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왕조로, 1910년 일본에 병합되기까지 500년 이상 존속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다. 왕권과 신권의 긴장 속에서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으로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유지했으며, 신분제 사회였다. 문화적으로는 한글 창제, 실학의 발달 등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과 개항, 개혁을 거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했으나, 결국 일본에 의해 멸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92년 설립 - 소격서
- 1897년 폐지 - 메리나 왕국
15세기부터 1897년까지 마다가스카르섬 중앙고원을 통치한 메리나 왕국은 안드리아마넬로 왕이 주변 공동체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랄람보 왕이 이메리나라는 이름을 붙여 왕국을 확장했으며, 19세기에는 마다가스카르 대부분을 통일했으나, 19세기 후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1897년 프랑스 식민군에 의해 멸망했다. - 1897년 폐지 - 카티푸난
카티푸난은 1892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이 스페인 식민 통치로부터 필리핀 독립을 목표로 결성한 비밀 결사 단체로, 무장 혁명을 통해 독립을 추구하며 1896년 필리핀 혁명을 일으켰다. - 옛 한글이 사용된 문서 - 황제
황제는 진시황에서 유래한 최고 통치자 칭호로, 동양에서는 천자의 개념과 연결되었고 서양에서는 로마 황제의 칭호에서 유래했으며,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호칭과 의미를 지녔으나 현재는 일본 천황만이 유일하게 그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 옛 한글이 사용된 문서 - 외래어
외래어는 다른 언어에서 유입되어 특정 언어에 정착한 단어 또는 표현으로,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발음, 의미, 형태 등이 변화하고 외국어, 차용어, 부분 바꿈, 번역 차용, 신조어, 뜻 차용 등의 형태로 수용되면서 원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며, 각 언어는 외래어 수용에 대한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외래어 순화 운동을 통해 사용을 제한하기도 한다.
조선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고��국 (1392–1393) 조선국 (1393–1894) 대조선국 (1894–1897) |
로마자 표기 | Joseon |
다른 이름 | 북한 이름: 조선봉건왕조 |
수도 | 주요: 한성 (현재 서울) (1394–1399, 1405–1897) 임시: 개경 (1392–1394, 1399–1405) |
공식 언어 | 중세 한국어 근세 한국어 한문 (문어) |
종교 | 유교 (국교) 불교 무속신앙 도교 기독교 (1886년 인정) |
통화 | 문 (1423–1425, 1625–1892) 양 (1892–1897)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데모님 | 한국인 |
정치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
국가 원수 | 국왕 |
초대 국왕 | 태조 |
마지막 국왕 | 고종 |
초대 영의정 | 배극렴 |
마지막 영의정 | 김병시 |
입법부 | 없음 (1894년 이전) (법령) 중추원 (1894년부터) |
역사 | |
건국 | 태조 이성계 즉위 (1392년 8월 5일) |
국호 변경 |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 변경 (1393년 3월 28일) |
한글 창제 | 훈민정음 반포 (1446년 10월 9일) |
일본의 침략 | 임진왜란 (1592–1598) |
만주족의 침략 | 정묘호란, 병자호란 (1627, 1636–1637) |
강화도 조약 | 강화도 조약 체결 (1876년 2월 26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1895년 4월 17일) |
멸망 | 대한제국 선포 (1897년 10월 13일) |
인구 | |
1519년 | 3,300,000명 |
1648년 | 2,576,000명 |
1717년 | 10,056,000명 |
1777년 | 9,074,000명 |
1807년 | 9,377,000명 |
외교 관계 | |
조공 관계 | 명나라, 청나라 조공 (1401–1895) 청나라 간섭 (1882–1894) 일본 간섭 (1894–1896) |
기타 | |
![]() | |
왕실 상징 | [[파일:Joseon wang bo (Royal Seal Treasure of the Joseon King).svg|85px]] |
칭호 | 대군주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
2. 건국과 국호
14세기 후반, 고려는 쇠퇴하던 원나라와의 전쟁 여파, 그리고 명나라의 등장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13] 고려 조정은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을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 반도 수복을 주장하는 파와 중립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고려는 원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13] 1388년, 명나라가 옛 쌍성총관부 영토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군을 이끌었으나, 위화도 회군을 통해 개경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13] 고려 우왕과 고려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킨 이성계는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이성계는 고려 공양왕을 옹립했으나, 1392년 정몽주를 제거하고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는 초기에는 고려 국호를 유지하고 왕위 계승만 바꾸려 했으나, 고려 왕조 잔당과 왕씨 가문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겪었다. 결국 새로운 왕조의 필요성을 느낀 이성계는 '화령'과 '조선' 중 고조선을 계승하는 의미의 '조선'을 국호로 선택하고, 명나라 황제의 지지를 받았다.[14] 또한 수도를 개경에서 한성(현재 서울)으로 옮겼다.[14]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급진파는 처음에는 창왕과 공양왕을 옹립하여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초기에는 국호를 변경하지 않고 고려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후 명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국호는 고조선을 계승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을 후보로 하여 명나라의 결정을 따르는 형식을 취했다.[151] '화녕'은 북원의 본거지 카라코룸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여, 명 태조는 위씨조선의 이름이자 평양 부근의 옛 이름인 '조선'을 선택했다.[151] 이는 기자조선의 사례를 들어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명나라와 단군조선 이래의 독자성을 의식한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절충된 결과였다.
이성계는 명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고 칭하며 사신을 보내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명 태조는 왕조 교체를 이유로 국호 변경을 명하였다.[165] 이에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 두 후보를 명 태조에게 제시하여 선택을 받았고,[151] 1393년 2월, 명은 이성계를 권지조선국사(權知朝鮮國事)로 책봉하고 국호는 조선으로 결정되었다.[152]
국가 존속 중 공식 명칭은 '''조선국'''[144] 또는 '''대조선국'''[145]이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조선왕국''', '''조선왕조'''(, )라고 부르며, 최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북한에서는 '''조선봉건왕조'''(조선봉건왕조한국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씨조선'''이라고 표기하며, 이씨 가문 지배하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과거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던 기자조선이나 위씨조선 등과의 구별을 위해 사용된다. 왕조명으로는 '''이조'''(李朝)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본식 명칭이 국가를 일족의 소유물로 격하시켜 축소하는 것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2. 1. 고려 말의 상황과 이성계의 등장
고려 말,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건국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가 운영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226] 이들은 요동반도 진출과 명과의 외교 관계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신진사대부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파와 조준, 남은, 정도전 등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급진파로 나뉘어 대립했다.[226]14세기 후반, 고려는 쇠퇴하던 원나라와의 전쟁 여파, 그리고 명나라의 등장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13] 고려 조정은 명나라와의 관계 설정을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 반도 수복을 주장하는 파와 중립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고려는 원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13] 1388년, 명나라가 옛 쌍성총관부 영토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군을 이끌었으나, 위화도 회군을 통해 개경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13] 고려 우왕과 고려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킨 이성계는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13] 이성계는 고려 공양왕을 옹립했으나, 1392년 정몽주를 제거하고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왕위에 올랐다.[13]
이성계는 초기에는 고려 국호를 유지하고 왕위 계승만 바꾸려 했으나, 고려 왕조 잔당과 왕씨 가문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겪었다. 결국 새로운 왕조의 필요성을 느낀 이성계는 '화령'과 '조선' 중 고조선을 계승하는 의미의 '조선'을 국호로 선택하고, 명나라 황제의 지지를 받았다.[14] 또한 수도를 개경에서 한성(현재 서울)으로 옮겼다.[14]
13세기 이래 원의 속국이었던 고려는 원의 쇠퇴를 틈타 독립을 꾀했지만, 북원과 명의 대립, 왜구 침략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나하추 정벌, 요양 제압, 여진족 및 왜구 토벌 등으로 명성을 얻은 이성계는 1388년 요동 공격 명령을 받고 압록강에 주둔했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개성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성계는 반원·친명파였고, 왕명에 반발했으며, 신흥 유신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성계는 "소국이 대국에 거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요동 공격의 부당성을 주장했고, 이를 사대주의로 보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고려 군사력으로는 명과의 전쟁이 무리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성계를 지지한 양반들은 주자학의 존화양이(尊華攘夷) 논리에 따라 한족 국가인 명을 정통 천자로 여겨 명에 대항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다.[164]
2. 2. 국호 제정과 명과의 관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급진파는 처음에는 창왕과 공양왕을 옹립하여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227] 초기에는 국호를 변경하지 않고 고려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후 명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227] 국호는 고조선을 계승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을 후보로 하여 명나라의 결정을 따르는 형식을 취했다.[151] '화녕'은 북원의 본거지 카라코룸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여, 명 태조는 위씨조선의 이름이자 평양 부근의 옛 이름인 '조선'을 선택했다.[151] 이는 기자조선의 사례를 들어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명나라와 단군조선 이래의 독자성을 의식한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절충된 결과였다.[227]이성계는 명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고 칭하며 사신을 보내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명 태조는 왕조 교체를 이유로 국호 변경을 명하였다.[165] 이에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 두 후보를 명 태조에게 제시하여 선택을 받았고,[151] 1393년 2월, 명은 이성계를 권지조선국사(權知朝鮮國事)로 책봉하고 국호는 조선으로 결정되었다.[152]
조선 국왕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형태로 재위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세습으로 계승되었고, 국가 제도 역시 독자적인 국풍을 유지하였다.[227] 조선의 국서와 외교문서는 국명을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다.[229]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은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이후 사용되었다.[230]
건국 초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이었다. 명나라 홍무제는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고, 내부에서는 왕자의 난과 두문불출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228] 조선은 명과의 사대를 강화하고, 영락제 즉위 이후 사대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대외적 불안을 해소했다.[228] 명과 조선의 관계는 종주국과 속국, 군신부자(君臣父子)의 관계였고, 조선은 명에 봉사하는 사대외교(事大外交)를 펼쳤다.[164]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고 청이 건국되자, 조선은 명 문화의 정당한 계승자로서 '소중화(小中華)'를 자칭했다.[164]
한편, '이씨조선(李氏朝鮮)' 또는 '이조(李鮮)'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사 정리 사업으로 형성된 것이다.[231] 한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용어를 사용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비판하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231]
3. 국체 및 이념
조선은 전제군주적인 국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왕국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관료제로 이루어졌다.[232] 건국 초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점차 새로운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고 《경국대전》을 통하여 이를 명문화하였다.[272] 성리학은 유학의 한 갈래로 송나라 시기 형성되어 한국에 전해졌다. 성립 시기 성리학은 양명학, 훈고학 등의 다른 유학 갈래들과 경쟁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성리학만을 참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유학의 다른 유파들은 배격하였다.[233]
성리학이 독점하는 국가 이념의 수립은 이후 조선 내의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파가 형성되는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234]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 학파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었고 학파의 수장으로서 자리잡은 유학자는 비록 현직 관료로 있지 않더라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235]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이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생각하였으나 그들 역시 성리학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236] 한편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는 서학이나 동학과 같은 움직임은 사문난적으로 배격되었다.[237][238]
조선 시대의 특징은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된 유교 도덕, 특히 주자학에 기반한 통치였다. 이는 신분 제도를 강고하게 만들고, 차별 의식을 조장하였으며, 수많은 당파 싸움을 야기하고, 대립 당파에 대한 공격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기술·노동 계급의 멸시는 기술 발전의 저해, 군사력 약화, 우민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외교와 내정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유교는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타파하였고, 왕조 후기에도 혁신 사상이 등장하는 등 지식인들이 정치와 사회 개혁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성장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저서 『국가, 민족, 나』에서 조선에 대해 "사색당쟁, 사대주의, 양반의 안일하고 무사안일한 생활 태도로 인해 후세 자손까지 악영향을 미친 민족적 범죄사"라고 평가했다.
4. 역사
조선 초기는 정치적으로 이성계의 건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의 등장에 따른 각종 사화가 있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성계의 건국은 성리학적 이상에 따른 정치 실현이라는 신진사대부의 요구와 함께 원나라가 북원으로 물러나고 명나라가 수립되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국내 세력의 갈등이 함께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원나라 간섭기가 길어지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왕족과 권문세가 역시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원과 명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고려는 고토회복을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과의 전쟁을 시도하였다.[239] 명나라가 명실상부한 중국의 패자라는 인식 아래 급진적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226]
새 왕조가 건국되자 태조는 후계자 문제를 제기했다. 이방원은 왕위 획득에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영의정 정도전과 남은은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태조의 여덟째 아들(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이방석을 1392년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 갈등은 정도전이 조선을 왕이 임명한 신하들이 이끄는 왕국으로 여겼던 반면, 이방원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 군주제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가 갑자기 죽자, 이방원은 1398년 궁궐을 습격하여 정도전과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신덕왕후의 두 아들(이복형제)을 포함한 왕세자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서로 죽이려는 사실에 경악한 태조는 퇴위하고 둘째 아들 이방과를 정종으로 즉위시켰다.
정종의 즉위 후 첫 조치 중 하나는 수도를 개경으로 환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실권을 유지했고, 1400년, 이방원 세력과 이방간 세력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전면전으로 비화되었고, 이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싸움 이후 패배한 이방간은 도산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처형되었다. 정종은 즉각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스스로 퇴위했다. 같은 해 이방원은 태종으로 조선의 왕위에 올라 왕조의 세 번째 국왕이 되었다.
태종은 왕자들의 사병(私兵)으로 인한 내란의 원인을 제거하고 군정(軍政)을 재정비하여 정무(政務)와 군정을 완전히 분리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조선의 과거 제도, 신분 제도, 정치 제도, 화폐 제도 등이 정비되었다. 명(明)에 대해서는 철저한 친명(親明) 정책을 펼쳤다. 그 때문에 선대(先代)들은 “권지조선국사(朝鮮国王代理)” 이상의 지위를 받지 못했지만, 태종은 1403년에 명(明)의 영락제(永樂帝)로부터 공식적으로 “'''조선왕(朝鮮王)'''”의 지위에 책봉되었다. 이후 제3대 조선왕이라 칭하게 된다.[146] 태종은 1418년에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지만, 군권은 그대로 유지하여 1419년의 응영의 외구라 불리는 쓰시마(対馬) 침공을 지시하였다.[168]
세종 시대는 조선에서 가장 정권이 안정된 시대로 여겨진다. 왕권이 강고하였고, 왕의 권위도 미쳤다. 한편 1422년까지 이방원이 상왕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종은 먼저 왕 중심의 일극 집중형에서 의정부(議政府)를 중심으로 한 관료 주도의 정치로 정치 제도를 전환했다. 또한 명(明)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한글(훈민정음)의 기원이 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세종 시대는 31년에 걸쳐 군사적 안정과 정치적 안정의 균형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또한 이 시대에 화폐(貨幣) 경제의 보급이 진행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침략 전쟁을 여러 차례 수행하여, 1437년에는 두만강(豆滿江) 이남 여진(女真) 지역을 침략하여 제압하고, 육진(六鎮)을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그 후에도 여진과 대립을 계속하며 여러 차례 침략을 감행하였다.
성종 즉위 초 경국대전이 반포되었다. 이후 조선은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의 보완 체제를 추가하였으나 갑오개혁에 이르러 폐지될 때까지 《경국대전》을 공식적인 법제로서 유지하였다.[244]
제6대 단종(제5대 문종의 아들)은 11세에 즉위하여 정치는 모두 관료들이 결정하는 형태가 되었고, 왕권의 공동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다른 왕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궁정 투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교묘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1455년에 단종에게 압력을 가해 왕위를 빼앗고 스스로 국왕이 되었다(세조). 세조는 반대 세력을 강력하게 제거하고 왕권을 집중시켰다. 군정과 관제를 개혁하여 군권을 강화하고 직전법을 도입하여 세출을 억제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지방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나, 세조는 이 반란들을 진압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일본과는 화해 정책을 채택하여 외교를 안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강권적인 중앙 집권주의로 인해 자신에게 복종하는 공신들을 우대하고 고급 관료는 자신의 측근으로 채워졌으며, 실력 있는 자도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조에게 우대받은 공신들은 후에 훈구파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유자들이 많은 비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불교 우대 정책을 취했다. 1467년의 이시애의 난에서는 비판 세력을 탄압하였으나, 진압에 활약한 규성군 이준(세종의 사남 임영대군의 차남) 등 왕족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재위 기간(1498년~1506년)은 사림 학자 숙청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모가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행동이 괴팍해졌다. 그는 폐비 윤씨의 죽음을 지지한 관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처형했다.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을 쓴 사림 학자들도 처형했다. 연산군은 또한 수백 명의 여성들을 지방에서 끌어들여 궁중의 기생으로 삼았고, 성균관을 사적인 유흥 장소로 전용했다. 그는 왕의 부적절한 행동과 정책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사헌부와 홍문관을 폐지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왕을 비판하는 내용의 포스터에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12년간의 폭정 끝에, 1506년 쿠데타로 폐위되어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경위로 인해 근본적으로 약한 왕이었지만, 그의 재위 기간에는 사림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인 그의 신하 조광조가 이끄는 중요한 개혁 시대를 맞이했다. 그는 지방 자치와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향약이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설립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보다 공평하게 분배하고 토지 소유량과 노비 수를 제한하는 토지 개혁으로 빈부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백성들에게 국어 번역본이 포함된 유교 경전을 널리 보급하고, 관료 수를 줄여 정부 규모를 축소하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감찰사로서 법을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어떤 관리도 감히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백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지만, 중종을 왕위에 앉히는 데 도움을 준 보수적인 관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중종에게 조광조의 충성심에 의심을 품도록 음모를 꾸몄다. 조광조는 처형되었고, 그의 대부분의 개혁 조치는 그가 죽은 후 발생한 세 번째 사림 숙청과 함께 사라졌다.
4. 1. 조선 초기 (건국 ~ 16세기 초)
조선 초기는 정치적으로 이성계의 건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의 등장에 따른 각종 사화가 있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성계의 건국은 성리학적 이상에 따른 정치 실현이라는 신진사대부의 요구와 함께 원나라가 북원으로 물러나고 명나라가 수립되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국내 세력의 갈등이 함께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원나라 간섭기가 길어지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왕족과 권문세가 역시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원과 명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고려는 고토회복을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과의 전쟁을 시도하였다.[239] 명나라가 명실상부한 중국의 패자라는 인식 아래 급진적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226]
새 왕조가 건국되자 태조는 후계자 문제를 제기했다. 이방원은 왕위 획득에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영의정 정도전과 남은은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태조의 여덟째 아들(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이방석을 1392년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 갈등은 정도전이 조선을 왕이 임명한 신하들이 이끄는 왕국으로 여겼던 반면, 이방원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 군주제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가 갑자기 죽자, 이방원은 1398년 궁궐을 습격하여 정도전과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신덕왕후의 두 아들(이복형제)을 포함한 왕세자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서로 죽이려는 사실에 경악한 태조는 퇴위하고 둘째 아들 이방과를 정종으로 즉위시켰다.
정종의 즉위 후 첫 조치 중 하나는 수도를 개경으로 환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실권을 유지했고, 1400년, 이방원 세력과 이방간 세력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전면전으로 비화되었고, 이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싸움 이후 패배한 이방간은 도산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처형되었다. 정종은 즉각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스스로 퇴위했다. 같은 해 이방원은 태종으로 조선의 왕위에 올라 왕조의 세 번째 국왕이 되었다.
태종은 왕자들의 사병(私兵)으로 인한 내란의 원인을 제거하고 군정(軍政)을 재정비하여 정무(政務)와 군정을 완전히 분리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조선의 과거 제도, 신분 제도, 정치 제도, 화폐 제도 등이 정비되었다. 명(明)에 대해서는 철저한 친명(親明) 정책을 펼쳤다. 그 때문에 선대(先代)들은 “권지조선국사(朝鮮国王代理)” 이상의 지위를 받지 못했지만, 태종은 1403년에 명(明)의 영락제(永樂帝)로부터 공식적으로 “'''조선왕(朝鮮王)'''”의 지위에 책봉되었다. 이후 제3대 조선왕이라 칭하게 된다.[146] 태종은 1418년에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지만, 군권은 그대로 유지하여 1419년의 응영의 외구라 불리는 쓰시마(対馬) 침공을 지시하였다.[168]
세종 시대는 조선에서 가장 정권이 안정된 시대로 여겨진다. 왕권이 강고하였고, 왕의 권위도 미쳤다. 한편 1422년까지 이방원이 상왕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종은 먼저 왕 중심의 일극 집중형에서 의정부(議政府)를 중심으로 한 관료 주도의 정치로 정치 제도를 전환했다. 또한 명(明)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한글(훈민정음)의 기원이 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세종 시대는 31년에 걸쳐 군사적 안정과 정치적 안정의 균형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또한 이 시대에 화폐(貨幣) 경제의 보급이 진행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침략 전쟁을 여러 차례 수행하여, 1437년에는 두만강(豆滿江) 이남 여진(女真) 지역을 침략하여 제압하고, 육진(六鎮)을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그 후에도 여진과 대립을 계속하며 여러 차례 침략을 감행하였다.
