이에야스는, 오다와라나 가마쿠라가 아닌, 간토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던 호조의 일개 출장소 에도(江戸일본어)로 명절인 핫사쿠(八朔일본어)였던 1590년 8월 1일 입성하였다.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인도 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완수하기 앞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며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히젠국에 새로 축조해 놓은 나고야성(名護屋城)으로 출진할 것을 명령하고 나고야 성을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에야스도 동원령을 받아 1592년 병력을 이끌고 나고야 성으로 출진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출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1598년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할 다섯 다이로와 다섯 부교를 뽑아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였는데, 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와 더불어 다섯 다이로로 뽑혔고, 집행 기관인 다섯 부교에는 문관파인 이시다 미쓰나리, 아사노 나가마사, 마에다 겐이, 나쓰카 마사이에, 마시타 나가모리가 뽑혔다. 또한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는 각각 후시미에서의 정사 담당과 오사카에서의 히데요리 보좌라는 중대한 임무가 더 맡겨졌다.

2.3. 권력 쟁탈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 사망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입지를 넓혀갔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이시다 미쓰나리호소카와 가라샤를 죽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등 무공파가 미쓰나리를 위협하자,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사와야마 성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 성에 도착하는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직을 일시적으로 파직시켰다.

5원로의 서명. 왼쪽 위부터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모리 데루모토, 왼쪽 아래부터 우키타 히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래 줄은 거꾸로 되어 있다.
5원로의 서명. 왼쪽 위부터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모리 데루모토, 왼쪽 아래부터 우키타 히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래 줄은 거꾸로 되어 있다.

1598년, 건강이 악화된 히데요시는 그의 사후 아들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통치할 5원로 중정을 결정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히데요리의 태로(섭정)로 선택된 5명은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그리고 5명 중 가장 강력했던 이에야스였다.

한편,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모반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자, 1600년 이에야스는 가케카쓰에게 진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나오에 가네쓰구는 "각 구니의 풍습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박하였고, 이에야스는 즉각 아이즈 정벌을 명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쓰나리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여 10만 4천여명의 서군(西軍)을 결집하였다. 서군은 후시미 성을 함락시키고 오가키성을 점령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

1600년 7월 24일, 시모쓰케국 오야마에서 미쓰나리의 거병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동군(東君)을 결성하고, 9월 14일에 가쓰야마에 본진을 구축하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나카센도를 거쳐 오도록 하였으나 사나다 마사유키와 부딪혀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서군은 세키가하라에서 반월 형태의 진을 쳤으나,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깃카와 히로이에 등 서군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배반 또는 내통을 약속받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적극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군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9월 15일, 동군은 서군을 궤멸시켰으며, 미쓰나리는 도주하고 시마즈 군은 이세국으로 탈출하였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은 초기 병력이 7만 5천 명이었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끈 서군은 12만 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투 최종 진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투 최종 진영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등은 참수되었다. 서군에 가담했던 다이묘들은 가이에키(改易일본어) 또는 감봉(減封)을 당하였다. 시마즈 씨는 60여만석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히데요리도 65만석으로 감봉되어 일개 다이묘로 강등되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와 사후 처리를 통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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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쇼군 재임

쇼군 때의 이에야스
쇼군 때의 이에야스

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으며, 후시미성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선지(宣旨)를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에야스는 무로마치 막부 이래 여러 권력자들이 교토에 본거지를 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개창하였다.

1604년부터 에도 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에도 성의 증축을 위해 이에야스는 도도 다카토라를 등용하여 설계를 맡겼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도자마 다이묘 28개 가문에 공사를 돕도록 명령하였다. 도자마 다이묘들은 1,000석 당 한 사람의 인부를 제공해야만 했고, 이즈반도에서 채석한 석재를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10만석 당 100명이 들 수 있는 석재를 120개 준비하도록 하는 식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부역 부담을 통해 이에야스는 다이묘를 손쉽게 통제하였으며, 에도 성은 260년 간 도쿠가와 쇼군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았다. 당시 이에야스는 60세였으며, 오다 노부나가, 다케다 신겐, 도요토미 히데요시, 우에스기 겐신 등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인물들을 모두 능가했다. 쇼군으로서 그는 남은 세월을 도쿠가와 막부의 건설과 강화에 바쳤고, 이는 에도 시대를 열었으며 가마쿠라 막부와 아시카가 막부에 이은 세 번째 쇼군 정부였다.

확립된 일본의 관례를 따라 1605년 쇼군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였다.

1604년, 도도 다카토라와 다테 마사무네는 쇼군 정부에 일본 전역에 걸쳐 각 봉건 영주가 쇼군의 수도인 에도에 거주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규칙을 도입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야스는 이를 즉시 받아들여 공식적으로 시행했다.

