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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우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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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우스트리아는 "새로운 서부 영토"를 의미하며, 프랑크 왕국 시대에 서쪽의 프랑크 왕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아우스트라시아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 통합과 분열을 반복했다. 687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병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합한 이후,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분국으로 유지되다 베르됭 조약 이후 서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 변경이 설치되었고, 로베르 가문과 카페 왕조가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을 다스리다 위그 카페가 즉위하면서 국왕 직할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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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우스트리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이름네우스트리아
현지 이름Neustria
다른 표기라틴어: Neustria
위치프랑크 왕국의 서부
네우스트리아 위치
714년의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아키텐 공국, 부르고뉴에 둘러싸임)
수도수아송
공용어라틴어
소수 언어로망스어군:
속 라틴어 (5세기~7세기)
고대 갈리아-로망스어 (7세기~8세기 후반)
고대 프랑스어 (8세기 후반부터)
서게르만어군:
프랑크어 (8세기까지)
기타 언어갈리아어 (6세기까지)
종교기독교
통화데니어
오늘날의 국가프랑스
정치
정치 체제봉건제 세습 군주제
국왕"클로비스 1세 (초대): 486년 ~ 509년경"
"루이 5세 (마지막): 986년 ~ 987년"
궁재"아에가 (초대): 639년 ~ 641년"
"피핀 3세 (단신왕) (마지막): 741년 ~ 751년"
역사
시작 사건수아송 전투 (486년)
종료 사건카페 왕조 성립 (987년 6월 1일)
이전 국가수아송 왕국
계승 국가프랑스 왕국

2. 명칭

네우스트리아는 원래 '새로운 땅'(neuf프랑스어, neude)을 뜻하는 말로, '새로운 땅'을 뜻하는 '네우'와 '땅'을 뜻하는 '트리아'의 합성어이다. 이는 프랑크족이 갈리아 북부 지방을 새로 개척한 땅이라는 것에서 유래했다. 메로빙거 시대에는 주로 동쪽 프랑크 왕국인 아우스트라시아와 구별하여 서쪽 프랑크 왕국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아우스트라시아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네우스트리아'(Neustria)라는 이름은 대부분 "새로운 서부 영토"로 설명되지만, 테일러(1848)는 "북동부 영토"라는 해석을 제시했다.[7] Nordisk familjebok(1913)에서는 "동부 영토가 아님"(''icke östland'')을 제시하기도 했다.[8] 오귀스탱 티에리(1825)는 '네우스트리아'가 단순히 "서부 왕국"을 의미하는 ''West-rike''에서 유래된 ''Westria''의 변형이라고 추정했다.[9] 어쨌든 '네우스트리아'는 "동부 왕국"을 의미하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라는 이름과 대조를 이룬다.

'아우스트라시아'와의 유사성은 '네우스트라시아'(Neustrasia)라는 변형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10]

'네우스트리아'는 롬바르드 지배 기간 동안 북서부 이탈리아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이는 동북부와 대조되었는데, 동북부는 동 프랑크와 동일한 용어인 아우스트라시아로 불렸다.

3. 메로빙거 왕조 시대

네우스트리아는 '새로운 땅'을 뜻하는 말로, 프랑크족이 갈리아 북부 지방을 개척하면서 유래했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서쪽 프랑크 왕국을 지칭했으며, 동쪽 프랑크 왕국인 아우스트라시아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11]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가 수아송 왕국의 통치자 시아그리우스를 패배시키면서 네우스트리아 지역은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클로비스 1세의 후손들은 영토를 분할 상속하면서, 네우스트리아는 아우스트라시아와 200년 이상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11]

6세기 후반부터 프랑크 왕국은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부르군트 왕국으로 명확히 분할되었다. 다음은 수아송 또는 파리에서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한 초기 왕들의 목록이다.

재위 기간
클로타르 2세584년–629년
다고베르트 1세629년–639년
클로비스 2세639년–657년
클로타르 3세657년–673년
테우데리크 3세673년
킬데리크 2세673년–675년
테우데리크 3세675년–691년
클로비스 4세691년–695년
힐데베르트 3세695년–711년
다고베르트 3세711년–715년
킬페리크 2세715년–721년
테우데리크 4세721년–737년
힐데리크 3세743년–751년



687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가 테르트리 전투에서 네우스트리아를 병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합했다. 카롤링거 왕조 이후에는 서 프랑크 왕국이 되었으며, 위그 카페 즉위 후에는 국왕의 직할령이 되었다.