성종 즉위 초 경국대전이 반포되었다. 이후 조선은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의 보완 체제를 추가하였으나 갑오개혁에 이르러 폐지될 때까지 《경국대전》을 공식적인 법제로서 유지하였다.[244]
제6대 단종(제5대 문종의 아들)은 11세에 즉위하여 정치는 모두 관료들이 결정하는 형태가 되었고, 왕권의 공동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다른 왕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궁정 투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교묘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1455년에 단종에게 압력을 가해 왕위를 빼앗고 스스로 국왕이 되었다(세조). 세조는 반대 세력을 강력하게 제거하고 왕권을 집중시켰다. 군정과 관제를 개혁하여 군권을 강화하고 직전법을 도입하여 세출을 억제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지방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나, 세조는 이 반란들을 진압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일본과는 화해 정책을 채택하여 외교를 안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강권적인 중앙 집권주의로 인해 자신에게 복종하는 공신들을 우대하고 고급 관료는 자신의 측근으로 채워졌으며, 실력 있는 자도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조에게 우대받은 공신들은 후에 훈구파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유자들이 많은 비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불교 우대 정책을 취했다. 1467년의 이시애의 난에서는 비판 세력을 탄압하였으나, 진압에 활약한 규성군 이준(세종의 사남 임영대군의 차남) 등 왕족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재위 기간(1498년~1506년)은 사림 학자 숙청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모가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행동이 괴팍해졌다. 그는 폐비 윤씨의 죽음을 지지한 관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처형했다.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을 쓴 사림 학자들도 처형했다. 연산군은 또한 수백 명의 여성들을 지방에서 끌어들여 궁중의 기생으로 삼았고, 성균관을 사적인 유흥 장소로 전용했다. 그는 왕의 부적절한 행동과 정책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사헌부와 홍문관을 폐지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왕을 비판하는 내용의 포스터에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12년간의 폭정 끝에, 1506년 쿠데타로 폐위되어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경위로 인해 근본적으로 약한 왕이었지만, 그의 재위 기간에는 사림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인 그의 신하 조광조가 이끄는 중요한 개혁 시대를 맞이했다. 그는 지방 자치와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향약이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설립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보다 공평하게 분배하고 토지 소유량과 노비 수를 제한하는 토지 개혁으로 빈부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백성들에게 국어 번역본이 포함된 유교 경전을 널리 보급하고, 관료 수를 줄여 정부 규모를 축소하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감찰사로서 법을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어떤 관리도 감히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백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지만, 중종을 왕위에 앉히는 데 도움을 준 보수적인 관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중종에게 조광조의 충성심에 의심을 품도록 음모를 꾸몄다. 조광조는 처형되었고, 그의 대부분의 개혁 조치는 그가 죽은 후 발생한 세 번째 사림 숙청과 함께 사라졌다.
4. 2. 조선 중기 (16세기 중반 ~ 17세기)

성종 시기 제도가 정비된 이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을 거치며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섰다.[245] 사림파는 학연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했으며, 이는 훗날 붕당 형성의 원인이 된다.[290]
조광조의 개혁 좌절 이후 사림파는 사화를 겪으며 부침했으나, 결국 정치 실권을 장악했다.[246] 왕권은 제약되었고, 신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왕은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림파 내에서는 학파와 인맥에 따라 붕당이 형성되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의 사색정파가 형성되어 경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290]

사림 세력은 선조 시대에 정권을 장악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22][23]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철학을 따랐다.[22][23]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24] 당파는 유교 철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25] 권력 교체는 반역 혐의와 유혈 숙청을 수반하는 복수의 악순환을 야기했다. 정여립의 난 (1589년)은 대표적인 정치적 숙청 사건으로, 정철이 이 사건을 이용하여 1000명이 넘는 동인들을 숙청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큰 전쟁이 있었다. 임진왜란은 평온했던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고, 이후 정치, 사회,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247]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 조정의 당파 싸움, 일본군의 군사력 평가 부족, 외교 실패는 조선의 부실한 준비로 이어졌다. 일본군은 우수한 화기를 사용하여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한성과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 함대를 궤멸시키고, 게릴라 저항이 형성되면서 침략은 늦춰졌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는 일본군의 보급선을 방해했고, 명나라의 개입으로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냈다. 전쟁 중 조선은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전쟁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1609년까지 단절되었다.
광해군 폐위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248] 후금이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에 굴복을 요구하면서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조선은 정축하성으로 청에 굴복했다.[249]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진 부족을 통합하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만주"로 개명했다. 광해군은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인조는 명나라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627년, 아민이 이끄는 여진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여 "형제 관계"를 맺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했다.[28]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1636년 조선을 침략했고, 인조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해야 했다.[30]
조선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기며 분개했고,[28] 명나라를 문명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다.[32] 명나라에 동조했던 지식인들은[33]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정체성을 재검토해야 했다.[32] 조선은 소중화 사상을 만들었다.[32] 조선 조정과 지식인들은 명나라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34]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사림 세력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정치를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사림 세력은 1575년에 서인과 동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분열하여 주도권 다툼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보이는 당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정치 체제를 붕당정치라고 한다. 당파의 분열은 다시 정국 혼란을 불러왔고, 각 왕은 그 안정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도해야만 했다.
서인과 동인으로 나뉜 사림파는 서로를 견제했지만, 이이(이율곡)가 이 대립을 억누르는 동안에는 양당파 모두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었다. 1584년에 이이가 죽자 양당파 모두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였다. 초반에는 동인이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조정을 거의 장악하려던 찰나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여 서인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1591년에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동인이 기세를 회복하여 이후 30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다. 동인은 서인 세력 처벌 문제에서 사형 등을 주장한 강경파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과 온건파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남인의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1592년 4월 13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준비되지 않은 조선군은 곳곳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도요토미 군에 국토를 빼앗겼다. 도요토미 군은 개전 반달 만에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몇 달 만에 조선의 함경도 북쪽까지 진출했다. 당시 부패가 심했던 조선 정부는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했고, 치안 악화로 전국토가 피폐해졌다. 그에 대한 위기감과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진 민중들이 저항을 시작했다.
민중들 중에는 조선의 압정과 부패에 불만을 가진 자들도 많았고, 도요토미 군에 협력한 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명나라의 원군이 진출하자 도요토미 군은 협상 해결로 선회하여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듬해 일본과 명나라는 강화 협상 과정에서 조선 남부 연안으로 일단 병력을 철수했다.
그러나 강화는 실패로 끝나고, 1597년 1월 15일,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반도에 침략한다(정유재란). 2차 침략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대한 소탕 작전을 벌였고, 명군이 한성을 버리지 않자 월동과 영구 점령을 위해 휴전 기간의 3배 정도 지역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듬해부터 본토에서 지휘를 맡았던 히데요시의 건강이 악화되어 소극적으로 되면서, 답보 상태에 빠진 전쟁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종결되었고, 도요토미 군은 철수했다. 7년에 걸친 전란으로 부패가 심했던 조선의 정치·사회는 붕괴 직전까지 몰렸고, 경제적으로도 파탄 직전에 놓였다. 조선은 증수 방안으로 “납속책”을 제시했는데, 이는 곡물이나 돈을 조정에 납부한 평민·천민 등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이었다. 천민도 일정 금액을 내면 평민이 될 수 있고, 평민도 일정 금액을 내면 양반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도로 조선의 신분 제도는 크게 유동화되었고, 구성 비율은 크게 변화했다. 새로운 체제가 생겨나고, 부패는 일시적으로 쇄신되었다. 정치에는 일시적으로 다시 활기가 되살아났다.
한편, 이 전쟁으로 명나라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되어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주변 이민족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여진족의 세력 신장을 가져왔고, 후일의 후금과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는 “속국 조선에 대해 종주국 명나라”가 어떤 태도로 협상했는지에 대해, 구원 결정부터 강화까지 명나라가 주도하고 있었으며, “종주국이라고 해도 결국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대국의 편의주의”를 지적하고 있다.[169]
'''광해군의 실리 외교와 국내 정쟁'''
광해군은 즉위하자 파탄 난 재정의 재건과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의 뛰어난 외교 정책은 후금(훗날 청나라)과의 전쟁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171]
이미 에도 시대로 접어든 일본과는 1609년에 화약을 맺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 회복에도 힘썼다(조선통신사). 또한 당쟁 종식에도 힘썼으나, 당쟁 종식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려면 대규모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1615년까지 이어진 숙청은 그 범위가 반대 파벌, 형제까지 미쳤으나, 이로써 대북파와 광해군은 일단의 정권 안정을 확보하게 된다. 또한, 민정에서는 대동법을 도입하는 등의 개혁을 실시했다. 한편, 쇠약해진 명나라와 그 틈을 타 성장해 온 후금(청) 사이에 끼여(정묘호란, 1618년 - 1619년), 이후 조선은 이중 외교를 펼치게 된다.
'''인조 반정'''
그러나 광해군의 이러한 정책은 민중과 대북 이외의 서인과 다른 파벌, 다른 왕족, 그리고 이중 외교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사대주의자 등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1623년 2월 12일, 광해군은 자신의 조카인 령양군과 서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나 폐위되었다. 서인 세력은 대북 세력을 궁궐에서 축출하고 령양군을 추대하여 인조로 즉위시켰다. 이 사건을 인조 반정이라고 한다.
인조와 서인(西人)은 쿠데타 이후 대북파(大北派)를 숙청하여 북인(北人) 세력은 소북파(小北派)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소멸되었다. 그리고 서인을 주(主)로, 남인(南人)을 부(副)로 하는 당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인조 즉위 직후인 1624년에는 이적(李适)의 반란 사건(이적의 난)이 발생하여 인조가 한때 한성(漢城)에서 피난해야 했고, 북방의 정규군을 반란 진압에 투입해야 했다. 외교 정책은 명(明)과 후금(後金)의 이중 외교에서 명에 친하고 후금에 등을 돌리는 친명배금(親明背金) 외교를 전개했으나, 이 정책은 역효과를 낳았다. 이중 외교를 파기당한 후금은 1627년 3만의 병력으로 조선에 침입하였다(정묘호란). 조선은 후금군의 파죽지세에 패배를 거듭하였고, 인조는 한때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 후 조선의 저항으로 전황이 교착되자, 해결책을 찾지 못한 조선과 조선을 통해 명과의 교역을 유지하려는 후금은 강화에 응했다. 그러나 후금이 제시한 조건에 대해 주전파(主戰派)의 척화론(斥和論)과 주화파(主和派)의 주화론(主和論)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미 후금과 싸울 여력이 없었던 조선은 결국 강화를 받아들이고, 후금을 형(兄), 조선을 동생(弟)으로 하는 조건을 받아들여 이후 조선은 후금에 결코 적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강화하였다(정묘약조). 강화가 성립되자 후금군은 일단 철수하였다. 이후 인조는 국방 대책을 재검토하여 북방과 연안 지역의 방위력을 강화하고, 1628년 표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Jan Janszoon Weltevree)로부터 대포를 도입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1636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조선에 대한 청에의 복종과 조공, 그리고 명에 파병할 병사 3만 명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척화론이 득세하여 이 요구를 거부하자, 같은 해 청은 태종(太宗)(홍타이지)가 직접 12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조선에 침입하였다(병자호란). 조선은 남한산성에 농성하였으나, 성내의 식량은 5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그 안에서 주전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45일 만에 항복하였고, 청군과 화의를 맺었다.
정축약조(丁丑約条)가 체결되었는데, 이 화의의 내용은 명(明) 연호 사용 중지, 청(清)에 대한 복종, 명으로부터 받은 조선왕 임명 인장을 청에 넘길 것, 명과의 단교 및 청에 대한 제압 협력 명령, 매년 청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 파견, 조선왕 장남·차남과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매년 막대한 배상금 지불, 청의 허락 없이 성곽을 증축·수축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11개 항에 달하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다.[170] 광해군 시대의 실리 외교에서 전환하여, 힘도 없이 후금(後金)에 저항하다 패배한 조선왕 인조(仁祖)는 청 황제 홍타이지(洪太極)에게 삼궤구고두의례(세 번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행하는 치욕을 겪었다.[171] 홍타이지는 자신의 “덕”과 인조의 “잘못”, 그리고 양자의 맹약을 보여주는 비문을 만주어·몽골어·한어로 돌비에 새겨 1639년 항복의 땅인 삼다도(三田渡)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다.
약 50만 명의 조선인이 청에 끌려갔다. 특히 청으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은 청나라 남성들의 성노예가 되어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기도 했다. 고생 끝에 고국인 이씨조선으로 돌아와도 “환향녀(還郷女)”라는 욕설을 들었다.[171]
이씨조선이 청 황제를 중심으로 한 책봉 체제·청에 대한 속국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청전쟁(日清戰爭)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된 1895년까지 이어진다. 삼다도의 굴욕으로 인조는 오히려 “반청친명(反清親明)” 노선을 강하게 내세워 멸망 직전의 명에 더욱 사대(事大)하게 되었다.
정치·경제·외교 모두 극도의 혼란기에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송시열·송준길 등의 학자를 배출하고, 조선 주자학인 성리학의 큰 발전이 있었다. 한편 이러한 주자학은 당쟁을 부추겼다.
인조는 화폐경제의 재건을 도모했다. 조선에서는 화폐 재료인 구리를 일본에 의존했기 때문에, 경장의 역(慶長の役) 이후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인조는 화폐로서 가치를 잃은 “조선통보” 대신 “상평통보”를 유통시켜 화폐 경제의 유통을 촉진하려 했으나, 후의 두 차례의 호란 등으로 인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다시 충분한 양의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678년 숙종 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다음 세대인 효종 시대에 들어서면서 반청론은 더욱 고조되었고, 북벌론이 제기되면서 군비 증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청을 정벌할 기회는 오지 않은 채 북벌은 무산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 제국이 만주 북부의 흑룡강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 청의 요청에 따라 정벌을 위한 원군을 파병(1654년과 1658년의 나선정벌)하였다(청로국경분쟁).
청의 중국에서의 패권이 확립된 18대 현종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으로는 평온한 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발달한 조선 주자학이 화근이 되어,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에 의한 예론(禮論)이라 불리는 조정 의례에 관한 논쟁을 원인으로 하는 정쟁이 정국 혼란을 초래했다. 그중에서도 상복 기간에 대한 논쟁에서 서인이 승리하고 남인은 세력을 잃었다(기해예송). 현종은 끝없는 이 논쟁을 멈추게 하기 위해 1666년에 상복 기간에 대한 규정을 정하고, 이 이상 논쟁을 일으킨 경우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상복 기간 논쟁이 일어나, 이번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갑인예송).
4. 3. 조선 후기 (18세기 초 ~ 19세기)
조선은 후기에 들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공명첩 발행 등으로 신분제가 흐려졌고,[251] 지방 양반 상당수는 몰락하여 잔반(殘班)이라 불렸다.[252] 상평통보 유통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재력 있는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여, 19세기 초 양반 인구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253] 이들은 부역과 군역 면제를 위해 양반으로 등록하고자 하였다. 노비 출신 후손이 양반으로 등록된 경우도 있었다.[25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약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실학이 등장하였다. 초기 실학자들은 사회 재건을 위해 제도 개혁과 농업 기술 향상을 주장했다.[35] 김육의 개혁은 국가 재정과 농민 삶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예송 논쟁은 국왕도 성리학적 예법에 종속된 존재임을 확인하며 관료제를 공고하게 했다.[255] 숙종 시기 붕당은 전형적인 정치 형태로 굳어졌고, 숙종은 환국을 통해 정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256] 장희빈의 등장과 죽음은 이러한 정치 상황과 관련 있었다.[257] 숙종 즉위 시기 붕당은 노론 중심으로 변화했고, 경종 시기 연잉군(훗날 영조)의 왕세제 책봉으로 절정에 달했다.
숙종 시대에는 당쟁이 격화되었고, 숙종은 이를 역이용하여 환국 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35][36]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숙종은 대동법 확대와 상평통보 주조 등 사회, 경제 안정에도 힘썼다. 한편, 일본과의 울릉도 영유권 분쟁에서 에도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제시하여 노론을 견제했다.[258]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즉위하여 벽파와 시파로 나뉜 정국에서 왕권 강화형 탕평책인 준론 탕평을 실시, 붕당 정치를 재편했다.[259] 호락논쟁은 또 다른 갈등 요소였다.[260]
영조는 당쟁 억제를 위해 탕평책을 실시, 각 당파를 균형 있게 등용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탕평책을 확대, 네 당파를 균등하게 등용하려 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강화했으나, 각 당파는 세자 문제 등을 이용해 주도권을 꾀했다. 1762년 장헌세자 (사도세자) 사건 이후 조정은 벽파와 시파로 분열되었다. 한편, 1763년 조선 통신사가 고구마를 들여와 기근 대책으로 활용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등용했으나, 1780년 왕비 독살 미수 사건으로 홍국영을 축출하고 문화 정치를 실시, 실력 위주 인재 등용 정책을 폈다. 정조는 벽파보다는 시파에 가까웠으나, 당쟁은 계속되었다. 천주교 유입은 당쟁의 쟁점이 되었고, 1791년 신해박해가 발생했다. 1795년 중국인 신부 밀입국 사건으로 탕평책은 붕괴되고, 남인은 숙청되었다.
19세기 세도정치가 들어서며 붕당 정치는 종결되었다. 세도정치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특정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며 부작용을 낳았다.[261] 안동 김씨[262], 풍양 조씨[263] 등이 세도 가문이었다. 60여 년간 지속된 세도정치 시기 조선은 많은 문제에 봉착했고,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 집권으로 혁파되었다.[264]
1800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며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1804년 순조 친정 시작 후 김조순 중심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42] 이들은 요직을 독점하고 왕위 계승에 개입했다. 권력 집중으로 정치는 혼란해지고 부정부패가 만연,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어 농민 반란이 빈발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은 대규모 반란이었으나 1812년 진압되었다.
조선 후기는 위기 고조 시기였다. 이양선 출몰로 서구 제국주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고,[265] 소빙기 영향으로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 등 기근을 겪었다.[266] 삼정의 문란과 임술농민봉기 등 민란이 지속되었다.[267]
내부 문제 해결 시도는 실학 연구, 서학 수용, 동학 수립 등으로 전개되었으나, 동학 농민 혁명이 실패하고,[268] 외부 문제인 서양 접근에 대한 갈등은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져 위정척사파 등장 배경이 되었다.[269]
1863년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며 쇄국정책을 펴고 천주교를 박해,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하고, 1862년-1864년 동학 농민군 봉기를 진압했다.[43] 조세 제도 개혁으로 백성 부담을 줄이고, 1871년 신미양요를 겪었다.

1873년 고종 친정 후 명성황후가 권력을 잡고 여흥 민씨를 등용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고, 1885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이 있었다.[44]
left 서울]]

1881년 별기군 창설 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일본 공사관이 공격받고 왕비가 피신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점령, 전주에 도달하자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은 왕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부를 세워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명성황후는 일본 간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중국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되었다.[45][46]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 일본 요원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왕비를 살해했다.[46]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패배를 인정, 조선 독립을 보장했고,[47] 일본은 조선 패권을 장악했다.
대외 관계는 명나라 조공국 시대, 청나라 예속 시대, 러시아 제국과 대립 시대로 나뉜다. 첫 시대 말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사회가 변화했다. 두 번째 시대에는 소중화사상, 사대주의, 중화사상 등이 주자학 발달과 함께 보수 유학자 중심으로 뿌리내렸다. 유교 내 개혁적 실학 사상과 서학 등이 등장, 지배층 공격을 받았으나 개항 후 개혁 운동 모체가 되었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과 일본 개입이 발생,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로 청 책봉 관계가 소멸, 일본 영향하에 놓였다. 그러나 국내는 러시아와 일본 대립, 파벌 대립으로 혼란했다. 친일파는 친러파, 양이파 방해를 받았고, 근대화론자도 친일, 친러, 양이파로 나뉘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러일 전쟁 후 일본 영향력 강화로 친일파 힘이 커졌다. 일본과 이완용 등은 대한제국 보호국화, 합병을 추진했고, 일진회는 "한일합방"을 주장했다. 1910년 대한제국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1845년 영국 군함이 제주도 해역에 침입, 1846년 프랑스 해군이 천주교 박해 항의, 1854년 러시아 예핌 푸차친이 거문도에 상륙, 철종에게 개항 요구 친서를 전달하는 등 서구 열강 간섭이 시작되었다.
안동 김씨 섭정정치는 왕권 약화와 혼란을 초래했다. 1863년 고종 즉위까지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은 왕권 회복을 꾀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안심시키고, 철종 사망 후 신정왕후와 꾀하여 아들을 고종으로 즉위시키고 섭정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타파, 당파 문벌 불문 인재 등용, 부패 관료 처벌, 세제 개혁을 했다. 척왜 정책으로 1866년-1872년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으나 격퇴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후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군이 강화도를 점령했으나, 흥선대원군 개항 거부로 철수했다.
1873년 고종 친정 선포 후 명성황후 일파가 흥선대원군을 축출, 여흥 민씨 섭정 정치가 시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정치 복귀 운동을 벌였다.
1875년 운요호 사건 후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민씨 정권은 개국 정책으로 전환, 1882년 미국, 중국, 1883년 영국, 독일, 1884년 러시아, 이탈리아, 1886년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맺었다. 개화파와 척사파 대립이 심화되었다.
일본 고문 초빙, 신식 군대 편성을 시도했으나, 구식 군대 차별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흥선대원군과 척사파 선동, 일본 공사관 방화, 일본인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민비는 청나라 원세개에 의지, 군대를 제거하고 대원군은 보정부에 유폐되었다.[172] 제물포 조약 체결 후,[172] 일본군 조선 주둔이 허용되었다. 민씨 정권은 친청 정책으로 전환, 묄렌도르프가 외교 고문으로 추천되었다. 사대당이 권력을 장악, 개화파와 대립, 친일 개화파는 고립되었다.[172] 1884년 개화파 쿠데타(갑신정변)는 청군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173] 갑오개혁은 좌절되고, 청 영향력이 증대되었다.[173] 1885년 거문도 사건 발생,[174] 원세개가 조선 정부 감시를 강화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발생, 민씨 세력은 청에 원군 요청, 일본도 개입, 농민과 화의했으나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주둔했다. 일본은 민씨 세력 축출, 대원군에게 정권, 김홍집이 실권,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일본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은 청과 관계를 끊고 독립국이 되었으나, 러시아에 접근, 친러 정책을 폈다. 1895년 을미사변 발생,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권 실추, 일본과 러시아 세력 다툼을 초래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 연호를 광무로 정했다.
가와야 겐이치는 시모노세키 조약이 아닌, 조선 종속 관계 파기로 이씨조선이 ‘독립’했다고 주장한다. 서구 열강 개국 요구에 조선이 청에 협상 위임, 종속 관계 강화, 열강 조약도 청 지도하에 이루어졌고, 조선 ‘독립’ 실현 결과, 열강이 청을 신경 쓰지 않고 조선 진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75]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일본 승리,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 우월권 인정, "일본이 한국에서 군사적, 경제적 탁월 이익, 지도, 보호, 감독 조치"를 인정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보호국이 되었다. 일본은 외교권, 내정, 재정에 영향력,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퇴위, 순종이 즉위했다.
1906년 일본 한국통감부 설치,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 일본 정부 내 병합파, 반대파 논쟁, 이토는 반대:
# 보호국 상태로도 지배 가능, ‘한국 독립 부강’ 명분 유지 이익
# 재정 지출 증가, 국내 산업 육성 우선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후, 일진회 한일합방 요구 성명, 합방파 우세, 한국 병합, 대한제국 멸망이 결정적 국면, 일본 정부, 일진회, 이완용 등 친일 합방파 협상, 1910년 대한제국 병합 조약 체결, 대한제국 일본 일부, 조선반도 국가 소멸, 한국 황족 일본 황족 대우(왕공족(王公族)), 엄벌 처치는 없었다.