1600년 12월 19일, 1595년에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해임된 이후 공석이었던 관백에 구조 가네타카가 이에야스의 상소에 따라 임명되었다. 이로써 도요토미씨에 의한 관백직 세습이 중단되고 종래의 고셋케(五摂家)에 관백직이 돌아왔다.

1601년 3월 23일, 이에야스는 오사카성 서쪽 마루를 나와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정이대장군으로서 막부를 열기 위해 도쿠가와씨의 계보 개성을 실시했다.

1602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에서 유일하게 처분이 결정되지 않았던 히타치 국 미토의 사타케 요시노부를 우슈 국 구보타로 감전봉했다. 대신 사타케씨와 마찬가지로 겐 요시미쓰의 계보를 잇는 다케다씨를 계승한 다섯째 아들 다케다 노부요시를 미토에 들였다.

1603년 2월 12일, 우대신에 임명되었다. 같은 날, 정이대장군, 겐지 장자, 쇼가쿠 준와인 등 별당, 우샤병장 등의 선하가 있었다.

같은 해 3월 12일, 후시미성에서 니조성으로 옮겼고, 3월 21일, 의관속대를 갖춰 행렬을 정비하여 어소에 참내하여 장군 배하의 예를 행하고, 연초의 축하도 말했다. 3월 27일, 니조성에 칙사를 맞이하여 중신과 공가 중을 초대하여 장군 취임의 축하 의식을 거행했다. 또 4월 4일부터 3일간, 니조성에서 노가쿠가 행해져 제다이묘와 공가 중을 향응했다.

1603년 10월 16일, 우대신을 사임했다.

이에야스(家康)가 기반을 닦은 도쿠가와 쇼군가(徳川将軍家)를 정점으로 하는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지배 체계는 완성도가 높은 것이었다. 에도 막부는 교토, 오사카(大坂), 사카이(堺) 등 전국 주요 막부 직할 도시(텐료(天領))를 포함해 약 400만 석, 하타모토(旗本)지교(知行)지를 포함하면 전국의 총 석고(石高)의 1/3에 해당하는 약 700만 석을 독점 관리했고, 나아가 사도 금산(佐渡金山) 등 중요 광산(鉱山)과 화폐(貨幣)를 만드는 권리도 독점하여 화폐 경제(貨幣経済)의 근간도 장악하는 등, 다른 다이묘(大名)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압도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고, 이를 배경으로 전국 제후, 지샤(寺社), 조정, 그리고 황실(皇室)까지도 여러 법도(法度)로 단속하고 지배했다.

막부에 충순한 다이묘에 대해서도 참근교대(参勤交代) 등으로 항상 재정을 압박하여 막부에 반항할 힘을 축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특히 근세 초기에는 많은 전봉을 실시하여 "화분에 심은 식물"처럼 만들었다.

2.5. 양위 이후

1605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씨의 위협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도쿠가와 쇼군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쇼군 직위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을 통해 히데타다가 교토에 상경했을 때 히데요리도 인사를 하도록 요구했지만, 히데요리가 거부하자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보내 양해를 구했다.

이후 이에야스는 슨푸 성으로 들어가 명목상 은거했지만, '오고쇼'(大御所일본어)라고 칭하며 에도의 히데타다와 함께 2중 정치를 이끌었다. 슨푸 성은 에도 성처럼 대대적인 증축을 거쳐 칠중오층의 천수각을 가진 거대한 성으로 재탄생했고, 조카마치 또한 정치, 경제, 외교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슨푸 성 다쓰미 망루
슨푸 성 다쓰미 망루


이에야스는 사망할 때까지 슨푸에서 측근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새로운 통치 기구를 만들었다. 미카와 시절부터의 원로들은 은퇴하고, 혼다 마사즈미, 나루세 마사나리 등의 젊은 다이묘와 행정 전문가, 곤치인 스덴, 하야시 라잔 같은 승려와 유학자, 자야 시로지로, 이나 다다쓰구 같은 경제 전문가와 거상, 윌리엄 애덤스 같은 외국인이 오고쇼 정치의 주축을 이루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히데요시 때부터 금교령이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처음에는 묵인하며 해외 무역 확대를 도모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 부인, 할복 금지 등 기독교 특성과 신토와의 대립, 오카모토 다이하치 뇌물 사건 이후 도요토미 잔당에 기독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1612년 에도, 오사카, 교토에 금교령을 발표하고 이듬해 전국으로 확대, 모든 백성에게 불교 신자가 되도록 하고, 기독교 신자에게 개종을 강요, 거부한 다카야마 우콘 등은 마카오와 필리핀으로 추방되었다.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무역 지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한정했다.
데지마 일대와 해군 훈련소 (나가사키시)
데지마 일대와 해군 훈련소 (나가사키시)


이에야스는 조정에 대한 압력도 지속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교토에 쇼시다이(所司代일본어)를 설치해 감시하고, 1607년 이노쿠마 노리토시 추문 해결을 막부가 의뢰받은 것을 빌미로 이노쿠마를 참수, 1613년 공가중법도를 제정해 간섭권을 확립했다. 2년 뒤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 조정과 공가의 군사·정치적 권한을 빼앗았다.