3. 1. 잦은 통합과 분열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브룬힐데의 최후


클로비스 1세의 후손들은 영토를 정기적으로 분할했기 때문에, 200년 이상 동안 네우스트리아는 아우스트라시아와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11]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는 여러 차례 재통합되었다. 첫 번째는 558년부터 562년까지 클로타르 1세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네우스트리아 왕비 프레데공드(킬페리크 1세의 왕비)와 그녀의 아들 클로타르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브룬힐데와 권력 다툼을 벌여 격렬한 전쟁을 일으켰다.[11]

생드니 대성당에서 프레데공드의 장례를 치른 후(597년), 클로타르 2세는 브룬힐데와의 항쟁을 계속했다. 613년 브룬힐데가 신하에게 배신당하면서 클로타르 2세가 승리했다. 클로타르는 브룬힐데를 고문대에 묶어 3일 동안 방치한 후, 네 마리의 말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였다. 이로써 클로타르는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를 통합했지만, 이는 단기간에 끝났다.[11]

다고베르트 1세(재위: 628년-637년) 시대에는 일족 간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일시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아우스트라시아에서는 아르눌프 가문의 궁재 대 그리모알드가 군주에게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모알드의 아들 킬데베르트를 시지베르트 3세의 양자로 삼았지만, 시지베르트 3세에게 다고베르트 2세가 태어나자 다고베르트를 아일랜드 수도원 등으로 추방하려 했다. 네우스트리아의 왕이자 시지베르트의 동생인 클로비스 2세는 대 그리모알드를 제거하고 왕국을 네우스트리아로 재통합했다. 그러나 이것도 일시적이었다. 클로비스 2세의 아들 클로타르 3세 치세 이후, 네우스트리아 왕가는 이전 아우스트라시아 왕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궁재에게 권한을 양도했다.[11]

678년, 궁재 에브로인의 통치하에 있던 네우스트리아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복했다. 에브로인은 681년에 살해되었고, 684년에는 에브로인의 영토인 푸아티에의 주교 앙소알드가 에브로인의 최대 적이었던 성 레오데가르(679년 순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687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는 토르트리(현재 솜현의 코뮌)에서 네우스트리아를 격파했고, 아우스트라시아 측에서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를 통합했다. 아우스트라시아 출신 연대기 작가들은 자신들의 궁재 피핀 2세에게 더 큰 충성을 보였다.[11]

피핀의 후손인 카롤링거 왕조는 궁재로서 두 왕국을 계속 지배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축복을 받은 후, 751년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그와 그의 후손들이 왕으로서 지배했다.[11]

이후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부르군트 왕국은 하나의 권력 아래 통합되었고,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라는 이름은 점차 사라져 갔다.[11]

3. 2. 궁재 정치



클로비스 1세의 후손들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면서,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는 200년 이상 잦은 전쟁을 겪었다.

잦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는 여러 차례 통합되었다. 최초의 통합은 558년부터 562년까지 클로타르 1세 통치 시기였다. 네우스트리아 왕비 프레데공드(킬페리크 1세의 왕비)와 그녀의 아들 클로타르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 왕비 브룬힐데와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전쟁이 격화되었다.[11]

597년 프레데공드가 사망하고 생드니 대성당에 묻힌 후, 클로타르 2세는 브룬힐데와의 항쟁을 계속했다. 613년 브룬힐데가 신하에게 배신당하면서 클로타르 2세가 승리했다. 클로타르는 브룬힐데를 고문대에 3일 동안 묶어둔 후, 네 마리의 말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였다. 클로타르는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를 통합했지만, 이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11]

다고베르트 1세(재위: 628년-637년) 시대에는 왕족 간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일시적인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아우스트라시아에서는 궁재 대 그리모알드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모알드는 자신의 아들 킬데베르트를 시지베르트 3세의 양자로 삼았지만, 시지베르트 3세에게 다고베르트 2세가 태어나면서 다고베르트를 아일랜드 수도원으로 추방하려 했다). 네우스트리아의 왕이자 시지베르트의 동생인 클로비스 2세는 대 그리모알드를 제거하고 왕국을 네우스트리아로 재통합했지만, 이 역시 일시적이었다. 클로비스 2세의 아들 클로타르 3세 치세 이후, 네우스트리아 왕가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가처럼 궁재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11]

