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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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선왕후는 광해군 시대에 태어나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이다. 장유의 딸로 봉림대군과 결혼하여 풍안부부인이 되었으며, 인조 23년에 세자빈, 효종 즉위 후 왕비가 되었다. 효종 사후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효숙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다. 사망 후 영릉에 안장되었으며, 장렬왕후와의 예송 논쟁이 발생했다. 가족 관계로는 아버지 장유, 어머니 영가부부인 안동 김씨, 남편 효종, 아들 현종 등이 있다. 여러 드라마에서 인선왕후를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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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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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조선 왕비 |
재위 (왕비) | 순치 6년 5월 13일 (음력 1649년 6월 22일) – 순치 16년 5월 9일 (음력 1659년 6월 28일) |
재위 (왕대비) | 강희 즉위년 5월 9일 (음력 1659년 6월 28일) – 강희 13년 2월 24일 (음력 1674년 3월 19일) |
전체 이름 | 장씨 |
별칭 | 효숙정범경렬명헌인선왕후 (시호) |
출생일 | 만력 46년 12월 25일 (음력 1619년 2월 9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안산 |
사망일 | 강희 13년 2월 23일 (음력 1674년 3월 19일) |
사망지 | 조선 한성 경희궁 회상전 |
능묘 | 영릉 |
배우자 | 효종 |
자녀 | 현종, 숙신공주,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 |
씨족 | 덕수 장씨 |
아버지 | 장유 |
어머니 | 안동 김씨 |
왕족 정보 | |
작위 (세자빈) | 조선 세자빈 |
재위 (세자빈) | 1645년 9월 27일 ~ 1649년 5월 13일 (음력) |
전임 (세자빈) | 세자빈 강씨 |
후임 (세자빈) | 세자빈 김씨 |
작위 (왕비) | 조선 효종의 왕비 |
재위 (왕비) | 1649년 5월 13일 ~ 1659년 5월 9일 (음력) |
가문 | 덕수 장씨 |
작호 | 풍안부부인 |
존호 | 효숙왕대비 |
휘호 | 경렬명헌 |
시호 | 인선 |
전호 | 경사전 |
자녀 (총) | 1남 6녀 (3남 7녀) |
능묘 위치 |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 |
전임 (왕비) | 장렬왕후 조씨 |
후임 (왕비) | 명성왕후 김씨 |
작위 (왕대비) | 조선 왕대비 |
재위 (왕대비) | 1659년 5월 9일 ~ 1674년 2월 24일 (음력) |
전임 (왕대비) | 자의왕대비 조씨 |
후임 (왕대비) | 현열왕대비 김씨 |
아버지 | 신풍부원군 장유 |
어머니 | 영가부부인 김이순 |
별칭 | 인선성모, 인선대비 |
통치 | |
왕비 | 1649년 6월 17일 – 1659년 3월 23일 |
왕대비 | 1659년 3월 23일 – 1674년 3월 20일 |
선임 (왕대비) | 자의왕대비 |
후임 (왕대비) | 현열왕대비 |
배우자 | 이호, 효종 (1630년 결혼, 1659년 사망) |
가계 | |
아버지 | 장유, 신풍부원군 |
어머니 | 안동 김씨 영가부부인 |
자녀 | 숙신공주, 의순공주 (양녀), 숙안공주, 이름 미상 왕자, 숙명공주, 이연, 현종, 숙휘공주, 이름 미상 공주, 이름 미상 왕자, 숙정공주, 숙경공주 |
생애 | |
출생 | 1619년 2월 9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시흥 장곡동 안골마을 |
사망 | 1674년 3월 20일 (55세) |
사망지 | 조선 한성 경덕궁 (현재 경희궁) 회상전 |
2. 생애
광해군 11년 12월 25일( 1619년 2월 9일), 장유의 딸로 태어났다. 인조의 차남인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려 풍안군부인의 작호를 받았으며, 남편인 봉림대군과 선양에서 8년간의 인질 생활을 하고 돌아왔다.
인조 23년( 1645년), 소현세자가 훙서하자 남편 봉림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이에 따라 장씨는 세자빈이 되었다. 인조 27년( 1649년)에 인조가 훙서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장씨도 왕비로 책봉되었다.
효종 10년( 1659년), 효종이 훙서하고, 아들인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현종 3년( 1662년),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효숙왕대비가 되었으며, 현종 15년( 1674년)에 55세로 사망했다.
이후, 장렬왕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예송 문제가 일어났다. 능은 경기도여주시에 있는 영릉으로, 남편인 효종과 함께 매장되었다.