대한제국 멸망, 일본 병합 직후, 3·1 운동 발생,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5. 정치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 운영되었다.[270] 조선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 군주였으며 왕권과 신료의 권한이 긴장과 타협 속에서 조정되어 국정에 반영되었다.[271] 조선의 정치 체계와 구조는 《경국대전》으로 집대성되어 관료 체제가 규정되었고[272] 다양한 층위의 논쟁과 갈등 속에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주요 갈등은 국왕과 신료들 사이의 권력 형성을 두고 일어났고 중기 이후 사림파의 등장은 붕당 정치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후기의 호락논쟁과 같이 성리학의 이해에 대한 학문적 차이에서부터 붕당의 인맥과 실제 정치적 쟁점이 뒤섞인 독특한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었다.[273]
== 왕권과 신권 ==
조선은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며 신료의 영향력 또한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274] 양반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관료제는 국왕과 신료들의 통치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규정되었다.[275] 국왕은 절대적인 전제 군주로 존중되었으며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 조선은 건국부터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276] 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고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도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210] 이후 세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다.[277] 조선은 전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 각각의 정치 쟁점과 지형이 변화를 겪었으나 왕권과 신권의 긴장과 타협은 지속적인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c9b192cf_59685fe6.jpg|thumb|경복궁에 있는 조선 국왕의 봉황좌
배경 그림은 이르워로봉도입니다.]]
조선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권력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랐다. 국왕은 경국대전 및 유교적 가르침에 구속되었다. 국왕은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지만, 신하들은 국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의무도 있었다. 자연재해는 국왕의 잘못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선 국왕들은 자연재해에 매우 민감했다. 심각한 가뭄이나 일련의 재해가 발생하면 국왕은 종종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비판을 구했다.
국왕과 일반 백성 간의 직접적인 소통은 상언(상언/上言한국어)이라는 서면 청원 제도와 격쟁(격쟁/擊錚한국어)이라는 구두 청원 제도를 통해 가능했다. 격쟁 구두 청원 제도를 통해 백성들은 궁궐 앞이나 국왕의 행차 중에 북이나 징을 쳐서 자신의 불만을 호소하거나 국왕에게 직접 청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조선 사회의 문맹자들도 국왕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1,300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48][49][50]
조선 건국 이후 정치의 중심이자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국왕이었으며, 왕위는 완전한 세습이었으나, 실제로 왕을 움직인 것은 조정과 왕비를 배출하는 유력한 양반 가문인 외척이었다. 이러한 구도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더욱이 외척은 당쟁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 관료제 ==
조선의 정치는 관료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러한 관료는 주로 과거 제도를 통해 선발되었다.[278] 과거는 문과[279], 무과[280], 그리고 각종 기술직을 뽑는 잡과[281]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는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폐지되었다.[282]
관료 선발에는 과거 제도 외에도 천거, 음서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선발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음서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는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283]
등용된 관리들은 직위에 따라 종9품에서 정1품까지 18단계에 이르는 품계가 주어졌다.[284]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는 작위가 수여되는 봉작이 있어 남성 왕족은 군, 대군 등의 작위가, 여성 왕족은 공주, 옹주 등의 작위가 주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부원군의 작위가 주어졌다. 공신에게도 군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세습되지는 않아 고려 시대의 귀족 신분과는 성격이 달랐다.[285]
관리의 직급 상승은 과거 시험이나 추천을 통해 이루어진 후 왕의 임명으로 결정되었다. 정1품부터 정3품까지의 관리는 붉은 옷을, 종3품부터 종6품까지는 파란 옷을, 그 이하는 녹색 옷을 입었다.[56] 정1품, 정2품, 종1품 관리는 ‘대감’(大監)이라는 경칭으로 불렸고, 종2품과 정3품 관리는 ‘영감’(令監)이라는 경칭으로 불렸다.[57] 붉은 옷을 입은 관리들을 당상관(堂上官)이라 총칭했으며, 이들은 국정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여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나머지 계급의 관리들은 당하관(堂下官)이라 불렸다.
관의 상하 관계는 중국을 본받은 관품제를 채택하였다. 각 관직에는 해당하는 품계가 정해져 있었고, 품계는 일품을 최고위로 하여 구품까지 9계급으로 나뉘었다. 각 품계에는 정과 종의 구분이 있어 정일품 관직이 최고위, 종구품 관직이 최하위였다. 그중 정삼품은 당상과 당하로 나뉘었고, 당상관은 왕궁에 들어가 왕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관은 종이품 이상이며, 품계에 따라 주거, 의복(종삼품까지: 붉은 관복, 정사품~종육품: 푸른 관복, 정칠품~: 녹색 관복), 탈 것 등에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관직은 늘 변화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정리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세조 시대의 『경국대전』을 통해서이다.
관직은 크게 내부 기관인 여관의 내명부와 외부 기관인 경관직 및 외관직으로 나뉜다. 왕족 여성, 공신, 문무관의 부인에 대한 관위(외명부에 속함)도 있었으나 명목상의 것이었다. 그 외에는 중국 사절의 응대를 담당하는 비상근직 명예직 봉조하, 궁궐의 내시를 담당하는 내시부(대개 환관이 직무를 맡아 왕의 곁을 시중들었음), 잡역에 종사하는 잡직 등이 있었다.
왕조에 봉사하는 여러 관직은 과거를 통해 선발되었는데, 문관은 문과, 무관은 무과를 통해 선발되었고, 무관은 문관에 비해 항상 지위가 낮게 여겨졌다. 또한, 중인 계급이 맡을 수 있는 기술직은 더욱 낮은 위치에 있었고, 잡과를 통해 선발되었다. 특히 이씨조선 초기 왕자들의 사병에 의한 다툼 이후에는 무관과 군사에 대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또한 각 관부에는 관직과 관위의 상한선이 있어 정해진 품계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왕족은 종실이라 불리며, 자동적으로 경관직인 종친부에 속했다. 종실도 일반 관직과 마찬가지로 정일품이 최고위였으나, 왕의 자녀(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는 위계 제도 위에 있어 품계를 가지지 않았다. 가장 높은 관직은 군이라 불리며, 정일품~종이품이 주어졌다. 외척과 공신 등도 충훈부에 속하며 최고위인 정일품 관직이 자동으로 주어졌다. 충훈부의 최고위는 부원군이며, 다음이 군이다.
행정의 최고 기관은 의정부이며, 기본적으로 문관만이 맡을 수 있었다. 의정부의 최고위는 정일품 영의정이며, 그 아래에 역시 정일품 좌의정과 우의정이 있었다. 다른 정일품 관직에는 각원, 각부의 도제조, 영사 등이 있다. 육조의 대신이나 다른 관아 장관의 직무를 담당했던 정이품 판서를 보좌하는 것은 종이품 참판이나 정삼품 당상 참의였다.
한편, 조선의 관료제 제일 하부에는 아전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급료 없이 근무하였고 과거 시험의 응시가 제한되어 중인 계급을 형성하였다.[286]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실시를 위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지위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국가의 급료가 없는 향리는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함께 읍, 리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에 자신의 몫인 읍징분(邑徵分)을 수취하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향리의 이러한 추가적인 수취는 규정에 없는 임의적인 행위였지만 관행으로서 용납되었다.[287] 조선 후기에 이르러 향리의 이러한 수탈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288]
== 붕당정치 ==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는 훈구파를 퇴출시키고 붕당을 형성하여 붕당 정치를 이끌었다. 붕당은 동인과 서인의 분화로 시작되어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화되었고,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와 시파가 생기기도 하였다.[289]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인사권 장악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양반 인구 증가와 관직 수 부족, 정책 대립 등이 배경에 있었다.[290] 왕권 약화 또한 붕당 정치 발생의 한 원인이었는데, 반정으로 추대된 왕은 반정공신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민심 이반을 달래기 위해 신료와 타협해야 했다.[210]
사림은 선조 시대에 정권을 장악한 후 정치적, 철학적 스승에 따라 동인(이황, 조식)과 서인(이이, 성혼)으로 분열되었다.[22][23]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24] 당파는 유교 철학에 대한 해석 차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25] 권력 교체는 반역 혐의와 유혈 숙청을 동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초래했다.
정여립의 난 (1589년)은 대표적인 유혈 숙청 사례이다. 동인 정여립은 군사 훈련 단체를 결성했으나, 반란 음모 혐의를 받았다. 정철은 이 사건을 조사하며 동인들을 숙청했고, 1000명이 넘는 동인들이 사망하거나 유배되었다.
1567년 선조 즉위 후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했지만, 1575년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하여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당파 분열은 정국 혼란을 야기했고, 왕들은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이 사후,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이 30년간 정권을 장악했다. 동인은 강경파 이산해 중심의 북인과 온건파 우성전 중심의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왕은 절대적 권력을 가졌고 왕위는 세습되었으나, 실제로는 조정과 외척이 권력을 행사했다. 외척은 당쟁과 깊이 관련되었다.
조선 역사는 당쟁의 역사이며, 당쟁은 조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여겨지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권 교체는 대립 파벌의 허위 모반 고발과 숙청으로 이어졌고, 많은 옥사가 발생했다. 주요 원인으로는 미약한 왕권, 도덕적 비난 중심의 당쟁, 유교(특히 주자학)의 영향 등이 꼽힌다.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을사사화(1546년) 등이 당쟁의 전조로 지적된다. 선조 즉위 후(1568년) 당쟁은 정치적 색채를 띠었고, 심의겸 중심의 서인과 김효원 중심의 동인이 대립했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서인과 함께 삼색이라 불렸다. 광해군 14년(1622년)까지 동인이, 인조 1년(1623년)부터 현종 15년(1674년)까지 서인이 정권을 다투었다. 숙종 대(1675~1720)에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이 있었고, 숙종 6년(1680년)까지 남인이 주류였으나, 숙종 20년 이후 서인이 권력을 잡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영조 1년(1725년)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고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 통치 기구 ==
조선의 통치 기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서울의 중앙 관청(경관직)과 지방의 행정 조직(외관직)으로 구성되었다.[291][292] 통치 기구는 수행 임무에 따라 국왕 직할 부서, 의정부 관할 부서, 지방 행정 부서로 나눌 수 있다.[291][292]
국왕은 통치 기구의 최상위에 위치하며, 그 아래 의정부가 최고 심의 기관으로 존재했다.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모두 종1품으로 최고위직 관리들이었다.[58] 의정부의 권력은 왕권과 반비례하여, 왕권이 강할 때는 주로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육조는 조선 시대 최고 행정 기구로, 각 조의 장관인 판서(종2품)와 차관인 참판(종2품)으로 구성되었다. 육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나뉘며, 각 관청은 현재 광화문광장이 있는 육조 거리에 위치했다.
- 이조(吏曹): 관료 임명을 담당.
- 호조(戶曹): 세금, 재정, 인구 조사, 농업 및 토지 정책 담당.
- 예조(禮曹): 의례, 문화, 외교, 과거 시험 담당.
- 병조(兵曹): 군사 문제 담당.
- 포도청(捕盜廳): 치안 담당.
- 형조(刑曹): 법률 집행, 노비 제도, 형벌 담당.
- 공조(工曹): 산업, 공공 사업, 제조업, 광업 담당.
삼사는 왕과 관료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관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한다.
- 사헌부(司憲府): 관리 감찰, 공공 도덕 및 유교 관습 진작, 백성의 억울함 해결.
- 사간원(司諫院): 왕의 잘못된 행동이나 정책에 대해 간언.
- 홍문관(弘文館): 왕실 도서관 관리, 유교 철학 연구, 왕의 질문에 답하는 연구 기관 역할.
이 외에도 왕과 육조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승정원, 한성(현 서울)의 운영을 담당하는 한성부, 왕의 직속 기관으로 조사와 집행을 담당하는 의금부[58], 관청 및 역사 기록을 작성, 편찬, 보관하는 춘추관[59], 미래의 관료를 양성하는 성균관 등이 있었다.
지방 행정 조직은 전국을 팔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각 도에는 종2품의 관찰사가 파견되었고, 도 아래에는 부, 군, 목, 현 등의 하위 행정 구역을 두었다. 각 하위 행정 구역의 수령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되어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이루었다.[293]
[[File:null|350px|right|thumb|'''팔도의 위치'''
- '''경기도''': 돈의문 밖에 있다가 수원으로 이전
- '''충청도''': 충주 (감영 이전에 따라 충공도, 공청도 등으로 명칭 변경)
- '''경상도''': 상주
- '''전라도''': 전주
- '''강원도''': 원주
- '''평안도''': 평양
- '''황해도''': 해주
- '''함경도''': 함흥 (함길도에서 명칭 변경)
]]
《경국대전》은 수령의 임기를 5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교체 시기가 더 짧았다.[294]
관직의 상하 관계는 중국을 본받은 관품제를 채택하였다. 관직에는 품계가 정해져 있었고, 일품부터 구품까지 9계급으로 나뉘었으며, 각 품계에는 정과 종의 구분이 있었다. 정삼품은 당상과 당하로 나뉘었고, 당상관은 왕궁에 들어가 왕과 대면할 수 있었다.
5. 1. 왕권과 신권
조선은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며 신료의 영향력 또한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274] 양반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관료제는 국왕과 신료들의 통치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규정되었다.[275] 국왕은 절대적인 전제 군주로 존중되었으며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 조선은 건국부터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276] 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고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도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210] 이후 세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다.[277] 조선은 전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 각각의 정치 쟁점과 지형이 변화를 겪었으나 왕권과 신권의 긴장과 타협은 지속적인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c9b192cf_59685fe6.jpg|thumb|경복궁에 있는 조선 국왕의 봉황좌
배경 그림은 이르워로봉도입니다.]]
조선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권력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랐다. 국왕은 전통, 이전 국왕들이 설정한 선례, 경국대전 및 유교적 가르침에 구속되었다. 국왕은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지만, 신하들은 국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국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의무도 있었다. 자연재해는 국왕의 잘못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조선 국왕들은 자연재해에 매우 민감했다. 심각한 가뭄이나 일련의 재해가 발생하면 국왕은 종종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비판을 구했다. 그러한 경우 비판자들은 자신이 말하거나 쓴 내용에 관계없이 기소로부터 면제되었다(몇 가지 예외가 있었지만).
국왕과 일반 백성 간의 직접적인 소통은 상언()이라는 서면 청원 제도와 격쟁()이라는 구두 청원 제도를 통해 가능했다. 격쟁 구두 청원 제도를 통해 백성들은 궁궐 앞이나 국왕의 행차 중에 북이나 징을 쳐서 자신의 불만을 호소하거나 국왕에게 직접 청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조선 사회의 문맹자들도 국왕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1,300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48][49][50]
조선 건국 이후 정치의 중심이자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국왕이었으며, 왕위는 완전한 세습이었으나, 실제로 왕을 움직인 것은 조정과 왕비를 배출하는 유력한 양반 가문인 외척이었다. 이러한 구도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더욱이 외척은 당쟁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조선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이기도 하며, 당쟁은 조선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여겨지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일정한 해석은 없다. 정권 교체는 대립하는 파벌의 허위 모반을 왕에게 고발하여 숙청하는 형태가 많았고, 많은 옥사가 발생했다. 주요 원인으로는 왕권이 미약하여 관료들을 충분히 억압할 수 없었던 점, 당쟁에서 상대의 정책 능력을 지적하기보다는 도덕적 결함이나 문제점을 비난하는 데 집중한 점, 당시 국교적 위치를 차지했던 유교, 특히 주자학의 여러 성격이 정쟁에 이용되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당쟁의 전조로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연산군 4년(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세조의 즉위를 둘러싼 사론 문제에서 비롯된 관료·유림의 대립 항쟁)나 갑자사화(1504년), 을사사화(1546년) 등의 일련의 사화이다. 이른바 사화 시대는 유림 내부의 갈등 성격이 강하지만, 선조 1년(1568년) 선조가 즉위한 이후 당쟁은 정치적 색채를 짙게 띠게 되었고, 당파의 대립도 노골화되었다. 즉, 선조 8년(1575년)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이 대립하였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서인과 함께 삼색(색은 종류라는 의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당쟁은 광해군 14년(1622년)까지 동인이, 인조 1년(1623년)부터 현종 15년(1674년)까지는 서인이 서로 상대를 배척하며 정권을 다투었다. 동서로 나뉜 후 약 1세기 동안, 숙종(재위 1675~1720)대에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이 되었고, 숙종 6년(1680년)까지는 남인이 주류를 차지했으며, 숙종 20년 이후에는 서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영조 1년(1725년)에 개혁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5. 2. 관료제
조선의 정치는 관료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러한 관료는 주로 과거 제도를 통해 선발되었다.[278] 과거는 문과[279], 무과[280], 그리고 각종 기술직을 뽑는 잡과[281]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는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폐지되었다.[282]관료 선발에는 과거 제도 외에도 천거, 음서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선발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음서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는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283]
등용된 관리들은 직위에 따라 종9품에서 정1품까지 18단계에 이르는 품계가 주어졌다.[284]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는 작위가 수여되는 봉작이 있어 남성 왕족은 군, 대군 등의 작위가, 여성 왕족은 공주, 옹주 등의 작위가 주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부원군의 작위가 주어졌다. 공신에게도 군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세습되지는 않아 고려 시대의 귀족 신분과는 성격이 달랐다.[285]
관리의 직급 상승은 과거 시험이나 추천을 통해 이루어진 후 왕의 임명으로 결정되었다. 정1품부터 정3품까지의 관리는 붉은 옷을, 종3품부터 종6품까지는 파란 옷을, 그 이하는 녹색 옷을 입었다.[56] 정1품, 정2품, 종1품 관리는 ‘대감’(大監)이라는 경칭으로 불렸고, 종2품과 정3품 관리는 ‘영감’(令監)이라는 경칭으로 불렸다.[57] 붉은 옷을 입은 관리들을 당상관(堂上官)이라 총칭했으며, 이들은 국정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여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나머지 계급의 관리들은 당하관(堂下官)이라 불렸다.
관의 상하 관계는 중국을 본받은 관품제를 채택하였다. 각 관직에는 해당하는 품계가 정해져 있었고, 품계는 일품을 최고위로 하여 구품까지 9계급으로 나뉘었다. 각 품계에는 정과 종의 구분이 있어 정일품 관직이 최고위, 종구품 관직이 최하위였다. 그중 정삼품은 당상과 당하로 나뉘었고, 당상관은 왕궁에 들어가 왕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관은 종이품 이상이며, 품계에 따라 주거, 의복(종삼품까지: 붉은 관복, 정사품~종육품: 푸른 관복, 정칠품~: 녹색 관복), 탈 것 등에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관직은 늘 변화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정리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세조 시대의 『경국대전』을 통해서이다.
관직은 크게 내부 기관인 여관의 내명부와 외부 기관인 경관직 및 외관직으로 나뉜다. 왕족 여성, 공신, 문무관의 부인에 대한 관위(외명부에 속함)도 있었으나 명목상의 것이었다. 그 외에는 중국 사절의 응대를 담당하는 비상근직 명예직 봉조하, 궁궐의 내시를 담당하는 내시부(대개 환관이 직무를 맡아 왕의 곁을 시중들었음), 잡역에 종사하는 잡직 등이 있었다.
왕조에 봉사하는 여러 관직은 과거를 통해 선발되었는데, 문관은 문과, 무관은 무과를 통해 선발되었고, 무관은 문관에 비해 항상 지위가 낮게 여겨졌다. 또한, 중인 계급이 맡을 수 있는 기술직은 더욱 낮은 위치에 있었고, 잡과를 통해 선발되었다. 특히 이씨조선 초기 왕자들의 사병에 의한 다툼 이후에는 무관과 군사에 대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또한 각 관부에는 관직과 관위의 상한선이 있어 정해진 품계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왕족은 종실이라 불리며, 자동적으로 경관직인 종친부에 속했다. 종실도 일반 관직과 마찬가지로 정일품이 최고위였으나, 왕의 자녀(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는 위계 제도 위에 있어 품계를 가지지 않았다. 가장 높은 관직은 군이라 불리며, 정일품~종이품이 주어졌다. 외척과 공신 등도 충훈부에 속하며 최고위인 정일품 관직이 자동으로 주어졌다. 충훈부의 최고위는 부원군이며, 다음이 군이다.
행정의 최고 기관은 의정부이며, 기본적으로 문관만이 맡을 수 있었다. 의정부의 최고위는 정일품 영의정이며, 그 아래에 역시 정일품 좌의정과 우의정이 있었다. 다른 정일품 관직에는 각원, 각부의 도제조, 영사 등이 있다. 육조의 대신이나 다른 관아 장관의 직무를 담당했던 정이품 판서를 보좌하는 것은 종이품 참판이나 정삼품 당상 참의였다.
한편, 조선의 관료제 제일 하부에는 아전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급료 없이 근무하였고 과거 시험의 응시가 제한되어 중인 계급을 형성하였다.[286]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실시를 위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지위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국가의 급료가 없는 향리는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함께 읍, 리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에 자신의 몫인 읍징분(邑徵分)을 수취하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향리의 이러한 추가적인 수취는 규정에 없는 임의적인 행위였지만 관행으로서 용납되었다.[287] 조선 후기에 이르러 향리의 이러한 수탈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288]
5. 3. 붕당정치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는 훈구파를 퇴출시키고 붕당을 형성하여 붕당 정치를 이끌었다. 붕당은 동인과 서인의 분화로 시작되어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화되었고,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와 시파가 생기기도 하였다.[289]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인사권 장악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양반 인구 증가와 관직 수 부족, 정책 대립 등이 배경에 있었다.[290] 왕권 약화 또한 붕당 정치 발생의 한 원인이었는데, 반정으로 추대된 왕은 반정공신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민심 이반을 달래기 위해 신료와 타협해야 했다.[210]사림은 선조 시대에 정권을 장악한 후 정치적, 철학적 스승에 따라 동인(이황, 조식)과 서인(이이, 성혼)으로 분열되었다.[22][23]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24] 당파는 유교 철학에 대한 해석 차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25] 권력 교체는 반역 혐의와 유혈 숙청을 동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초래했다.