외교 정책도 중시하여,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607년까지 포로를 교환하고 조선 통신사가 파견되었으며, 1609년 기유약조 체결로 삼포왜란 이후 폐지되었던 왜관이 동래에 다시 설치되어 무역이 정상화되었다.
|섬네일|오른쪽|250px|조선통신사 행렬도 (대영 박물관 소장)]]
명나라와는 정식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히라도와 나가사키에서 사무역만 성행했으며, 타이완, 필리핀, 시암 등 동남아 국가들과도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사쓰마국의 시마즈 이에히사가 류큐 왕국 (오키나와)을 침략하여 막부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2.6. 오사카 전투와 도요토미 가문 멸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에 위협을 느껴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구실로 오사카 전투를 일으켰다.

현재도 남아있는 방광사의 종명 "國家安康""君臣豊楽"의 글자
현재도 남아있는 방광사의 종명 "國家安康""君臣豊楽"의 글자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리


1614년 10월,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포위하고, 11월부터 12월까지 이마후쿠와 시기노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후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의 해자를 매립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혼다 마사노부, 혼다 마사즈미 부자에게 안쪽 해자와 망루도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하여, 히데요리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해자를 모두 매립했다.

1615년 4월,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측이 교토에 방화한 것을 빌미로 다시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사나다 유키무라의 분전으로 초반에 고전했지만, 유키무라 사후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 내부와 내통하며 압박을 가했다. 결국 5월 8일 오사카 성이 함락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가 자결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2.7. 최후

구능산 동조궁
구능산 동조궁

1616년 정월, 슨푸 근교로 매사냥을 나갔던 이에야스는 측근으로부터 돈카쓰, 덴푸라를 먹은 후 그날 밤 복통을 일으키며 중태에 빠졌는데, 시의 (侍醫) 가타야마 소테쓰의 재빠른 조치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후 3개월 간 이에야스의 건강 상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며 결국 4월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위암, 매독, 각기병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의 유훈은 《동조궁신군어유훈》(도쇼구신쿤고이쿤/東照宮神君御遺訓일본어)에 쓰여져 닛코 동조궁에 모셔져 있다.



이에야스는 죽음을 앞두고 혼다 마사즈미, 곤치인 스덴, 덴카이 쇼닌을 불러, 사체를 스루가 국 구노잔(久能山)에서 장사지낸 후 장례는 에도의 조조 사에서 지내고, 위패는 미카와 국의 다이주지에 봉안하고 시모쓰케 국의 닛코(日光)에 작은 사당을 지어 죽은 지 1주일 후 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죽은 날 밤 이들은 이에야스의 유해를 비밀리에 구노잔으로 옮겨 장사지낸 후, 이에야스를 신격화하기 위해 불교의 산왕일실신도에 따라 곤겐(権現일본어)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죽은 후 1주기가 되던 날에는 유해를 닛코로 옮겼으며, 천황으로부터 도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일본어)이라는 신호가 부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의 갈등 이후, 이에야스는 각 다이묘(大名)가 성을 하나만 소유하도록 규정한 무가쇼핫토(武家諸法度)를 시행했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암 또는 매독으로 추정된다. 초대 도쿠가와 쇼군(将軍)은 사후 "동쪽의 빛, 위대한 곤겐(權現)"이라는 뜻의 도쇼 다이곤겐(東照大権現일본어)으로 신격화되었다. (곤겐(權現)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지상에 가미(神)의 모습으로 나타난 불다로 여겨진다.) 이에야스는 생전에 후손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후 신격화되기를 바랐다. 그의 유해는 구노잔(久能山)의 곤겐(權現) 묘소인 구노잔 도쇼구(久能山東照宮일본어)에 매장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사망 1주년 이후 그의 유해가 닛코 도쇼구(日光東照宮일본어)로 이장되었고, 현재도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쪽 사당도 묘를 열 의향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에야스의 유해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묘소의 건축 양식은 곤겐즈쿠리(権現造り), 즉 곤겐 양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돌보던 주치의인 소테츠 카타야마(片山素鉄)는 이에야스에게 위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카타야마의 진단을 기생충 감염으로 잘못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소테츠가 준비한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기생충 문제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치료법을 계속 사용했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아들 히데타다(秀忠)도 그의 치료법에 대해 경고했지만, 의학 분야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에야스는 오히려 화를 냈다. 그의 치료를 둘러싼 갈등은 이에야스가 소테츠를 신슈(信州)의 다카시마번(高島藩)으로 유배 보낸 후에야 끝났다.