2. 1. 탄생과 가계
1618년(광해군 10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산(현 시흥시)에서 아버지 신풍부원군 장유(張維)와 어머니 영가부부인 김이순(金二順)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1]본관은 덕수이며,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원나라에서 귀화한 위구르인 장순룡이다. 어머니 영가부부인은 김상용의 딸이며 척화파 김상헌의 조카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화약에 불을 붙여 순절하였다.[2]
남편 효종과는 성종을 공통 조상으로 한다. 효종은 성종의 아들 중종의 후손이고, 인선왕후는 성종의 또 다른 아들 경명군의 후손이다.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 | 중종 | → | 덕흥대원군 | → | 선조 | → | 원종 | → | 인조 | → | 효종 |
성종 | |||||||||||
└─→ | 경명군 | → | 이연환 | → | 김극효 | → | 김상용 | → | 영가부부인 | → | 인선왕후 |
|}
미래의 왕비는 광해군 재위 11년인 1619년 1월 30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광산 김씨 가문 출신으로, 이를 통해 장씨 부인은 김장생의 의붓 외조카손녀가 되었으며, 인경왕후와도 먼 친척 관계가 되었다.
덕수 장씨 가문의 귀인 장씨는 그녀의 아버지의 후손이다.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의 후궁이 되었고, 의친왕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예의 바르고 온순한 성품을 지녔으며, 통통한 볼을 가진 귀여운 외모였다고 전해진다.
1630년, 12세가 되던 해에 인조는 자신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배우자로 간택했다. 인조는 장유의 딸을 현명하고 덕이 있다고 여겨 며느리로 선택했다. 이듬해 봉림대군과 혼례를 치른 후 풍안부부인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입궁 후, 풍안부인은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며, 꾸준히 어른을 섬기고 존경하여 시어머니인 인열왕후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2. 2. 군부인 시절
1631년(인조 9년) 9월 13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3]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나,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강화 조약에 따라 남편 봉림대군을 따라 청나라 심양에서 9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다.[4]1630년, 인조는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배우자로 장유의 딸을 간택했고, 이듬해 봉림대군과 길례를 치른 후 풍안부부인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입궁 후, 풍안부부인은 인열왕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4년 후 남편과 함께 궁궐을 나와 사저에서 살았다.[3]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풍안부부인은 강빈,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위기를 헤쳐나갔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갈 때, 풍안부부인 또한 봉림대군을 따라갔다. 8년 동안 남편을 뒷바라지했고, 그곳에서 3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성인이 된 아들은 이연이었다.[4]
1645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뒤,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풍안부부인은 세자빈이 되었다.[5]
2. 3. 왕비 · 왕대비 시절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는 궁녀들을 현명하게 이끌었고,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대했다. 효종의 후궁 경주 이씨 안빈이 자신의 딸 숙녕공주를 "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왕이 처벌하려 하자, 왕비는 간청하여 이를 넘어가도록 했다.1659년 효종이 승하하고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1661년(현종 2년)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 왕비는 효종처럼 북벌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왕비 재위 기간 동안 굿판을 근절하고 음주를 금지했다. 또한 이불의 색깔을 홍색과 청색 두 가지로 통일하여 전쟁 시 군복으로 사용하도록 준비했으며, 이러한 재정은 모두 북벌을 위해 사용되었다.
현종과 인선왕후는 여러 해에 걸쳐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는데, 1669년(현종 10년) 3월에는 약 한달 동안 온양온천에 머물렀다.[6] 이때 현종과 명성왕후를 비롯하여 네 공주(숙안, 숙명, 숙휘, 숙경공주)도 함께 행차하였다.[6]
인선왕후는 딸들과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숙명공주와 숙휘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의 일부가 신한첩에 수록되어있다. 왕비는 결혼한 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그 중 왕비가 숙신공주와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70통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또한 왕비는 효종의 후궁 소생 외동딸인 숙녕공주를 차별 없이 아꼈다.
효종이 1659년 머리의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침술을 받던 중 과다 출혈로 인해 요절하자, 왕비는 심한 통곡으로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장례 절차를 의미 있게 치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얇은 쌀죽만 먹었다.
이연(현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18대 국왕이 되었고, 그녀는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로 존경받았다. 남편의 죽음 이후 건강 관리에 실패하여 병을 얻었고, 온양에서 온천욕을 하며 건강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지만, 1674년 56세에 경덕궁(당시 경희궁) 회상전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여주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에 있으며, 남편과 함께 동원상하릉 군에 묻혔다.
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이자 그녀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죽음 이후 문제가 되었던 예송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2. 4. 최후
1659년, 왕이 머리의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침술을 받던 중, 과다 출혈로 인해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의료 사고로 요절했다. 이에 왕비는 심한 통곡으로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장례 절차를 의미 있게 치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직접 손톱과 발톱을 깎고 시신을 씻겼다고 전해진다. 이후 3개월 동안 얇은 쌀죽만 먹었다.이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18대 국왕(현종)이 되었고, 그녀는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 이후 건강 관리에 실패하여 병을 얻었다. 이후 효숙왕대비는 자주 온양에 가서 온천욕을 하며 건강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지만, 1674년 56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3월 20일 경덕궁(당시 경희궁) 회상전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여주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에 있으며, 남편과 함께 동원상하릉 군에 묻혔다(왕의 묘는 부인의 묘와 같은 선상에 위치). 시호에서 "인"(仁)은 사랑과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선"(宣)은 선함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붙여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인선왕후로 추존되었다.