678년, 궁재 에브로인의 통치하에 네우스트리아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복했다. 에브로인은 681년에 살해되었고, 684년에는 에브로인의 영지였던 푸아티에의 주교 앙소알드가 에브로인의 최대 적이었던 성 레오데가르(679년 순교)에게 그의 운명을 맡겼다. 687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는 테르트리 (현재 솜현의 코뮌)에서 네우스트리아를 격파했고, 아우스트라시아 중심으로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가 통합되었다. 아우스트라시아 출신 연대기 작가들은 자신들의 궁재 피핀 2세에게 더 큰 충성을 보였다.[11]

피핀의 후손인 카롤링거 가문은 궁재로서 두 왕국을 계속 통치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축복을 받은 후, 751년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그와 그의 후손들이 왕으로 통치했다.[11]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부르군트 왕국은 하나의 권력 아래 통합되었고,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라는 이름은 점차 사라졌다.[11]

궁재는 처음에는 궁정의 장 정도의 역할이었지만, 점차 국왕을 대신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름재임 기간
란드리크613년까지
군돌란트613년–639년
아에가639년–641년
에르키노알드641년–658년
에브로인658년–673년
울포알드673년–675년
레우데시우스675년
에브로인 (재임)675년–680년
와라토680년–682년
기스테마르682년
와라토 (재임)682년–686년
벨카리우스686년–688년
피핀 2세, 노르데베르트688년–695년
그리모알드 2세695년–714년
테우도알드714년–715년
라간프리드715년–718년
카를 마르텔718년–741년
피핀 3세741년–751년


4. 카롤링거 왕조 시대

687년 아우스트라시아궁재 피핀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병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이후 카롤링거 왕조는 카롤링거 제국의 종속된 왕국으로 유지되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서 프랑크 왕국이 되었다.

748년, 피핀 3세와 카를로만 형제는 그들의 막내 동생 그리포에게 르망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의 네우스트리아 백작령을 하사했다.[1] 이 정치체는 ''ducatus Cenomannicus'' 또는 메인 공작령으로 불렸으며, 9세기까지 네우스트리아의 ''regnum''(왕국)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

샤를마뉴가 790년에 그의 차남 젊은 카를루스에게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땅"을 왕국으로 하사하면서 "네우스트리아"라는 용어는 이 지역을 지칭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1] 이 시기에 왕국의 주요 도시는 젊은 카를루스의 왕실이 있던 르망으로 보인다.[1]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네우스트리아 왕의 주요 의무는 브르타뉴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주권을 방어하는 것이었다.[1]

817년, 경건왕 루이는 네우스트리아를 그의 맏아들 로타르 1세에게 하사했지만, 831년 그의 반란 이후, 아키텐의 피핀 1세에게 주었다. 838년 피핀 1세가 사망한 후에는 대머리 카를에게 주었다.[1] 네우스트리아는 아키텐과 함께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제국에서 분할된 카를의 서프랑크 왕국의 주요 부분을 형성했다.[1] 856년 카를은 말더듬이 루이를 왕으로 임명했을 때 르망에 자신의 궁정을 두고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할 장남을 임명하는 전통을 이어갔다.[1] 루이는 브르타뉴 왕 에리스포에의 딸과 결혼했으며, 프랑크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브르타뉴 군주로부터 ''regnum''을 받았다.[1] 이러한 독특한 관계는 대머리 카를의 중앙 권위로부터 멀어지고 에리스포에의 권위에 더 가까워지면서, 이 시기에 일드프랑스와 파리를 확실히 제외할 정도로 네우스트리아의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강조한다.[1] 루이 2세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네우스트리아에 임명된 마지막 프랑크 왕이었으며, 아들을 위한 부왕국을 만드는 관행은 후기 카롤링거 왕가에서 쇠퇴했다.[1]

4. 1. 분국(Subkingdom) 시대

687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가 네우스트리아를 병합하여 프랑크 왕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카롤링거 왕조 이후에는 카롤링거 제국의 종속된 왕국으로 유지되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서 프랑크 왕국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통일된 뒤 카롤링거 왕조 치하에서도 종종 네우스트리아의 분국왕이 봉해졌다. 768년 피핀 3세 사후 카를로만이 네우스트리아를 분배받았고, 그 뒤로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 청년왕 샤를이 네우스트리아의 왕에 봉해졌다. 그 뒤로는 경건왕 루트비히, 경건왕 루트비히의 아들 로타르 1세, 대머리 카를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 말더듬이 루이 2세의 아들 카를로만이 각각 네우스트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 외드와 로베르 1세가 네우스트리아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위그 카페 즉위 후에는 국왕의 직할령이 되었다.

