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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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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창 전투는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늦추기 위해 1950년 7월에 거창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국군은 함양과 안의에서 지연전을 펼쳤으나, 조선인민군의 압박으로 인해 거창으로 후퇴했다. 미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합천으로 철수했으며,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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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전투
거창 전투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7월 24일 ~ 7월 27일
장소경남 거창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지휘관 1강태영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소장
채병덕 영남서부지구방위사령관 소위
민기식 민부대 대령
김병화 김부대 소령
오덕준 오부대 대령
김성은 해병대 중령
지휘관 2리권무 제4사단장 소장
최인덕 제5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16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18연대장 대좌
김준 포병연대장 대좌
병력 규모
병력 1알 수 없음
병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규모
사상자 1알 수 없음
사상자 2알 수 없음
관련 전쟁

2. 전투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연이은 패배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쳤으며, 함양-거창 전투는 이러한 지연전의 일환이었다.

3. 전투 과정

남원에서 철수한 민기식 부대(민부대)와 김부대(김병화 부대), 오부대(오덕준 부대), 그리고 해병대(김성은 부대)는 7월 24일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이동하여 지연전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장계~안의로 공격해 온 조선인민군 4사단의 압박으로 인해 함양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육군 본부는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해체하고, 채병덕 소장을 영남서부지구 사령관에 임명하여 민기식 부대와 전남지구편성관구 산하 통합병력인 이응준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국군은 계속되는 전투와 철수로 지쳐 피난민 틈에 끼여 부대를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 전투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서남부 전선의 위협이 커지자,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대전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던 24사단을 이 지역으로 급파하였다. 24사단은 34연대를 거창에, 19연대를 안의~진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함양에 철수한 민기식 부대와 24사단 병력은 함양~안의에서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안의 저지선이 무너진 후, 민부대장(민기식 대령)은 연락이 두절된 오부대와 미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조선인민군에게 차단되자 해병대를 수습하여 함양 동쪽 6킬로미터 지점인 화산리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민부대장은 미 29연대 1대대장과 협의하여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20시 40분경 병력을 산청으로 철수시켰고, 오부대 200명은 진주까지 철수했다. 그러나 민부대원은 사기가 매우 저하되어 전열을 갖추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안의 쪽에서 거창 쪽으로 오는 조선인민군을 발견한 미 34연대는 13야포대대 A 포대의 5문(105밀리)의 포로 방어했으나, 중대를 잃고 1대대와 3대대를 거창 동쪽으로 철수시켜야 했다. 34연대는 거창에서 합천으로 철수하면서 공병에게 도로를 파괴하도록 했다. 이 지역에 있던 경찰 및 기타 부대들도 지휘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합천 등지로 흩어졌다. 이로써 함양, 거창에서 벌인 국군의 지연전은 큰 성과 없이 많은 손실을 보았다.

3. 1. 안의 전투 (7월 27일)

7월 27일 조선인민군 4사단은 장계~안의 도로를 따라 진격해 왔는데, 이 길목에는 안의 서쪽 15킬로미터 지점인 육십령 고개에 대대 규모의 경찰 혼성부대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 병력은 조선인민군에게 소총을 쏘며 저항했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안의로 분산 철수했고, 이로써 장계~안의 간 통로가 조선인민군에게 열렸다.

함양 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한 민기식 부대는 오덕준 부대와 김병화 부대를 투입하여 안의를 방어하려 했다. 이들은 이미 안의에 배치된 미 19연대 1대대의 A 중대와 함께 안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진지를 점령했다.

당시 진주에 집결 중이던 미 19연대는 오키나와에서 새로 한국 전선에 투입된 29연대 1대대에게 진지를 인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7월 27일 오전 10시경부터 시작되었으나,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5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오덕준 부대와 김병화 부대는 조선인민군 잠복병의 기습을 받아 6대의 자동차를 잃었고, 미군의 지원 화력은 포당 연막탄 2발뿐인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가 전부였다. 포병, 전차, 공중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17시경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한 차례 격퇴했으나, 결국 20시에 함양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미 19연대 A 중대의 진지를 인수한 미 29연대 1대대 B 중대는 악전고투 끝에 18명(장교 2명, 부사관과 병 16명)만이 거창으로 철수했고, 나머지 215명(D 중대 일부 포함)은 전사했다. 이로써 안의 저지선이 무너지고 조선인민군의 침공은 거창과 함양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4. 전투 결과 및 영향

함양-거창 전투에서 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으나, 조선 인민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4. 1. 이후 전투로 이어짐

민기식 부대는 진주 북방 산청 가도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했고, 김성은 부대가 이끄는 해병은 미국에 배속되어 남강 남쪽 방어선을 맡았다. 미 29연대 1대대는 진주 동쪽 28킬로미터 지점인 함안으로 이동하였고, 34연대는 합천에서 방어에 임했다.

5. 평가 및 논란

함양-거창 전투는 대한민국 국군의 열악한 상황과 지휘부의 판단 착오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6.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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