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이자 그녀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죽음 이후 문제가 되었던 "예송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는 조선에서 제2차 예송 논쟁을 촉발했다.
현종 3년( 1662년),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효숙왕대비가 되었으며, 현종 15년( 1674년)에 55세로 사망했다.
이후, 장렬왕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예송 문제가 일어났다. 능은 경기도여주시에 있는 영릉으로, 남편인 효종과 함께 매장되었다.
'''예송 논쟁'''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며느리인 인선왕후의 상중에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간에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기년복(1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으로 수정하였는데, 남인이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여 경신환국때까지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이자 그녀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죽음 이후 문제가 되었던 "예송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는 조선에서 제2차 예송 논쟁을 촉발했다.
2. 4. 1. 예송 논쟁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며느리인 인선왕후의 상중에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간에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기년복(1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으로 수정하였는데, 남인이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여 경신환국때까지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인선왕후가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이자 그녀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죽음 이후 문제가 되었던 "예송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는 조선에서 제2차 예송 논쟁을 촉발했다.
3. 가족 관계
인선왕후의 아버지는 장유(1587년~1638년)이며, 어머니는 영가부부인 안동 김씨(1585년~1654년)이다. 형제로는 언니 덕수 장씨(1610년~?)와 형 장선징(1614년~1678년)이 있다.
인선왕후는 효종(1619년~1659년)과 혼인하여 숙신공주(1634년~1645년), 숙안공주(1636년~1697년), 숙명공주(1640년~1699년), 현종(1641년~1674년), 숙휘공주(1642년~1696년), 숙정공주(1646년~1668년), 숙경공주(1648년~1671년)와 이름 없는 왕자와 공주를 낳았다.
효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중 현종은 조선의 제18대 왕이 되었으며, 며느리는 명성왕후(1642년~1684년)이다. 명성왕후와의 사이에서 숙종을 낳았다.
인선왕후는 이애숙(1635년~1662년)을 양녀로 삼았다. 의순공주는 도르곤과 보로와 혼인하였다.
인선왕후의 외조부는 장운익(형조판서 증 영의정 덕수부원군 정민공, 1561년-1599년)이고, 외조모는 밀양 박씨(생년 미상-1632년)이다.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장유 | 1587년 1월 22일 | 1638년 4월 30일 | 우의정 증 영의정 신풍부원군 문충공 |
어머니 | 영가부부인 안동 김씨 | 1585년 | 1654년 1월 19일 | |
남편 | 효종 | 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 조선 제17대 왕 |
장녀 | 숙신공주 | 1635년 | 1637년 | 요절 |
차녀 | 숙안공주 | 1636년 | 1697년 | 우의정 홍득기와 혼인, 1남 (홍도상) |
장남 | 이름 없는 왕자 | 1637년/1638년 | 1642년 | 요절 |
삼녀 | 숙명공주 | 1640년 | 1699년 | 영의정 심지원과 혼인, 2남 |
차남 | 현종 | 1641년 | 1674년 | 조선 제18대 왕 |
며느리 | 명성왕후 | 1642년 | 1684년 | |
손자 | 숙종 | 1661년 | 1720년 | |
사녀 | 숙휘공주 | 1642년 | 1696년 | 정재현과 혼인, 2남 1녀 중 차남 정태일만 성장 |
오녀 | 이름 없는 공주 | 1643년/1644년 | 1644년 | 요절 |
삼남 | 이름 없는 왕자 | 1645년 | 1645년 | 요절 |
육녀 | 숙정공주 | 1646년 | 1668년 | 정재륜과 혼인, 3남 2녀 중 1남 1녀만 성장 |
칠녀 | 숙경공주 | 1648년 | 1671년 | 원몽린과 혼인, 1녀 |
양녀 | 의순공주 | 1635년 | 1662년 | 성종의 서자 익양군의 3세손 금림군의 딸, 도르곤의 비 |
4. 인선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 1981년 KBS1 TV 시리즈 《대명》에서 원미경이 연기했다.
- 2012년 MBC TV 드라마 《마의》에서 김혜선이 연기했다.
- 2013년 JTBC TV 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 이문정이 연기했다.
4. 1. 드라마
참조
[1]
문서
인선왕후 지문
[2]
실록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1637-01-22
[3]
일기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길례(吉禮)를 이현궁(梨峴宮)에서 거행하였다.
1631-09-13
[4]
실록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1637-02-08
[5]
실록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부인 장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다
1645-09-27
[6]
실록
왕대비·중궁·공주들과 함께 온양으로 행차하다
1669-03-15
[7]
실록
축시에 왕대비 장씨가 승하하다
1674-02-24
[8]
일기
사경오점(새벽 1~3시)에 왕대비가 승하하였다.
1674-02-24
[9]
일기
삼가 들으니 조선 효종방(鳳林大君房)의 왕손(王孫)은 끝내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642-04-19
[10]
문서
갑신년(1644년) 3월 13일, 양궁(兩宮)이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1644-03-13
[11]
실록
세자빈 장씨가 사저에서 분만하다
1645-09-09
[12]
문서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때 처형됨
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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