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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키 히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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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키 히사타카는 센고쿠 시대 무장 구키 요시타카의 손자이며, 셋츠 산다 번의 초대 번주이다. 숙부의 아들 사콘의 양자로 들어가 8세에 곤고쇼지에 맡겨졌으며, 적자였던 형이 폐적된 후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후 삼촌과의 갈등으로 인해 시마 토바 번에서 셋츠 산다 번으로 감봉되었고, 조부 이래의 수군력을 상실했다. 그는 셋츠 타카츠키 번의 수비를 맡았으며, 1649년에 사망하여 장남 구키 타카마사가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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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키 히사타카
기본 정보
씨족구키 씨
묘소효고현산다시 니시야마초의 심월원
계명춘광원전청양종원대거사
생애
출생겐나 3년 (1617년)
사망게이안 2년 1월 23일 (1649년3월 6일)
초명주라
개명조사쿠 (유명)
류쇼
히사타카
관직
관위종5위 하, 야마토 수
막부에도 막부
시마도바 번 번주 → 셋쓰산다 번 번주
가족 관계
아버지구키 모리타카
어머니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딸
양아버지구키 사콘, 구키 요시타카
형제요시타카, 사다타카, 다카스에, 다카시게, 히사타카
배우자정실: 혼다 마사타케의 딸
자녀다카마사, 딸 (야규 무네하루 정실)
번주 이력
전임구키 모리타카
후임나이토 다다시게
임기1632년
대수2
전임마쓰다이라 시게나오
후임구키 다카마사
임기1632년 ~ 1649년
대수1

2. 생애

히사타카는 셋쓰 다카쓰키번의 수비를 맡았다. 게이안 2년 정월 23일에 사망했으며, 장남 다카마사가 그 뒤를 이었다.

2. 1. 가독 상속과 갈등

히사타카는 숙부 나리타카의 아들 사콘의 양자가 되어 8세 때 곤고쇼지에 맡겨져 쥬료라고 불렸다. 적자였던 장남 요시타카가 병약하여 폐적된 후, 요시타카의 양자가 되었다. 간에이 9년(1632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삼촌 다카스에가 이 상속에 불만을 품고 대립,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막부로부터 그 책임을 물어 히사타카는 시마 도바에서 셋쓰 산다 36000석으로 감봉되었다.

다카스에는 새로 단바 아야베번 20000석을 받아 분가하는 형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도바 56000석이 분할되었고, 양자 모두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토지로 전봉되었기 때문에 더욱 조부 요시타카 이래의 수군력을 잃었다. 구키 씨의 셋쓰로의 이봉은 막부가 유력 다이묘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2. 2. 산다 번주 시절

숙부 나리타카의 아들 사콘의 양자가 되어 8세 때 곤고쇼지에 맡겨져 쥬료라고 불렸다. 적자였던 장남 요시타카가 병약하여 폐적된 후, 요시타카의 양자가 되었다. 간에이 9년(1632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삼촌 타카스에가 이 상속에 불만을 품고 대립,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막부로부터 그 책임을 물어 히사타카는 시마 토바에서 셋츠 산다 3만 6천 석으로 감전봉되었다.

타카스에는 새로 탄바 아야베번 2만 석을 받아 분가하는 형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토바 5만 6천 석이 분할된 꼴이 되었고, 양자 모두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토지로 전봉되었기 때문에 더욱 조부 요시타카 이래의 수군력을 잃었다. 구키 씨의 셋츠로의 이봉은 막부에 있어서 위험한 세력이 될 것 같은 다이묘를 소동에 편승하여 전봉한다는 세력 삭감 정책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후는 셋츠 타카츠키번의 수비 등을 맡았다. 게이안 2년(1649년) 정월 23일에 사망, 그 뒤를 장남 타카마사가 이었다.

2. 3. 구키 수군의 몰락

간에이 9년(1632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숙부 타카스에가 이 상속에 불만을 품고 대립, 소동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막부로부터 그 책임을 물어 히사타카는 시마 토바에서 셋츠 산다 3만 6천 석으로 감봉 및 이봉되었다.[1]

타카스에는 새로 탄바 아야베번 2만 석을 받아 분가하였다.[1] 결과적으로 토바 5만 6천 석이 분할되었고, 양자 모두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토지로 이봉되었기 때문에, 조부 요시타카 이래의 수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1] 구키 씨의 셋츠로의 이봉은 막부가 위험한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 다이묘를 소동에 편승시켜 이봉함으로써 세력을 삭감하려는 정책이었다고 여겨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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