사망 당시 이에야스는 약 400만 석(石)의 개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도쿠가와 씨 전체로는 800만 석(石)에 달했다. 또한 그는 약 42톤의 금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幕府)가 이전 시대의 일본 정부와 달리 금광과 은광 소유권을 중앙 집권화했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는 광산 소유권은 막부의 허가를 받은 지역 영주가 관리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 후 260년 동안 일본을 지배하게 된다.
매사냥 모습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상 (스루가성 본마루 터)
매사냥 모습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상 (스루가성 본마루 터)

겐나 원년(1615년) 7월 17일, 금중병공가제법도 17조를 제정하여 조막 관계를 규정하였다. 또한, 여러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무가제법도·일국일성령이 제정되었다.

겐나 2년(1616년) 1월 21일, 매사냥을 나선 다나카에서 병에 쓰러져, 소강 상태가 된 25일에 스루가로 귀환했다. 그 후, 요양 생활에 들어가지만,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점차 악화되어 갔다.

3월 27일, 조정으로부터 태정대신에 임명되었다. 무가 출신자의 태정대신으로서는, 평청성, 원의정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였다.

원화 2년(1616년) 4월 17일(음력), 이에야스는 駿府城에서 75세(만 73세 4개월)로 사망했다.

사인에 대해서는, 도다이를 개비 기름에 튀겨, 거기에 갈은 부추를 뿌린 덴푸라에 의한 식중독설이 오랫동안 일반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도다이 덴푸라를 먹은 것은 1월 21일 저녁으로, 교토에서 평판이 좋은 새로운 요리로 차야사로지로 세이지가 소개하여 다나카성(현 시즈오카현후지에다시)에서 대접한 것이다。참고로, "덴푸라"라고 불리고 있지만, 옷을 입히지 않고, 실제로는 가라아게에 가깝다.cf. 튀김#일화。, 사망한 날짜인 4월 17일까지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에, 식중독을 사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신 주류가 되고 있는 것은 위암설이다.

3. 인물과 평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쓰라 세이잔의 수필 갑자야화에 수록된 센류에서 묘사된 것처럼 "인내의 귀재"로 평가받는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복종을 강요당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임진왜란 중에도 영지를 지키며 신중하게 대처했다. 이러한 인내심 강하고 신중한 성격 덕분에 그의 삶은 일본에서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소재로 활용되며, 일본인들은 그를 '일본의 10걸'로 선정하여 존경한다. 반면 에도 시대 서민들 사이에서는 천하 통일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문무를 겸비하고 학문과 의술에 능했으며,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이길 정도의 무예 실력과 예술적 조예도 깊었다. 그가 디자인한 에도 성은 메이지 유신 이후 현재 일본 천황황거로 사용될 정도이다.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들에 의해 폄훼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반대하고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침략을 꾀하던 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최근에는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 등에도 잘 드러나 있다.

권모술수에 능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미끼로 반기를 드는 다이묘들을 색출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또한, 아군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센고쿠 시대 다이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부하 병력 피해가 적었다.

규슈대학 교수 미쓰나리 준지는 이에야스의 성장 과정을 모리 데루모토와 비교하며, 불안정한 유년 시절이 과감한 결단과 위험 감수 능력을 길렀다고 평가했다. 존 T. 퀴헨은 이에야스가 장기 전략 수립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홍강은 이에야스가 가신들의 능력을 활용하여 국가 안정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오와다 데쓰오는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에서 호조 씨의 세금 정책을 유지하여 주민들의 호감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하마다 코이치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이에야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미카와 이꼬이키 반란 진압 등에서 용감한 모습을 보였고,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의 잠재력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배신하지 않았고, 가신들에게 충성스러웠으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기억하고 처형하기도 했다. 와타나베 다이몬 교수는 이에야스가 부하들에게 자비심을 보이고 배신자들을 용서하여 미카와 사무라이 가문들의 충성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다케다 씨, 호조 씨, 이마가와 씨의 가신들을 충성스러운 가신으로 변화시켰지만, 도전을 받으면 무자비한 면모도 보였다. 조지 샌섬은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 이후 도요토미 씨 생존자들을 잔혹하게 제거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카와의 이꼬이키 봉기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와타나베 모리쓰나를 용서하는 등 용서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일본 밖 정복 욕망은 없었고, 질서 회복과 전쟁 종식을 원했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을 즐겼으며, 무사 훈련과 건강에 좋다고 여겼다. 수영도 즐겨 에도 성 해자에서 수영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도장 (구노잔 도쇼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도장 (구노잔 도쇼궁)