748년, 피핀 3세와 카를로만 형제는 그들의 막내 동생 그리포에게 르망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의 네우스트리아 백작령을 하사했다.[1] 이 정치체는 ''ducatus Cenomannicus'' 또는 메인 공작령으로 불렸으며, 9세기까지 네우스트리아의 ''regnum''(왕국)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

"네우스트리아"라는 용어는 샤를마뉴가 790년에 그의 차남 젊은 카를루스에게 왕국으로 하사하면서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1] 이 시기에 왕국의 주요 도시는 젊은 카를루스의 왕실이 있던 르망으로 보인다.[1]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네우스트리아 왕의 주요 의무는 브르타뉴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주권을 방어하는 것이었다.[1]

817년, 경건왕 루이는 네우스트리아를 그의 맏아들 로타르 1세에게 하사했지만, 831년 그의 반란 이후, 아키텐의 피핀 1세에게, 그리고 피핀 1세가 838년에 사망한 후에는 대머리 카를에게 주었다.[1] 네우스트리아는 아키텐과 함께 베르됭 조약(843년)에 의해 제국에서 분할된 카를의 서프랑크 왕국의 주요 부분을 형성했다.[1] 카를은 856년에 말더듬이 루이를 왕으로 임명했을 때 르망에 자신의 궁정을 두고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할 장남을 임명하는 전통을 이어갔다.[1] 루이는 브르타뉴 왕 에리스포에의 딸과 결혼했으며, 프랑크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브르타뉴 군주로부터 ''regnum''을 받았다.[1] 네우스트리아의 이러한 독특한 관계는, 대머리 카를의 중앙 권위로부터 멀어지고 에리스포에의 권위에 더 가까워지면서, 이 시기에 일드프랑스와 파리를 확실히 제외할 정도로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강조했다.[1] 루이 2세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네우스트리아에 임명된 마지막 프랑크 왕이었으며,[1] 아들을 위한 부왕국을 만드는 관행은 후기 카롤링거 왕가에서 쇠퇴했다.[1]

'''네우스트리아의 분국왕'''

이름재위 기간
카를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790년811년
로타르 1세817년831년
피핀 1세831년838년
샤를 2세838년856년
루트비히 2세856년879년



루트비히 2세는 857년 11월에 일어난 에리스포에 암살 사건으로 인해 르망에서 추방되었다.[4]

4. 2. 네우스트리아 변경(March) 설치

861년, 카롤링거 왕조의 왕 대머리 샤를은 네우스트리아 변경을 설치했으며, 이는 국왕이 임명한 감독관, 현령 또는 변방백이 다스렸다. 원래 브르타뉴인에 대한 변경과 노르만족에 대한 변경, 이렇게 두 개의 변경이 있었으며, 각각 브르타뉴 변경과 노르만 변경이라고 불렸다.

911년, 프랑스의 로베르 1세는 두 변경의 변방백이 되었고, "데마르쿠스(demarchu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가문인 이후의 카페 왕가는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 전체를 통치했다. 네우스트리아의 부하 백작들은 그 당시 변방백의 권력을 넘어섰고, 바이킹과 브르타뉴인의 습격이 절정에 달했다. 카페 왕조의 기적 이후, 더 이상 변방백이 임명되지 않았고, "네우스트리아"는 유럽 정치 용어로서 쇠퇴했다.

4. 3. 로베르 가문과 카페 왕조

프랑크 왕국이 통일된 뒤 카롤링거 왕조 치하에서도 종종 네우스트리아의 분국왕이 봉해졌다. 768년 피핀 사후 카를로만이 네우스트리아를 분배받았고,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 청년왕 샤를 2세가 네우스트리아의 왕에 봉해졌다. 이후 경건왕 루트비히, 경건왕 루트비히의 아들 로타르 1세, 대머리 카를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 말더듬이 루이 2세의 아들 카를로만이 각각 네우스트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 외드와 로베르 1세가 네우스트리아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위그 카페 즉위 후에는 국왕의 직할령이 되었다.

