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장씨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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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인 장씨는 조선 인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덕수 장씨이다. 1619년에 태어나 1635년 숙의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638년 소의, 1640년 귀인으로 품계가 승급되었다. 1671년에 사망하여 예장되었으며, 2013년 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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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장씨 (인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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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인조의 후궁 |
배우자 | 인조 |
자녀 | 없음 |
아버지 | 장류(張留) |
어머니 | 한산 이씨 |
출생일 | 1619년 3월 16일 (음력) |
사망일 | 1671년 1월 24일 (음력) |
능묘 | 풍천본종산하묘좌(楓川本宗山下卯坐) |
2. 생애
귀인 장씨는 1619년(광해군 14년)에 태어나 1635년(인조 13년) 숙의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인렬왕후 사후 인조가 계비를 세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후 번복하고 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장씨는 1638년(인조 16년) 소의로, 1640년(인조 18년) 귀인으로 승봉되었으며, 1671년(현종 12년)에 사망하여 예장되었다.[16]
2. 1. 초기 생애
본관은 덕수 장씨이며, 1619년(광해군 14년) 3월 16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귀후서별제(行歸厚署別提) 장류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4]2. 2. 후궁 간택과 입궁
1635년(인조 13년) 음력 3월 11일, 숙의(淑儀) 간택령이 내려져 삼간택[4]을 거쳐 이 해 음력 8월 16일 숙의로 뽑혔다.[5] 이후 이현궁에서 한 달간 머물다가 인조의 친영을 받고 입궐했다.[6][7] 신하들의 강압이 아닌 인조의 자의로 숙의 간택이 결정되었고, 가례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 구씨가 왕모(王母) 자격으로 머물렀던 이현궁에서 인조의 친영을 받는 등 왕후에 준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받으며 후궁 생활을 시작했으나, 결국 인조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8]2. 3. 인렬왕후 사후와 계비 간택
1635년(인조 13년) 12월 9일, 인조의 첫 왕비인 인렬왕후가 난산으로 사망했다.[9] 인렬왕후의 담제를 마친 후인 1637년(인조 15년) 3월 27일, 인조는 '계비는 예로부터 해독은 있으나 유익함은 없었다.'는 이유를 들며 계비를 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10] 그러나 같은 해 12월, 인조는 인렬왕후의 3년상 절차를 모두 마친 뒤, 계비를 세우지 않겠다고 했던 뜻을 번복하고, 새로이 처녀를 뽑아 계비로 삼겠다며 계비 간택령과 금혼령을 내렸다.[11][12]2. 4. 품계 승급
1638년(인조 16년) 12월 2일,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책봉례가 거행되었다.[13] 새로운 내명부 수장이 등극하면 관례에 따라 정1품을 제외한 선왕과 현왕의 후궁들을 진봉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이때 장씨는 1품계 승급하여 정2품 소의가 되었고, 인조의 승은 후궁이었던 숙원 조씨(훗날의 귀인 조씨)는 정4품 소원이 되었다.[14] 이후 1640년(인조 18년) 8월 27일, 장씨는 다시 1품계 승급하여 종1품 귀인으로 승봉되었다.[15]2. 5. 사망
귀인 장씨는 1671년(현종 12년)에 사망하여 예장(禮葬)되었다.[16]3. 가족 관계
(덕수 장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