정여립의 난 (1589년)은 대표적인 유혈 숙청 사례이다. 동인 정여립은 군사 훈련 단체를 결성했으나, 반란 음모 혐의를 받았다. 정철은 이 사건을 조사하며 동인들을 숙청했고, 1000명이 넘는 동인들이 사망하거나 유배되었다.
1567년 선조 즉위 후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했지만, 1575년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하여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당파 분열은 정국 혼란을 야기했고, 왕들은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이 사후,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이 30년간 정권을 장악했다. 동인은 강경파 이산해 중심의 북인과 온건파 우성전 중심의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국왕은 절대적 권력을 가졌고 왕위는 세습되었으나, 실제로는 조정과 외척이 권력을 행사했다. 외척은 당쟁과 깊이 관련되었다.
조선 역사는 당쟁의 역사이며, 당쟁은 조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여겨지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권 교체는 대립 파벌의 허위 모반 고발과 숙청으로 이어졌고, 많은 옥사가 발생했다. 주요 원인으로는 미약한 왕권, 도덕적 비난 중심의 당쟁, 유교(특히 주자학)의 영향 등이 꼽힌다.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을사사화(1546년) 등이 당쟁의 전조로 지적된다. 선조 즉위 후(1568년) 당쟁은 정치적 색채를 띠었고, 심의겸 중심의 서인과 김효원 중심의 동인이 대립했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서인과 함께 삼색이라 불렸다. 광해군 14년(1622년)까지 동인이, 인조 1년(1623년)부터 현종 15년(1674년)까지 서인이 정권을 다투었다. 숙종 대(1675~1720)에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이 있었고, 숙종 6년(1680년)까지 남인이 주류였으나, 숙종 20년 이후 서인이 권력을 잡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영조 1년(1725년)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고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木村誠은 "늘 중국의 외압을 받으면서 민족적 성장을 이룬 조선"을 지적했고[176], 義江彰夫는 일본과 조선을 비교하며, 양국 모두 무장 세력이 정권 중추에 등장했으나, 조선은 중앙 정권 내부에서 실권을 장악하는 데 그쳤고, "끊임없는 외압의 유무가 이러한 분기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지적했다.[169]
5. 4. 통치 기구
조선의 통치 기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서울의 중앙 관청(경관직)과 지방의 행정 조직(외관직)으로 구성되었다.[291][292] 통치 기구는 수행 임무에 따라 국왕 직할 부서, 의정부 관할 부서, 지방 행정 부서로 나눌 수 있다.[291][292]국왕은 통치 기구의 최상위에 위치하며, 그 아래 의정부가 최고 심의 기관으로 존재했다.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모두 종1품으로 최고위직 관리들이었다.[58] 의정부의 권력은 왕권과 반비례하여, 왕권이 강할 때는 주로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육조는 조선 시대 최고 행정 기구로, 각 조의 장관인 판서(종2품)와 차관인 참판(종2품)으로 구성되었다. 육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나뉘며, 각 관청은 현재 광화문광장이 있는 육조 거리에 위치했다.
- 이조(吏曹): 관료 임명을 담당.
- 호조(戶曹): 세금, 재정, 인구 조사, 농업 및 토지 정책 담당.
- 예조(禮曹): 의례, 문화, 외교, 과거 시험 담당.
- 병조(兵曹): 군사 문제 담당.
- 포도청(捕盜廳): 치안 담당.
- 형조(刑曹): 법률 집행, 노비 제도, 형벌 담당.
- 공조(工曹): 산업, 공공 사업, 제조업, 광업 담당.
삼사는 왕과 관료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관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한다.
- 사헌부(司憲府): 관리 감찰, 공공 도덕 및 유교 관습 진작, 백성의 억울함 해결.
- 사간원(司諫院): 왕의 잘못된 행동이나 정책에 대해 간언.
- 홍문관(弘文館): 왕실 도서관 관리, 유교 철학 연구, 왕의 질문에 답하는 연구 기관 역할.
이 외에도 왕과 육조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승정원, 한성(현 서울)의 운영을 담당하는 한성부, 왕의 직속 기관으로 조사와 집행을 담당하는 의금부[58], 관청 및 역사 기록을 작성, 편찬, 보관하는 춘추관[59], 미래의 관료를 양성하는 성균관 등이 있었다.
지방 행정 조직은 전국을 팔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각 도에는 종2품의 관찰사가 파견되었고, 도 아래에는 부, 군, 목, 현 등의 하위 행정 구역을 두었다. 각 하위 행정 구역의 수령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되어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이루었다.[293]
[[File:null|350px|right|thumb|'''팔도의 위치'''
- '''경기도''': 돈의문 밖에 있다가 수원으로 이전
- '''충청도''': 충주 (감영 이전에 따라 충공도, 공청도 등으로 명칭 변경)
- '''경상도''': 상주
- '''전라도''': 전주
- '''강원도''': 원주
- '''평안도''': 평양
- '''황해도''': 해주
- '''함경도''': 함흥 (함길도에서 명칭 변경)
]]
《경국대전》은 수령의 임기를 5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교체 시기가 더 짧았다.[294]
관직의 상하 관계는 중국을 본받은 관품제를 채택하였다. 관직에는 품계가 정해져 있었고, 일품부터 구품까지 9계급으로 나뉘었으며, 각 품계에는 정과 종의 구분이 있었다. 정삼품은 당상과 당하로 나뉘었고, 당상관은 왕궁에 들어가 왕과 대면할 수 있었다.
6. 군사
조선은 원칙적으로 15세 이상 60세 미만의 모든 남성에게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실제 운영은 매우 복잡하였다. 군역을 실제로 담당하는 정인과 이들의 군역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는 보인의 편성은 조선의 독자적인 병력 운영방식이었다.[295]
내금위는 왕, 왕비, 그리고 대신들을 호위하는 왕실 근위대였다. 이들은 왕이 직접 선발한 병사들이었다. 왕궁의 문을 지키는 '왕궁수문장'은 궁궐 다섯 곳과 한성의 성문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은 왕실 근위대 부대였다.
== 병력 ==
조선의 양인은 원칙적으로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으며, 만 60세에 종료되었다.[296] 군역을 지는 사람들은 정인과 보인으로 나뉘었는데, 정인은 실제 군역을, 보인은 복무 비용을 부담하였다.[297] 이는 고려 시대 군역전 폐지 이후 병력 유지 비용을 민간에 부담시킨 결과였다.[298] 조선 후기 균역법 시행 이후 군역전이 다시 설치되었으나, 상비군 증가와 국방 비용 증가로 재정은 늘 부족하였다.[299]
조선의 병력은 번상제로 운영되었다.[298] 육군은 8개의 조로 나뉘어 한 번에 2개월을 근무하는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였고, 수군은 2번 1삭상체(二番一朔相遞)로 1년 중 6개월을 근무하여야 했다.[300] 수군 복무 기피로 인해 세력이 없는 양인들이 주로 수군이 되었다.[300] 병역 기피 현상으로 인해 대립(代立)이 성행하고, 국가도 군포를 납부하는 방군수포(放軍收布)를 용인하게 되었다.[301] 양반은 성균관과 향교 유생에 대한 군역 면제 조치, 군포로 무관 명예직을 얻는 방법 등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302]
번상제로 운영되는 병력은 오위나 오군영과 같은 중앙군의 경우 전국에서 상번하는 입번군,[303] 지방의 병영과 수영은 유진군(留鎭軍)을 받아 운영하였다.[304] 중앙군은 상시적인 병력 유지를 위해 직업 군인인 장번군(長番軍)을 운영하였다.[305]
병력 유지 비용은 보인이나 방수군포를 통해 걷는 군포 등으로 충당하였다. 조선 후기 중앙군인 오군영 운영을 위해 삼수미를 별도로 걷었다.[306]
조선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농민 병사, 기병, 편파수(pengbaesu)와 갑사(gabsa) 정예병, 궁수, 총병, 그리고 포병으로 이루어졌다. 왕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는 두 가지 주력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찰 및 상륙 작전에는 소형 선박과 어선도 사용되었다. 국왕은 또한 제독을 임명하였다.
== 편제 ==
조선군의 기초 편제는 초(哨)로 대략 100 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의 예하에는 대(隊)와 오(伍)가 있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집단은 오로 5 명의 병졸로 이루어졌고 6 개의 오가 모인 대는 30 명 규모였다. 3 개의 대가 모여 하나의 초를 이룬다. 초의 지휘관인 초관은 종9품의 무관이었고[307] 예하의 대와 오의 장은 관리가 아니라 일반 병사에서 가려 뽑은 자들이었다.[308]
5개의 초가 모여 1개의 사(司)를 이루었고 사의 지휘관은 종4품의 파총이었다.[309] 다시 4 개의 사가 하나의 군영을 이루었다. 군영의 지휘관인 영장(營將)은 정3품이었다.[310] 조선 전기의 진관제에서는 주요거점에 진을 마련하고 진영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진영장(鎭營將)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수군의 경우 수영을 따로 설치하였고 지휘관은 수군절도사였다.[311]
조선은 초기에 지방의 주요 거점에 진을 설치하고 지역을 방어하는 진관제를 운영하면서 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각 진들이 협력하는 제승방략을 전략으로 삼았다.[205]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시에 침공해 오는 외적을 방어하는데 한계를 겪었고 이후 《기효신서》에 따른 삼수병의 육성과 중앙군의 강화를 추진하였다.[312] 조선 후기 중앙군으로는 훈련도감을 비롯한 오군영을 두었고 각 지에는 속오군을 비롯한 지방군을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조선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각 군은 농민 병사, 기병, 편파수(pengbaesu)와 갑사(gabsa) 정예병, 궁수, 총병, 그리고 포병으로 이루어졌다. 왕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는 두 가지 주력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찰 및 상륙 작전에는 소형 선박과 어선도 사용되었다. 국왕은 또한 제독을 임명하였다.
6. 1. 병력
조선의 양인은 원칙적으로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으며, 만 60세에 종료되었다.[296] 군역을 지는 사람들은 정인과 보인으로 나뉘었는데, 정인은 실제 군역을, 보인은 복무 비용을 부담하였다.[297] 이는 고려 시대 군역전 폐지 이후 병력 유지 비용을 민간에 부담시킨 결과였다.[298] 조선 후기 균역법 시행 이후 군역전이 다시 설치되었으나, 상비군 증가와 국방 비용 증가로 재정은 늘 부족하였다.[299]조선의 병력은 번상제로 운영되었다.[298] 육군은 8개의 조로 나뉘어 한 번에 2개월을 근무하는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였고, 수군은 2번 1삭상체(二番一朔相遞)로 1년 중 6개월을 근무하여야 했다.[300] 수군 복무 기피로 인해 세력이 없는 양인들이 주로 수군이 되었다.[300] 병역 기피 현상으로 인해 대립(代立)이 성행하고, 국가도 군포를 납부하는 방군수포(放軍收布)를 용인하게 되었다.[301] 양반은 성균관과 향교 유생에 대한 군역 면제 조치, 군포로 무관 명예직을 얻는 방법 등으로 군역을 면제받았다.[302]
번상제로 운영되는 병력은 오위나 오군영과 같은 중앙군의 경우 전국에서 상번하는 입번군,[303] 지방의 병영과 수영은 유진군(留鎭軍)을 받아 운영하였다.[304] 중앙군은 상시적인 병력 유지를 위해 직업 군인인 장번군(長番軍)을 운영하였다.[305]
병력 유지 비용은 보인이나 방수군포를 통해 걷는 군포 등으로 충당하였다. 조선 후기 중앙군인 오군영 운영을 위해 삼수미를 별도로 걷었다.[306]
조선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농민 병사, 기병, 편파수(pengbaesu)와 갑사(gabsa) 정예병, 궁수, 총병, 그리고 포병으로 이루어졌다. 왕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는 두 가지 주력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찰 및 상륙 작전에는 소형 선박과 어선도 사용되었다. 국왕은 또한 제독을 임명하였다.
6. 2. 편제
조선군의 기초 편제는 초(哨)로 대략 100 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의 예하에는 대(隊)와 오(伍)가 있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집단은 오로 5 명의 병졸로 이루어졌고 6 개의 오가 모인 대는 30 명 규모였다. 3 개의 대가 모여 하나의 초를 이룬다. 초의 지휘관인 초관은 종9품의 무관이었고[307] 예하의 대와 오의 장은 관리가 아니라 일반 병사에서 가려 뽑은 자들이었다.[308]5개의 초가 모여 1개의 사(司)를 이루었고 사의 지휘관은 종4품의 파총이었다.[309] 다시 4 개의 사가 하나의 군영을 이루었다. 군영의 지휘관인 영장(營將)은 정3품이었다.[310] 조선 전기의 진관제에서는 주요거점에 진을 마련하고 진영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진영장(鎭營將)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수군의 경우 수영을 따로 설치하였고 지휘관은 수군절도사였다.[311]
조선은 초기에 지방의 주요 거점에 진을 설치하고 지역을 방어하는 진관제를 운영하면서 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각 진들이 협력하는 제승방략을 전략으로 삼았다.[205]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시에 침공해 오는 외적을 방어하는데 한계를 겪었고 이후 《기효신서》에 따른 삼수병의 육성과 중앙군의 강화를 추진하였다.[312] 조선 후기 중앙군으로는 훈련도감을 비롯한 오군영을 두었고 각 지에는 속오군을 비롯한 지방군을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조선군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각 군은 농민 병사, 기병, 편파수(pengbaesu)와 갑사(gabsa) 정예병, 궁수, 총병, 그리고 포병으로 이루어졌다. 왕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는 두 가지 주력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찰 및 상륙 작전에는 소형 선박과 어선도 사용되었다. 국왕은 또한 제독을 임명하였다.
7. 경제
조선의 경제는 농업 중심의 자급적 지역 경제를 기반으로 한 가운데 개인 간의 호혜를 바탕으로한 선물과 부조, 국가의 조세 수취와 자원의 공적 분배와 함께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업 경제가 혼재되어 있었다.[313] 이러한 상황은 이전 왕조인 고려가 국제 무역을 비롯한 상업 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점과 비교된다.[314]
경제 활동은 크게 보아 생산과 소비, 그리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교환·유통을 담당하는 상업으로 구분지어 생각할 수 있다. 조선은 중기 이전까지 생산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 체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소비는 많은 부분이 상호 호혜에 의존하였다. 유희춘의 《미암집》에는 별다른 댓가 없이 선물로서 받은 물품이 총 2,855 회 기록되어 있다.[210] 조선의 호혜 경제는 전기에는 개인간의 친분에 의한 선물의 형태로 진행되다가 후기로 들면 계나 향약, 두레 등의 집단에 의한 공동 부조의 성격이 강화되었다.[315]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에도 결혼이나 장례에 부의금을 내는 형태로 한국 문화에 남아있다.[210]
조선은 농업 중심 국가로서 토지는 가장 큰 자산이자 경제 기반이었다. 조선의 국토는 이론적으로 국왕이 최종적인 주인으로서 몰수와 배분 등의 처분을 내릴 수 있었지만 고려 말 공민왕 시기의 과전법으로 사유지가 재분배 된 이후[314] 조선 초까지 매매가 금지되던 토지는 세종 대에 이르러 거래가 인정되었다. 이는 당시 이미 정착된 토지 거래 관행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경작지의 주인인 전주(田主)는 자신의 토지를 국가의 아무런 규제 없이 매각하거나 증여, 또는 상속할 수 있었다.[316]
조선의 공업은 크게 보아 관청에서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제조하며 여유분을 시장에 유통하는 경우와 전문적인 장인이 제작하여 판매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조선은 각종 물품을 제조하는 공장(工匠)을 《공장안》(工匠案)에 등록시켜 관영 수공업 체제로 흡수하였다. 그러나 중기 이후 관청에 등록되지 않은 장인의 생산과 판매를 묵인함으로써 관영 수공업은 점차 민영 수공업 체제로 전환되었다.[317]
조선은 상업 활동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품목은 육의전 등의 시전을 통해서만 공급되었고 사사로이 장사를 하는 난전은 금난전권으로 금지되었다. 금난전권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다가 정조 시기 신해통공으로 폐지되었다.[318] 조선 중기까지 국제 무역은 중국과의 거래는 사신 행차와 함께 동행하는 공무역이 주를 이루고 일본과의 거래는 왜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역관과 같은 관리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319]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공식적 무역 거래는 크게 감소하였고 중국과는 공무역 이외에도 사무역이 성행하면서 경상, 송상, 만상과 같은 상인 조직이 출현한다.[320]
조선은 상업의 비교적 늦은 발달과 현물화폐 사용의 일상화로 주화 역시 후기에 들어서야 일반화 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화폐 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주화를 제작할 구리가 부족한 이유가 컸다. 이러한 문제는 일본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이 개발되어 조선의 구리 수입이 원활해진 뒤에야 해결되었다.[321] 숙종 이후 발행된 상평통보는 조선의 대표적 화폐가 되었다.[322]
조선반도에서는 이씨조선 시대가 되면서 그동안 발전해 오던 경제 발전에 매우 강한 규제가 가해졌다. 조선 왕조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상인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평가가 낮았고, 상품에 대한 가치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본격적인 화폐 제도가 쉽게 정착되지 못하고, 물물교환이나 삼베, 무명, 쌀 등의 현물 화폐로 거래되었다.
제4대 세종 대에 “조선통보”라는 금속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유통량이 적었고,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청의 침입으로 그 전까지 구축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국내 산업 기반이 붕괴되어 의도한 만큼의 효과는 얻지 못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나, 금은 등을 사용한 고액 화폐의 유통은 매우 미미했다. 또한 주조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몰래 구리를 빼돌리고 그만큼 납으로 채웠기 때문에 시중에서 화폐에 대한 신뢰도는 낮았다.[187]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이씨조선 후기인 18세기, 19세기에 상인 계급의 흥기와 부의 축적, 그리고 양반의 지위를 돈으로 매수하는 일 등이 늘어나면서 조선의 상업은 큰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지배층의 유교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간섭이 계속되었고, 양반들이 일반 백성들에게 항상 가혹한 재산 징수를 행했기 때문에 자본 축적이나 자본에 의한 투자가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19세기 초의 기근과 반동 정치 등으로 인해 조선의 상업 발전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다.
이씨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도 물물교환이 중심이었고, 화폐의 유통은 도시 지역에 한정되었다.[177] 개항 후에는 서양, 중국, 일본 등의 은화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대외 무역을 하는 부산 등 항만 지역에서 고액 화폐의 유통량이 증가했지만, 그 이전에는 극단적인 경우 100달러(본위 은화 100枚)에 해당하는 화폐가 조선의 동전으로는 320,000枚이나 되어 운반하는 데 말 한 필이 필요할 정도로[177] 매우 불편을 겪었다. 공업 또한 상업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고용하여 분업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기업은 전혀 발달하지 못했고,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활동에 한정되었다.
이씨조선 시대의 교역은 중국과의 조공 무역, 쓰시마를 경유한 일본과의 교역, 류큐와의 교역이 중심이었다. 중국과의 조공 무역의 주요 수출품은 인삼, 담비 가죽, 해달 가죽, 김, 일본에서 수입한 은 등이었고, 대신 소금, 생사, 비단 등을 수입했다. 쓰시마와의 교역은 중국에서 수입한 생사나 비단, 목화, 인삼, 곡물 등을 수출하고, 대신 은과 구리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쓰시마와의 무역은 18세기 중엽에 정점에 달했고, 금액 기준으로는 일청(日清)·일란(日蘭) 무역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은의 생산량이 급감하자 에도 막부는 중국으로의 은 수출을 규제하는 동시에 자급자족 정책을 장려했기 때문에, 17세기 후반에는 목화가 자급할 수 있게 되었고, 생사, 인삼에 대해서는 18세기 후반에 일본이 자급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조선으로부터의 수출 품목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1750년에는 조선으로의 은 수출 금지령이 에도 막부로부터 발표되어, 쓰시마와의 교역은 이후 제한적인 것이 되었다.