이에야스의 성공 비결 (닛코 도쇼궁 소장)
이에야스의 성공 비결 (닛코 도쇼궁 소장)

久能山東照宮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수형
久能山東照宮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수형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芝東照宮 소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芝東照宮 소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東岡崎駅 앞)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東岡崎駅 앞)


루손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는 이에야스의 용모를 "중간 키의 노인으로 존경할 만한 쾌활한 용모"라고 기록했다. 하복부가 불룩하여 스스로 속옷을 맬 수 없었다고 한다. 신장은 155cm~160cm로 추정된다.

검술, 마술, 궁술, 철포 등 다양한 무술에 능했다. 검술은 신음류 계열 신영류 등을 사사했고, 오노 타다아키, 류생 소켄 등을 등용했다. 마술은 오오츠보류를 배웠고, 궁술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기사로 여러 명을 쏘아 죽였다. 철포는 하마마츠 거성기에 학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학을 좋아했으며, 논어, 중용, 사기, 정관정요, 연희식, 아즈마카가미 등을 좋아했다. 이러한 서적을 목판, 동활자판으로 인쇄·간행했다. 겐지 모노가타리 강의를 받거나, 윌리엄 애덤스로부터 기하학과 수학을 배우는 등 관심이 광범위했다. 슨푸 성에 "슨푸 문고"를 만들어 약 1만 권의 장서가 있었다. 본초강목으로 마노를 확인하는 등 실증적이었다.

매사냥, 약 만들기 외에도 노, 바둑, 장기, 향도 등 다양한 취미가 있었다. 매사냥은 정치적·군사적 시찰, 몸 단련, 섭생으로 여겼다. 약 만들기는 팔미지황환 등 생약을 조합했으며, '팔자'라고 불리는 약을 8번째 서랍에 보관했다. 노는 세아미 가계에 연이 있는 간세 주로타유에게 배우고, 고실에도 통달했다. 바둑은 본인방 산사를 초청하고 가원을 보호했다. 장기는 오오하시 소케이에게 부지를 제공했다. 향도는 최상급 가라를 원했으며, 유품에 고품질 향목이 많다.

남만동, 남만시계 등 새로운 것을 좋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가는 도중에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남만동구족
세키가하라 전투에 가는 도중에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남만동구족
닛코 토쇼구에는 남만동구족이 있으며, 기슈 토쇼구에는 탄흔이 남아 있는 남만동구족이 있다. 해시계, 당나라 시계, 모래시계 등을 수집했으며, 나침반, 연필, 안경, 비드로 약병 등 외래품이 현존한다.

다도 사교에 대한 적극성은 보이지 않지만, 차를 마시는 것 자체는 좋아했다. 유산인 『슨푸 고문물』에는 당물 명물·대명물이 가득하지만, 쿠노산 토쇼구에는 소박한 수택품이 많다.

유방, 태종(당), 위징, 장량, 한신, 태공망, 문왕(주), 무왕(주), 주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존경했다. 다케다 신겐을 스승으로 삼아 군사·정치를 본보기로 삼았다.

『옹초』에는 "무필과 같은 악필"이라고 적혀 있지만, 소년기부터 청년기 문서류에는 예법대로의 붕괴 방식을 보여 잘 훈련한 흔적이 짐작된다. 천정 연간에는 측근에게 보낸 서장 등에서 스스로 필을 잡았다. 정가류를 좋아하여 후지와라노 테이카 필의 오구라 시키시를 임모하고, 편지에서도 영향을 받은 필적이 엿보인다. 수묵화가 10점 정도 전해지지만, 확실한 유품은 없다.

건강에 대한 지향이 강했으며, 당시로서는 장수인 75세까지 살았다. 보리밥과 생선을 좋아했으며, 야채 조림이나 낫토도 자주 먹었다. 술은 강했지만 과음하지 않았다. 화한 생약에 정통했으며, 본초강목과 와제국방을 정독했다. 팔미지황환을 일상적으로 복용했다. 비누를 사용하여 감염증을 예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위암을 촌백 덩어리라고 오진하여 가타야마 소테쓰가 조합한 약을 복용하지 않고 스스로 조합한 약을 계속 마셔 병세가 악화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인질 생활을 보냈고, 푸다이 가신의 배신으로 조부와 부친을 살해당했다. 미카와 이치쿄 이키에서 많은 가신에게 배신당했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후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에게도 배신당했다. 심복 이외 가신단과의 교류는 적었고, 가신들은 이에야스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말수가 매우 적다"고 평가했다.

