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희
1. 개요
권태희는 경상북도 김천 또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도시샤 대학 신학과를 수료했다. 이후 안동과 밀양 교회의 목사, 기독교 안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김천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1956년까지 평양에 머물렀으며, 1983년 사망했다. 정치 활동으로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 이름 | 권태희 |
|---|---|
| 한자 표기 | 權泰羲 |
| 출생일 | 1907년 4월 2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북도 김천시 |
| 사망일 | 1983년 5월 29일 |
| 본관 | 안동 권(安東 權) |
| 학력 | 미상 |
|---|
| 경력 | 미상 |
|---|
| 부모 | 미상 |
|---|---|
| 형제 | 미상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미상 |
| 병역 | 미상 |
|---|
| 종교 | 미상 |
|---|
| 의원 선수 | 미상 |
|---|---|
| 의원 대수 | 미상 |
| 정당 | 미상 |
| 상훈 | 미상 |
|---|
-
납북자 -
임현수 (목사)
임현수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목사로, 북한 지원 활동 중 체포되어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목회자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목회자 -
심명섭
심명섭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목사로,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고 황민화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광복 후 동생 심훈의 시집을 간행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장로회신학대학교 동문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장로회신학대학교 동문 -
주공삼
주공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치며 월남을 시도하고 피난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인물이며, 주요 자녀로 주요한, 주요섭, 주영섭 등이 있다.
2. 생애
경상북도 김천 또는 경상남도 밀양 출생이다. 대구계성중학교,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도시샤 대학 신학과를 수료(청강생)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안동과 밀양 교회의 목사, 기독교 안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안동과 밀양 교회의 목사, 기독교 안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신세교회 (현 안동동부교회), 밀양교회 담임 목사와 조선신학교 전임강사, 밀양농잠중, 김천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경성신학교 강사, 밀양공립농림학교 교사·교장을 거쳐, 1947년 김천공립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경북 김천갑)에 당선된 후, 국회에서 문교사회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농지개혁, 국군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했다. 1951년 초 기독교연맹의 설득으로 김창준 기독교연맹위원장 산하에서 종사하였다.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위원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56년 8월 인민경제대학 재학 중이었으며, 1956년 10월까지 평양에 있었다. 1983년 5월 29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해방 이전
경상북도 김천 또는 경상남도 밀양 출생이다. 대구계성중학교, 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도시샤 대학 신학과를 수료(청강생)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안동과 밀양 교회의 목사, 기독교 안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2.2. 해방 이후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안동과 밀양 교회의 목사, 기독교 안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신세교회 (현 안동동부교회), 밀양교회 담임 목사와 조선신학교 전임강사, 밀양농잠중, 김천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경성신학교 강사, 밀양공립농림학교 교사·교장을 거쳐, 1947년 김천공립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경북 김천갑)에 당선된 후, 국회에서 문교사회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농지개혁, 국군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했다. 1951년 초 기독교연맹의 설득으로 김창준 기독교연맹위원장 산하에서 종사하였다.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위원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56년 8월 인민경제대학 재학 중이었으며, 1956년 10월까지 평양에 있었다. 1983년 5월 29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3. 한국전쟁과 납북
권태희는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신세교회 (현 안동동부교회), 밀양교회 담임 목사와 조선신학교 전임강사, 밀양농잠중, 김천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경북 김천갑)으로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했다. 1951년 초 기독교연맹의 설득으로 김창준 기독교연맹위원장 산하에서 종사하였다.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위원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56년 8월 인민경제대학 재학했다. 1956년 10월까지 평양에 있었다.
2.4. 사망
권태희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1951년 초 기독교연맹의 설득으로 김창준 기독교연맹위원장 산하에서 종사하였으며, 1956년 7월 재북 평화통일촉진위원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이었다. 1956년 8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하였고, 1956년 10월까지 평양에 있었다. 1983년 5월 29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정치 활동
권태희는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김천군 갑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4,703표를 얻어 40.9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북 김천시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1,994표를 얻는 데 그쳐 11.84%의 득표율로 4위에 머물러 낙선했다.
3.1. 제헌 국회의원 선거
권태희는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김천군 갑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4,703표를 얻어 40.9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북 김천시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1,994표를 얻는 데 그쳐 11.84%의 득표율로 4위에 머물러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