7. 1. 농업
7. 2. 수공업
7. 3. 상업
7. 4. 화폐
8. 교통
조선은 대규모 운송을 수운에 의지하였고 주요 운송수단은 조운선이었다. 육로는 9-10 개의 간선 도로가 있었고 역참을 두어 국가의 통신에 사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9개의 간선 도로가, 《대동지지》에는 10개의 간선 도로가 기록되어 있다.[323]
이름 | 시점 | 종점 | 주요 경로 | 비고 |
---|---|---|---|---|
제1로 연행로 | 돈의문 | 의주 | 한양 돈의문-홍제원-고양-파주-장단-개성-금천-평산-차령-금교-서흥-일수-봉산-동선령-사인암-황주-구현-중화-대동강-평양-순안-숙천-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주-의주 | 중국과의 교통로 |
제2로 관북로 | 흥인지문 | 함경북도 서수라 | 한양-다락원(樓院)-만세교-김화-금성-회양-철령-안변-원산-문천-고원-영흥-정평-함흥-북청-이성(利城)-마운령-마천령-길주-명천-경성-부령-무산-회령-종성-온성-경원-경흥-서수라 | |
제3로 | 흥인지문 | 강원도 평해 | 한성-망우리-평구역-양근-지평-원주-안흥역-방림역-진부역-횡계역-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 | |
제4로 | 숭례문 | 부산 | 한양-한강-판교-용인-양지-광암-달내(達川)-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낙원역(洛原驛)-낙동진(洛東津)-대구-청도-밀양-황산역-양산-동래-부산 | |
제5로 | 숭례문 | 통영 | 한양-한강-판교-용인-양지-광암-달내(達川)-충주-조령-문경-유곡역-함창-상주-비천-성주-현풍-상포진(上浦津)-칠원-함안-진해-고성-통영 | |
제6로 | 숭례문 | 통영 | 한양-동작나루-과천-미륵당-유천(柳川)-청호역(菁好驛, 수원)-진위-성환역-천안-차령-공주-노성-은진-여산-삼례-전주-오수역(獒樹驛)-남원-운봉-함양-진주-사천-고성-통영 | |
제7로 | 숭례문 | 제주 | 한양-제6로-삼례역-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관두량-바닷길 (海路)-제주 | |
제8로 | 숭례문 | 보령 충청수영 | 한양-제6로-소사-평택-요로원(要路院)-곡교천(曲橋川)-신창-신례원-충청 수영 | |
제9로 | 돈의문 | 강화 | 한양-양화도-양천-김포-통진-강화 |
조선은 주요 요지에 역참을 두어 국가에 필요한 육로 교통 시설로 이용하였다. 역참은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 통행인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다.[324] 세조 시기 체제가 정비되어 41 역도에 543 속역이 존재하였다. 역참의 관리를 위해 군역을 대신하는 역민을 두었고 역사를 두어 사무를 보게 하였다. 공무를 위해 움직이는 관리는 마패를 지니고 역참에서 말의 지급과 교환을 요청할 수 있었다.[325]
한반도는 산지가 많아 근대 이전 시기 원활한 육상 교통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많은 양의 곡물을 한 번에 운송하는 것은 수운에 의지하여야 하였다.[326] 조선은 전국의 교통 요지에 조창을 설치하여 인근의 세곡을 저장하고 한양까지는 조운선을 이용하여 운송하였다.[326] 조운선이 이용한 수로는 크게 보아 서해안을 이용하는 해로와 한강을 이용하는 수로가 있었다.[326] 경상도, 전라도의 세곡은 낙동강과 영산강 등을 이용하여 바다로 나온 뒤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다시 한강 하구를 이용하여 한양에 닿았다.[326] 한편 원주, 충주 등의 내륙지는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이루어졌다.[326]
8. 1. 도로
《증보문헌비고》에는 9개의 간선 도로가, 《대동지지》에는 10개의 간선 도로가 기록되어 있다.[323]
이름 | 시점 | 종점 | 주요 경로 | 비고 |
---|---|---|---|---|
제1로 연행로 | 돈의문 | 의주 | 한양 돈의문-홍제원-고양-파주-장단-개성-금천-평산-차령-금교-서흥-일수-봉산-동선령-사인암-황주-구현-중화-대동강-평양-순안-숙천-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주-의주 | 중국과의 교통로 |
제2로 관북로 | 흥인지문 | 함경북도 서수라 | 한양-다락원(樓院)-만세교-김화-금성-회양-철령-안변-원산-문천-고원-영흥-정평-함흥-북청-이성(利城)-마운령-마천령-길주-명천-경성-부령-무산-회령-종성-온성-경원-경흥-서수라 | |
제3로 | 흥인지문 | 강원도 평해 | 한성-망우리-평구역-양근-지평-원주-안흥역-방림역-진부역-횡계역-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 | |
제4로 | 숭례문 | 부산 | 한양-한강-판교-용인-양지-광암-달내(達川)-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낙원역(洛原驛)-낙동진(洛東津)-대구-청도-밀양-황산역-양산-동래-부산 | |
제5로 | 숭례문 | 통영 | 한양-한강-판교-용인-양지-광암-달내(達川)-충주-조령-문경-유곡역-함창-상주-비천-성주-현풍-상포진(上浦津)-칠원-함안-진해-고성-통영 | |
제6로 | 숭례문 | 통영 | 한양-동작나루-과천-미륵당-유천(柳川)-청호역(菁好驛, 수원)-진위-성환역-천안-차령-공주-노성-은진-여산-삼례-전주-오수역(獒樹驛)-남원-운봉-함양-진주-사천-고성-통영 | |
제7로 | 숭례문 | 제주 | 한양-제6로-삼례역-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관두량-바닷길 (海路)-제주 | |
제8로 | 숭례문 | 보령 충청수영 | 한양-제6로-소사-평택-요로원(要路院)-곡교천(曲橋川)-신창-신례원-충청 수영 | |
제9로 | 돈의문 | 강화 | 한양-양화도-양천-김포-통진-강화 |
8. 2. 역참
조선은 주요 요지에 역참을 두어 국가에 필요한 육로 교통 시설로 이용하였다. 역참은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 통행인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다.[324] 세조 시기 체제가 정비되어 41 역도에 543 속역이 존재하였다. 역참의 관리를 위해 군역을 대신하는 역민을 두었고 역사를 두어 사무를 보게 하였다. 공무를 위해 움직이는 관리는 마패를 지니고 역참에서 말의 지급과 교환을 요청할 수 있었다.[325]8. 3. 수운
한반도는 산지가 많아 근대 이전 시기 원활한 육상 교통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많은 양의 곡물을 한 번에 운송하는 것은 수운에 의지하여야 하였다.[326] 조선은 전국의 교통 요지에 조창을 설치하여 인근의 세곡을 저장하고 한양까지는 조운선을 이용하여 운송하였다.[326] 조운선이 이용한 수로는 크게 보아 서해안을 이용하는 해로와 한강을 이용하는 수로가 있었다.[326] 경상도, 전라도의 세곡은 낙동강과 영산강 등을 이용하여 바다로 나온 뒤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다시 한강 하구를 이용하여 한양에 닿았다.[326] 한편 원주, 충주 등의 내륙지는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이루어졌다.[326]9. 사회
wikitext
조선은 왕족, 양인, 천민의 구분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222] 실제로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223] 조선의 신분제는 세부 신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고 직역이 고정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신분제와 달랐고, 별다른 신분 구분이 없던 중국의 제도와도 달랐다. 조선의 신분제는 명시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많은 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327]
양반은 세대를 거듭하여 관료를 담당함으로써 스스로 특권화된 계층으로 혼인, 학연 등을 기반으로 다른 계층과 구분되는 사회 계급을 형성하였다.[328] 중인은 지방의 향리를 비롯하여 의원, 역관 등의 기술직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이들의 신분 상승은 매우 제한적이었다.[329]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양인은 주로 농사에 종사하였으며 각종 세금, 국가 노역, 병역의 부담 등을 떠안았다.[330] 조선의 천민은 관노나 사노비와 같은 노비, 백정, 남사당과 같은 재인(才人) 등이 속했다.[331] 이러한 신분 구분은 갑오경장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332] 사회의 차별은 20세기 초까지도 남아있었다.[333]
조선 사회는 중국식 호적 제도에 의해 사회 계층이 세분화되었다. 소수의 특권 계급은 서로 혼인 관계를 맺고 지주가 되어 과거 제도까지 지배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회였다.[183] 호적상 신분은 초기에는 양민과 천민으로 크게 나뉘었지만, 양민 중에서도 과거를 볼 여유가 있는 계급과 없는 계급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그 결과, 양민은 양반, 중인, 상민의 세 계층으로 세분화되었다. 천민은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고 스스로 없앨 수는 없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승려나 기능공, 상인 등은 상민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다.
사회 계층이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었고, 과거 합격으로 중인에서 양반으로 상승한 일족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에 대한 사회 통제가 느슨해지고, 근대에 가까워질수록 천민층은 격감하고 양반층은 급증하였다. 이는 신분 사칭이나 족보 매매, 조선 정부가 부유한 농민이나 천민에게 관직을 판매하고 그것이 고정화되었다는 것, 노비가 양민의 신분을 얻거나 도망치거나 양반의 고용인이 됨으로써 신분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84]
결혼과 가족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으나 재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첩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은 개인 간의 결합이라기 보다 가문의 결합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아내는 한 명만 인정되었고 중혼할 경우 처벌받았지만, 첩의 경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334] 양반의 경우 결혼은 인생의 주요 통과의례인 관혼상제 가운데 하나였고 가문이 결정한 바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첩을 들이는 것은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본처가 새로 들인 천민 출신의 첩을 살해하는 등 양반 여성의 저항도 상당하였으나 중기인 중종 시기 국가의 강력한 개입으로 이러한 행위가 처벌되면서 처의 반발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335]
첩은 양인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기와 같은 천민을 맞이하고 면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종모법으로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 되었기 때문에 천민 여성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천민으로 등록되었다. 처에게서 태어난 적자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하였다.[336] 첩이 천민일 경우 자식도 천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337]경우도 많았다. 적서차별은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폐단이 끊임없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없어지지 않았다.[338]
조선은 중기를 넘기면서 점점 더 가부장제 모습을 보였다. 조선 초기 양반 사이에서 상속과 제사의 봉행에는 남녀 차별이 없었으나 어느 시점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결혼한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취급되었다.[339] 성리학적 윤리의 강조는 여성이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재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340], 심지어 남편을 따라 죽는 순사(殉死)를 조장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341]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가부장제적 가족 구성은 지역마다 편차가 있었으며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보다 이혼이나 재혼이 자유로기 때문에 조선 전체에 걸쳐 일률적으로 시행되는 강력한 제도는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342]
9. 1. 신분제
조선은 왕족, 양인, 천민의 구분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222] 실제로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223] 조선의 신분제는 세부 신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고 직역이 고정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신분제와 달랐고, 별다른 신분 구분이 없던 중국의 제도와도 달랐다. 조선의 신분제는 명시적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많은 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327]양반은 세대를 거듭하여 관료를 담당함으로써 스스로 특권화된 계층으로 혼인, 학연 등을 기반으로 다른 계층과 구분되는 사회 계급을 형성하였다.[328] 중인은 지방의 향리를 비롯하여 의원, 역관 등의 기술직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이들의 신분 상승은 매우 제한적이었다.[329]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양인은 주로 농사에 종사하였으며 각종 세금, 국가 노역, 병역의 부담 등을 떠안았다.[330] 조선의 천민은 관노나 사노비와 같은 노비, 백정, 남사당과 같은 재인(才人) 등이 속했다.[331] 이러한 신분 구분은 갑오경장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332] 사회의 차별은 20세기 초까지도 남아있었다.[333]
조선 사회는 중국식 호적 제도에 의해 사회 계층이 세분화되었다. 소수의 특권 계급은 서로 혼인 관계를 맺고 지주가 되어 과거 제도까지 지배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회였다.[183] 호적상 신분은 초기에는 양민과 천민으로 크게 나뉘었지만, 양민 중에서도 과거를 볼 여유가 있는 계급과 없는 계급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그 결과, 양민은 양반, 중인, 상민의 세 계층으로 세분화되었다. 천민은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고 스스로 없앨 수는 없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승려나 기능공, 상인 등은 상민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다.
결혼은 개인 간의 결합이라기 보다 가문의 결합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아내는 한 명만 인정되었고 중혼은 처벌받았지만, 첩의 경우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334] 양반의 경우 결혼은 관혼상제 가운데 하나였고 가문이 결정한 바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첩을 들이는 것은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본처가 새로 들인 천민 출신의 첩을 살해하는 등 양반 여성의 저항도 상당하였으나, 중종 시기 국가의 강력한 개입으로 이러한 행위가 처벌되면서 처의 반발은 제한적이 되었다.[335] 첩은 양인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기와 같은 천민을 맞이하고 면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종모법으로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었기 때문에 천민 여성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천민으로 등록되었다. 처에게서 태어난 적자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하였다.[336] 첩이 천민일 경우 자식도 천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337]경우도 많았다. 적서차별은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폐단이 끊임없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없어지지 않았다.[338]
조선은 중기를 넘기면서 가부장제 모습을 보였다. 조선 초기 양반 사이에서 상속과 제사에는 남녀 차별이 없었으나, 이후 여성이 배제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결혼한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취급되었다.[339] 성리학적 윤리의 강조는 여성이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재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340] 심지어 남편을 따라 죽는 순사(殉死)를 조장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341] 그러나 이러한 가부장제적 가족 구성은 지역마다 편차가 있었으며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조선 전체에 걸쳐 일률적으로 시행되는 강력한 제도는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342]
사회 계층이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었고, 과거 합격으로 중인에서 양반으로 상승한 일족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에 대한 사회 통제가 느슨해지고, 근대에 가까워질수록 천민층은 격감하고 양반층은 급증하였다. 이는 신분 사칭이나 족보 매매, 조선 정부가 부유한 농민이나 천민에게 관직을 판매하고 그것이 고정화되었다는 것, 노비가 양민의 신분을 얻거나 도망치거나 양반의 고용인이 됨으로써 신분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84]
9. 2. 가족 제도
조선은 왕족, 양인, 천민의 구분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222] 실제로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223] 조선의 신분제는 세부 신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은 없었고, 직업인 직역이 고정된 것도 아니었다.[327]결혼과 가족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으나 재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첩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은 개인 간의 결합이라기 보다 가문의 결합으로 이해되었고, 공식적인 아내는 한 명만 인정되었고 중혼은 처벌받았지만, 첩은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334] 양반의 결혼은 관혼상제 가운데 하나였고 가문이 결정하였으나, 첩을 들이는 것은 남성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본처가 천민 출신의 첩을 살해하는 등 저항도 있었으나, 중종 시기 국가의 개입으로 처벌되면서 처의 반발은 제한되었다.[335]
첩은 양인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기와 같은 천민을 맞이하고 면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종모법으로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 되었기 때문에 천민 여성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천민으로 등록되었다. 처에게서 태어난 적자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하였다.[336] 첩이 천민일 경우 자식도 천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337]경우도 있었다. 적서차별은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문제로 폐단이 거론되었지만 없어지지 않았다.[338]
조선은 중기를 넘기면서 가부장제 모습을 보였다. 조선 초기 양반 사이에서 상속과 제사의 봉행에는 남녀 차별이 없었으나, 여성이 배제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결혼한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취급되었다.[339] 성리학적 윤리의 강조는 여성이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재혼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340], 남편을 따라 죽는 순사(殉死)를 조장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341] 그러나 이러한 가부장제적 가족 구성은 지역마다 편차가 있었으며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342]
10. 문화
문화는 한 사회의 생활 양식 전반을 일컫는 개념으로[343] 조선 역시 의식주를 비롯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의 문화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한국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344]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로 계속하여 서로 교류하여 상당한 문화적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각자 독자적인 발전을 통한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345]
오늘날 한복의 모습은 조선 후기에 정형화 된 것이다.[346] 조선의 의복은 철릭의 경우와 같이 같은 형태의 옷이라도 시기에 따라 차츰 다른 모습을 보였다.[347] 한식의 경우 보다 다양한 요소들의 혼합과 발전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고추와 같은 외래 향신료가 보급되면서 김치 역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348]
전통적인 주거 공간인 한옥은 지역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여 발전하였다. 추운 겨울이 긴 중부 및 북부의 한옥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집을 짓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고 더운 여름이 긴 남부의 한옥은 일자(一字) 모양의 개방적인 구조에 너른 마루를 지녔다.[349] 18세기와 19세기 조선 후기,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41]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연행사, 즉 조선의 청나라 사신들에 의해 청나라 문화가 조선 사회에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41]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조선 지식인들은 북학론을 주장하며, 조선이 청나라를 통해 청나라와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41] 조선 학자들은 중국의 정교한 건축 기술, 즉 건축 기법, 수레 활용 및 온돌 난방 시스템에 매료되었다.[41] 특히 벽돌에 매료된 북학파는 조선 전역에 벽돌 사용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41] 박지원(1737년생)은 18세기 말 경상도 안의와 서울 계동에 중국식 벽돌 건물을 최초로 건설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41] 청나라 건축 기술 및 기법의 영향을 받은 수원 화성 축조 이후, 청나라식 건축 양식과 기법은 조선 사회에서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41]
조선시대 여성 한복의 저고리는 점차 짧고 꽉 끼는 스타일로 변화하였다. 16세기에는 저고리가 헐렁하고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으나, 19세기에는 가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짧아져 가슴을 가리기 위해 허리띠(heoritti)라는 다른 천을 사용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흥선대원군이 만주식 상의인 마고자를 도입하였는데, 오늘날에도 한복과 함께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치마는 조선 후기 넓은 주름의 치마였고 저고리는 짧고 꽉 끼는 스타일이었다. 치마의 풍성함은 엉덩이 부분에 강조되었다. 원하는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 등 여러 겹의 속옷을 치마 안에 입었다. 저고리가 매우 짧아졌기 때문에, 코르셋과 같은 역할을 하는 허리띠(heoritti) 또는 허리마리(heorimari)가 드러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림에서 저고리 아래 드러난 흰색 삼베 천이 허리띠이다.
상류층은 따뜻한 계절에는 촘촘하게 짠 모시나 기타 고급 경량 소재의 한복을, 나머지 기간에는 무지 또는 무늬가 있는 비단 한복을 입었다. 일반 백성들은 법률과 자원의 제약으로 인해 기껏해야 목면을 사용하였다. 상류층은 다양한 색상을 입었지만, 밝은 색상은 주로 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입었고, 중년 남성과 여성은 차분한 색상을 입었다. 일반 백성은 법에 따라 평상복은 흰색으로 제한되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연분홍색, 연두색, 회색, 숯색 등의 칙칙한 색상을 입었다. 조선시대 남성들은 공식적인 외부 활동 시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루마기라는 외투를 착용해야 했다.
10. 1. 의식주
문화는 한 사회의 생활 양식 전반을 일컫는 개념으로[343] 조선 역시 의식주를 비롯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의 문화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한국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344]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로 계속하여 서로 교류하여 상당한 문화적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각자 독자적인 발전을 통한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345]오늘날 한복의 모습은 조선 후기에 정형화 된 것이다.[346] 조선의 의복은 철릭의 경우와 같이 같은 형태의 옷이라도 시기에 따라 차츰 다른 모습을 보였다.[347] 한식의 경우 보다 다양한 요소들의 혼합과 발전을 보인다. 조선 중기 이후 고추와 같은 외래 향신료가 보급되면서 김치 역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348]
전통적인 주거 공간인 한옥은 지역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여 발전하였다. 추운 겨울이 긴 중부 및 북부의 한옥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집을 짓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고 더운 여름이 긴 남부의 한옥은 일자(一字) 모양의 개방적인 구조에 너른 마루를 지녔다.[349] 18세기와 19세기 조선 후기,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41]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연행사, 즉 조선의 청나라 사신들에 의해 청나라 문화가 조선 사회에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41]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조선 지식인들은 북학론을 주장하며, 조선이 청나라를 통해 청나라와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41] 조선 학자들은 중국의 정교한 건축 기술, 즉 건축 기법, 수레 활용 및 온돌 난방 시스템에 매료되었다.[41] 특히 벽돌에 매료된 북학파는 조선 전역에 벽돌 사용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41] 박지원(1737년생)은 18세기 말 경상도 안의와 서울 계동에 중국식 벽돌 건물을 최초로 건설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41] 청나라 건축 기술 및 기법의 영향을 받은 수원 화성 축조 이후, 청나라식 건축 양식과 기법은 조선 사회에서 더욱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41]
조선시대 여성 한복의 저고리는 점차 짧고 꽉 끼는 스타일로 변화하였다. 16세기에는 저고리가 헐렁하고 허리 아래까지 내려왔으나, 19세기에는 가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짧아져 가슴을 가리기 위해 허리띠(heoritti)라는 다른 천을 사용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흥선대원군이 만주식 상의인 마고자를 도입하였는데, 오늘날에도 한복과 함께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치마는 조선 후기 넓은 주름의 치마였고 저고리는 짧고 꽉 끼는 스타일이었다. 치마의 풍성함은 엉덩이 부분에 강조되었다. 원하는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 등 여러 겹의 속옷을 치마 안에 입었다. 저고리가 매우 짧아졌기 때문에, 코르셋과 같은 역할을 하는 허리띠(heoritti) 또는 허리마리(heorimari)가 드러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림에서 저고리 아래 드러난 흰색 삼베 천이 허리띠이다.
상류층은 따뜻한 계절에는 촘촘하게 짠 모시나 기타 고급 경량 소재의 한복을, 나머지 기간에는 무지 또는 무늬가 있는 비단 한복을 입었다. 일반 백성들은 법률과 자원의 제약으로 인해 기껏해야 목면을 사용하였다. 상류층은 다양한 색상을 입었지만, 밝은 색상은 주로 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입었고, 중년 남성과 여성은 차분한 색상을 입었다. 일반 백성은 법에 따라 평상복은 흰색으로 제한되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연분홍색, 연두색, 회색, 숯색 등의 칙칙한 색상을 입었다. 조선시대 남성들은 공식적인 외부 활동 시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루마기라는 외투를 착용해야 했다.
10. 2. 문학과 예술
문화는 한 사회의 생활 양식 전반을 일컫는 개념으로[343] 조선 역시 의식주를 비롯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의 문화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한국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344] 사회적 관계나 경제의 변화는 문화의 변화를 가져왔다. 시를 짓고 문집을 만드는 일은 조선 초기 및 중기까지 주로 양반의 문화였지만, 후기에 들면 양민들이나 천민들도 문학 활동을 하게 되었다.[350] 서당이 일반화되면서 서민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확산되었고, 한글 소설 등이 널리 유행하면서 독자층도 늘었기 때문이다.[350]
공적인 문화의 중심은 중국어의 문어인 한문이었으며, 주자학을 중심으로 양명학 등을 수용한 조선 고유의 조선주자학(조선성리학)이 발달했다. 한자만으로는 한국어를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1443년에 한글의 기원이 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한글은 한국어 표기에 적합한 합리적인 문자 체계였지만, 중화사상에 지배받던 양반 등 남성 지식인들은 이를 언문(諺文)이라 부르며 멸시하여, 대한제국 말기까지 정식 문자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시대를 통해 민중의 문자로서 하층 계급과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서민들은 이 글자를 사용하여 시와 노래를 기록하고, 또 사적인 문서에도 사용했다. 지식인들 중에서도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조선 왕조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춘향전』 등이 쓰였다. 한글을 사용한 문학에는 한자와 한글을 혼용한 것과 한글 전용의 두 종류가 있으며, 전자는 주로 혁신적인 양반, 중인 계급이 사용했고, 후자는 서민을 위한 문학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공식 문서가 한문으로만 사용되었던 영향으로 표준어 규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 말기인 1907년에 국어연구소가 설립되어 표준어 규정의 정비를 시작했지만, 최초의 표준어 규정인 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이 완성된 것은 대한제국 병합 이후인 1912년이다.