이에야스의 검약에 관한 일화는 많다. 시중이 자리에서 스모를 할 때 다다미를 뒤집도록 했고, 마키에 장식을 한 고코의 악취미에 격분하여 부수게 했다. 미카와에 있을 때 보리밥을 먹으며 농민에게만 고생을 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마구간이 무너져도 그대로 두었다. 가신이 화려한 저택을 짓지 않도록 부지를 작게 했고, 자신의 저택도 소박했다. 카모 우지사토는 이에야스가 인심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야스의 유훈으로 알려진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은 위작이다. 메이지 시대에 위조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토쇼구 고유훈』은 위서라는 설이 있다.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겐을 존경하여 신겐의 전술과 사상을 배웠다. 신분이나 서열을 무시한 능력주의를 채택하지 않았고, 자신의 카리스마나 돈, 영지를 미끼로 가신을 늘리지도 않았다. 중신들은 대부분 미카와 시대부터 대대로 섬겨온 가신들이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허점을 이용하여 천하인이 되었다.

히데요시로부터 "가이도 이치노 유미도리"라고 칭찬받았다. 이에야스는 냉정침착한 지장이었지만, 급하고 신경질적인 면도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짜증을 내어 몬나 쵸사부로의 지모쓰 막대기를 베어 버렸다고 한다. 엄지손톱을 깨물어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분노에 휘둘려 가신이나 영민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냉철한 현실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법보다 인정을 우선시한 사례도 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대역으로 전사한 나츠메 요시노부의 자식을 용서했고, 사나다 마사유키와 사나다 유키무라를 구명했다. 미카와 무사들의 충절은 적에게 "개처럼 충실하다"고 말해졌다. 유능한 인재도 중시하여 푸다이뿐만 아니라 이마가와 씨, 다케다 씨, 호조 씨의 옛 신하들을 많이 등용하고, 오고쇼 시대에는 무사뿐만 아니라 승려, 상인, 학자, 심지어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를 등용하여 에도 막부의 기초를 만들어 갔다.

이에야스는 에도 시대 내내 신격화되었으며, 부정적 평가는 금지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흔했다.

전후에는 시마 료타로가 에도 시대를 비판적으로 평가했지만, 이에야스 자신에 대해서는 "전투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을 잘 다룬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인내와 선견지명으로 승리한 인물, 태평성대를 바라는 구도자로 그려졌으며, 이 소설을 계기로 이에야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2000년 아사히 신문사가 실시한 "일본의 얼굴 10인"에서 이에야스가 득표수 1위를 차지했다.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4. 가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오다이노가타의 아들로,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할아버지로, 미즈노 다다마사를 외할아버지로 둔다. 정실은 쓰키야마도노이며,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장녀 가메히메를 낳았다. 계실은 아사히히메이다.

측실로는 니시코오리노츠보네이 있으며, 차녀 도쿠히메를 낳았다. 오코챠는 차남 유키 히데야스를, 오아이는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4남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를 낳았다. 오타케는 3녀 후리히메를, 오츠마는 5남 마쓰다이라 노부요시를 낳았다. 오챠아는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와 7남 마쓰다이라 마쓰치요를, 오카메는 8남 히라이와 센치요와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낳았다. 오히사는 4녀 마츠히메를, 오만은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와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를 낳았다. 오카지는 5녀 이치히메(市姫)를 낳았다. 그 외에도 오토미, 오나츠, 오로쿠, 오센, 오우메, 아챠노츠보네, 오무스, 오마츠, 산죠씨, 마쓰다이라 시게요시의 딸 등 다수의 측실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62세에 11남 도쿠가와 요리후사(미토 도쿠가와 가의 시조)를 얻는 등 슬하에 11남 5녀를 두었다. 도쿠가와 요리후사미토 도쿠가와가의 시조가 되었고, 다른 아들들은 고산케를 창가하여 이에야스의 직계 자손이 끊어진 이후에도 번갈아 쇼군직을 계승했다.

