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1. 개요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청년기에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고, 1899년 고종을 실각시키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1904년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쳤다.
| 이름 | 이승만 |
|---|---|
| 출생 이름 | 이승만 (Rhee Syng-man) |
| 한국어 표기 | 이승만 / 리승만 |
| 한자 표기 | 李承晩 |
| 로마자 표기 | I Seungman / Ri Seungman |
| 다른 이름 | 우남 (雩南) |
| 출생일 | 1875년 3월 26일 |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 |
| 사망일 | 1965년 7월 19일 |
| 사망지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
| 안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
| 국적 | 대한제국 (1910년까지) 무국적 (1910년–1945년) 대한민국 (1945년–1965년) |
| 배우자 | 박승선 (1891년 결혼, 1909년 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1934년 결혼) |
| 정당 | 자유당 (1951–1961) |
| 다른 정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6–1951) |
| 학력 | 조지 워싱턴 대학교 (문학사) 하버드 대학교 (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 박사)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 재임 시작: 1919년 9월 11일 재임 종료: 1925년 3월 23일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주석 | 재임 시작: 1947년 3월 3일 재임 종료: 1948년 8월 15일 |
| 대한민국 국회 의장 | 재임 시작: 1948년 5월 31일 재임 종료: 1948년 7월 24일 |
| 대한민국 대통령 | 재임 시작: 1948년 7월 24일 재임 종료: 1960년 4월 26일 |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권한대행 | 1919년 4월 10일 ~ 1919년 4월 23일 |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2차) | 재임 시작: 1947년 3월 3일 재임 종료: 1948년 8월 15일 |
| 재임 기간 | 제1대: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제2대: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제3대: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6일 |
|---|---|
| 부통령 | 이시영 (1948년–1951년) 김성수 (1951년–1952년) 함태영 (1952년–1956년) 장면 (1956년–1960년) |
| 국무총리 | 이범석 신성모 (대행) 장면 이윤영 (대행)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 |
| 후임 대통령 | 윤보선 |
| 임시정부 대통령 (1차) | 재임 시작: 1919년 4월 10일 재임 종료: 1925년 3월 23일 |
|---|---|
| 임시정부 국무총리 | 이동휘 이동녕 신규식 노백린 박은식 |
| 임시정부 대통령 (2차) | 재임 시작: 1947년 3월 3일 재임 종료: 1948년 8월 15일 |
| 임시정부 부통령 | 김구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감리회) |
|---|---|
| 훈장 |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 웹사이트 | 우남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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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대통령 후보 -
조병옥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가이자 해방 후 한국 경찰 창설에 기여하고 내무부 장관, 대통령 특사 등을 역임한 정치인으로, 이승만 정권과 갈등하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앞두고 사망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 -
김구
김구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통일운동가로서, 동학 입교, 치하포 사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인애국단 조직,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 -
안재홍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정치인, 언론인으로 조선일보 주필, 신간회 활동, 광주 학생 독립 운동 참여 등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으나,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미군정청, 국회의원 활동 중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했고 친일 논란도 있다. -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후보 -
신익희
신익희는 해공이라는 호를 가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하고 국민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후보 -
조봉암
조봉암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정치인으로,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했으나 2011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3. 생애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성가리 능내동(陵內洞)에서 태어났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으나, 6대조 이후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 두 형이 홍역으로 사망하여 사실상 6대 독자로 성장했다.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을 따라 한성부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1879년 낙동서당, 1885년 도동서당에서 수학하고, 1887년 아명 '승룡'을 '승만'으로 고쳤다. 유년 시절 집중력이 뛰어나 '이나비', '꽃귀신' 등의 별명을 얻었다.
1890년 박씨 부인과 결혼, 1898년 아들 이봉수를 얻었으나 1906년 디프테리아로 잃고 1912년 이혼했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 서재필의 영향으로 독립협회와 협성회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897년 배재학당 졸업 후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연설가로 활동했다. 1898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박영효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1899년 투옥되었다가 20일 만에 탈옥을 시도, 실패 후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 중 민영환의 도움으로 석방, 1904년 11월 4일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실패했다. 1905년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1908년 하버드 대학교 석사,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0년 9월 3일 귀국길에 올라 5년 11개월 6일 만인 1910년 10월 10일 한국에 귀국하였다. 이후 1912년 3월 26일까지 한국YMCA 총무 겸 학감으로 활동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 위협을 받자,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기독교 감리회 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3.1. 유년기·청소년기 (1875~1894)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성가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아버지 이경선(1839~1912)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었다. 이승만은 신분상 왕족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이승만의 13대조에서 끝이 났다. 이승만의 6대조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아갔다.
이승만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으나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모두 홍역으로 사망했다.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라며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태어날 때 집안의 기쁨이 컸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의 증조부 대는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해 있었는데, 이승만이 2세 때인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한성부에서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승만은 아버지가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고, 어머니 말로는 자신이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이경선은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4세 때인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한성부 용산)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承龍)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이나비'라는 별명과 '꽃귀신이 씌였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 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 왕실에 비판적이었고 자신의 가계를 밝히기를 꺼려했지만, 정작 조선 왕실 족보라는 이유로 왕정복고를 꿈꾼다는 의혹에 종종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로버트 T. 올리버 선교사에게 자신의 정적들이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에 자신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박씨(박승선)와 결혼하여 1898년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 그러나 1906년 이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자 이경선은 격노해 이승만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1912년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3.2. 청년기 (1895~1904)
1898년 11월,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 직책을 얻었다. 그러나 관직에 오른 후, 박영효를 통해 고종을 실각시키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경무청 감옥에 투옥되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체포 연도를 1897년 또는 189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투옥된 지 20일 만에 탈옥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평리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청일전기』를 번역·편찬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으며, 『신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제국신문』에 글을 기고했다. 또한 고문을 당했는데, 일본 장교들이 기름종이를 그의 손톱 밑에 넣고 불을 붙인 후 하나씩 부수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과 함께 민영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3.2.1. 배재학당 수학 및 협성회 활동 (1895~1897)
1895년 4월 2일, 이승만은 20세의 나이로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서 그는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복수를 계획(춘생문 사건)했다가 발각되어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으로 3개월간 피신했다가, 배재학당에 복귀하였다.