조선 사회의 중상층은 한문에 능숙하였다.[123] 조선의 공식 기록(예: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과 양반 문인들의 저술은 한문으로 작성되었다.[122][123][124] 말기의 ''황성신문''과 같은 신문은 한국어를 사용하여 국한문혼용으로 쓰여졌다.[12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Annals of the Joseon Dynasty)은 1413년부터 1865년까지 조선 시대의 연대기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실록(實錄)은 총 1,89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일 왕조의 연속적인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기간을 포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두 권의 실록을 제외하고,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제151호 국보이며,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의궤'''는 조선 시대의 왕실 의례에 대한 기록으로, 텍스트와 양식화된 그림을 통해 왕실의 중요한 의식과 예식을 기록하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유학자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경향으로 인해 전반기에는 중국 산수화의 모방이었다. 궁중에서도 중국의 화원 제도를 본뜬 도화서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중국 회화를 본뜬 초상화와 의례 기록화 제작에 종사하게 하였다. 후반기에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김홍도와 신윤복이 등장하여 비로소 중국 회화의 모방에서 벗어나, 조선의 풍경을 바탕으로 한 산수화와 조선 민중의 삶을 바탕으로 한 풍속화가 그려지면서 조선 고유의 회화가 성립되었다. 김홍도는 풍속 산수화에, 신윤복은 풍속화와 미인화에 능했다. 또한 조선 민중 사이에서는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민화가 탄생하였다.



조선 중기 회화 양식은 사실주의로의 경향을 보였다. "진경(眞景)"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풍경화 양식이 등장하여, 이상화된 일반적인 중국식 풍경화에서 벗어나 특정 장소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사진처럼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이 양식은 한국 회화의 표준 양식으로 자리 잡을 만큼 학문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중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한국 예술은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고, 전통 중국 회화와는 점점 더 차별화되었다.[120]
도자기는 조선 시대 대중예술의 한 형태였다. 백자, 코발트, 구리 적색 유하, 청화 유하, 철화(鐵華) 유하로 장식된 백자 등이 그 예이다. 조선 시대 도자기는 다른 시대의 것과 달리, 예술가들이 각 작품마다 독특하고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개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점이 특징이다.[121]

10세기부터 한국에서는 백자를 제작해왔다. 역사적으로 청자의 인기에 가려져 있었으나,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백자로도 알려진 백자는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한국 도자기 중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는 큰 백자 항아리이다. 그 형태는 달을 상징하고, 그 색깔은 유교의 순수함과 겸손함의 이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 시기에 왕실의 식사와 궁중 연회를 담당하는 관청은 백자 생산을 엄격하게 통제했다.[121] 청화 백자는 유하 기법으로 천연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백자에 그림과 문양을 장식한 또 다른 인기 있는 조선 시대 도자기이다. 이러한 작품의 상당수는 왕실에 고용된 궁중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시대의 인기 있는 풍경화 양식은 도자기 장식에도 반영되었다.[121] 14세기 중반 중국 경덕진 가마에서 처음 개발된 청화 백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 15세기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코발트가 한국 화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1463년 한국에서 코발트 원료가 발견되었지만, 예술가들과 구매자들은 그 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더 비싼 수입산 코발트를 선호했다. 수입산 코발트로 장식된 한국 도자기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질서 정연하고 검소하며 절제된 삶의 강조와 상반된다.[121] 코발트와는 매우 다른 구리 적색 유하 도자기는 제작 성공률이 가장 낮은 종류이다. 제작 과정에서 숙련된 기술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소성 과정에서 회색으로 변한다. 구리 적색 유하 도자기의 기원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12세기 한국에서 유래하여 조선 후기에 인기를 얻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조선 시대 도자기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인 광주의 분원리 가마를 그 기원지로 지목하기도 한다.[121] 철화(鐵華)로 장식된 도자기도 있었다. 이러한 작품은 일반적으로 항아리나 기타 실용적인 용기들이었다.[121]
조선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음악 형태가 발전했다. 가장 많은 악보가 남아 있는 형태는 시조()이다.[131] 시조는 각각 네 음절로 이루어진 세 줄로 구성된 시가 형태로, 전통적으로 매우 느리게 노래되었다. 한국어 운율에서 음절은 일반적으로 형용사가 있는 명사 또는 부사가 있는 동사와 같은 짧은 구문 단위이다.
어인 | 벌리완대 | 낙락장송(落落長松) | 다 먹는고 |
부리 긴 | 져고리는 | 어느 곳에 | 가 있는고 |
空山에 | 落木聲 들릴제 | 내 안 들데 | 업세라 |
"작은 벌레들이 넓게 퍼진 소나무 전체를 다 먹어치울 수 있을까?"
"긴 부리 나무딱따구리는 어디 있지? 왜 여기 없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면 슬픔을 참을 수 없다.[132]"
여기서 다른 한국 음악 형식과 마찬가지로 각 연(章)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시조는 한국어로 불렸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두와 같은 대체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조를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시조의 최초 기록은 1565년 이황(李滉)이 지은 '도산십이곡'
김천택
판소리()는 노래와 산문을 결합하여 이야기를 묘사하는 또 다른 음악 형식이다. 그 발전은 아마도 무속 의례와 전라도의 노래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완전한 음악 형식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양반 귀족들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원래 12개의 이야기가 불렸지만, 5개만 기록되었고,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 5개만 불린다. 평민들에 의해 발전된 판소리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태도와 열망을 반영했지만, 양반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양반의 감성과 제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판소리는 (각각 12개 이야기 중 하나를 바탕으로 한) 판소리 소설과 고전 소설의 현실성을 높임으로써 당시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탈춤, 판소리와 같은 새로운 문화는 서민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하여 양반들의 것과는 다른 서민들의 바램을 담고 있었다.[350] 조선의 예능은 유교의 천시적인 상업 사상 때문에 도시 문화가 억압되어 농촌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광대(광대)와 기생(기생) 등에 의한 판소리와 같이 민화를 소재로 한 음악과 노래를 곁들인 예능이 성립하였다. 처음에는 농민의 예능으로서 양반 등 지식인이자 지배 계층에 천대받았으나, 그 내용이 문학적으로 세련됨에 따라 양반들 사이에서도 즐기게 되었고, 현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예능으로 보호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에서는 탈춤(탈춤)이라 불리는 가면극과 같은 것은 있었지만, 야외 광장이나 임시 무대에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연극을 위한 극장은 20세기가 될 때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세워진 협률사이다.
다양한 서적 편찬 사업이 국가 정책 사업으로 추진되면서 인쇄술과 제지술이 상당히 발전했다. 제3대 태종(太宗) 때에는 활자(活字)를 만들고 서적 인쇄를 담당하는 관서인 “주자소(鋳字所)”를 설치하여 고려(高麗) 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금속활자를 개량하여 높은 인쇄 효율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서적이 출판됨에 따라 종이의 생산량도 증가하여, 질 좋은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여 다양한 종이를 생산했다.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주자학(朱子学)을 사회적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유교(儒教)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윤리와 예절에 관한 서적을 많이 편찬했다. 제4대 세종(世宗) 때에는 백성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충신, 효자, 효녀의 업적을 기록한 윤리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했다. 또한 제9대 성종(成宗) 때에는 국가의 여러 가지 행사에 필요한 서적을 정비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다. 16세기에는 사림파(士林派)가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을 위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간행하여 보급했다. 『이륜행실도』는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에 대해 지켜야 할 예절을 강조한 윤리서이며, 『동몽수지』는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어린이용 윤리서였다. 이러한 서적들은 모두 이씨조선의 관청인 교서관(校書館)이 발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출판 부수가 극히 적어 이씨조선의 서적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이씨조선에서는 말기까지 서점이 존재하지 않아 서적을 사고팔 수 없었다. 거의 모든 백성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개인이 소유한 서적은 왕으로부터 하사받거나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것, 또는 개인으로부터 양수받은 것이었다.
10. 3. 세시풍속
조선은 여러 절기와 명절에 따른 세시풍속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설날, 정월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의 절기에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다. 이 가운데 몇몇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인의 주요 풍속으로 남아있다.11. 종교
조선 왕조는 유교를 주요 이념으로 삼았으며, 불교도 일정 부분 수용하였다.[126] 유교 학자 관료와 불교도 간의 문예적 교류 연구를 통해 불교가 완전히 배척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27][128][129] 일부 학자들은 공개적으로 불교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의 교류를 통해 최소한 조선 왕조에서 불교가 완전히 배척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선은 유교 왕국 건설에 매진한 결과 유교 문화가 번성했으나,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의 속국이었기에 모든 것이 중국 문화의 축소판이었다.[167] 조선의 문화 정책은 유교의 한 분파인 주자학을 중시하고 불교를 탄압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불교에 귀의했던 탓에 본격적인 폐불 운동은 제3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많은 불교 사찰이 폐쇄되었고, 242개의 사찰만이 국가의 통제 아래 남았다. 제4대 세종 때는 더욱 엄격해져 사찰 수가 더욱 줄었고, 불교 사찰이 소유했던 토지와 노비의 대부분이 몰수되었다. 태종 때 토교 대신 돌다리를 놓게 되었는데, 십이신장의 돌불상을 파괴하여 그 돌을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폐불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폐불에 적극적이었던 세종은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또한 제7대 세조는 유학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불교를 보호하여 한성부에 원각사라는 사찰을 세웠다. 이 사찰은 제10대 연산군 때 파괴되어 기생을 관리하는 건물로 개축되었다. 제8대 예종 때 다시 폐불 정책이 강화되었고, 제11대 중종 시대는 조선 전기 중 불교 탄압이 가장 심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중종의 세 번째 왕후인 문정왕후는 불교를 신봉했고, 중종 사후 외척과 함께 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있던 제13대 명종 시대에는 폐불 정책이 완화되어 불경의 한글 번역이 출판되고 불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이미 완전히 폐불로 기울어 있었고, 불교의 부흥은 실패로 끝났다. 제16대 인조 때 성내에서 승려를 추방하는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조선의 폐불 정책은 완성되었다.
정식 국교라고 할 만한 것은 유교의 주자학이었지만, 토착·민간 신앙으로서의 무속은 음습한 것으로 여겨지고 무녀인 무당(巫堂)이 천민으로 취급되는 등 멸시받았으나 뿌리 깊게 남았다. 섬기는 신은 한국 고유의 것도 있지만, 도교와 불교, 그리고 후에는 기독교의 영향도 보인다.
1800년, 순조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대신 정치를 맡았다. 정순왕후는 탕평책을 완전히 폐지하고 소론의 이권을 우선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탕평책 지지파 세력을 대량 학살하고 소론 요인을 대거 등용하여 소론 정권을 수립했다. 한편, 1801년 왕조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천주교 박해를 강화했다(신유박해()). 이 박해로 천주교 신자와 연루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수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는 이후 1815년, 1827년, 1838년, 1839년(기해박해()), 1846년(병오박해()), 1866년(병인박해(丙寅教獄)) 등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2. 과학 기술
조선 시대는 한국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기였다. 세종의 새로운 정책에 따라 장영실과 같은 천민 출신도 정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장영실은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이자 기술자로서 재능을 보이며 농업을 위한 기계들을 만들었고, 수로와 운하 건설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의 발명품 중에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격루(1434년 장영실 발명)라는 물시계가 있는데, 나무 인형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시각적으로 나타냈다.[137] 이후 더욱 복잡한 장치와 천문 관측 장비가 추가된 물시계와, 고려 시대의 금속 활자를 개량한 것도 있다. 개량된 활자는 품질이 더욱 높아지고 인쇄 속도가 두 배나 빨랐다. 그 외에도 시계(sight glass)와 측우기(우량계, udometer) 등을 발명했다.
조선 시대는 한국 천문학의 전성기였으며, 장영실과 같은 인물들이 해, 달, 별의 위치를 나타내는 천구의와 같은 장치를 만들었다.[137] 후대의 천구의(규표)는 계절 변화에 맞춰 조정되었다. 세종 시대의 천문학 및 역법 발전의 정점은 1442년에 완성된 칠정산이다. 이는 해, 달, 그리고 다섯 개의 가시적인 행성의 궤도를 계산한 것으로,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비롯한 주요 천체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138] 1669년 송이영이 제작한 혼천시계는 직경 40cm의 혼천의를 갖춘 천문 시계로, 시계 장치에 의해 작동하여 특정 시간의 천체 위치를 보여준다.
1402년, 김사형, 이무, 이회가 제작한 강역도는 태종 2년에 만들어진 한국식 세계 지도이다. 중국, 한국, 일본 지도를 종합하여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 발전은 조선 전기에 비해 더뎠다.
의학 분야에서는 고려의 의학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지만, 점차 의료 제도의 개혁, 의학 교육, 전문 의학서 편찬을 통해 동양 의학의 집대성을 이루었다. 한성에는 왕족의 질병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 의학 교육과 의학 인재 선발을 총괄하는 “전의감”, 일반 백성을 무료로 치료하는 “혜민서”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의원”, “의학교수”, “의학교유”, “의학교”, “의학승” 등의 의료 기관을 배치했다. 남성 의사는 여성을 진찰할 수 없었기에 여성을 진찰하는 의녀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기생과의 구분이 모호했다. 조선 시대에 간행된 의학서로는 1433년에 완성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1445년에 완성된 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 1610년에 완성된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있다. 16세기 궁중 의관 허준은 여러 의학 서적을 저술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는 동의보감이 있는데, 이는 한국 전통 의학을 대표하는 저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190][191] 이 책은 중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어 오늘날에도 동양 의학의 고전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1894년에 이제마는 “사상의학”( :ko:사상의학)을 주장했다. 사상의학은 인간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으로, 현재에도 한의학계에서는 통용되고 있다.
최초의 방탄조끼(bulletproof vest, ballistic vest)인 면제배갑(myeonjebaegab)은 1860년대, 병인양요(French expedition to Korea, French campaign against Korea) 직후 조선(Korea)에서 발명되었다. 흥선대원군(Heungseon Daewongun)은 서구 군대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방탄 갑옷 개발을 지시했다. 김기두와 강윤은 두꺼운 면(cotton)이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30겹의 면으로 만든 방탄조끼를 고안했다. 이 조끼는 1871년 미국 해군이 강화도(Ganghwa Island)를 공격했던 신미양요(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때 전투에 사용되었다. 미국 군대는 조끼 하나를 압수하여 미국으로 가져가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 Smithsonian Museum)에 2007년까지 보관했다. 이후 조끼는 한국으로 반환되어 현재 대중에게 공개 전시되고 있다.
13. 외교
## 중국과의 관계
1392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왕으로부터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했다.[73] 조선은 건국 초기, 왕실 혈통이 없다는 점을 정당화하고 외교 관계 및 무역을 위해 중국의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1401년 조선은 천명 사상에 근거하여 중국의 조공 체제에 가입했다.[74][75][76] 이 조공 체제에서 중국은 "형"의 역할을, 조선은 조공국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77]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큰 나라를 섬김)[81] 외교를 지속했다. "사대"는 중국을 유교적 도덕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하고,[82] 약소국이 강대국의 힘을 인정하는 외교 정책을 의미한다. 조선은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외교의 기반으로 삼았다.[84] 1400년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실용적이고 계약적인 것이었다.[81] 사대의 개념은 명나라를 섬기겠다는 약속을 의미했고, 국제 정세에 따라 지배적인 국가가 바뀔 수도 있었다.[81] 그러나 1500년대 초, 조선 엘리트들은 명나라 황제를 단순한 종주국이 아닌 의례적인 아버지상으로 여기면서 양국 관계는 부자 관계로 강화되었다.[81] 이러한 변화는 유교의 효도 원칙이 불변하고 취소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81] 1600년대 중반 명나라 멸망 이후에도 조선은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태보단(대은단)과 동묘(동명묘)를 건설하는 등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다.[81]
18세기 중반 이전까지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숭명배청(崇明排淸), 즉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멸시하는 것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41]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은 명나라를 자기 조상의 고향으로 여기고 청나라를 야만적이라고 여겼으며, 명나라 멸망 후에도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41] 조선 지식인들은 화이관(華夷觀)이라고 불리는 중국 중심적 관점에 따라 청나라를 멸시했다.[41] 인조는 1636년에 "중국(명나라)은 우리나라의 부모"이며, "저 이민족들(청나라)은 우리 부모의 원수"라고 말하며 명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41]
조선은 경제적, 문화적 이익뿐만 아니라 외교적 목적으로도 중국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고자 했다.[85] 중국은 조선이 3년에 한 번만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은 이에 반대하며 1년에 세 번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85] 결국 조선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 조공을 바칠 특권을 얻었다.[85] 조선은 중국과의 조공 무역에서 가장 많은 기회를 누렸고, 이를 통해 많은 경제적, 문화적 이익을 얻었다.[85]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방임주의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1882년 청·조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내정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178]
군란 이후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인하고 조선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리훙장의 측근인 독일인 바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와 중국 외교관 마젠중을 외교 고문으로 파견하고, 폰 묄렌도르프가 이끄는 조선 해관(Maritime Customs Service)의 설립을 감독했다. 또한 중국 장교들이 조선군 훈련을 맡아 소총 1,000정, 대포 2문, 탄약 1만 발을 제공했다. 새로운 조선군 부대인 친위영이 설립되었고 원세개에 의해 청나라 방식으로 훈련받았다. 1882년 10월 조청상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반식민지 속국으로 전락했다. 고종은 청나라의 승인 없이는 외교관을 임명할 수 없었고,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고려국사 권지”로 인정받은 후, 새로운 국호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선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국호 변경 이후 사망할 때까지 “권지 조선국사”로 남았다. 이후 1403년에 영락제에 의해 비로소 “'''조선왕'''”의 지위를 책봉받았다.[146]
조선은 만주에 살던 여진족과 분쟁과 교역을 반복하며 조공에 가까운 의례적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여진은 명에도 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여진에게 조공을 하였다는 것을 명이 나무란 적도 있다. 조선 정부는 여진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17세기 여진이 세운 후금(후에 청)에 무력으로 복속되고, 청에 의해 명이 멸망한 것은 조선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어 소중화사상으로 나타났다.
일청전쟁까지 500년 동안 조선은 명과 청의 책봉체제 속에 있으며, 중화왕조에 사대의 예를 다했다. 조선 군주는 중화왕조 황제를 유일한 천자로 존경하고 조공과 사절 환대를 행했으며, 회남자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구절처럼 유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상을 침투시켰다.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보내 도왔던 것은 “재조의 은”이라고 불렸고, 17세기에는 청보다 은혜가 있는 명을 더 존경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실제로 명으로부터 받은 시호는 공식 기록에 남아 있지만, 청에 순응한 16대 인조 이후는 청으로부터 받은 시호를 외교문서를 제외한 모든 공문서에서 삭제하고 감추었다.[179]
사대주의를 취했던 조선에서는 중화왕조의 사람은 범죄자라도 다스릴 수 없었고, 본국으로 정중하게 수송해야 했다.[180] 그 때문에 후기왜구 전성기에는 명인 왜구를 토벌하여 처벌받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181]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전의 조선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이었다.[182] 북경(연경)에 파견된 조선연행사는 책봉 관계가 종료될 때까지 약 500회에 달하며, 서구 열강의 영향 이후에도 파견되었다. 조선은 중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역사가 길고 밀도가 높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영향으로 세계 질서의 중심이 유럽과 미국으로 이동하고 중국이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대응에 고심하게 된다.[182] 요시다 미쓰오는 청과의 관계에 대해, 처음에는 조선이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받았지만, 100년이 지나면서 중국 문명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인식이 생겼고, 국내적으로도 청으로부터 책봉되는 것이 정통 왕조라는 것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82]
조선이 조공했던 명이나 청의 황제로부터는 자주 사절이 파견되었는데, 이때 조선왕 자신이 황제의 칙사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고, 황제에게 신종하는 뜻을 확인하는 의례가 행해졌다. 이 의례를 위해 한성의 교외에 慕華館(모화관)·영은문이 만들어졌으며, 국왕은 사절이 한성에 이르면 모화관에서 맞이하여 예를 다하는 관례였다. 후에 조선과 청의 책봉 관계가 끝나면서, 모화관은 독립관이 되고, 영은문은 파괴되었다.
## 일본과의 관계
초기 단계로, 1402년에 일본으로 외교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조선 사절은 양국 간의 우호 관계 재건을 추진하고 고대 시절 존재했던 좋은 관계를 기념하고자 했다. 이 사절단은 성공적이었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이 최초의 사절단에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89] 일본의 에도 시대 시작 전까지 조선 수도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외교 사절단은 70개가 넘었다.[90]
상호 사절단은 한국 국왕과 일본 쇼군 간의 거의 동등한 지위의 소통 수단으로 여겨졌다. 당시 일본 천황은 실질적인 정치적 또는 군사적 권력이 없는 명목상의 지도자였다.[91][92] 조선이 소통했던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 및 군사 지배자는 쇼군들이었으며, 중화주의적 질서에서 중국 황제가 최고 권위자였고 모든 조공국의 통치자는 "왕"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많은 외국과의 소통에서 "일본의 장군(타이쿤)"으로 표현되었다.[93]
중국 이외의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중화 세계의 상국으로 위치 지정하고, 교역과 정치 관계에서 조선 국왕의 복종을 요구하는 의사 조공 체제를 취했다. 명이 멸망하고 청이 흥하자(명청 교체), 중원의 중화 문명은 멸망했다고 보고 조선이야말로 중화 문명의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위 소중화 사상이다. 거기서 이씨 조선은 주변국의 여진·류큐·일본과 교린 외교를 펼쳤다.