양자로는 마츠다이라 이에하루, 마츠다이라 타다마사, 마츠다이라 타다아키라가 있다. 양녀로는 코마츠히메, 마테히메, 에이히메, 쿠마히메, 렌히메, 쿠니히메, 카메히메, 만히메, 후리히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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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미지이름사후 시호출생사망부모
아버지마쓰다이라 히로타다(Matsudaira Hirotada)오세이도칸토코지(Oseidokantokoji)마쓰다이라 기요야스(Matsudaira Kiyoyasu)
아오키 가문의 딸
어머니오다이노카타(Odai no Kata)1602년 10월 13일미즈노 다다마사(Mizuno Tadamasa)
오토미노카타(Otomi-no-K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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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미지이름사후 시호출생사망부모자녀
정실부인츠키야마도노 (Tsukiyama-dono)쇼게인(Shoge-in)1579년 9월 19일세키구치 치카나가(1518–1562)
이이 나오히라의 딸
마츠다이라 노부야스
정실부인아사히노카타 (Asahi no kata)난메이인(Nanmeiin)1543년1590년 2월 18일
측실니시고리노츠보네 (Nishigori no Tsubone)렌쇼인(Rensho-in)1606년 6월 19일우도노 나가모치(1513–1557)도쿠히메 (도쿠가와) (후에 호조 우지나오와 결혼, 이후 히메지번의 이케다 테루마사와 재혼)
측실시모야마도노 (Shimoyama-dono)모신인(Moshin’in)1564년1591년 11월 21일아키야마 토라야스미토번의 다케다 노부요시
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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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야마도노 (Kageyama-dono)유주인(Youjuin)1580년1653년 10월 13일마사키 요리타다(1551–1622)
호조 우지타카(d.1609)의 딸
기슈번의 도쿠가와 요리노부
미토번도쿠가와 요리후사
측실코토쿠노츠보네 (Kotoku-no-Tsubone)초쇼인(Chōshō-in)1548년1620년 1월 10일나가미 사다히데후쿠이번의 유키 히데야스
측실사이고노츠보네 (Saigō-no-Tsubone)1552년1589년 7월 1일토즈카 타다하루
사이고 마사카츠의 딸
측실오타케노카타 (Otake no Kata)료운인(Ryōun-in)1555년1637년 4월 7일이치카와 마사나가후리히메(1580–1617) (후에 아이즈번의 가모 히데유키와 결혼, 이후 히로시마번의 아사노 나가아키라와 재혼)
측실차아노츠보네 (Chaa-no-Tsubone)초코인(Chokoin)1621년 7월 30일다카다번의 마츠다이라 타다테루
후카야번의 마츠다이라 마츠치요
측실오나츠노카타 (Onatsu no Kata)세이운인(Seiun’in)1581년1660년 10월 24일하세가와 후지나오
측실오카지노카타 (Okaji no Kata)에이쇼인(Eishō-in)1578년 12월 7일1642년 9월 17일오타 야스스케(1531–1581)이치히메(1607–1610)
측실오우메노카타 (Oume no Kata)렌게인(Renge-in)1586년1647년 10월 8일아오키 카즈노리(d.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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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노츠보네 (Acha no Tsubone)운코인(Unkoin)1555년 3월 16일1637년 2월 16일이다 나오마사
측실오무스노카타 (Omusu no Kata)쇼에이인(Shōei-in)1692년 7월 26일미츠이 요시마사사산아(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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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메노카타 (Okame no Kata)소오인(Sōōin)1573년1642년 10월 9일시미즈 무네키요마츠다이라 센치요(1595–1600)
오와리번의 도쿠가와 요시나오
측실오센노카타 (Osen no Kata)타이에이인(Taiei-in)1619년 11월 30일미야자키 야스카게
측실오로쿠노카타 (Oroku no Kata)요겐인(Yōgen'in)1597년1625년 5월 4일쿠로다 나오진
측실오히사노카타 (Ohisa no Kata)후쇼인(Fushōin)1617년 3월 24일마미야 야스토시(1518–1590)마츠히메(1595–1598)
측실토미코 (Tomiko)신주인(Shinju-in)1628년 8월 7일야마다 씨
측실오마츠노카타 (Omatsu no Kata)호코인(Hōkōin)
측실산조 씨
측실마츠다이라 시게토시(1498–1589)

5. 일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심이 강하고 검약하며 학문을 애호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에 이미 250만 석을 훌쩍 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400만 석에 달하는, 다이묘석고 랭킹 1위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도 이에야스의 거대한 석고 때문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하라미이시 몬도에게 모욕을 당했지만, 훗날 다케다 신겐의 수하로 들어간 하라미이시를 포로로 잡자 할복을 명했다. 반면 슨푸 시절에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가신 출신의 포로는 풀어주고 큰 상을 내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연에서 자신의 골동품을 자랑할 때, 이에야스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한 5백 명의 가신들이 자신의 보배"라고 답했다.

