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섭
1. 개요
심명섭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을 보인 한국의 목사이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출생하여 경성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동아부인상회를 경영하다 개신교에 입문했다. 이후 목사 안수를 받고 창천교회와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적극신앙단에 가담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고, 《매일신보》에 황민화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다. 광복 후 동생 심훈의 유고 작품을 엮어 시집 《그 날이 오면》을 간행했으며, 한국 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이름 | 심명섭 |
|---|---|
| 원래 이름 | 沈明燮 |
| 출생일 | 1898년 |
| 출생지 | 충청남도 당진군 |
| 사망일 | 1950년? (53세) |
| 학력 | 경성 선린고등상업학교 수료 일본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 졸업 |
| 별명 | 아호(雅號)는 설송(雪松) |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 경력 | 前 대한기독교교육협회 부이사장 |
| 부모 | 심상정(부), 해평 윤씨 부인(모) |
| 배우자 | 안동 권씨 부인(사별) 안동 김씨 부인(재혼) |
| 자녀 | 슬하 2남 2녀 |
| 본관 | 청송(靑松) |
| 정당 | 무소속 |
| 형제 | 심우섭(형) 심훈(아우) |
| 친인척 | 심재영(조카) 심재호(조카) 윤극영(외사촌 동생) |
| 직책 | 前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경성부 기독교교육행정평의회 촉탁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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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 | 아베 노부유키 조선 주재 일본 총독 |
| 임기 | 1945년 1월 31일 ~ 1945년 8월 15일 |
| 군주 | 히로히토 일본 군주 |
| 총리 | 고이소 구니아키 일본 총리 스즈키 간타로 일본 총리 |
| 주석 |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 |
| 거주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일제 강점기 경기도 시흥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일제 강점기 경기도 과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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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권영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02-25, 51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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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 출신 -
인명진
인명진은 대한민국의 목사, 시민운동가, 정치인으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새누리당 및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당진시 출신 -
김원기 (1924년)
김원기는 1924년 충남 당진 출생으로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동문 -
전영택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동문 -
구몬 히로아키
구몬 히로아키는 1989년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쇼난 벨마레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 요코하마 FC의 J2리그 승격에 기여한 일본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현재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스카우트로 활동하고 있다. -
1950년 사망 -
김영랑
김영랑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활동한 시인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같은 서정시와 민족주의적 저항 의식을 담은 시를 동시에 선보였으며, 1935년에 시집 『영랑시집』을 발간했다. -
1950년 사망 -
정지용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생으로 모더니즘 문학을 선도했으며, 시문학 동인과 구인회 활동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2. 생애
충청남도 당진군 출신으로, 경성 선린고등상업학교 수료 후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상점 경영에 참여하다 개신교에 입문하여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예산 및 아산교회 전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경성부의 창천교회, 중앙교회 등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했으며, 신흥우의 적극신앙단 활동과 기독교 언론 활동에도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하고 일제의 개신교 교파 통합 정책에 협력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로 인해 광복 후 감리교 내부에서 정춘수, 갈홍기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지목받았다. 심명섭은 당시 황민화 기독교를 정당화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요절한 동생 심훈의 유고 시집 《그 날이 오면》을 간행했으며, 대한기독교교육협회 부총무와 부이사장을 지냈다.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인민군 환영 행사 준비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치보위부에 소환된 뒤 실종되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형 심우섭과 함께 포함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개신교 입문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경기도 시흥에서 잠시 지낸 뒤 경기도 과천과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경성 선린고등상업학교를 수료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아오야마 중학교를 졸업했다. 귀국해서는 동아부인상회라는 상점 경영에 참여했는데, 당시 이 상점은 지식인들의 출입이 잦아 정보 교환의 장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개신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2.2. 목회 활동과 언론 활동
동아부인상회라는 상점 경영에 참여하며 지식인들과 교류하다가 개신교에 입문하였다. 이후 충남 예산교회 및 아산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다 목사 안수를 받았고, 경성부 창천교회와 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신흥우가 조직한 적극신앙단에 가담하여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겸 기독교신문 편집위원을 역임하며 기독교 언론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총무부 부원으로 활동하고, 일제가 강요한 개신교 교파 통합 작업에 감리교 측 대표로 참여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광복 후 감리교단 내에서 친일 청산 요구가 일었을 때, 정춘수, 갈홍기, 이동욱, 김영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목사로 지목되었다.
심명섭은 1941년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기독교가 각 지역의 역사와 풍습, 민족성에 맞게 변화해왔다는 논리로 당시의 황민화 기독교 정책을 정당화했다. 또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며 태평양 전쟁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일찍 사망한 동생 심훈의 유고를 모아 시집 《그 날이 오면》을 간행했으며, 대한기독교교육협회 부총무를 거쳐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초기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감리교 대표로 인민군 환영 행사 준비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치보위부의 호출을 받고 실종되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그의 형인 심우섭 역시 같은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2.3. 친일 행적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해 신흥우가 부장으로 있는 총무부 부원을 지냈다. 또한 일제가 강요한 개신교 교파 합병 작업에도 감리교 측 대표로 참여하였다.
1941년에는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기독교가 각 지방의 역사, 풍습, 민족성에 맞추어 변화해왔다는 논리로 당시 일제의 황민화 기독교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 글에서 심명섭은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며, 태평양 전쟁 승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광복 후 감리교단 내부에서는 친일 행적에 대한 반성 요구가 나오며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심명섭은 정춘수, 갈홍기, 이동욱, 김영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목사로 지목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그의 형인 심우섭 역시 같은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2.4. 광복 이후
광복 후 감리교단 내부에서는 친일 행적에 대한 자성과 청산 요구가 일었는데, 이 과정에서 심명섭은 정춘수, 갈홍기, 이동욱, 김영섭 등과 함께 주요 친일 목회자로 지목되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임전보국단 참여 및 일제의 개신교 교파 통합 정책에 협력한 그의 행적 때문이었다. 심명섭은 1941년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의 황민화 기독교 정책을 옹호하고, 예수의 말을 인용하여 신도들에게 전쟁 참여와 희생을 독려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심훈의 유고를 모아 시집 《그 날이 오면》을 출간했으며,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 부총무와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인민군 환영 행사 준비위원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 정치보위부에 소환된 뒤 행방불명되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그의 형인 심우섭 역시 같은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다.
2.5. 납북
한국 전쟁 초기에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심명섭은 이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데 감리교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후 정치보위부의 호출을 받은 뒤 실종되었으며, 이로 인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여 총무부 부원으로 활동했으며, 일제가 강요한 개신교 교파 통합 작업에도 감리교 대표로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광복 이후 감리교단 내에서 친일 행적에 대한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 심명섭은 정춘수, 갈홍기, 이동욱, 김영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지목되었다.
심명섭은 1941년 친일 어용신문인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기독교가 각 지역의 역사와 풍습, 민족성에 맞게 변화해왔다는 논리로 당시 일제가 추진하던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는 기독교를 정당화하려 했다. 또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의 형인 심우섭 역시 같은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