남쪽의 일본인에 대해서는 왜구를 막기 위해 교역을 인정한 자도 왜관이라고 불리는 거류지에 거주할 것을 의무화하고 엄격하게 단속했다. 왜관은 처음 부산포(부산), 내이포(창원), 염포(울산)의 세 포구에 있었고, 삼포 왜관이라고 불렸지만, 1509년에 일어난 삼포왜란과 그 이후의 왜구 사건으로 부산 한 항구로 한정되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조 국교는 단절되었지만, 재정의 존립을 조선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대마도번은 국서를 위조하는 등(류가와 일건), 1609년에는 일조가 기유약조를 맺고, 부산에 왜관 신설도 인정받았다. 일본 사절의 한성 상경은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사절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정#[정] 세습을 축하하는
13. 1. 중국과의 관계
1392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왕으로부터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했다.[73] 조선은 건국 초기, 왕실 혈통이 없다는 점을 정당화하고 외교 관계 및 무역을 위해 중국의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1401년 조선은 천명 사상에 근거하여 중국의 조공 체제에 가입했다.[74][75][76] 이 조공 체제에서 중국은 "형"의 역할을, 조선은 조공국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77]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사대"(큰 나라를 섬김)[81] 외교를 지속했다. "사대"는 중국을 유교적 도덕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하고,[82] 약소국이 강대국의 힘을 인정하는 외교 정책을 의미한다. 조선은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외교의 기반으로 삼았다.[84] 1400년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실용적이고 계약적인 것이었다.[81] 사대의 개념은 명나라를 섬기겠다는 약속을 의미했고, 국제 정세에 따라 지배적인 국가가 바뀔 수도 있었다.[81] 그러나 1500년대 초, 조선 엘리트들은 명나라 황제를 단순한 종주국이 아닌 의례적인 아버지상으로 여기면서 양국 관계는 부자 관계로 강화되었다.[81] 이러한 변화는 유교의 효도 원칙이 불변하고 취소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81] 1600년대 중반 명나라 멸망 이후에도 조선은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태보단(대은단)과 동묘(동명묘)를 건설하는 등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다.[81]
18세기 중반 이전까지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숭명배청(崇明排淸), 즉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멸시하는 것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41]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은 명나라를 자기 조상의 고향으로 여기고 청나라를 야만적이라고 여겼으며, 명나라 멸망 후에도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41] 조선 지식인들은 화이관(華夷觀)이라고 불리는 중국 중심적 관점에 따라 청나라를 멸시했다.[41] 인조는 1636년에 "중국(명나라)은 우리나라의 부모"이며, "저 이민족들(청나라)은 우리 부모의 원수"라고 말하며 명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41]
조선은 경제적, 문화적 이익뿐만 아니라 외교적 목적으로도 중국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고자 했다.[85] 중국은 조선이 3년에 한 번만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은 이에 반대하며 1년에 세 번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85] 결국 조선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 조공을 바칠 특권을 얻었다.[85] 조선은 중국과의 조공 무역에서 가장 많은 기회를 누렸고, 이를 통해 많은 경제적, 문화적 이익을 얻었다.[85]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방임주의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1882년 청·조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내정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178]
군란 이후 청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인하고 조선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리훙장의 측근인 독일인 바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와 중국 외교관 마젠중을 외교 고문으로 파견하고, 폰 묄렌도르프가 이끄는 조선 해관(Maritime Customs Service)의 설립을 감독했다. 또한 중국 장교들이 조선군 훈련을 맡아 소총 1,000정, 대포 2문, 탄약 1만 발을 제공했다. 새로운 조선군 부대인 친위영이 설립되었고 원세개에 의해 청나라 방식으로 훈련받았다. 1882년 10월 조청상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반식민지 속국으로 전락했다. 고종은 청나라의 승인 없이는 외교관을 임명할 수 없었고,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고려국사 권지”로 인정받은 후, 새로운 국호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선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국호 변경 이후 사망할 때까지 “권지 조선국사”로 남았다. 이후 1403년에 영락제에 의해 비로소 “'''조선왕'''”의 지위를 책봉받았다.[146]
조선은 만주에 살던 여진족과 분쟁과 교역을 반복하며 조공에 가까운 의례적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여진은 명에도 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여진에게 조공을 하였다는 것을 명이 나무란 적도 있다. 조선 정부는 여진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17세기 여진이 세운 후금(후에 청)에 무력으로 복속되고, 청에 의해 명이 멸망한 것은 조선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어 소중화사상으로 나타났다.
일청전쟁까지 500년 동안 조선은 명과 청의 책봉체제 속에 있으며, 중화왕조에 사대의 예를 다했다. 조선 군주는 중화왕조 황제를 유일한 천자로 존경하고 조공과 사절 환대를 행했으며, 회남자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구절처럼 유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상을 침투시켰다.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보내 도왔던 것은 “재조의 은”이라고 불렸고, 17세기에는 청보다 은혜가 있는 명을 더 존경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실제로 명으로부터 받은 시호는 공식 기록에 남아 있지만, 청에 순응한 16대 인조 이후는 청으로부터 받은 시호를 외교문서를 제외한 모든 공문서에서 삭제하고 감추었다.[179]
사대주의를 취했던 조선에서는 중화왕조의 사람은 범죄자라도 다스릴 수 없었고, 본국으로 정중하게 수송해야 했다.[180] 그 때문에 후기왜구 전성기에는 명인 왜구를 토벌하여 처벌받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181]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전의 조선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이었다.[182] 북경(연경)에 파견된 조선연행사는 책봉 관계가 종료될 때까지 약 500회에 달하며, 서구 열강의 영향 이후에도 파견되었다. 조선은 중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역사가 길고 밀도가 높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영향으로 세계 질서의 중심이 유럽과 미국으로 이동하고 중국이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대응에 고심하게 된다.[182] 요시다 미쓰오는 청과의 관계에 대해, 처음에는 조선이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받았지만, 100년이 지나면서 중국 문명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인식이 생겼고, 국내적으로도 청으로부터 책봉되는 것이 정통 왕조라는 것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82]
조선이 조공했던 명이나 청의 황제로부터는 자주 사절이 파견되었는데, 이때 조선왕 자신이 황제의 칙사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고, 황제에게 신종하는 뜻을 확인하는 의례가 행해졌다. 이 의례를 위해 한성의 교외에 慕華館(모화관)·영은문이 만들어졌으며, 국왕은 사절이 한성에 이르면 모화관에서 맞이하여 예를 다하는 관례였다. 후에 조선과 청의 책봉 관계가 끝나면서, 모화관은 독립관이 되고, 영은문은 파괴되었다.
13. 2. 일본과의 관계
초기 단계로, 1402년에 일본으로 외교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조선 사절은 양국 간의 우호 관계 재건을 추진하고 고대 시절 존재했던 좋은 관계를 기념하고자 했다. 이 사절단은 성공적이었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이 최초의 사절단에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89] 일본의 에도 시대 시작 전까지 조선 수도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외교 사절단은 70개가 넘었다.[90]상호 사절단은 한국 국왕과 일본 쇼군 간의 거의 동등한 지위의 소통 수단으로 여겨졌다. 당시 일본 천황은 실질적인 정치적 또는 군사적 권력이 없는 명목상의 지도자였다.[91][92] 조선이 소통했던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 및 군사 지배자는 쇼군들이었으며, 중화주의적 질서에서 중국 황제가 최고 권위자였고 모든 조공국의 통치자는 "왕"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많은 외국과의 소통에서 "일본의 장군(타이쿤)"으로 표현되었다.[93]
중국 이외의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중화 세계의 상국으로 위치 지정하고, 교역과 정치 관계에서 조선 국왕의 복종을 요구하는 의사 조공 체제를 취했다. 명이 멸망하고 청이 흥하자(명청 교체), 중원의 중화 문명은 멸망했다고 보고 조선이야말로 중화 문명의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위 소중화 사상이다. 거기서 이씨 조선은 주변국의 여진·류큐·일본과 교린 외교를 펼쳤다.
남쪽의 일본인에 대해서는 왜구를 막기 위해 교역을 인정한 자도 왜관이라고 불리는 거류지에 거주할 것을 의무화하고 엄격하게 단속했다. 왜관은 처음 부산포(부산), 내이포(창원), 염포(울산)의 세 포구에 있었고, 삼포 왜관이라고 불렸지만, 1509년에 일어난 삼포왜란과 그 이후의 왜구 사건으로 부산 한 항구로 한정되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조 국교는 단절되었지만, 재정의 존립을 조선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대마도번은 국서를 위조하는 등(류가와 일건), 1609년에는 일조가 기유약조를 맺고, 부산에 왜관 신설도 인정받았다. 일본 사절의 한성 상경은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사절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정#[정] 세습을 축하하는
14. 이씨 왕가
조선의 국왕은 초대 국왕 이성계의 자손(이왕가)인 전주 이씨에 의해 세습되었으며, 고종까지 26대를 이었다. 국왕은 국가 최고 권력자였지만, 명나라에서 폐지된 합의제에 따른 재상 제도가 존재하여 중국처럼 철저한 전제 제도는 아니었다. 또한, 왕족인 이씨는 여진족 계통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울루스부하/Улусбухаmn처럼 몽골인의 성을 사용하였고, 이지란과 의형제를 맺는 등 여진족 부하를 많이 거느렸다.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입장이었기에, 국왕・왕비・대비의 경칭에 전하를 사용하였다. 왕위 계승 서열 1순위 왕자는 태자가 아닌 왕세자라 불렸으며, 왕세자・세자빈의 경칭에도 전하가 사용되었다. 1894년 독립 선언 이후에는 왕・왕비 등의 경칭을 폐하로 개칭하였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는 국왕은 황제, 왕세자는 황태자로 불리게 되었다.
15. 연표
국왕 | 연도 | 사건 |
---|---|---|
태조 | 1392년 | 이성계가 고려 恭譲王(공양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조선의 왕으로 즉위. 조선 건국. |
태조 | 1393년 | 명나라 황제로부터 국호를 “조선”과 “화녕” 중에서 선택하도록 허락받아 국호를 조선국으로 변경. |
태조 | 1394년 | 한양 천도. |
태조 | 1398년 | 제1차 왕자의 난. |
정종 | 1400년 | 제2차 왕자의 난. |
1401년 | 명나라로부터 왕을 자칭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음. | |
1404년 | 무로마치 막부와 국교를 회복하고, 일조 무역이 성행. | |
1419년 | 응영의 외구 - 이씨 조선군의 쓰시마섬 침공. | |
세종 | 1443년 | 훈민정음 창제. |
세종 | 1446년 | 훈민정음 반포. |
세조 | 1455년 | 세조찬위. |
성종 | 1485년 | 《경국대전》 완성. |
연산군 | 1498년 | 무오사화. 사림파에 대한 탄압인 사화가 시작됨. |
연산군 | 1504년 | 갑자사화. |
중종 | 1506년 | 중종반정. 정음청(훈민정음을 관리하던 기관) 폐쇄. |
중종 | 1510년 | 미우라의 난. 쓰시마의 일본인에 의한 반란. 쓰시마와의 통행이 일시적으로 중단됨. |
중종 | 1512년 | 임신약조. 쓰시마와의 통행 재개. |
중종 | 1519년 | 기묘사화. |
명종 | 1545년 | 을사사화. |
명종 | 1555년 | 을묘왜변. 비변사 설치. |
명종 | 1559년 | 임꺽정 출몰. |
1559년 - 1562년 | 황해도에서 민중 반란(임꺽정의 난). | |
1567년 | 사화가 끝남. 이후 사림파 사이의 대립이 계속됨. | |
1575년 | 사림파의 동인과 서인의 대립 시작. | |
선조 | 1583년 | 이탕개의 난. |
선조 |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
선조 | 1594년 | 훈련도감 설치. |
선조 | 1597년 | 정유재란 발발. |
1592년 - 1593년 및 1597년 - 1598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이라고 부름)을 받음. | |
광해군 | 1607년 | 에도 막부와 일조 국교 회복 협상 시작. |
광해군 | 1608년 | 창덕궁 준공. 북인(동인의 분파)의 대북이 광해군을 옹립. 북인 정권 시작. |
광해군 | 1609년 | 일조 통상 조약. 일본과의 통행 회복. 막부와 조선통신사에 의한 교류. |
광해군 | 1617년 | 인목대비 폐비. |
광해군 | 1619년 | 강홍립 청에 투항.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와의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대패. |
인조 | 1623년 | 인조반정. 광해군 폐위. 대북 숙청. |
인조 | 1624년 | 이괄의 난. |
인조 | 1627년 | 정묘호란. 후금군, 조선에 침략. |
인조 | 1636년 | 병자호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에 친정. 인조, 남한산성에 농성. |
인조 | 1637년 | 인조 항복하고, 청나라에 복속. |
1654년, 1658년 | 나선정벌. | |
현종 | 1659년 | 기해예송. |
현종 | 1660년 | 예론(복상 기간에 대한 대립)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구 동인의 분파)이 대립. |
현종 | 1674년 | 갑인예송. |
숙종 | 1680년 | 경신환국. |
숙종 | 1683년 |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
숙종 | 1689년 | 기사환국. |
숙종 | 1694년 | 갑술환국. |
숙종 | 1712년 | 백두산 정계비 세움. |
영조 | 1721년 - 1722년 | 신임사화. |
영조 | 1727년 | 정미환국. |
영조 | 1728년 | 이인좌의 난. |
영조 | 1736년 | 《속대전》 간행. |
영조 | 1762년 | 무고의 옥. |
영조 | 1772년 | 탕평책 실시. |
정조 | 1776년 | 규장각 설치. |
정조 | 1780년 | 홍국영 축출. |
1784년 | 기독교 전래. | |
정조 | 1791년 | 신해박해, 신해통공. 기독교 탄압 시작. |
1796년 | 수원 화성 축성. | |
1801년 | 기독교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계속됨. | |
순조 | 1804년 | 사림파에 의한 정치의 종언. 안동 김씨에 의한 권세 정치(-1863년). |
순조 | 1811년 | 홍경래의 난(지방 차별에 반발한 농민 봉기, 평안도 농민 전쟁이라고도 함). |
1811년 | 제12차 조선통신사가 가쓰시마 봉축을 위해 출발하지만, 쓰시마에서 저지당함. 조선은 이에 불복하고 이후 단교. | |
1846년 | 프랑스 세실제독 함대가 국서 전달 | |
1860년 | 동학 탄생 | |
1861년 | 김정호에 의한 조선 전도, 대동여지도 완성. | |
철종 | 1862년 | 임술농민봉기(경상도 진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중 반란). |
고종 | 1863년 | 흥선대원군 정권 성립. |
고종 | 1866년 | 병인박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고종 | 1867년 | 경복궁 재건. |
고종 | 1871년 | 신미양요. |
1872년 | 조선 대기근. | |
고종 | 1873년 | 대원군 추방, 민씨 정권 성립. |
고종 | 1875년 | 강화도 조약 체결. |
고종 | 1876년 | 일본 메이지 정부와 강화도 조약 체결. |
고종 | 1882년 | 임오군란 발생.[172] 제물포 조약 체결.[172]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고종 | 1883년 | 재정 위기를 보정하고 어지러운 통화 정책을 정비할 목적으로 주조 기관인 전환국이 설치됨. |
고종 | 1884년 | 갑신정변, 개화파 김옥균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남. |
고종 | 1885년 | 포트 해밀턴 사건[174], 거문도가 영국에 점령됨. |
고종 | 1888년 | 러일조약. |
고종 | 1894년 | 동학 농민 혁명, 갑오경장. 대원군의 정국 복귀. 대원군파와 민비파의 대립 심화. 김옥균, 상하이에서 암살됨. 반란군과 정부가 화해하고, 반란 평정이라는 명목으로 주둔하고 있던 일청 양군의 철병을 요구하지만 양군 모두 거부하고, 청일전쟁 발발. |
고종 | 1895년 |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민비 복권하지만 암살됨. 을미사변. 청일전쟁 종결.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청나라로부터 독립. |
고종 | 1897년 | 칭제건원. 대한제국으로 개칭. |
대국들의 침략에 압박을 받던 조선 조정은 국가 통합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1897년 광무개혁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특히 러시아를 포함한 다른 열강으로부터 일본을 막기 위한 군사 기술을 얻으려 했다. 엄밀히 말해, 제국의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으므로 1897년은 조선 시대의 종식을 의미한다. 비록 일본과 러시아에 의해 압박받았지만 조선 왕조는 여전히 통치하였다.
일련의 복잡한 술책과 맞대응 속에서 일본은 1904년 뤼순 전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퇴하였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러일 전쟁이 포츠머스 조약으로 끝나면서 일본이 한국을 장악할 길이 열렸다.
국왕 | 연도 | 사건 |
---|---|---|
고종 | 1904년 | 제1차 한일협약 |
고종 | 1905년 |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이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를 인정. 미국과 영국도 필리핀·인도 영토 인정과 교환으로 일본의 한국 보호를 승인. 제2차 한일협약(한일보호조약). |
고종 | 1906년 | 한국통감부 설치 |
고종 | 1907년 | 헤이그 밀사 사건. 제3차 한일협약. 한국군, 일부를 남기고 해산. |
고종 | 1909년 | 한국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됨. |
고종 | 1910년 | 대한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기초하여 일본에 병합되어 멸망(경술국치). |
참조
[1]
웹아카이브
Japan–South Korea Joint History Research Project
https://www.jkcf.or.[...]
2024-05-08
[2]
웹사이트
Was Korea Ever a Part of China?: A Historical Review
https://www.ifans.go[...]
The Institute of Foreign Affairs and National Security (외교안보연구소)
[3]
서적
Interior Space and Furniture of Joseon Upper-class Houses
https://books.google[...]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2020-11-01
[4]
서적
Reorienting Reorient: East Asia and 15th–19th Century Joseon
[5]
서적
The Standard of Living in the Chosoˇn Dynasty Korea in the 17th to the 19th Centuries
[6]
논문
International Order in Historical East Asia: Tribute and Hierarchy Beyond Sinocentrism and Eurocentrism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7]
웹사이트
조선력사 시대구분표
http://www.naenara.c[...]
2019-07-01
[8]
웹사이트
Korean History in Chronological Order
http://www.naenara.c[...]
2019-07-01
[9]
뉴스
(세상사는 이야기) 왜색에 물든 우리말-(10)
http://www.newstown.[...]
Newstown
2009-07-22
[10]
웹사이트
Chosŏn dynasty Korean history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9-02-10
[11]
서적
Women Our History
https://books.google[...]
D.K.
2020-11-01
[12]
백과사전
[13]
학술지
Rethinking the Late Koryŏ in an International Context
http://dx.doi.org/10[...]
2017
[14]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015-08-07
[15]
서적
Korea
https://books.google[...]
Routledge/Curzon
2020-11-01
[16]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11-01
[17]
웹사이트
계해약조 癸亥約條
http://100.nate.com/[...]
2011-06-10
[18]
웹사이트
계해조약 癸亥約條
http://100.nate.com/[...]
2011-06-10
[19]
서적
웅진, 지식하우스
[20]
웹사이트
King Sejong the Great And The Golden Age Of Korea
http://www.asiasocie[...]
asiasociety.org
2009-11-27
[21]
웹사이트
Forgotten story of Princess Gyeonghye
https://www.koreatim[...]
2014-04-04
[22]
웹사이트
서인-한국민족대백과 사전
https://encykorea.ak[...]
[23]
웹사이트
동인-한국민족대백과 사전
https://encykorea.ak[...]
[24]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Volume II: From 1600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3
[25]
웹사이트
붕당정치-한국민족대백과 사전
https://encykorea.ak[...]
[26]
harvnb
2006
[27]
harvnb
2006
[28]
harvnb
2008
[29]
harvnb
2006
[30]
harvnb
1997
[31]
harvard
[31]
harvard
[32]
서적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22-04-23
[33]
학술지
Ruling Ideology and Marginal Subjects: Ming Loyalism and Foreign Lineages in Late Chosŏn Korea
https://brill.com/vi[...]
2022-11-24
[34]
harvard
[35]
백과사전
yesong
https://encykorea.ak[...]
2023-11-02
[36]
웹사이트
sukjong
https://encykorea.ak[...]
2023-07-31
[37]
백과사전
탕평책
[38]
서적
조선당쟁사 2 탕평과 세도정치: 숙종조~고종조
아름다운날
2007-00-00
[39]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Ewha Womans University Press
2016-12-23
[40]
서적
Su-un and His World of Symbols: The Founder of Korea's First Indigenous Relig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12-23
[41]
논문
Changing perceptions of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Chinese style architecture that emerged in Joseon in the 18th century
2022
[42]
서적
세도정권기 조선사회와 대전회통
혜안
2007
[43]
서적
A Handbook of Korea
Korean Overseas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1993
[44]
논문
The Port Hamilton (Geomundo) Incident (1885–1887): Retracing Another Great Game in Eurasia
https://www.tandfonl[...]
2019-03-04
[45]
뉴스
Characteristics of Queen of Corea
https://timesmachine[...]
1895-11-10
[46]
뉴스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http://www.donga.com[...]
2002-01-01
[47]
백과사전
[48]
웹사이트
Ilseongnok: Records of Daily Reflections
http://www.unesco.or[...]
UNESCO
[49]
서적
Korean History in Map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50]
웹사이트
상언격쟁
http://www.cultureco[...]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51]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Taejong, vol. 1, year of 1401, 6th month, 12nd day
http://sillok.histor[...]
2021-05-29
[52]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Injoo, vol. 35, year of 1637, 11th month, 20nd day
http://sillok.histor[...]
2021-06-02
[53]
서적
Record of Joseon Diplomacy
https://kyudb.snu.ac[...]
2021-05-29
[54]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Jeongjo, vol. 2, year of 1776, 8th month, 18nd day
http://sillok.histor[...]
2021-05-29
[55]
웹사이트
Journal of the Royal Secretariat, vol. 2902, year of 1882, 7th month, 1st day
http://kyudb.snu.ac.[...]
2021-05-29
[56]
간행물
Gyeongguk daejeon
[57]
간행물
About Rank of Joseon Official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58]
웹사이트
한성부
http://www.doopedia.[...]
Doosan Encyclopedia
2014-03-01
[59]
웹사이트
춘추관
http://www.doopedia.[...]
Doosan Encyclopedia
2014-03-01
[60]
서적
The Great Enterprise: Sovereignty and Historiography in Modern Korea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2013-03-25
[61]
서적
The Making of International Law in Korea: From Colony to Asian Power
https://books.google[...]
Brill
2016-05-12
[62]
서적
Harmony and War: Confucian Culture and Chinese Power Politic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12-15
[63]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10-16
[64]
서적
Overseas Chinese Entrepreneurship and Capitalist Development in Southeast Asia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2000
[65]
서적
Thailand's Policies towards China, 1949–54
https://books.google[...]
Springer
1992-06-18
[66]
서적
Wei Yuan and China's Rediscovery of the Maritime World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 Asia Center
1984
[67]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1996-01
[68]
서적
China and the Developing World: Beijing's Strate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8-20
[69]
서적
Frontier Contact Between Choson Korea and Tokugawa Jap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5-11-02
[70]
서적
East Asia Before the West: Five Centuries of Trade and Tribute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71]
서적
Offshore Asia: Maritime Interactions in Eastern Asia Before Steamships
https://books.googl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6-07-20
[72]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16-07-28
[73]
서적
pp. 123–132.
[74]
서적
p. 7.
[75]
서적
pp. 10–11.
[76]
서적
p. 71.
