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하
1. 개요
강익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시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김구에게 한문을 배우고, 3·1 운동 당시 재판에서 황온순을 돕는 등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해주지방법원 판임관으로 근무하다 대한생명을 창설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김구와 이승만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 황온순은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이화장을 제공했으며 국민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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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업자 -
쥐네이트 차크르
쥐네이트 차크르는 튀르키예의 축구 심판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등 주요 경기 심판을 맡았고 FIFA 월드컵 준결승전 주심을 담당했으며, 은퇴 후에는 심판 양성에 기여하고 뛰어난 역량으로 인정받았으나 논란이 되는 판정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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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와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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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이태준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로, 섬세한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현실을 그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주목받았으며, 특히 1930년대 〈달밤〉, 〈까마귀〉, 〈복덕방〉 등의 작품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월북 후 숙청되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
1946년 강익하는 한국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보험생명사인 대한생명을 창설했다. 회사명을 정할 때 '한국생명'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강익하는 광복 직후라는 점을 고려해 '대한독립 만세'를 떠올릴 수 있는 대한생명으로 결정했다.
같은 해 6월,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론을 주장할 당시 김구는 탈장증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강익하는 김구를 문병하고 3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했으나, 김구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며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사양했다. 강익하는 김구에게 돈을 건네기 전, 이승만에게도 5의 정치자금을 전달했다.
강익하의 부인 황온순은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원불교 종사를 지냈다. 황온순은 이승만에게 이화장을 제공했으며,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2.1. 유년기 및 독립운동
1907년 강익하는 11살로, 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 중에 탈옥하여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던 때에 처음 만났다. 당시 김구는 재령에서 보강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강익하는 김구에게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모의로 김구가 구속되자 강익하는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1919년 3·1 운동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구속돼 재판을 받던 중, 해주지방법원 판임관으로 근무하던 강익하는 황해도 연안 출신의 경성여고보생 황온순이 검사정의 질문에 불리한 답변을 하는 것을 보고 재판에 유리하게 통역을 해줘 그녀가 풀려나도록 했다. 이후 강익하는 황온순이 중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귀국해 이화여전에 입학한 후에도 따라다녔다. 8년 동안의 집념에 감동한 그녀는 결국 1928년 결혼을 승낙하고 자신이 설립한 화광유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2. 법조계 활동 및 결혼
1919년 강익하는 해주지방법원 판임관으로 근무하면서 3·1운동으로 구속된 조선인들의 재판 통역을 맡았다. 황해도 연안 출신의 경성여고보생 황온순이 검사정의 질문에 불리한 답변을 하자, 강익하는 재판에 유리하게 통역하여 그녀가 풀려나도록 도왔다. 이후 강익하는 황온순이 중국 유학을 갔을 때와 귀국 후 이화여전에 입학했을 때도 꾸준히 그녀를 따라다녔다. 8년간의 끈질긴 구애에 감동한 황온순은 결국 1928년 자신이 설립한 화광유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3. 기업 활동
1919년 3·1운동 이후 해주지방법원 판임관 근무를 사직하고, 인천미두장으로 전직하였다. 1927년 서선전기주식회사 설립 및 같은 회사 상무취체역으로 부임하였다. 1932년 조선취인소가 출범하자, 인천에는 강익하상점, 경성에는 금익증권 개점하였다. 강익하는 '기정미총람'과 '익정보'를 발간하며, 일본인 미두업자에 비해 한발 앞선 정보력과 영업력을 보였다. 미두와 주식으로 큰돈을 번 강익하는 수해 때마다 기부자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등 학교와 사회에 기부도 많이 했다.
1946년 순수 토종 보험사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한국 국내 자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보험생명사인 대한생명을 창설하였다. 초기에는 회사명을 결정할 때 ‘한국생명’이라는 사명(社名)이 거론됐지만, 그는 광복 직후라는 점을 들어 ‘대한독립 만세’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는 대한생명으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