911년, 로베르 1세는 두 변방 후작의 지위를 얻어 데마르쿠스(demarchu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계통인 후일의 카페 왕조가 987년까지 네우스트리아 전토를 다스렸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종속적인 네우스트리아의 후작 지위는 바이킹의 절정기, 브르타뉴인의 반란과 같은 시기에 힘을 얻어 변방백보다 우위에 있었다. 카페 왕조가 프랑스 왕위에 오른 이후, 변방 후작이 임명되는 일은 없어졌고, 네우스트리아는 유럽의 정치적 용어로서 소멸했다.

통합된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을 다스린 자만 포함되어 있으며,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의 칭호는 브르타뉴인의 변경백과 노르만인의 변경백이 모두 초기에 사용했지만,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로베르 4세로, 이후 카페 왕조의 선조가 된다.

통치 기간이름
911년–922년로베르 1세
922년–956년위그 대공
956년–987년위그 카페


5. 통치자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네우스트리아는 카롤링거 제국의 종속된 왕국으로 유지되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서 프랑크 왕국이 되었다.[1] 프랑크 왕국이 통일된 뒤에도 카롤링거 왕조 치하에서 종종 네우스트리아 분국왕이 임명되었다.[1]

748년, 피핀 3세와 카를로만 형제는 그들의 막내 동생 그리포에게 르망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의 네우스트리아 백작령을 주었다.[3] 이 정치체는 'ducatus Cenomannicus' 또는 메인 공작령으로 불렸으며, 9세기까지 네우스트리아 왕국(regnum)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3]

샤를마뉴는 790년에 그의 차남 젊은 카를루스에게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땅"을 왕국으로 주면서 "네우스트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 이 시기에 왕국의 주요 도시는 젊은 카를루스의 왕실이 있던 르망이었다.[3]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네우스트리아 왕의 주요 임무는 브르타뉴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었다.[3]

817년, 경건왕 루이는 네우스트리아를 그의 맏아들 로타르 1세에게 주었지만, 831년 로타르 1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키텐의 피핀 1세에게 주었고, 838년 피핀 1세가 사망한 후에는 대머리 카를에게 주었다.[3] 네우스트리아는 아키텐과 함께 베르됭 조약(843)에 의해 제국에서 분할된 카를의 서프랑크 왕국의 주요 부분을 형성했다.[3] 카를은 856년에 말더듬이 루이를 왕으로 임명하고 르망에 자신의 궁정을 두면서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할 장남을 임명하는 전통을 이어갔다.[3] 루이는 브르타뉴 왕 에리스포에의 딸과 결혼했으며, 프랑크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브르타뉴 군주로부터 ''regnum''을 받았다.[3] 루이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네우스트리아에 임명된 마지막 프랑크 군주였으며, 아들을 위한 부왕국을 만드는 관행은 후기 카롤링거 왕가에서 사라졌다.[3]

네우스트리아 분국왕
젊은 카를 (790년–811년)[4]
로타르 1세 (817년–831년)[4]
피핀 (831년–838년)[4]
카를 2세 (838년–856년)[4]
루이 2세 (856년–879년)[4]



861년 카롤링거 왕조의 왕 대머리왕 샤를은 네우스트리아에 변경 후작(en)직을 만들었다. 원래는 브르타뉴인에 대한 것과 노르만족에 대한 두 종류의 변방 후작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브르타뉴 변방 후작, 노르만 변방 후작으로 불렸으며, 왕이 임명한 관리인, 지사, 변방백 등이 맡았다.

911년, 로베르 1세는 두 변방 후작의 지위를 얻어 데마르쿠스(demarchu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가문인 후일의 카페 왕조987년까지 네우스트리아 전토를 다스렸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된 이후, 변방 후작은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고, 네우스트리아는 유럽의 정치적 용어로서 사라졌다.

통합된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을 다스린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로베르 1세, 911년–922년
  • 위그 대공, 922년–956년
  • 위그 카페, 956년–987년

5. 1.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왕



클로비스 1세의 후손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영토가 분할된 결과, 200년 이상 동안 많은 왕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아우스트라시아와 함께 네우스트리아도 거의 정기적으로 전란에 시달렸다.[11]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는 여러 차례 재통합을 경험했다. 처음은 558년부터 562년까지 통치한 클로타르 1세 시대였다. 네우스트리아 왕비 프레데공드(킬페리크 1세 왕비)와 그녀의 아들인 클로타르 2세가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브룬힐데와 권력 다툼을 벌인 것이 전쟁을 촉발시켰다.[11]