[77]
서적
Harmony and War: Confucian Culture and Chinese Power Politic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78]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6-07-20
[79]
서적
Asian Security Order: Instrumental and Normative Features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80]
서적
Diplomacy and Ideology in Japanese-Korean Relations: from the Fifteenth to the Eigh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81]
논문
Huddling under the Imperial Umbrella: A Korean Approach to Ming China in the Early 1500s
https://www.jstor.or[...]
2017-12-03
[82]
웹사이트
Will Flowers Bloom without Fragrance? Korean-Chinese Relations
http://www.asiaquart[...]
2009-03-01 # Spring 2009 추정
[83]
서적
The Koreas
[84]
서적
Diplomacy and Ideology in Japanese-Korean Relations: from the Fifteenth to the Eigh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85]
웹사이트
조공횟수의 문제 (The problem of the frequency of tributes)
http://contents.hist[...]
[86]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87]
웹사이트
사대교린 (조선 외교), Britannica online Korea
http://enc.daum.net/[...]
[88]
서적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https://books.google[...]
[89]
서적 # 추가 정보 없으므로 서적으로 추정
[90]
서적 # 추가 정보 없으므로 서적으로 추정
Frontier contact between chosŏn Korea and Tokugawa Japan
[91]
서적
The Emperors of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BRILL
2020-11-01
[92]
서적
Jews & the Japanese: The Successful Outsiders
https://books.google[...]
Tuttle
2020-11-01
[93]
서적
Diplomacy and Ideology
https://books.google[...]
[94]
서적
Sources of Korean Tradition: Volume II: From the Six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ies
Columbia University Press
[95]
간행물
Korean Expansion and Decline from the Seven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A View Suggested by Adam Smith
[96]
서적
The Dawn of Modern Korea
https://web.archive.[...]
EunHaeng Namu
2010-02-16
[97]
간행물
Economic growth in P'yongan Province and the development of Pyongyang in the Late Choson Period
[98]
서적
A Heritage of Kings: One Man's Monarchy in the Confucian World
Columbia University Press
[99]
웹사이트
Korean Nobi in American Mirror: Yi Dynasty Coerced Labor in Comparison to the Slavery in the Antebellum Southern United States
https://ideas.repec.[...]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Seoul National University
2016-02-13
[100]
서적
Structure of Slavery in Indian Ocean Africa and Asia
Routledge
2004
[101]
서적
Views on Korean social history
https://books.google[...]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2017-02-15
[102]
서적
The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
https://archive.org/[...]
ABC-CLIO
2017-02-14
[103]
간행물
[104]
간행물
[105]
웹사이트
On double-entry bookkeeping in Eighteenth-century Korea: A consideration of the account books from two clan associations and a private academy.
http://www.iisg.nl/h[...]
[106]
간행물
[107]
간행물
[108]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Isolation, War, Despotism and Revival : the Fascinating Story of a Resilient But Divided People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2019-01-01
[109]
서적
택리지
[110]
간행물
[111]
논문
Versions and subversions: Patriarchy and polygamy in Korean narrativ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12]
참고문헌
[113]
서적
아틀라스한국사
사계절
[114]
참고문헌
[115]
서적
Structure of Slavery in Indian Ocean Africa and As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4-02-14
[116]
백과사전
선비
https://encykorea.ak[...]
2023-11-02
[117]
웹사이트
의병
https://encykorea.ak[...]
2024-08-03
[118]
웹사이트
문화재청-흐트러진 마음을 가담고 각궁으로 활을 쏘다
https://www.cha.go.k[...]
2017-09-28
[119]
서적
Korea: A Very Short Introduction
https://www.worldcat[...]
Oxford University Press
2023-05-01
[120]
웹사이트
조선예술(朝鮮藝術)
https://web.archive.[...]
2020-02-03
[121]
서적
Birmingham Museum of Art : guide to the collection
http://artsbma.org/
Birmingham Museum of Art
2012-01-29
[122]
웹사이트
Yangban: The Cultural Life of the Joseon Literati
https://www.metmuseu[...]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4-10-00
[123]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24]
서적
New Insights From Recent Studies in Historical Astronomy: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F. Richard Stephenson
Springer
[125]
학술지
A Shared Cultural Realm: Literary Exchanges between Scholar-Officials and Poet-Monks in the Mid Joseon Period
https://muse.jhu.edu[...]
2015-08-20
[126]
학술지
Pathways to Korean Culture: Paintings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by Burglind Jungmann (review)
https://muse.jhu.edu[...]
2015-00-00
[127]
웹사이트
Buddhist paintings: Artworks Filled with Beauty and Hope
https://issuu.com/mu[...]
National Museum of Korea
2023-11-18
[128]
웹사이트
Art of the Korean Renaissance, 1400–1600
https://www.metmuseu[...]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0-09-00
[129]
웹사이트
Four Preaching Buddhas
https://smarthistory[...]
Smarthistory.org
2023-11-18
[130]
간행물
Breve Ex debito pastoralis
https://www.vatican.[...]
Pope Gregory XVI
1831-09-09
[131]
서적
Understanding Korean Literature
[132]
서적
The Bamboo Grove: An Introduction to Sijo
[133]
서적
The Bamboo Grove: An Introduction to Sijo
[134]
서적
The Bamboo Grove: An Introduction to Sijo
[135]
서적
Understanding Korean Literature
[136]
웹사이트
https://www.naver.co[...]
2021-07-29
[137]
서적
웅진출판사
[138]
웹사이트
Korea And The Korean People
http://www.indiana.e[...]
2006-02-14
[139]
뉴스
A life of tears and regret for last Korean princess
https://koreajoongan[...]
Korea Joong-Ang Daily
2023-11-02
[140]
기타
[141]
일반
[142]
웹사이트
인구
http://terms.naver.c[...]
[143]
일반
[144]
서적
고종실록
2020-07-18
[145]
서적
고종실록
2020-07-18
[146]
간행물
한국문화에의 초대: 전라북도의 역사와 문화 추계 특별전
이시카와 현립 역사 박물관
[147]
뉴스
【만물상】21세기 한국의 「무술옥사」
http://www.chosunonl[...]
2018-04-22
[148]
뉴스
【칼럼】조선왕조 시대의 붕당 정치, 화려한 부활
https://news.yahoo.c[...]
2020-06-14
[149]
서적
역사 이야기 조선반도
아사히 신문사
[150]
서적
역사 이야기 조선반도
아사히 신문사
[151]
논문
[152]
논문
[153]
논문
[154]
논문
[155]
논문
[156]
뉴스
(제목 정보 없음)
日本経済新聞
2002-04-10
[157]
웹사이트
https://repository.l[...]
2024-03
[158]
웹사이트
朝鮮歴史時代区分表
http://www.naenara.c[...]
2019-07-01
[159]
웹사이트
조선봉건왕조
http://www.dprktoday[...]
[160]
웹사이트
조선력사 시대구분표
http://www.naenara.c[...]
2019-07-01
[161]
웹사이트
《동방의 성인》으로 불리운 세종대왕
http://www.uriminzok[...]
2019-07-01
[162]
서적
백과전서(2)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63]
웹사이트
通商約章成案彙編
https://books.google[...]
[164]
서적
明帝国と倭寇
人物往来社
[165]
서적
「歴史」を動かす―東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亜紀書房
2011-08-02
[166]
서적
「歴史」を動かす―東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亜紀書房
2011-08-02
[167]
서적
明帝国と倭寇
人物往来社
[168]
웹사이트
朝鮮王朝実録世宗5卷1年(1419年)8月5日
http://sillok.histor[...]
[169]
서적
아시아의 나카노 일본사
[170]
웹사이트
archive.ph
https://archive.ph/Y[...]
2022-09-13
[171]
웹사이트
【コラム】中国、我が歴史のトラウマ(1)=韓国
https://japanese.joi[...]
2022-09-13
[172]
웹사이트
時事新報史 第15回:朝鮮問題① 壬午事変の出兵論
http://www.keio-up.c[...]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07-05-10
[173]
웹사이트
時事新報史 第16回:朝鮮問題② 「脱亜論」の周辺
http://www.keio-up.c[...]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07-06-21
[174]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https://books.google[...]
Brill Academic Pub
[175]
서적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1992
[176]
서적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1992
[177]
서적
朝鮮紀行
[178]
웹사이트
最古の太極旗の絵が発見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04-01-26
[179]
웹사이트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s://web.archive.[...]
朝鮮日報
2007-09-16
[180]
서적
中世倭人伝
[181]
간행물
朝鮮王朝実録明宗 33卷, 21年(1566 丙寅 / 명 가정(嘉靖) 45年) 7月 2日(辛卯)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国史編纂委員会
[182]
뉴스
「歴史の光に浮かび上がる 東アジアの過去・現在・未来」
http://www.ouj.ac.jp[...]
放送大学
2009-12
[183]
서적
日本帝国の申し子 高敞の金一族と韓国資本主義の植民地起源
草思社
[184]
간행물
李朝人口に関する身分階級別的観察
[185]
뉴스
初等教科書、高麗時「23万帰化」言及もしない
https://m.khan.co.kr[...]
2007-08-21
[186]
뉴스
초등 4~6학년 교과서, 단일민족·혈통 지나치게 강조
https://www.khan.co.[...]
2007-08-21
[187]
서적
朝鮮事情
[188]
간행물
韓国『正しい歴史認識』の虚構と戦略
2009-04
[189]
서적
韓国近代大学の成立と展開
名古屋大学出版会
1995
[190]
위키
이제마
[191]
서적
동의수세보원
[192]
백과사전
조선
https://encykorea.ak[...]
[193]
웹사이트
태조 이성계
http://contents.hist[...]
[194]
웹사이트
칭제건원
http://contents.hist[...]
[195]
논문
조선초기 한성부의 기능과 한성판윤
https://www.kci.go.k[...]
2017
[196]
뉴스
두만강 북쪽은 누구 땅인가? 한·중·일 근대는 ‘국경 만들기’에서 시작됐다
https://m.khan.co.kr[...]
경향신문
2022-05-06
[197]
웹사이트
성리학
http://contents.hist[...]
[198]
웹사이트
관료체제의 특징
http://contents.hist[...]
[199]
논문
조선왕조의 정치체제: 절대군주제
https://www.kci.go.k[...]
2017
[200]
논문
조선전기 훈구·사림의 갈등과 그 정치사상적 함의
https://www.kci.go.k[...]
2004
[201]
웹사이트
붕당
http://contents.hist[...]
한국사연대기
[202]
웹사이트
예송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03]
웹사이트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호락논쟁 이야기
https://www.hani.co.[...]
[204]
웹사이트
세도정치
https://encykorea.ak[...]
[205]
웹사이트
제승방략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06]
웹사이트
오군영
http://contents.hist[...]
한국사연대기
[207]
웹사이트
속오군(束伍軍) 속오군
http://dh.aks.ac.kr/[...]
[208]
웹사이트
비변사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09]
웹사이트
속오군
https://encykorea.ak[...]
[210]
서적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2015
[211]
웹사이트
금난전권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12]
뉴스
정조의 신해통공, 시장진입 장벽 허물다
http://www.atlasnews[...]
아틀라스뉴스
2019-08-13
[213]
논문
조선 후기 鑄錢정책과 財政활용
https://s-space.snu.[...]
서울대학교
2014
[214]
웹사이트
산업의 발달
http://contents.hist[...]
제6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하)
[215]
웹인용
한산모시축제 소개
https://hansanmosi.k[...]
2023-12-10
[216]
웹사이트
부채의 고장, 전주
https://ncms.ncultur[...]
[217]
웹사이트
상인의 경제적 성장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218]
웹사이트
오일장
https://www.kculture[...]
[219]
웹사이트
조운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20]
웹사이트
역참(驛站) 역참
http://dh.aks.ac.kr/[...]
[221]
웹사이트
물자 유통을 위한 전국의 도로망은 얼마나 되었을까
http://contents.hist[...]
한국문화사
[222]
웹사이트
신분제의 개편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223]
웹사이트
신분
https://encykorea.ak[...]
[224]
웹사이트
조선왕조사의 특징과 시기구분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225]
논문
조선 중기 시기 구분에 대한 검토 — 사족사회의 형성 문제를 중심으로 —
https://www.kci.go.k[...]
2020
[226]
웹사이트
위화도 회군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27]
웹사이트
태조 즉위의 승인과 국호개정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228]
논문
조선 초기 ‘조선 건국’에 대한 역사 인식의 형성과 추이
https://www.kci.go.k[...]
2021
[229]
웹사이트
서계
https://encykorea.ak[...]
[230]
서적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
1876-12-17
[231]
뉴스
이조와 조선
https://www.hani.co.[...]
한겨레
2005-06-09
[232]
논문
조선왕조의 정치체제: 절대군주제
https://www.kci.go.k[...]
2017
[233]
논문
조선 성리학자들의 양명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 검토
https://www.kci.go.k[...]
한국양명학회
2021
[234]
논문
조선전기 사림파 성리학의 전개와 특징
https://www.kci.go.k[...]
2011
[235]
백과사전
산림
https://encykorea.ak[...]
[236]
백과사전
실학
https://encykorea.ak[...]
[237]
웹사이트
사문난적(斯文亂賊) 사문난적
http://dh.aks.ac.kr/[...]
[238]
백과사전
동학운동
https://encykorea.ak[...]
[239]
웹사이트
위화도회군
http://contents.hist[...]
[240]
웹사이트
세조의 왕권강화
http://contents.hist[...]
[241]
웹사이트
국보 훈민정음
https://www.heritage[...]
문화재청
[242]
웹사이트
세종실록지리지
https://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243]
웹사이트
세종, 여진족을 물리치고 영토를 개척하다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44]
웹사이트
경국대전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5]
뉴스
성종은 성공하고 연산군은 실패한 이유?
https://h21.hani.co.[...]
한겨레21
2022-10-09
[246]
간행물
심의의 일과 도적을 잡을 방책에 대해 의논하다
https://sillok.histo[...]
중종실록
1509-10-05
[247]
웹사이트
임진왜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8]
웹사이트
인조반정(仁祖反正)
http://dh.aks.ac.kr/[...]
[249]
뉴스
병자호란의 끝 정축하성⋯ 삼전도의 굴욕
https://www.asiatime[...]
아시아타임즈
2021-02-24
[250]
웹사이트
박지원의 양반 풍자
http://contents.hist[...]
[251]
웹사이트
공명첩(空名帖) 공명첩
http://dh.aks.ac.kr/[...]
[252]
논문
조선시대 양반들의 경제생활-간찰과 일기를 통해본 일반적고찰
https://www.kci.go.k[...]
2017
[253]
웹사이트
양반인구의 증가
http://contents.hist[...]
[254]
뉴스
노비에서 벗어나 양반으로
https://www.sisain.c[...]
시사인
2014-09-20
[255]
웹사이트
예송
http://contents.hist[...]
[256]
웹사이트
환국(換局) 환국
http://dh.aks.ac.kr/[...]
[257]
웹사이트
기사환국
http://contents.hist[...]
[258]
웹사이트
노론(老論) 노론
http://dh.aks.ac.kr/[...]
[259]
웹사이트
준론 탕평의 적용
http://contents.hist[...]
[260]
웹사이트
호락논쟁의 역사적 의의
http://contents.hist[...]
[261]
뉴스
정조가 추진한 왕권강화 정책,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져
https://www.cctoday.[...]
충청투데이
2017-05-31
[262]
논문
세도정치기 안동김문의 정치적 기반 - 국왕, 유력가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https://s-space.snu.[...]
서울대학교
[263]
웹사이트
풍양조씨
http://www.grandcult[...]
디지털도봉문화대전
[264]
뉴스
흥선대원군의 개혁
https://world.kbs.co[...]
KBS
2012-10-20
[265]
논문
조선시대 이양선과 해난구조사상 연구
https://www.kci.go.k[...]
한국도서연구
2018
[266]
웹사이트
소빙기 자연재해와 인구 동향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67]
논문
삼정문란과 조세저항
https://www.kci.go.k[...]
세무학연구
2022
[268]
웹사이트
동학농민운동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69]
웹사이트
강화도조약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70]
웹사이트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71]
간행물
조선 왕의 다양한 특성
http://contents.hist[...]
한국문화사, 우리역사넷
[272]
백과사전
경국대전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73]
뉴스
‘타자’(他者)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조선 호락(湖洛)논쟁의 핵심
http://www.m-economy[...]
이코노미뉴스
2019-07-05
[274]
논문
조선왕조의 정치체제: 절대군주제
https://www.kci.go.k[...]
2017
[275]
간행물
중앙 정치 체제와 지방 행정 조직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76]
서적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2015
[277]
간행물
세조의 왕권강화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78]
간행물
과거 제도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279]
간행물
문과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80]
간행물
무과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81]
웹사이트
잡과
http://contents.hist[...]
[282]
웹사이트
승과
https://encykorea.ak[...]
[283]
논문
조선시대 문인들의 음서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양상 연구
https://www.kci.go.k[...]
2021
[284]
뉴스
키워드로푸는역사 - 조선시대 품계는 직품+관계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07-09-14
[285]
웹사이트
봉작(封爵)
http://dh.aks.ac.kr/[...]
[286]
웹사이트
아전
https://encykorea.ak[...]
[287]
웹사이트
향리
https://encykorea.ak[...]
[288]
웹사이트
밀양민란
https://encykorea.ak[...]
[289]
웹사이트
붕당
http://contents.hist[...]
[290]
웹사이트
붕당정치
https://encykorea.ak[...]
[291]
웹사이트
경관직
http://contents.hist[...]
[292]
웹사이트
외관직
http://contents.hist[...]
[293]
웹사이트
도역과 군현 및 면·리 편성
http://contents.hist[...]
[294]
웹사이트
수령
https://encykorea.ak[...]
[295]
웹사이트
부병제
https://encykorea.ak[...]
[296]
웹사이트
누가 노인인가
http://contents.hist[...]
[297]
웹사이트
보
https://encykorea.ak[...]
[298]
웹사이트
군역(軍役) 군역
http://dh.aks.ac.kr/[...]
[299]
웹사이트
군역전
https://encykorea.ak[...]
[300]
웹사이트
수군
http://encykorea.aks[...]
[301]
웹사이트
방군수포(放軍收布)
http://dh.aks.ac.kr/[...]
[302]
뉴스
양반의 병역꼼수 집요했다…나라도 망할뻔한 조선 병역비리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0-09-13
[303]
웹사이트
입번군(入番軍)
http://dh.aks.ac.kr/[...]
[304]
웹사이트
유진군(留鎭軍)
http://dh.aks.ac.kr/[...]
[305]
웹사이트
훈련도감
http://contents.hist[...]
[306]
웹사이트
삼수미(三手米)
http://dh.aks.ac.kr/[...]
[307]
웹사이트
초관
https://encykorea.ak[...]
[308]
웹사이트
대장
https://encykorea.ak[...]
[309]
웹사이트
파총(把摠)
http://dh.aks.ac.kr/[...]
[310]
웹사이트
영장(營將)
http://dh.aks.ac.kr/[...]
[311]
웹사이트
수영(水營)
http://dh.aks.ac.kr/[...]
[312]
웹사이트
삼수병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313]
서적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2015
[314]
웹사이트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315]
논문
조선후기 조직의 賻儀와 경제적 성격
https://s-space.snu.[...]
2009
[316]
웹사이트
토지 소유 관계의 변화
http://contents.hist[...]
한국문화사
[317]
웹사이트
공장
https://encykorea.ak[...]
[318]
웹사이트
신해통공
http://contents.hist[...]
한국사 연대기
[319]
웹사이트
최상층 중인 역관과 의관
http://contents.hist[...]
주제로 본 한국사
[320]
논문
경상(京商)과 송상(松商)의 상거래 유통망에 관한 비교 연구
https://preview.kstu[...]
2010
[321]
웹사이트
왜동(倭銅)
http://dh.aks.ac.kr/[...]
[322]
웹사이트
동전의 보급
http://contents.hist[...]
한국문화사
[323]
웹사이트
물자 유통을 위한 전국의 도로망은 얼마나 되었을까
http://contents.hist[...]
한국문화사
[324]
웹사이트
역참(驛站)
http://dh.aks.ac.kr/[...]
[325]
웹사이트
마패(馬牌)
http://dh.aks.ac.kr/[...]
[326]
웹사이트
조창의 설치와 관리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327]
논문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
https://www.kci.go.k[...]
2003
[328]
웹사이트
양반의 개념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329]
웹사이트
최상층 중인 역관과 의관
http://contents.hist[...]
주제로 본 한국사
[330]
웹사이트
양인
https://encykorea.ak[...]
[331]
백과사전
천인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32]
웹사이트
갑오개혁기 신분제와 사회관습 개혁안
http://contents.hist[...]
[333]
웹사이트
형평사 운동
http://contents.hist[...]
[334]
웹사이트
첩을 들이는 이유
http://contents.hist[...]
[335]
논문
조선전기 사족여성(士族女性)의 비녀(婢女) 살해
https://www.kci.go.k[...]
2019
[336]
웹사이트
혈통 또는 신분의 중요성
http://contents.hist[...]
[337]
위키문헌
홍길동전 30장 경판본
:s:홍길동전 30장 경판본
[338]
웹사이트
적서의 문제
http://contents.hist[...]
[339]
논문
조선시대 균분상속제도와 그 의미
https://www.kci.go.k[...]
2013
[340]
웹사이트
제약이 많았던 조선시대의 혼인풍속
https://ncms.ncultur[...]
[341]
백과사전
열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42]
뉴스
조선 후기 여성사 다시 써야 할 판
https://weekly.donga[...]
주간동아
2005-01-05
[343]
서적
Primitive Culture
J.P. Putnam's Son
1871
[344]
백과사전
민속
https://encykorea.ak[...]
한국문화대백과사전
[345]
뉴스
한국, 한국인의 정체성?…한중일 3국의 역사문화 속에서 찾다
https://m.khan.co.kr[...]
경향신문
2020-10-26
[346]
웹사이트
한복의 의미와 역사
http://www.hanajudan[...]
김영희 우리옷
[347]
백과사전
철릭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48]
웹사이트
김치의 혁명
http://contents.hist[...]
한국문화사
[349]
웹사이트
한국 가옥의 지역별 특징
https://ncms.ncultur[...]
[350]
웹사이트
조선 후기의 서민문화
https://if-blog.tist[...]
[351]
웹사이트
세시풍속
http://www.grandcul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