에도 성을 재건하여 에도 막부 시기 정이대장군 전용 궁으로 사용하게 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천황으로 헌납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에도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각종 공사를 지시했는데, 이들은 에도가 살기 좋아 정착했고, 훗날 반다이, 타미야프라모델 회사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야스를 모시는 신사에는 프라모델이 헌물되기도 한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 군을 압박하기 위해 메구라부네를 사용했다.

이에야스는 다양한 검술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야규 신카게류 도장의 후원자였으며, 그들을 개인 검술 사범으로 두기도 했다. 그는 전사 또는 장군으로서 90번의 전투에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족 사찰인 조조지(増上寺), 히로시게(広重)가 1857년에 묘사한 모습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족 사찰인 조조지(増上寺), 히로시게(広重)가 1857년에 묘사한 모습

久能山東照宮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수형
久能山東照宮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수형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芝東照宮 소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芝東照宮 소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東岡崎駅 앞)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상(東岡崎駅 앞)

『교도입지기』「도쿠가와 타케치요」(고바야시 키요치카 필). 마쓰다이라 타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석합전의 승패의 향방을 알아맞추는 장면을 그린 그림.
『교도입지기』「도쿠가와 타케치요」(고바야시 키요치카 필). 마쓰다이라 타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석합전의 승패의 향방을 알아맞추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에야스는 정토종 불교 신자였으며, 가족 사찰을 에도의 조조지(増上寺)로 옮기고, 지온인 본찰을 포함한 기존 정토 사찰의 보수 공사를 후원했으며, 여러 새로운 사찰 건립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염불을 되풀이했다. 또한 학문과 유교에도 몰두하여 하야시 라잔과 같은 학자들을 후원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관용했지만, 1613년 이후 기리시탄(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가 급증하여 1614년 가톨릭을 완전히 금지했다.

6. 관련 작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제로 한 작품은 소설, 드라마, 영화, 만화, 게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소설
* 산오카 소우하치의 『덕川가강』은 메이지 시대 이후 형성된 교활한 이미지를 탈피, 그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1964년 NET(현 TV 아사히)에서 드라마화되었고(주연: 이치카와 우타에몬), 1965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감독: 이토 다이스케, 주연: 키타노지 킨야) 그 외에도 1983년 NHK 대하드라마(주연: 타키타 사카에), 1992년 TV 아사히 드라마(주연: 키타노지 킨야) 등 여러 차례 영상화되었다.
* 시바 료타로는 『패왕의 집』, 『세키가하라』, 『성채』 등 '이에야스 3부작'을 통해 이에야스를 다각도로 조명했다. 『세키가하라』는 1981년 TBS 드라마(주연: 모리시게 쿠야)와 2017년 영화(감독: 하라다 마토, 주연: 야쿠쇼 코지)로 제작되었다.
* 류 케이이치로의 『그림자 무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림자 무사설을 모티브로 한 소설로, 1998년과 2014년 두 차례 드라마화되었다.
* 몬도이 케이키의 『이에야스, 에도를 짓다』는 2019년 NHK 정월 시대극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이치무라 마사치카)
* 이마무라 쇼고의 『사나다를 치라』, 『타케치요의 값』
* 마베 아키토의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리대신이 된다면』은 2024년 영화화되었다.(주연: 노무라 만사이)
* 드라마
*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태합기》(1965년, 배우: 오노에 키쿠조)를 시작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 배우: 타키타 사카에), 《독안룡 마사무네》(1987년,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2000년,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군사 칸베에》(2014년, 배우: 테라오 아키라), 《사나다마루》(2016년, 배우: 우치노 세이요), 《어떡할래 이에야스》(2023년, 배우: 마츠모토 준) 등 여러 작품에서 이에야스를 주요 인물로 다루었다.
* 제임스 클라벨의 소설 『쇼군』(Shōgun) 속 요시 토라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1980년(쇼군 역: 미후네 도시로)과 2024년(쇼군 역: 사나다 히로유키)에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다.
* 한국 드라마로는 《불멸의 이순신》(2004년~2005년, KBS1, 배우: 전일범), 《임진왜란 1592》(2016년, KBS1, 배우: 이종신) 등이 있다.
* 만화
*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 『아즈미』(코야마 유)
* 『헤우게모노』(야마다 요시히로)
* 『네코네코 일본사』(소니시 켄지)
* 『바지리스크 ~코우가인법첩~』(세가와 마사키)
* 게임
* 『전국 BASARA』 시리즈 (캡콤)
* 『문명』 시리즈 (『문명 V』 제외)
* 기타
* 다이노소어킹(Dinosaur King) 2시즌 63화

야마오카 소하치 저 『덕川가강』 제1권
야마오카 소하치 저 『덕川가강』 제1권

7.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