프레데공드가 죽고, 생드니 대성당에 묻힌(597년) 후, 클로타르 2세는 브룬힐데와의 항쟁을 계속했으며, 브룬힐데가 신하에게 배신당한 613년에 마침내 승리했다. 클로타르 2세는 브룬힐데를 고문대에 묶어 3일 동안 방치한 후, 네 마리의 말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였다. 클로타르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의 통합을 달성했지만, 이는 단기간에 끝났다.[11]

다고베르트 1세(재위: 628년-637년) 시대에는 일족 간의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일시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아우스트라시아에서 아르눌프 가문의 궁재 대 그리모알드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모알드의 아들 킬데베르트를 시지베르트 3세의 양자로 삼았지만, 시지베르트 3세에게 다고베르트 2세가 태어나자 다고베르트 2세를 아일랜드 수도원 등으로 추방하려 했다. 네우스트리아의 왕이자 시지베르트의 동생인 클로비스 2세는 대 그리모알드를 제거하고 왕국을 네우스트리아로 재통합했다. 그러나 이것도 일시적이었다. 클로비스 2세의 아들 클로타르 3세의 치세 이후, 네우스트리아의 왕가는 이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궁재에게 권한을 양도했다.[11]

678년, 궁재 에브로인의 통치하에 있던 네우스트리아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정복했다. 에브로인은 681년에 살해되었고, 684년에는 에브로인 자신의 영토인 푸아티에의 주교 앙소알드가 에브로인의 최대 적이었던 성 레오데가르(679년 순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687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는 토르트리(현재 솜현의 코뮌)에서 네우스트리아를 격파했고,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를 통합했다. 아우스트라시아 출신 연대기 작가들은 자신들의 궁재 피핀 2세에게 더욱 충성을 보였다.[11]

피핀의 후손들인 카롤링거 왕조는 궁재로서 두 왕국을 계속 지배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축복을 받은 751년 이후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는 정식으로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그와 그의 후손들이 왕으로서 지배했다.[11]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부르군트 왕국은 하나의 권력 아래 통합되었고,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라는 이름은 점차 사라져 갔다.[11]

6세기 후반부터 프랑크 왕국은 네우스트리아, 아우스트라시아, 부르군트 각 왕국으로 명확히 분할되었다. 수아송 또는 파리에서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한 초기 왕들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이름재위 기간
클로타르 2세584년–629년
다고베르트 1세629년–639년
클로비스 2세639년–657년
클로타르 3세657년–673년
테우데리크 3세673년
킬데리크 2세673년–675년
테우데리크 3세675년–691년
클로비스 4세691년–695년
힐데베르트 3세695년–711년
다고베르트 3세711년–715년
킬페리크 2세715년–721년
테우데리크 4세721년–737년
힐데리크 3세743년–751년


5. 2. 궁재

궁재는 처음에는 궁정의 장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지만, 점차 국왕의 이름으로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어갔다. 네우스트리아의 궁재직을 역임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
란드리크613년까지
군돌란트613년–639년
아에가639년–641년
에르키노알드641년–658년
에브로인658년–673년
울포알드673년–675년
레우데시우스675년
에브로인 (재임)675년–680년
와라토680년–682년
기스테마르682년
와라토 (재임)682년–686년
벨카리우스686년–688년
피핀 2세688년–695년
그리모알드 2세695년–714년
테우도알드714년–715년
라간프리드715년–718년
카를 마르텔718년–741년
피핀 3세741년–751년



687년, 아우스트라시아 왕의 궁재인 에르스탈의 피핀은 테르트리에서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다.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벨카리우스는 그 직후 암살되었고, 피핀의 아들 샴페인의 드로고와 벨카리우스의 미망인 샴페인의 안스트루드 간의 결혼 동맹 이후, 피핀은 네우스트리아 궁의 궁재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11]

5. 3. 카롤링거 왕조의 분국왕

카롤링거 왕조 이후 네우스트리아는 카롤링거 제국의 종속된 왕국으로 유지되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서 프랑크 왕국이 되었다.[1] 프랑크 왕국이 통일된 뒤 카롤링거 왕조 치하에서도 종종 네우스트리아의 분국왕이 봉해졌다.[1]

