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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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궁재는 프랑크 왕국에서 왕을 보좌하던 주요 관직으로,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아키텐 등 여러 지역에서 존재했다. 아우스트라시아의 경우 6세기부터 8세기 초까지, 네우스트리아는 7세기부터 8세기까지 궁재가 있었으며, 피핀 가문과 카롤링거 가문이 이 직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부르군트와 아키텐에도 궁재가 있었으나, 부르군트는 네우스트리아와 통합되면서 궁재 직책이 사라졌고, 아키텐의 궁재는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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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마누스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로서 동생 피핀 3세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고 교회 개혁을 지원했으며, 알레만니아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을 처형한 후 수도원에 은퇴했으나 이탈리아로 추방되어 사망하고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피피누스 왕조 - 피피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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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피누스 2세는 7세기 후반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이자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네우스트리아와의 전투 승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카롤링거 왕조의 기반을 다졌으며, 사후 후계 분쟁은 카를 마르텔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졌다. - 프랑크 왕국 - 중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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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대 피핀은 다고베르트 1세의 궁재였다가(623년-629년), 이후 다시 궁재에 올라 639년부터 640년까지 재임하였다. 그리모알트 1세 (643년-656년)는 대 피핀의 아들로 궁재직을 이었다.
중 피핀 (680년-714년)은 687년 네우스트리아를 정복한 후 '프랑크의 공작 및 백작(''dux et princeps Francorum'')' 칭호를 얻었다. 그의 서자 카를 마르텔 (715년-741년)은 네우스트리아 궁재를 겸임(718년-741년)하였다. 카를 마르텔의 아들 카를로만 (741년-747년)과 카를로만의 아들 드로고 (747년-751년)가 궁재직을 이어받았다.
2. 1. 초기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6세기-7세기 초)
- 파르테미우스 (548년까지)[1]
- 고고 (567년-581년)[1]
- 반달레누스 (581년부터)[2]
- 군둘프 (600년부터), 테우데베르트 2세의 궁재
- 란드리크 (612년까지), 네우스트리아 궁재 겸임
- 바르나차르 (612년-617년), 부르군트 궁재 겸임
- 우고 (617년-623년)
- 대 피핀 (623년-629년), 다고베르트 1세의 궁재
- 아달기젤 (633년-639년)
- 대 피핀 (639년-640년), 재임
- 오토 (640년-642년)
- 그리모알트 1세 (643년-656년)
- 불포알트 (656년-680년), 네우스트리아 겸임(673년-675년)
- 중 피핀 (680년-714년), 687년 네우스트리아 정복 이후 프랑크의 공작 및 백작(''dux et princeps Francorum'') 칭호를 얻음
- 테우토알트 (714년-715년), 네우스트리아 겸임.
- 카를 마르텔 (715년-741년), 피핀 2세의 서자, 네우스트리아 궁재 겸임 (718년-741년)
- 카를로만 (741년-747년)
- 드로고 (747년-751년), 카를로만의 아들
2. 2. 피핀 가문과 카롤링거 가문의 등장 (7세기-8세기)
대 피핀은 다고베르트 1세의 궁재였다가(623-629), 이후 다시 궁재에 올라 639년부터 640년까지 재임하였다. 그리모알트 1세 (643-656)는 대 피핀의 아들로 궁재직을 이었다.중 피핀 (680-714)은 687년 네우스트리아를 정복한 후 '프랑크의 공작 및 백작(''dux et princeps Francorum'')' 칭호를 얻었다. 그의 서자 카를 마르텔 (715-741)은 네우스트리아 궁재를 겸임(718-741)하였다. 카를 마르텔의 아들 카를로만 (741-747)과 드로고 (747-751)가 궁재직을 이어받았다.
네우스트리아의 궁재는 프랑크 왕국에서 왕 다음 가는 권력을 가진 중요한 직책이었다. 궁재는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군대를 지휘하는 등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3.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초기 네우스트리아 궁재와 에브로인 시대의 권력 투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할 수 있다.
테르트리 전투 이후, 피핀 2세와 그의 후손들이 네우스트리아 궁재직을 독점하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3. 1. 초기 네우스트리아 궁재 (6세기-7세기)
3. 2. 에브로인 시대와 권력 투쟁 (7세기 후반)
에브로인은 658년부터 673년까지 궁재직을 맡았다가 쫓겨났으나, 675년에 복귀하여 680년까지 재임하였다. 불포알트는 673년부터 675년까지 궁재직을 수행하며, 동시에 아우스트라시아 궁재(662년 ~ 680년)를 겸임하였다.[1] 레우데시우스는 675년에 전임자에 의해 궁재로 선택되었으나, 이후 쫓겨났다.[2]680년 에브로인이 사망한 후, 바라톤이 681년부터 682년까지 궁재직을 맡았다. 그러나 바라톤의 아들 기스테마르가 682년에 아버지에 반기를 들어 그를 쫓아내고 궁재직을 차지했다. 바라톤은 곧 복귀하여 684년까지 재임하였다. 베르타르는 바라톤의 사위로, 686년부터 688년까지 궁재직을 맡았으나, 687년 테르트리 전투에서 피핀에게 패배하였다.
3. 3. 피핀 가문과 카롤링거 가문의 지배 (7세기 말-8세기)
7세기말 네우스트리아의 유력 가문 출신 궁재들은 테르트리 전투에서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중 피핀에게 패하였다. 이후 네우스트리아의 궁재직은 피핀 2세와 그의 후손들이 독점하게 되었다.7세기 후반부터 8세기까지 네우스트리아 궁재를 역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4. 부르군트의 궁재
- 와르나카르 1세(596–599)
- 베르토알드(603년 이전–604)
- 프로타디우스(604–606)
- 클라우디우스
- 라도(613–617)
- 와르나카르 2세(617–626), 아우스트라시아에서도 활동
- 고디누스(626–627)
- 아이가(639–641), 네우스트리아에서도 활동
- 플라오카드(642)
- 라도베르투스(642–662)
이후 궁재 직은 비어 있었고, 부르고뉴는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고뉴의 왕 아래 별도의 왕국으로 존재했다. 부르고뉴의 행정은 잠시 다음과 같이 분리되었다.
- 드리고(695–708), 690년부터 샹파뉴 공작, 697년부터 부르고뉴 공작
5. 아키텐의 궁재
브로둘프 (627–628)
참조
[1]
웹사이트
Cambridge Dictionary
https://dictionary.c[...]
2024-07-09
[2]
서적
The Merovingian Polity: A Network of Courts and Courtiers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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