1896년 5월,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는 이승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승만은 비가 오는 날 볏짚 모자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입고 서재필의 집을 찾아가 "박사님의 배재학당 강연을 감명깊게 들었다"고 말하며 만남을 청했다. 이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 시기, 특히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청년 운동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과 교류하였고, 특히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주도로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협성회는 한국 최초의 학생 단체이자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제였으며, 학생정치단체의 성격도 지녔다. 협성회 창립발기회원은 양홍묵, 이승만, 신흥우, 노병선(盧炳善), 주상호(周相鎬), 윤창렬(尹昌烈), 민찬호(閔賛鎬) 등 13인이었다. 이승만은 협성회에서 서기,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협성회는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으며, 창립 1년 만에 회원수가 200여 명, 1898년 2월에는 3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지방에도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한편, 이승만이 왕정 타도를 꾀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 창립회원이자 동지였던 이승구는 이완용의 아들이었는데,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이승구를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버렸다. 이승만은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방학예식)이 열렸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여 청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승만은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하였는데, 유창한 발음과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참석한 청중들, 정부 고관들, 주한 외국 사절들을 사로잡았다.
3.2.2. 언론 활동 및 독립협회 사건 (1898)
1895년 제1차 청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일본 제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면서 이승만은 반일 세력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공작원에 의해 명성황후가 암살된 사건(춘생문 사건)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 음모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성 의사 조지애나 E. 휘팅이 그를 환자로 위장시켜 여동생 집으로 피신시킴으로써 기소를 피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합성회와 독립협회를 통해 활동하였다. 그는 일본과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및 부패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시위를 조직했다.
1895년 4월 2일 이승만은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을 세웠다가(춘생문 사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6년 5월,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비가 내리는 날 볏짚으로 만든 모자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입고 서재필의 집에 찾아가 '박사님의 배재학당 강연을 감명깊게 들었습니다.'라며 서재필을 만나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 후 이승만은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독립협회의 가장 주요한 청년 운동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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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주도 하에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협성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단체이며, 학생정치단체의 성격도 가진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제였다. 협성회의 창립발기회원은 양홍묵, 이승만, 신흥우, 노병선, 주상호, 윤창렬, 민찬호 등 13인이었다. 협성회에서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을 맡았다. 협성회는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았다. 협성회는 창립 1년 만에 회원수가 2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898년 2월에는 3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지방에서도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료였던 이승구는 이완용의 아들이었는데,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이승구를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버렸다. 이승만은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방학예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시작하였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참석한 청중들, 정부 고관들, 주한 외국 사절들을 사로잡았다.
1898년 11월,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 직책을 얻었다. 관직에 오른 후, 박영효를 통해 고종을 실각시키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경무청 감옥에 투옥되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체포 연도를 1897년 또는 189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투옥 20일째 탈옥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평리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청일전기』를 번역·편찬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으며, 『신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제국신문』에 글을 기고했다. 또한 고문을 당했는데, 일본 장교들이 기름종이를 그의 손톱 밑에 넣고 불을 붙인 후 하나씩 부수는 고문을 가했다.
3.2.3. 한성감옥 투옥 (1899~1904)
이승만은 1899년부터 1904년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904년 8월 9일 석방된 후, 민영환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904년 11월 4일 제물포항에서 출국했다. 고종의 면담 요청과 밀지를 전달하려는 궁녀를 거절했는데, 고종을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쳤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1905년 1월 15일 워싱턴포스트 지와 인터뷰를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했다.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같은 달, 존 헤이 미국 국무부 장관을 만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따른 한국 독립 협조 약속을 받았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무산되었다.
1905년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밀서를 전달하고 호의적인 답변을 받았으나, 외교적 문제로 한국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공사였던 김윤정은 일본에 포섭되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했다. 워싱턴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햄린 목사와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 찰스 W. 니드햄 박사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1905년 9월 10일 민영환에게서 격려 편지와 경비 300달러를 받았으나,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으로 자결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후였기에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3.3. 미국 유학 및 외교 활동 (1904~1910)
1904년 러일 전쟁 발발과 함께 민영환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04년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8월, 이승만과 윤병구는 포츠머스 평화 회담 중인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도록 돕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계속 머물렀는데, 이는 "망명"으로 묘사되었다. 1907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 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 9월 3일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1910년 10월 10일 한국에 귀국하였다.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이었다.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한국YMCA)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11년, 이승만은 황성기독청년회가 청년 선교를 위해 발행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존 모트(John Mott)가 쓴 책 《신입학생인도(Work for New Students)》, 《학생청년회회장(The President of the Student)》, 《학생청년회의 종교상회합(Religious Department of the Student Association)》을 번역해 출판하였다.
1911년 5월 16일부터 6월 21일까지 37일 동안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에 들러 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석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뒤이은 일제의 체포 위협이 있자,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기독교 감리회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