748년, 피핀 3세와 카를로만 형제는 그들의 막내 동생 그리포에게 르망을 중심으로 하는 12개의 네우스트리아 백작령을 하사했다.[3] 이 정치체는 ''ducatus Cenomannicus'' 또는 메인 공작령으로 불렸으며, 9세기까지 네우스트리아의 ''regnum''(왕국)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3]

"네우스트리아"라는 용어는 샤를마뉴가 790년에 그의 차남 젊은 카를루스에게 왕국(왕국)으로 하사하면서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3] 이 시기에 왕국의 주요 도시는 젊은 카를루스의 왕실이 있던 르망이었다.[3]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네우스트리아 왕의 주요 의무는 브르타뉴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주권을 방어하는 것이었다.[3]

817년, 경건왕 루이는 네우스트리아를 그의 맏아들 로타르 1세에게 하사했지만, 831년 그의 반란 이후, 아키텐의 피핀 1세에게, 그리고 피핀 1세가 838년에 사망한 후에는 대머리 카를에게 주었다.[3] 네우스트리아는 아키텐과 함께 베르됭 조약(843)에 의해 제국에서 분할된 카를의 서프랑크 왕국의 주요 부분을 형성했다.[3] 카를은 856년에 말더듬이 루이를 왕으로 임명했을 때 르망에 자신의 궁정을 두고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할 장남을 임명하는 전통을 이어갔다.[3] 루이는 브르타뉴 왕 에리스포에의 딸과 결혼했으며, 프랑크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브르타뉴 군주로부터 ''regnum''을 받았다.[3] 루이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네우스트리아에 임명된 마지막 프랑크 군주였으며, 아들을 위한 부왕국을 만드는 관행은 후기 카롤링거 왕가에서 쇠퇴했다.[3]

네우스트리아 분국왕
젊은 카를 (790–811)[4]
로타르 1세 (817–831)[4]
피핀 (831–838)[4]
카를 2세 (838–856)[4]
루이 2세 (856–879)[4]


5. 4. 로베르 가문/카페 왕조

861년 카롤링거 왕조의 왕 대머리왕 샤를은 네우스트리아에 변경 후작(en)직을 창설했다. 원래는 브르타뉴인에 대한 것과 노르만족에 대한 두 종류의 변방 후작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브르타뉴 변방 후작, 노르만 변방 후작으로 불렸으며, 왕이 임명한 관리가 맡았고 관리인, 지사, 변방백 등으로 칭해졌다.

911년, 로베르 1세는 두 변방 후작의 지위를 얻어 데마르쿠스(demarchu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가문인 후일의 카페 왕조987년까지 네우스트리아 전토를 다스렸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된 이후, 변방 후작은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고, 네우스트리아는 유럽의 정치적 용어로서 소멸했다.

통합된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을 다스린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로베르 1세, 911년–922년
  • 위그 대공, 922년–956년
  • 위그 카페, 956년–987년

6. 역사 기록

투르의 그레고리의 『프랑크족의 역사』, 『프랑크족 역사서』, 『생 베르탱 연대기』, 『생 바스트 연대기』, 랭스의 플로도아르의 『연대기』, 랭스의 리셰르의 『갈리아의 갈등사』는 네우스트리아 관점에서 쓰여진 주요 동시대 연대기이다.[12] 《프랑크인 이야기》(Liber Historiae Francorum)는 네우스트리아 측의 시점에서 쓰인 주요 동시대 연대기이다.[14]

참조

[1] 서적 Chapter 18: The Franks https://www.cdschool[...] 2024-02-14
[2] 웹사이트 Gallo-Romance https://www.thefreed[...] 2024-06-24
[3] 서적 The French Language Toda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0
[4] 서적 Histoire de la langue française Ellipses Edition Marketing S.A. 2011
[5] 간행물 Neustria
[6] 서적 The Franks Basil Blackwell
[7] 서적 A Manual of Ancient and Modern History https://archive.org/[...] D. Appleton 1848
[8] 간행물 Nordisk familjebok Meijer et al. (eds.) 1913
[9] 간행물 History of the Conquest of England by the Normans https://books.google[...] Augustin Thierry 1825
[10] 간행물 Caesaris S.R.E. Card. Baronii https://books.google[...] Augustin Theiner (ed.) 1867
[11] 서적 The Carolingian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12] 문서 Hodgkin, vol. vii, p 25.
[13] 백과사전 Neustria http://www.1911encyc[...] 2008-04-06
[14] 문서 Hodgkin, vol. vii,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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