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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석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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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석복은 고려인 출신으로, 해방 이후 소련군 소속으로 북한에 와서 친소련 정부 수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조선로동당 제2상무위원회 위원, 근로자 잡지 편집장, 문화선전성 부상 등을 역임했으며, 제네바 협상에 북한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김일성의 소련파 공격과 개인 숭배에 불만을 품고 1957년 소련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거주하다 197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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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석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기석복
원어 이름기석복
출생1913년
사망1979년
직책
직위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임기 시작알 수 없음
임기 종료알 수 없음
학력
모교알 수 없음
개인 정보
직업정치인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웹사이트알 수 없음

2. 생애

기석복은 고려인 출신으로, 해방 이후 소련군 장교로 북한에 들어가 조선로동당에서 활동했다. 조선로동당 제2기 상임위원회 위원, <근로자> 편집장, 문화선전부 차관, 외무성 부상 등을 역임하며 제네바 협상에 북한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독재 체제 강화와 개인 숭배에 환멸을 느껴 1957년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정착하여 1979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2. 1.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활동 (1945-1957)

고려인 출신인 그는 해방 이후 소련군 소속 군인으로 한국에 왔으며, 제25군단을 지휘하는 이반 치스차코프 장군의 정치부장인 그로모프 대령 직속으로 배속되었다. 초기에는 소련군 정치부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친소련 정부를 북한에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8년에는 조선로동당 제2상무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4]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근로자 잡지 편집장을 역임했다.[4] 1950년 11월, 문화선전성 부상으로 임명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 후, 외무성 부상으로 임명되었고, 제네바 협상에 북한 대표로 파견되었다.[1]

김일성의 소련파 공격과, 김일성 개인 숭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된 그는[2] 1957년 소련으로 돌아갔다.[3]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공화국출판사 사장으로 좌천되었지만, 공포에 질려 전혀 일을 할 수 없었다. 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기석복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1957년 11월 아들들과 함께 북한을 떠났다.

2. 2. 소련으로의 귀환과 사망 (1957-1979)

김일성의 소련파 공격과 김일성 개인 숭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된 기석복은[2] 1957년 소련으로 돌아갔다.[3]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공화국출판사 사장으로 좌천되었지만, 공포에 질려 전혀 일을 할 수 없었다. 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기석복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1957년 11월 아들들과 함께 북한을 떠났다.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8일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기석복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정착하여 1979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참조

[1] 서적 Over the Line: North Korea's Negotiating Strategy Aei Press
[2] 웹사이트 Memorandum of Conversation with Gi Seok-bok https://digitalarchi[...] 1956-05-31
[3] 웹사이트 Gi Seok-bok Biography https://digitalarchi[...] 1995-10-10
[4] 웹인용 Memorandum of Conversation with Gi Seok-bok https://digitalarchi[...] 1956-05-31
[5] 웹인용 Gi Seok-bok Biography https://digitalarchi[...] 199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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